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26:10-27:1]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열려라 에바다 2021. 9. 1. 08:04

26편 10절-27편 1절.

 

26편 10절-12절: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내 발이 평탄한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27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26편 10절: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일반적으로 볼 때도 뇌물을 주고 받는 손은 아주 악한 음모의 성질들이 들어있다.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해내고, 사람을 고통과 멸망으로 빠뜨린다.

 

신앙 면으로 볼 때 뇌물을 주는 손은 비진리적 세상적 사역의 성질이 들어있다. 이런 경우 하나님 보시기에 뇌물의 손이 된다. 그러니까 신앙 면에서의 ‘뇌물을 주는 손’이란 쉽게 말하면 ‘세상축복 축복’ 하는 게 들어있다. 내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는데 그 헌금을 세상소원 목적으로 드리는 거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뇌물이 된다. ‘내가 하나님께 이걸 드릴 테니 잘 봐 주십시오. 내 일이 좀 잘 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건 뇌물이라.

 

또 선물이 있는데, 신앙 면에서의 선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심에 대해 감사하고, 사람의 마음이 고쳐지면서 하나님 앞에 옳게 바르게 살게 해 주심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거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드리게 되면 예물이 되고, 사람에게 주게 되면 선물이 되는 거다.

 

‘뇌물, 예물, 선물’ 하는 것은 사람 마음속에서 결정이 되는 거다. 일반적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주게 되면 이건 선물이 된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좀 봐 주십시오’ 하고 주는 것은 뇌물이 된다. 하나님 앞에서는 ‘당신의 은혜를 받고 보니 정말 옳습니다. 깨닫게 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에 사람에게 주게 되면 선물이 되고, 하나님께 드리게 되면 예물이 된다.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게 되면 은혜를 또 받을 수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우리가 신앙 면에서의 영적 살인을 알아야 하겠는데, 일반적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을 친구가 와서 데리고 가서 뭘 사 먹이고, 오락실에 가고 해서 공부할 시간을 빼앗아 간다면 그 학생은 나쁜 물이 들게 되어서 그 정신이 망가지고 실력이 없으니 장래도 망가진다.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격살인이다. 신앙 면에서의 영적 살인은 세상정신을 넣어줘서 그의 영적인 장래를 망치게 하는 거다.

 

성도들은 자기의 영혼에 대해 육신문제보다 더 진하게 느껴야 할 텐데 이걸 별로 잘 못 느낀다. 자기의 피부를 꼬집으면 아픈 것은 느끼는데 영혼 면이 망하는 것, 영혼 면이 고통스러운 것에 대해 못 느끼는 사람은 분명히 영적인 면이 둔하다. 이러면 눈에 안 보이는 면에 대해서는 별로 실감을 못한다. 이런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행복 영광성 추구성으로 되어있지 눈에 안 보이는 면이 망가져 들어가는 것은 못 보는 사람이다. 성도들을 영적 살인성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은 예수이름을 부르면서 열심히 일을 하는 면으로 내몰면 된다.

 

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는 부자라. 옷을 잘 입었다. 자기는 학식이 많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헐벗었구나. 불쌍하고 가련하고 처절하다고 했다. 옷은 잘 입었는데 아는 면으로 들어가서 빈 깡통 같은 사람이 있다.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보석반지는 잔뜩 끼었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텅 빈 사람이 있다.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내가 많이 듣기도 하지만 교인들 숫자가 많은 교회를 보면 원목사가 있고 부목사가 있는데, 원목사가 부목사에게 설교를 짜라고 하고 주일날 원목사가 그것을 가지고 설교를 한다고 한다. 교인들은 이걸 모른다. 그러니 그 교회 교인들은 불쌍하고 처절한 거다.

 

영적 살인자들은 거짓 종들이고 사단 마귀의 손에 붙들린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성도들의 신앙성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역위주 사역목적으로 몰고 간다. 그러니까 종교적 행동 활동 면으로 막 몰고 가는 거다. 그 면으로 시간을 다 날리게 해 버린다. 그렇게 해서 영인성장을 못하게 하니 이것이 영적 살인이다. 그러면 이런 자들이 성경공부를 하면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 일반사회 윤리 도덕적인 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가르친다. 그러니까 성경문자 속에 숨어있는 영적 이면적 은밀한 뜻은 못 깨닫는 거다. 성경은 그런 게 아니다.

 

11절: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그러니까 성도다윗은 자기의 완전성을 어디에 두었느냐? 자기가 완전해지는 것을 어디에 두었느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두었다.

 

인간이 자기의 인격의 완전성, 도덕성의 완전성을 어디에 두어야 옳은 것이냐? 도덕성은 인격성에서 되는 말인데, 일반세상은 자기의 인격의 완전성을 깊이 명상을 하고 도를 닦는, 그러면서 자기를 내적으로 수양을 하면서 외모적으로 건전한 것에 두고 있다. 그러나 아담 타락 이후로 모든 인간은 아무리 도를 닦아도 거기서 거기다. 아무리 도를 닦아도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그 차원밖에 안 된다.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모든 인간은 인간 자기의 완전성에 대해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발상을 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불가능한 것이다. 또 그런 생각을 할지라도 인간이 완전하게 될 수 있는 요소를 찾는 것도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 하나님의 인도가 아니면 인간으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방 종교인들은 인간의 완전함을 어떤 신비스러운 일들로부터 찾으려고 한다. 만화 같은 얘기로 한다면 하늘을 난다든지, 축지법을 쓴다든지, 장풍을 쓴다든지, 손끝에서 불이 나온다든지 이런 것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면 이런 일을 한다고 해서 인간이 완전하게 된 거냐? 작두 위를 걷는다고 해서 그게 사람이 완전한 거냐? 얼마나 허황된 생각인지 모른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이건 미쳤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선악과 따먹은 세계는 다 미친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이 머리를 하늘로 두었으니 그 생각이 고상한 도덕성적으로 들어야 할 텐데 머리를 하늘로 두었음에도 하늘의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관심도 없고 항상 땅에서 생산되고 땅에서 소산이 된 것을 목적으로 하고 사니 자연적 본능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거다. 여기에서 더 나가면 이제 악행이 되는 거다. 일반적으로 볼 때도 그렇고, 잘못된 세상 속화된 교회 안에도 그런 것과 비슷한 짓들이 많다. 말하자면 자칭 만능의 능력자들이 많다 그 말이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하나님처럼 닮아나가는 것. 이게 인간의 완전이요 신앙의 완전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건 없고 무슨 희한한 일을 하는 것을 신앙의 완전처럼 보고 있으니 예수 믿는 신앙이 얼마나 한심한 종교가 되어버렸느냐? 그러니 일반세상 사람들이 교회 안의 인도자들을 보고 ‘저 정도면 나도 해 먹겠다’ 하는 거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종이 된 세계가 거짓 종들의 세계다. 이런 자들은 그걸 합법화시키기 위해서 기독교 제도를 타는 거다. 사상은 불신사상인데 제도는 기독교 종교적인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거짓 종들의 세계다. 그러니까 명찰, 목사간판을 가지고는 옳은 목사를 못 찾는 거다.

 

교회를, 신앙을 그런 눈을 가지고 본다면 이는 그렇게 보는 자기 눈부터 벌써 멀어있는 거다. 왜냐? 육의 눈을 가지고 보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영의 눈을 가지고 사람을 보는 거다. 영의 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거다. 방편은 육의 귀로 듣지만 속에서 듣는 귀가 또 따로 있는 거다.

 

현재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완전을 어디에 두었느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완전을 알고나 있느냐? 다른 각도로 말하면 뭐하려고 예수를 믿는 거냐? 예수 믿는 목적이 뭐냐? 교회에 다니는 목적이 뭐냐? 말씀을 듣는 목적이 뭐냐?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어디에 써먹으려고 하는 거냐?

 

학생이 선생님으로부터 배움을 받을 때는 그걸 잘 배워서 써먹으려고 배우는 거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교회는 왜 성경을 가르치고 왜 배우는 거냐? 일 부려먹는 데로 성경구절을 써먹는다. 신비주의로 나가는 곳에서는 성경구절을 가지고 무슨 신비스러운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풀어먹는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인간의 인격 면에서 질적 면에서 완전으로 들어가면서 부피적으로 성장이 되겠느냐? 하나님의 옳은 질을 가지고 부피적으로 커지겠느냐? 그런 것에는 하나님의 옳은 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있는 그 질은 하나님의 질과 이질이기 때문에 생명적으로 커지는 것은 불가능하고 사망적으로 죄가 커진다. 예수를 믿는 데도 죄가 커진다. 방향과 목적이 다른 데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믿을수록 죄가 더 커진다. 안 믿어도 죄가 커지지만 이질적으로 믿을수록 죄가 더 커진다. 또 할수록 또 더 커진다. 모든 게 사망이다.

 

안 믿는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심판대 위에 놓여진 거고, 예수 믿는 것은 살아나는 게 있어야 하는데, 성장되고 깨달아지고 올라가는 게 있어야 하는데 이질적인 교훈에는 이게 없다. 그러니까 생명적으로 깨달아지고 성장되고 고상해지라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었고, 사건을 주었고, 먹을 것을 주었고, 입을 것을 주었고, 환경을 주었고,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다 주었는데 그걸 다 이용 응용해서 어디에 썼느냐? 네가 인격 면에 성장이 되고, 너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성장되게 하는 것이 인도하는 건데 너에게 준 모든 것을 어디에 썼느냐 그 말이다.

 

생각을 해봐라. 우리에게 우로지택으로 주어진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마귀 것이 아니다. 마귀에게 붙인 바 되는 것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성도가 진리를 놓쳐버리면 마귀에게 붙여버린다. 그런다고 해서 마귀가 성도를 지옥이나 천국에 끌고 갈 자유는 없다. 그런데 성도가 하나님의 말을 안 들으니까 마귀에게 ‘네가 저 자를 훈련 좀 시켜라’ 하고 마귀에게 붙여버리는 거다.

 

예수 믿는 자기가 인간의 완전에 대해 알고나 있느냐? ‘너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자기에게는 현재적으로 사사건건 분초찰나 순간마다 이룰구원을 이루라고 사건과 시간이 지나가고 있으니 이 기간 동안에 이룰구원을 잘 이뤄 가면 영혼이 하나님의 온전으로 자라는 거다.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여기의 ‘구속’은 ‘중복적 구속’을 말하는 거다. ‘기본구원적 구속’은 중생을 말하는 거고, 믿는 사람이 자기를 구속해 달라는 것은 ‘중복적 구속’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자기를 이룰구원 차원에서 말씀으로 깨닫게 해서 완전함에 도달하게 해 달라는 의미를 가진 구속이다.

 

그러니까 ‘중복적 구속’이라는 말은 점차적으로 구원을 이루어 간다는 말이 되는 거다. 주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깨달아지면서 점점 닮아져 간다 그 말이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인격화 되고, 실상화 되고, 사상화 되고, 자체화 되는 것을 말한다. 믿어갈수록 사람이 모든 사고방식이 고차원적으로 성장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인 말로 한다면 철이 들어가는구나. 사람이 안정되게 잡혀 들어가는구나.

 

우리교회를 보면 다른 교회에 다니다가 이곳에 올 때 부모를 따라 온 아이가 처음에는 예배시간에 떠들고 돌아다니고 했었는데 지금은 많이 잡혔다. 지금은 그런 아이가 별로 없다. 그래서 아무리 집사나 장로라고 해도, 수 년 수십 년 예수를 믿었어도 예배시간에 아이가 하는 걸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아이들이 예배시간에 하는 걸 보면 부모가 문제가 되어있다. 이걸 보고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는 내 거울이구나’ 해야 한다.

 

자기의 일생이 인격적으로 바로 되려면 첫째는 교회에서 배울 때부터 그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한다. 이러려면 목사님의 가르침에서 그 정신이 나와야 한다. 사회에 나가서 부지런하고, 지혜롭고, 눈치 빠르고, 힘차게 살려면 교회에서부터. 간단히 말해서 목사님의 말씀에서 그 정신이 나와야 한다.

 

예수를 믿어도 게으르고, 눈치도 없고, 지혜롭지 못하면 안 믿는 세상에서도 이런 사람을 싫어한다. 그래서 사랑을 받던 미움을 받던 자기 할 탓이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정말 막 돼 먹고, 욕심도 많고, 양심도 없고, 앞뒤도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고, 도덕성을 지닌 인간인데도 그런 냄새가 없고 하면 이런 사람을 어디에 쓰겠느냐?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성도다윗은 하나님의 온전한 인격의 성품자로 만들어지는 그 자기를 긍휼히 여겨달라는 거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런 신앙의 인격을 가진 자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그런 자들에게 함께 해 달라는 거다. 이건 옳은 기도다.

 

12절: ‘내 발이 평탄한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발이 평탄한 데 서면 사람이 불안하지 않다. 미끄러짐도 없고, 흔들림도 없고, 넘어짐도 없고, 편안하고, 굳건하게 설 수 있다. 사람이 진리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깨닫고 서면 세상의 큰 바람이 아무리 불어 닥쳐도 흔들림이 없고 넘어짐이 없다. 사상적으로도 넘어짐이 없고, 마음적으로도 넘어짐이 없고, 정신적으로도 넘어짐이 없다. 사람의 마음속의 인격의 중심이 그렇다.

 

사람이 넘어진다는 것은 마음이 불신앙의 사상 쪽으로 넘어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교회에 다니다가 뭔가 좀 어려우면 ‘에이, 교회에 안 다닐란다’ 라고 한다거나, 또는 자기 형편이 어려워지면 예수를 안 믿고, 형편이 좋아지면 예수를 믿고 하는 이런 거.

 

‘내 말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어떻게 평탄하게 섰겠느냐? 말씀 깨달음에서 서지는 거다.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회중’이란 교회를 말함이고, ‘송축’이란 노래를 부르고 축하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이 만들어짐에서 나오는 찬양이다. 그러니까 무엇이 신앙의 승리인지를 알게 되어서 그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거다. 그러니까 자기가 말씀을 따라 살아서 이렇게 만들어진 것은 자기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하는 것을 찬송을 하는 거다. 즉 증거를 한다 그 말이다. 이게 간증이다. 일반적으로 병고치고 이런 게 간증이 아니다.

 

27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다윗이 이렇게 된 것은 누구를 자기의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이냐? 진리성도 다윗은 만능의 능력자를 자기의 튼튼한 배경으로 삼고 있다.

 

안 믿는 사람들의 자기의 배경은 돈, 세상 명예 영광, 권세 등등이다. 자기가 이런 것이 없을지라도 자기 뒤에 이런 사람이 있어도 그것으로 인해 자기 마음에 힘이 실린다. 그러나 이런 것은 다 넘어지는 거고, 변질되는 거고, 다 자기를 배반할 거고, 아니면 자기가 내버릴 거고 그런 거다.

 

그러면 성도인 자기의 배경이 누군가? 누구를 배경으로 삼아야 되겠는가? 그것도 자기가 어려울 때 말고 평소 평탄할 때에? 예수 믿는 사람이 평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살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왜 부르는 거냐? 자기의 소원을 들어달라는 거다. 자기의 어려운 일을 해결해 달라는 거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그의 배경이 되어주시겠느냐? 그런 네 말은 안 듣는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말을 들어주실 때가 있는 거다. 말하자면 선지자들로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마음이 바로 서라. 정신이 바로 서라’ 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안 듣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아이고, 하나님 바로 서겠습니다’ 한다면 이건 이미 늦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요.’ 빛이 가는 곳에는 어두움이 물러간다. 차를 타고 밤길을 갈 때 차의 헤드라이트를 켜면 그 차가 가는 주변이 환하게 보인다. 빛이 가는 곳에는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 앞에서는 정형과 정모와 정질이 다 드러나게 된다. 형태나 모양이나 질이나 색깔이 정확하게 다 드러난다. 장광도 다 드러난다. 사방이 아무리 캄캄해도 빛이 가면 그곳은 어두움은 물러가고 순간적으로 정형이 다 드러난다. 그래서 빛은 참 좋은 거다. 빛이 있으니까 인간이 사는 거다.

 

복음의 빛이 가면 외부의 모양과 크기, 길고 짧음과 안과 밖, 부피는 물론이고 안쪽의 성질 성격 성분까지 낱낱이 분별해 낸다. 사람의 성질 성분 성격과 사건 환경의 성질과 목적을 분별해 내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복음의 빛을 받은 사람이다. ‘이거는 거짓이고, 이거는 이단이고, 이런 사람의 생각의 방향은 어디로 가 있고, 이런 사람의 취미는 그 생각의 방향이 어디로 가서 있구나’ 하는 것을 분별해 내는 사람은 복음의 빛을 받은 사람이다. 진리와 비진리의 신앙의 성질을 안다면 이 사람은 빛을 받은 사람이다. 영의 눈이 밝은 사람이다. 꼭 기도를 안 해도 그건 이미 판단이 나는 거다. 왜냐? 그 사람 속에 진리의 기준이 서 있으니까.

 

진리의 빛을 받은 사람은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신앙이 질적인 면에서, 사상과 정신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본질과 똑같은 건지, 아니면 이질인지? 질적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본질에서 얼마나 이탈이 되어있는 건지, 얼마나 벌어져 있는 건지? 또 얼마나 깊은 건지, 얼마나 낮은 건지, 얼마나 두꺼운 건지, 얼마나 엷은 건지를 안다. 그리고 어떤 감화를 받아서 그 일을 하는 건지? 사람의 생각도 영에 속한 생각인지, 육에 속한 생각인지? 그 생각이 하나의 종교성인지, 아니면 신앙성인지? 그 일을 하는 것이 무슨 목적으로 하며 어떤 열매를 따먹으려고 하는 건지를 안다.

 

진리의 빛을 받은 자는 자기를 세밀히 분석을 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는 것은 분별하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성도가 매사를 분별하는 것이 죄냐, 분별을 안 하는 것이 죄냐? 분별을 안 하는 것이 죄다. 성도는 세상을 분별을 해야 한다. 사람도 분별을 해야 한다. 만일 영과 육을 분별을 못하면서 겉으로 나타난 것만 보고 ‘내 마음에 드네, 안 드네. 재미가 있네, 없네’ 한다면 이 사람이 죄를 짓는 거냐, 선행을 하는 거냐? 죄를 짓는 거다. 분별을 못하고 있다면 자기는 진리의 빛을 아직까지 받지 못했다는 증거가 된다.

 

진리의 빛을 받으면 신앙의 성질을 분별해 낸다. 분별을 하지 못하면 자기가 하는 것마다 하나님 앞에 사망성공적인 일이 된다. 이게 다 죄다. 믿는 우리는 죄를 짓는다는 것을 일반개념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말씀성에서 이탈된 사고방식이 죄라.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게 죄라.

 

죄를 짓게 되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이 말의 의미는 생명과를 따먹을 수 없는 권 밖으로 내쫓긴다 그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권, 애정권, 생명의 말씀의 치리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쫓겼다. 이러면 이 사람의 신앙은 못 자란다. ‘신앙이 자랐느냐, 못 자랐느냐?’ 하는 것은 자기 속을 들여다보고 ‘내가 그 권 안에 있었는지, 안 있었느냐?’를 볼 때 드러나는 거다. 분별을 못하고 있다면 빛을 안 가진 거다. 빛을 가졌다면 분별이 되는 거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의 빛을 가진 자는 자기가 구원이 된다. 그러니까 어두움에 다니지 않게 될 것이고, 영과 육이 분별이 잘 되기 때문에 진리와 비진리가 분별이 되고, 사단 마귀의 계책을 알게 되니 자기가 죄를 짓지 않게 되고, 거기에 동원되지 않고 자기의 이룰구원을 잘 이뤄간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몸이 의의 병기가 되어서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성품이 잘 이뤄져 가니 죽음이 두렵겠느냐? 심판이 두렵겠느냐? 무서울 게 없다.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지, 비진리적인 종교적 사상에 넘어가지 않지, 거짓 종들에게 이용을 당하지 않지, 이단들에게 속지 않지, 일반생활 속에서도 영광 육을 잘 분별을 해서 자기 갈 길만 잘 가니 뭐가 두렵겠느냐? 그러나 빛을 가지지 못하면 더듬게 된다. 자기가 아무리 똑똑해도 빛을 가지지 않으면 더듬게 된다. 아무리 똑똑해도 불이 없으면 엎드려야 된다. 겸손해야 한다.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예수를 안 믿는 자는 자연생명으로만 살고, 예수 믿는 사람은 자연생명과 영이 중생된 영의 생명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데, 자연생명은 물질을 먹고, 영의 생명은 말씀을 먹는다. 물질을 먹고 사는 생명은 임시적인 생명이고, 말씀을 먹고 사는 생명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가는 생명이다.

 

우리의 중생된 영의 생명은 그 질이 예수님의 생명과 똑같다. 예수님의 생명이 영원히 죽지 않듯이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다. 영이 중생된 사람은 예수님과 똑같은 죽지 않는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의 중생된 영은 죽을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주님이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을 책임을 지고 계시니 영이 중생한 사람은 지옥에 갈까봐 염려할 것은 없고 이제는 자기가 진리를 붙잡고 자기의 몸을 의의 병기로 잘 이용해 나간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것이니 이런 사람은 육신의 죽음이 무섭지 않고 마귀시험이 무섭지 않게 되는 거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사망아 오너라. 너의 쏘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한 거다.

 

성도가 말씀을 붙들고 말씀을 깨달으면서 이 말씀을 자기의 진리지식화 하면서 영인성장 면에서 이룰구원을 잘 이뤄가고 있다면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버티고 계신다. 이런 사람의 속에는 성령님이 역사가 되어있다. 되어있으니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거다. 그러니 뭐가 무섭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