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25:22-26:2]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5편 22절-26편 2절.
25편 22절: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26편 1절-2절: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25편 22절: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환난에서 구속해 달라. ‘구속’은 뭐고, ‘구원’은 뭐냐? ‘구원’의 일반적인 뜻으로 어려운 가운데서 건져주는 것.
헤엄을 못 치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타로부터 건짐을 받아야 구원이 된다. 그런데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구원이 된다. 다른 사람은 빠져 죽는데 헤엄치는 실력이 있으니까 자기 스스로 살아난다. 그런가 하면 물에 빠진 사람이 건짐을 받았는데 그 후에 수영연습을 잘해서 나중에 또 다시 물에 빠지게 되면 이때는 스스로 살아나오니까 이것도 구원이다.
신앙 면에서는 죄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 또한 모르는 데서 알게 해주는 것도 구원이다. 앎으로서 안 속고 나쁜 데로 안 빠지고. 그러니까 자기가 아니까 그만큼 안 빠지고 휩쓸림을 받지 않으니 죄를 안 짓게 된다. 이것도 구원이다. 모르면 빠진다. 미련하면 빠진다. 미련하면 죄 짓고, 못 깨달으면 죄를 짓는다. 이건 구원이 아니다. 앎으로서 지혜로워지면 자기가 악에 안 빠지고 구원이 되는 거다. 그러니까 모든 면에서 자기가 깨닫는 것이 많다면 자기에게 그만큼 유리한 거고 생산적이고, 신앙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많이 닮는 영생적인 거다.
‘구속’은 구원해 달라는 말과 같다. ‘환난 때에 나를 구속하소서’ 라고 하는 것은 환난 때에 자기를 구원해 달라는 거다. 그러면 이 말이 환난을 안 당하게 구원해 달라는 말인지, 아니면 물속에 있으면서도 수영을 잘 하면 물에 빠지듯이 환난 속에 있으면서 환난 속에 빠지지 않고 그 환난을 이기고 나올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건지? 환난이 왔을 때 그 환난을 물러가게 해 달라고 하는 것과, 자기가 환난 가운데 있으면서도 거기에 안 빠지고 죄를 안 짓고 안 넘어지고 거기서 훈련 연단을 받고 튼튼하고 강한 사람으로 나오게 해 달라고 하는 것과는 다른 거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쪽이 실력이 있고 강하고 값진 거냐? 어느 것이 더 멋있게 들리느냐? 후자다. 풍랑을 잔잔하게 해 달라고 하면 이건 약해빠진 거다. 그 가운데서 깨닫고 영특한 사람으로 실력자로 나오는 이게 멋있는 거다.
군인들이 전쟁을 한 번 겪고 두 번 겪고 세 번 겪고 하면 해가 질 때는 적군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밝을 때는 적군들이 뭘 하고 있는지 이걸 빤히 안다. 전쟁에 한 번 나가고 두 번 나가고 여러 번 나갈수록 싸움에 능통해지는 거다. 적을 죽이는데 실력이 있는 거다. 그러면 계급도 올라가고 연봉도 올라가는 거다. 그렇게 해서 싸울 적마다 안 죽고 나오면 영웅이 된다. 별을 달게 된다. 이게 실력 있는 스타다. 그러나 전쟁에 한 번도 안 나간 군인은 그런 걸 전혀 모른다. 이런 군인이 전쟁터에 나가면 죽기 십상이다.
내가 군대 있을 때 보니까 젊은 사람이 군사관련 대학을 나와서 바로 소위로 들어오는데, 그 때 군대에 특무상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들은 나이도 지긋하고 6. 25 전쟁도 겪은 군대경력이 많은 분이다. 그러니 이제 막 들어온 젊은 소위가 계급상으로는 높지만 특무상사에게 함부로 말을 못한다. 그러니 죽으려고 한다. 싸울 줄을 모르는 군인은 아무리 계급이 높아도 그게 무슨 소용이냐? 군인이라고 하면 싸우는 데는 도가 터야 한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보면서 신앙적으로도 생각을 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죽음을 각오하는 게 들어있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속화된 정신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뭐든지 잘 된다고 하고 있으니 이건 아예 그 정신부터가 완전히 썩어빠진 거다. 이게 바뀌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에게 왜 환난을 보내는 거냐? 첫째는 영능의 실력자로 만들어 주려고, 두 번째는 ‘이래도 네가 못 깨닫겠느냐?’ 이게 들어있다.
테레비에서 경마 하는 걸 보면 말이 출발선에 가만히 서 있다가 기수가 말의 엉덩이를 채찍으로 때리면 말이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말이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도 더 빨리 달리라고 기수가 계속해서 말의 엉덩이를 때린다. 이걸 신앙의 이치로 보면 성도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때리는 경우도 있고, 잘 믿어나가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보시고 ‘면류관을 타게 해야 되겠다’ 하고 남보다 더 높이 올리기 위한 뜻으로 경책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나를 구속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자기를 건져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죄 안에 빠져 있다. 죄의 노예로 되어있다. 사망권 안에 들어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이걸 전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걸 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뭐 안에 있는 거라? 죄 안에, 사망 안에.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은 ‘너희들은 이제부터 사망 아래, 죄 아래, 선악과 따먹은 차원에서 살지 말고 하나님 공부를 많이 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그 차원으로 올라오너라’ 하는 것이니 이렇게 되는 것이 구원이고 구속이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음이 되면 성질도 성격도 사망, 즉 죽는 자리에 있지 않고 사는 자리로 올라간다. 이게 영생이라. 이게 구속이라. 이게 구원이라. 물에 빠진 사람이 물속으로 쑥 들어가면 죽는다. 물에 빠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건져주지 않으면 결국은 허우적거리다가 그대로 죽는다. 그러니까 물속으로 더 내려가기 전에 물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그걸 물 위로 올려야 한다. 예수 믿는다는 게 이런 것과 같은 거다. 깨달음을 받는다는 게 이런 거다.
올라가는 게 좋으냐, 내려가는 게 좋으냐? 올라가는 게 좋다. 올라가면 신이 난다.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면 답답하다. 캄캄하다. 죽는다. 사람이 깨달아지면, 알면 알수록 자기에게 평안이고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올라갈수록 높으니까 아래의 것을 훤히 다 볼 수 있는 거지 땅속에 처박히면 어떻게 보겠느냐?
26편 1절: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다윗 왕이 누구의 말씀을 붙잡고 움직이지 않고 완전하게 살았다는 거냐?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고 그 말씀에서 요동치 아니했으니 이제 누구의 판단을 바라는 거냐? 세상 사람들이냐? 하나님의 판단이다.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안 믿는 사람이 판단을 하게 되면 정확하지 못하고 자기 감정대로, 자기 기분대로 제가 표준이 되어서 판단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절대 정확하다. 우리 신앙의 성도들은 그 신앙이 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판단이 되어야 한다. 목사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자기 감정이 아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판단이 될 수 있도록 전해야 한다.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예수님을 믿는 자기를 마귀가 판단하도록 만들면 안 된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판단을 하도록 하면 안 된다. 이러면 이 사람은 그만큼 낮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판단이 고차원적인 판단이요 정확한 판단이다. 예를 든다면 내가 주일날 교회에는 나가지 않고 안 믿는 사람에게 가서 그들을 막 떠 받들어 주면 안 믿는 그 사람이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을 하겠느냐, 나쁜 사람이라고 판단하겠느냐?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옳다고 판단을 하시겠느냐?
다윗이 하나님을 향해서 자기를 판단해 달라고 했는데, 만일 오늘날 내가 하나님께 ‘나를 판단해 주옵소서’ 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너 이놈, 나쁜 놈아’ 그럴까, ‘그래, 넌 참 좋은 사람이다’ 라고 하실까? 믿는 사람이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자 한다면 이건 그 마음이 먼저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기준이 되어서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거다.
신앙사상이 사람기준에 맞추게 되면 너는 사람에게 코가 꿰이게 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에서 안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그들을 리드하고 인도하고 사람의 차원을 높일 줄 알아야지 깨닫지를 못해서 안 믿는 사람에게 코가 꿰여서 따라간다면 하나님 아버지가 보실 때 보기가 좋겠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코가 꿰이느냐? 뭔가 잘못돼 있으니까 코가 꿰이는 거다. 교회에 왔다 가면 그만큼 집안일도 열심히 하고, 사람이 부지런하고, 남편의 마음이 다른 데로 안 가게 맛있는 것도 해서 먹어보라고도 하면 얼마나 좋아하겠느냐? 그리고 아내가 마음이 자꾸 밖으로 나가고 밤에 자꾸 돌아다니려고 한다면 남편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헤어지면 그만이냐? 첫사랑을 찾아야 한다. 인간에게는 첫사랑, 교회에서는 처음사랑.
2절: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본 2절은 1절의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라고 한 것의 연장선으로 세상 사람들은 인간의 완전을 인격에 두지 않고, 또 깨닫는 면에 두지 않고 먹고 마시고 부자로 살고 하는 돈에 두고 있다. 돈에 집중이 돼 있다. 그래서 ‘누가 돈을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하는 것에 기준을 두고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를 하더라.
안 믿는 세상에서는 사람이 인격적으로 정확하게 바로 서는 기준이 없다. 일반종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적으로 흐르는 교회도 그 기준이 없다. 왜 그런가 하니 성경을 끌어다가 세상부자로 사는 그 면에 이용을 하니까 기준이 없는 거다. 그래서 자꾸 ‘부자 부자’ 하는 거고, 또한 부자를 높이 보는 거다.
그러면 부자를 높이 보는 것이 사람을 높이 보고 있는 거냐, 부자(돈)를 높이 보고 있는 거냐? 부자다. 세상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도 부자를 높이 보고 있는 것이니 그 마음 정신이 부자를 넘어설 수 있느냐? 아니다. 부자 밑에서 사는 거다. 인간은 돈보다 훨씬 올라서야 그 돈을 이용하겠는데 돈 밑에 깔려있으니 사람 꼴이 되겠느냐? 돈도 세상이고 세상 것인데, 성경에 보면 ‘세상을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을 하고 땅에 충만하라. 편만하라’고 했는데 사람이 돈 밑에 깔려서 돈을 바라보며 그 돈에게 큰 절을 하고 있으니 사람 꼴이 되겠느냐?
예수 믿는 우리는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돈에 욕심을 품지 말아라. 그러면 너는 망가지는 사람이다. 너는 돈 때문에 죽는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많이 준다면 이 사람은 그 날로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안 주는 거다. 너를 살리기 위해서 안 준다 그 말이다. 이해가 되느냐? 그래도 주면 좋겠느냐? 자기가 죽는 데도?
세상 사람들은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나 이해타산 평가성의 수준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박사증이 있다고 해도 물질적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의 생각에도 높이가 있는 건데 이 사람의 생각은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물질을 뛰어넘지를 못한다. 예수 믿는 것은 그걸 훨씬 뛰어넘는 거다. 그 위에서 바라보는 거다.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이 훤하게 보이는 거다.
진리성도 다윗 왕은 완전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인생행로의 지침서, 인간이 완전을 이룰 수 있는 지침서로 삼고 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자신이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지침서로 삼고 살고 있다. 다윗은 이렇게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자기를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살고 있다. 이게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다. 이게 오늘날 우리 인간이 사는 신앙정신이다. 우리 모두는 인간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의 소원 목적대로 사는 것이 말씀대로 사는 거고 당연한 거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마음이 요동하면 몸으로도 죄를 짓게 된다. 그러니까 몸이 요동치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몸은 마음을 따라 움직이는 거니까 생각 마음이 요동치 않아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요동치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진리,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하고, 그 말씀을 붙잡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를 말씀으로 인격화 시켜야 한다. 질적으로 말씀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요동치 않는다.
예수 믿는 사람도 보면 마음이 ‘이래볼까, 저래볼까?’ 하는 게 있다. 이건 말씀으로 인격화가 안 된 거다. 인격화 된 사람은 이미 판단이 내려져 있다. 우리 성도들이 세상적으로 ‘이래볼까, 저래볼까?’ 할 때 주님만 딱 붙잡으면 마음이 요동치 않는다. 마음이 요동을 하면 약해져 버린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정신을 만들지 못하면 이방 불신자들처럼, 세상 사람들처럼 요동을 하는 인간이 되고 만다. 중심이 없다 그 말이다. 사람 사는 게 중심의 정신이 없다.
현재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요동하는 인간으로 되어있는데, 이런 상태의 인간이면서도 누가 자기에게 ‘내가 너를 못 믿겠다’ 하면 ‘아이, 한 번 믿어봐라’ 한다. 마음이 이미 세상으로 요동이 되어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모르니까 ‘너 왜 나를 못 믿느냐? 나만 믿어라’ 라고 하는 거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방 불신자들이 아무리 착해도 절대로 그 사람의 마음을 믿어주면 안 된다. 그 사람이 아무리 정직하게 하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사건을 이리 저리 돌리면 그 마음대로 되지를 않는 게 세상이다. 그럼에도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런 사람에게 속았다면 안 믿는 사람이 불쌍한 거냐, 그 말을 믿어준 예수 믿는 자기가 불쌍한 거냐? 자기가 불쌍한 거다. 마음이 요동하는 기독자는 그 신앙상태가 불신앙 상태가 된다.
1절: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이 말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나를 판단해 주소서’ 그 말이다.
우리는 의지하고자 하는 그 성질도 알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해야지’ 할 때 무엇 때문에 의지하는 거냐? 부자 되려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싶어서? 이게 있는 거다. 시험 치는 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느냐? 뭐라고 기도를 하느냐? 시험에 붙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 자기가 공부를 안 했어도 시험에 붙기를 원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공부를 안 한 사람에게 답을 가르쳐 준다고 하면 이건 하나님도 불법자가 되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성질도 판단을 해야 하는 거다. 뭔가 하니 ‘인간 자기의 세상살이의 소원 목적을 들어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게 있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좋아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그러니까 하나님을 잘 살펴서, 하나님의 마음을 살살 건드려서 하나님께서 만능의 능력으로 나 좋도록 해 주도록 해야지‘ 이거다. 이건 사기꾼의 심보다. 그래서 대부분 보면 하나님께서 소원 목적하시는 그 뜻대로 의지하는 게 아니라 인간 자기편에서 주관성을 가진 의지성이 많다. 인간 제 욕심대로 해 달라는 게 많다는 말이다. 이거는 신앙이 아니다. 그러면 다윗의 마음도 이런 마음이냐?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인간 자기를 정평 정가하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인간 자기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후에 그 말씀대로 바로 살았는지, 바로 만들어졌는지 이 판단을 한다 그 말이다.
지금 판단을 받는 사람도 있고, 앞으로 판단을 받을 사람도 있다. 그래서 어린 학생들은 말씀대로 바로 살아야 한다. 반드시 판단 받을 날이 온다 그 말이다. 책임추궁을 당할 날이 온다 그 말이다. 어릴 때부터 용돈을 받는 것에서 십일조 떼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데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다 보니 그것마저도 까먹는다면 공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사건 환경을 통해서 칠 배나 더 뜯어가게 하신다.
그런 식으로 살다가 하나님께서 ‘내가 물질 주고, 시간 주고, 사건 주고, 사람 주고, 모든 것을 주었는데 그 이자를 내어 놓아라’ 하면 어떻게 할 거냐? 끔찍하지 않느냐?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것도 제대로 안 내면 더 붙여서 내는 게 있지 않느냐? 이런 게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는 거다.
진리성도 다윗 왕은 여호와 하나님께 자기를 판단해 달라고 하는데, 이는 인간 자기편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했지만 그것이 바로 됐는지, 바로 안 됐는지 하나님께서 판단을 해 달라는 거다. 그 신앙이 얼마나 높으냐? 지금 우리는 다윗의 이런 신앙의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말하자면 ‘잘못된 것이 있으면 지적을 해 주십시오. 고치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고 있느냐? 이런 겸손한 신앙을 가진 다윗 왕이더라. 그래서 다윗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거다.
사람들은 자기도 알고 남도 아는 죄를 지었음에도 누가 그 죄를 지적해서 ‘고칩시다’ 하면 그만 자극을 받아서 인상을 쓰고 싸우려고 덤벼든다. 정치인들도 이런 걸 많이 볼 수 있다. 맨 거짓말, 흉보는 말만 하려고 한다. 우리 같으면 누가 어떤 말을 해도 영의 눈을 가지고 정신 사상의 질적인 면을 보기 때문에 ‘죄다. 아니다’ 하고 판단을 하는 거지만 이방세상은 이렇게 보는 눈이 없다.
여호와께서 나의 잘못에 대해 판단을 하시고 징계를 하실 때 ‘나에게 잘못된 것이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 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복 받을 사람이구나. ‘나는 잘 했는데 왜 두들겨 팹니까?’ 그 소리가 안 나와야 한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도 ‘영적인 면에서 신앙사상이 잘못된 것을 고칩시다’ 하면 이걸 별로 크게 여기지를 않는다. 특히 이런 일이 목사님들 모이는 곳에 가면 흔히 보인다. 강사목사가 ‘제발 예배당에 꽃병 같은 거 놓지 말아라. 십자가 떼어버려라.’ 오래 전부터 이 말을 했는데도 몇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갖다놓고 꾸미고 있다. 집에서야 꽃병도 갖다놓고 할 수 있는 거지만 어느 교회에 가 보니까 강대상이 아예 수목원이라. 삼림이라. 이게 무당집이지 교회는 그런 게 아니다.
내 말을 듣고 당장 뜯어내는 목사도 있는데 ‘너는 짖어라. 뒷집 개가 짖느냐, 앞집 개가 짖느냐?’ 하는 식으로 나가는 목사도 있다. 안 고치겠다 그 말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방우상의 신당을 만들어 놓은 게 있는데 그것과 똑같은 현상이다. 그렇게 꾸며놓는 거기에는 무슨 말을 해도 이방신관이 들어있다. 반드시 들어있다.
성도의 마음속에 말씀만이 들어있어야 되겠는데, 하나님만이 들어있어야 되겠는데, 진리이치 생명의 말씀만이 들어있어야 되겠는데 그게 아닌 세상 것을 어떻게 예쁘게 하려는 게 마음속에 들어있으니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거다. 마음에 든 것이 행동으로 다 나타나는 거다.
표면적 눈으로 나타나 보여지는 면만을 주장하는 사람은 죽음 저 너머 영원 궁극적 영적인 면에서 옳은 것을 인정을 안 한다. 이 말이 어려우냐? 세상 사람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좋다. 나쁘다’ 하는 사람은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이 알아주는 옳은 것을 인정할 줄 모른다 그 말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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