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편 12절-1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2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있다면 그의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겠다는 거다.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거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속마음을 모르고서는 아버지를 모르는 거다.
속마음 중심, 소원 목적,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엇을 주시려고 함인지, 아니면 나로부터 뭘 빼앗아 가려고 하는 분인지, 아니면 나에게 무엇을 바라심인지 이게 있는 것인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고 신령계와 물질계를 다 가진 분이신데 이런 분이 인간 나에게 당신을 경외하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서 뭘 빼앗아 먹으려는 건지, 아니면 우리에게 일을 시키려는 건지?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고자 하는 자에게 택할 길을 정확하게 알게 해준다. 그러면 택할 길을 정확하게 알게 해준다는 게 무슨 말이냐?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고자 할 때 어떤 택할 길을 정확하게 알게 해준다는 거냐?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싶다고 할 때 뭘 택할 길을 알게 해준다? ‘이렇게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거다’ 하는 걸 알게 해준다는 거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려면 모든 면에서 말씀의 이치를 통하여 첫째는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한다. 하나님 앞으로 가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이 나온다. 나오는 그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한다. 깨달으면 자기 속에서 가치판단 평가성이 명확하게 나온다. 왜냐? 하나님의 말씀은 잣대가 되는 거고 저울과 같기 때문이다. ‘이래야만이 모든 면에서, 모든 면이란 우리 사는 거 전반에서, 그러니까 ‘사람을 만나던, 일을 하던, 장사를 하던, 사람을 다스리던 모든 면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로 하는 거다’ 하는 게 나온다. 하나님을 알면 이게 나온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
교회는 열심히 다녔지만 만일 이런 것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가치 판단 평가성 등 모든 면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로구나. 저것이 하나님의 뜻이로구나’ 하는 게 분명히 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믿을 거냐? 어떻게 믿는 게 바로 믿는 거냐? 예배시간에 한 시간도 빠지지 않고 참석을 하는 것이 바로 믿는 거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몰랐다거나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보려고 하는 신앙이라면 이 사람은 예수님을 잘못 믿고 있는 거다. ‘나는 예수님을 잘못 믿고 있습니다’ 하는 증거를 바로 네가 하고 있는 거다. 그러나 옳게 바르게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진정 하나님의 옳은 말씀을 받는다면 바른 평가와 판단이 주어진다. 그러면 이제는 그 바른 판단 평가를 가지고 네가 바로 살아라. 이게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섬기는 거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모든 면에서 바르게 나가기 시작을 한다. 그러나 구별 분별 판단이 없는 세상에 속한 주장적 말씀을 받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을 못 섬긴다. 이건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거다. 왜냐? 자기 속에 자기주장만 들어있는데 이게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거냐? 자기를 바로 아나, 사람을 바로 아나,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나? 그러니 완전히 막혀버린다.
하나님을 모르면 이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 된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이 사람의 머리는 영특해진다. 구별력이 들어가고, 판단력이 예민해지고, 모든 사물을 관찰력이 있게 보고. 이게 예수를 바로 믿는 거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거다.
13절: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이게 큰 축복이다. 옳고 바른 여호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게 되면 마음이 기쁘고, 마음이 즐겁고, 마음이 시원하고, 마음이 평안해진다. 왜 그러냐? 세상근심 걱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진리의 깨달음이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이 뚜렷이 보이고 확실히 보여서 이룰구원을 잘 이뤄가니 만족이요, 사는 것이 불평불만이 없다는 말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근심 걱정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땅에 속한 면의 근심 걱정이 가득 있는 상태를 말한다.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성도가 이렇게 되려면 첫째가 하나님을 귀중히 여기고, 두 번째는 사람을 귀히 여기고, 그 다음에는 일을, 물질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귀중히 여겨야 하는데 이 실습이 어디로 들어가느냐 하면 사람에게 들어간다.
사람은 다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활동을 하게 되는데 활동을 갖되 먼저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가지고 활동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에 있어서 활동을 하되 하나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까 자기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그 다음에 받은 것을 인인관계에서 써먹는 거다.
안 믿는 사람에게 써먹는 것은 안 믿는 사람을 하나님 앞에 데리고 와서 하나님과 관계를 짓게 하려는 거다. 그리고 믿는 사람에게는 깨달게 하는 것인데, 일에서 깨닫고, 활동에서 깨닫고, 생활에서 깨닫고, 인인연관 관계성에서 깨닫고. 이렇게 깨달아지는 삶이 되면서 ‘아,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데 내가 인인관계성에서 잘못 됐구나’ 하고 고치면 깨달은 그것이 자기 것이 되는 거고, 고치면 그만큼 자기 관계성이 넓어지는 거다.
저 자와 내가 원수가 되었었는데 내가 고치니까 저 자와 그만큼 친밀해지고 여러 사람과 원수가 됐었는데 내가 고치니까 바른 관계성이 맺어지니 관계성이 넓어진다. 그러면서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내 일터도 나오고, 일터가 있으면 돈이 들어오고. 이게 다 관계성에서 되어지는 거다. 그런데 이건 없이 말씀을 뒷전으로 밀어놓게 되면 이 사람 속에는 세상이 첫째로 들어있다. 이렇게 되면 근심 걱정 고통밖에 없다. 세상만사가 자기 목적대로 잘 되라는 법이 있느냐? 못 되기도 하고 잘 되기도 하는 거다. 그런데 늘 잘 되다가 안 되면 어떻게 할 거냐? 이러면 또 근심 걱정을 하게 된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 거다.
믿는 사람은 아무리 못 살아도 마음은 하나님께로 딱 중심을 잡아두고, 그 다음에 인인 관계성을 맺어나가는 거다. 이러면 아무리 없이 살아도 그 마음은 깨끗하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속에 세상이 들어있다면, 이걸 대표적으로 말하면 돈인데, 돈이 중심이 되어있으면 이 사람은 관계성 면에서 돈을 가지고 따지게 된다. 돈 탐을 하다가 결국은 죄를 범하고 만다. 결국은 자기가 구덩이를 파놓고 거기에 들어가는 식이 돼버린다.
믿는 사람은 직장을 구하는 것도 믿음의 사람으로 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구하는 거다. 믿는 사람은 생활 속으로 들어가서 활동을 하며 믿음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거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세상만사를 나를 위해서 움직이고 계시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면 알수록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위해서 세상만사를 긍적적이고 건설적으로 돌리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뒷전으로 두게 되면 이 사람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정적 심판적으로 돌리신다. 그래서 세상의 같은 환경 속에서 일을 하며 같이 사는데도 한 사람은 기쁘고, 한 사람은 고통이 되는 거다. 속에서 움직이는 그 마음중심이 달라지니 이렇게 되는 거다. 다 같이 주님을 믿어도 이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그 믿음의 깊이가 다른 거다. 절대로 같을 수 없다.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대하는 느낌성도 같을 수가 없는 거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이 편해야 한다. 못 사는 사람은 마음이 다 불편하냐? 거지의 마음은 다 불편한 거냐? 어떻게 보면 거지의 마음은 참 편할 거다.
사람이 육신이 건강하지 못하면 자기 앞의 진수성찬도 고역일 수가 있다. 죄에 매여 마음이 편하지 못하면 아무리 비단방석에 앉혀놓아도 가시방석과 같다. 일반적으로 사람 사는 것이 마음이 편한 것이 중요한 것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돈이 많아야 마음이 편한 줄 알고 돈 욕심에 마음이 붙어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돈을 많이 가지면 마음이 편할까? 왜 더 불안해지는 거냐? 사람이 돈이 많으면 간이 부어서 이 돈에 의해 웃는 웃음이 자기의 뇌를 야금야금 파먹는 줄을 모른 채 돈 힘에 붕붕 뜨면서 죄를 짓게 되고, 자기만이 아니라 남까지 망하게 한다. 이 돈으로 인해 얼마나 죄를 많이 짓고 고통을 겪는지?
스트레스를 푼다고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춤추고, 구경 다니고, 화풀이 하고, 아무리 이렇게 해도 스트레스는 자기 곁을 떠나지 않는다. 세상은 어디를 가든지 스트레스가 있는 곳이다. 선악과 따먹은 세상이라서 그렇다. 그런데 보통 보면 물질번영의 축복을 말하는 교회가 많다.
사람이 부요하게 살던 가난하게 살던 먼저 마음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이치부터 알아야 한다. 자기가 편하게 살 수 있는 이치부터 알아야 한다. 자기에게 눈보라가 오던, 비바람이 오던, 불볕이 오던 이 모든 세상풍파를 능히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정신력이 있어야, 그 신앙사상이 있어야 마음이 편한 거다. 여호와 하나님을 옳게 경외하면 마음이 편하게 사는 길을 잘 가르쳐 주신다.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자에게 바른 길이 제시가 되니 그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하나님의 보호 아래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우리가 세상 일반적으로 보면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한 아들이 땅을 상속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술판에 노름판에 재산을 탕진하고 몸에 병까지 얻고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아들이 있다면 어느 부모가 이런 자식에게 재산을 넘겨주겠느냐? 공장이나 회사를 하는 사람이 자식이 실력이 없으면 자기를 따라오며 기술을 잘 배운 사람에게 자기 회사를 물려주기도 한다.
부모도 부모 나름인데 육신의 부모들 중에 자손들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성공 출세를 해서 부귀와 영광을 누리는 것을 원하는 부모가 있다. 이런 부모가 많다. 신앙의 부모 중에도 세상에서 성공 출세를 해서 부귀와 영광을 누리는 것을 원하는 부모가 있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참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믿음생활을 잘 하기를 원하는 부모가 있는데, 어느 부모의 마음이 단수가 높은 거냐? 믿음생활을 잘 하길 원하는 부모, 자식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부모다.
부모가 어떤 시대적 바람을 타지 않고 그 시대적 바람을 능히 타고 넘고 이길 수 있는 자식이 되길 원한다면 얼마나 멋있는 바람이냐? 그런데 세상부모들은 세상에서 성공 출세하기를 원한다. 그러면 원하는 대로 그렇게 된다고 하면 그 다음에 그 자식은 어떻게 될까? 우리가 그걸 알아야 한다.
어릴 때부터 부모덕에 부귀 명예 영광중에 살았다면 이 자식에게 시대적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면 어떻게 살 거냐? 그러나 어느 시대적인 바람이 불더라도 신앙 믿음을 잃지 않고 굳굳히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쳤다면 이 자식은 그 어떤 시대적 바람이라도 잘 타고 넘어간다.
그러면 시대적인 바람을 발로 딛고 잘 타고 넘어가는 사람은 다 가난뱅이만 있을까? 자자손손 늘 가난한 거냐? 그렇게만 보지 말아라. 사회적인 지도자 인도자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거다. 그런가 하면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으나 늘 술이나 먹고 노름이나 하고 화투나 치고 늘 경찰서에 들락날락 하는 부모가 있다면 그 자식의 마음의 형성이 어떻게 될까? 사회에 나간들 사람노릇이 바로 될까? 굉장한 영향이 있다. 그래서 첫째는 교육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신앙의 교육이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교육이 비뚤어져 놓으면 못 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금이라도 당신이 가지신 신령하고 신비로운 것을 성도들에게 다 주고자 원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이 이 땅에 오시는 것도 자원적으로 오셨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도 자원적인데 당하셨다.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자손이란 자기 속에서 나온 씨들이다. 좀 더 올라가서 정신적인 차원으로 보면 정신과 사상이 행동화 활동화로 되어서 나온 자기의 결실이 자기의 자손이다. 신앙적인 차원으로 말을 하면 진리로 인격화 사상화 되어 나온 자기의 이력이요 업적이 자기의 자손이다. 진리 인격화 사상화로 되어 나온 나의 활동이 곧 내 후손이다.
나의 활동은 전부 나를 따르기 때문에 선악 간에 자기가 뿌린 대로 자기에게로 거두어진다. 자기가 언행심사를 한 것은 자기가 뿌린 것으로, 이것이 자기의 것으로서 영원히 자기를 따르는 거다. 그러니까 자기의 이 후손은 어디서 나오겠느냐? 다 자기가 뿌려서 나오는 거다. 이게 눈으로 보이는 이치다.
‘네 족보가 뭐냐?’ 하고 따져서 올라가면 ‘네 조상이 누구다’ 하고 나오는데, 이건 눈으로 보이는 거고, 그 다음에 신앙 사상적으로 진리신앙이 인격화 된 것으로 내가 심고 뿌린 그대로 내가 거두는 것이니 이것은 신앙적인 면에서의 내 후손들이고 자손들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뿌린 것이 옳은 것으로 의의 것으로 뿌렸다면 의의 것으로 거두는 거고, 악으로 뿌렸다면 내가 또 악으로 거둬들이는 거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이런 영적 이치를 가지고 사람들 속에 옳은 진리사상을 심어라. 옳은 것으로 심어졌으면 이게 다 믿음 안에서 네 집 식구들이 되는 거다. 우리는 보이는 이치 속에 안 보이는 이치를 심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왜 각 지역마다에 눈에 보이는 교회를 심어놨을까? 열심히 전도를 해서 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라는 거다. 이렇게 되면 주일날이 되면 가게도 다 문을 닫을 것이니 예수 믿기가 그만큼 편할 게 아니냐? 그런데 전도가 안 돼 놓으면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 목사보고도 주일날 부역 나오라고 할 거고.
우리는 이래저래 한 세상을 살 것인데 이왕이면 진리를 뿌리고, 선을 뿌리고, 의를 심어서 자기의 영광으로 거둬가야 할 것이고, 또 자기의 자손이 그렇게 많아져야 한다. 이게 아닌 죄를 심고 썩어질 것을 뿌려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의 수치스러움이 자기 뒤를 따르게 하면 되겠느냐? 믿는 사람이 아들딸 자손들에게 비진리적인 것을 심어놓아서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의 대 심판 아래 들어가 버린다면 무슨 꼴이 되겠느냐?
우리가 신앙 믿음 하는 게 눈에 보이는 것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도록 하자니 정신 사상이 옳은 것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다. 이게 교회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정신적으로 옳은 것으로 심어지는 것은 없고 비진리인 줄도 모른 채 비진리적인 것을 자꾸 심다가 나중에 사람이 완전히 저질적으로 되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거둔다면 이게 무슨 꼴이냐?
오늘날 영과 육의 부모들이 자손이 망하는 것을 원하는 것인 양 사람이 바로 되는 것은 배워주지를 않고 돈을 빨리 벌어서 부자가 되어서 돈을 물 쓰듯 하는 것을 가르치는 부모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부모의 정신이 이렇다면 우리가 판단을 할 때 희망이 없다.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인 진리이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영혼의 평안과 약속된 땅의 주인이 되는 거다. 이 자손들은 세상 마지막에 천국을 차지한다. 이 땅에서 영혼의 평안을 누린 자는 장차 천국도 차지하게 되는 거다. 이렇게 들어가는 거다. 이치는 같은 거다. 그러니까 이치를 어기지 말아라. 자기 생활 속에서도 이치를 어기지 말아라. 이치를 어기며 살면 너는 희망이 없다. 너의 자손은 볼 것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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