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23:4-5]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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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편 4절-5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세상은 정말 진리생명의 말씀으로 이치적으로 무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진리지식에서 나오는 지혜를 쓰지 않으면 꼼짝없이 당하고 마는 세상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우습게보지 말아라 그 말이다.
싸움이라 할 때는 그 성격상 공격적이라야 한다. 방비책만 쓰는 것은 잘못이다. 방비만 하면서 싸우게 되면 결국에는 그 싸움에서 패하게 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적극적이다. 소극적은 안 된다. 물론 돌격을 하기 위해서 방편상 후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원칙상 우리의 신앙은 적극적이다. 왜 적극적이라야 하느냐? 소극적은 앞으로 못 나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 교회 교인들을 보면 영적 싸움이 없다. 싸움을 한다는 여기에는 원수가 있다는 것인데 싸움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원수를 못 알아본다는 말이 되는 거다. 이걸 다시 말하면 원수에게 먹혔다고 보는 거다. 싸울 줄 모르는 것은 그 신앙이 원수에게 먹힌 상태다.
진리지식의 생명이치의 신앙은 적극적이다. 왜 적극적이 될 수밖에 없는가 하니 자기의 앎의 수준이 다른 것이 훤하게 보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거다. 왜냐하면 사람을 살리는 데는 적극적이라야 하는 거니까. 어쨌든 싸움은 적극적이라야 이길 가능성이 있는 거지 안 그러면 못 이긴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일반적인 정신을 가지고는 안 된다. 성경은 적극성을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은 사망의 골짜기다.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아 타락된 세상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런 세상에 살면서 살아나고 살리는 건데, 영원히 살리는 운동을 하는 건데 사망의 골짜기에 가서 죽을 짓을 할 바에야 표현을 한다면 뭐하려고 예수를 믿느냐? 학교에 다니는 것은 공부를 하려는 거다. 병원에 가는 것은 진찰을 받고 병이 나으려는 거다. 진찰을 안 받고 약을 안 먹고 병을 안 고칠 바에야 뭐하려고 병원에 가느냐?
싸움을 말한다면 무장을 해야 하는 거고, 아름다움을 말한다면 영적인 미모성을 가꿔야 하는 거다. 육신이 고운 거, 아름다운 게 있듯이 마음이 아름답다고 하는 게 있다. 그리고 영적인 면에서 영모의 미모성이 빼어나야 한다. 성경에 압살롬이 머리카락이 빼어났다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머리카락을 알아주니까 그 머리카락에 굉장히 신경을 썼던 모양이다. 그러던 차에 전쟁이 일어나서 압살롬이 나귀를 타고 도망을 가다가 자기의 긴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려서 죽었다.
육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을 하다가는 그 자랑 때문에 네가 망할 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그걸 반드시 알아라. 그래서 자기가 모든 면에서 남보다 아름답다면 겸손해지는 것이 좋다. 그것을 가지고 자기가 높이 올라가려고 하다가는 너는 그것 때문에 망한다. 이건 교만이다. 누군가가 자기의 육체의 미모나 얼굴에 관해서 칭찬을 할 때 ‘그렇지’ 하고 돌아가면 그것 때문에 네가 망할 수 있다. 이사야서에 보면 스랍들이 긴 옷을 입고 있듯이 하나님의 옳음으로, 하나님의 선으로 자기를 가리는 것이 참 아름다운 거다. 호화찬란한 옷을 입었다고 해서 아름다운 게 아니다.
세상은 무장을 하고 적극적으로 싸워야 할 곳이다. 또한 싸워서 이겼다고 해서 가만 내버려두면 안 되고 정복을 해버려야 한다. 싸우고 그치는 게 아니라 정복을 하는 거다. 싸우고 정복하는 이것이 진리신앙 성도의 적극적인 삶이다. 세상을 살아도 이렇게 사는 자가 힘이 있는 거지 세상을 사는 것도 예수를 믿는 것도 술에 술 탄 듯하고 물에 탄 탄듯하게 살면 안 된다. 세상을 우습게보지 말아라. 무서운 세상이다.
우리가 옳은 진리이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서워하고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자기 인생은 다 지나가 버린다. 자기 일생이 지나가 버린다. 세월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모른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생활 속에서 옳은 정신 변치 말고, 그 정신 굽히지 말아라.
이러려면 정신적 싸움을 해야 한다. 정신적 싸움에는 이치가 분명해야 하고, 말이 옳아야 하고, 정신 사상이 옳아야 한다. 그래야 옳은 싸움이 된다. 이런 면에 허점이 생겨서 정신적으로 넘어가 버리면 그만 신앙정신마저도 넘어져서 사람이 추하게 된다.
우리는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앙정신 변치 말고 싸우면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 싸운다고 하니까 눈을 시퍼렇게 뜨고 용서할 줄도 모르고 이해할 줄도 모르고 총칼을 들고 마구 쳐부수라는 말이 아니다. 용서할 때는 용서해 줄 수도 있어야 하고 이해할 때는 이해해 줄 수도 있어야 하는데, 용서도 옳은 용서가 되어야 상대가 굴복을 하게 된다. 이것도 싸움이다. 그런데 보통 보면 이게 잘 안 된다.
우리는 옳은 진리이치로 무장을 해서 귀신 잡는 진리의 해병대가 되어야 한다. 귀신이 사람 속에 안 들어가고 자기 혼자 공중에 떠다니는 귀신은 없다. 다 사람 속에 들어가서 장난질을 하는 거다. 귀신이 사람 속에 들어가서 꼭 그 사람의 정신인 것처럼 하며 역사를 하는 거다. 귀신이 들려서 움직이는 사람은 그 정신의 향방성이나 소원 목적성이 성령의 감화가 아니라 악령이 감화다.
겉으로 보면 분명히 사람의 활동이고 사람의 정신인데 왜 그것이 귀신의 활동이거나 악령의 역사라고 하는 걸까?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할 때 정해진 코스로 달리는데, 앞서서 달리는 사람이 있고 뒤에서 달리는 사람이 있는 것은 정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해진 코스로 달리는 게 아니라 코스를 벗어나서 운동장 중간으로 가로질러서 달려간다면 이건 불법이다. 그런 것처럼 신앙성도가 각자마다 신앙이 얇고 두껍고 깊고 하는 옳음의 차이를 갖는 것은 정상이다. 그런데 진리본질에서 벗어난 채로 그 어떤 마음과 정신으로 그 어떤 활동을 한다면 이것은 성령의 감화가 아닌 악령의 감화로 된 거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세상은 험난한 세상이다.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사람을 해코자 하는 것.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예수 믿는 사람이 의례히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엉터리가 많다.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해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불속에 들어가도 두려워하지를 않는다. 왜? 불속에 들어가도 안 타져서 안 죽는다는 말인지? 어떤 마음으로 이 말을 하는 거냐? 불속에 들어가도 육신이 안 타져 죽는다는 의미의 말이냐, 자기의 신앙정신 사상이 불속에 들어가도 절대로 안 타져서 안 죽는다는 것인지? 어느 위주의 말이냐?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했으니까 주님의 보호가 배경으로 된 말이다.
자기가 먹던 굶던, 춥던 따뜻하던, 생활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할지라도 평소에 옳은 진리이치의 신앙사상을 변치 않고 나갔다면, 신앙정조를 잘 지키고 나갔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느냐? 주님이 진다. 이게 성경이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질적인 길로 가면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이건 스스로 속는 거다.
우리는 항상 성경의 기준에서 자기의 잘잘못을 발견해야 한다. 자기 주관대로, 자기 개인적인 어떤 신앙심에서 나오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가 없다. 한 예로 성경도 모르는 사람이 ‘난 죽어도 예수 믿는 믿음을 변치 않을 거다’ 라고 한다고 해서 이 사람의 신앙이 변치 않는 거냐? 이건 어찌 보면 이미 변해져 있는 거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나는 내 신앙이 변치 않는다’ 라고 할 때 변치 않는다고 하는 그 정신이 하나님의 질에 맞는 그 질로 변치 않는다는 말인지, 아니면 자기 속에서 나오는 똥고집으로 그 말을 하는 것인지? 후자다.
성경은 사람이 말을 할 때 그 말이 육에 속한 데서 나오는 건지, 영에 속한 데서 나오는 건지를 알게 해준다. 우리가 자기 마음의 결심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를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만이 자기를 미리미리 고칠 수 있고 안 넘어지는 사람으로 되는 거지 자기의 결심을 가지고는 넘어져 버린다. 이미 넘어질 소리다. 어떻게 보면 이미 넘어졌다.
그러면 안 넘어지는 방법은? ‘나는 절대로 안 넘어진다’ 라고 해서 안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튼튼하고 굳게 선 말씀에 자기의 모든 것을 무조건 집어넣어라. 말씀은 시대의 바람을 타지 않는다. 따라서 자기가 이 말씀으로 자체화 인격화 되어있으면 이 사람은 그 어떤 사건 환경 속에서도 변치 않는다. 이런 사람은 ‘나는 절대로 변치 않는다’ 이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이미 변치 않을 사람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변치 않는 거다.
사람이 바로 만들어지는 것, 자체적으로 말씀화로 되어지는 것. 이런 사람은 주님의 보호가 배경으로 되어있고, 또 주님이 빛으로 역사를 하시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생명의 말씀, 옳은 진리지식으로 다 분별해 버린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지혜지식적으로 찾아오셔서 ‘이게 영이냐, 육이냐? 생명이냐, 사망이냐? 영원에 속한 거냐, 임시성에 속한 거냐?’를 분별케 해서 그걸 판단 평가를 해서 바로 가게 하신다.
3절에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셨듯이 성도의 몸은 당신의 피로 사신 당신의 몸이다. 그러니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느냐? 주님이 책임을 져야 한다. 당신의 책임이 있기 때문에, 즉 인간 자기에게 주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 자기를 크고 작은 사건 환경에 넣어서 담금질을 하는 거다. 어떻게 보면 빨리 담금질이 될수록 아주 날렵한 사람이 된다. 현명하고, 눈치 빠르고, 마음이 넓고, 신앙정신이 예리한 사람이 된다. 세상은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사건 환경과 대립성을 많이 띤다. 그만큼 무디구나.
성도가 일부러 고의적으로 진리권 생명권 애정권 안에서 탈출을 하지 않는 한 주님의 보호가 있는 거다. 주님의 보호는 항상 진리 지혜지식적 도덕성적인 면으로 같이 하는 거다. 성도가 이것이 무너졌다고 하면 주님이 같이 하지 않는 거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주님은 생명의 능력자이시기 때문에 사망권을 이기고 집어삼키시는데 이걸 우리들에게 주려는 거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지팡이도 손에 잡고 쓰고 막대기도 손에 잡고 쓴다. 그래서 지팡이나 막대기가 비슷한 것 같으나 역할에 있어서는 다른 점이 있다. 지팡이는 막대기보다 조금은 더 길다. 지팡이는 사람의 몸이 의지가 된다. 지팡이는 한쪽 발의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다. 또 물에 있는 사람이던 물건이던 쉽게 건져 올릴 수 있다. 또 지시할 때 지팡이를 쓰기도 하고, 무엇을 잴 때 자처럼 쓰기도 하고, 짐승을 쫓을 때 쓰기도 한다.
막대기는 손에 들고 못된 사람을 팰 때 쓰기가 좋다. 그리고 돼지몰이를 할 때도 쓴다. ‘막대기’라 할 때는 주로 분노나 징계의 성질이 들어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징계를 위해서 바벨론이나 앗수르 군대 등을 막대기로 동원해서 성도에게 자극을 주어서 구원의 바른 길로 가게 하시는 것으로 보고 있는 거다. 이게 얼마나 단수가 높은지?
성경에 보면 다윗이 누구에게 쫓겼느냐? 사울 왕에게 쫓겼다. 다윗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사울이 악신이 들려서 괜히 죽이려고 달려들고 쫓아다니고 했다. 다윗은 이걸 자기를 높여주려고 하는 주님의 보호로 보고 있다. 얼마나 단수가 높으냐? 다윗은 환난 중에 참으로 고상한 영적인 신앙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바라보고 있더라. 우리 성도들도 그래야 한다.
이런 신앙사상을 가진 진리성도 다윗을 감히 사망권이 와서 집어삼킬 수 없다. 그런데 교인들을 보면 대부분 자기에게 닥친 사건 환경에 삼켜져 버린다. 사건 환경에 대립성을 일으키는 것은 삼켜진 상태다. 이런 사람은 인간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에게도 원수가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물러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된다.
다른 교회 교인들의 기도를 보면 이런 게 상당히 많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집 자식이 말을 안 듣습니다. 저 놈만 바로 세워주시면 우리 집이 편하고 예수 잘 믿는 가정이 되겠습니다’ 하는 사고방식.
부모가 이 때 누구부터 바로 고치라고 그 환경이 주어졌다고 하는 걸 안다면 부모가 얼른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이걸 깨닫고 안다면 이 사람은 올라간다. 그런데 그것과 대립이 돼버리면 그만 다 던져버리게 된다. 언제까지 그렇게 할 거냐? 부모자식간만이 아니라 모든 가족도 마찬가지다.
남자가 한 여자를 데리고 살아도 편안할까 말까인데 성경에 보면 솔로몬은 몇 천 명의 여자를 데리고 살았으니 생각을 해봐라. 끔찍하지 않느냐? 그 많은 여자가 서로 솔로몬 방에 들어가려고 머리를 끄집어 당기며 싸울 게 아니냐? 그래서 솔로몬이 말하기를 좋은 집에서 고기를 먹으며 사는 것보다 차라리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게 낫다고 했다.
성경에 해가 지기 전에 분을 그치라고 했다. 말다툼을 하다 보면 서로가 안 지려고 자꾸 도수가 올라가다가 나중에는 전쟁이 일어난다. 그러기 전에 눈치 빠르게 ‘아, 이 정도에서 그치자’ 하는 게 있어야 한다. 부부간에 해가 질 때까지 분을 품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가 말씀을 바로 깨닫고 보면 세상이 겁날 게 없다. 무슨 말인가 하니 눈앞에 일어나는 건 다 지나가는 거다. 세상은 다 지나가는 거다. 그러니 세상을 그렇게 신경질을 내며 살 필요가 없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가 시험에 들어서 자기가 사망권 안으로 들어가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주의 지팡이’라 하면 첫째는 진리와 성령의 영감의 감화성, 곧 보혜사를 말한다. 두 번째는 주님이 나에게 보내시는 신실한 종을 말한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성도를 보호하시고 의로운 길로 인도를 하신다. 왜 의로운 길로 인도를 하시는 거냐? 하나님의 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다윗의 원수관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성도의 원수관과 같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저 놈 밉다’ 하면 다윗도 ‘예, 내가 보니 저 놈이 밉군요’ 하는 거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 놈 악하다’ 하는데 자기가 볼 때는 ‘안 악한 데요’ 한다면 이건 보는 눈이 다른 거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시는 눈과 같다. 또 성령님이 보는 눈과 똑같다. 일치다.
구약성경에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의 며느리를 찾으러 갔는데, 이 엘리에셀은 어릴 때부터 아브라함의 집에서 종으로 늙은 사람으로서 주인 아브라함이 어떤 성질을 가졌으며, 뭘 좋아하며, 먹는 음식은 어떻고, 사람을 보는 눈이 어떻고 하는 걸 다 아는 거다. 그래서 주인의 며느리는 주인이 찾으러 가야 하는 건데 아브라함이 이 엘리에셀을 보낸 거다.
다윗이 보는 원수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원수와 같다. 다윗은 하나님이 보시는 원수를 자기의 원수관으로 삼는 거다. 그런 것처럼 성도의 이룰구원을 방해하는 것은 전부가 자기의 원수이고 다른 성도들의 원수이기도 하다. 이룰구원을 방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일을 방해하는 것은 내 원수도 되지만 다른 성도의 원수도 되는 거다.
이 원수가 어디에 있느냐? 다른 사람일수도 있지만 바로 자기 속에도 원수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기 속의 원수는 보지 못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원수가 되어있다. 그런데 서로 원수라고 하지만 제 삼자가 볼 때는 그들과 원수가 아닐 수도 있는데 이것은 벌써 원수관이 서로가 다른 거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이게 네 원수다’ 그러면 ‘예, 그렇습니다’ 해야 되겠는데 그게 아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원수라고 하시는데 자기는 아니라고 펄펄 뛴다면 바로 그 놈이 하나님의 원수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목전’이란 ‘눈앞에서’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다윗에게 상을 베풀었다는 거다. 이게 무슨 상인가 하니 마치 밥상에 여러 가지 음식이 널려있듯이 다윗 앞에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사건들을 골치 아프게 만들어 놨다는 거다. 이게 다윗의 밥상이라는 거다.
자기 앞에 밥상이 차려져 있다면 그 앞에 가만히 앉아있는 게 아니라 먹어야 한다. 그런데 안 먹고 있다면 누구만 배가 고픈 거냐? 자기 배만 고픈 거다. 이치는 이와 같다. 다윗 앞에 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봤을 때 그들이 하는 말이 ‘아이고, 저 다윗 참 살아가기 힘들겠구나’ 그렇게 말을 하는 건지? 다윗이 원수들 앞에서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들이 다윗을 보면서 ‘참 고소하다’ 라고 하는 거다.
왜 고소하다고 하느냐? 다윗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바른 신앙의 길로 가다가 그런 일을 당하니까 그걸 비웃으면서 그러는 거다. 사울 왕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니까 다윗이 사건 환경을 만나서 쩔쩔매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니 고소하다는 거다. 다른 말로는 다윗이 사건 환경을 만나서 ‘뻥’ 하고 나자빠지는 꼴을 보고 싶다는 거다.
그렇지만 이 일을 당하는 다윗이 입장에서 그런 것을 겪는 신앙의 눈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맛있는 식탁을 마련해줬다는 거다. 자기에게 닥친 사건 환경을 자기의 신앙 믿음이 자랄 수 있는 먹이로 보고 있는 거다. 참 고상하다. 영적인 눈을 가진 자는 이렇게 보이는 거지만 육의 눈을 가지면 어떤 상태가 될까? ‘이놈의 자식들, 내가 작살을 내버리겠다’ 하는 생각을 가질 거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기름을 발랐다? 무슨 기름일까? 잔에 기름을 부어야 넘치는 거지 머리에 기름을 발랐는데 무슨 잔이 넘치느냐? 성경을 영의 눈을 가지고 영적 신앙상태로 보지 않으면 해석은 불가능이다. 육적인 생각을 가지고는 해석이 안 된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기계에 기름을 치면 기계가 잘 돌아간다. 그런 것처럼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며’ 라고 하는 것은 성령의 감화로, 진리의 지혜지식으로, 이룰구원으로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거다. 원수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대립자가 그렇게 많은데도 진리의 지혜지식으로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대적이나 사건 환경을 대립 없이 넘어간다는 말이다. 또 ‘내 잔이 넘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룰구원의 기쁨이 충만이요 성령충만이더라 그 말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잔’이라고 하는 것은 사건을 말하는데,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뺏고 뺏어가는 여러 가지 사건 환경을 말한다. 이 사건 환경 안에는 사단 마귀의 작용이 다 들어있다. 사건 속에는 나의 마음을, 나의 신앙정조를 뺏어가는 게 들어있다. 성도는 이걸 넘치도록 먹어야 하는데 어떻게 먹어야 하느냐? 자기의 신앙의 마음이 안 뺏기는 쪽으로 먹는 거다.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된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이 보기에 주께서 자기의 원수의 눈앞에 보이도록 다윗 자기 앞에 진수성찬의 상을 만들어 놨구나. 진수성찬은 반찬이 다 달고 고소한 것만 있느냐, 맵고 시고 쓴 것도 있느냐? 여러 가지 맛이 다 있는 거다. 이걸 골고루 먹어야 살이 오르고 건강해지는 거다.
상을 왜 베풀어 놓는 거냐? 먹으라는 거다. 그러면 어떤 마음을 가지고 먹어야 하느냐? ‘감사합니다’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이 음식을 먹는 지혜와 지식을 주옵소서’ 하고 자기 앞에 차려진 사건 환경을 먹어야 한다. 그러면 이걸로 인해서 자기의 신앙 믿음이 성장이 된다. 그래야 왕이 되는 거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다 겪으면서 미워하지 말고 대립하지 말고 그 잔을 다 마셔야 한다. 이게 다 나를 올려주려고 하는 거다. 이런 걸 통해서 ‘사람이 어떻다. 세상이 어떻다’ 하는 걸 나에게 가르쳐 주려는 하나님의 뜻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건 환경에 대해 원망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차려주신 음식을 못 먹는 거다. 상대에게 옳은 말을 해도 상대가 못 깨닫고 자꾸 나를 잡아 뜯는다고 해서 대립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인가 그 사람을 치워버릴 수도 있다. 어떻게 치울 런지는 모른다. 사울 왕처럼 치울 런지, 어떻게 치울 런지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나는 그 사람을 통해 깨닫고 만들어질 기회를 놓치고 마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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