설교말씀

구원의 도리 빌 3:2-12 주님을 따르는자

열려라 에바다 2011. 10. 31. 15:56

구원의 도리 빌 3:2-12 주님을 따르는자

오늘 이 시간도 지닌 주일 오후에 계속해서 예수를 믿고 사는 사람이 믿는 사람 답게 살아가는길 곧 명확하게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활 예수님일 좇아가는 생활 그것이라는 것이 무언가? 이건 우리가 오전에 강설하는 내용과도 늘 깊게 관계가 있는 것인데 우리가 구원의 믿음을 가진 다음에 구원의 믿음이 있다는 사실의 확실한 증명이 생활 행보 가운데서 나타나야 할텐데 그런것은 무엇인가? 이걸 우리가 바로 아는것이 또한 중요하 일이올시다. 바로 알고 바로 알아서 그릇되이 생각지 아니하고 인생의 길을 낭비하지 않고 방황하지 아니해야 우리에게 주신 시간과 정력과 생명의 모든 활동이 열매를 맺어서 주께 늘 드리는 것이 되고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열매를 매즌 생활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올시다. 그런데 지난 주일 오후에 우리는 잘 아시는 누가복음 9:57-62에 나타난 주를 따라가겠다는 사람, 세사람의 예 그것을 쓴 것을 우리가 보았는데 여기서 주를 따라가려고 하는 세사람에 향하여 우리 주님게서는 각각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또한 준비하고 있는 것이나 그 자세에 불충분한것 또 버려야만 할것들을 지적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주를 따라간다는 생활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깨닫고 이해하도록 하신것이오. 이와같은 실예에서 우리들 자신도 예수를 믿고 주를 따라간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주의해야 할 것이오. 물론 믿는 사람에게 말씀하신것 주께서 누구든지 내 제자가 되려면 이러이러해야 할것이고 이러 이렇지 아니하면 제자가 될수 없다고 얼마 안 있으면 골고다에 가서 십자가에 달리실텐데 아직 베레아 땅이 없으면 못한다는 그 필수의 조건 꼭 있어야만 하는 조건은 세가지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그것이 26절에 무엇보다도 주를 더 사랑치 않으면 안된다는 것 33절에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는 주님의 제자가 못된다하는 얘기 올시다. 이와같이 주께 대한 사랑과 제게 있는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과 날마다 자기를 이기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 간다는 따라간다는 이 세가지가 다 각각 그 하나 하나 없으면 제자가 되지 못하는 필수의 조건들이오. 그런걸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사람 즉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다르게 살겠다는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의 조건의 의미하는 것과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모르고서 자기의 종교의 감정에만 의지해 가지고 주를 섬기노라고 종교인다운 생활 종교적인 의식과 분위기와 열정과 행사 속에서 주를 따라가는 생활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그게 연목구어라는 것이오. 나무에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생선을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는 말이오. 항사 ㄴ주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것이 정당한 길이고 어떠한 것이 우리가 밟아야 할 것인가르 가르치셨으면 거기 가서 거기서 얻는 결과를 얻을 것이고 어떠한 결과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고 죾서 우리엑 가르치신 것은 그대로 따라가야 할 것이지 항상 자기가 변조해 가지고 자기 종교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대로 이리저리 뒤바꿔 놓든지 자기의 조건도 거기다가 보태든지 하는것은 우리의 정당한 일이 아니올시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라가는 조건으로써 예수님의 그 합당하다고 여기시는 그 조건으로써는 조금 전에 말한바 이 3가지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느것과 자기를 이기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다느 것과 또 그 다음엔 제게 있는 모든것을 다 버리지 않고서는 아니된다 하는 것이올시다.

그런데에 있어서 우리가 해명해야 할 몇가지의 그 중요한 선언이 있어요. 물론 십자가르 지고 나를 좇으라 할때는 우리가 모르는 말들이 있어요. 십자가가 무언가 그거요. 십자가라는 상징적이 용어로서 어떤 큰 사실을 나타내 보이는데 그걸 잘 알지 못하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디어야 할 사람이 그 필수의 조건으로 십자가르 지고 날마다 주를 따라가야 할텐데 좇아가야 할텐데 그 십자가가 무엇인지 모르면 무엇을 질런지 알수 없는 거요. 그런고로 그 십자가에 대해서도 우리가 해명을 하고 알아야 하겠지만 또한 주를 좇아간다 하나는 말도 그 쉬운 말이지만 어려운 이야기요. 왜냐하면 목전에 2000년전 육신을 입고 땅에 오셔서 살아 계시던 예수님이 목전에 계셔서 ‘ 자 내가 저기 갈테니 나를 따라 오너라’ 하면 ‘예 그리하겠습니다.’하고 자기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도 알고 가는 길도 알고 간다는 것이 무언인지도 알것이지만 오늘날 우ㅖ수님은 우리 목전에서 명확하게 나타나서 ‘ 나는 이길로 간다 이리 오너라 저길로 간다 저리 오너라’ 혹은 쿠 바디스 같은 데서 말하는 식으로 예수님의 어떤 환영이 나타나서 ‘네가 내 백성을 버리고 가니까 내가 다시 저리 십자가에 못박히러 간다’ 는 그런 식으로 그 아주 시적으로 아주 문학적으로는 되었는지는 몰라도 엄격하게 생각할것 같으면 그 예수님이 십자가를 또 가지고 십자가를 향해서 또 가시고 날마다 가시는 건가? 그 십자가란 말의 뜻을 모르는 까닭에 예수님의 십자가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 내가 달릴 십자가 이런 것을 모두 혼동하고 생각하는 데서 그 추상적이고 막연한 데서 시적인 감흥을 느낄런지는 몰라도 이게 진실이 주는 바 참된 감정이나 참된 각성이라는 것 정신의 깨우침이라는건 없는 것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막연한 추상적인 용어를 가지고서 자기의 종교의 불분명한 것을 매일 같이 둘러싸는 것은 결코 신앙상 유익한 일이 아니올시다. 모르면 캐서 알아야 해요.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간다느 이 사실은 그 당시에 예수님은 무엇을 의미하셨으며 그건 그 당시 사람에게만 의미하는 것일까 하면 그렇지 아니하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의미를 하신다고 우리가 확신하는데 왜냐하면 성경 말씀이 그때 한 때에만 쓸려고 하시고 그 나머지는 효과없고 아무도 네게 상관없는 말이다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큰 의미를 선언하신 가운데 하나도 그런것 없어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요새 자유적의적인 물을 먹은 성경신학자들이 유럽에서 아메리카에서 마구 지껄여 대는 소리이지만 즉 역사적 예수만을 강조하는 나머지 역사적인 예수가 그 역사적인 사실로 발언한것으로만 얘기하지 영원하신 예수가 영원하신 진리로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배일 요구하시고 깨우쳐 주시고 그 계시하신 바를 우리에게 셀현하도록 하신 다는 이 사실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한낱 2000년 전에 났던 위대한 성자요. 지도자로만 생각하는 한 즉 그런거요. 그런 생각이 나는거요.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실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적용해야 할 것들도 있지만 그러나 만대에 적용할 큰 진리를 포함해서 늘 말씀하시는 거요. 그런데 여기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사람, 여러분 그 마태복음 8:20절에 “ 한 서기관” 이 나와서 그렇게 말한 것을 보셨지요? 이것이 누가복음에는 9:58절에 있는 말씀인데 눅 9:58에 있는 말씀을 읽으면 “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도다” 이것은 예수께서 한 서기관이 나와서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여기 누가복음 9:57에 “ 길 가실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너는 좇으리이다” 이게 3년 하반기에 갈릴리를 영구히 떠나서 유대를 향해서 가시는 도중 어디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거요. 아마 서기관의 생각에는 “길가실대에” 어떤 사람이 여쭈었다고 누가 복음에는 그랬는데 이것이 마태복음 8:19에 보면 “ 한 서기관이 나와서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뭐 기록은 같은데 마태복음에서는 그말 한 사라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서기관이다. 지난 주일에 서기관이 말을 했다는 것이 보통 여항간에 있는 사람이 얘기한 것 보다는 훨씬 의미가 신중하다고 사는 것 말씀드렸지요? 비상한 각오를 가지고 이때가 3년 후기니까아주 반대고 극성하던 때요. 예수님의 지상 생활을 셋으로 나룰것 같으면 초창기는 누군지 잘 몰라서 알아보지 못하던 때요. 둘째번에는 굉장히 인기가 있던 해이고 셋째번에는 반대가 심히 성해가지고 가는 데마다 부딪히는 때고..... 그렇게 본다면 3년 하반기란 것은 이제 마지막 달로 들어서기 전인데 벌써 반대가 점고하고 서기관 바리새인 혹은 사두개인의 그룹들이 좀더 그 음모가 성숙해 가면서 좀더 조직적으로 적극적으로 도당을 보아 가면서 세력을 구축해서 장차 예수님을 잡는데 까지 이르는 그런 과정도중에 한참 치닫는 도중에 있을 때요. 이런 때도 비상한 각오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할때는 거기는 그 만큼 상당한 각오도 있을 것이고 예산도 있는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같이 뒤 따르겠습니다. 하지는 않는거요. 그런데 그러한 서기관이 “어디로 가시드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말을 한것은 우리가 생각을 해 보십시다. ‘ 어디로 가시든지 좇겠습니다’ 할때 예수님께서는 그 다음에 “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는 간단한 말씀으로 그 사람의 가지고 있는 그 생각이 심히 옅고 미비한 것을 깨우쳐주시는 거요. 그 사람이 깨달아서 그 후에 예수님을 따라 갔는지 우리가 잘 알수 는 없지만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할때는 그럴 만큼 준비가 있어야 하는거요. 이 사람이 그런 준비가 없이이야기한 것이라 말이오. 그 준비란 뭐냐 하면 어떤 각오가 필요하단 정도가 아닌거요. 내가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라는 거요. 예수님이 지금 가시는 길은 무슨 길인가를 바로 알아야 내가 그를 따라간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가를 알수 있는거요.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 더군다나 ‘어디를 가시든지 따라가겠습니다’할때는 어디로 가시든지 예수님을 따라간다는것은 마치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 말을 자기가 알아야 할거요.그런데 그 사람은 어디로 가든지 다라가겠다는 말을 이 선언을 명백하게 한 이상에는 예수님이 어디로 가신다 내가 못따라 갈 곳이 없다. 또 따라가는 것이 내게는 좋다.이렇게 생각한 거요. 즉 서기관된 이 사람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가에 대해서 자기가 자기 딴에는 안것으로 여기고 가는 것이란 말이오. 전연 그가 어디로 가시는지 모른다할것 같으면 덮어놓고 따라가겠다고 못할 거요. 그럼 예수님게서 어디로 거시는가 하고 서기관이 생각했을까? 예수님은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려고가신다. 지금 여기 갈릴리를 영구히 떠나신다. 사마리아 땅을 지나서 혹은 아마 보통 다니시던 하아라밧 길을 안 가시고 사마리아 쪽으로 샤론 쪽으로 아마 이렇게 가신 것 같아요.그렇게 내려 가시는 이 길은 유대로 들어갔다가 베레아로 가셨다가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이니까 지금 이제는 오래 살고 계시던 갈리리 땅을 아직을 하고 내려 가시는 거요. 그런데 서기관이 ‘선생님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 가겠습니다.’ 하고 나왓으면 예수님이 앞으로 이제 결국 이르는 곳은 골고다요 십자가다는 것을 잘 알았겠는가? 할때 그 십자가의 필요를 절실한 필요를 느끼지도 아니했고 둘째는 십자가에 가지 아니할수 없도록 사세가 지금 변화해서 무수운 형편가운데 빠졌다고 까지 급박한 정세에 이르렀다고 까지 볼만한 증상은 아직 없는 때요. 예수님은 지금 타의에 의해서 밀려서 아래로 내려가는 십자가에 장제적으로 끌려 들어가는 그런 때가 아니라 그 말이오. 처음부터 그런 일은 없었어요. 예수니은 당신이 지금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남쪽을 향해서 성도인 예루살렘을 행해서 내려가시는 것으로만 여긴 정도라 말이오. 그러니 그렇게 여긴 것으로 봐서 예수님이 지금 자의로써 남쪽을 내려가시는 데는 아마 생각컨데 그가 베시아로서 이제는 이 나라를 바로 세우시고 그 보좌에 앉으시사 대권을 쥐시고 천하에 그 메시아 왕국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려고 하신다고 하는 것을 아마 자기 딴에는 연구하고 생각한 결과 그 분이 메시아가 아닐수 없고 또 저분이 지금 하고자 할 것 같으면 충분히 이 나라의 왕이를 가지실수가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런 예견은 있었을 거요. 왜냐하면 그 후에 예루살렘에 내려오셨는데도 이 갈릴리에서 남쪽 유대땅으로 예루살렘에 녀려오실때도 서기관 뿐 아니라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왕을 삼으려고 햇던 것을 여러분은 요한 복음 기록에서 보실거요. 억지로 왕을 삼으려고 했어요. 또 말하기를 그 분이 얼마나 훌륭한 기적을 행하시느냐? 가령 메시아가 아니라고 한다고 하자.그러면 새로 메시아가 별달리 있어서 온다고 한들 어찌 저분이 하는 기적과 같이 많은 기적을 하실 수가 있겠느냐? 메시애가 온다고 한들 그는 못아다. 그렇다면 메시아로서 중요한 건 기적에 의해서 신통력에 의해서 로마의 정권을 뒤집고 로마의 그 압제와 로마의 침력의 상태 절제하의 상태에서 온전히 이 나라 백성을 구출해서 자유로운 국가를 세우는 것이 이제 할일인데 물론 이것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덤벼가지고서 일대 내란을 일으켜 가지고 성공하리라는 일은 아니고 메사아의 신통력에 의해서 이끌로 나가면 우리가 가담을 해서 일전은 불사는 하겠지만 좌우간 가담해서 메사아의 그 신비한 힘에 의해서 승리를 얻어애 하겠다는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많이 있던 사상이올시다. 저들이 자기네의 일비지조를 혹은 자기네의 어떤 사람의 헌시적인 협조를 아끼지는 않았으나 자기네가 헌신적으로협조하면 일이 된다고 생각한 건 아니오. 막강의 로마의 대군을 대적해 가직 그를 쳐 물리쳐 버리고 다시 침력 못하게 해 버리겠다는 말하자면 압도를 하고 그리고 산산히 그것을 궤멸시키고 그리고 서겠다고 하는 일에 대해서 자기네에게 자기네 군중의 집합의 세력에 그런 힘이 있다고 아무도 망상한 사람은 없어요. 없으나 어째서 그러면 추후 가령 바 코크바의 난리가 일어났느냐? 알때도 그것도 역시 바코크바를 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에 감연히 만용을 다 일으킨 것이지 바 코크바가 메시야가 아니고 단순히 내란의 혹은 반란의 지도자에 불과한 정도였으면 많은 사람이 그렇게 안 따라갔을 것이오. 그러한 까닭에 문제는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할때에는 예수님에게 그러한 신비한 힘이 있다는 걸 인정한 까닭에 그래요. 단순히 5000명을 먹이고 ,4000명을 먹이고 덕 5덩이를 가지고 생선 2마리 가지고 그렇게 큰 기적을 행했다고 그래서 그런 정도만을 가지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사람이 지금까지 하신 예수님의 일과 교훈과 예수님 당신의 접촉에서 얻으 바 인상에 의하면 초연한 인물이다 한 것은 다 승인하는 거요.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는 확실한 사실인거요. 예수니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흠모할만한 것이 없었다고 늘 슬픔을 가지고 게셨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엄연하신 자태나가까이 모시고 있었을 때에 그에게서 나오는 그 초연한 능력의 빛이라는것은 숨길수 없는 거요. 이러한 까닭에 가나에서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되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낫게 해 달라고 했을 때도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는 한 마디 말만 듣고서도 갔다고 하는 기록이 요한 복음 4장에 나오지요? 그 무엇이 그랬는가? 갑자기 그 사람을 그렇게 변하게 만들었는가? 다른 아무 말에 있어서의 거래가 없어요. 예수님고 접촉하고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을 한 번 우러러 본다는 그것만으로도 거기에 사람에게는 강렬한 어떤 인상을 주는 거요. 요새 영하같은것 텔리비젼 같은데서 함부로 예수님의 얼굴까지 다 내가지고서는 마치 열렬하고 광신적인 종교 지도자의 모양으로 전부 격하를 해가지고 지금 자꾸 만들어 내는 것 여러분 다아시지요? 예수님이 그러한 분이었겠는가? 때때로는 예수님께 대해서 가만히 추상을 할때에는 그에게 그의 용모에서나 그의 얼굴 빛에서나 그의 눈길에서 우리는 훨씬 거룩하고 초연한 것 세상에서 맛볼수 없는 것을 봤을 거요. 왜냐하면 우리는 위대한 예술가를 만났을때 그 사람의 눈빛이나 용모 가운데에서 보통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는 어떤 인상을 얻는 수가 흔이 있어요. 그오 같이 어떤 도에 깊이 들어가서 그 오도에서 대각을 한 사람들의 용모라는걸 그만큼 변동이 있는것 같이 뎨수를 참으로 믿고 거룩히 살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항상 얼굴 가운데 그런 빛이 나타나는 것이오. 하물며 예수님 당신에게서 나타나는 빛이라는 건, 그건 당연한 것이오. 그런 것을 거기 있는 백성들 누구든지 다 느꼈을 거요. 그리고 그의 신통력에 대애서는 지금까지의 업적이나 접촉에서 그럴 다 느끼는 거요. 참 신비한 어떤 힘을 우리가 측량할수 없는 어떤 힘을 가졌을 것이다. 그게 무슨 힘일까? 그렇다. 로마의 대군, 막강의 로마의 군대를 다 뒤엎어 버리는 그런 하늘로서 오는 그런 이상한 신비한 힘일 것이다. 메시아는 그걸 가져야 해요. 내가 메사아란다고 덮어놓고 다 따라가는것 아니오. 그것이 있어야 해요. 껏이 있어 가지고 군중을 향해서 ‘가자 이제는 메시야 왕국의 건설이다’ 한다면 군중은 지체없이 다 가서 전부가 공사를 해서 로마 대군과 다 일전을 각오하고 싸움에도 열렬하게 나서서 싸우게 될것이란 말이오. 이렇게 해서 바코크바 난리는 일어났던 것이고 이래서 철저하게 로마 군대한테 궤멸당하고 말았던 것이오.

지금 이때는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삼아가지고 그의 신비한 힘과 지도하에서 우리는 이 거룩한 나라, 도덕적으로 고도적이고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이 나라를 건설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말이오. 이스라엘 서민들 사회 혹은 대중 속에 그런 것들이 아주 더 강렬하게 있었어요. 왜냐하면 소위 지자계급은 상당히 예수님께 대한 질투때문에 자기네의 가지고 있는 지배자로서의 치리자로서의 그 명예를 다 앗아간 그 분에 대한 진투와 시기 때문에 적개심을 가지고 혹은 적의를 가지고 그걸 대하고 있었지만 그 이외의 일반 대중은 대체로 예수님께 대해서 그러한 심정을 품고 있었던 거예요. 서기관 외는 이 사람도 그러한 일반적인 중견 계급이 가지고 있던 예수님께 대한 인상과 존경을 가지고 있은 것 같이 보여진다 그말이오. 그러한 까닭에 자기의 그룹들의 그 예수님께 대한 적개심이나 적의에 가담을 하지 않고 차라리 ‘ 선생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이제 저 분은 어디 가서 무슨 우여곡절을 만난다 하더라도 역시 그에게 있는 신비한 힘이 오늘날까지 그 자신이 점점 그 신비스럽게 능력있게 거룩하게 아주 존경할만하게 늘 서 있던 것을 생각하면 이제 그가 이 나라를 중흥하고 이 나라를 다시 세울 시간이 가가운 것이 아닌가? 이제 그러기 이해서 남쪽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것 아니냐?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를 따라가야겠다. 아마 이러한 생각을 가졌을 수 있어요. 대부분 아마 그렇지 아니했을까 그런 거예요.왜 이렇게 ㅊ리를 하게 되느냐 하면 나는 정착할 곳이 있고 앉을 곳이 있고 너희들도 거기에 앉아서 행복스런 생을 누리고 또 아름다운 세계를 바라볼 줄로 알고 나를 따라오겠다고 하느냐? 정착할 곳이 없다. 어미 둘 곳도 없다. 세상에 돌아다니는 여두도 하루종일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그런 여우도 결국은 갈 굴이있다. 날아 다니고 있어서 어디로 부터 어디로까지 알수 없는 새도 돌아가는 곳은 있는것이다. 그런데 나는 머리 둘곳이 없다. 그런데 냐는 내가 정착할 것으로 알고 따라오느냐? 이렇게 강렬하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거처가 있다는 말에서 서기관이 어떤한 생각을 했을 것인가를 능히 우리가 추리할수 있게 그의 속에 있던 생각이 여우같이 암만 돌아다녀도 결국은 정착할 곳이 있고 새같이 암만 날아 다녀도 결국은 정착할 곳이 있는데 그런데 인자는 결국은 중흥하는 그 나라에서 보좌에 앉을 그것이 나의 정착으로 아느냐? 그것이 나의 귀결할 곳으로 아느냐? 머리 둘곳도 없다. 사실상 예수님은 이 말을 절대로 오늘 밤 숙소도 없다는 말도 아니오. 어디 가서 잘 지도 모르고 갈 곳도 없다. 방랑객이다. 그런 길손이라는 말은 절대로 아니오. 네 생각에는 결국은 나는 어딘지에 가서 어떤 목표지점에 가서 거기서 정착할 것으로 알고 거기까지 네가 따라와서 그 정착한 자리에서 받는 행복을 제가 나누어 가지려고 따라오려고 그러지만 그런거 없다. 너는 나를 잘못 알았다. 왜 이러한 것이 이렇게 되었느냐? 왜 서기관은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가령 최종적으로 말씀이오. 예수님을 알되 좀더 그것보다는 점진적인 의미에 있어서 가치 있는 생활을 건설하고 최종덕으로 그것 대문에 일신을 거기다 내 던져서 죽임심을 당한다고 가정을 합시다. 서기관이 최악의 경우에는 그런 걸 생각해 보았다고 가정해 보자 말이오. 예수님께 가서 중흥해서 왕좌에 앉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혹은 이렇게 해 나가다가 바리새인들이나 또한 우리 동료 서기관들이나 혹은 적당이지만 지금은 야합되어 있는 이 제사장의 그룹 즉 사두개인들이나 그 사람들의 음모와 술수에 그만 말려들어가지고 나중에 죽는다는 일이 있다고 하자. 그래도 나는 따라 가야 할것인가? 만일 서기관이 생각을 깊이 했다면 거기까지도 했을 수도 있는 일이오. 그랬을 경우도 그래도 나는 그걸 따라 가겠다햇다면 거기는 서기관이 자기의 생의 의미라는 것을 그와 같이 함으로써 자기도 생의 가치라는 것을 찾고 존재의 의의를 타나내고 나도 이 세상을 지나 가겠다 하는 비상한 각오까지라도 가질수 있었다. 반드시 서기관이 세속적으로 번영만을 공리적인 요구에서만 살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일신을 도해서 일명을 도해서 참된 가치를 세우고 그리고 나는 이 세상을 가겠다고 했을 수도 있는 거요. 왜냐하면 예수님을 볼때 그가 신비한 힘으로 모든 걸 다 이기고 최종적으로 위대한 왕좌에 찬란한 왕좌에 앉을 것이다는 이런 식으로만 보지를 않고 위대한 순교자로 봤다면 자기의 주의와 정신과 나태내려고 하는 일을 해 나가다가 적당을 만나서 그 사람들의 음모에 걸려서 당당하게 당신의 목숨을 거기다 내 던져 버리고 가신다 하면 그랬을 때 어떻게 할까? 그런 경우라도 이 서기관은 나는 따라가겠다고 가정합시다. 그랬을 수도 있어요. 서기관이 꼭 예수님이 중흥의 자리 왕좌에만 앉으리라고만 보았다고 독단할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하나의 희생자로 참으로 죄엇이 붙들려서 돌아가시는 인물로 그러나 자기의 principle 자기의 주의와 자기의 정신을 끝까지 굽힘이 없이 나타내면서 찬란하게 사람이 그 생애를 마치시는 분이라고 그렇게 여겼더면 그래도 따라가겠다고 했다면 그럴 경우에는 서기관 자신도 예수님의 그 정신을 인생의 참으로 이 세상에 사는 보람을 이루는 것이다고 그러한 인생관을 가진 사람, 그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을 수 있는 거요. 그런 경우에는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셨을까? 그 경우도 이 대답은 마찬가지요. 제가 나를 인생의 어떤 가장 높은 이상적인 위치, 살신성인을 한다는 위치, 내 몸을 던져서 몸을 죽여 가지고 인이란 것을 이룬다는 자기의 주의와 사상을 거기서 확연히 세워서 만대의 역사위에 인류에게 빛을 비추고 나간다는 그러한 인물로 나를 따라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게 아니다 거룩 그것은 하나의 인간의 정착이 것이오. 사람이 어디 가서 정착하든지 어떤 목표지점에 가서 나는 뭣이 되겠다 혹은 왕을 따라가서 그 앞에 대신이 되겠다든지 아니 나는 저렇게 자기의 주의를 위해서 살신성인하는 사람을 따라 가서 나도 내 한 목숨을 내 던지고 거기에 인을 이루겠다. 거기에 위대한 정신을 세워놓고 가겠다 한다면 자기의 가치관이 하나는 물질적인 거고 현세적인 거고 물리적인 거고 또 하나는 대단히 정신적인 거고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오. 대만 그 가치관의 변화 뿐이지 어디인지에 가서 정착해서 그 목적지에 도달해야겠다고 하는 생각은 마찬가지란 그 말이오. 어디엔지 정착을 하겠다. 그렇게 해서 인생의 최종의 가치를 가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인생의 행로가 이런데 대해서 이 서기관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사상을 예수님은 ‘아니다’‘둘다 틀렸다’‘가령 그게 물질적인 물리적인 문제를 가치화했든지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했든지 그 둘다 거기가 종착역이 아니고 거기가 귀결점이 아닌것이다.’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이러게 해서 ‘ 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다. 너 내가 새와같이 공중에 날아다녀서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는 이 정신적인 세계 저 공중의 세계 거기를 가다 가다 마침내 어떤 곳에 가 장착할 것으로 알고 달 오겠다고 그러느냐? 당위에서 걸어 가서 결국 자기 먹을 것을 찾아가지고서 제 굴로 돌아가는 그런 것으로 알고 나를 따라 오겠다는 거냐? 땅위에서 걸러가서 결국 자기 먹을 것을 찾아 가지고서 제 굴로 돌아가는 그런 것으로 알고 나를 따라 오겠다는거냐? 그 두가지 다 아니다’ 그거요. 여우와 같이 땅의 무제와 물리적인 문제를 뒤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새와 같이 공중으로 날아 다녀서 자취를알지 못하고 갈 바를 우리가 어디 간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정신의 세계에서 대기의 세계속에서 결국 그러나 어딘지 안정하는 곳으로 가는 그런 것으로 아느냐? 그런 둘다 아니다. 둘다..... 왠하면 요컨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셔서 지나시고 하신 일이라는 것은 이 땅위에 어떤 정착점을 최종적으로 주시고 가는게 아니다 말이오. 예수님은 그 거룩하신 역사가 만제 전에 영원전부터 실재의 세계 천계에 있어서 늘 움직여 나왔고 그 거룩하신 자취는 옛날 부터 창조이전부터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계셨던 것이오. 인류가 창조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거기 땅위에서 선택되어서 경영이 되면서는 야훼로서 거룩한 능력과 영광이란 것은 인간과 접촉하시면서 시작되어서 전진했고 때가 이른즉 육신을 입으시고 땅에 오셔서 그의 도성인신의 사실로써 인류의 역사의 자취를 남겨 놓으시고 그 인류의 역사의 사실에서 가신 다음에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셔서 오늘날도 여전히 당신의 중보자로서의 임무를 그대로 계속하시는 것이오. “ 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지금도 일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역사의 진행으로 보면 끝없이 진행하는 것이고 역사라는 것은 잠시 잠간 땅위에서 육신을 입고 지내신 것이고 역사라는 것은 잠시 잠간 땅위에서 뮥신을 입고 지내신 그것이 예수님의 실역사의 전부도 아니고 대부분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면이 아닌것이오. 유구한 옛날부터 흘러서 내려오는 그 거룩한 예수님의 일이라는 것은 마치 물이 끝간데 없이 어디서부터 흘러서 내려 가는 듯이 자꾸 가는 것이오. 그러는 중에 땅위에 오셔서 하실일을 하셨고 계속해서 그 중보자로서의 임무를 지금도 수행하고 계시며 또한 그 거룩한 신령한 몸인 보편의 교회라는건 땅으로 하늘로 뻗어 있어서 그 보편의 교회에 속한 사람이 또한 땅에 있어서 물리적인 현실을 쥐고 있는 동안에는 물리적인 현상 교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조직해서 형성해 가지고 그것을 나태내고 살도록 하심녀서 결국은 이것이 완전히 하나인 교회 신령하고 영화된 교회 영광으로 화한 교회 이것으로서 끝없이 나갈 것이라 말이오.

예수님이 그러한 분이라고 알려고 할것 같으면 예수님께 대한 서기관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 메시아관이라는 것을 고쳐야 해요. 언제든지 물질적이고 물리적이고 인간적이라는 이런 카테고리안에 가둬 놓고 생각하는 이것을 고쳐 버려야 한다 그말이오. 그러한 까닭에 그러한 예수님을 그렇게만 알고 따라가겠다고 할때 ‘네가 나를 따라와? 그러한 목적, 어딘지 결국은 정착할 수 있다는 그리고 귀결점이 있다는 그러한 해석 가운데에 나의 생 이라는 걸 가치화하고 네가 보고서 그 가치에 가담하겠다고 네가 하겠다면 너는 헛것을 찾는 것이다. 차라리 여우는 돌아가는 곳이 있다. 공중의 새야 아무리 공중을 날아 돌아다녔어도 갈 곳이 있다. 그렇지만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관념의 세계의 정착도 없고 너희들이 생각하는 현실세계에 있어서의 정착도 없다.’ 그래서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말에 자기 자신의 의미를 반성하게 하신 것이오. 무엇이 참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될 것인가?

그리고 예수님게서는 그 다음에 보면 그 다음 사람보고 “ 나를 따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 누구든지 나를 좇아오려고 할 것 같으면 각각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야 한다” 하는 말을 하시어 결국 예수님은 따라가야 하는 것이고 가야 할 것으로 가르치신 것이오. 예수님을 따라 가야 한다 할때는 오늘날의 의미는 그렇게 물리적인 어떤 현상의 뒤를 좇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해 가면서 어떤 정점에 오르려고 하는 것도 아닌 것을 먼저 각오라한 것이 이제 첫째 사람 서기관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이오. 오늘날 만일 누구든지 ‘저는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하면 겟세마내 동산까지 주님의 뒤를 따라간다는 그런 찬송가 같은 얘기가 아니오. 오늘날 십자가를 지신 이후에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충보자로서 제사장으로 왕으로 선지자로서의 당신의 임무를 지금도 끊임없이 행하시고 계시면 그 통치의 대상으로서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속한 그리스도게 속한 우리들을 놓고 고귀하게 놓고 어떵헤 그렇게 가장 높으신 비류없이 높으신 그 분이 대상을 상대를 삼기를 우리를 삼았느냐 할때는 너무나 그건 기막히게 큰 특권인 것이오. 그러한 우리들을 당신의 권고와 거룩한 사랑의 통치의 대상으로 삼고 왕으로서의 일을 하시고 그런 우리들을 대상으로 해서 선지자로서 가르쳐 주시고 그러한 우리들을 당신의 제사장으로서 속하셨고 늘 복을 내려주시는 것이오. 그런 경우에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간다 할때는 이제는 물리적인 눈 앞에 보이는 예수님이 있어서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 가신다는 그것이 없는때요. 그런다고 예수니이 다시 십자가를 향해 가니까 나도 그 십자가의 고통이라도 그 쪽을 향해서 가겠습니다. 그 뭐 시로는 혹시 됐는지는요. 더 센티멘탈하기도 하고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는 것 그 자체가 가장 두드러지게 오는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내가 진 십자가냐? 그런 것 아니라는 걸 이야기 했지요? 그런것 하고 상관없는 것이다고. 그렇게 신성하게 가장 심오한 뜻을 가진 것을 세상 사람 안 믿는 사람도 다 겪으면서 살아가는 인간고의 어떤 특수한 부분을 가지고 얘기한다는 건 그건 너무나 경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고....그러면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사람들의 오늘날의 첫째의 문제는 지금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적용되는 것인가요? 거기 대해서는 오늘 아침 우리가 제일 먼저 알아야할 중요한 문제를 배웠어요. 예수님은 땅에 계시는 동안에 당신이 친히 제자들의 일을 돌아 보셨고 가시면서 따라오도록 하셨지만 “ 이제 내가 가지 않는것 보다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할 것이다” 그랬지요? 오늘 아침 우리가 요한 복음 16장에서 그것을 읽었어요. 왜냐하면 내가 가지 아니할 것 같으면 보혜사 그분이 아니 오시지만 내가 갈것 같으면 내가 가서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것이니 그가 오셔서 죄와 의와 심판과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이것이 요한 복음 16장 7절 부터 있는 말씀인데......그렇다 할것 같으면 보혜사,παρακλητος 즉 예수님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계셨더면 나에게 하셨을 듯한 일을 친히 당신은 아무에게도 소격됨이 없이 아무한테도 멀리 떨어짐이 없이 모두에게 가까이 계시면서 마치 예수님이 옆에서 하시는 것과같이 대신 그 은혜르 지켜 주실 뿐이다. 이게 보혜사라는 말 뜻이라고 그랬지요? 파라클레이토스란 말 이렇게 해서... 오늘날은 그 분이 곧 성신님이 성신께서 나에게 가자 하면 가는 것이고 여기서라하면 서는 게고 이리 가야겠다 하면 그 뜻을 받아서 따라가야 하는것이란 그 말이오. 그래서 [너희는 성신을 좇아서 가거라][성신을 좇아 행하라] 오늘 아침 갈라디아서 5:16에 있는 그 말을 내가 간단히 한마디 인용을 해서 말씀을 드렸어요. 성신을 좇아가거라.

오늘날 우리에게 성신께서는 무엇을 하시길 원하시는가? 예수님의 영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며 어디로 가라고 하시고 어떻게 따라 오라고 하시는가? 그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서 주를 따라가는 거시요. 그리고 그것은 덮어 놓고 저 골고다에 가서 다시 십자가에 달리라는 그런 얘기도 아니오. 대체 골고다까지 간다고 하더라도 겟세마제 동산까지 간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지금 할 일은 거기서는 없는 것이오. 그러한 까닭에 보혜사인신 그 분을 따라서 혹은 성신님의 그 거룩사신 지시와 인도를 받아서 그가 가프치시는 대로 행하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가 알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이땅 위에 두시고 새로 창조하시고 정밀하게 우리를 만들어 놓으셨는가? 대체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고 무엇을 하시려 함인가? 뭘하시려 함인가?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아야 할 문제요. 예수님 그 당시의 사람들은 에수님께 대해서 그렇게 자기네 식으로 일방적으로 생각지 말고 예수님 당시 사람들으 예수님이 그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알기를 원하시던 대로 나를 사람 메시아로 알고 이스라엘의 중흥의 왕으로만 알고 물리적인 큰 기적을 향해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그 손아귀에서 벗겨 줄 그런 인물로만 기대하고 알아가지고는 내가 땅위에 온 목적을 행하기가 어렵다. 그러한 까닭에 그 아주 답답한 깨달음이 옅고 완고하고 자기네 주장에서 자기네 생각에서 절대로 철통같이 지키고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군중을 놓고서 할꺼번에 가르치시지 않고 그 중의 소수를 뽑아 가지고 소수에게 독특한 교육을 하셨다 그랬지요?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여러가지 교훈을 볼것 같으면 특별히 그 제자들에게 소수에게 가르치시기를 뭘 가르쳤느냐할때 네가 참으로 내가 네게 주는바 이 큰 은혜의 사실을 받을 수 있으려면 즉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주는바 이 큰 은혜를 그를 그러려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거요. 이 큰 은혜, 그것 한마디로 말하면 구원이라는 사실이오. 이 구원이라는 큰 은혜의 사실을 너희에게 주려고 하는데 그것을 너희가 받게 되려면 너를 건지시는 구주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야 하는것이지 멍하니 앉아서 그 구원을 못 받는것이오. 왜냐하면 구원은 그를 그 신앙이 대상을 바로 알고 믿는데 받는 것이기 대무에 그래요. 그런고로 예수님을 바로 알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그들의 신관을 고쳐야 해요. 유일신관이란 것, 오직 요호오 그분만이 하나님이다 해서 그 이외의 다른 어떤 신도 용인치 않는 이러한 생각이 투철한 이것이 그만 신의 일위성만을 생각했다 그말이오. 거기에 삼위의 하나님이라는 걸 생각할 여지가 없게 지독하니 완고하게 수호를 해 버렸어요.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바빌로니아 폴 이후에 귀환했을 때 이래로 아주 강렬했던 것이고 거기 대해서는 아주 민감했아요. 그렇게 해서 다른 많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다시는 여호와 이외의 다른신 다른 누구라도 신화해서 생각않는다는 그런 확연한 태도르 취하고 있었는데 사실 예수님을 알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말이 표시하는 신성있는 그분, 제 이위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않고는 예수님의 주시는 은혜를 받을 길이 없는 것이오. 예수님이 구줄서 우리에게 사역하시려면 하나님 아닌 어떤 사람으로 오신 일로는 도저히 믿음이 발생하지도 않고 또한 믿을 대상도 안되고 그런거요. 그러한 가닭에 예수니을 단순히 사람으로만 궁극적으로 해석하면 최종적으로 늘 이스라엘 사람의 메시아는 사람이지 절대로 사람 이사의 신성을 가진 분이 아닌거요. 그러나 예수님을 참으로 믿고 구원을 받으려고 하느 사람은 그리고 그것을 절대로 필요한 일이고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첫째로 오신거요. 그러려면 예수님을 하나님이시요. 사람으로 알아야해요. 하나님과 일체이신 분으로 알아야 해요. 군중에게 예수님은 한두번 그걸 얘기할때 돌을 들어 치려고 그랬어요.그렇게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임금삼을던 사람들이 같은 사람들이 이번에는 표변해 가지고서 저런 차람함이 어디 있느냐고 돌을 쳐 죽여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러한 무서운 완고속에 암매 속에 무서운 노예상태 속에서 참으로 예수님의 그 신성을 보이시고 그로 인하여 예수를 믿고 그로 말미암은 칭의를 얻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면 그 어떤 사람이든지 그런 무서운 완고와 노예상탱서 끄집어 내어서 빛을 보고 ‘ 아 그 분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 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theanthropos, God-man 이란 것이오. 신인이라는 이 사실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고 믿어야만 하는 것이고 그의 하신 일을 의지해야만 비로소 예수니이 오셔서 하신일을 제대로 받을수 있는 것이오. 그것을 알알더면 그 예수님을 덮어놓고 다라간다고 말 안햇을 것이오. 예수님의 “ 나를 따라 오너라”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좀더 바로 깨달아 보려고 생각해 보려고 했을 거요. 그러나 이제자 세사람다 보더라도 항상 거기 결핍이 있어요. 특별히 이 서기관의 경우를 볼때에는 자진해서 ‘예수님을 따라 가겠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할때 제하는 말의 의미가 누구에게 하고 있는 것인지를 몰랐다 그말이오. 자기는 안것 같은데 자기로서는 너무나 예수님을 가장 요소적인 사실은 없애버리고 제외해 버리고 눈앞에 보이는 물리적인 현상만을 놓고 생각했다 그말이오. 이러한 식으로 예수님은 못 따라 가는 것이다 그거요. 오늘날도 우리가 만일 예수님을 따라간다하고 자기가 생각하면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어떤 분으로서 무엇을 경영하는 분인데 따라 가려고 하는가? 그것 알아란 말이오. 모르고 앉아서 주의 뒤를 따라가겠다고 백번 찬송해도 별수 없는 것이오.찬송되지도 않는거요. 또 안따라가도 예수님 제자가 되는 수는 없는것이오. 예수를 믿는다면서 예수님은 안 따라가겠다. 다라가는 도리도 잘 모르고 그러니까 난 적당히 좀 쉬고 앉았다가 천당에나 가겠다?! 예수님 안 따라가고 갈 천당은 따로 있는것 아니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면 그 절대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주의해서 알고 있어야지 아 그 몰라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줄로 생각하는 것이 이거 큰 문제인 거요. 모르고 앉았으며서도 나는 제자가 되었느니라.....?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우리가 예수님을 참으로 따라가려면 그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객관저이 이야기만 신학의 기독론만 쭉 나열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하고의 관계를 바로 생각하고 있으란 말이오. 그리고 나하고의 관계란 것은 족보에 언제 있었다는게 아니고 지금 오늘날 나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와 어떠한 접촉 가운데 있는 건가? 어떻게 서로 교제하고 있는 것인가? 예수님과 우리가 교제를 않는다고 할것 같으면 그 사실상 안믿는 사람과 같은 거요.교제를 한다고 하면 그럼 보이지 안흔 예수님과 어덯게 교제하고 있느냐? 우리는 날마다 기도할때마다 예수님을 이용해요. “ 예수님이 이름으로입니다.” 그 이용하는 건 마치 수표를 쓸때 나는 돈 저금이 없지만 돈 저금이 많은 사람이 수표를 주면서 거기다 ‘자네가 도장을 여기다 좀 찍게’ 하면 ‘고맙습니다.’하고 ‘돈 얼마나 필요한가?’ ‘얼마가 표요합니다’ 그러면 싹 써 준다음에 ‘여기다 자네 도장 찍으라’하면 찍어서 그 수표를 갖다가 은행에다 주면 내 이름 보는게 아니고 그 도장 찍혀 있는 사람의 이름을 보고 그의 저금 때문에 수표의 액수를 내 줄거란 말이오.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나와서 예수님이 비는 것으로 하고 이걸 빌었습니다 하는거요.이렇게 매일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는 지금 유요하고 살아가는 것이오. 그러지 않고는 기도할 재주가 없어요. 그러지 않고는 ‘내가 많이 기도한 공로로 지금 이 기도를 드리오니 들어 주시옵소서’하면 ‘네 공로가 그 얼마나 대단한거냐? 내가 네 기도를 들을 만큼 그 굉장한 공로냐?’그러고서 예수님의 이름은 결국은 없애 버리고 자기가 한다면 그건 예수 믿는 도리가아니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전적인 부패와 타락이 우치에서 아무 것도 내 놓을 것이 없고 하나님이 그것을 보실수 없는 상태에 우리가 있었던 거요.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우리에게 공로 없이 의롭다고 칭해 주신 까닭에 나온 것이고 그런 까닭에 그 공로롤 비는 것이오. 이 공로 때문에 나는 이 기도를 올릴수가 있어요.그러나 예수님과의 교제는 어떻게 되어있는가? 그 추상적인 용어를 잘 소위 New Evangelical Group 에서 잘 쓰고 있어요.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통이 뭐 어떻다느니 하는데 열심으로 들어보더라도 대체 인격적인 교통이 명확하게 뭘 의미하는 것인가 자 알수가 없어요. 아마 잘 아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인격적인 교통이라?? 예수님께서 지금 어디 계신 어떤 예수님 보고 어떻게 교통을 한다는말인가? 하는 문제가 있어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교통이란 그서을 주의해서 마을 해야 해요. 예수님은 당신의 하실을을 나와 관계를 맺어가지고 하실 일을 당신이 당에서 떠나시면서 훨씬 real하게 생생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도 광범위로 효과있게 능력있게 조금치라도 손상이 없이 하시기 위해서 제 삼위되시는 하나님이신 성신께서 보혜사로서 다은 보혜사 예수님이 떠나신 후 보혜사로 오신 것이다 그말이오. 내주를 하신 것은 나의 모든 일에 유기적으로 역사하시려고 하시는 것이오. 유기적으로 역사한다는 말은 나의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활동을 제어해 버리고 당신의 뜻으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상대를 하고 앉아서 ‘ 이래라, 저래라, 저라래’ 지휘를 하면 ‘ 예, 예’하고 따라가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올시다! 그렇게 내 바깥에서라든지 적어도 나와 대립한 위치에 있어서 거기 서서 나에게 명령을 하시는 그런 자세를 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organic movement, organic work, 유기적인 성신의 역사라는 것은 나의 의식 가운데 내가 깨닫도록 하시고 내가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시고 내가 뜻을 품게 하시고 내가 정서를 가지게 하시는데 있는 것이오. 즉 성신님이 그 뜻을 나에게 비치시고 거기 대해서 처음에는 내가 거부반응이 있어요. 저항을 느끼기도 하는거요. 왜? 이하에 항상 붙들여 있는 인간으로서 자기에게 불리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맘이 금방 좀 달라질수가 있는거요. 그ㅓ나 그러한 것들을 극복하는 정신과 그러한 것들에서 다시 ‘주여 내가 항상 급하게 나의 이해를 생각하고 주의 영광을 생각지 않는 옛사람적인 것으로 돌아갔습니다.’하고 다시 주님 앞에 의지하고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럴때 성신께서 나에게 보이는 그 의사에 대해서 그것이 결국은 궁극적으로 내 의사가 되고 그냥 의사만 될뿐 아니라 처음에는 실패해도 따라가는 것이지만 나중에는 기쁨으로 자기의 것으로 삼고 나가는 것이오. 이렇게 accensus(의지하는 상태) 가 있어야 한다고 그랬지요? assent 라는 것. 그것이 구원을 받는 신앙이 가지고 있는 또하나의 요소라고 그랬지요. 지난 주일 아침에 ..... 그렇게 그러한 자기의 정서에 의지 뿐 아니라 정서에 그리고 그런 것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 거룩하신 듯을 가급적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오. 왜 주께서는 이걸 이렇게 하시려고 하신다......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이오. 그의 경영을 알아야 한다 그말이오. 이렇게 해서 혼연히 성신님고 내 자신의 인격적인 모든 활동이 하나와 같이 움직이는 것이오. 이렇게 유지적으로 성신님께서 나를 억압하는 것도 아니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강제하는 것도 아닉 어떤 부분을 빼버릭 당신이 그냥 전권으로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 전체의 의식을 가장 명료하게 작용하게 하고 활돌하게 하고 거기 들어오셔서 역사하셔서 나로 하여금 생각을 정당하게 학 하는 것이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여러가지 경우에 있어서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지 저렇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 많이있어요. 그런 소위 딜레머라는 것이있어요. 그런 분기점, crisis란 것이 있어요.그런때에 이런 분기점에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보통 세상 사람은 자기가 이리저리 생각을 하다 아무리 해도 별 뾰족한 수가 없고 생각이 안나면 하다 못해 돈이라도 한 푼 내어 가지고 이 쪽으로 엎어지면 오른 쪽이고 이리로 엎어지면왼쪽이다해서 휙던져서는 그것을 열심히 쳐다보고 그것이 데구르르 딱 누우면 할수 없이 저리로 가야겠다고 그런 짓 하지요? 그 ‘장발장’얘기에도 그런것 나오지요? 그렇게 하지만 만일 참으로 성신님의 유기적인 역사라는것 확신하고 있는 사람 같으면 그런 때에 마음을 기울여서 주님께 기도를 하는 것이오. 주님께 기도를 하고 자기가 알수 있는 한가지 현실을 분석해서 어떤 것이 주님 앞에는 더 영광스럽고 의미를 가지느냐 하는것을 찾는 것이오.자기 이해를 앞세우지 앟고 그렇게 해서 의지적으로 기울어 질수 있는 데로 기울어 지는 것이오. 지혜가 부족해서 어쩔줄 알지 못하면“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해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이렇게 간곡하게 구하는 것이오. 자기가 제을 해 놓고 하나님을 재촉해서도 안되요. 몇일 까지 이것 안하면 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나지만 그러나 주께서 안 보이시면 어떻게 할수 없다. 무엇이든지 주님의 뜻을 지나친 것은 , 뜻을 넘어서 그를 강제할 것이 어디 있느냐? 이 세상에..... 이렇게 원칙을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무슨 큰 일이 나서 그 사람이 좌절되어 버리는 그런 일 없어요. 주님은 그냥 인도하시는 것이지....그와 같이 또 그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만일의 경우에 정 아무것도 모르고 암만 구해도 안 주시면 할수없으니 이렇게 해야겠다는 그 소위 숨겨둔 잠재의식 가운데 감추어 놓은 방법이 있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벌서 한개의 시험인 것이오. 왜 전쟁할때 배수의 진을 친다 그러지요? 뒤에다 물을 큰 강을 끼고서 적을 향해 가면 도망을 하면 여기 물에 빠져 죽는 수 밖에는 없으니까 이왕 앞으로나간다고......주를 믿고 나가는길을 때때로 배수의진을 치는 것이오. 이제는 뒤로 못 물러 간다..... 이것만 유일의 길이다. ... 거기다 다른길, 다른 가능성, 다른 대안을 안 넣는 것이다 말이오.

이런 것이 다 쉬운 것이 아니오. 그렇게 늘 살아 버릇한 사람에게는 차츰 차츰 생활이 쉬어지지만 그것을 처음으로 하려고 할때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오. 그러니까 그때도 열번이라도 더 기도를 하고 부르짖으면서 힘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오. 힘주셔서 이런 경우에 방황하지 않게 하시고 이런 경우에 자기의 길을 걸어가지 않게 하고 대안을 놓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없게 합소서. 이렇게 주의를 해야 하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성신께서 그 거룩하신 전 인격적인 역사로써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사실을 항상 잘 받들고 살아가는 생활이란 것이 이것이 중요한 것이오. 이런 것을 할때는 물론 성신께서 나에게 먼저 무엇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이오. 빛을 비취어 주시는 것이 첫째 일인 거요. 그런고로 우리가 무엇을 바로 알고 깨닫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인데 이렇게 눈감고 기도만 하고서 무엇을 알았다! 한다고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평소부터 내가 늘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에서 그 거룩한 도리를 자꾸 궁구해서 터득해 가야 해요. 말씀을 조르르 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한 도리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명령하시고 무엇을 경영하셨고 나에게무엇을 요구하신다고 항상 내가 할 당위, 의무라는 것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그 나라 거룩한 교회, 또한 인류를 내신 그 거룩하신 뜻 이런 것들 이런 사상적인 중요한 것들을 자꾸 자꾸 터득해 가야 하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는 매양 그것은 중욯나 criteria(표준) 가 되어서 내가 어떤 crises,crisis앞에 설때 어디로 정할까에 아주 좋은 도움을 주는 것이오. 그런것을 더 알면 안 만큼 하나님의 거룩한 일이란 이런것이다.하나님 나라의 일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잘작 알고 확신하고 그렇게 그런 사상을 품고 있으면 그 많은 것들이 나에게 비춰주는 그 율이 많은 것이오. 그것이 표준이 되어서 나에게 판단을 일으키게 하는 거요. 그런 것이 빈곤하고 빈곤한 머리를 가지고 빈곤한 지식을 가지고서 덮어놓고 주님 뜻, 주님 뜻 해야 빈곤한데서 주님의 뜻이 그대로 파생할수도 없고 주님이 그렇다고 해서 뵈인들 그게 주님 뜻이라고 알 길이 무엇이오? 어떻게 아느냐고....... 내게 생각이 떠 올랐다면 아 이게 주님의 뜻이다고 가르쳐 주셨어요? 표준이 없으면 결국 모르는것이오. 그러면 어디 바같에서 소리가 나면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할 무슨 능력이 무슨 조건이 있단 말인가요? 그런데 외부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도 우리가 믿을수 없고 내부에서 무슨 생각이 나도 믿을 것 없다고 믿을 것 없는 것이 아니오. 이런 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먼저 평소에 정상적으로 자라 나가야 하는 것이오. 바른 것을 먹고 자라나야 해요. 속이비고 공허하면 공허할수록.....주님의 경영이 무엇인지를 알때 보혜사이신 성신께서 나를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이것이 중요한 일이올시다. 그러면 이 서기관으로서는 그 때 예수니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더면 말을 그렇게 안했을 거요. 하나님이 아들로 알았더면 자기가 할수 있는 일이 있고 더 어떻게 할수 없는 일이 있이 있는것을 알았을 거요. 또 예수님이 만인의 구주인 동시에 이스라엘의 메시야요 메시아로서 오셔서 하시는 일이란 먼저 죄 주에서 흑암의 노예 상태에서 걸져 내시는 일이라는 이 사실이 우선이고 그 사실이 먼저 와야 할 일이고 이스라엘의 중흥이란 후의 문제다 하고 바르게 순서도 정하고 알았더면 훨씬 별다른 생각을 가지고 가령 그 말을 발언을 같은 말을 비슷하게 했다고 할지라도 생각은 근본적을 달랐을 거요. 예수님도 그것을 그렇게 대답 아니 하셨을 거요. 그렇지만 결국은 여우나 새같이 보통 우리가 그 디르 좇기가 어려운 것들도 결국은 다 정착하는 데가 있듯이 인자의 지금 걸어가는 길도 어디엔가 결국은 정착할 데가 있고 그것을 네가 나누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죽음이었든지 그것이 영광이었든지 나누겠다고 하지만 그 아무것도 나하고 네가 나눌것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정착할 곳이 없는 것이다. 너희들 너희들이 같이 가서 함께 정착할 만한 자리로 가는 일은 없다 그거요. 그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요. 오늘날은 훨씬 성신님의 그 보혜사의 인도와 지시오 가르치심을 따라서 예수님께 대한 지식도 더 풍부해져야 하고 하시는 일도 더 잘 깨달아야 하고 우리가 가야 할 길도 무엇인지를 더 잘 알아야 하는 것이오.

(기도)

거룩하신 주님이여 그 크신 사랑으로 저희를 주의 것을 선택하식 세우시고 주의 뒤를 따르게 하셨나이다. 오늘날 성신님께서 저희에게 늘 함게 하셔서 기르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힘주시고 친히 주장하시는 여러가지의 사실 안에 저희는 성신을 좇아 나아가야 할 것이오. 그런데 그것은 또한 그것 자체가 그대로 막연한게 아니고 주께서 저희에게 알기를 원하시는 여러가지의 크신 경영이 있어서 그것들을 더욱 알고 하나님 나라의 내실을 더욱 깨닫는데 따라서 주를 따라 나가는것도 훨씬 명료하고 도한 우리의 가는 방향이 분명해 지는 것을 아나이다. 주여 항상 막연한 가운데 공허한 가운데 빈곤한 속에서 주의 듯을 구하는 잘못이 없게 하시고 저의 뜻을 그렇게 간곡하게 구하거든 평소에부터 항상 주님께서 대체 선택한 자들 속에서 인류의 사회위에서 무엇을 하시려는 건가를 마로 깨달아알게하시고 이리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무엇을 기뻐하시고 어떻게 해야 할것을 가르치시는 바를 평소부터 잘 알고 깨우쳐서 있어서 일단 자기가 결정해야 할 중요한 문제 앞에서는 방황함이 없이 확연히 알고 나가게 하시고 이리하여 확신 가운데서 자기의 생활의 길을 걷게 합소서 이라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주께 바친 것을 순결하게 지키고 거룩되이 자기의 생애를 보내게 합소서. 우리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