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25:15-20]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25편 15절-20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15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인간의 세계에는 조직된 그물이 있다. 그리고 마귀도 자기 나름대로의 조직된 그물을 쓴다. 그러니까 의인을 잡아 죽이기 위한 궤휼, 음모 이런 것이 다 그물이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그물을 선한 목적을 위해 다 이용해 버린다. 악한 것들까지도 성도를 위한 면으로 다 써버린다. 이용을 해버린다.
이런 경우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볼 수 있고, 모르드개의 사건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용을 하게끔 역사가 되는 거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건을 다 이용을 하신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자기는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의 목적대로만 살아라.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하나님의 친구인 인간 자기를 그 가운데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요나의 사건을 보면 처음에는 눈으로 보이는 면의 일이 잘되는 것으로 요나가 착각이 되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 면을 이용해서 유도작전이다. 요나를 깊은 바다 쪽으로 끌어가게 하는 하나님의 유도작전이 거기에 들어있다. 그 방편을 보면 아예 처음부터 세찬 바람을 불게 하면 뱃사람들이 ‘오늘 바람이 불어서 배가 못 뜹니다’ 할 것이니 요나는 육지에 있어서 그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요나가 보기에 처음에는 일이 잘 되는 것처럼 되어진 것은 요나가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 왔을 때 세찬 바람이 불게 해서 풍랑을 일으켜서 죽기 직전까지 가게 하려는 거다. 이것도 하나님의 그물이다. 계획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하고, 하나님의 의사성을 멀리 하고 사는 데도 사업이 잘 되고, 뭣도 잘 될 때는 이것을 축복으로 여기지 말아라. 네가 더 깊은 속으로 빠져드는 거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럴 때에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반드시 너는 죽게 되어있다. 무슨 말인가 하니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으로 나가는 자가 육의 일이 잘 되면 육이 자꾸 커지는 것 같지만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참 자기, 새사람은 완전히 쭈그러지고 망하는 거다. 그 다음에 육신적으로 눈에 보이게 오는 심판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행할 수 있는 거다.
이렇게 살면 자기 살아생전에 잘 먹고 잘 살 런지 모르겠지만 그 다음 대가 어떻게 되겠느냐? 이건 틀림없이 애굽에 팔려가게 되어있다. 그 원칙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신앙을 육의 사고방식으로 보지 말아라. 육의 눈으로 보이는 것은 이면적인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니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 ‘육적인 모든 것이 편하다. 내 마음대로 이뤄진다’ 이런 착각에 빠지지 말아라. 뜨거운 꼴을 보게 된다.
악한 자들이 의인을 죽이기 위해서 조직된 그 그물을 이용해서 악인들을 하여금 도로 그 그물에 걸려들어 죽게 만들어 버리고 의인을 높이시는 하나님이다. 이런 예를 한 마디로 말하면 모르드개 사건에서 볼 수 있다.
내가 말했지만 공부하러(주-수원 궁극교회와 안양 포도원 제일교회에서 김경형목사님과 포도원 제일교회 김정학 목사님이 신학생 및 교역자 대상으로 매 주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 오시는 나이 많으신 OOO목사님께서 어떤 송사에 걸렸는데 이에 대해 나에게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묻기에 내가 말하기를 ‘절대로 예수이름 팔아먹지 말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만 하라. 그리고 돈 욕심내지 말고 사람 바로 고쳐주는 면으로 임해라’ 라고 했는데 OOO목사님께서 내 말대로 했더니 그 재판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이기게 되었다고 한다.
상대는 변호사를 두 명이나 세웠지만 OOO목사님은 변호사를 세우지 않고 스스로 했다고 하는데 원래 판결을 하기로 했던 판사가 판결을 앞두고 갑자기 교체가 됐는데 이런 일은 극히 드문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바뀐 판사가 그 사건을 살펴본 후에 이건 뭐 상대가 워낙 악하게 나왔기 때문에 그냥 한 방에 OOO목사님 쪽으로 판결을 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체험적으로 느끼셨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볼 때 상대가 믿는 자들을 향해서 워낙 불법적으로 나오면 하나님께서는 일반법을 들어서라도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그 증거를 보여줄 수도 있는 거다. 물론 믿는 사람이 송사에 걸리면 신앙이 깊다면 물질적인 모든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신앙으로 할 수도 있는 거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법 앞에 서더라도 신앙 믿음에 손해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 교인들도 신앙 믿음으로 바로 살려고 하는 데도 가정적으로나 사업적으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궁지에 몰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 나는 부자가 되는 면으로 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어떻게 합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힘이 듭니다.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불쌍히 보셔서 너무 어려운 가운데 두지 마시고 그 성도에게 하나님 당신의 원하심대로의 하나님이 계심을 역사적으로나마 맛이라도 보여줘서 힘을 얻게 해서 앞으로 나가도록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한다. 믿음의 성도들에게 그런 맛을 보여주는 것을 성경에서도 본다.
그러나 사건에 휘말렸을 때 신앙 믿음을 버리고 그 사건만 해결되기를 바라는 교인을 위해서는 ‘하나님 아버지,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에게도 하나님의 얼굴이 있고 우리 주님의 기본구원의 본전이 있는데 저 성도를 저렇게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사건을 부딪치게 하시든지 어떤 방편을 쓰시든지 바로 서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한다. 여기는 울고불고하는 사건이 들어가는 거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하나님 아버지, 너무 세게 때리면 안 되니까 살짝만 때려 주십시오. 그래도 안 되면 그 때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라고 한다.
믿는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육신의 생활의 어려움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거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바로 하고자 하는 그 신앙은, 하나님을 붙잡는 그 마음은 더 강하게 나와서 그걸 다 이기고 나가는 성도는 이제 자유롭다. 그 계단만 올라서면 자유롭다. 그 다음에는 쉽게 쉽게 이겨나갈 수가 있다. 그런데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죽네, 사네’ 하면 못 일어선다. 앞으로도 자꾸 큰 파도가 몰려올 텐데 못 일어선다. 작은 파도가 왔을 때 일어설 줄 알아야 큰 파도도 이길 수 있다.
이 세상이란 세상은 그물이 죽 깔려있다. 유혹물도 많고, 미혹물도 많고, 함정도 많다. 인간이 물욕이 많으면, 돈 욕심이나 세상에 대한 욕심이 많으면 그런 그물에 걸려들게 되어있다. 반드시 걸려들게 되어있다. 돈 많은 사람을 보면 사귀고 싶으냐? 그 돈을 가지고 싶으냐? 그게 부러우냐 그 말이다. 그런 거 부러워하지 말아라.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면 너는 걸려들게 된다.
돈이 적으면 적은 대로 살아나간다. 돈이 많다고 해서 돈이 쌓이느냐? 아니다. 많으면 또 많이 나간다. 그렇다면 생각을 해봐라. 돈이 많아서 그게 나가는 게 피곤하겠는지, 돈이 적어서 그게 나가는 피곤하겠는지? 이치적으로 생각을 해 봐라. 이상하게 돈이 많아지면 사람이 더 피곤해져 버린다. 왜 그럴까? 돈이 한 푼도 없다면 아예 방 안에 가만 들어 앉아있으면 안 피곤하다. 돈이 있으면 자꾸 밖으로 나간다.
인간이 물욕이 많으면 그물에 걸려들기 십상이다. 또 편하게만 살려고 하면 걸려든다. 또 영의 눈이 어두우면 걸려든다. 영의 눈이 어두우면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에 걸려들게 되어있다. 그런데 자기가 물욕적 정신적 그물에 걸려들었는데도 그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 ‘누구의 축복을 받으면 부자가 된다더라. 안수 전문가를 찾아가라. 별미축복 대성회가 있다. 병자여, 다 오너라. 방언에 신비주의’ 하는 이게 다 그물이다. 이런 그물이 빠져들면 사람 꼴이 안 된다. 사람 꼴이 안 되면 집안 꼴이 안 되는 건 빤한 거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선택해서 이 의를 자기 것으로 인격화 시키지 못하면 이 사람은 악한 정신적 사상적 그물에 걸려들게 되어있다. 빠지게 되어있다.
믿는 사람이 세상 썩어질 것을 선택하는 자유 아닌 자유는 가지면서도 생명과, 영생을 갖는 면에서 자유를 행사하지 못했다면 이 사람은 자기의 어리석은 자유로 인해 영원히 자유하지 못하는 그물에 걸려들게 된다.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하는 눈은, 신앙하는 눈은 정신적 사상적인 죄와 사망적인 그물을 볼 줄 알기 때문에 죄를 짓게 하는 그물을 보게 되면 얼른 빠져나오게 된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로구나’ 하고 얼른 빠져나온다.
16절: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세상 사람들은 보통 어떤 때 외롭고 괴롭다고 하느냐? 왕따를 당하면 외롭느냐? 진리성도 다윗도 그래서 ‘주여 저 놈들이 나를 왕따 시키고 다 나를 버리고 도망을 가서 내가 외롭고 괴롭습니다’ 라고 하는 거냐?
성도가 보통의 경우에 왜 외롭고 괴로우냐? 하나님이 떠나가면 외롭다? 자기의 주위에 성도들이 없으면 외롭다? 자기와 함께 하는 자가 없으면 외롭다? 그러면 다윗은 왜 외롭고 괴로운 거냐? 하나님이 떠나가서 외롭다? 자기의 주위에 성도들이 없어서 외롭다? 자기와 함께 하는 자가 없어서 외롭다? 다윗이 어떤 경우에 외롭다고 했을까? 하나님이 떠나갔기 때문이다.
다윗의 경우는 하나님이 떠나가면 외롭다고 하는데 성도인 현재 자기는 어떤 때 외로우냐? 하나님이 떠나가면 외로운 건지, 아니면 친구들이 떠나가면 외로운 건지? 여기에서 자기의 신앙을 바로 잡아야 한다.
다윗이 ‘괴롭사오니’ 라고 했는데 일반사람들은 어떤 때 괴로우냐? 몸이 아프면 괴롭다. 또 어떤 때 괴로우냐? 슬플 때 괴롭다. 또 내 뜻대로 안 되면 괴롭다. 그런데 성도다윗의 경우는 느낌이 좀 다르다. 다윗의 경우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 괴롭고, 하나님이 떠나가시면 괴롭고,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면 괴롭고, 죄를 지으면 괴롭고, 또한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는데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는 성도를 볼 때 다윗의 입장에서 그게 참 괴롭다. 그러면 오늘날 교인들은 주로 어떤 경우에 괴롭다고 하느냐?
17절-20절: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다윗은 외롭고 괴로움을 당할 때 기도를 했는데 무엇이라고 기도를 했느냐? 16절에 보면 한 마디로 자기를 긍휼히 여겨달라는 거다. 자기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하는 것은 그 마음에 근신 걱정이 많다는 거다.
그렇다면 성도다윗이 무슨 근심 걱정일까? 육신 잘 먹고 잘 사는 면에 근심 걱정일까, 영혼구원에 대한 근심 걱정일까? 무슨 근심 걱정을 했을까? 영혼구원에 대한 근심 걱정이다. 자기의 영혼구원에 대한 근심 걱정을 해 본 사람이 있느냐? 생활이 어려워도 자기의 영혼구원, 자기 가족의 신앙 믿음에 대한 근심 걱정은 참 옳은 기도다.
우리 성도들은 일을 하고 생계유지를 해야 한다. 그런데 마음의 위주가 자꾸 먹고 마시는 면의 근심 걱정 쪽으로 빠져서 ‘뭘 먹고 살까? 뭘 마실까?’ 이렇게 되면 자기의 영혼은 그 물질적 생각에 포로가 돼버린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자기가 세상의 포로가 돼서 자유가 없어진다. 그 이치를 알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사람인지라 생활의 염려 걱정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지만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 내 마음이 자꾸 먹고 마시는 쪽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이거 안 빠져 들어가게 나를 좀 붙잡아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하라. 이렇게 기도한다고 해서 ‘네가 생활도 어려운데 먹는 건 구하지 않으니 굶어죽어라’ 그런 법은 없다. ‘안 빠져 들어가게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지혜도 주실 수 있고, 또 누구로 통해서든 그런 생각에 안 빠지도록 하나님께서 해 주신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를 보면 먹고 사는 문제에 많이 빠져버린다. 이러면 풍부하게 되면 그 풍요에서 마음이 빠져나올 줄을 모르게 되고, 그 풍요가 나중에 가난으로 되면 또 그 가난에 빠져서 나올 줄을 모르게 된다. 어쨌든 사람 자체가 그 마음이 물질에 빠져버리면 인간이 못 쓰게 돼버린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영혼구원에 대한 근심 걱정은 모르고 먹고 사는 생활문제에 대한 근심 걱정을 한다. 그리고 기독교인들도 의식주 문제 때문에 신앙을 갖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건 신앙이 아니다. 육의 문제, 가난한 것을 긍휼이 여겨서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또 어떤 자들은 ‘내가 백 억짜리 건물을 지어서 하나님께 바치려고 하는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니 하나님, 내가 서원을 해 놨으니 내 기도를 들으셔서 백 억짜리 건물을 짓도록 도와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기도 하는데 이거 못 쓴다. 이러면 사람이 피곤하고 더 못써져 버린다.
일을 크게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하려고 하면 사람이 더 피곤해져 버린다. 그러니 하나님에게 ‘내가 무슨 일을 하겠습니다’ 이런 소리 하지 말아라. 자꾸 일을 하겠다고 해서 많은 일을 주면 그 사람은 나중에는 피곤에 빠져버리고 병들어 버린다. 그것보다는 ‘하나님 아버지, 나에게 지혜를 주옵소서. 사는 동안에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 앞에 내가 바로 살고 모든 세상만사를 겪는 동안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많이 이루게 해 주옵소서’ 라고 하면 이 일 속에는 일도 있고, 사람도 있고, 다 있는 거다. 그런데 이게 아닌 자꾸 일을 달라고 하면 그만 하나님이 일을 주면 그 일에 푹 빠져서 빨리 죽게 된다.
다윗이 16절에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한 후에 17절-20절의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면 못 돼 먹고, 못나고, 못하고, 무지 무능한 자칭 잘난 자기를 바로 알고 그런 자기를 자기가 시인을 하고 자기 부정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인간 자기가 하나님만큼 지식이 있느냐? 하나님만큼 고차원적인 도덕성을 가졌느냐? 하나님만큼 능력을 가졌느냐? 인간 자기는 무지무능하면서도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제 잘난 멋에 살고 있더라. 세상 사람은 다 그렇다.
자기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하는 다윗의 기도 속에는 ‘정말 나는 미련하고 지혜가 없습니다. 정말 나는 영의 눈이 멀었습니다. 정말 나는 교만했습니다. 정말 나는 내 자신이 미련해서 나를 속이는 줄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라고 하며 그런 자신을 책하는 마음이 들어있다.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는 하나님 앞에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 은혜를 못 받는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지 말고 반드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놓고,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자기를 비교를 하라. 사람과 비교를 하게 되면 교만해서 못 쓴다.
자신을 예수님과 비교를 하면 자기는 잘난 구석이 하나도 없다. 자기가 아무리 눈이 커도 그 눈이 신령계를 보느냐? 신령계를 못 보는 눈이다. 자기 눈이 아무리 눈이 예뻐도 그 눈이 신령계를 보느냐? 신령계를 못 보는 그 눈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하자면 그렇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자기를 예수님 앞에 세워놓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따지고 또 따지고 ‘내가 이 면이 못 자랐구나. 이 면을 내가 몰랐구나’ 하며 자꾸 만들어져 올라가야 한다. 그러지 않고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해서 ‘나는 쟤보다 키가 크고, 눈도 크고, 잘 생기고’ 하는 건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교만한 자기를 불속에 집어넣었다 꺼내면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은 아무리 못 생겼어도 하나님이 만드신 거다. 하나님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만든 거다.
젊었을 때는 잘 모른다. 껍데기 번지르 한 걸 예쁘다고 하는데 나이 들면 다 예쁘게 보인다. 사람은 다 예쁘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보실 때 다 얼마나 예쁠까? 흑인들을 볼수록 하나님께서 그 피부색을 어쩌면 저렇게 만드셨는지? 피부가 흰 사람도 있는데 검은 색과 흰색을 비교해 보면 어느 쪽이 더 튼튼해 보이느냐? 검은 쪽이 튼튼해 보인다. 어쨌든 사람마다 다 하나님이 만드셨다. 보기 싫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자기를 주님과 비교를 해서 자기를 만들어 갈 줄 알아야 한다. 인간과 비교하지 말아라. 인간을 세워놓고 자기를 비교하지 말아라. 우리는 다윗과 같은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게 옳은 기도다. 이런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다. 반드시 응답이 들어있다. 약속으로 되어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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