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구원의 도리 눅 9:57-62 주님을 따르는 자

열려라 에바다 2011. 10. 31. 15:56

구원의 도리 눅 9:57-62 주님을 따르는 자

그동안 우리는 주일 오후에 예배때에 누가복음 15장에 잇는 세개의 비유를 가지고 생각을 했어요. 전에 그 비유에 대하여서 생각한 바가 있지만은 이번 주에 다시 거기 있는 다른 여러가지 뜻들을 생각하기 위해서 그것을 들어 이야기 했던 것인데 오늘은 아침에 구원의 신앙에 관해서 특별히 정서적인 의지적인 요소라는 것, 그것을 배우면서 동시에 제일 중요한 것 구원의 신앙의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의지적인 요소 혹은 그것을 신학상의 용어로 fitucia 즉 trust 의지한다하는 것이예요. 하나님을 의지 한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크신 능력의 사실에 완전히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고 살아 간다는 것.... 그런 점인데 그 점에 대해서 그 삶들이 그냥 모호하게 생각하는 것 보다 주께서 우리에게 명료하게 요구하신 사실 그것은 뭐냐하면 주의 제자돌 조건들을 가져라 그것이예요.

구원의 신앙이 참으로 구원받은 자로서 주의 백성이 되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된 사실을 의미한다 할것 같으면 주를 따르는 사람의 당연히 구비해야 될 조건들이 거기 있는 것을 성경이 분명히 이야기 한것을 우리가 생각을 해야 하고 사실상 구원받았다하고 막연히 자기가 생각하지 말고 나는 구원의 신앙의 조건으로서 확실히 주께서 나에게 요구하신 그 불가결의 제자의 조건이라는것 제자가 되는 조건이라는것 주께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빼서는 아니될 이 조건들이라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는가?

오늘 아침 우리는 그것을 배웠어요. 누가 복음 14장에 보면 오늘 아침 읽기는 25절로 끝절 35절까지 읽었는데 그 중에 특별히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들은 26,27절 (30절에 있는 말씀) 33절에 있는 말씀, 그런데 26절에서부터 보면 첫째 조건 이 첫째의 조건은 무엇이냐 할것 같으면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그런 조건이었어요. 여기 이 말씀은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여기서는 제일 사랑을 예수님을 앞에 내세우지 않고 그 다음에 생각향 할 부모나 혹은 형제나 처자나 또 자매, 자기 목숨 이런 것을 미워한다는 말로 표현을 했는데 그것을 뭐 뒤집어 말할때 그러면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지 않된다.

마태복음에서는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기록했지요? 이렇게 이야기 한 것이 첫째이고 그 다음에 27절에 바것 분명히 자기가 제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를 좇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제제가 되지 못한다 하는 말씀을 했어요. 그리고서 두개의 비유 탑쌓는 것과 일만을 가지고 이만의 대군을 가지고 쳐들어 오는 그 적군을 맞이 하는 어떤 왕의 이약기를 가지고 말씀하신 다음에 33절에 가서 (제 둘째 번) 세번쩨의 조건으로서 이와같이 너희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고서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수 없다.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런 명백한 말이 있는데 이 말씀의 뜻들을 잘 못 생각을 하고 그 잘못 생각한데서 많이 주저가 많고 또 실상 이것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야 못 따라가지 어떻게 내 모든 소유를 다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가? ‘자기도 인생으로 세상에 살아가렴녀 다 필요한 것들이 있어서 사들이고 가져야 하고 그것을 가지고 경영해야 하고 그러게 어렵게라도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을 다 포기하란 말인가?’하고 너무 건너 짚어가지고 그 말의 깊은 뜻을 생각지 못하고 금방 자기 머리에 아무렇게라도 떠오르는 생각을 가지고 조건인 것 같이 생각해 나가는 이런 경향이 있어서 이렇게 고귀한 말씀,꼭 구비하지 앟으면 아니되는 조건들을 그냥 할수 없는것 같이 생각하고 버리는 수도 있고 또 해본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릇된 폐단을 일으키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일에 대해서 항상 명백하게 생각하고 또 이렇게 중요한 조건이며 중요하게 다루어야지 극서을 잘 몰라도 그냥 자기가 제일 상으로 떠오른 그 착상에 의해서만 생각하고 분명히 주께서 그 말씀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을 가르치셨는가를 잘 생각하지 않는것이 하나의 태만이올시다. 그래서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제자로서의 일생, 그를 모시고 그를 따라 가기를 원하면 그가 말씀하신 그 조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느가? 어떻게 하라는 것이가? 그래서 거기에 비추어서 자기가 하는가 못하는가를 보고 못할때에는 못 따라가는 것인줄 알아야지 못하고서라도 ‘천당은 간다 주님은 따라간다’하고 이렇게 자기가 스스로 종교를 만들어서 조건을 만들어서 위로하고 나가는 것은 참으로 정당한 신앙태도가 아니올시다. 그런 까닭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주의를 해야 할것이고 이것이 구원받은 신앙의 명백한 증거로서 필요하다는 이야기예요. 특멸히 그 의지적인 요소가 어떻게 매일 주를 따라가고 있느냐 하는것에서 명백하게 나오는 것이지 예수를 믿고 나서 이만한 선행을 행하고 전에 품었던 각박한 마음을 안 품고 좀 부드럽게 마음을 품고 나도 믿는 사람이니까 도를 하는 사람이니까 이제는 좀 착한 일을 해야겠다고 그렇게 아무런 규범이 없고 규제가 없는 혹은 규모가 없는 그런 선행을 가지고 믿는 사람이란 증거를 가지려고 하는것은 예수님을 믿는 도리가 아무규제가 없고 이무 규모가 없는 것같이 대하는 태도인 것이예요.

그래서 오늘 아침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릴때에 중요한 문제는 구원받은 신앙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표실할 중요한 증거인 의지적인 요소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면 자기 의사가 지금까지 자기를 지배하고 밀고 나가던 것을 포기해 버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경영하신 그 길로 나는 가야할 것을 알고 그것을 구하면서 보이시는 한 것음씩을 전진하는거속 또 하나님께서 윌르 세상에 두신 본래의 크신 뜻이 무엇이라는 것을 성경이 풍요하게 가르쳤으니까 그것을 알고 그 뜻에 합당하게 하나님이 좋아 하시는 대로 싫어하시는것을 버리고 좋아하시는 것을 취해서 살아간다는것이오. 이렇게 해서 자기의 도덕적인 위치를 바로 잡을 뿐 아니라 자기 인생의 행로에 대해서도 주의 지시와 명확한 가르침에 의해서 인도에 의해서 움직이라는 것이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란 것을 찾는데 하나님의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것들을 생각지 않고 어떤 세세한 문제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 여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저것의 하나님의 뜻은 어떨까? 하고 흔히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뜻의 큰 것은 잃어버리고 기르고 지엽 말단에 있는 것을 가지고 거기서 마치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뜻을 찾는것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도 원래 하나님의 말씀을 충성스럽게 성실히 공부핮디 않는 까닭에 발생하는 것이오. 그전에도 늘 예를 들었지만 어떤 사람이 어떤 큰 회사에서 사원으로서 일을 할대에 멀리가서 출장을 하라 혹은 공려를 공식여행을 하고 가서 사무를 보고 돌아오라고 할려면 그것을 무엇을 어떤 내용의 해야할 것인가를 알고 가야할 것이고 또 그일을 해 오도록 필요한 자료를 회사는 주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회사의 의사에 맞는가 안맞는가를 그는 알아야 할 것이고 실컷 일을 해 왔다고 하지만은 회사에서 요구하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뚱단지 딴 짓을 하고 온다고 할것 같으면 그것은 우스운 일이예요.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는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분부하실 때에는 내가 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알아야 그 전체의 일의 어떤 부분을 맡을 수도 있고 할수 있는 것이예요. 이런 의미로서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할때에는 먼저 하나님이 전체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큰 것을 보이실때 큰 것부터 알아야 하는것이오. 큰 것을 알고 내가 담당해야 할 일을 알고 깨닫고 그 일을 감당해 가는 것이예요.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행하고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것이지만은 그렇지 아니하고 자기가 큰 것은 모르고 하나님이 원래 요구하시는 큰일들은 모르고 조그만한 것들 약대 같은 것은 통으로 삼켜 버리고 하루살이 같은 것을 자꾸 걸러내서 이것이가? 저것인가? ....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어요.

이와 같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것을 존중히 여길때는 그 뜻이 크고 작은 것이 있고 전체와 부분이 있어서 전체에 대한 당연히 알아야 할 부분을 알고서 그 전체에 관계되어 있는 부분을 알도록 하는것이 정당한 것이예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우리에게 자상하게도 그렇게 친절하게 다 가르쳐 주는 것이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기의 일새을 그 뜻대로 나간다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니고 또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이 제 마음대로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가 나가는 것이 아니고 어떤 거룩한 목표, 그것은 주께서 ‘저기 저기’그 곳이 네가 가야 할 곳이다. 하고 가르치시면 이것이 주의 말씀을 좇아 가는 것이예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혹은 성신님으로 인도해주시는 그대로 나가는 거란 말씀이오. 그 인도하는 길이란 무엇이냐할때 그 길의 성격을 우리 주께서 말씀하실때는 그것은 날마다 자기를 부이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매일 나를 좇아 오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신 것이오. 그런 말을 표현할때 그렇게 가장 간단하게 말을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란 말을 원용하신 것이오.

그러나 그 십자가란 말은 간단하게 한마디로 끝날 말이 아니오. 십자가란 말도 몇가지의 뜻을 따로 따로 가지고 있어서 예수님이 자신 십자가와 나보고 지고 따라오라 하신 십자가가 같은 것은 아니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과 또 내 자신이 옛사람이 십자가에 달렸다 하는것과가 정확하게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것이오. 그와같이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란 그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먼저 알아야 지던지 안지던지 그것도 명백해 지는것이고 그것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지려고 해도 짖도 못할 뿐더러 지지도 않고도 아무렇지도 앟은 것같이 생각하는 것이예요. 왜냐하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오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십자가를 졌는지 안졌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자기 생활을 한다면 그것이 무슨 옉수 그릿도의 제자되는 본분의 생활입니까? 그러면서 자기는 예수님의 교인이 예수 믿고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자처한다면 그것은 이상한 종교요. 예수님이 내 놓은 조건은 하나도 충당치 않고 구비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스스로 정한 조건하에서 자기는 예수 믿는 사림이다.... 이것이 소용이없는 것이다 그 말이오.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좀더 성경이 우리에게 명확히 요구한 조건이 있으면 거기에 충당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오. 그렇게 예수님을 좇아 간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것이 부족하다든지 잘못 되었다든지 하면 그것은 고쳐야 하는 것이오.

오늘 읽은 누가 복음 9장에 있는 말씀 57절 부터 62절 까지를 읽었는데 이 말씀은 세 사람이 각각 예수님게 나와서 예수님을 좇아가는 그 자태를 이야기 했어요. 이 말씀 가운데 첫 두 사람에 관한 기록은 마태복음에도 있어요. 8장 19절로 22절에 두 사람, 첫째 두사람은 있고 제일 마지막 제 세째 사람의 이야기는 마태복음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게서 그 공생애 3년 하반에 하신 이야기인데 갈릴리를 영구히 떠나시기로 하고 떠나셔서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남쪽으로 사마리아를 지나서 유대를 향해서 내려오시는 도중이에요. 어디에서인지는 알수 없으나 도중에서 길을 가시다가 오늘 이 성경 본문 읽은 대로 볼것 같으면 처음에 보면 “ 길을 가실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하는 것이 첫째 사람이예요. 그럼 우선 간단히 사실 거기에 나타난 묘사된 사실을 보면 길을 가실땐데 첫째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혹이라고 했지만은 마태복음 8장을 볼것 같으면 19절에 한 서기관이 나와서 하는 말이에요. 하는 말은 꼭같아요. 여기 볼것 같으면 “ 길 가실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마태복음에는 “ 한 서기관이 선생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결국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서기관이올시다. 서기관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생각해 봐야 할 만한 중요한 문제지요. 보통...거기 따라가는 여러 사람 가운데 서기관이라는 바리생인의 그룹이든지 그런 독틋한 종교적 지도자와 또 성경과는 늘 접촉하고 있는 이런 독특한 그룹의 사람이 아닌 어떤 사람이 마치 각릴리 어부가 되었든지 나가서 날마다 품을 팔고 사는 사람이 되었든지 그런 사람이 ‘좇아간다는’말을 했다는 것과는 퍽 의미가 달라요.

그 둘째번을 볼것 같으면 모두 세사람인데 둘째번 사람은 “제자중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제자 중의 하나라고 마태복음에서는 말했어요. 여기 누가복음을 볼것 같으면 “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러면 이것은 주님께서 제 둘째 사람에게는 나를 좇으라 하셨지요.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그것은 제자중의 하나다 하는 이야기예요. 열두 제자를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이미 예수님을 섬기고 수종들고 그 디를 좇아서 늘 오는 사림인데 그 사람들 가운데 그 여러 사람이 예수님 뒤를 따라 오지만은 자기르 예수님을 좇아야 할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예수님게서 보시고 아시는 것요. 누구든지 예수님만 좇겠다고 하면 ‘오냐 따라와봐라’ 그렇게 않는다 말이오. 원래 우리 주께서 그 백성이 뒤를 따르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라도 따라 오너라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오. 항상 따라오는 여러 종류의 사람 가운데 참으로 진정으로 따라올 마음의 준비가 있고 또한 그럴만한 제목인가를 보시면서 그 사람 보고 나를 좇으라 하신 것이오. 거기에는 물론 그 이유를 여로 분들은 짐작 하실거요. 거기는 여러가지 극복해야 할 문제들 치뤄야 할 댓가들이 잇는 것요 그런데 아무나 보고 덮어놓고 예수님을 좇아오라고 해서 나도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말을 안하신다 말이오. 네가 지금 나를 따라오지만은 네가 눈을 떠서 네가 이제 이겨야 할 시험과 당해야 할 환난과 치워야 할 값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너는 벌써 갔을 것이다하고 그런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오. 그러한 까닭에 그러한 것을 보시면서 그 중에서 그대로 따라와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큰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지어가시는 그 역사의 중요한 역군으로 활동할수 있는 사람을 놓고 예수님은 오라고 하시는 거요. 도리를 가르쳐도 모든 사람이 다같이 아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귀있는 자는 들어라하고 항상 그 귀 있는 사람이 듣기를 바라시는 거요. 그런데 그러한 제자 가운데 한 사람 이미 예수님을 좇기로 자기가 작정을 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하고 주님을 죽 따라오던 사람인 까닭에 주님은 눈여겨 보셨고 그를 다뤄보셨고 그의 자질을 아셨고 자격을 아식 그래서 이제는 ‘ 너 이제는 나를 좇으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오. 그 사람은 좀더 그 좇으라는 말에 대해서 ‘저 선생님 지금까지 뒤를 늘 따라다니고 모시고 늘 다니고 그러는데 또 어떻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 것인가요?’하고 자기 마음 가운데 의문이 생길듯도 하고 또 그 의미를 알아 봐야 할거요. 왜냐하면 따라오던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 사람의 마음 가운데는 예수님이 ‘나를 좇으라’고 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선점하고 있는 것 마음을 미리 점령하고 있는 것들이 있어요. 그 점령하고 있는 사실은 자기 집안일이오. 자기 아버지 장사의 문제였어요. 자기 어버지를 노후에 마지막에 어떻게 잘 봉양을 해 드려야 하고 어떻게 잘 해드려야 겠는데... 하는 효도의 심정이올시다. 도덕적인 심정이오. 그런데 그것이 선점하고 있단 말이오. 우선 마음을 지배하고 있단 말이오.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는 아주 당위올시다. 아주 해야할 일이에요. 사람이 일반 사회의 형성에 있어서 필요한 도덕적인 태도 올시다. 그것이 먼저 그 앞에서 나타났단 말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을 대답해 주신 다음에 즉 저희 죽은 자의 장사에 대해서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이 말씀을 마태복음의 기록에 있어서는 “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이 그 사람 보고 나를 좇으라 하신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를 아마 이실거요. ‘나는 너를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 정하고 너에게 지금 이것을 분부한다. 너는 나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해야겠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전파는 둘째로 두고 먼저 가서 네 할일 네 인간의 당위라고 하는 집안의 일을 돌보겠다는 것이냐?’ 그렇게 반문하시는 것고 같이 들려요. ‘그래서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즉 너는 나를 좇으라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좇아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을 우리가 알수 있도록 이야기 하셨어요.

제 세째 사람을 봅시다. 제 세째 사람에관해서는 누가 복음에 뭐라고 했냐면 “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만은 나로 머저 내 가족을 작별케 하락하소서” 이렇게 말을 했어요. ‘주를 좋겠습니다’이것은 자기가 말하는 것이오. 자기가 주를 좇을 결의를 말하는 점이 제 1인 , 제 첫째사람 그 서기관과 같아요. ‘주를 좇으리이다’ 그런제 좇기는 좇겠습니다만은 먼저 가서....선행사가 하나 있는데 선행사는 그럼 무언인가 하면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그것은 뭐 대단한 문제는 아니오. 가족에게 ‘잘 있으라 나는 이제 예수님을 좇아서 예수께서 명령하시고 분부하시는대로 하나님 나라르 전파하는 이로가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서 역사를 지어가는 일에서 역군으로서 일을 해 나갈 테니까 잘 있으라’고 그런 작별을 해서 집안에서도 그럴줄 알고 그리고 마음도 아주 그렇게 깨긋이 먹도록 해야겠다 하는 등의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그런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함당치 아니하니라” ‘네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지어가는 일에 한 역군이 되겟다고 하느냐? 하나님 나라에 네가 가합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느냐? 너는 손에 쟁기를 잡고 지금 쟁기질을 하고 앞으로 나가야 할 터인데 뒤돌아보고 뒤로 가려하는 사리이다. 그 어떻게 하겠느냐? ’그렇게 그에게 가르쳤어요.

이러한 세가지 종류의 사람, 이 세가지 종류의 사람에 대래서 그전에 우리가 공부한 것이 있어요. 여러분 다 기억하실거요. 이것으 때때로 여기 언급을 하는 까닭에 아마 잘 기억하실텐데 지금 이 시간에 그것을 자세히 이야기 않습니다만 우리가 여기서 세가지 사람에 대해서 종합해서 주의해야 할 문제가 있어요. 세가지 사람 모두 주를 좇아간다는 사람으로서는 어떤 결함들이 있어요. 그래서 다갘이 주님 앞에 시정을 받지 아니하고 고침을 받지않고는 그대로 갈수 없는 사람들이예요. 예를 들면, 첫째 사람인 서기관이에요. 서기관과 같이 종교적인 직업가인 동시에 높은 위치를 점유해서 헤브라이즘에 그 당대의 히브리 사상과 주의와 그 모든 운동에 항상 상좌를 점하고 지도자에 자처해서 사실상 순전히 유대학적이 관점으로 볼때에는 위대한 지도자들이고 그 사람들은 헤브라이즘에 그 때 역사의 중추 인물들로서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헤브라이즘이란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할 만큼 중요했던 인물들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제 3년 하반으로 들어가서는 이 사람들을 포함해서 바리새인들에 있어서는 예수님께 대한 자기네의 그 전체 바리새인이라는 한 그룹의 태도가 대체로 명확해진 때예요. 그 태도는 뭐냐면 적대하는 거요. 예수님을 우리가 처음에는 포영하든지 그와 더불어 합작을 하던지 해서 어떤 형식을든지 메시야 국가를 여기 실현하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정책이 될것이닥 생각한 시기도 있었지만 그것이 벌써 2년이 지나고 제 3년도 거의 다 가는 시기에 있어서는 이제는 다시더 타협할 여기작 없다. 분명히 그에 대해서는 적대를 할수 밖에 없다고..... 적의가 심하던 때 올시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들이 이번에는 사두기(Sadducee), 즉 대제사장의 그룹들과 결탁을 해 가지고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 그러한 역사의 국면을 치닫고 마는 거요. 이렇게 해서 핑소에 그렇게 잘 결탁이 돌수 없던 사두개와 야합을 해서까지라도 예수님을 타도하려하는 맹렬한 적개심을 벌써 나타내고 그것을 거기에 의해서 활동하던 시기 올히다. 그런데 그런 그룹 가운데서 서기관이 쑥 나오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표시하고 예수님께 고백한다는 것은 이것은 굉장한 일이올시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요. 보통 갈릴리 어부 한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가겠다고 한 것과 아주 다르다고. 비장한 결심이다 말하자면 동료에게는 배척을 받고 나중에는 심지어 배반자라고 이단자라고 해서 그래서 배반자란 낙인이 찍히고 타매를 받고 혹은 음패를 받을 수도 있고 큰 행해르 입을 수도 있는 위험 가운데 자꾸 뛰어들게 되는 것이예요. 그런데 그런것을 전혀 예유(豫惟)하지 않고 덮어놓고 신기루를 좇아 가듯이 간 사람이 아니올시다. 똑똑한 사람이오. 벌써 서기관을서 그 동안 살앗다하면 識者分子요. 사회의 지도층에 있던 사람이올시다. 그리고 남에게 존경을 받던 사람일거요. 왜냐하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를 좇겠다는 중대한 결심을 하는 것을 보면 정신적으로 천박한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오. 심오한 생각 가우데 자기가 빠져있던 사람이오. 그래서 무엇이 인생의 참된 가치가 될 것인가. 무엇이 헤브라이즘도 가야할 바른 길이 되겠는가를 생각할 때그 대답을 예수님에게서 찾으려 한 것이예요. 적어도 나는 예수님을 따라가서 거기에 의해서 우리가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이 세계를 앞으로 건설하고 이끌고 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신성한 동기와 가상한 마음의 작정 가운데서 예수님을 따라 가려고 한 것이오. 그리고 그것은 거기 상당한 희생을 지불하겠다는 중대한 각오를 가지고 따라가야 하는 거요.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대해서 예수님은 “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둘곳이 없다는 말로써 거절도 아니고 받아들인것도 아닌 그러면 무엇인가 그 사람 너는 생각할 것이 덮어놓고 거절할 것은 아니오. 그러나 덮어놓고 받아들이지도 아니하고..... 왜냐하면 사람의 변천을 알고 그 만큼 심각한 자기 비판과 또 문제데 대한 심각한 태도를 자세를 취하고 나온 사람 같으면 우리 주님 보시기에 생각할 여지를 주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하신 줄 알아요. 그래서 그에게 생각할수있는 여지를 준거요. 생각할수 있는 재료를 주신 거요. 프레미스(premise)라는것, 전제라는것을 주었어요. ‘ 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은, 깃들인 곳이 있지만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 하셨는데 그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한 것은 아니예요. 그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할때에 거기에는 자기의 동기가 있을 거요.그 동기와 그 다음엔ㄴ 어떤 예산이 있었을 거요. ‘주님을 따라 가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있었을 거요. 거기에 대한 그 사람의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하신 거요. 마치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제자 되는 사람에 있어서는 그 사람의 태도가 심히 중요한다는 거요. 문제에 대한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의 준비가 중요하다는 것을 오늘 아침에 우리가 배웠어요.

어떤 사람이 탑을 쌓는다고 하는데 기초만 세우고 위를 쌓지 못하고 예산이 부족해서 못하고 말면 사람들이 비웃어서 ‘ 이사람이 탑을 쌓는다고 하더니 기초만 세워놓고 위는 못세우느냐? ’그럴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자기도 군대가 일만 명 밖에 없는데 자기 보다 배나 많은 이만명을 가직 잇는 대군을 가지고 있는 어떤 왕이 선전포고를 하든지 어쩌든지 그 군댈 막 끌고 와서 공격을 하려할때 네가 그 소식을 알면 자 우리는 일만 밖에 없는데 우리의 배수의 대군을 모아 가지고 온다 그렇다 해서 우리의 화력이 얼마나 더 큰것이 아닌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자 그러면 무엇으로 이 결핍된 부족한 일만명을 대충할수 있겠는가? 만일 화력이 일만 군대를 가지고라도 이만 군대에 맞설 만한 것이 있다면 일전을 한번 하겠지만 화력도 그만이고 수도 훨씬 열세이고 그러면 그래도 그냥만용을 피고 가서 싸우겠습니까? 그렇게 안할것이다 가거요. 그럼 어떻게 하겠느냐? 먼저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하고 ‘야 싸움 말자. 조건이 무엇인가? 그 조건에 대해 이야기 하자. 지금은 싸움을 말자’ 권토중래(捲土重來)를 할지라도 와신상담을 할지라도 지금은 싸움을 못하겠다는 거요. 마치 오월이 서로 싸움을 하듯이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싸움을 하듯이 그렇게 하는것이 아니냐. 이와 같이 여기서 너희는 두 사람에게서 봐야할것이 있지 아니하냐. 너의 있는 소유를 다 버리지 않고서 그리고 내 제자가 되겠다고 생각지 말아라. 제자 못된다. 예산을 똑똑히 하라. 너는 지불할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으라는 이거요. 그런데 이 서기관은 지불할 것을 잘 알았는가? 다시한번 생각하고 검토해 봐라. 왜냐 하면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할때 “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겠다”고 그랬는데 지금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을 향해 내려가시는 거요. 그리고 거기서 부터 베레아로 가실 거요. 최후 한달을 베레아에서 보낼거요. 그리고 베레아에서 그 다음에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오시는거예요. 그래서 나귀를 타시고 들어오신 이후에 베다니로 가서 그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유하시면서 매일 일짜감치 성전에 나가서 가르치시는 것이 마지막 중간씩 일이오. 그런 결과로 결국은 많은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많은 사실을 보이셨지만 또한 그렇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악은 악대로 그때로 성장해서 결국은 예수님은 금요일날 요일로 보면 금요일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이올시다. 이 서기관이 그것을 알았습니까? 이 서기관이 그렇게 까지 몰랐어요. 지금 3년 하반에 아직 베레아로 들어가시기 전에 남쪽으로 아마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는 때인지 혹은 유대땅으로 들어갔는지 아직 갈릴리를 다 못벗어났는지 모르나 도중에서 좌우간 만났다고 그랬어요. 그러면 그것을 잘 모르고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의 의미를 철두철미 알 길이 없는 그가 자기 아는 한도 내에서 희생의 대가를 그 만큼 지불하리라. ‘ 그런 정도라면 내가 가는 길이 어떠한 큰 환란, 어떠한 큰 사실의 길이지 알지 못하는 너로서는 벌써 예산이 크게 빗나가고 있다. 빗나가는 예산을 가지고서 나를 따라오겠다고 하느냐? ’ 그런 의미를 포함해서 지금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예요.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 여우도 굴이 있지 않느냐? 낮에도 하루종일 어디로 돌아다녔을지라도 거기 저 쉴곳이 있다. 그것은 거기에서 다음의 일을 위해 자기를 편하게 쉬게 하는 자리이다. 공중의 새도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날라 다니고 야단하지만 돌아가서 쉴곳이 거처가 있다. 그러나 지금 인자의 가는 길은 그렇게 한 루틴(routine)으로 그렇게 규정적으로 자고 일어나서 활동하고 자고 활동하는 여우의 생활이나 새의 생활과 같이 말하자면 하루의 노고를 안식하는 안식의 처를 향해 나가는 것이 아나라 이제부터 가장 큰 일을 하려가고 그것이야 말로 내몸을 화목제물로 주는 그일이다 너는 그것을 모른다. 그일에 있어서 너는 그것이 도무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고 있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든지 따라오겠다고 아느냐? 갈보리까지 골고다까지 네가 따라올테냐? 그것은 네가 모른다 그거요. 너 여우라든지 공중의 새가 굴이 있고 그 집이 있어서 각각 돌아갈 곳이 있지만은 나는 돌아가는 것이아니라 나는 그 집으로 지금 결국 안식의 자리로 안정의 자리로 제가 기대하고 있는 안정의 메시야의 왕국으로 지금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큰 고난의 속으로 지금 들어간다. 그리고서 죽음이다. 그런데 네가 나를 따라 오겠다고 하느냐? 그 당시에 어떤 자제들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모르고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가까이 갈수록 자꾸 서로누가 크냐는 다툼도 했고 “ 하나는 주님의 좌편에 하나는 주님의 우편에...” 그렇게 훌륭한 제자 아고보나 요한까지라도 그런 생각을 하고서 그 어머니까지 나와서 그것을 청했던 것을 여러분은 아실거요. 그런 답답한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시고 지금까지 나오시는 예수님의 그 답답하고 괴로움이란 것은 우리말로 보통 말할때는 기막힌 일이 한두가지가 아닌거요.가장 자기 가까이 있던 요한 같은 제자는 통찰력도 강한 사람이고 남의 마음에 얼른 무엇이 있는가를 이렇게 생각하는 그런 예술가적인 직관력이 강한 사람이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한하고 야고보하고 그 어머니까지 나와서 구한 것은 중흥 하신 다음에는 하나님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소서, 뭐 벼슬자리를 미리 맡아 놓는 거요. 그러한 일이 있는 때인데 항차 전에 일찍부터 불러서 교육을 해서 기독론을 가르치고 ‘내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라 바로 모르고서 내가 주는 이나라를 제가 받을수 없다’는 예수님이 아직 예수님의 교훈을 그렇게 심오하게 자세히 받았는지 여부초자 우리가 알수없는 서기관이오. 서기관이 예수님을 다른 제자오 같이 꼭 늘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도 예수님이 선택해 가지고 사람들이 가진 오류된 메세야관을 시정하셨을 뿐 아니라 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그 신관에 큰 변혁을 일으키는 그 위대한 교훈을 결국은 그 위대한 교훈이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의 유대 사람의 히브리 사람의 베시야로서가 아니고 만민의 구주로 그리고 또세상의 속죄의 구주, 화목제물로서 알라는 이 큰 사실속으로 들어가게 하신 그런 대상으로서의 서기관은 우리가 사복음을 다 뒤져도 안나와요. 없어요.

결국은 항상 최종적으로 이 열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배반자요. 나머지 열한 사람이 남는 것이오. 그러나 열 한 사람만이 전부가 아니오. 신실히 따라 다니던 다른 문도들이있었어요. 특별히 여신도들이 있었어요. 그 분들이 일고 있었어요. 그런데 서기관은 그 어느 ㅍ녀에도 속한 것이 아니예요. 물론 여신도는 아니죠. 그러나 엠마오로 가던 그런 혹은 글로바의 내외인지 아마 내외인것 같아요. 한 집으로 들어간것을 보면 그래 그런 사람도 아니고... 내내적으로 바리새인 가운데도 니고데로 같은 사람 또한 공회원 가운데 아리마대 요셉도 물로나 바리새인이오. 그런 사람은 내내적으로 주님의 제자 노릇을 하고 제자로 자처한 사람들이오. 그러나 철저하게 명확하게 주님의 교훈을 받아 가직 주께 대한 그 사상이나 정신을 바로 잡는 대상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 말이오. 그런 서기관이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단 말이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알고 무엇을 사히려고 지금 가시는가를 알고 가야할 것이오. 그것을 모르고 앉아서덮어놓고 따라갑니다 그거요. 센치멘탈하게 찬송은 부르지요. 어느 곳으로 가든지 주의 뒤를 뒤를 혹은 주와 같이 같이 가겠네 하는... 여러분 그런 찬송 잘 아시죠? 우리 교회에서는 안 부릅니다만 많이 불렀지요. 겟세마네 동산까지 겟세마제 동산까지 피땀 흘린 동산까지 주의 뒤를 따라가겠다고 그렇게 이야기 하지요. 오늘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흘리는 곳으로 예수님이 오라고 하시느냐? 그것도 좀 바로 생각을 해보세요.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내가 내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간다면 예수님은 어디로 가시는 길인가? 지금도 골고다를 향해 가시는 중요? 골고다로 가시는 그 일을 우리가 따라가라는 그 말인가? 그것도 똑똑히 생각해서아니면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할것이가 하는 이야기요. 그런데 이 서기관은 그것을 몰아요. 모르고 몽롱한 안개속에 있는 이 장래의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만 따라가면 어떻게 된다 하는 그런 정도일런지 모른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오.이것이 다같이 거기에 부족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볼수 있어요. 또 세사람 모두 십자가를 직 주니을 따라 간다는 그 말뜻에 비취어 볼때에는 항상 큰 결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오. 첫째는 어떤 점에 결핍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아직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간다하는 사실의 의미를 십분 모른다 그거요. 그령 그것을 십자가란 상징용로를 혹은 표상을 사지고 표현을 않더라도 이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 우리 주님을 우리는 이제는 이러헤 모시고 이렇게 따라가야지 하는 그것이 실질상 십자가를 지는 그것을 십자가로 표현한 내용을 가졌더면 상관없어요. 몰랐다고 할수 없는거요. 우리는 이 제자들이 십자가란 말 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뜻을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내용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거요.그리고 때때로 자기 짐을 잠시 내려 놓으려는 경향이 둘째 사람 세째 사람에게 다 있어요. 예수님은 아니다. 네가 지금 짐을 부릴시간이 아니니까 지고 그냥 가거라 그러는데 ‘잠간 내려놓고 나는 아버지 장사를 보러 나는 가족하고 작별하러.......’ 그리고 거기에 다 도덕적인 이유가 다 붙어 있어요. 이것이 爲人子의 도리니까 그렇게 말할수 있어요.요컨데 뭐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일 예수님을 직접 좇는 일과 세상의 일과 도덕적인 세상위에 성립되어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무슨 악한 일이 아니라 허영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마땅한 도리라고 하는 남의 자식이 되어서 사람의 도리라고 하는것 남의 자식된 도리라고 하는것 그러한 중요한 도덕적인 요구가 있을 경우에 무엇을 취해야 하는가를 아직도 몰랐다 이거요. 그래도 그것보다 우선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하고 그렇게 까지는 몰랐단 말이오.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기의 가족을 가서 혈족을 만나서 작별을 하겠다고 하는것은 좀더 어떤 도덕적인 큰 문제도 장사와 같이 개재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도덕적인 사살이 아닌것은 아니나 좀더 그것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 인정의 문제인것이오. 인정의 문제 혹은 혈족애라고 할만한 인정의 문제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만일 어떠한 사람이 손에 쟁기를 잡고 가는데 자기의 사랑하는 아기가 옆에와서 재롱을 부린다면 쟁기를 멈추고 놔두고 가서 아기를 들여다 보고 한참 얼르고 다시 쟁기질을 하느냐? 아마 그렇게 쟁기질을 하는 사람도 있겠죠. 세상에는.... 그렇지만 못한다. 왜? 앞에 있는 짐승은 그냥 끌고 가는 것이다. 짐승이 끌고 가는 힘을 빌려서 네가 땅을 파려고 할것 같으면 짐승이 가는 시간에 그냥 쟁기를 몰고 가야지 억지로 할 것 같으면 짐승이 가는 시간에 그냥 딴 것은 안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짓을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인간간의 애정의 문제라고 인정의 문제라고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는 합당하지 않다. 여기서 주를 따라가는 자들이 마땅히 분별하고 알아야 할것들은 첫째, 자기의 십자가란 것은 무엇이며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다음 둘째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일인가를 알고 거기에 응해야 하는것이고 세째는 그 일을 잠시라도 게을리하든지 중단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예료(예측)을 해야 한단 말이오. 마치 디모데 후서 2장 3절 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네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견딜것인데 군사로 뽑힌 자는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를 기쁘게 하려는 것이다. 그의 의사만을 좇는 것이 아니라 그를 기쁘게 하려고 자진해서 적극적으로 전진해야 한다는 그런 말이오.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우리가 또 가져야 할 여러가지 것들이 많이 있는 거요. 평상시 집에 있어서는 사랑하는 일도 많고 좋아하는 것도 많고 귀하게 아끼는 것도 많고 하지만 일단 응소가 되어서 전쟁이 지금 치열한 전투를 하기 위해서 앞서 나갈 때에는 다 뒤로 하는 것이란 말이오. 사람은 그렇게 전투하는 시간이 있는 것이오. 하나님 나라는 평온하게만 가는 것이 아니오. 전투하는 시간이 있고 도한 잠시 소강을 유지하는 시간도 있고 그래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인정 관계도 다 끊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끊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더 귀하게 여길것이 요구를 할 때에는 그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먼저 놓은 것을 먼저 앞에다 놓아야 한다 그거요. 이렇게 해서 지금 전투가 치열히 벌어졌으면 전투해 나가는 사람은 지금까지 귀하게 나가고 아끼던 것을 뒤로 하고 뛰어 나가서 이 신령한 싸움에 가담을 해야 하고 거기에 뛰어 들어가야 하는 거란 말이오. 그러는 시간에 그것을 않고 다시 뒤로 돌아가서 뒤에 있는것, 좋아하는 것을 좀 아끼고 쳐다보고 싶고 한다면 그것이라도 전력을 드려서 같이 전투해야 할 터인데 몇 사람들이 ‘아이 우리는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내버려 두어라’ 하고 적은 지금 막 돌격이라도 해올 태세를 가지고서는 접근해 가지고서는 쏘아 대는데 그것을 휴지 하고서 슬슬슬 뒤로 빠져서 자기가 좋아하는일을 하러 간다면 그 부대난 궤멸을 당하는 거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는 어떤 부대가 하나 어떤 전쟁에서 궤멸을 당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다 그거요.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중대한 파괴적인 사실을 초래하고 마는 것이오. ‘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너 혼자 짓는 것이 아니라 그일을 하는데 내가 하께 해서 그일을 내 손과 발로 써서 거기서 내가 일을 이루는데 손노릇, 발노릇하기로 기대하고 약속을 하고 하겠다 하고 나간 자들이 그 일을 않고 중간에 자기 딴 일을 보러 가고 자기 기분을 맞추어 가려고딴일을 하려 한다면 무엇이 남겠느냐?’ 이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의 역군으로 서는 것은 말하자면 신성한 약속인거요. 주님과의 신성한 계약이오. ‘네가 그렇게 하라 나는 이렇게 하마’ 이것이 우리를 가장 높게 대접하신 주님의 거룩한 정치라는 거요. 주님은 우리를 쓰실때에 강제로 쓰시지도 않지만 도한 우리를 쓰실때 기계로 부려먹는 다른 이세상 사람들과 같이 쓰시지 않는 거요. 주님은 우리를 쓰실때에 인격자로 여기고 싱당히 존경을 하시고 또 그만큼 신뢰를 하시고 일을 맡기시는 거요. 그리고 모자라는 힘을 자꾸 보태어 주시는 거요. 그리고 없는 지혜는 주시고 그래서 주님께서 결국 다 주어 가지고 하지만 그 사람이 한 것같이 일을 만들어 주시는 거요. 이렇레 해서 결국 그 사람이 하늘에다 보화를 쌓게 하고 받아야 할 상을 만들어 주시는 거요. 이렇레 해서 자차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하나님이 상주실 것을 그가 받도록 하시는 거요. 이것이 주의 사랑인 것이오. 그런데 주님께서 그렇게 그에게 주시는 그 여러가지 은혜라는 것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내가 이 신성한 약속을 저 버린다든지 신실하게 이행하지 않고 그 약속하에서 지금 치열하게 나갈 때는 나라야지 않나가고 앉았고 또 무엇을 해야할 때는 해야 할텐데 하지 않고 단 짓을 하고 앉았고.... 하나님 나라의 전체의 거룩한 조화에다가 파괴를 일으키는 것이오. 이런 것은 다 용납 못하는 일이 되는 것이오. 이러한 까닭에 그렇게는 못 따라 온다. 그런 각오도 없이 거기에 댛나 준비도 없이 덮어 놓고 따라오겠다고 하느냐? 그러므로 나의 일의 성질과 중요성을 미리 잘 알뿐 아니라 거기에 부합하게 내가 행동하는 것이 하나의 인격자로 주의 신뢰를 받고 분부를 받은 자의 정당한 태도인 것이오. 그런데 주의 신뢰와 분부를 받아서 신성한 계약하에서 움직인다는 그런 고귀한 생각 가운데 들어가지 못하고 주를 따라가는 것은 일이 아니다 그거요. 이렇게 해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명료하게 자기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 만큼 주님의 신뢰를 받고 주님과의 신성한 약속 가운데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오. 그것을 무시하고 엎어놓고 짐지워주니까 짐꾼같이 끙끙거리며 지고 간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지는거요. 내가 안지면 안질수 있는 거요. 그러나 그런다면 거기는 벌려 놓은 그 역사의 진행에는 어떤 결함이 만들어지는 것이오. 이런것을 생각해 가지고 이 세사람의 일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 즉 우리가 과연 구원받은 신앙을 가진 사람 다웁게 일생을 주께다 부탁하고 맡기고 드리고 그리고 주님의 그 사랑과 신뢰를 받으면서 그와 신성한 계약 가운데서 주의 일을 맡아 하는것인가? 십자가람 말을 나중에 해석해 보더라도 그런 의미를 가장 강렬하게 갖고 있는 것이오. 십자가가 무엇인가에 대해 오늘 적어도 몇가지를 여기에서 배웠어요. 그것은 그 일을 소홀히 하거나 마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닌것을 우리가 알거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요소가 있다고 배웠어요. 날마다 자기가 담당하고 짊어겨야 하는 것이오. 그리고 날마다 자기가 주님을 좇아가야 하는것이오. 주님의 디를 주님이 가라 하시는 그 길을 걷는 것이오. 이것이 중요한 일인데 그것을 할때 날마다 한다고 할때 쉬어서 안되어야 할 때 쉬겠다. 다른 인간적인 일이고 그것이 도덕적인 일이고 또 인간사에 당연히 요구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 아닐때에 더 막중한 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진행의 사실에 관계된 사실이 있는데도 그것을 정지하고 다른 것을 돌아 못보는 것이오. 이러한 문제는 이 세상에서 고귀하고 가치있는 일에는 어느 정도 만큼 다 붙어 다니는 것이올시다. 어떤 음악가 유명한 블란서의 베를리오즈란 유명한 음악가가 있어요. 대 작곡가로서 자기 부인이 아파서 아픈 부인 옆에서 죽 간호하고 밤에 잠을 안자고 앉아있는데 한 2,3일 그러고 있는 동안에 하루 저녁에는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서 그 베를리즈의 수기를 볼것 같으면 풍성한 교향악, 대관현악곡이 자기 멀리에 더올라가지고서는 그 멜로디가 참 아름답게흘러가는 것을 알았아요. 대개 음악가라는 것이 작곡할 때에는 그런 영감이 떠올때에는 그것을 오선지에다 빨리 빨리 올려놓는 것이오. 그런데 그것을 받앗을 때 거의 본느적으로 반사적으로 그것을 바아서 오선지에다 옮기려 하다가 멈칫 보니까 자기 부이이 아파가지고 대단히 괴로운 상태 가운데 있는 것을 볼때, 아! 내가 사랑하는 아내를 돌아보고 간호하고 해야지 만일 이것을 내가 붓을 지고 쓰기 시작하면 다 잊어 버리고 이것만 또 할것 아닌가? 그러면 아내는 누가 간호하는가? 다른 사람이 간호한다고 해도 내가 옆에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할때 아무 말도 않고 그냥 이르 악물고 그 영감이 흘러가는 것을 catch를 하지 앟고 요렇게 앉아 있었단 말이오. 그렇게 해가지고 한 동안 지난 다음에는 으례 하는 양으로 없어져 버렸는데 대단히 마음이 서운하고 슬펐지만은 할수가 없다. 마치 괴테의 말과 같이 항상 예술이라는 것은 아느 때는 현실에 양보하는 것이다고... 그 다음에 다음 날 저녁에 다시 앉아 있는데 의자에 아내 옆에 이렇게 쳐다보고 때때로 이렇게 만져주고 갈아주고 그러는데 또 어제 저녁의 그것이 또한번 확 떠올라서 굉장하게 찬란하게 이번에는 전개되더라고 그래요. 그래서 또다시 그것을 거의 catch해 보고 싶은 심정이 있지만은 또아프고 있는 아내를 생가가해서 못하고 말았아요. 그러더니 그 사람 수기를 보면 그 다음날 저녁부터는 다시 , 영구히 지금까지 그것이 온적이 없고 온일도없고 아무리 생각해보려도 그것이 무엇이엇는가를 그것이 무슨 멜로디엿던가 무슨 그 소리 였던가를 자기가 catch할수 없었단 말이오. 그 figure 그 음형이라는 것을 그랬다고 썼어요. 거기 보면 작곡을 하면 거기 몰두하면 다른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오. 거의 發憤忘食이란 말도 있지요. 거기다가 정신을 다 주입할것 같으면 먹는것도 잊어버리고 대때로 그런 일이 발생해요. 그러면 이 세상의 고귀한 일을 할때라도 사람이 몰두해야 하고 거기에 전력을 기울여서 사는 것을 못돌아보고 하는 일이 있는 거요. 그런데 더군다나 막중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그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 어떻게 신중하고 어떻게 또 심오한 것인가를 잘 파악하지 못할때는 조금하고 어떻게 또 심오한 것인가를 잘 파악 못할때는 조금하고 그 다음에 두어 두고 조금하고 두어두고 이럴수가 있는 것이오. 적어도 그것이 자기의 감정이나 자기의 흥미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파악해서 가지 아니하면 몰두하기는 어려운 거요. 이렇게 몰두하지 못할때 저기에 전 심령을 기울일 그런 정도가 되지 못할때 흔히는 태만이 생겨요. ‘아 좀 있다 하더라도 되지’ 그것이 사무보는 일, 수판 놔서 돈 계산 하는 일 같으면 두었다가도 할수 있지만 이것이 정신적인 일로 어떤 영감이 그를 지배해서 움직여 나갈 일이라면 ‘ 성신님의 역사도 잠간 기다리십시요 내가 이 일을 하고 난 다음에 계속해서 지도하시고 인도해 주십시요’ 그렇게 못하는 거요. 누가 주인입니까? 성신께서 나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셔서 일을 하시려고 할때는 내가 그를 막고서는 내 현실 때문에 이것을 못하겠습니다. 하고 핑게를 못하는 것이오. 내 사정을 누구보다도 더 잘아시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려 하시는데 내가 그것을 ‘아 내사정 모르십니까? ’하고 항의를 합니까? 그러한 생각 가운데 들어가기가 쉬운 것이라 그것이오. 그래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 누가주장하느냐? 우리 주님께서 하시려고 해야만 하겠다고 하는데 ‘ 너는 쉬어야 겠다고 하고 너는 가서 부모를 돌아보아야 하고 너는 가서 처자하고 작별해야 하고 그래야 하겠다고 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요. 그사람들은 주께서 그일을 위해서 그 거룩하신 능력과 은혜로써 주장하신다는 것을 아마 생각안했는지 몰라요. 주님을 따라 갈때는 자기의 힘으로 따라가는 것이오. 그러면 주께서 하시는 일을 내가 중단하는 것은 아닌 것이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 사정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니까 가장 문제를 잘 해결하실 방책이 있으신 것이오. 그런데 자기 생각이 주님의 생각보다도 자기의 생각의 해결이라는 것이 받을 만한 해결이라고 생각했기에 이것을 요렇게 이토록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하는 거요. 그런데 문제는 그 주님의 생각을 우리가 바로 아는 문제요. 모르니까 내 생각을 가지고 일을 중단해 보려고 하고 또 다른 일도 잠간 시려고 그러는 것이오. 이렇게 주님의 거룩하신 뜻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인데 이것은 신앙이 자꾸 성숙해 가는데에 따라서 더욱 명료해 지는 것이오. 거기에다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하고 배우고 그래야지 그냥 앉아서 저절로 눈만 감고 앉아서 기도만 하면 알아지는 것은 아니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비취지는 대로 차례차례 알아가는 것이오.

(기도)

거룩하신 주님이여, 그 크신 사랑으로 저희들이 주의 제자로서 살수 잇도록 높은 위치를 주시고 진려하시고 저희를 대접해 주시는 것을 생각할때 황송스럽고 감사할 뿐이로소이다. 그런데도 저희는 주님과의 그 신성한 약속에 대해서 충분히 잘 감당도 못하고 이해도 못하고 또한 하나님 앞에 때때로 슴픔을 드리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저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는 주께서 저희로 하여금 정신을 차려서 참으로 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제게 당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게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서 이와같이 말씀하고 없어서는 아니될 중요한 것들을 그냥 흐지부니 아든지 등한히 여기든지 심각하게 생각지 아니하고 그냥 넘겨버리는 이런 모호하고 이상한 태도를 가지지 않게 하시고 중요히 말씀하시고 절대적으로필요한 조건으로 말씀하셨을 때에도 그것을 알아야 할 것이고 거기에 충당해야 할 것인 것을 마음 가운데 깊이 각성을 하고 주님의 제자다웁게 주께 합당한 자로 살아가게 사랑해 주시고 인도해 주소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