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도시와 성서의 세계
I. 다윗 도성 발굴 개요
예루살렘의 과거는 지난 수세대 동안 학자들과 종교인들을 매혹시켰다. 또한 옛부터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 인들은 예루살렘의 풍부한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수많은 책을 썼다.
다윗 도성은 산등성 위에 세워졌다: '예루살렘 주의에 산들이 있다'(시편 125:2). 기드론 골짜기는 (현재 히브리대학교가 위치 한) 스코푸스 산과 올리브 산에서 도시를 동쪽으로 분리하고 힌놈 골짜기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도시를 가로질러 현재 유대인 지 역과 아르메니아 지역과 시온 산을 포함하는 서쪽 언덕으로부터, 성전 산과 오펠과 다윗 도성을 이루는 동쪽 언덕의 두 주요 언 덕으로 도시를 분리시킨다. 동쪽 언덕은 성전 산에서 경사지는 좁은 돌출부이며 이 동쪽 비탈길 기슭에는 도시의 유일한 물 공급 원인 기혼 샘이 연중 끊임없이 흐른다.
다윗 도성의 고고학적 발굴은 금석병용기부터 이슬람교 시대까지 예루살렘 역사의 주요 사건들을 드러내었다. 사람들이 예루살 렘의 동쪽 언덕에 정착하기 시작했던 때부터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패망할 때까지의 발견물들이 다윗 도성 전시 유물에 중점적으 로 전시된다. 다윗 도성 발굴 계획 사업(1978-1985)은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고고학 대학(the Institute of Archaeology of th e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과 이스라엘 탐사 협회(Israel Exploration Society), 예루살렘 재단(the Jerusalem Foundati on)과 협회들과 발굴 계획의 주된 창시자인 멘델 카프란 씨(Mr. Mendel Kaplan) 등 남 아프리카 공화국 후원단에 의하여 창설된 다윗 도성 협회를 대표하여 이행되었다.
II. 금석병용기와 초기 청동기 시대, 기원전 3500-2500년(21-19층)
다윗 도성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거주 증거는 바위에 자연적으로 부서져 씻겨진 21발굴층에서 찾아진 금석병용기의 토 기 조각이 보여준다. 초기 청동기 시대(20층)의 요새화되지 않은 거주 흔적은 기혼샘 위 동쪽 비탈의 기반에 세워진 건축 유적에 서 찾을 수 있다. E 지역에서 기반에 세워진 두 거주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예외적으로 두꺼운 돌벽이며 안쪽 벽을 따라 긴 의 자가 세워졌다. 이 집들은 초기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여러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넓은 집'과 비슷하다. 중기 청동기 시대 IIB( 18층)의 성벽은 이 거주지의 동쪽에 건축되었다.
III. 중기 청동기 시대 IIB, 기원전 1800-1700년 (18-17층)
다윗 도성 발굴로 기원전 18세기의 요새화된 도시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다. 동쪽 비탈의 성벽 등선은 기원전 586년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까지 계속해서 요새화된 건축의 등선으로 판단되며 초기층과 당대의 생활층과 후기층으로 이루어진 연속된 층위를 보여준다. 폭이 25m 가량 되는 큰 돌로 지은 성벽은 18 발굴층의 주요한 발견물이다. E 지역의 벽은 길이가 약 30m까지 드러나있다. 건축의 세 단계와 성벽 안쪽에 연관되는 바닥과 토기로 건축구조의 시기가 기원전 18세기임이 드러났다.
IV. 후기 청동기 시대, 기원전 1400-1200년 (16층)
다윗 도성 발굴 이전까지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거주 흔적에 대한 유일한 증거로는 엘-아마르나 문서 중의 일부인 예루 살렘의 왕 아브디-헵바(Abdi-Heppa)가 이집트에 보낸 6개의 편지였으며 예루살렘 근처에서 발견된 무덤의 부장품들이 이 시대의 특징을 알려주었다. 다윗 도성 발굴은 도시의 경계 안의 고고학적인 유적을 드러내었으며 이 유적은 기원전 14-13세기로 추정되 는 16층 기간 중 동쪽 비탈의 북쪽 끝에 건축 사업이 활발했었음을 증명한다.
돌로 채운 여러 개의 상자 모양들은 비탈길 방향과 비탈길을 가로지르며 쌓는 육중한 토대 벽의 복잡한 공사 방법으로 만들어졌 다. 이 토대 건설은 자연적인 지형의 외형선 너머로 불쑥 나와 이미 세워진 지역에 약 250평방 미터의 지역을 확보하게 하였다. 전체 건축은 후기 청동기 시대에 가나안의 성곽과 예루살렘의 성채를 세우기 위한 계단식 돌 단상 기반으로 사용되었다. 발견된 토기들의 수량은 적으며 기원전 14-13세기의 것들이다.
V. 철기시대, 기원전 10세기 (14층)
기원전 10세기에 여부스족의 예루살렘이 통일된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바뀐 것은 성서에 잘 기술된 사건이며 14발굴 층의 도시 흔적으로도 명백히 드러난다. 다윗 왕은 이 도시를 정복하고 그 이름을 '다윗 도성'이라고 바꾼 후에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정하였다.
다윗 왕의 이름은 성서 이외의 당대 자료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왕가(王家)나 왕국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여진 '다윗 가( 家)라는 용어가 최근에 텔 난(Tel Dan)에서 나온 아람어 석비에서 발견되었다. 명문이 새겨진 이 석비는 아람 왕 하사엘(기원전 9세기)에 의해 세워졌고 곧이어 여호아스(기원전 8세기 초) 시대에 여러 조각으로 부숴진 것으로 보인다.
다윗 왕의 아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가 계획한 사업을 성전과 왕궁 공사로 끝냈다. 새 수도의 건축자들은 가나안 도시의 윤곽( 아랫 도시와 성곽)을 보존했으며 성전 산 지역을 북쪽으로 확장하여 예루살렘을 국가의 중심지로 탈바꿈시켰다. 도시는 세 주요 지역으로 이루어졌다.
1) 거주지로 계속하여 사용된 아랫 도시
2) 다윗 도성 발굴 지역 밖에 위치하며 기원전 10세기에 확장된 성전 산과 왕궁들
3) 위의 1과 2사이의 지역에는 도시의 공공 행정 업무의 중심지가 위치했다고 여러 학자들이 제안한다. 이곳에서 다윗 도성 발 굴단은 약 18m의 높이까지 보존된 '계단식 돌 건축'의 아랫 부분을 발견했다. 이 건축은 16발굴층의 토대 건축 위에 세워졌으며 예루살렘 성채의 요새화를 위해 토대와 단지로 사용되었다. 이 건축은 도시의 성곽의 남쪽 귀퉁이의 부분이라고 발굴자들은 생각 한다.
예루살렘의 역사에 있어서 바로 이 시기에 '워렌 갱로(Warren's Shaft)라고 알려진 도시의 첫 번째 수로 방식이 만들어졌다.
VI. 수로시설
다윗 도성의 동쪽 비탈길 기슭 키드론 골짜기에서 생겨나는 기혼 샘은 도시가 생긴 이후 주민들의 주된 물 공급원이었 다. 이 샘에서 하루에도 여러 번 솟아오르는 물은 일년 내내 충분하다. 물이 골짜기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아마도 키드론 골 짜기를 따라 다윗 도성의 남서쪽 중앙 골짜기의 입구에 만든 못들에 물을 모은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런 낮은 지역의 지세는 충분한 양의 물이 모이는 못을 쉽게 만들 수 있게 하였다.
세 수로 시설이 기혼 샘을 연결한다: 워렌 갱로, 실로암 수로, 히즈키야의 지하수로이다.
'워렌 갱로(Warren's Shaft)는 1867년 C. 워렌(Warren)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것은 기원전 10-9세기 왕국의 중심지에서 사용된 수로 공급 시설에 따라 지은 것으로 다윗 도성의 동쪽 비탈길 가운데 넓은 입구가 위치하고 있으며 일부는 계단식으로 잘라낸 굴 과 수직 갱로이며 이 굴은 수갱의 바닥을 샘에 연결한다 (이 수로는 후에 히즈키야의 지하수로로 대치되었다). 물은 수갱의 꼭대 기에서 길었다. 입구는 아마도 수문(水文)(Water Gate)에 가까운 성벽 안쪽에 위치했던 것 같다.
다윗 도성 발굴로 전 체계의 요소들이 깨끗하게 되었고 이전까지 알려진 아래부분 밑에 3m 정도 깊이의 수갱이 선명하게 드러났 다. 수갱과 평평한 굴 부분은 원래 이른 시기의 정착인들이 그들의 수로 방식을 건설하기 위해 사용했던 자연적으로 침식된 석회 암 동굴이었다.
'실로암 수로(Siloam Channel)'는 약 400m 정도 남쪽으로 흐른다. 바위의 일부분이 수로로 잘렸고 돌로 덮혔으며 부분적으로는 굴이다. 실로암 수로는 기드론 계곡의 기혼 샘에서 물을 실어 다윗 도성의 남서쪽 끝의 못에 모은다. 천정의 틈으로 빗물이 빠져 비탈길로 흘러내리는 반면에 수로의 측면에 창문같은 틈들은 물을 돌려 키드론 계곡의 밭에 물을 대준다. 이 방식의 가장 불리 한 점은 모든 요소들이 도시의 요새밖에 위치하여 오직 평화시에만 주민들이 충분히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히즈키야의 지하수로(Hezekiah's Tunnel)'는 기혼 샘에서 실로암 못까지 약 530m 정도로 바위 속을 잘라낸 닫힌 지하수로이다. 다윗 도성 발굴단에 의해 진행된 측량에 의하면 샘 가까이의 수로 시작 부분과 그 끝 사이의 높낮이의 차이는 겨우 30cm 정도이 며 그래서 수로는 매우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위 내용은 '성서유물전' 도록 -안성림 편저- 중 일부를 발췌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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