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바울의 전도여행

열려라 에바다 2022. 5. 9. 16:27

기독교의 이방 전도에큰 역할을 한 바울의 전도여행에 대하여 지도를 보며 표시해 보았습니다.

 

주로 터기와 그리스 지역이 전도의 대상이었는데 바울 시대와 현재는 지명 등에서 차이 있는 곳이 꽤 있었습니다. 그래서 검색을 통해서 현재의 지명을 찾고 구글 지도에서 표시하는 방법으로 전도여행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처음에 간단하게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이런 저런 자료의 차이로 인해서 헤매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결국 다시 성경으로 돌아와서 사도행전을 보면서 최종으로 다듬었습니다.

 

바탕의 지도는 현재의 구글지도를 캡처해서 사용했습니다. 커다란 글씨는 당시의 지역명, 또는 지명으로 제가 작업했습니다. 터키, 그리스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분들도 이 지도를 참조하면 좀더 명확하게 바울의 여정을 따라서 여행 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의 일곱교회는 별도의 기호로 표시를 했습니다. (원 안에 십자가가 그려진, 에베소, 라오디게아, 서머나, 사데, 빌라델비아, 버가모, 두아디라 일곱교회)

 

오렌지색 글씨는 구브로, 그레데 등 섬이나 길리기아, 밤빌리아, 비시디아, 부르기아, 아시아, 무시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마게도냐, 아가야 등 지역명을 기록했습니다. 검정 큰글씨는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블가리아, 터키, 그리스,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등 현재의 국가명 입니다. 검정 작은 글씨는 두로, 다메섹, 예루살렘, 다소, 골로새, 안디옥, 빌립보, 아덴, 고린도, 빌립보, 데살로니카 등 바울 당시의 지역명입니다.

클릭하면 가로 2500픽셀로 확대되지만 나름대로 가공하여 사용하길 원하여 원본 파일을 원하시면 댓글에 메일주소 남겨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원본은 일러스트레이터로 만들었습니다.

 

지도가 복잡해 보여서 여정을 텍스트로 연결해 보았습니다. 간단한 설명을 곁들였는데 제가 비 전문가이다보니 착각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댓글이나 메일로 지적해 주시면 검토하고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의 기록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가이사랴에 투옥되어 기록된 것인지 3차 전도여행시 고린도에서 기록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연대상으로 크게 차이나지 않겠지만 혼란 스러운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깊게 연구하기 힘들어 그냥 기록했습니다.

 

바울의 선교여행으로 복음이 세계로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보면 3차에 걸친 여행이지만 그리 넓은 지역도 아니었고 많은 도시에 확고하게 전파 한 복음이 아니라고 볼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씨앗이 크게 자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당시에 퍼져나간 복음이 여러 과정을 거쳐 커다란 종교로 발전(?) 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세상은 혼란스럽고 전쟁과 테러 등 불안과 증오가 가득 한 걸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한 것이 다른 의미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과연 평화는 언제 올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올까요? 사람들은 오늘도 태어나고 죽어가고 있는데...

 

 

 

◆ 바울의 1차 전도여행(행13:1-14:28)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안수 받고 전도목사로 파송 받아 1차 전도여행을 떠난다.

 

●동역자 : 바나바

 

●선교경로 : 수리아 안디옥 →실루기아 >(배를 타고)→구보로 섬(살라미→바보)→버가 → 비시다아 안디옥→이고니온→ 루스드라→ 데베를 거쳐 돌아올 때 왔던 도시들을 다시 방문하여 교회들을 굳게 한다. 돌아올 때는 구보로 섬을 거치지 않고 안디옥으로 돌아와 교회 앞에 선교보고를 한다.

 

☞다소: 바울의 고향

 

 

●선교지에서 생긴 일

 

1. 바보: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소경이 되게함. 구브르섬 총독이 복음을 받아들임.

2. 버가: 동행한 마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떠남.

3. 안디옥(비시디아): 일부 유대인들의 시기로 바나바와 함께 핍박받음.

4. 이고니온: 이방인, 유대인과 관리들이 두 사도를 돌로 치려고 달려듬.

5. 루스드라: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을 보고 고침. 유대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 알고 내침.

6. 더베 : 성안에 들어가 복음을 전함

7. 이고니온과 안디옥: 제자들을 격려하고 교회의 장로를 세움.

8. 비시디아 지역 →버가 →앗달리아에서 말씀을 전함

9. 안디옥 도착: 전도여행을 보고함.

 

◆ 바울의 2차 전도여행(행15:2-18:22)

 

1차 전도여행 후 할례문제(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로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예루살렘 교회에 갔다가 돌아온 후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난다.

 

2차 여행을 떠나기 전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동반하는 문제에 이견이 있어 크게 다투고 결별하게 된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과 함께 구브로 섬으로 갔고, 바울은 실라와 동행하게 된다.(행15:36-18:22). 사도 바울은 실라 그리고 디모데와 같이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교회를 세운다.(행 16:11~40)

 

●동역자 : 바울과 실라, 디모데

 

●선교경로 : 수리아 안디옥 →다소→ 더베 → 루스드라→비디시아 안디옥 →드로아→(배를 타고)→네압볼리 →빌립보(사도 바울은 일행과 함께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교회가 세워집니다.)→데살로니가 →뵈레아→(배를타고)→아덴(아테네)→고린도(사역의 중심지, 데살로니가 전. 후서, 갈라디아서 기록)→ 겐그레아 →(배를타고)→ 에베소 →도로→(배를타고)→ 가이사랴 →예루살렘 →안디옥으로 돌아옴.

 

 

●선교지에서 생긴 일

1. 안디옥 →더베: 마가 요한의 동행 문제로 바나바와 헤어져 실라를 데리고 떠남.

2. 루스드라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 디모데를 만나 할례를 베품.

※바울은 소아시아(터어키)지역에서 말씀 전하기를 바랐지만, 성령께서 막으시고 그들을 브르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으로 보내셨다.

3. 무시아: 하나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여 비두니아 행이 좌절 됨.

4. 드로아: 마케도냐 사람이 바울 사도를 청하는 환상을 봄

5. 사모드라게섬(사도 바울이 유럽에 처음 도착지) →네압볼리

(마케도냐 지방)

6. 빌립보: 네압볼리를 지나 마케도냐 첫 성 빌립보에 도착 루디아와 그 집에 세례를 베품. 귀신들려 점치는 여종을 구한 사건으로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으나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림. 간수에게 세례를 베품.

7. 암비볼리 →아볼로니가 →데살로니가: 바울이 세 안식일 동안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함, 대적자들이 바울과 실라를 발견치 못하자 야손과 다른 믿는 자들을 끌어냄.

8. 베뢰아: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의 시기로 밤중에 도피하여 베뢰아로 도피, 베뢰아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함 (아가야 지방)

9. 아덴(아테네): 실라와 디모데를 만남, 그 후 실라는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서 다시 만남. 철학자들과 논쟁함. 아레오바고의 관원인 디오누시오가 복음을 받아들임.

10. 고린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 장막업을 1년 반 동안 동업하면서 머뭄. 실라와 디모데의 도착으로 힘을 얻음.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의 가족에게 복음 전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에베소까지 동행

11. 겐그레아: 바울의 서원대로 머리를 깎음.

12. 에베소: 유대인과 변론함.

13. 가이사랴 →예루살렘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 옴.

 

바울의 3차 전도여행(AD53-57년(약3년), 행18:23-21:26)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직후 곧바로 3차 전도여행을 떠난다. 그는 또다시 1,2차 전도 여행지를 돌아보며 교회를 든든히 세웠다(행18:23-21:26).

 

●선교경로 : 수리아 안디옥 → 다소 > 이고니온→ 에베소(두란노서원에서 2년동안 복음전함, 3년동안 체류함) 미둘레네→앗소 →드로아→(배를타고)→빌립보(고린도 후서 기록)→데살로니가→뵈레아→고린도→베뢰아→데살로니가→빌립보→(배를타고)→드로아→앗소→미둘레네→밀레도→(배를타고)→바다라→(배를타고)→두로→가이사랴→예루살렘(체포)

 

●선교지에서 생긴 일

1. 갈라디아, 부르기아 지역 : 제자들을 찿아 다니며 믿음을 굳게 함.

2. 에베소 :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함, 귀신 축출과 마술 책들을 공개적으로 불사름.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소동

3. 드로아 : 바울의 설교 중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림.(빌4:15~18)

4. 밀레도 :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고별 설교(권면과 부탁) 행20:22~24

5. 두로 : 7일 동안 머뭄.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만류함

6. 가이사랴 : 빌립집사와 예언하는 딸들을 만남,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만류함)

7. 예루살렘 : 예루살렘 도착과 3차 전도여행에 대한 결례를 행함

☞결례: 율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고하는 공식적 보고를 말함.

 

◆ 바울이 로마로 가다.

 

※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 바울은 예루살렘 공회에서 변론함(행21:27~ 23:11)

 

 

*암살 계획을 피해 가이사랴로 이송됨(행23:12-35)

*바울은 총독의 공관이 있는 가이사랴로 후송되어 미결수로 2년간 감옥에 갇힙니다.

*가이사 황제에게 제소하여 로마로 가게 됨(행25:9-26:32)

로마에 가서도 2년 동안 구금되며 행28:30~31에 보면 비교적 자유스러운 옥중 생활을 한다.

 

바울은 로마에 복음 전파를 간절히 원했고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죄인의 몸으로 로마로 입성케 했다. 그리고 더욱 간절히 가기 원했던 그 당시의 땅 끝 서바나(스페인)는 결국 가지 못한 채 로마의 아피아 가도에서 목이 잘려 순교했다.

 

고대 로마의 가장 중요한 도로로 길이 50km, 너비 8m인 에그나티아는 포장도로다. 로마의 켄소르(감찰관)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BC 312년에 건설을 시작한 도로이며, 도로명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처음에는 로마와 카푸아 사이였으나 BC 240년경 브룬디시움(브린디시)까지 연장되었다. 도로는 돌로 포장을 했는데 로마와 남이탈리아를 연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의 간선도로이기도 하였으며, 오늘날도 일부가 사용되고 있다.

 

(에그나티아 - 로마 때 포장도로)

 

로마는 현재 이탈리아의 수도이며 옛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에 있던 로마 제국의 수도이다. 로마는 예수님 당시 동으로는 유프라테스 강, 서로는 라인 강, 남으로는 지중해, 북으로는 동부 유럽에 미치는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였다. 전성기에는 유럽 대륙을 대부분 석권하였으며 아프리카와 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한 때도 있었다.

 

기독교인에게 로마가 중요한 것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용하여 세계로 통하는 로마의 길을 통해 유럽전역에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때의 도로인 에그나티아(로마 때 포장도로)가 네압볼리 빌립보 등에 아직까지 남아있다.

 

성경적으로 보면 로마는 바울이 죄인의 몸으로 복음을 전한 곳이며(행23:11) 순교한 곳이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가정에서 시작된 초대교회

예루살렘 마리아의 집 행12:12 에 베 소 아구라의 집 고전16:19
빌 립 보 루디아의 집 행16:40 라오디게아 눔 바 의 집 골 4:15
고 린 도 가이오의 집 롬16:24 골 로 세 빌레몬의 집 몬 1: 2

성경에 나타난 신약의 교회들

1 예루살렘 교회 행 8: 1 8 마게도냐 교회 고후 8: 1
2 안 디 옥 교회 행11:26 9 갈라디아 교회 갈 1: 2
3 가이사랴 교회 행18:22 10 그 레 데 교회 딛 1: 5
4 에 베 소 교회 행20:17 11 빌 립 보 교회 빌 1: 1
5 로 마 교회 롬 1: 7 12 골 로 세 교회 골 1: 1
6 겐그레아 교회 롬16: 1 13 라오디게아교회 골 4:15
7 고 린 도 교회 고전 1: 2 14 데살로니가교회 살 1: 2

여러 교회의 대표자들

교 회 교회대표 출신지 특 징 성 경
마게도냐 소바더 베뢰아 부로의 아들, 바울의 친척 ? 행20: 4
아리스다고 데살로니가 가이오와 같이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행 행19:29, 27:2
세군도 데살로니가 바울을 따라 아시아에까지 동행 행20:4
갈라디아 가이오 더 베 바울과 함께 아시아에 간 사람 중 하나 행20:4
디모데 루스드라 외조모와 어머니의 신실한 신앙 물려받음 행16:1~3, 17:4
소아시아 두기고 아시아 바울의 신임 받던 조력자, 로마 옥중에 동행 엡6:21~22
드로비모 에베소 바울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가 성전 모독죄의 누명 씀

행21:29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의 역사적 배경

구분  배 경
에베소 소아시아의 수도.게스터 강구에서 5마일 상류에 있는 산유지다. 현재의 이즈미르에서 80KM 위치한 도시. 로마국의행정상, 교통상의 중심지이며 아시아 7교회중의 하나가 있었던 곳이다. 에베소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자료는 고대에 활약한 작가들의 작품이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얻어진 수천 점의 비문에 의존하지만, 도시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알 수 없다.


역사에서 에베소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경의 히타이트 성경의 헷 족속 비문에서 인데 그 비문에 APASAS라고 불리웠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으로 추정된다.
에베소 폐허 기원후 1세기에 에베소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중요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37-42년 사이에 기독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바울(PAUL)은 그의 2차와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를 방문하여 선교를 벌리고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로 부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함께 에베소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내기도 했다.
서머나 '서머나'라는 이름은 "몰약"이라는 향료에서 유래되었습니다. 8, 9 피트의 높이로 아라비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자라는 몰약이라는 가시 돋친 나무는 쓴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몰약의 향기는 대단히 훌륭하여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께 드리기 위해 준비해 올만큼 값지고 훌륭한 향료입니다. 몰약의 향기는 유명합니다. 특히 두드리고 으깰수록, 짓눌리고 부서질수록 더욱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낸다고 합니다. 이름의 특성을 생각할 때 고난과 핍박이 아무리 심할지라도 부활에 대한 소망을 따라 순교의 향기로 역사를 장식한 교회를 서머나 교회로 명명한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서기 100 년부터 콘스탄틴 황제가 최초로 종교의 자유를 합법적으로 공인한 밀란의 칙령을 반포한 313 년까지 혹독한 핍박을 치른 시대를 대표합니다. 소아시아 서해안 헬메안만 내에 있는 성으로 에베소에서 북으로 36마일, 이스탄불에서 약631km 떨어진 지점에 에게 바다를 향래 위치한 유명한 항구 도시로서 화재와 지진으로 여러 번 파괴되었고 외적의 침략으로 거의 폐허되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한 후 재건하였다.


그후 이 성은 다시 건축되어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현대 이름은 이즈밀이다. 주전 3,000년부터 형성된 항구 도시로서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에 주둔하였고, 산 위에 성채를 건설 하였다. 서머나는 주전 3-2세기 희랍 시대에 크게 번성 하였고 항구 상업 도시로서 유대인들이 이곳에 많이 살게 되었다.
버가모 소아시아 서부에 있는 무시아의 도시. 에에게 바다 연안에서 24km 내륙에 있다. 앗탈루스 왕족의 수도로서 주전 3-2세기에 문화 도시로 번성했고 유네미스 2세(주전197-159)가 도서관을 창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교의 신전이 많이 있으며 특히 제우스 높이 12m나 되는 거대한 것으로 "사탄의 위"는 이 신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계2:13). 로마 "황제 예배 신전"이 세워져 기독교에 있어서는 초대교회 부터 싸움의 도시였다. 초기에 순교자 안디바가 여기서 순교했다.


가장 웅장한 교회의 유적이다. 그러나 본래 교회의 건물이 아니라 후대에 교회가 사용한 것이라 한다. 버가모 교회는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해발 300미터이상의 고지대에 위치한 도시로서, 로마지배중 아시아 전체를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된 총독부가 있을만큼 정치, 행정의 중심지요 20만권의 장서를 가진 대규모 도서관이 있는 문화의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제우스 신의 태생지라는 것과 연관되어 지어진 제우스 신전을 비롯한 디오니소스 신전, 아데나 신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과 로마황제 숭배를 위한 3개의 거대한 신당등 갖가지 우상숭배 신전들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곳은 사단의 위, 즉 사단이 득실거리는 곳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우상 숭배와 세속화 되어가는 도시 분위기 속에서 사단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아야 했습니다.


아크로폴리스:SERAPIS를 위한 신전이 남아 있으며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변 분위기 속에서도 버가모 교회는 믿음 중심을 지키는 충성된 증인들이 있어 칭찬을 받았습니다. 17절에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이 버가모 교회에는 "모든 악, 어려움, 세상의 모든 불신앙적 요소들에 대항한다." 는 뜻을 가진 안디바 즉 <충성된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두 아디 라 버가모에서 남동쪽으로 약 32km지점. 소아시아 루디아 도에 있는 성읍으로 빌립보의 여신도 루디아의 고향이다(행16:14). 소아시아 일곱 교회중의 하나(계1:11, 2:18). 음행, 간음, 사탄의 깊은 것이라 하여 심하게 책망하였다(계2:20-24). 이즈미르(스미르나) 북동쪽으로 105km 악세르 호수 남쪽에 있는 교회터에는 석축 기둥과 담장만 남아 있다.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을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한지라 (사도행전 16장 11절- 14절)


버가모와 사데를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B.C. 7세기 경 리디아(Lydia)인들이 거주하며 "펠로피아(pelppia)"라 불렀다. B.C. 3세기경 SELEUCUS 1세는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상업과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 시켰으며, 한 때 로마와 동맹 관계에 있던 버가모 왕국의 지배 하에 있다가 로마의 속령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 시에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의 하나가 위치하여 크게 번성하였으며 1425년 오토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두아디라의 역사적 중요성은 군사적인 것과 상업 중심지로서의 역할이다. 두아디라는 지형상 훌 륭한 요새라고는 할 수 없으나 지리적으로 길고 넓은 골짜기 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중요한 군사적 요충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많은 유대인들을 이주시켰기때문에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상술과 지리적 특성은 자연히 상업도시로 번성케 했으며, 이때 이미 상인조합(길드/Guild)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행전 16:11-15 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때에 빌립보에서 '두아디라에서 온 루디아'를 만났다고 되어 있다. 루디아는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자였다. 현재 두아디라는 과거의 어떤 유적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도시의 한 귀퉁이에 아마도 아폴로 신전으로 보이는 신전 하나와 회랑이 있는 길 그리고 하나의 커다란 비잔틴 교회 기둥들만이 부서진 상태로 그냥 방치 되어 있다.


동방으로 통하는 대로상의 상업 중심지. 오늘날의 소도읍 아키사르. 옛 시대의 잔재는 남이있는 것이 없다. 질그릇에 대한 언급은 그 도시의 산업중 하나를 반영시켜 주고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산업은 염료(자주빛) 업이었다. 자주장사로서 빌립보에서 바울을 만났던(행16:14) 루디아는 두아디라 출신이었고 또 집에 돌아가서 그 곳에 교회 세우는 일을 도왔을 것이다. 그 교회의 또한 여자는 교인들을 그들의 믿음에서 떠나 부도덕에 빠지게 하였고 그 악한 영향으로 인하여 요한의 편지에서 구약의 인물과 짝을 이루는 제2의 이세벨라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 데 소아시아 서쪽 해안에 있던 루디아의 수도로서 서머나 동쪽 약 80키로 지점 트몰러스 산 북쪽 기슭 헐머스 평야 남단에 자리잡고 있다. B.C 1200년경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요새지대이었다.
세월이 흘러 감에 따라 상업 도시로 번영하였으며 직물과 귀금속 생산지로 이름난 곳이다.
기원전334년 알렉산더 대왕의 명으로 건축된 유적 아르테미스 신전 B.C 6세기와 3세기 두차례에 걸쳐 파괴되었다. 이곳에는 여신 시빌리의 신전이 있었고 부도덕한 제사의식이 거행되었다.


사데 교회가"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자"라는 경고를 받게 되었던 것도 이같은 종교의 부도덕한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계3:1). 지금은 서머나 빌라델비아 철도의 정거장 부근 페허에 세워진 한 촌에 그 이름이 붙어 있을 뿐이다. 아르테미스 신전과 왼쪽의 작은 건물이 교회로 사용해던 장소라 한다. 험준한 산을 배경으로 한 난공불락의 요새로, BC 1200년 경에 세워진 도시로, 그후 수세기가 지난 후 산 기슭에 제2의 도시가 형성되어 고대 리디아(Lydia) 왕국의 수도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빌라델비 아 리디아(Lydia) 왕국 시대에 칼라테부스(Callatebus)라는 이름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그 후 B.C. 159~138 페르가뭄(pergamum, 성서의 버가모)의 앗탈로스(Attalus) 2세, 필라델푸스 (Philadelphus)는 동부 진출의 전초기지로 이 지역에 도시를 건립, 자신의 이름을 따서 빌라델비아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합성어 로써 '형제애'를 의미한다.


B.C 138년 이전에 버가모왕 아탈저스 빌라델 버스가 세운것으로 언제 교회가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계록에는 일곱 교회의 하나로 나타난다(계3:7-13).일찌기 순교자가 생겼고 1300년 이후 대감독 구역이 되었다.


주후 17년과 23년에 큰 지진이 일어나 이 도시가 대파되어 이 도시에는 아무런 고대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이미 마을이 들어서 있어 발굴도 불가능하다. 다만 기독교 유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교회 하나가 파괴된 모습으로 나마 남아있다. 이 교회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져 사도 요한에게 바쳐졌다.
라오디게 아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 프리지아(Phryghia, 성서상의 부르기아)의 수도로 교통의 요지인 리커스 계곡에 위치하여, 부유한 상업도시로서 발전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셀리우코스(SELEUCID) 왕가의 안티오쿠스(ANTIOCHUS) 2세가 그의 부인 LAODICE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라오디게아라 불렀다.


라오디게아는 근처의 히에라볼리에서 흘러내리는 온천물이 이곳에서 만나기 때문에 질병치료에 도움을 주었을 뿐아니라 귓병을 치료하는 특효약과 콜로니온이라 불리우는 안약의 산지로 유명하여 의료도시로서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역사상 수차례의 지진으로 인하여, 이 도시의 유적은 대부분, 땅 속에 파묻혀 지금은 황무지화 되어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 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 치리라"(계 3:15~16)


이곳에서 6.5KM 떨어진 히에라볼리의 온천 물이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로 흘러 들어오게 하였다. 라오디게아의 온천 물은 이곳에 도착하면 식어서 덥지도 차지도 않은 물이 되었다.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고 있다.


골로새서에서도 라오디게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골 4:15-16, 2:1, 3:13~15) 특히 마지막 절의 문안인사에서 라오디게아에 있는 "눔바"라는 여자의 집에 교회가 세워 졌음을 알 수 있다.

1 장 갈라디아서

1.기본적인 배경

1) 서론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가장 위대하고,중요한 서신들 가운데 하나이다.그것은 사도가 실제로 가르친 것과 하나님의 계시로 받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갈1:12) 많은 사람들은 이 서신을 "짧은 로마서"로 서술했다.실로 로마서는 갈라디아서를 확대한 것이라 말할수 있다. 교회지도자들은 갈라디아서를 높이 평가했다.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고,신앙지도의 원천이 되었다.종교개혁시대의 개혁자들에게 갈라디아서는 다른 어느책보다도 성경적 진리의 자유와 부흥을 위한 더 위대한 선언서가 되었다.이 서신은 루터가 가장 좋아했던 서신이었다. 그는 그 속에서 자신의 신앙과 생활을 위한 힘과 자기의 개혁사업을 위한 무기고를 발견했다. 갈라디아서는 자체속에 지니고 있는 지극히 고차원적인 교리적 내용과 변증적 상격과 또한 시적 아름다움의 결여 때문에 항상 교회사의 몇몇 시대에 잘 알려지거나 열렬하게 총애를 받아오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의 그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고 초대교회가 그 속에 나타난 특수성을 알게 되었다.
개혁교회는 갈라디아서의 교리적 내용과 특히 믿음으로서만이 의롭다함을 입는다는 강력한 기술과 변증,그리고 율법주의의 어떤 형식에도 반대하는 영적 자유의 영광스런 변호를 항상 존중해 왔다. 교회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핵심에 대한 어떠한 공격에도 방어할수 있는 항상 견고한 성채가 되어왔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처음으로 사람들로 하여금,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이해하도록 도와준 바울의 위대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가르침을 접하게 된다.

2) 저자
교회는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했음을 항상 믿어왔다.한두 사람의 극단적인 급진주의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갈라디아서의 순수성,즉 이 서신이 사도바울에게서 생긴 사실을 공격한 일이 없다. 고대나 현대의 성경학자들은 다같이 바울이 저자임을 증명하고 있다.대부분의 급진적인 비평가들은 바울의 특징뿐만 아니라 바울의 저작성까지도 동의했다.오늘날 저명한 학자들은 갈라디아서에 대한 저들의 저서에서 이 문제를 더이상 논의하지 않는다.이러한 입장에 대한 명백한 이유는 고대의 증명과 문어체와 교리적인 내용과 역사적인 배경과 문학적인 분석등 모든 가능한 고찰을 통하여 이 서신은 의심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다. 브루노 바우어와 루돌프 슈텍을 위시하여 로만, 피어슨,나버,반마넨 등으로 구성된 급진적 화란 학파는 본 서신이 바울의 서신이 아니라,초대교회 안에서의 유대주의자들과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 사이에 일어난 2세기의 분쟁 결과 만들어진 것으로 바울 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바울주의자들이 바울의 이름과 권위를 빌어 쓴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극단적인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바울이 저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수 있는데 그것은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를 통해서 살펴볼수 있다.
먼저 내적 증거로는 본서의 1:1-3과 5:2절에서본서의 저자가 사도바울임을 밝히고 있다. 그외에도 본 서신에 나타난 바울의 성격과 사상이 바울의 저작임에 틀림없는 로마서와 고린도전서등의 서신에 나타난 것과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본 서신이 완벽한 바울의 저작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본 서신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에 걸쳐서 개인적이고 무의식적인 자서전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이방선교를 위한 초석을 다졌다는 사실과 같은 실재적인 역사적 상황으로서만 설명이 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외적 증거로서 1940년 무라토리에 의해 발견된 무라토리 단편과 A.D 4세기 초엽에 가이샤라의 주교로 있었던 신학자 유세비우스 및 심지어A.D 1세기 경의 영지주의자인 마르시온뿐만 아니라 그이후 19세기에일어난 튜빙겐 학파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 서신이 바울의 저작임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본 서신이 누구의 저작인가를 판명하는 문제가 나올때 마다 언제나 바울의 저작이라고 판명되었다는 점이다.그것은 모든 시대를 일관하는 교회의 소신이며, 또한 오늘날에도 교회가 확신하는 바이다.이제까지 이 견해가 오류에 속한다고 입증할만한 뚜렸한 시비논증이 한번도 제기된적이 없었다. 그리고 갈라디아 서신이 바울적인 핵심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 표면에는 속사도 시대의 사이비 바울적인 껍질이 단단히 덮어 씌워져 있다는 타협적 제설들은 자체 모순의 부단때문에 무너지고 말았다. 저자는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이 바울이라고 말한다(1:1,5:2) 본 서신은 분명히 하나의 단원으로 역어져 있다. 그것은 또한 바울이 생활하던 시대와 부합되는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행15:1,고전7:19절 참조) 뿐만 아니라 이 편지는 매우 인간적이며,전체 내용이 그리스도안의 한사람을 조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감당할수 있을만큼 넓은 한 마음이 있으며,너무나 깊이 사랑하기에 책망하지 않을수 없는 자애로운 한 심정이 담겨있다. 그래서 갈1:15,16, 2:20, 3:1, 4:19-20등에 나타난 바울은 명백하게 롬9:2, 고전9:22, 10:33, 고후11:28, 12:15, 엡4:1, 및 빌3:18,19등에 나오는 그 사람, 바로 다소의 바울이다.

3) 수신자.

본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갈1:1-2). 옥중 서신인 에베소서를 제외하고는 본서가 특별히 교회의 한 집단을 대상으로한 유일한 바울 서신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의 교회는 어느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가? 과거 반세기 동안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수 많은 논의가 있었고,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본서의 연대와 독자를 결정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먼저 갈라디아서가 어디로 보내졌느냐? 이른바 바울의 제1차 선교여행중에 세운 로마의 행정지역으로서의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낸 것이냐? 아니면 갈라디아 인종의 영토에 있는 교회에 보내어 진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의 행정지역으로 있는 갈라디아 교회에 보냈다는 것은 남부 갈라디아설이라고 하고,바울이 갈라디아 종족들의 영토에 있는 갈라디아 종족들에게 보냈다는 것은 북부 갈라디아설이라고 한다. 그래서 갈라디아인이라는 소리가, 로마의 행정적 지칭이냐 아니면,종족적 지칭이냐 하는 문제가 대립된다.
그래서 이 두견해의 주장을 말하고 어느것이 유력하겠는가 보도록 하겠다.
(1) 북부 갈라디아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견해를 근거로 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① 갈라다아 사람들 이란 용어의 통속적 사용
북 갈라다아 지역에는 본래 부루기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후에 고올족이 이들을 정복하고,B.C3세기 말엽에 중앙 산악지역에 앙카라,페시누스,타바움, 등 세도시를 건립했다. 고올족은 자신들의 호칭을 자기들의 거주하는 지역의 명칭으로 삼기를 좋아했는데 여기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② 누가의 일반적 용법
누가는 밤빌리아,비시디아, 그리고 루가오니아 등의 지명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 모든 지명들은 지리적인 위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행16:6절에서 바울과 그 일행이 부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을 통과 하였다는 설명, 역시 누가가 그 지명들 역시 지리적 의미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럴경우 갈라디아는 북부 갈라디아를 지칭한다고 할수 있다.
③ 남부 갈라디아의 여러 도읍들에 관한 누가의 설명
누가는 안디옥을 언급하면서 비시디아라는 단어를 덧붙였으며(행13:14) 루스드라와 더배는 루가오니아의 도시들로 묘사하였다(행14:6) 이같은 사실들은 갈라디아라는 지명 또한 로마의 행정구역의 명칭을 나타내려는 의도보다는 오히려,그 지역이 어디인가를 밝혀주기 위해 사용된것임을 보여준다. 그와 같은 명칭을 가진 행정구역은 실제로 지리적 구역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 지역까지 확장되어 루가오니아,비시디아,그리고,브루기아의 일부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누가가 모든 지역에 대해 행정구역 명칭을 사용한것 같지는 않다.
④ 사도행전 16:6절의 의미
북부 갈라디아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은 바울과 그의 일행이 브루기와와 갈라디아 지역을 통과 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지역이 아니고 두 지역이 언급된것을 볼때 갈라디아는 브루기아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가랄디아란 명칭은 행정구역상의 명칭이라고 볼수 없다고 주장되어 어 왔다.
⑤ 사도행전 18:23의 의미
이 구절은 바울이 제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기전,안디옥에서 얼마동안 머문뒤에 행한 선교활동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라이트푸트는 이 구절 역시 내용이 비슷한 행16:6절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럴 경우 바울은 이 여행 초기에 북쪽 지역을 방문했을 것이다. 만일 이 두 구절에 대한 이같은 설명이 모두 옳다면,사도행전은 북쪽 지역에 여러 교회들을 세웠을 것이라는 강한 추측과 함께 바울 사도가 그 지역을 두차례 방문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⑥ 주민들의 특성
라이트 푸트는 갈라디아서의 나타난 독자들의 특성이 고올족의 특성과 아주 유사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갈라디아인들은 술취함,인색함,분쟁, 자만심,분냄,방탕함,변덕 스러운 성향을 가진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 라이트추트에 따르면,고올족은 변덕 스러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인들은 북부 갈라디아에 정착했던 고올족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 지었다.
⑦ 이고니온을 떠난 뒤의 바울의 여정(행16:6절이하)
모패트는 누가가 사용한 통과했다는 말을 행18:23에 사용된 같은 단어와 꽌련지어 볼때 이 말은 복음을 전하며, 통과했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 단어를 이렇게 받아들인다면, 바울이 북쪽지역에 몇개의 교회를 세웠다는 견해를 지지해 준다. 그리고 또 "금지된"의 의미를 살펴보면,바울이 이미 루가오니아에 있었을때,아시아에서 활동을 성령께서 금지 하심으로 어쩔수 없이 그는 북쪽 지역으로 밖에 갈수 없었다.
⑧ 이 견해는 초대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지지되어 왔다.
⑨ 본 서신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율법, 특히 할례문제는 남갈라디아에서 보다 이방인들이 대다수인 북부갈라다아 지역에 해당된다. 할례문제는 유대인들이 많은 남갈라디아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될수 없었다.

(2) 남부 갈라디아설
19세기 이후 많은 학자들이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고 내세운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 사도행전16:6절과 18:23절의 색다른 해석
램지에 의하면,행16:6절에 브루기아-갈라디아 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그것은 갈라디아의 로마 행정구역의 일부지역에 브루기아인들이 살았으며,지리적으로는 브루기아로 알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같은 내용인 18:23절은 갈라디아의 행정구역안에 있는 여러지역과 아시아의 행정구역에 인접해있는 브루기아란 지역의 일부를 나타낸다. 이 두 구절을 이같이 이해함으로서 램지는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북부 갈라디아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없다고 주장했다.
② 사도행전에 북부갈라디아 교회들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점.
사도행전은 갈라디아 지역에서 활동하는 바울에 관해 아주 간력하게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처럼 중요한 논쟁이 있었던 교회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는점은 참으로 이상하다. 더구나 이 교회들은 누가가 바울의 전도활동, 초기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던 교회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모패트는 여기에 대해 반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누가가 특히 남쪽지역에 있는 교회들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하고 있으나,북쪽지역에 있는 교회들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사실때문에 남부 갈라디아설이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③ 북부 갈라디아 지역의 고립
갈라디아서에는 바울이 건강을 회복하는 기간에 갈라디아 교회들을 처음으로 방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갈4:13) 그러나 이러한 방문이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북쪽 지역을 여행하는 일은 매우 험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이 회복기의 환자로서 북쪽지역보다는 남쪽지역으로 여행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램지의 견해가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④ 바울이 사용한 행정구역의 명칭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들을 언급할때 교회가 위치해 있는 행정구역의 명칭들 곧 아가야, 아시아,마케도냐 등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이라고 한것도 그와 같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누가는 지리적인 위치의 명칭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바울역시 그와 같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바울은 여정을 기록할때 누가와 비슷하게 기술했지만 그가 세운 여러 교회들은 제각기 그 교회가 속해있는 행정구역별로 분류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⑤ 남부 지역에 어울리는 갈라디아의 명칭
램지는 이 명칭 이외에 남쪽지역에 사는 여러 사람들에게 포괄적으로 적용될수 있는 다른 이른을 생각하기는 힘들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이 명칭은 조금도 인종적인 의미는 갖지 않으면서 그 행정구역내에 살고 있는 모든 주민들을 잘 묘사해 주는 명칭이라고 했다 더욱이 남부인들은 로마 시민권과 관련시켜 그 명칭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 했었다.
⑥ 사도행전16:6절의 분사에 대한 다른 해석
에스위드는 이 구절의 분사는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통과한 직후의 금지사항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다른 사례들을 인용하여 적절히 입증해 주었다.
⑦ 바나바에 대한 언급
갈2장에 세번이나 바나바의 이름이 언급되었다.(1,9,13절) 이것은 바나바가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인 경우 그 교회들이 남쪽에 있는 교회 일때 더욱 자연스럽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바나바가 바울과 동행한 것은 다만 제1차 전도여행 때였다.
⑧ 북부 갈라디아에서 온 구제 헌금의 모금 대표자가 없었다는 점
행20:4이하에서 바울 일행에 대한 언급은 둘다 남갈라디아에서 온 더배 사람 가이오와 루스드라에서 온 디모데였다. 그러나 북갈라디아지역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가 이 구제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고전16:1에 바추어 볼때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가이오가 갈라디아의 여러교회들의 대표자가 아니라면,적어도 디모데가 이 교회를 대표한다고 보는 것이 매우 적절할 것이다. 분명히 고린도나 빌립보에서 온 대표에 관한 언급은 없다.
⑨ 갈라디아에 기록되어 있는 부수적인 내용들
갈4:14절의 하나님의 천사는 아마 행14:12의 간접적인 암시일 것이다. 또 주 에수의 흔적이란 표현은 돌로 맞는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남부에 있는 여러 교회들이 이 서신의 수신자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갈2:5절은 예루살렘에서 할례문제로 바울이 고전 분투한 것이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을 설립한 이후에 일어났던 사건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왜냐하며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고"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복음이 이미 그들에게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암시해준다.
⑩ 유대 기독교인들의 활동
갈라디아서는 교회를 교란시키는 자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의 관습과 규례들을 지킬것을 강요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 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활동이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보여주는 가설이 더욱 호평을 받았고 또 그같은 가설은 남부갈라디아설을 뒷바침해 주었다. 그 이유는 유대주의자들은 북부와 같은 외진 지역보다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같은 여러 지역으로 바울을 미행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도행전은 그러한 유대주의자들이 남쪽지역에서 활동했으며, 또 그들의 활동이 예루살렘공회가 열리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었음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북부갈라디아설과 남부 갈라디아설을 소개 하였다. 그러면 어느쪽이 더 신빙성이 있으며, 정확한 걸일까? 이 두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인 배경과 연대문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때 그래도 부루스가 강력히 주장한데로 남부 갈라디아설이 저울추가 조금 기울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더구나 사도행전에 보면,남부 갈라디아 교회들에 대한 언급은 많으나,이른비 북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 대해서는 적어도 바울시대를 두고 말한다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바울이 여행한 것도 알지 못하고, 그러므로 거기 교회를 세웠다는 것은 더더구나 알지 못하고,이런 이유들로 잠정적으로 남부 갈라디아설을 받아 들일수 밖에 없다.

4) 기록된 시기와 장소

이 문제는 그렇게 쉽게 간단히 처리할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매우 복잡하다. 아울러 갈라디아서의 저작시기는 수신지에 의해서 결정될수 있다. 그러면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1) 북부 갈라디아설에 따른 저작연대
북부 갈라디아설의 입장에서는 이 서신이 매우 늦은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맨 먼저 제안된 저작 연대는 에베소 전도 사역 초기이다. 주로 갈1:6의 타게오스라는 단어에 의해 갈라디아서가 바울이 방문한 직후에 신속하게 씌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저작 연대는 바울이 에베소를 떠난 직후에 기록했다는 주장이다. 라이트푸트는 갈라디아서가 로마서보다 먼저 씌어졌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 이유는 같은 문제에 대해 로마서가 원숙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갈라디아서는 고린도 전후서가 기록된후에 씌여졌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고린도서에는 유대인과의 논쟁에 관한 암시가 전혀 없기 때눔이다. 따라서 라이트푸트는 이 서신을 제3차 전도여행 말기에 고린도에 보낸 서신으로 보았다.

(2) 남부 갈라디아설에 따른 저작연대
남부 갈라디아설은 이 서신이 일찍 기록되었다는 것으로 본다. 남부 갈라디아설은 갈4:13에 나오는 두차례의 갈라디아 빙문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두가지의 저작설이 생긴다. 먼저 두번째의 방문이 행16:6절에 언급된 것과 일치 한다면,갈라디아서는 예루살렘 공회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본다. 또한 두번째 방문이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가는 길에 남쪽의 여러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를 방문했던 때인 행14:21절에 언급된 사실과 일치한다면 저작 연대는 예루살렘 공회 이전으로 결국 AD 49년경이 될 것이다. 또한 갈라디아서4:13절이 단지 한번만의 방문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바른 저작연대가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정확하게 이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에 언급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을 주의깊게 고찰해 봄으로서 결정할수 있다.

(3) 예루살렘 방문
여기에는 두가지의 견해가 있는데 먼저 견해는 갈라디아서의 2:1-10이 사도행전15장의 예루살렘 공회방문이었다는 견해이다. 이는 전통적인 견해로서 두 방문간에 유사한 점들이 있다는 주장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사도행전이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에 자문을 구하고 있다. 또 두 경우 모두 그들은 강한 저항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같은 유사점들은 남부 갈라디아서를 지지하는 많은 학자들로부터 도전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들의 항의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북부 갈라디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행15장과 갈2장의 내용을 같은 내용으로 볼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해 분명한 의의가 있다. 그것은 갈2:1절의 "다시"라는 말에 몇가지 의문점이 있고,더구나 갈2장과 행15장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한층 더 난점은 베드로와 바울간의 논쟁이다. 그래서 결국 선택할수 있는 대안은 갈2장과 행15장은 동일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또하나의 견해가 있는데 그것은 갈2:1-10이 사도행전11:30절에 나오는 방문과 같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최근에 광범한 지지를 받는다. 갈2:1절은 문자적으로 바울의 두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 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견해는 갈라디아서에 예루살렘 공회의 법령들이 생략되어 있는 점에서 생기는 문제도 얼마든지 해결해 준다. 더욱이 안디옥 사건이 예루살렘공회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라면, 베드로의 외식행위의 책임은 크게 줄어들게 된다. 이와 같은 가설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다.
①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사역을 한지 1년쯤 되었을때 유대에 있는 교회의 상황을 듣고, 교회는 교회를 돕기위해 구제헌금을 가지고,예루살렘으로 가도록 바울과 바나바의 파송문제를 결정했다.
② 디도가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있었을때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제에 관한 문제가 아주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③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바울을 무할례자들의 사도로 보았다 그러나 바울에게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임무를 부여해 주었다.
④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함께 교제할 것을 권면하였다.
⑤ 베드로의 외식 사건 직후에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에게 전도사역을 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⑥ 바울과 바나바의 지도를 받는 안디옥 교회는 이와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의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익명의 여러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대표자로 보냈다. 그래서 그 결정을 위한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주장들을 모두 받아 들인다면, 갈라디아서는 예루살렘 공회가 소집되기 전에 기록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첫번째 전도여행에서 안디옥으로 돌아오기 전에 보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에도 많은 단점을 가지고 있음을 볼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볼때 그 시기를 대강 결정할수 밖에 없다. 첫째 이 서신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회가 있는 후에 기록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예루살렘 공회는 바울이 회심한지 약 14-17년 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보통 예루살렘 공회 연대는 AD48년이나 49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바울이 이 서신을 기록한 연대는 아무리 이르게 잡더라도 AD48년 이전이 될수 없다. 둘째로 예루살렘공회가 있는 다음에 베드로는 안디옥을 방문하였고,이 방문 기간중에 베드로는 바울로 부터 면책을 받았다(갈2:11-14)고 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다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본서신의 저작연대는 앞서 말한 것보다 다소 이른 시기가 될수도 있다. 세번째는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섰을 당시 그는 자유의 몸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서신을 기록한 연대를 아무리 늦게 잡더라도 그가 이 자유를 잃은 이후는 될수 없다. 그런데 사도행전21장을 보면 그는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하던 기간중에 체포되었다. 이와 같이 보았을때 최고 추정 연대와 최신 추정 연대 사이에는 8-9년의 기간이 게제된다. 바로 이기간중에 바울은 두번에 걸친 전도여행을 하였고, 이 기간중에 아마도 본서신이 기록 되었을 것이다.

본서가 기록 되었다고 볼수 있는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는데 첫째는 사도행전18:1-7절의 시기 다시 말해서 데살로니가 전서가 기록되기전후에 고린도에서, 둘째는 사도행전18:22절의 시기, 즉안디옥에서, 세째는 행19장의 시기에 에베소에서 혹은 네째로 행20:1-3의 시기에 마게도냐나 아가야에서 썼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에 오랬동안 머무른 것을 참작해 볼때 본서는 에베서에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

5) 주제 및 특징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구원의 방법으로서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은혜에 의한 구원을 뜻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
사도의 가장 큰 염려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유일하고 참된 복음을 붙잡히는 일을 경코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음을 분명히 알게 한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지 모른다. 그 복음의 진수는 "사람이 의롭게 함을 얻는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것이 아니요,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맘미암을줄 아노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의 대 주제는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의 복음을 그 훼방자에 대항하여,옹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는 로마서의 주제이기도 한다. 그 장편의 서신과 이 단편 서신사이에는 유사점들이 있다. 그런 반면 상이점도 있다. 로마서는 종요하고 장엄하게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막론하고 모든 죄인을 위해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완전하고 값없는 구원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조용하다기 보다는 오히려,때로 맹렬한 어조로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그 훼방자들에 대항하여,옹호하고 있다. 그 훼방자들에 대한 본 서신의 징계는 점차 약화되고 있다.그 수신자들은 훼방자들에게 귀가 솔깃하여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사도의 질책들은 준열한 것이며, 동시에 대조법을 따른 것인데 이것이 바로 본 서신의 특징이다. 아울러 본 서신은 거짓된 교리를 강하게 논박하는 성격을 띠고 있으며, 바울 서신들중 고린도후서와 더불어 바울의 자서전적 특징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 신앙에 관한 핵심적 내용이 되는 윱법과 복음의 의미와 그 관계를 명쾌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관한 교리와 더불어 신앙의 실천적인 면에 말하고 있는 올바른 기독교 윤리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런것들이 본서의 특징이라고 말할수 있겠다.


2. 역사적인 배경

A.D 50년을 전후한 약 10여년간의 초기 교회는 가끔 교리적인 큰 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복음이 주로 유대인에 의하여 유대인에게 전파되었을때는 교회가 평탄하게 발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신들이 복음을 전하고,그곳에서 뿌리박기 시작하자 그리스도인과 모세의 율법 및 이미 하나의 제도가 되어 버린 유대교와의 관계에 대해서 적지 않은 문제들이 일어 났던 것이다. 교회가 이러한 문제들과 유대교의 특수한 전통과의 관계를 개의치 않고 교회로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그 문을 열어 놓았던가? 교회의 범주를 모든 인류를 포옹할 만큼,넓혔던가? 아니면,교회는 단지 유대교를 이방세계에로 확장시킨것에 불과한 것이었는가?
보다 자세히 말해서 이방인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모세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었는가? 이방인 신자는 할례를 받아야만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방 토양에 정착했던 모든 곳에서 즉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서 이와 같은 문제들이 점차 강력한 힘을 가지고 대두되었다.
갈라디아서는 소 아시아의 한 지역에서 있었던 이러한 형태의 갈등을 기록한 책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갈라디아서는 또한 그 문제가 예루살렘교회의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어떻게 토론되어 졌으며,또한 어떻게 다루어 졌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같이 식사하는 것이 옳았는가? 또 음식을 같이 먹을수 있었을까? 유대전통이 선언했듯이 전통 유대인은 이러한 교제로 말미암아 더렵혀 졌는가? 혹은 그렇지 않았는가? 얼마동안 이러한 토론은 기독교의 통일성과 은혜를 전해주는 복음의 존속을 파괴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거의 혼자서 이러한 추세를 반대하고,그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예루살렘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 되었고 그 해결을 위한 바울의 안건이 지지를 받았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인 바울은 비유대사회에서 복음을 전했을때 유대 율법에 합당한가 하는 문제들을 일부러 제시하지 않았다.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두번에 걸친 설교를 했는데 그때마다 그렇게 했다. 사도바울은 이 지역에서 오직 복음만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들은 복음을 잘 받아드렸다.
그러나 바울은 얼마후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전에 그렇게도 잘 받아드렸던 복음을 이제 막 저버리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율법화 주의자들인 유대교의 교사들이 그곳으로 왔다. 그들은 주의 형제 야고보가 보냈다고 주장하면서 바울의 가르침이 교리상으로 잘못되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방인들도 모세의 율법아래 있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 한분만으로는 부족하고,모세도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소식을 듣자 바울은 의분할수 밖에 없었다. 그대로 버려 두면,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의 십자가가 헛것이 되고,기독교의 특성을 상실하게 되고,유대교 가운데 하난의 소종파가 될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화주의를 책망하고,갈라디아교회들을 되찾기 위해 이 서신을 쓴 것이다.
바울은 자기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사도권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답변하기를, 자기의 가르침이 다른 인간적인 권위에 기인하지 않는다는 점이 바로 자신이 사도임을 분명히 해준다는 점과, 때때로 다른 사도들이 그를 만났을때 마다, 그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였으며, 그는 베드로와 바나바까지도 포함한 다른 사도들이 가기를 주저했던 안디옥에 견고하게 머물러 있음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 받았다.
그리고 또 그들은 대적하기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비난에 대하여 바울은 문제는 누가 율법을 지키고, 누가 지키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간주해 주시는 데 기초가 되는 진정한 근거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 근거로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다.
끝으로 바울의 대적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방종하는 생활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여기에 대하여 그들의 주장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결코 성도들을 율법에서 꾀어 내 무가치한 것으로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성도를 예수께로 인도하며,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모습으로 그 성도안에 거하시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수 있는 새로운 성품울 그에게 주신다. 이러한 변화는 내적인 것이다.

3. 저술목적

이 부분도 수신자에 따라서 다르게 이야기 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먼저 남부 갈라디아설은 말하기를, 복음의 자유로 부터 재빨리 이탈하는 갈라디아인들의 행위가 바울을 크게 자극했다. 바울은 공식적인 인사말이나,감사를 표하지 않고 갈라디아서를 기록하였다. 또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특수하고 긴박한 상황에 처해있는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도바울은 장차 교회사에 그리스도인의 자유헌장이 될 소중한 내용을 제시해 주었다.
북부 갈라디아설은 갈라디아교회의 상황에 대해 약간 다르게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 여러 갈라디아 교회들이 예루살렘공회에서 규례를 받았으나 유대 기독교인들이 그들로부터 은혜를 빼앗아 가는 것을 분명히 허용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서신의 저작 연대가 예루살렘공회 이후일 경우 그와 같은 가설은 남갈라디아설에서 필요하게 된다.
아무튼, 유대주의자들의 술책은 바울 사도를 불신하게 했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주된 내용을 다루기 전에 자기를 넘어뜨리려는 여러 비난들에 대해 길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결론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갈라디아교인들은 세례를 받았고, 성령도 체험했지만 그들 대부분이 본래 이교도들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그들이 전에 신봉했던 율법적 의식을 결합시킨 형태로 복음을 재구성하기 쉬운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예루살렘으로 부터 온 유대인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서 율법주의를 강조하였을때 갈라디아교인들 가운데는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대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파급된 유대주의 선동가들의 해독을 제거하고,나아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재강조함으로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순전한 신앙을 되찾기 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이 기회에 자신을 비난하며, 대적하는 자들과 맞서서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참된 사도이며,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진정한 복음임을 천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계기와 목적 속에서 본 서신을 저술하게 되었다.

제 2 장 데살로니가전서

1. 기본적인 배경

1) 저자

오늘날 데살로니가 전서가 바울이 기록한 서신이라고 하는 확실성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거의 일치된 이러한 견해에 동의치 않고 본 서신이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위조자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들의 주장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수 있을 것이다.
첫째, 본 서신은 바울에 의하여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다른 서신들보다 교리적 성격을 훨씬 결여하고 있다. 본 서신은 교리상의 내용에서 볼때 오히려 무의미하다. 둘째로, 본 서신은 율법의 행위로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생각을 공격치 않는다. 세째로, 데살로니가의 새 신자들이 불과 몇개월 이내의 기간에 살전1:7,8 및 4:10에 묘사되어 있는 바와같이 내외적으로 그토록 선한 영향을 끼칠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네째로 유대인들에 관해서 살전2:14-16절에서 쓰고 있는 "격렬한 말"은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 나의 형제로 말미암아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라"라는 진정을 토로한 기자에 의해서는 사용될수 없었을 것이다. 다섯째로,본 서신은 너무나 바울적 성격을 띠고 있다. 본 서신에는 틀림없이 바울이 기록한 서신들에 나오는 귀절들과 닮은 귀절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이는 분명히 위조자의 짓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서신이 바울의 저자임을 명백히 알수 있다.외적인 증거로서는 바울의 전집을 수집한 마르키온의 목록에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무라토리안 정경에서도 언급되고 있으며,이레네우스가 본 서신의 제목을 언급하고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터툴리안의 시대에도 바울의 저술로 인정 받았으며,고대 라틴 역본과 고대 수리아 역본 모두에도 실려 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의 자체에 의해서도 충분히 증명된다. 그 근거들을 보면,
첫째로,본 서신 자체가 바울로부터 보내어진 것임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1:1,2:18) 둘째로 기자가 본 서신을 써 보낼때 그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 사람들은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때 바울과 함께 동역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들은 실라와 디모데이다.(1:1,3:2,6) 세째로 본 서신은 전형적인 바울의 문필형태를 가지고 있다. 즉 본 서신은 데살로니가 전서가 바울의 서신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서조차 바울의 기록임을 인정받은 로마서 고린도전서,고린도후서 및 갈라디아서의 특징과 똑같은 서한문으로서의 특징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받고 있다. 네째는 어휘가 분명히 바울의 사용어휘이다. 다섯째로 어휘 하나하나가 바울이 저자임을 나타내고 있을뿐 아니라,많은 특유한어귀들도,또한 같은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러한 어귀들은 바울의 서신들에서만 발견된다. 여섯째로 본 서신은 바울의 인품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일곱째로 바울의 주요 서신들속에서 선포된 교리와 완전히 조화되지 않는 내용의 기록은 본 서신중에 없다.
중요한 점은 초기 문헌중 어디에도 의문이 없다. 합법적인 유일한 결론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의 저자라는 것이다.

2) 수신자
데살로니가가 수신처라는 전통적인 학설은 거의 확실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여기에는 더이상의 반론이 없다. 데살로니가는 카산더가 창설한 도시인데 명칭은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자매인 카산더의 아내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살로니카라 부르고 있다. 이 도시에는 마케도냐 지방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요,그 지역의 수도이기도 한다. 데살로니가는 항구도시이며,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이며,바울의 선교전략상 이상적인 도시였다.

3) 저작연대 및 장소

본 서신의 저작 연대는 바울이 고린도에 체류하였던 기간과 일치하기 때문에 상당히 정확하게 측정할수 있다.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때 끌려갔던 갈리오 법정과 관계있는 갈리오에 있는 내용이 델피근처에서 발견된 한 비문에 소개된 바가 있다. 이 비문에는 갈리오가 A.D 51-53년 어간에 1,2년정도 총독으로 있었음이 나타나는데 바울은 본 서신을 기록하기 전에 고린도에 혼자 있다가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도착한뒤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 그래서 거의 이 시기를 A.D 51-52년정도이다.
그리고 바울이 갈리오 앞에서 심문을 받았던 때를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사도행전18:12-18은 이 일이 갈리오가 취임한 직후이며,또한 바울이 그 도시에 체류한지,18개월이 끝나가는때에 있었던 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그 시기는 51년정도가 된다.
그리고 본 서신의 기록 장소는 고린도로 추측된다. 사도행전과 본서신을 볼때(1:1,행17:10,14)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과 관계가 있으며, 실라는 1차와 3차 여행에는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본 서신은 고린도에서 기록 되었음이 분명하다.

4) 신학적 가치

데살로니가에 보낸 두개의 서신들은 우리가 바울의 신학적 개관을 이해 하는데 크게 이바지 한다.우리는 이 두개의 서신들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많은 문제들에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성경의 연감과 권위에 관한 교리. 삼위로 존재하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관한 교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와 그리스도와 믿는자의 연합 및 동일성,개인적 정결과 관련되는 성화의 교리,사랑, 직업적 근면,자극 및 기타 영역들이다. 또한 바울은 자신을 모범으로 삼아 다른 사람들을 훈련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관한 중요한 교훈들을 가르치고 있다.
데살로니가전후서가 신학적으로 최대의 공헌을 하고 있는 이유는 이 두 서신들에는 종말론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이 종말론을 요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데살로니가전후에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종말에 관한 여러가지 용어들과 주제들을 조사하는 일이다. "강림하심" 혹은"나타나심"은 가장 빈번히 사용되어 있는 용어들이다.
또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인하여 경건치 못한 자들은 무서운 심판이 있는 반면에 믿는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자로 여기심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2. 역사적인 배경

본 서신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하여 데살로니가시의 역사와 데살로니가 교회에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데살로니가 시의 역사
이 도시는 살로니가만의 윗 부분에 위치한 온천 지대로서 빌립보 성을 건설한 마케도냐의 왕 빌립2세의 양자인 카산더에 의해 B.C 315년에 건축되었다. 또한 이 도시의 이름은 카산더의 부인이며,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누이인 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그후 로마가 마게도냐를 지배했을때 이 도시는 로마의 네 행정구역중 한 지방의 수도가 되었으나 B.C 146년에는 마게도냐 전지역의 수도가 되었다. 한편 로마의 영웅 시이저가 죽은 뒤 내란으로 로마가 혼란할때 데살로니가시는 옥타비아누스편에 가담한 공로로 B.C42년에 자유 도시가 되었다. 그뒤 이도시는 점점 발전하여 바울 당시에는 읍장이라 불리는 행정장관들에 의해 자치적으로 관리 되었고,주민은 대부분 그리스도인과 많은 유대인으로 구성 되었다.
2)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의 설립경위와 바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① 데살로니가 교회의 설립 경위
마게도냐의 첫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증거하였다.(행17:1) 이때 바울은 3주일 동안 회당에서 가르쳤는데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머무른 기간은 3주간이 훨씬 넘은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두 번이나 빌립보교회로 부터 보조를 받았으며,또 많은 사람들이 우상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섬겼는데 이것은 많은 시간이 경과됐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은 야손의 집을 집회 장소로 사용했는데 이곳이 후에 데살로니가 교회로 발전 하였다. 초대 교회는 이러한 대부분이 헌신적인 개인의 가정에서 출발 하였다.
②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
바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고 있었지만 이러한 외부의 압력을 데살로니가 교회는 잘 견디고 있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문제가 되는 것은 내부에서 일어난 잘못된 종말관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생활이 문란해진 점이었다. 그들은 재림이 임박했다고 생각하여 일도 하지 않고 세상에서 해야 할 육신의 일을 등한시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전에 죽은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염려하여 신앙생활에 많은 혼란을 빚고 있었다.

3. 저술 목적

바울이 본 서신을 쓰도록 자극했을뿐 아니라 그 내용을 결정한 것은 디모데를 통해 전해들은 특별한 소식이었음이 분명하다. 먼저 바울은 교회의 성정에 만족을 표시하였으며, 서신전체에서 그의 기쁨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비겁하며, 자기유익만을 도모하는 자라는 유대인 반대자들의 비난에 대해 답변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2:1-12). 그는 유대인의 반대와 핍박에 직면하여서도 인내할 것을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다.그는 기독교로 새롭게 개종한 사람들을 다시 옛날의 기준으로 되돌리려는 이교도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보화기 위해서 기독교의 도덕이 이교의 것보다 우월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재림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고 있다. 그리고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지도자들을 존경하도록 권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은사 체험에 대한 가벼운 암시를 해야 할 필요를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본 서신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인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으며, 초대 기독교 당대의 문제들에 대한 직접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의 보고에 대한 응답으로서 세가지의 주요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서신을 기록하였다. 첫째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에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만족을 표하기 위해서 였으며, 둘째는 바울 자신과 그의 동역자들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대항하여 강력하게 본을 세우기 위해서이며, 세째로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함으로서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거룩함을 계속 구함에 따라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강력히 행한바 있는 행위들을 증진시킬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요약하여 말한다면, 바울이 자신의 인격과 동기에 대한 비방운동과의 정면적인 대결. 잠자는 자들에 인해서 야기된 문제 및 그리스도 재림의 양상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해명. 기쁨과 감사의 표현. 암흑의 나라로 부터 광명의 나라로 이끌림을 받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한 선교사에게 기대할수 있는 그러한 지도와 교훈을 제공하려 함. 이리하여 바울은 새로운 신앙은 이방 세상의 특징인 불륜행위를 완전히 끊을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교회의 공직을 바르게 존중하고,형제들간에 사랑하고,화평을 누리며, 고난중에 있는 자들을 기꺼이 돕고, 세상이 보기에 올바른 행위를 해야 할 필요성때문에 본서신의 저술 목적을 찾을수 있겠다.

제 3 장 데살로니가후서

1. 기본적인 배경

1) 저자

데살로니가 후서가 사도바울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은 의심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전적으로나,혹은 부분적으로 데살로니가 후서가 바울이 기록한 서신임을 부정하는 주장들은 개개주장에 따라 상이하지만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로 살후2:1-12은 말세론적 귀절이다. 이 귀절은 그리스도가 그의 원수들을 정복하고,받게 될 장래의 영광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바울이 도처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있어서의 성장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둘째로 만약에 바울이 살전4:13-18; 5:1-11을 기록했다면, 살후2:1-12이 또한 그의 기록일수는 없다. 왜냐하면,전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임박한 사실로 보고 있음에 반하여 후자는 그렇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세째로 살후2:1-12은 다음 경우들을 가리키는 귀절이다. 네로-불법의 사람을 가리킨다. 그는 당시 이미 죽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실제로 숨어 있는데 곧 되돌아올 것으로 묘사되어져 있다. 다음으로는 베스파시안 황제을 가리키거나 혹은 트라얀의 시대나 확대해 가는 영지주의의 대세를 가리킨다. 이는 바울이 본 서신의 저자일수 없음을 보여준다. 네째로 2:11-13에 나타난 전적 예정설은 비 바울적 귀절이다. 다섯째로 데살로니가 후서는 아주 상당한 부분이 데살로니가전서의 반복이다. 이는 분명히 위조자의 짓이다. 여섯째로 데살로니가 후서는 바울의 붓의 산물로 간주되는 참된 바울의 서신들과 비교할때 너무나 많은 점에서 상이하다. 특히 본 서신은 데살로니가 전서보다 훨씬 더 냉담하고 또한 훨씬 더 유대적 색체를 띠고 있다. 일곱번째로 문안(3:17)의 말이 의심스러워 보인다. 이는 분명히 위조자가 본 서신을 진짜 바울의 것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한 시도이다. 그리고 또 지적한다면,데살로니가 후서의 종말론이 A.D70년의 예루 살렘함락이후에 생겨난 하나의 기독교적인 전망을 대표하는 이론으로서 살전과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의심을 받고 있으며,바울이후에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적인 속성과 기능을 부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서신은 데살로니가 전서보다 구약을 더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이방인들 보다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쓴 것임을 나타내기 때문에 본 서신은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서신은 사도바울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증거를 말할수 있다. 먼저 내적 증거로서는 1:1절과3:17절에서 밝히고 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한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지극한 관심과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증가를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그의 감사(1:3,11,12; 2:13; 3:3-5)는 이미 그가 기록했던 데살로니가 전서에 나타난 자세와 동일하다(살전2:11,12,17; 3:10)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대한 주장(1:1)과 이전 교훈들에 대한 그의 언급(2:5,15; 3:6), 그리고 자신과 동료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한 명령(3:1)등은 데살로니가 전서에 나타난 그의 어투의 특성과 다를바 없다(살전1:1; 5:25)
그리고 외적증거로는 순교자 저스틴이나 폴리갑,이레니우스,터툴리안,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같은 감독, 교부들은 자신들의 저서에서 본 서신이 바울의 저작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최초로 신약성경의 정경문제를 논한 마르시온경이나 무라토리 단편 그리고 고대 수리아 사본과 라틴 사본에서도 그 증거를 찾을수 있다.


2)연대

만약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정확한 것이라고 믿는다면,데살로니가후서는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러 있을때 씌여졌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그 이후에 다시 만났는지의 여부가 알려져 있기 않기 때문이다. 바울의 상황은 대체적으로 데살로니가전서를 썼을때의 상황과 동일하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데살로니가후서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씌어졌음이 틀림없다.왜냐하면, 데살로니가 전서속의 자서전적 부분을 볼때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나는것과 그 편지 자체가 일치 한다는데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반대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로 본 서신은 환란이 극도에 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으나 전서는 그 환란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본 서신에는 내부적인 어려움이 새로운 사실로 등장했으나,데살로니가 전서에는 그것들이 이미 잘 알려진 사실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근거에 의해 그 반론들을 무시할수 있다.
첫째로 본 서신에는 앞서 써 보낸 편지를 확실히 지적하는 구절이 있다(2:15)
둘째로 살전4:1-12 ; 5:12-28에는 몇개의 명령이 있는데 본 서신에서는 그 명령들중 일부가 더욱 강하게 표현 되어 있으며, 불순종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할것인지에 대한 명백한 지시가 있다.
세째는 살전1:6 ; 2:13절에서는 데살로니가 인들이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였음을 암시하고 있으며,본 서신1:3절에서는 그들의 신앙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바울이 감사의 표시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은 자신의 이름을 도용한 거짓서신에 대해 경계하면서 이는 본 서신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내는 두번째 서신임을 밝혀주는 것이다.

3) 저작 장소와 수신인

데살로니가 전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이 두번째 서신역시 고린도에서 썼다. 우리가 아는 한 그 후에는 실라와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있지 얺았다. 베뢰아와 빌립보 교회가 이 서신의 수신처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되어 왔다. 그들은 그 도시에서 유대인들이 바울과 그 동역자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으며, 데살로니가후서에 구약의 인용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베뢰아가 수신처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타당성 있는 주장으로 생각된다.빌립보가 수신처라는 이론은 폴리갑의 인용문에 의해 뒷받침을 받는데 이는 폴리갑이 빌립보를 데살로니가후서의 여러 귀절들의 수신처로 지명한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4) 신학적 가치

이 부분은 데살로니가전서의 신학적 가치와 동일하다.

2. 배경

데살로니가의 회심자들에 대한 바울의 관심은 첫번째 서신을 보냄으로서 끝난것은 아니었다. 그의 사역은 그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자들을 계속적으로 훈련 시키는 일이었다.이 두번째 서신은 단지 데살로니가전서 보다 약간 뒤늦게 씌여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후서의 배경은 단지 가벼운 사건이 몇가지 더 첨가되었을뿐 데살로니가 전서의 배경과 동일하다(역사적 배경은 데살로니가전서를 참고하라) 바울이 아직 고린도에 있을때 그는 이 교회의 형편에 대한 소식을 좀더 듣게 되었다. 어떤 경로로 그 소식이 바울에게 전해졌는지는 잘 알수 없다. 그러나 그 소식의 내용은 바울의 마음을 움직여 데살로니가후서를 쓰게 할 만큼 중요했음에 틀림이 없다.

3. 저술목적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온 순서가 정확하다고 가정 한다면 데살로니가 전서는 게으름의 문제를 다루는데에 바울이 기대한 만큼 효과적이지 않았으며,재림에 대한 새로운 오해들이 발생하였다고 결론 내릴수 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들은 주의 날이 이미 지나갔다는 가짜 바울 서신을 받았으며,그러한 인상을 시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경로를 통해 잘못된 가르침이 바울의 이름과 연관 되었고 바울은 그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데살로니가 후서를 썼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여기에 더 나아가서 이야기 한다면, 바울은 첫번째 서신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보내긴 했지만 그에게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전보다 심한 핍박을 당하고 있었고 교회 내부의 신앙문제는 더욱 악화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 상황은 그리스도인에게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감에 따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실망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바울의 이름을 도용한 위조편지와 거짓된 가르침들은 점점 심해지는 박해 상황을 볼때 이미 종말이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확신시켜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핑계로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지 않는 자들이 데살로니가 전서를 쓸때보다 더욱 증가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상과 같은 문제들을 염두해 두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본 서신을 써 보냈다.
첫째로 바울은 미래에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때 주어질 상급과 형벌에 대해 서술함으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고난의 상황에서 더욱 인내할것을 권면 하였다. 둘째로 바울은 종말이 이미 임했다는 그릇된 종말관을 반박하기 위해 주의 재림시 있을 중요한 사건들을 명백히 밝혔다. 세째로 바울은 종말을 핑계로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바로잡기 위해 교회가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 상세한 교훈을 주었다. 네째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구두로나 혹은 서신으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들을 계속 고수해 나가도록 권고하고 잘못된 재림에 속지 말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목적과 함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동역자들을 기도할때에 기억해 주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보호에 맡기고 마음을 굳게 하여 언제 어떠한 처지에서나 은혜와 평강과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좋은 소망을 품으라고 하는 귀절들이 여기저기에 있다. 이와 같은 간단한 목적개요로 비추어 볼때 본 서신은 분명히 재림서신이라고 말할수 있겠다.

제 4 장 고린도전서

1. 기본적인 배경

1) 저자

고린도전서속에 나타나 있는 자료가 바울에게서 온 자료이건 아니건 간에 바울이 고린도전서의 저자라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널리 인정되어 왔다. 더욱이 본서는 고등비평학자들에게도 가장 논란이 적은 책중의 하나로 인정받을 만큼 확실한 정경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볼때 바울 저작설에 대해서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먼저 내적 증거로는 본서의 내용가운데 바울이 저자라는 사실이 직접적으로 나타난다(1:1-3,12-17; 3:4,6,22; 16:21) 그리고 본 서신의 문체와 언어,사상등이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일치한다. 또한 고린도 교회가 본 서신을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여 본존해 온 사실도 바울 저작설에 대한 강한 입증이 된다. 그리고 본서에 언급된 사건들과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고린도 전도 여행기가 일치한다.
한편 외적증거로는 로마의 클레멘트는 고린도인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본서를 축복받은 사도바울의 글이라고 칭송하였다. 또한 폴리갑의 빌립보인엑 보내는 서신을 비롯해 이레니우스의 이단 반박론,터툴리안의 이단 반박론,익나티우스의 서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저서등에서도 본서의 저자가 사도바울임을 증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라토리 단편과 마르시온경에서도 본서를 각각 바울 서신의 첫부분과 갈라디아서 뒤에 배치하여 바울이 그 저자임을 밝히고 있다.

2) 수신자

사도바울은 본 서신의 서두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있기를 원하노라"(1:1-3)는 인사말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인사말을 볼때 본서의 수신자는 바울이 손수 개척했던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주축으로 하여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 들였던 모든 성도들임을 알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본 서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대상으로 그 당시의 성도에게만 한정된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성도들까지 그 수신자로 포함한다.

3) 기록연대 및 장소
우리는 이 서신의 기록연대를 이 서신의 내용과 관련하여 추정할수 있다. 이 서신은 바울이 오랫동안 에베소에 체류하던 마지막 무렵에 에베소에서 기록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마게도냐를 방문할 예정이며,그 후에 고린도에 갈 계획이지만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 머무를 것이라고 고린도교회에 말하고 있다(16:5-8) 이 점과 관련하여 행19:20; 20:1,2의 언급과 일치하는 16:19절을 보면 이 서신은 A.D56년 곧 바울이 고린도를 처음 방문한지 5년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 증거를 보면,먼저 바울 자신이 이 편지를 에베소에서 썼다고 말하고 있다.(고전16:8,9,19) 둘째로 바울은 A.D51년 가을에 고린도를 처음 떠난후 몇년동안에 걸쳐서 이 편지를 썼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아볼로가 고린도에 체류한후, 그리고 바울이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에베소에서 마게도냐로 보내고 디모데를 고린도로 보낸후에 씌여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진전되어가고 그들의 소식이 바울에게 전해지기 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다.
이 편지를 고린도교회로 전한 사람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고린도전서16:17에 의하면, 이 편지의 전달자들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인듯하다. 그들은 고린도에서부터 바울에게로 와서 바울과 함께 지내었다. 고린도전서 16:18절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 세 사람에게 존경을 표하라고 말한점으로 볼때 그들이 고린도로 다시 돌아갔다고 결론짓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 세사람 편에 고린도전서를 고린도교회로 보냈다고 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4) 신학적의의 및 가치

몇가지 점에 있어서 바울과 고린도교회는 매우 특별한 관계를 띠고 있다.그는 이 교회를 세웠으며,동시에 이 교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 하였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을 근심하게 했었다. 바울은 이교회를 매우 지혜롭게 처리해야 했으며, 따라서 바울은 이일을 위하여 오래 참고 견뎌야 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는 때때로 바울에게 깊은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교회가 날로 확장되며, 주위에 영향력을 미치기를 소망하였다. 따라서 이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은 특별히 강했다. 그래서 이 서신은 그의 개인적인 성품을 잘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이 서신의 특별한 관심은 분명하게 이교와 투쟁하는 기독교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방사회속에 설립된 교회의 실천적인 문제들과 기독교 사회속에 세워진 교회의 실천적인 문제들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고린도전후서응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전서에는 몇가지 신학적인 사실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예배드리는 교회의 공통적 신앙규범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일상 생활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15장에서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을 믿어야 하는 확실한 이유를 제시해주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시키고 있다. 또한 11장에서는 주의 만찬의 교리를 효과적인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으며,동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지한 마음으로 주의 만찬에 참여할라고 충고해 주고 있다.
바울은 5장과 6장에서 그 교회내의 근친 상간 행위와 간음 행위를 엄한 말로 비난 하였고,모든 성적인 부도덕한 행위를 나무랐다. 그리스도인이 결혼을 해야 할것인지,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또한 그리스도인이 결혼한 상태에서나 결혼하지 않는 상태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실제적인 지침을 말하고 있다. 6장에서는 믿는 성도가 다른 성도를 세상법정에 송사하는 것과 같은 곤란한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그리스도인답게 중재할 것을 제안하였다. 8장과10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다른 형제에게 행해야 하는 책임과 대조해가며,성도의 자유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교회론의 분야로서 교회에서의 바른 예배 행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은사와 교회를 위해 그러한 은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12장부터 14장까지 자세하게 상술해 주고 있다.

2. 역사적 배경

1) 일반 역사적 자료 및 고고학적 자료를 통한 배경
고린도의 역사적 배경을 살피면서 먼저 일반적인 역사적 자료를 통한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것 같다. 먼저 고대의 고린도시는 북동쪽의 아티카와 남쪽의 헬라땅 펠로폰네소스 사이에 있는 지협에 위치해 있었다. 고린도시를 두고 동쪽으로 8Km정도 떨러져 에게해가 있으며,서쪽으로는 이오니아해가 있다. 고린도의 동편항구 겐그레아는 살로니카 만에 접해 있었고 서편은 고린도 만에 접한 레게온 항구가 있었다. 고린도는 이처럼 바다가 인접해 있었고, 북동쪽으로 72Km밖에 떨러지지 않는 가까운 지점에 아덴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인 상업중심지와 군사 요충지로서의 역활을 담당했다. 고린도 시는 아프로디테 신전을 모시고 있는 높이 540m나 되는 높은 암석 요새인 아크로 고린도의 북쪽 가파른 경사지 아래 위치해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고린도는 소아시아,수리아 베니게,애굽에서, 온 배들을 비롯하여,이달리야,시실리,그리고 서버나에서 온 배까지도 드나 들었다. 고린도는 "바다의 교량"이라고 불리우기도 했고,또한 "펜로폰네스의 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고린도를 부유하고,모든 것이 풍부한 도시로 생각했었다.
B.C 3000년 후반기경 청동기 시대에 고린도를 비롯한 전헬라 지역에 헬라인의 선조로 생각되어지는 이주민들이 칩입해왔다. 그때 부터 고린도에는 새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이후의 모습은 잘 알수 없으나,고린도는 트로이 전쟁시대 호머가 그 도시를 부유한 고린도 라고 묘사할 정도로 대단한 번영을 이루었던것 같다. 철기시대동안 고린도는 영토도 확장되고 부도 증가 되었다.B.C800년경 고린도는 경제적 중심지와 군사적 중심지로서 상당한 지위를 획득 하였다. 헬라도시 국가들 사이의 세력 다툼 속에서도 또한 마게도냐의 필립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하에 전헬라가 종속되는 와중에서도 고린도의 지역적 중요성은 더욱 빛났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후 헬라가 마게도냐의 지배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던 차에 로마가 개입하게 되었고, 고린도는 B.C146년에 루기오 무미오가 이끄는 로마인들에 의해 멸망 되었다. 그후 B.C46년에 쥴리어스 시이져에 의해 재건되어 콜로니아 라우스 줄리아 고린투스 라고 불리우게 되었다.시이져는 고린도에 퇴역한 로마 군인들과 자유민을 이주 시켰다. 아구스도 통치 이후 시대로 고린도는 로마식 건축 양식을 비롯한 로마식의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으며,고린도는 로마가 통치하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다.
로마의 통치를 받고 정치적 중심지로서 역활을 담당하는 동안 고린도는 또다시 번영을 이루었다. 고린도는 해상 무역 및 발달된 예술과 산업을 통해서 거대한 수입을 얻었다. 고린도의 도기와 고린도산 놋쇄는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포세이돈 신전에서 열린 이스드미안 경기의식은 헬라식 생활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바울은 아마도 A.D50  가을 즉 지식이 고로로 발달한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직후에 중요하기는 하지만 도덕적으로 문ㄹ한한 이 고린도시를 방문했던것 같다.사도바울이 A.D 50년에 고린도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은 로마총독 갈리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사도행전18:12절과 A.D52년 1월과 8월 사이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델피에 있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비문에 새겨진 아가야 지방의 총독 갈리오에 대한 기록을 봄으로서 확증할수 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 추측할수 있듯이 고린도 교회내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유하였다. 그런가 하면 상인방 벽돌이 읽을수 있을 정도로 히브리인의 회당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는 점은 고린도에 회당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한다. 시장의 한가운데는 심판대 즉 재판석이 있었다. 그리고 아폴로 신전을 포함하여 오늘날에도 그 유적지를 볼수 있는 많은 신전과 사당외에 시의 북쪽과 서쪽에 두개의 극장이 세워져 있었다. A.D10세기 경까지 베마의 페허 위에 한 교회가 존재했었으나,베마의 상부구조에는 그 당시 벌써 무너져 있었다. 그러나 시장 동편에 위치한 쥴리안 바실리카에서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명문에는 성바울의 교회 라는 문자가 새겨져 아마도 베마의 페허위에 세워졌던 교회에서 나온듯 하다.

2) 신약시대의 고린도
신약시대에 고린도는 아가야 라는 로마행정구역의 수도였으며,그 지역 총독의 거주지였다. 사실상 바울 시대에 고린도는 그리이스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이 도시는 B.C146년 뭄비우스 집정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소수의 신전들과 기둥들만이 남았다. 그때오 부터 1세기가 지난후에 항구와 군사기지로서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한 쥴이어스 시이져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이탈리아인들을 거주하게 하였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자유민 이었다. 이 도시는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리고 고린도시는 매우 자유 분방하고 복합적이며, 신분이나 형식같은 것을 그다지 중요시 하지 않는 비교적 민주주의적인 사회였을 것이다. 이런것은 본 서신에서도 볼수 있다. 즉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분파 및 분쟁, 부도덕한 범죄 행위,은사의 오용등은 바로 이러한 고린도인들의 성격이나 사회 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고린도는 무역항이었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고린도의 또 하나의 고유한 특성은 고린도의 귀족들,지배계급들은,가문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부유한 사람들, 즉 상업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옛날의 명예로운 혈통이 가져다주는 권위의식이나 훈련된 지성, 혹은 예술적 재능 같은 것이 없었다. 무역은 아무런 창의력이나 도덕성을 키워주지 못한다.그것은 다만 물건들을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개 사물을 자신의 상업적 사고로 대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 대신에 물질을 숭배하고,명예보다는 이윤을 더 추구하고,저울에 달면 무게가 나가지 않는 정신적 능력이나,도덕적 힘,영적 소망과 같은 것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 고린도의 상인들중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들 이었다. 그런가 하면 퇴폐적인 모습도 나타나고 있었다. 방탕함이 만연했으며, 거리뿐 아니라 신전에도 창녀들로 들끓었으며,그 창녀들의 상당수는 아프로디테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에서 일하는 여사제들이었다. 이도시는 자생적인 것이든, 이식된 것이든 간에 온갖 해로운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났고 사치와 방종이 조장되는 악의 온상이 되었으며,결국 타락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3) 고린도교회의 설립경위 및 상황
고린도 교회의 설립겨우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들을 바탕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고린도인들이 처음으로 복음을 대하게 된 시기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도중인 A.D50년 경이다. 그 당시 아덴으로 부터 이곳으로 왔던 바울은 처음에는 타락하고,부패한 이 도시의 죄악상을 목격하고,심히 두려워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박히신것을 전파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결심후에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라는 훌륭한 동역자를 만나게 되었으며, 얼마 안되어 마게도냐로 파견 되었던 디모데와 실라가 돌아옴으로서 본격적으로 고린도의 복음 사역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규례대로 안식일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대상으로 성경을 강론 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유대인들로부터 격렬한 반대를 받아 급기야는 이방인에게로 돌아가리라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회당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라는 이방인의 집으로 옮겨 회당장 그리스보를 비롯해 많은 고린된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이러한 경위에 따라 설립된 고린도 교회는 좀차 여러가지 내외적인 문제와 신앙 윤리적인 논쟁으로 인해 일대 혼란을 겪게 되었는데 그 심각성은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까지 이르렀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이 도시의 주민들의 성격이나,환경에서 추측할수도 있지만 우리는 본서와 고린도 후서의 내용을 통하여 그 상황을 보다 확실하게 추측할수 있다. 이 도시의 주민은 어느 도시보다도 다양한 부류로 구성 되었다. 즉 쥴리어스 시이져에 의하여 이주한 식민 이민단들의 후손, 대도시 고린도에 매혹되어 몰려든 헬라인들,유대인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모든 지역으로 부터 이방인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고린도 주민들이 지닌 특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단연코 그리이스적인 특성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아마도 유대인이 아닌 그리이스인 이었을 것이다. 오랜세월 동안 그리이스인들은 사색하기를 좋아했으며,상상력이 풍부했고,쾌락을 즐겼으며,파당성을 띠는 드으이 특징을 지녀왔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고린도 교회는 믾은 유대인 개종자들과 더불어 바로 위에서 언급한 특성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세련된 이교적 교육을 받았으며,방탕으로 인도하는 온갖 유혹에 둘러싸여 있었으며,비록 최고선은 아닐지라도 선한 가치를 지닌 쾌락을 추구하도록 배웠으며,많은 철학자들과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따라서 본서에 묘사된 고린도 교회도 분명히 이러한 특성을 보여 준다. 그들은 바울파 아볼로파,게바파, 그리스파로 파당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고린도 교회의 또 다른 커다란 죄악은 여러가지 형태로 제7계명을 범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철학자들 까지도 이런 부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여러가지 종교의식과 축제에는 다양한 음행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종교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고린도교회의 자유로운 경향은 이들이 이교의 희생제물을 드리는 일과 이교의 종교적인 축제에 참여하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이들은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도 거리낌없이 먹고, 신전에서 거행하는 축제에도 참석하는 일에 익숙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공중집회를 하는데 있어서도 각파마다 무질서하게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가지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 안에는 많은 순전하고 모범적인 교인들이 있었으며, 이교회를 무질서 하게 하는데 다소 책임이 있던 무리들 가운데도 굳은 믿음을 지니고,경건한 생활을 하던 이들도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다고 여김을 받는 이들에게 문안하며,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동시에 하나님이 이들을 주 예수의 날까 지 흠이 없이 보전하시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언급하게 있다.

3. 저술 목적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한 목적은 1:11과 16:17절을 통해 나타나는 다음 두가지 사실에 있다.
첫째로,바울은 글로에의 집 사람들의 보고를 통해서 제기된 고린도 교회의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 해답을 주고자 본서를 기록하였다. 그 문제들이란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바울의 사역에 대한 오해(1-4장),근친상간과 간음죄를 비롯해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들(5장),법정에서 다른 성도들을 송사하는 비 그리스도적인 행위(6장)등이다.
둘째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대표자들에게서 온 편지(7:1)를 받고 거기에 제기되어 있는 몇가지 질문에 답변을 주고자 본서를 기록하였다. 그 질문 사항들은 혼인에 관한 문제(7장),우상의 제물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해함으로서 생기는 방종한 행위에 관한 문제(8-10장),공공 기도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일,무질서한 만찬, 성령의 은사의 활용등과 같은 예배에 관련된 여러가지 무질서한 행위들에 관한 문제,(11-14장),그리스도의 부활 및 육체의 부활에 대해 그릇되게 이해하는 문제(15장) 등이다.

제 5 장 고린도후서

1. 기본적인 배경

1) 저자 및 수신자
본서의 저자는 바울이라는 견해가 정설로 되어 있다.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 학파의 기수로서 13권의 바울서신중 무려 9권을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튀빙겐 학파의 창시자인 바우르 조차도 본서를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ㄹㅎ마서와 함께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했다. 본 서신이 바울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알려주는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내적 증거로는 본서의 내용에도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람이 바울이라고 두번 언급되어 있다(1:1; 10:1) 그리고 외적증거를 든다면,폴리갑, 이레니우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그리고 터툴리안과 같은 초대교회 교부들은 본서를 바울의 서신으로 인용했다. 또한 본 서신은 마르시온의 아포스톨리콘과 무라토리 단편에도 바울의 서신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본서의 수신자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었다(1:1).

2) 기록연대 및 장소

본 서신의 기록연대는 고린도전서의 기록연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여러가지 자료를 통하여 잠정적으로 결론에 도달할수 밖에 없다.
첫째로,고린도 전서는 봄, 아마도 유월전 직전에 씌어져 고린도 교회로 보내졌을 것이다.(고전5:7-8, 15:20절 참고)
둘째로 고린도후서는 아마 가을에 씌어졌을 것이다.(행20:6, 20:3, 고후12:14, 13:1을 참고하여 보면 암시한다)
세째로 고린도 전서와 후서는 18개월 이상의 시간적인 간격을 사이에 두고 씌어졌을 것이다. 물론 같은 해로 추정할수 있겠지만 고전16:6절에 언급되어 있는 겨울이 행20:3절에 암시되어 있는 겨울로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후1:15,16절의 기록되어 있는 계획과 사실상 다를바 없는 잠정적인 계획을 말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후8:10; 9:2절의 지난해가 6개월의 시간적인 간격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이상의 것들을 종합하여 보면, 고린도 전서는 A.D55년 봄에 보내졌을 것이고,고린도후서는 A.D56년 가을에 보내졌을 것이다. 반면에 고후10-13장이 고린도후서1-9장보다 더 이후에 씌여졌다고 한다면,이 마지막 네장은 A.D56년 가을부터 씌여졌을 것이고, 처음 아홉장은 A.D55년 가을과 A.D56년 초가을 어간에 보내졌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 발생한 주요 사건들의 잠정적인 연대를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수 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A.D 55년 봄
가슴아픈 방문 A.D 55년 여름 혹은 가을
준엄한 편지 A.D 56년 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남 A.D 56년 봄
바울이 바게도냐에 도착함 A.D 56년 여름
디도가 마게도냐에 도착함 A.D 56년 여름
고린도후서 A.D 56년 가을
그리고 바울이 이 서신을 쓴 장소를 보면 고린도후서 안에 언급되어 있는 몇 귀절들은 바울이 이 서신을 쓸때 마게도냐 지역에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7:5; 8:1; 9:2-4)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은 고린도후서가 "빌립보로부터" 씌어졌음을 명기해 놓은 이 서신의 필사본들에 의해 확증되고 있다. 또한 고린도후서의 "마게도냐"는 빌립보를 의미하고 있다(빌4:15절 참고)

3) 통일성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고린도후서의 통일성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들은 본 서신이 고린도에 보낸 바울의 초기 편지들의 단편을 하나로 묶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그들이 근거로 삼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고린도후서2:14-7:4절의 말씀이다.
몇몇 학자들은 본서신의 6:14-7:1절을 제외한 2:14-7:4부분을 "준엄한 편지"이전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써 보낸 독립된 편지라고 주장한다.
둘째는 고린도후서6:14-7:1절의 말씀이다.
이들이 문제를 삼는 이유는 이 귀절은 독립적인 단위를 형성하고 있으며,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대해 어떤 특별한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 귀절은 6:13로부터 7:2절에 이르는 사상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이 귀절은 자유의 사도인 바울과는 온당치 않게 바리세파 사람들의 배타주의를 밝혀 놓은 것이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이귀절은 쿰란 종파의 신학과 매우 흡사한 점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바울의 사상 전개 방식이 현대와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전혀 문제시 되지 않는다.
세째는 고후 8-9장이다.
어떤 학자들은 9장은 8장의 중복일뿐만 아니라,바울이 고린도가 아닌 아가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게 보낸 독립적인 서신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주장은 증거가 없으며, 그런 선입견을 버리고 8,9장을 대한다면, 단순한 반복이 아님을 알수 있을 것이다.
네째는 고린도후서 10-13장의 말씀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후서 10-13장이 고린도후서 1-9장보다 이전에 씌여졌다는 견해가 있으며, 고린도후서10-13장이 고린도후서 1-9장보다 이후에 씌여졌다는 견해가 있다. 이들의 주장은 공통적으로 본 서신10:1에서 어조가 전환되어 있다고 보고 본 서신이 1-9장과 10-13장의 독립된 부분이 결합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본서의 전후 문맥과 내용을 볼때 이러한 견해들에 대한 뚜렸한 증거를 찾을수 없다.
이상에서 볼때 일부 학자들의 견해는 본 서신이 단일 편지이기 때문에 어떤 불일치의 흔적이나 변동이 있을수 없다고 인정한 초대교부들이나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의 전통적 견해와 배치된다. 뿐만 아니라 본 서신의 일부가 고린도 교회의 실제 상황과 다르거나 모순이 있다는 그들의 견해는 바울 당시의 고린도 교회 상황이나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지극히 단편적이고,적은 일부분의 자료만을 가지는 여건을 고려할때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고린도후서가 통일성을 지닌 한편의 서신이라는 견해에 동의한다.
그 논증을 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고린도후서가 원래 두 서신이었다가 한 서신으로 나중에 합본되었다는 가정을 허용할 만한 사본상의 다양한 증거가 없다는 점, 둘째는 1-9장에 감사에 넘치는 어조가 나오지만 그러나 이 어조만이 이 부분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1:23절참고) 또 10-13장에 과격한 어조가 나오지만 그러나 이 어조만이 이 부분에서 발견되는 것은 아니므로(12:20절참고) 이 두 부분이 양립할수 없다는 점을 거의 극소화 시킨다는 점. 세째는 10-13장이 1-9장보다 연대적으로 빠르다고 하며,과격한 편지의 일부가 바로 10-13장 이라고 보려는 시도는 본 서신의 통일성을 지지해 주는 사본의 증거로 미루어 보아 아직 확실한 견해가 되지 못했다는 점. 마지막으로는 과격한 편지의 일부가 현존한다고 시사하는 주장들의 불확실등이다.

4) 특별한 문제들

[1] 가슴아픈(혹은 중간) 방문
① 사실성
고린도 후서의 몇몇 귀절들은 바울이 이미 고린도를 두번 방문했으며,그 두번째 방문이 가슴아픈 방문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고후12:14과 13:1,2절은 이전에 두번 방문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고후2:1과12:21은 이전에 있었던 두번의 방문중 한번은 근심스러웠다고 말한다.
② 방문시기
가슴아픈 방문에 관해 고린도전서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나 고린도후서에서는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똑같은 결론, 즉 가슴아픈 방문이 고린도전서와 후서가 씌여진 어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바울은 디도로부터 준엄한 편지의 결과를 듣고서 고린도후서를 썼기 때문에 가슴아픈 방문은 고린도전서를 보낸후와 준엄한 편지를 보내기 전에 이루어졌다. 즉 바울이 준엄한 편지를 보낸후에 고린도교회를 방문한 것은 아니다.
③ 방문의 동기와 목적 그리고 결과
고린도교회가 고린도전서를 받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때에도 교회안의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아마도 바울을 추종하는 자들은 바울의 적대자들과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로 부터 달갑지 않는 소식을 받고 고린도전서의 효과를 보완하는 편지를 서둘러 보내야 했고 유대주의적인 거짓사도들이 고린도에서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더이상 손상시키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가슴아픈 방문기간에 일어났던 일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바울은 음란한 죄를 지은 사람들을 꾸짖으기는 하였겠지만 징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다시가면 용서치 않으리라(고후13:2)의 경고를 보면서 알수 있다. 그리고 바울은 아마도 외부에서 교회로 들어온 자나,혹은 고린도출신의 교인들에게서 모욕을 당한것 같다. 그래서 그는 가슴아픈 방문이라고 말한것 같다. 아무튼 짧은 방문을 통해서 그는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일로 인하여 금심하였다.(고후2:5-11; 7:12) 그래서 바울은 디도를 상당히 설득한 다음(고후7:14) 자신의 개인적인 사절로서 준엄한 편지를 전달하고 연보를 모금하도록 고린도 교회로 보냈다.
[2] 준엄한 편지
"내가 큰 환란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것이 아니요,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2:4)" 바울은 준엄한 편지 ,근심케 한 편지, 혹은 눈물의 편지로 알려져 왔던 것을 이와같이 묘사했다.
① 목적
준엄한 편지를 쓴 일반적인 목적은 고린도 교회를 깨우쳐 불의를 행한자를 훈계하게 하려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고린도후서는 이 편지를 쓰는 4가지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로,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다시 가슴아픈 방문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1:2-2:4) 둘째,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알리기 위해서다. 세째로,바울은 그들이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순종하는지 시험하려고 했다. 네째 바울은 영적 아버지인 바울을 위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참된 관심과 사랑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게 나타나게 하려고 했다.
② 결과
이 편지의 결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행동에 관심을 가지고,뉘우치고,염려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다시 오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의분케 했던 수치스러운 일을 했던 자들을 처벌하기에 몰두했다. 바울은 불의를 행한 자들을 처벌하는 일을 멈추고 이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스스로의 죄를 뉘우친 불의한 자를 용서해 주기를 원했다(고후2:6-8)
③ 준엄한 편지란 무엇인가?
준엄한 편지란 어떤 편지를두고 하는 말인가에 대한 3가지 견해가 있다. 먼저 고린도전서라는 견해가 있으며, 또하나는 고린도후서10-13장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편지라는 견해와 마지막은 분실된 중간편지라는 견해이다. 이상과 같은 3가지의 견해 중에서 3번째 견해가 지배적임을 알수 있다.
[3]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
A.D 52년부터 A.D57년까지 예루살렘 성도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자신이 세운 이방교회들에서 연보를 모금하기에 자신의 상당한 시간과 정열을 쏟았다.
① 기부자들
사도행전20:4절이 모금한 연보를 전달하기 위해 바울과 함께 마지막 방문지인 예루살렘에 동행했던 자들 즉 몇몇 니방교회가 임명한 대표자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② 수혜자들
구제금은 가난한 자들로 지칭해온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었다.
③ 바울에게 있어서 연보모금이 주는 의미
이것은 먼저 형제애를 들수 있겠다. 그리고 연보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임을 효과적으로 나타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이방전도를 미심쩍게 여기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던것 같다. 또한 연보를 통해 동지중해 연안에서의 바울의 사역을 절정을 이루게 해주었으며,바울이 약속했던 것을 이행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④ 연보의 수락
바울은 예루살렘 성도들이 구제 연보를 거절하지나 않을까 염려 하였지만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때 예루살렘 성도들은 그 구제 연보를 기쁨으로 받아드렸다.
[4] 고린도 교회의 바울 적대자들
① 적대자들은 누구인가?
몇몇 학자들은 고린도후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적대자들과 고린도 전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적대자들이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들은 구별되어야 한다. 바울의 적대자들이 유대인들이었다는 주장은 널리 인정되고 잇다. 그러나 그들이 유대주의자들 이었을까? 하례가 구원의 선행조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유대주의자라고 정의 한다면 바울 적대자들은 유대주의 자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고린도후서는 할례에 대한 논쟁을 벌인 어떠한 흔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이나 그리스도안의 한형제됨의 기븜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관습을 강요하려는 사람을 유대인이라고 정의 한다면, 유대주의자라는 이름을 붙일수 있다.
② 적대자들과 예루살렘과의 관계
고린도 교회의 바울의 대적자들과 예루살렘교회, 특히 세 기둥 사도 혹은 열두 사도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여기에는 세 견해가 있음을 볼수 있다. (1) 예루살렘에서 공식적으로 파송된 자들 (2) 열두사도의 인지와 묵인으로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열두 사도의 뜻을 잘못 전했던 일부 공식적인 임무를 띠고 파송된 자들 (3) 유대주의의 강령을 지키기 위해 유대로 부터 스스로 들어와 열두 사도 특히 베드로의 권위에 호소했던 자들. 학자들은 각각의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세번째가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본다 그 근거로서 몇가지를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들이 팔레스타인 출신이었다는 것을 추론해 볼수 있다(고후11:22과 빌3:15절을 비교) 둘째는 아마도 우리는 고후11:5과 12:11절의 지극히 큰 사도들과 11:13절의 거짓사도들을 구별할수 있다. 세째로 유대에서 온 어떤 사람들은 열두 사도의 인증없이 열두 사도들의 권위를 빙자하여 행사하기도 하고,다른 사람들은 특정한 위임장 없이 예루살렘을 떠났던 것이 분명하다. 끝으로 고린도 교회의 한 당파는 베드로의 이름을 빌어서 예루살렘에 호소한 선례를 이미 남겨 놓았다.
③ 적대자들의 가르침

바울 적대자들의 첫째 목적이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서서히 약화시켜 무너뜨리려는 것이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바울의 추방,적어도 고린도교회 안에서 만은 추방시켜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종으로 신임을 얻으려는 의도로 교인들을 가르쳤다.

2. 역사적 배경

이 부분에 대한 것들의 자세한 내용 즉 고린도시와 교회에 대한것들은 고리도 전서의 역사적 배경을 참고 하기 바란다.
여기에서는 다만 바울의 에베소 전도에 대한 언급을 잠깐 하기로 하겠다. 바울의 전도여행중에서 에베소와 그 인근지역에서 보냈던 30개월 내외의 기간만큼 정확히 재구성하기 힘든 기간은 없을 것이다. 이 기간은 소란스러웠던 기간이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많이 가졌으며,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기적을 베풀고,또한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 시켰다. 바울은 복음전도에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이에 병행하여 그를 시기하는 적대자들도 많았다. 더메드리오 소동이 실제로 바울로 하여금 에베소를 떠나게 한 원인이 되었든지 그렇지 않았든지 간에 바울은 에베소에서 유대인들의 반대에 직면했던 것은 말할것도 없고 아데미 신전의 신봉자들의 자신에 대한 적대감이 극도에 달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음에 틀림없다.

3. 저술목적

바울이 이 서신을 쓴 데에는 몇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첫째 바울은 디도에 의해 전달 되었고 보완되었던 자신의 준엄한 편지에 대해 고린도교회 성도드르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자신에게 대단한 위로와 기쁨이 되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둘째는 자신의 다음 방문전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예루 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그들의 약속된 연보를 완수하도록 권면하고 싶었다. 세째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스스로 반성하고 자신들을 시험해 봄으로서 곧 있을 바울의 방문을 준비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참사도와 거짓사도들을 구별하는 타당한 기준을 찾을수 있으며,바울도 훈련시켜야 할 수고를 덜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부수적인 목적들도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아시아에서 당한 심한 환란을 알려서 앞으로의 전도여행을 위해 그들이 기도해 줄것을 청하고 싶었으며,바울은 그가 여행계획을 변경한 이유를 말하고 싶었고 잘못을 뉘우치는 불릐를 행한 자들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다시 사랑하도록 권면하고 싶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우상을 섬기는 어떤 자들과도 교제하지 말라고 주장하고 싶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의 참 본질과 고귀한 소명을 기술하고 싶었다. 그런가 하면,자신의 사도직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함과 고린도 교인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함에서 본 서신을 쓰게 되었다고 말할수 있겠다.

제 6 장 로마서

1. 기본적인 배경

1) 저자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썼다는데 대해서는 큰 이론이 없다. 그러나 바울의 전체서신안에 나타난 교리적인 면을 따져보면,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썼다고는 할수 없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다.(20세기초 네델란드 학파)
로마서는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후서와 함께 바울의 가르침에 중요하고 기본적인 자료를 제공해주는 네 서신중의 하나이다. 바울과 로마서의 저자 갈라디아서의 저자,고린도전후서의 저자가 동일인물로 명백하게 인정되어 오기 때문에 어떤 신학적 목적을 위해서 이 서신들의 저자를 문제삼는 것은 유익하지 못하다.

2) 기록장소와 연대

바울의 활동과 관련된 연대는 거의 확실치 않다. 그러나 몇몇 확실한 연대들 가운데 하나는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으로 부임하려고 고린도에 온 A.D51년 여름이다. 이 일후에 바울은 고린도에 "여러날" 유하였다.(행18:18) 그는 아마 52년 봄에 가이사랴와 예루살렘에 갔으며, 돌아오는 길에 안디옥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그해 겨울을 보냈을 것이다. 56년 말기에 그는 고린도에서 석달을 보냈으며,57년 몸에 예루 살렘으로 가는 그의 마지막 여정에 올랐다. 그가 로마서를 쓸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은 끝났던것 같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때 로마서를 쓴 시기는 56년 말기가 아니라 57년 초기인듯 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가서 고후8-9장을 썼을 당시 그 모금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서를 기록한 장소는 고린도이다.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고린도의 동쪽 항구인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 일꾼 뵈뵈에게 본 서신 전달의 책임을 맡겼던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거주하였던 집주인인 가이오에 대한 언급도 바울이 그 당시 고린도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그 이유는 가이오가 바울의 고린도전도중에 회심한 대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린도시의 재무관이었던 에라스도가 문안하는 내용이 언급된 것도 좋은 증거라 할수 있다. 딤후4:20절에 의하면,그는 고린도에 거주 하였으며,1929년에 발견된 고린도의 비문에도 그가 그 지역 공화당의 관장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3) 수신처
처음에 나오는 인사말에 본 서신의 수신자는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자 라고 "표현 하였다. 그런데 가장 오래된 사본들에는 본 서신의 서두에 로마인들에게 라는 간단한 표제어가 붙어 있다.그런데 그러한 표제어를 바울이 직접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표제어는 2세기 중 어느 시기에 교회가 본 서신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견해를 첨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몇몇 사본들에는 이 표제어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것을 이유로 혹자는 본 서신을 특정한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회람 서신"으로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견해는 본 서신의 수신자가 로마교회의 성도들이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 특히 본 서신의 서두와 결론부분에 있는 내용은 본 서신이 어느 특정한 교회에 보내는 글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데 그 교회가 바로 로마교회라는 점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2. 역사적인 배경

이 시대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하여는 자세히 언급할수 없다 따라서 대강 몇가지를 나누어서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로마교회의 상황과 로마교회의 문제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의 바울의 상황등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로마교회의 상황을 보면, 로마교회의 기원에 대해서는 참으로 모호하다. 자연 발생적인지 아니면 사도에 의해 설립되었는지 확실한 증거가 없이 모호한 상태이다. 그리고 그 교회의 상황에 대해서도 단서가 없다. 만약 로마서 16장이 바울이 쓴 원본의 한 부분이라면, 우리는 로마교회가 어떤 사람들로 구성 되어 있으며,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짐작할수가 있다. 그것은 로마의 기독교 공동체가 아마 서로 다른 인종적,지방적 배경을 가진 매우 다양한 가정 교회들로 구성된 복합적 모임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 외에는 로마의 기독교의 공동체의 특성이나 상황에 대하여 알수 없다. 그래서 고고학적 흔적에 의하여 추측을 하고 있는데 로마의 유대인 사회가 아주 복잡한 다양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많은 다양한 회당들이 공존했고, 이런 것들은 서로 다른 언어적,문화적, 사회적,신학적,집단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그리고 로마의 역사가에 의하면,클라우오디오스가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다 추방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원래 로마교회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다수 였으나,클라우디오의 칙령에 의하여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쫒겨 났다가 7-8년 후에 다시 로마로 돌아와 보니 그곳에 교회에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다수가 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로마 사회의 극심한 반 유대주의 감정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로마교회에 대두하게 되었으며, 바울은 이러한 것에 대항하여 싸우며,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과의 연합과 다양한 유대 가정의 연합을 이루기 위하여 로마서룰 기록했다는 내용도 있다. 그리고 로마서 기록 당시의 바울의 상황을 보면, 바울은 동방에서의 선교사역을 완수한후 그는 이제 막 서방에서의 선교에 착수하려는 때에 당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갈라디아, 고린도,기타 지역에서의 유대파 기독교인들의 훼방과 그의 회심자들,그가 전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는 자들의 오류에 직면하는 매우 어려웠던 8여년의 세월을 통과하고 평정을 찾을수가 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구제 헌금을 위한 모금을 끝내고 구제 연보를 가지고 이제 막 예루살렘으로 향하려는 시점에 있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유대에서 자가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 박해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 의한 환영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크게 염려하고 있었다.

3. 저술목적

이 서신의 저술 목적을엄밀하게 규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바울의 직접적 목적은 그의 서버나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은 이 서신의 신학적 성격을 적절하게 평가하지 못한것 처럼 보인다. 다음과 같은 다양한 설명이 있다.
1) 논쟁적 목적이다.
바우어와 그의 학파는 바울이 겨냥한 주된 목표는 유대적 기독교 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별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2) 타협적 목적이다.
로마의 교회가 유대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그의 이방인에 대한 위임을 변호하고, 유대적 요소들과 이방적 요소들을조화시키려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의 설명은 분명히 거리가 멀다.
3) 교리적 목적이다.
이는 전통적인 설명으로서 이 서신안에 바울의 교리적 입장이 충분히 진술되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견해도 그리 만족하지 못하다. 그 이유는 사도가 여기에서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 우주적 화해나 발전된 종말론과 같은 중요한 진리들도 있다. 그리고9-11장은 역사적 설명이 없이는 적절히 이해될수 없다. 그리고 개인적 언급들과 특히 1:7-15과 같이 이 서신이 특별히 로마의 교회에 보낸 것임을 보여주는 부분들은 이 서신의 필수적인 부분이며, 또 그 목적을 논할때에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4) 바울의 현재 경험을 요약하려는 목적이다.
사도는 그의 선교사역에서 전환점에 도달했다. 그의 관심은 예루살렘과 로마를 향했고, 그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 확인할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마음과 과거를 돌려서 회고하여 과거의 중요한 주제들을 교회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5) 독자들의 직접적 필요를 충족시킬 목적이다.
바울은 로마의 교회에 대한 상당한 포괄적인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어떤 지적인 문제들을 알고 있는듯 하며,그것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 하였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의 기본 원리인 "의"의 원리를 다루었으며,그후에 이스라엘의 실패와 이스라엘이 보편적 기도교회와 갖는 관계를 논했다.
그러나 우리는 서신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을 토대로 살펴보아야 할것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은 로마교회에 자신과 자신의 복음을 소개해서 오마교회를 자기 서방선교의 후원교회로 얻으려고 하는 직접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런 데 이 한가지 목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수 없다. 그래서 로마교회와 로마교회의 상황과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당시의 상황등을 고려 하여 종합적으로 평가 한다면, 바울은 한편으로는 복음의 진리와 자유,이방 그리스도인들의 합법성,교회의 하나됨등에 대해 예루살렘에서의 다가오는 대결에 의식하여 로마서를 기록하였으며,이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은 이 편지를 다른 사람이 아닌 로마의 그리스도인에게 보냈다는 사실, 이것은 결국 바울이 로마교회에 자신과 자신의 복음을 소개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예루 살렘에서의 대결을 염두해 두고 그의 복음을 요약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토대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의 복음을 변호할 의도와 못지 얺게 로마교회에 자신의 복음을 옳게 소개할 의도가 있었다. 그래서 이 대결에서 로마교회를 자기 편으로 이끌려하고, 또한 자신의 서방 선교를 위해 그들의 지원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교적인 목적과 변증적인 목적을 모두가지고 있었다고 말할수 있겠다. 이러한 의도에서 로마서의 저술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된다.

제 7 장 빌립보서

1. 기본적인 배경
1) 저자

빌립보서를 쓴 이는 사도바울 이었다. 확실히 바울은 디모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라고 서두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제1인칭 단수로 전체를 썼다는 사실은 양자 중 바울에게 주된 책임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밝혀진다. 빌립보서의 저자는 디모데가 아니라 바울이었다.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의 요새의 공격을 지휘한 사람은 바우어 였는데 그는 갈라디아서,고린도후서, 그리고 로마서를 제외한 나머지 사도의 이름으로 통하는 모든 서신들에 대하여 바울 저작권을 공격 하였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감독들과 집사들에 대한 언급(1:1)은 바울 후기의 교회 정치 무대에 속한다. 그러나 행6:1-6, 11:30,14:23,20:27,28 그리고 살전5:12,13의 연구는 이런 직분이 빌립보서가 기록되기 오래 전부터 있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둘째로 본서는 원본이 아니라는 것으 보여준다. 본서는 바울 서신의 진본을 모방한 글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만일 바울이 로마서등을 쓴것 같이 빌립보서를 썼다면 비슷한 표현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세째로 본서는 영지주의의 흔적을 보여준다. 특별히 2:5-8에서 저자는 아이온의 마지막 즉 소피아를 생각하며,충만에서 공허로 타락하는 절대자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특이한 해석은 문맥에 모순된다.
네째는 본서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로 각각 대표도니 유대인 기독교파와 이방인 기독교파를 화해시키려는 바울 후기적 작품이다. 그런데 문맥은 이런 이름들이 빌립보 교회에 있는 여인들에 속하며,따라서 그들중에 어느 한 사람도 결코 반 바울적인 어느 파당의 지도자일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쓴 서신이다.이 편지의 전기체 언급은 분명히 바울의 독특한 문체이며, 그 전체 내용도 바울 저작의 특징이 담겨있다.

2) 기록연대 및 장소
바울은 감옥에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는 바울의 투옥사실을 확인 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견해는 그 투옥장소가 로마라고 생각해 왔으나 이것은 두가지 다른 이론들인 가이사랴 이론과 에베소 이론에 도전을 받고 있다.
① 가이사랴설
이 가설은 다른 두이론들 보다 훨씬 설득력을 결여하고 있으며, 오늘날 이 이론을 지지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여기에서 주장하는 것은 먼저, 바울의 투옥은 최근의 일로 보이며, 따라서 투옥 기간은 짧았다고 주장되어 왔다.그리고 3장에 있는 유대인 교사들에 대한 노박은 본 서신이 유대인 이방인의 갈등이 있던 기간에 쓰여졌으며, 그것은 빌립보서와 유사성을 가지는 바울의 초기 서신들과 같은 저작연대를 보여주는 증거로 보았다. 그리고, 빌립보서1:13에 언급된 시위대는사도랭전23:25에서 언급된 것처럼 헤롯궁전으로 이해 될수 있을 것이다. 빌립보서는 바울의 투옥이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음을 명백히 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규모의 교회를 가진 장소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② 에베소설
에베소에 투옥되었다고 가정할때 그곳에서 빌립보서를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있는가? 최근에 많은 학자들이 그와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다른 옥중 서신들 보다도 빌립보서가 에베소에서 쓰여진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이제 그 이론의 근거는 선물문제와 방문들, 그리고 바울과 빌립보 사이의 잦는 서신 왕래, 문헌적인 연관, 유대인 논쟁의 문제, 재판의 문제, 시위대와 사이사의 가솔들, 그리고 누가의 위치의 문제를 근거로 삼고 있다.
③ 로마설
본 서신이 로마에서 쓰여진 것으로 A.D 59-61년사이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로서 가장 강력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 이론은 시위대(1:13)와 가이사 집(4:22)을 가장 자연스럽게 해석하는 것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 사도에 관한 재판은 진행중 이었던 것처럼 보이며, 그는 임박한 느낌으로 삶과 죽음을 결정할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던것 같다. 그런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용기 있게 복음을 전파한것은 상당한 규모의 교회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로마에서의 일로 쉽게 이해 될수 있으며, 이것은 가이사랴보다는 로마라는 이론에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개인적 형편은 로마 투옥의 상황과 쉽게 일치한다. 바울은 가까운 장래에빌립보를 방문할수 있도록 풀려날 것이라는 강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로마 가설은 본 서신에 덧붙여진 마르키온의 서문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데 이 마르키온 서문은 본 서신이 로마로 부터 발송 되었다고 되어 있다.

2. 역사적 배경
본 서신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빌립보 시의 역사와 빌립보 교회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빌립보시의 역사
빌립보는 에게해에서 내륙으로 약16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이 도시의 원래 이름은 "작은 우물"이라는 뜻을 지닌 "크레니데스"였으며,이 부근에는 유명한 판게우스의 금광이 있다. 그런데 B.C 356년 마게도냐왕 필립 2세가 그곳의 많은 사람을 이주 시키고 도시를 확장,증축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본따서 이 도시의 이름을 빌립보라고 칭하였다. 그후 여러번의 정복 과정을 거쳐서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으며,B.C42년 삼두 정치의 동맹자와 로마 공화주의자 사이에 유명한 빌립보 전쟁이 터졌다. 여기서 삼두 정치 동맹자들이 승리하고 곧 이어 B.C 31년 악티움 전쟁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패퇴시켜 로마의 실권자가 되면서 그의 퇴역한 군인들을 빌립보로 이주 시켰다. 이때에 빌립보의 위치가 상승하여 빌립보 시민들에게는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으며,자연히 그들은 로마시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누릴수 있게 되었다.
빌립보 지역은 로마의 군사적 전초 기지로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중 하나였으며,전략상 마케도냐 지방의 제일로 꼽히는 성읍이었다. 또한 빌립보에는 헬라인,로마인,아시아인,등 여러 민족이 모여 살았으며,각종 철학,종교,미신등이 성행하였다. 이도시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 였으나 그들의 생활,언어 관습은 오히려 헬라적 이었다. 빌립보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소수였으므로 회당도 없었다. 또 종교와 생활습관의 차이 때문에 그곳 사람들이 유대인을 대하는 감정은 좋지 않았다.
② 빌립보 교회
빌립보교회는 A.D50년경 바울의 2차 전도여행중에 세워졌다. 사도바울은 드로아에 있을 당시 환상중에 마게도냐를 향해 계속 나아가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그 결과 빌립보는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유럽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
유럽의 첫번째 교회인 빌립보 교회의 기원에 관한 설명은 사도랭전16장에 특별히 생생하게 기록 되어 있다.여기에는 빌립보에서 기독교의 능력이 나타난 세 경우를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먼저 아시아로 부터 온 자주장사이며,신실한 개종자인 루디아 그녀는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잘된 자들의 대표로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점하는 귀신 들린 여인, 바울에 의해 그 귀신이 쫒겨나게 된다. 이것은 어두움의 세력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예시하고 있다. 또 하나는 지진에 의해 자신의 곤경을 알게 된 간수 그와 그의 전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그는 온 가족을 변화 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준다.
본서신에 언급된 빌립보교회의 다른 구성원들은 에베브로디도,유오디아,순두게,글레멘드이다. 이 모든 이름은 빌립보 교회가 두드러지게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그리고 빌립보의 교인들은 사도 바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에 의해 건설 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역사 적인 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에도 몇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두 여인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중심으로 한 교회안의 분열,유대주의자들의 분쟁,바울의 장기화된 투옥에 대한 비판,외부의 적에 대한 불안,해우이로 완전에 이른다는 사상,의 발생등이다.

3. 저술 목적

먼저 어떤 정황에서 이 편지를 쓰게 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째로 감옥에서 쓰고 있다는 것이다.감옥에서 편지를 쓰면서 디모데와 에베브로 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천거하고 있다. 둘째는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빌립보교회가 보낸편지, 헌금을 잘 받았다는 영수증을 떼어 주고 있는거자. 세째는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몇가지 문제들을 이 편지에서 다루고 있다.에바브로디도에 의해서 바울에게 보고된 빌리보교회내의 분쟁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교회 전체가 하나됨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하나됨을 위해서 서로 겸손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것을 강조하고 있다. 네째는 빌립보 교회는 어쩌면 고린도후서10-13장에서 우리가 볼수 있는 유대 기독교 열광주의자들에 의해서 복음의 이해에 혼돈을 가져오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혼돈을 가져오는 문제들을 갖게 된것 같다. 마지막으로 빌립보 교회는 또 외부 세력의 계속되는 핍박아래 놓여 있었던것 같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감사함과 그들의 선물과 핍박의 상황에서 그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또 핍박의 상황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교회 자체내에서 하나됨을 유지 하도록 권면하고, 외적인 이방인들의 핍박이나 유대 열광적 그리스도인들의 훼방에 맞서서 믿음에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하여 본 서신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의 목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수 있을 것이다. 먼저 글로서 그의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 교회가 필요로 하는 영적 지침을 제공하기 위해서, 빌립보 교인들의 생각과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기 위하여 그리고 더 나아가서 몇가지를 이야기 한다면,디모데가 머지 않아 방문할 것을 통보하고, 가능하다면 가까운 장래에 그들을 방문하려는 사도 바울 자신의 의도등도 있었음을 볼수 있다.

제 8 장 골로새서

1. 기본적인 배경

1) 저자 및 수신자

골로새서는 바울의 서신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자들이 그들의 주장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할수 있겠는데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언어와 문체는 바울이 저자가 아님을 나타낸다. 그것은 골로새서는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단어 34개와 바울 서신의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 여러개의 단어를 추가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의, 구원, 계시, 폐지하다 드으이 단어가 골로새서에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골로새서에서 사용하는 문장은 너무 길다.둘째는 골로새서에서 대항하여 싸우는 것은 2세기의 영지주의이다. 그러므로 1세기의 사람인 바울이 저자일수 없다. 세째는 골로새서의 고차원적 기독론은 비 바울적이다. 그것은 차라리 요한복음의 로고스의 교리의 하나라고 생각 되어진다는 것이다.
진실로 바울의 저작을 부인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이 서신 스스로가 바울의 저작임을 보여주고 있으며,(골1:1;4:18) 다른 서신에서 처럼 바울적인 성격도 분며히 나타나고 있다.
첫째로 골로새서는 에베소서와 매우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다.
두번째로 골로새서는 그 저자가 거의 모두가 바울의 서신으로 인정하는 로마서, 고린도후서,갈라디아서에서 언급된 저자와 같은 사람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본 서신의 수신자는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다.(1:2)

2) 기록장소 및 시기
에베소서와 빌립보서처럼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도 옥중 서신에 속한다. 한 서신의 저작시기와 장소가 대체적으로 4서신들 모두의 시기와 장소를 결정한다.
골로새서,빌레몬서,에베소서는 두기고와 오네시모가 한번의 여행 길에서 각 목적지들에 전달한 서신들이다.(골4:7-9; 몬10-12절,엡6:21-22)
바울은 이 서신들을 쓸때 죄수의 몸으로 있었다.(골1:24; 4:3,10,18; 몬1:9,23) 오네시모 이외에도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서는 다른 인물들의 이름도 등장한다. 이들은 바울의 동역자들이다. 누가, 아리스다고,마가,에베브라,데마 그리고 디모데의 이름도 양 서신의 문안 인사에 바울의 이름과 함께 나온다. 바울은 어느정도 복음 전파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놓임받기를 원했다.
이상의 내용에서 이 서신들이 로마에서 쓰여졌다는 전통적 견해에 상반되는 것은 없다. 바울이 누린 어느 정도의 자유는 로마에서의 상황에 대한 보고와 조화를 이루나 가이사랴의 감옥생활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저작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A.D 61-63년경으로 본다. 좀더 자세히 알기를 원하면, 빌립보서의 부분을 참고하기 바란다.

2. 역사적인 배경

골로새 시는 미엔더 강의 지류인 루커스강 계곡지대에 있었는데 이는 현 터어키의 서부 지대에 위치한 고대 브루기아의 남부지대였다.이 도시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가는 주요 무역로 상에 위치 하였다. B.C5세기에 헤로도투스는 골로새를 가리켜 군세기의 가장 위대한 도시라고 불렀고, 한세기후에 연대기 작가 크세노폰은 부와 그 크기에 있어 인구가 조밀한 도시라고 기술했다. 한편 골로새는 모직과 피륙공업의 상업중심지 였으므로 이 도시는 상업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그러나 로마시대에 와서 골로새의 중요성은 점차 감소되었다. 왜냐하면,라오디게아와 히에라 폴리스 같은 이웃도시들이 자라났고,점점 더 번창해 졌기 때문이다. 기독교 시대가 시작될때에,지리학자 스트라보는 골로새를 하나의 작은 도시로 기술했다. 현재 이 도시의 유적지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바울이 골로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보냈을 당시에 이 도시의 주민은 브루기아 토착민과 희랍이주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그러나 역사가 요세푸스는 안티오쿠스 3세가 2세기 초에 메소포타미아와 바빌로니아로 부터 수천명의 유대인들을 이주시켜 루디아와 브루기아에 정착하여 살게 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골로새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적 요소가 서로 만나고 혼합된 범 세계적 도시였다.한가지 기억할 만한 중요한 사실은 골로새의 이단의 기원을 찾을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하는 동안에 골로새에 전파 되었다. 본 서신은 바울 자신이 루커스 계곡에서 복음적인 전도사역을 하지 않을것을 긍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골1:4과2:1이 바울이 이 서신을 기록할 당시에 골로새교회를 방문하지 않았던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그들을 개인적으로 만나기를 원했던 바울의 소망은 그후에도 실현 되었을 것이다.
이제 골로새의 교회에 대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골로새 교회의 설립에 대한것은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아마도 바울이 에베소 본거지에서 일할때 루카스 계곡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음이 분명하다.(행19:8-10) 골로새의 교회가 설립된 것은 역시 이무렵 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교회에는 바울의 절친한 친구들이 있었다. 에베브라,빌레몬,압비아,아킵보,오네시모등이 있었다.
이 교회가 당면하였던 위험을 파악하는 일도 중요하다 먼저 이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골로새교회가 전적으로 또는 거의 전적으로 이방인 회심자들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따라서 이 지방에는 모든 종류의 이교들이 번창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의 어린 교회가 직면했던 근본적인 문제를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먼저 매우 부도덕한 이교주의에 다시 빠질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골로새의 이단을 받아들일 위험이 있었다. 골로새의 이단은 첫번째의 위험에 두번째의 위험성을 더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거짓철학, 유대교의 의식주의, 천사숭배, 금욕주의, 기독론, 배타주의,등이 골로새 교회의 이단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3. 저술 목적

바울이 첫번째로 로마 감옥에 갖혀 있는 동안 골로새의 목사 에바브라의 방문을 받았다.에바브라는 교회의 사정을 바울에게 이야기 했다. 그 보고 내용은 대체로 매우 좋은 것이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그들중에 명백히 있었다. 복음은 그 열매를 더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전의 엄청난 습관성 죄악으로 되돌아갈 위험성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더우기 이 순간에도 거짓선생들은 그에 대한 해결책이 자신에게 있다고 교회를 미혹하고있으나 그 해결은 아니고 오히려 사태는 악화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교리가 신실한 일꾼의 순수한 가르침을 떠나서 횡행치 못하도록 편지를 써야만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쓴 이 서신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바울은 골로새인들에게 영혼을 파멸케 하는 이전의 악한 행실로 되돌아가지 말도록 경고하고,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구세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해결책이란 것에 대하여 경고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
2) 골로새인들의 관심을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에게로 돌려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경배하기 위함이다.
3) 또한 그들의 신실한 사역자 에바브라에 대한 존경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다.
4) 골로새인들에게 용서와 자비의 덕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5) 무엇보다도 골로새의 이단 즉 거짓 가르침의 위협은 시정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었으며,이것이 본서신의 진정한 저작 목적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두가지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관련된 교리적인 문제였고,다른 하나는 기독교의 삶과관련된 실천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본 서신에는 고도의 기독론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는 다른 모든 피조물 및 창조자체보다도 먼저 계신 분이시다. 사실상 만물은 그에 의하여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창조 되었다.그는우주의 중심이시며,모든 정사와 권세 및 모든 세력들 다시 말해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든것들을 다스리신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소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바울은 실천적인 차원의 오류를 논박하면서 단지 인간들의 의식들에 불과 하다는 사실을 근거로 금욕적 경향을 강하게 논박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기 때문에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 기독교인은 오직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항상 부정적인 것들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긍정적인 것들을 무시하는 엄격한 금욕주의는 반대로 금지들과 함께 적극적인 내용들도 동시에 강조되고 있다.

제 9 장 에베소서

1. 기본적인 배경

1) 저자
에베소서에 있어서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은 저작권에 관한 문제이다. 에베소서는 인간 최고의 신적 문장,기독교신앙의 정수를 뽑아 낸 본질, 기독교 신앙의 가장 권위 있고 완전한 개요,고상하고 중요한 교리로 가득찬 서신등으로 불리워 왔다.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모든 국적을 가진 전문적 학자들과 평신도들 그리고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인상을 주어왔다. 따라서 에베소서의 저작자가 주님에게서 풍부한 재능을 부여받은 바울이라는 초대교회의 보편적 증언을 부인하는 어떠한 이들에게는 무모한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저작에 대한 부인이 바우어에 의해 마구 성행하게 되었고,그러한 제의가 계속되어 왔다. 바울의 저작권에 대한 부인은 크게 둘로 나눌수 있다.
[1] 너무 많은 유사점을 가진다.
① 에베소서는 골로새서와 유사하다. 그래서 바울이 골로새서를 썼다면,에베소서를 쓸수 없었다는 것이다.
② 에베소서가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너무도 유사점이 많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하면, 바울의 제자중,바울의 여러 서신이나 심지어 단어 ,어귀 등에 밝은 한 유능한 사람이 선생을 모방하여 에베소서를 썼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답변한다면,학자들 가운데는 이 유사성의 실재적 범위에 대하여 많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에베소서의 저자는 그의 주제로서 영광스러운 교회,즉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다같이 주시는 구원의 축복으로 충만해진 교회가 그의 영광을 찬양하는 주제를 가진고로 이 옥중서신 가운데 많은 귀절들이 유사한 주제로 쓰여진 다른 서신과 내용의 유사성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에베소서는 변증적 자료가 별로 없다. 또한 에베소서는 대부분의 바울서신보다 늦게 쓰여진 서신이다.
③ 에베소서는 베드로 전서와 유사하다. 바울서신이 아닌 다른 신약의 문서들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④ 에베소서는 누가복음 및 사도행전과 유사점을 가진다.
⑤ 에베소서는 요한의 저작과 유사점을 가진다.
⑥ 에베소서는 히브리서와 유사점을 가진다.
⑦ 에베소서는 야고보서와 유사점을 가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2] 차이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① 단어의 차이이다.
에베소서가 너무나 많은 예외적 단어, 즉 새로운 단어들을 쓰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소위 바울 서신은 물론 신약성경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단어가 에베소서에서 발견되므로 바울의 저작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답변 한다면,만약 이 주장이 의심없이 바울의 저작임을 드러내는 다른 서신에도 적용이 된다면,이 서신들에서도 다른 서신에서 발견하지 않는 새 단어들이 발견되므로 바울의 서신에서 제외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제가 다를때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리고 흔히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 없는 말이 에베소에서 발견된다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말해 목회서신과 골로새서가 바울의 서신이 아니라는 무언의 가정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 가정은 근거없는 것이다. 목회서신을 쓴것은 바울이었다. 그리고 에베소서에서만 발견되는 소위 예외적 단어들 중에서 돌로새서와 목회서신에서 발견되는 것들을 제외하고 나면 남은 것은 불과 얼마되지 않는다. 그렇다면,바울같이 유능한 저작자가 그 정도의 새로운 말이나 용어들의 어휘력을 가졌다는 것은 바울 저작권을 부인할 하등의 이유가 성립되지 못한다.
② 의미의 차이를 들고 있다.
③ 문체의 차이를 들고 있다.
④ 교리의 차이를 들고 있다.
먼저 신론에 있어서는 에베소서는 인간의 구원의 근거를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두고 있으나 다른 서신에서는 바울은 십자가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인간론의 차이에서는 에베소서는 은혜를 떠난 인간의 죄의 상태를 골로새서나 다른 서신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투로 서술하고 있다.
기독론의 차이에서는 에베소서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했으나 다른데서는 머리를 다만 지체중의 하나로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엡2:16절에서는 화해를 이루신 분은 그리스도라고 하였으나 골1:20,2:13-14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또한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근본적 문제를 다루어지고 있지 않고 모든 것이 승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서신에서는 죄인들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된 것을 말하고 있느나 에베소서에서는 십자가로 인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르치고 있는데 다른데는 이 승천 교리가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를 든다면,에베소서는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신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 후기의 요소라는 것이다.
구원론의 차이를 들고 있는데 에베소서에서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한 구원을 말하고 있느나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베소서의 율법관이 비바울적이라는 것이다.
교회론의 차이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에베소서에서는 교회란 단어는 언제나 보편교회를 말하고 있는데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서는 지교회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베소서가 교회의 통일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 서신이 바울의 사후에 즉 많은 파당이 생겨나 중앙집권적 교권의 강조가 요구되는때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또 사도들과 선지자에 대하ㅕ 마치 그들이 거룩하고 또 그들이 교회의 기초인양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바울 후기시대의 세대들을 위하여 기록된 인상을 짙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엡2:11절을 쓸수 없다는 것이다,. 참 유대인은 아무래도 할례를 그런 경멸조의 언어로 볼수 없다는 것이다.
종말론의 차이를 들고 있는데 바울의 저작권을 부인하는 이들은 바울이 에베소서를 쓸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기엔 재림이나 이에 관련된 아무런 교리도 발견할수 없다는 것이다.
[3] 결론
① 너무 많은 유사점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의 유사점은 주로 저자가 같다는데 그리고 시간,장소,일반적 상황이 같다는데 있다. 또한 동일 저자라는 사실은 표현과 강조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있고 이유도 설명해 준다. 그리고 바울의 저작이라고 전통적으로 믿어온 다른 서신들은 발신인과 주소에 대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에베소서와의 유사점이란 큰것이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에는 많은 비교점이 있고 이 또같은 사상은 새로운 방향을 지시해 주고 있다. 저자의 동일성과 함께 제2의 요소인 교리의 동일성은 고려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일률적 교회의 문답식 교훈의 필료성과 새 개종자들의 증가는 표현의 일치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신약성경 저자들의 형태와 내용의 유사성은 결국 그리스도에게까지 즉 그의 인격과 업적, 가르침까지 추적 될수 있다. 바울과 다른 저자들은 똑같이 구약의 배경에 조예가 깊었다. 이 모든 요소들은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으로서 잘못 취급되어 왔으며, 그 저자는 어ㄸ넌 모방자였으리라는 가정 보다는 바울의 저작으로 보는 것이 이 유사성들을 설명하느데 더 만족할 답을 줄 것이다.
② 차이점이 너무 많다는 이의에 대하여
단어나 문체드의 차이는 이 편지를 쓸 당시 바울의 감사에 대한 감정이 폭발된데 있으며,소위 교리의 차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수 있다. 즉 에베소서에 여러가지 교리들이 다른 서신들보다 더 강조되고 확대되고 있는게 사실이지만 다른 서신들에서 발견되는 교리들과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③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이유
먼저 내증을 보면 에베소서의 저자는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 또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갖힌자된 나 바울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에베소서의 저자는 마지막 축도에 앞서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현제요,주 안에서 신실한 일군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고 말하였다.
바울의 제자요 그의 가르침에 밝은 서신의 수집자가 감히 자신을 바울과 동일시 할수 있었을까? 그리고 에베소서는 보편적으로 바울 서신이라고 인정된 로마서,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의 모든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초대 교회의 바울의 진짜 저작을 그처럼 훌륭한 문체와 논리적 전개와 고상한 내용을 가진 귀절들로 합성할수 있는 위조의 천재가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바울의 지적능력과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바울의 사상을 발전시키면서 아무도 구별할수 없도록 했다는 것은 더욱 믿을수 없는 일이다.
또한 외증에 있어서도 증명이 된다. 초대교회의 증언은 이미 내린 결론과 조화를 이룬다. 유세비우스는 에베소서를 바울의 진정한 서신으로 인정한다. 터툴리안도 마찬가지로 바울의 저작을 인정하고 이보다 약간 일찍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이레니우스는 바울의 자작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공식적인 정경인 마르키온 정경속에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당시에는 이 서신을 바울이 기록했다는 점에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마르키온은 오직 사도바울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오래도니 라틴 역본 및 수리아 역본에서도 에베소서를 바울의 서신들 가운데 포함시키고 있다. 본서신은 오파이트라,발렌티누스파에 의하여 사용되었으며,폴리갑의 저작들에서와 헤르마스와 디다케 속에서도 본 서신의 언어들이 발견되고 있다.
2세기 후반기를 지나면서 헬마스의 목자,사도들의 가르침,바나바의 서신,등등에 나타난 에베소서의 암시는 제쳐두고라도 100-170년경에 살았던 저술가들에 이르면,당시에 에베소서의 저자가 이미 바울로 인정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 외에도 본 서신의 바울적 구조와 본 서신의 언어 및 문학적 유사성, 그리고 본 서신의 신학적 유사성, 또한 본 서신의 역사적 자료들을 통하여 우리는 바울의 저작임을 결론적으로 내릴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약의 저작들을 규정할때에 이의 없이 바울을 에베소서의 저자로 지목한 것이다. 2세기 말에 에베소서의 저자에 대하여 극소수의 이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서신의 가치와 영감성에 대하여는 일찍부터 각처에서 인정되어 온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전통적 확신을 저버릴 아무런 이유가 없다.

2) 수신자 및 기록연대

에베소서에 있어서 하나의 큰 문제는 엡1:1절에 언급된 수신인에 대한 기록이 희랍어 사본에는 차이가 있다는데 있다. 초두의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에는 아무런 본문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에베소에 있는 의 첨가된 낱말이 난점이 있다. 가장 오래된 사본들에는 이 귀절이 없다. 그래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초기의 사본들에 "에베소에 있는"이란 귀절이 없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에베소서의 참 목적지가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하여 몇가지 해결책들이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첬째로, 에베소서는 에베소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내진 서신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보내진 서신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서신의 제목이 무엇이든지 간에 에베소서에 있는 이란 말은 바울이 삽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학설에는 두가지의 형태가 있는데 먼저는 바울이 그의 메세지를 참 존재를 가진 성도들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바울이 단순히 그리스도 예수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썼다는 것이다.
두번째 제시는 에베소서가 어떤 제한된 지역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진 서신이기는 하지만 에베소는 아니라는 견해이다.
이 이론은 특별히 애보트가 변호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에베소서는 라오디게아,히에라볼리,골로새서등의 이방 개종자들에게 썼다는 것이다.
세번째 제시는 본 서신은 에베소가 도청 소재지인 그 지방에 거주하는 신자들에게 보내졌으며, 그것은 에베소 교회뿐 아니라 주변의 여러 교회들을 위하여 쓰여졌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 견해는 널리 지지되고 있다.
네번째 견해에 의하면, 본 서신은 한 특수 지역, 즉 빌립보서가 빌립보에 있는 교회들을 위하여 고린도잔후가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쓰여짐 같이 에베소에 있는 한 교회를 위하여 쓰여 졌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순회 서신 이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에베소서에 있는"이란 말은 가장 오래된 사본들 속에 없다. 따라서 에베소서가 수도인 어떤 지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한 이 에베소를 목적지로 주장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1:15; 3:2과4:21,22등을 비교해 보면 분명히 독자들 가운데는 바울이 모르는 자들과 그가 개인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갖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바울이 세운 교회와 그가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낸 모든 서신에는 그가 교회의 영적 아버지이며,그들 중에서 해산의 고통을 한것을 기록한 귀절들이 나온다. 그런데 이런 귀절이 에베소에는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에베소서에는 개인적인 인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대하여 이 서신이 순회 서신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말시온의 사본을 제외한 모든 고대 사본에는 본 서신은 "에베소인들에게"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그리고 엡1:15,3:2 과 4:21,22은 해석상의 문제이다.
또한 사도행전에 있는 바울의 활동에 대한 기록과 본 서신의 내용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고린도후서,갈라디아서,데살로니가 전후서 역시 바울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이나 인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 반대로 로마서는 바울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가 아니지만 많은 인사가 나온다.
다섯번째 견해는 본서신은 라오디게아로 보내졌다.
이 가설은 마르키온 정경의 증거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방면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여섯번째 견해는 본 서신은 바울의 영적 유언장이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본 서신이 로마 투옥 말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며 제 2차 투옥 가설을 부인한다. 따라서 이 서신은 전체 교회에 보낸 바울 사도의 고별 메세지로 생각되고 있다.
일곱번째 견해는 본 서신은 바울 전집에 대한 서론이라는 것이다.
굳스피드와 존 낙스에 의해 제안된 이 이론은 약간의 수정과 함께 미턴에 의해 주장 되었다. 에베소서를 기록했다고 말하는 헌신적인 바울 주의자는 바울 서신들을 모르고 있을 독자들을 위해 서신들 안에 포한된 가르침에 대한 요약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서론적인 기록은 수집된 편지들이 에베소 교회에 처음 알려졌기에 "에베소인들에게"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이론은 비판을 받고 있는데 그덧은 에베소서가 바울 전집의 서두에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그리고 에베소서6:21,22에 있는 두기고에 관한 언급은 굳스피드의 이론에서 큰 난제이다. 그리고 이 이론은 바울 서신들이 한동안 무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사도행전의 출판으로 관심이 되살아났다는 가정에 의존한다. 또 하나의 난점은 문헌적인 문제로서 바울 전집에 대한 서론으로 쓰여진 본 서신이 그처럼 골로새서에 의존했을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여덟번째 견해는 본 서신은 모든 기독교 세계를 위한 종교 철학을 기록한 것이다.
아홉번째 견해는 본 서신은 골로새 이단의 확장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론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본 서신의 목적지는 "에베소"였다. 즉 에베소와 그 주변의 교회들 이었다. 서신을 기록한 장소는 로마였으며,시기는 A.D 61-63의 어느 시기이었을 것이다.

3) 기록 장소

이 부분은 본 보고서의 빌립보서의 기록연대와 장소부분을 참고하기 바란다.

2. 역사적 배경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해 그의 제 2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기초가 세워졌다. 그리이스로 부터 시리아로 향해 가는 길에 사도바울은 브리스 길라와 아굴라를 동반하고,에베소를 방문 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이들을 이 도시에 남겨 두고 떠났다.방문은 그가 예루살렘으로 급히 서둘러 가는 도중에 잠시 머물렀던 것에 불과 하다 그러나 그는 그 지역 회당의 유대 지도자둘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그는 그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따라서 그들은 바울에게 그곳에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그는 그의 계획을 바꿀수가 없었다.그래서 그는 자신이 돌라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돌아오겠노라고 그들에게 약속 했다. 이러한 사실은 확실히 이루어졌다 왜냐하면,그는 그 다음 전도 여행 일정에 에베소를 포함 시켰고,실제로 에베소에서 3년 이상을 머물렀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곳이 전도 전략상 상당히 유력한 지역임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곳은 그 지역의 중심 도시였으며, 동서를 잇는 대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에베소의 주위에는 230개의 독립된 공동체 사회가 아시아의 로마 지경내에 산재해 있었다. 만약 기독교의 신앙이 이와 같은 수도에 확고히 세워진다면,그것은 마치 바퀴의 중심에서 테두리로 힘을 옮겨지는 것과 같이 확산 될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로 돌아 왔을때 그는 자신이 없는 동안에 아볼로가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는 아볼로가 고린도로 옮겨가고 있었으며,따라서 바울은 그곳에서 자신의 사업을 자유로이 강화할수 있었다,. 석달 동안 그는 유대인들과의 대결을 겪어야 했으며, 곧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개종자들을 두란노 서원에 모아 2년동안 날마다 강론했다.
바울의 전도의 여파는 에베소지역 너머에 까지 미쳤다. 그 전지역이 영향을 받았으며,이로 인하여 도처에 개종자들이 있었다. 사업차 수도로 왔던 사람들이나 유람차 왔던 사람들을 막론하고 그들은 복음을 들었다.그래서 그들은 각기 고향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획기적인 전도의 확장은 사도행전19:23-41에서 묘사된 소동으로 인해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 이 소동이란 더메드리오라고 하는 어느 은장색이 자기의 동료들과 동맹을 결성한 사건이었다. 바울은 이미 그곳을 떠나려던 차였으며,이것은 바울이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그만 두고 로마로 향하게 된 신호가 되었다. 수리아로 가는 마지막 항해중에 그는 밀레도에 도착해서 에베소의 장로들과 작별을 하면서 그들에게 엄숙하고도 감동적으로 무리의 실수에 대해 훈계하고 부탁한다. 그후로 바울은 에베소를 다시 방문할수 없었다.

3. 저술 목적

수신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고 있는 본 서신의 저작동기와 목적을 확실하게 결정하기란 어렵다. 만일 우리가 회람이론을 가정한다면,우리는 독자들의 상황보다는 저자의 상황으로부터 목적을 제시할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생각할수 있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이러한 사실은 그 서신이 훨씬 더 명상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음과 함께 그가 다루고 있는 특별한 상황에 관련된 긴장이 없음을 잘 설명해 준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고 결국 영광 받는 기독론과 그리스도안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을 높이 찬양하게 되었다.
본 서신과 골로새서의 밀점한 관련은 에베소서의 저작 목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 두 서신은 다소 방법상의 차이는 있으나 동일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의 교리를 여전히 마음속에 생각하면서 이단이 존재하는 특별한 배경없이 일반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다시 썼다고 생각할수 있다.
이제 바울이 이 서신을 쓴 목적을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수 있겠다.
1) 바울은 에베소서를 그곳 성도들의 그리스도를 중심한 신앙과 모든 성도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에 대한 그의 만족을 표현하기 위하여 기록하였다.
2) 또 하나의 연관된 목적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속죄적 은혜를 알려주어 세상에 대하여는 축복이 되며, 몯굳게 서며,그리하여 구속주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하려는데 있었다.
3) 본 서신에서 바울은 그가 죄수로 갖혀 있는 로마의 제국과 교회 사이에 대조를 하려 했는지도 모른다.이 가능성은 같은 옥중 생활중에 쓰여진 빌립보서신에도 암시되어 있다. 만약 그렇다면,로마의 마력은 그에게는 교회의 영광으로 암시 되었을 것이다.아직 제한된 영역만을 통치하는 로마의 횡포한 독재자와 온 세게를 다스리는 교회의 은혜로우신 주님과의 대조,로마의 물리적 힘에 대한 정치적 통합과 평화의 줄로 매어진 교회의 유기적 단일성의 대조,로마의 군사적 힘과 교회의 영적 갑옷과의 대조,뢈의 시간과 변화와 성쇠속의 기초와 교회의 영원하며,끊임없는 기초와의 대조등이 바울의 의도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제10장 빌레몬서

1. 기본적인 배경
1) 저자

본 서신의 저자가 사도바울임은 다음의 외적,내적증거에의해 분명히 드러난다. 먼저 외적 증거로는 본서가 사도바울에 의해 기록된 편지라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초대교부인 익나티우스,터툴리안,오리겐등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쓴 것으로 인정하였고,무라토리 단편과 마르시온 정경도 본 서신이 바울의 저작임을 인정한다.
내적 증거로는 바울은 본 서신의 서두에서 부터 자신이 발신자임을 밝히고 있으며(1:1) 후반부에서는 자신이 친필로 본 서신을 기록했음을 고백하고 있다(1:19)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은 본 서신의 내용문맥 속에서도 자신이 저자임을 암시하고 있는바, 그는 자기 개인의 신상에 관하여,언급하면서 자신만의 톡특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즉 자신이 갖힌 상태에 있다는 것,기도의 부탁,그의 동역자들의 문안인사,등 그 만이 전개할수 있는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을 언급함으로서 바울 자신이 본 서신의 저자임을 암시하고 있다.

2) 수신자

본 서신의 수신자는 소아시아의 루쿠스 계곡에 살았던 빌레몬이라는 한 개인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본 서신의 수신자는 빌레몬 한 사람외에 여러 사람을 포함한다. 그 이유는 본 서신의 서두에는 빌레몬 한 사람이 수신인으로 되어 있지 않고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1:2)라 하여 여러 사람이 수신인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서신의 끝 인사도 복수인 "너희"(22,25절) 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때 본 서신의 수신자는 내용상으로는 한 사람이지만 형태상으로는 여러사람이라 할수 있다. 바울은 빌레몬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들도 본 서신의 내용을 알게 하여 자신이 주는 교훈을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3) 기록장소 및 연대

여기에 해당하는 내용은 앞서서 설명한 옥중서신의 내용과 동일하다. 따라서 빌립보서의 부분을 참고하기 바란다.

2. 역사적 배경

좀더 자세한 배경들은 위에서 언급했던 옥중 서신들의 역사적 배경을 참고하기를 바라며, 여기서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을 소개 하기로 하겠다.
빌레몬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해 쓴 서신을 받은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 였다. 성경에 보면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 집에서 모인것으로 되어 있다. 바울은 그를 우리의 사랑하는 자요,동역자 라고 불렀다. 빌레몬서의 기록에 보면,그는 골로새 사람이요,종을 가질 정도로 재산이 있는 사람이었으며,바울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성도들을 후대한 사람이었고,골로새 교회의 직원이었던 것 같다. 빌레몬서1:2절에 보면,그는 한짐의 가장이요, 압비아는 아내요,아킵보는 아들이었던 것 같다. 바울이 골로새에 전도할 기회가 없었음을 생각할때에 그가 에베소에 있는 동안 전도했던것 같다.전설에 의하면,빌레몬은 골로새의 감독이 되었다가 네로 박해때에 그 아내와 아들과 오네시모와 함께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한다.

3. 저술 목적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빌레몬서를 쓴 이유에 대하여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였다.이것은 낙스와 굳스피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요컨데 그의 견해에 따르면,빌레몬의 주된목적은 오네시모가 그의 주인을 속이고,도망을 친 죄를 용서 받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오히려 이 종이 자유를 얻도록 한후 다시 바울에게 돌아와 복음 전도를 위해 일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라고 각색한다. 이 각색한 내용에 대하여와 그리고 비판에 부분은 여기서 모두 다루지 않겠다. 제시했던 참고 문헌을 살피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런 모든것을 무시하고 바울이 빌레몬서를 쓴 진정한 목적을 서술하고자 한다.
먼저 진정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수 있다.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중심인물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주님과 형제들을 사랑하였고,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재차 삼차 나타내었다(7절) 그는 직접적이든,간접적이든 바울의 영적인 아들이었다. 하나님은 빌레몬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바울을 사용하셨다. 그의 새로운 인생은 그 자신은 물론 그의 가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주님을 영접한 친구들은 예배드리기 위하여 그들의 집에 정규적으로 모였다. 에베브라가 없을 때에는 아마도 아킵보가 예배를 인도한것 같다. 그는 디모데 처럼 격려를 받을 필요가 있는 청년이었을 것이다.
오네시모는 빌레몬 가족의 노예들 중의 하나였다. 이 노예는 도망하여 마지 가게된다. 로마에서 그 노예는 바울을 만난다. 주니께서는 이전에 이 위대한 선교사의 사역을 축복하시어 빌레몬의 마음을 변화시켰던 것처럼 이제도 그의 사도를 통해 노예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그는 바울에게 너누 소중한 존재가 되어 바울이 그에 대하여 "내가 갖힌 중에서 낳은 아들"(10절) "내 심복(12절" 사랑받는 형제로 둘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안에서 상관된 네게랴(16절)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골4:9)라고 표현 하였다. 오네시모의 인격은 이제 그의 이름과 일치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조력자로서 그의 곁에 두기를 원했다. 이점에 관해서는 11절을 읽고 이 노예의 이름의 동의어로 문장을 엮어간 사실에 주의 하라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로마에 머물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그를 그 주인에게 편지와 함께 돌려보내기로 작정한다. 이제는 더 이상의 노예로서가 아니고 사랑하는 형제로서 받아들이도록 권고하는 매우 사려깊은 정중한 자세로. 만일 오네시모가 불의 하였거나 갚아야 할 돈이 있으면, 바울은 기꺼이 그 돈을 자신이 갚겠다고 말한다.그에게는 명령할 권한이 있었으나 그는 오히려 빌레몬의 마음에 호소한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그의 요구보다 더 행할줄을 알았다. 사도는 현재의 갖힌바 된 자기 위치에서 해방될 소망을 갖고 있고 또한 빌레몬여 처소를 예비할것을 믿는다.
영감에 가득찬 이 서신이 많은 말로서 노예제도를 정죄하지는 않으나 실은 그 제도의 정신을 뒤집어 엎고, 그 노예를 사랑하는 형제로 변화 시킨다는 사실은 거의 덧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빌레몬서를 쓴 목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수 있다.
① 오네시모에 대한 용서를 확실히 하기 위함
②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노예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도록 지혜롭게 요구함으로서 노예제도의 근본을 겨누어 지적하기 위함
③ 그가 놓인후에 자신을 위한 처소를 예비케 하기 위함이라고 말할수 있다.

제11장 목회서신(디모데전후서 및 디도서)

딤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오랫동안 목회서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용어가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우리가 이 서신들을 목회신학의 교과서라고 부를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회서신이라는 용어는 이 서신들을 다른 책들로부터 구별해 주는 표현으로서는 편리한 것이라 할수 있다. 따라서 이 서신들을 다룸에 있어서 단일 서신으로 서론을 다루는 것이 좋을 것이다.

1. 기본적인 배경

1) 저자 및 수신자
본 서신들은 바울의 어떤 서신들 보다도 그 잔정성에 대한 도전이 강하게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가 목회서신에서 가장 크게 대두 된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먼저 이 저자의 문제에 대하여 제기 되는 반론을 소개하고나서, 목회서신은 바울의 저자임을 논증하고자 한다.
바울 저작권에 대한 반론에는 크게 네가지 분야 즉 역사적, 교회적, 교리적,언어적 분야가 있다. 차례로 소개 하고자 한다.
[1] 역사적 문제
세권의 목회서신 모두에는 바울과 그의 동료들의 삶에 관한 역사적 언급이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① 바울은 마게도냐로 이동중인 반면,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를 맡기 위해 그곳으로 떠났다.(딤전1:3)
② 마찬가지로 어느때인가 디도도 그레데 교회를 맡기 위해 그곳에 남겨 졌다(딛1:5) 이 경우 바울 자신이 그레데를 방문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요구된다.
③ 바울은 로마에 있을때 자신을 부지런히 찾아 만난 오네시보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딤후1:16,17) 이는 편지를 쓸 당시 바울이 로마에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바울이 로마에 있었다는 것은 결정적이다. 그는 당시 분면 죄수의 몸이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드로아에 두고 온 겉옷을 가지고 오라고 부탁하면서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 미보는 병들어 밀레도에 있다는 등의 최근 발생한 사건들을 알려주고 있다.(4:13,20)
위와 같은 자료들에 비추어 볼때 본서들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역사의 틀에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사도행전의 줄거리 속에 본서들을 끼워놓으려는 시도가 여러차례 있어 왔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와같은 시도를 불가능한 것으로서 거부하고 있다 그렇다면,우리에게 남아 있는 가능성은 다음의 세가지이다.
첫째로,우리는 본서들의 진정성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사도행전 역사 밨의 어떤 시기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할수 있다.이 경우 두번째 로마 투옥이 있었으며,첫번째 투옥과 두번째 투옥사이에 바울이 풀려난 몸으로 계속 전도여행을 하였다는 가정을 필요로 하게 된다.
둘째로,우리는 완전히 다른쪽 극단으로 가서 목회서신 전ㅊ히 허구로 꾸며낸 작품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세째는 적어도 역사적 암시에 나타난 몇 명의 인물들은 실제 인물임이 확실하기 때문에 제3의 설명이 요구 되었다. 즉 작품 속에는 일부 바울 자신의 글도 포함되어 있으나, 서신의 대부분은 훗날 바울 추종자가 거짓으로 꾸민 것이라는 것이다.
[2] 교회적 문제
목회서신속에 어떤 교회 질서에 관한 언급이 있는데 이는 바울 시대의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발전된 것이며, 따라서 목회서신은 바울 시대의 것으로 볼수 없다는 이론이 있다. 이 계통의 비평들은 다음 네가지 생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첫째, 바울은 교회를 조직하는데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이전 서신들에 비추어 볼때 그의 교회안에 어떤 획일적 정형이 있었던것 같지는 않으며,오히려 바울은 공식적 조직체계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다. 그들은 목회서신은 각 교회가 공식적 직분자들을 가지고 있었으며,전체적인 과정이 조심스럽게 통제 되었던 후기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이 이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목회서신이 보여주는 교회 구조속에 반영된 장로의 역활은 주로 전승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장로들이 수행하는 역활이 목회서신을 바울 시대의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발전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째로,목회서신에 반영된 상황은 어느정도 시간이 경과 했을 것을 요구 한다는 것이다. 특히 디모데전서 3:6절에서 바울이 새로 입교한 자에게 감독의 직분을 주지 말라고 권면한 것을 보면 그것이 잘 나타난다. 이 구절은 조직이 정비된 교회를 암시해 주고 있으며, 따라서 바울 시대 보다는 더 후대의 교회에 훨씬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네째로,디모데와 디도의 지위가 대개 2세기 초의 군주적 감독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장로를 임명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장로보다 훨씬 높은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교회내의 문제들에 관하여 재판권을 행사 하였는데 이는 오직 그들만이 지녔던 특권이다. 바울 자작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은 또한 이것을 목회서신이 바울시대보다 더 후대의 것이라는 것을 지지하는 근거로 삼는다.
또 다른 반대는 목회서신에 반영되어 있는 이단들을 근거로 한것이다. 그 이단들은 바울 시대라기 보다는 영지주의이단들이 발전했던 시대에 속한 이단들이라는 것이다.영지주의는 2세기에 그 절정에 달했다.
[3] 교리적 문제
여기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의 교리라고 주장되는 것들과 그렇지 않는 것들이 서로 섞여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목회서신들 속에 바울 신학의 여러 특징적인 것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다만 바울의 진정한 글로부터 발췌한 어구들을 그대로 옮겨서 사용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본다. 주된 반대가 발생하고 있는 것은 목회서신속에 바울의 특징적 교리들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과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더 상투적인 접근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로부터이다. 전자의 예로서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성령의 사역등의 위대한 교리들이 있다. 그런데 이와같은 것들이 바울의 초기 서신들에 비해 목회서신속에서는 그렇게 탁월하게 부각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근본적인 교리들에 대해 논함이 없이 바울이 이 세 서신들을 쓸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된다.
목회서신속에 "믿음' 맡김, '선한교훈' 등의 용어들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큰 비중이 부여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 교리의 전승이 이제 확장 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참으로 기독교 교리는 이제 미쁜 말씀 혹은 수납된 교리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찬양시로서 정형화 되었다. 그러나 학자들은 바울이 놀랍도록 창조적인 정신을 가졌기 때문에 일부러 그와같은 상투적 수준으로 내려와서 말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를 거부하고 있다.바울 저작권을 비판하는 자들에 따르면, 위와 같은 상황들은 사도들의 교리의 전수가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졌던 1세기 말이 교회 상황과 좀더 조화를 이룬다고 한다.
[4] 언어적 문제
다른 바울서신들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면서 오히려 바울서신을 제외한 다른 신약성경 속에서는 자주 발견되는 용어들이 목회서신에서 다량으로 발견된다는 사실을 주된 근거로 삼고 많은 학자들은 목회서신의 진정성을 거부하고 있다.그리고 이것은 단어에서 뿐만 아니라 문체에서도 그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비판을 받아야 하며, 여기서는 비판에 대한 부분은 생략하고, 옥중 서신 자체에 의해 제공된 자료에 따라서 바울의 저작권을 증명하도록 하겠다.
①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 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딤전1:1;딤후1:1) 또는 하나님의 종이요,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딛1:1)이었다.이로서 우리는 이 세 서신들의 경우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는 히브리서와는 대조적으로 스스로 증거를 대고 있음을 알수 있다.
② 저자는 자신의 이름을 말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이 묘사는 바울에 관한 사도행전과 열 서신에 있는 것과 일치한다. 그 묘사는 양편의 바울은 훼방자요 핍박자 였다. 그리고 회심하매, 그는 반포자와 사도로 하나님에 의해 택정 되었다. 그는 진리를 수호하다가 많은 고난을 당했다.
③ 이 사람은 바울의 열 서신과 구조상 비슷한 세 서신을 썼다.
④ 이 세 서신들은 일반적으로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된 서신들과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저자의 수신자(디모데와 디도)간의 경우와 같은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권위를 가지고 서신을 쓰는 자와 그 권위를 인정하는 수신자간의 관계요 영적인 아들과 영적인 아버지의 관계이며,친구와 친구의 관계 이었던 것이다.
⑤ 이 세 서신들은 다른 자료들에서 바울의 동료들이요,동역자들로 알려져 있었던 어떤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서 언급하고 있다.
⑥ 이 서신들은 자기가 세웠던 교회들에 뜨거운 관심을 갖고 있고 그의 문체와 신학이 앞에서 밝힌 데로 분명히바울임을 보여주는 한 저자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증거는 세 목회 서신들 자체에서 얻어낸 결론과 일치하고 있다. 유세비우스는 일반적으로 로마서에서 히브리서까지 바울의 저서로 알려졌던 14권의 책 중에서 히브리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도 바울의 편지라고 확언 했으며, A.D170년 경 무라토리 단편에도 본 서신을 포함한 목회서신이 바울의 저서로 인정되어 있다. 더욱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디모데 전후서가 이단자들의 오류를 반박하고 있기 때문에 이단자들은 이 서신들을 거부한다고 말하면서 본 서신의 정경성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본 서신의 수신자는 디모데 이다. 사도바울이 본 서신을 써 보낼때 디모데는 에베소에 있었다(1:3) 바울이 두번째 서신을 써 보낼 때에도 디모데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던 것 같다.
덧붙여서 설명한다면, 서신자체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의 수신인을 결정하기란 쉬운 일이다. 딤전1:3절에서 바울은 내가 마게도냐로 갈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게 한것은-- 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본 서신이 디모데에게 보내졌으며, 그때 디모데는 에베소에 있었음을 분명히 말해 준다. 그리고 디도서1:5절에 보면 디도도 여전히 그곳에 있었음을 볼수 있다. 그런데 디모데 후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그러나 디모데의 상황은 디모데 전서를 보냈던 때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장을 암시해주는 상은 디모데 후서 4장이다. 여기서 바울은 네가 올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13절) 드로아는 에베소에서 유럽으로 가는 도로상에 있었다. 만약 직접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갈수 없을 경우 사람들은 이 도로를 이용하였다. 또한 12절에서는 두기고가 에베소에 파견되었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언급되었다.
디도서의 수신인은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1:4)이다 디도에 대해 부가된 묘사는 바울과 디도사이의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를 나타내주고 있다. 디도는 헬라 사람으로서 할례를 받지 않아지만 예루살렘 총회때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참석했던 사실을 보면 그 이전부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갈2:1-5). 또한 디도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행15:36-18:23) 이후 그와 계속 동행 하였으며, 고린도에 파송되기도 하고(고후7:6,8:6) 그레데 교회를 돌보기도 하였다(1:5). 이같이 오랫동안 바울과 동역한 디도는 바울에게 참아들(1:4), 동무, 동역자(고후8:23),라고 불릴 정도로 바울의 많은 사랑과 신임을 받은 신실한 주의 종이었다.

2) 연대 및 장소
바울의 첫번째 로마 투옥 연대는 아마 A.D 59-61년 이었던 것 같다.(어떤 학자들은 그 연대를 60-62년,다른 학자들은 61-63년 또는 62-64년으로 보고 있다) 초대교회는 바울이 A.D68년 6월에 자살한 네로 황제에 의해 처형당한 것을 이의없이 증언하고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겨울전에(딤후4:21) 자기에게 오라고 편지한 점으로 보아 디모데 후서는 A.D67년 이전에 씌여진 것이 분명하다. 더 이르다면,65년 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디모데전서와 디도서가 A.D 62년과 66년 사이에 씌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사도행전 기사에서 자세한 일에 대한 기록이 생략되었다는 것을 감안 한다면 더 앞선 연대도 가능하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A.D 64년 경에 순교했다면, 목회서신의 저작연대는 A.D 64년 경 직전이었을 것이다. 즉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는 바울의 로마 재억류 직전에 쓰여졌을 것이며,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옥살이 기간에 씌여졌을 것이다.이러한 연대결정은 물론 바울의 저작을 가정한 것이다.
집필 장소를 살펴본다면, 서실들의 역사적 자료들과 서로 비교해 볼수 있는 독립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서신들내의 자료들을 목록으로 만들고 이 서신들이 쓰여졌을 기간에 사도 바울이 어떠한 활동을 하였을 것인가를 재구성해 볼수 있을 것이다.
① 바울은 에베소와 마케도냐를 방문했었던 것 같다(딤전1:3)
② 그는 또한 그레데를 잠깐동안 방문하였다(딛1:5)
③ 그는 디도에게 편지를 쓴후 그 다음 겨울을 에비로 서해안에 있는 니고볼리에서 보내고자 했다( 딛3:12)
④ 디모데후서를 쓴 다음 바울은 로마에(?) 다시 수감 되었다.
그는 로마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말하기를 로마에 있을때 오네시보로가 그를 찾아왔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에서 순교했다. 이런 사정을 고려 해 볼때 디모데 후서는 로마에서 부쳐졌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서신의 저작 장소는 더 분명하지 않다. 디모데 전서를 썼을때 바울은 마케도냐에 있었다. 이것은 이치에 맞는다. 왜냐하면, 서신에서 그는 이 장소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도는 에비로에 있었거나 에비로에 가는 도중 이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추측이 올바르다면,서신들의 저작 순서는 디모데전서,디도서, 디모데 후서알 것이다.그리고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는 서로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을 것이다.

3) 목회서신에 나타난 이단사상

본 서신을 포함하는 목회서신이 쓰여지지 않으면 안될 상황의 저변에는 교회 발전을 위협하는 이단들이 있었다. 그 이단들의 성격과 부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격
목회서신에 나타난 이단들의 성격은 사변적이며,이지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식을 절대시 하며,교회안에 헛된 변론을 야기 시켰는데 그것에 휩쓸린 자들의 가르침은 어리석은 말다툼에 빠지게 하는 것이었으며, 진리와는 무관한 탁상 공로네 불과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이단자들은 교회내의 거짓되고 교만한 지식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실제적으로는 아무것도알지 못하면서 자신들이 소유한 편협한 지식만이 참다운 구원과 행복을 제공한다고 하는 교만에 빠져 있었다. 그런자들 가운데는 족보를 가지고 헛된 교훈이나 쓸모없는 논쟁을 하고 현실적이지 못한 신화들을 지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2] 부류
목회서신에 나타난 부류들은 세가지 부류로 구분할수 있다.
① 금욕주의자들
이들은 음식에 관한 특별한 규정을 만들었으며,성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여 결혼을 포기 하도록 강요하였다.
② 방종자들
또 다른 이단자들은 오히려 부도덕한 생활에 젖어 있었다.그들은 성적으로 문란하여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혹하였으며,스스로를 쾌락에 내 던졌다.
③ 율법주의자들
이들은 할례를 행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할례의 시행을 강요하였다. 사실 이들의 진정한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의 전통과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사람들이 만들어 낸 명령을 좇도록 연약한 자들을 유혹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부활은 단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더불어산다는 영적 의미라고 주장하여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였을뿐 아니라 인간이 경험 하고자 했던 전인격적인 부활은 이미 지나갔다고 주장 하였다.

2. 역사적 배경

모든 역사적 증거로 보아 바울이 그의 1차 로마투옥에서 석방된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바울은 그가 석방된후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그런데 목회서신에는 분명히 여러 차례의 여행을 한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면 많은 것들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소개하기로 하자.
1) 바울은 석방되자마자 곧 디모데를 빌립보로 보내어 이 소식을 전하도록 했다. 아마도 주후 63년 안팍이었을 것이다. 주후 64년 7월19일에서 24일이후로는 석방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2) 바울은 소아시아를 향하여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디도를 그레데 섬에 떨어뜨려두어 거기에 세워졌던 교회의 조직을 완료시키도록 하였다.
3) 사도는 에베소에 도착하고 그가 계획했던 대로 골로새에 이르기 까지 계속여행을 한후에 다시 에베소로 돌아왔다.
4) 여기서 그는 빌립보 교인들에게서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온 디모데와 합류했다. 그리고 떠나려 할때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하여 에베소에 남도록 하였는바 그곳은 디모데를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5) 바울은 그가 계획했던 대로 마케도냐로 갔다.그는 에베소로 돌아오기를 희망했다.마케도냐에서 그는 서로 내용이 아주 비슷한 두통의 편지,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썼다. 그는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사랑하는 형제에게 청하여 니고볼리에서 그를 만날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다.
6) 사도는 이고니아 바다 동쪽 해안에 위치한 니고볼리로 여행했다. 여기서 그는 겨울을 지냈으며,디도와 합류했다.
7) 바울은 서반아로 여행했다.
8) 서반아에서 돌아온후 바울은 소아시아로 가서 드로비모가 병듦으로 그를 에베소남쪽,밀레도에 남겨 두었다.
9) 드로아에서 그는 가보를 방문했다가 자기 외투를 그의 집에 놓아 두었다. 에라스도가 머물러 있었던 고린도를 경유하여 그는 로마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다시 체포되었다.
10) 따라서 바울은 서반아에서 돌아온 후로는 더이상 정치적인 보호를 받지 못했다. 그의 2차 로마 투옥은 가혹하였다. 그리고 그의 투옥은 오래가지 않았다. 2차 투옥 기간중 누가만이 그와 함께 있었다. 데마는 이세상을 사랑하여 그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 버렸다.그레스게는 갈라디아 또는 갈리아로 갔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빨리 자기한테 오라고 명하면서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부탁했다. 이와같은 세세한 것들은 디모데후서에 기록되어 있는바 그 서신은 죽음의 그늘이 이미 사도에게 정면으로 드리워진 때에 기록 되었던 것이다. 그는 사형이 확정되어 수도에서 3마일즘 떨어진 오스티안가에서 참수 되었다. 사도가 사형당하기 전에 디모데와 마가가 로마에 도착했는지의 여부는 우리는 알지 못한다.

3. 저술 목적
만약 바울 저작권을 인정한다면 세 서신들의 목적은 자명하다.디모데전서와 디도서에서 사도는 자신의 절친한 두 동역자들에게 그들이 당시 책임지고 있던 각 교회의 문제 처리 방법을 문서를 통해 교훈해 주려하고 있다. 이 교훈들중 많은 것들이 이전에 말로 전해 졌으며,따라서 이 서신들은 성격상 확증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디도서의 경우에 바울은 편지를 써야할 특별한 용건,즉 니고볼리에서 동역자를 만나기 위해 그를 불러 와야 한다는 용건을 가지고 있다. 이 요구에 대한 이유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디도에게는 세나와 아볼로의 여행을 도울것을 요구하고 있다. 디모데전서에는 재구성이 필요한 특별한 목적을 시사해 주는 자료가 거의 없다. 그러나 비록 너무 불쑥 언급했기 때문에 이것을 서신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기는 대단히 곤란하지만 바울은 언젠가 장래에 디모데가 에베소를 방문해줄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바울은 교회안에 질서있는 조직을 세워나가야 하는 디모데의 임무에 대하여 문서를 통하여 자세히 교훈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손을 굳게 하고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격려와 심지어 도덕전 도전까지도 줄 필요를 느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디모데후서에서는 매우 다른 상황이 발견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제 감옥안에 있으며, 그의 생의 마지막에 직면해 있는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성취해온 일들을 뒤돌아보고 있고 자신이 고대하고 있는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다. 서신은 교회 조직에 관해 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오히려 디모데와 그에게 맡겨진 임무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사도는 회상의 분위기에 젖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디모데후서의 결론 부분은 목회서신중에서 가장 개인적 당부가 두드러진다. 디모데에게 되도록 빨리 자신에게 오도록 당부하고 있지만 사도는 오히려 그를 다시 볼수 있을 것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것 같다. 앞서 디모데전서에서도 말한바 있지만 사도는 후서를 써 내려가면서 디모데에게 다시 한번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를 할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이상의 것들을 요약하여 세서신의 기록 목적을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수 있을 것이다.
1) 디모데 전서
① 그가 받은 은사(4:14)와 그의 선한증거(6:12)와 그에게 부탁한 것을 디모데에게 일깨워 줌으로서 그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고 하는데 있다.
② 에베소 교회에 퍼져 있었던 영혼을 멸망시키는 거짓된 교훈들과 맞부딪칠수 있는 지침을 주고 디모데로 하여금 바른 교훈에 계속 거하도록 권면해 주려는데 있다.
③ 공중예배시의 바른 행실에 대한 지침을 두려는데 있다(2장)
2) 디도서
① 그레데에서 일을 대신 맡아 볼 사람이 거기에 도착하여 인계를 맡게 되는 대로 바울에게 디도를 니고볼리로 오도록 명하기 위해서다(3:12)
② 교법사 세나와 말에 능한 전도자 아볼로가 급히 그들의 여행을 계속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3:13)
③ 회중,개인,가정, 그리고,사회관계에서의 성결된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데 필요한 지침들을 주려고이다. 이처럼 디도서는 삼중의 목적을 가지고 기록 되었으며, 이중에서 마지막것이 디도서의 대부분에 걸쳐 언급되어 있다.
3) 디모데 후서
① 사도가 이 세상을 떠날 기약이 임박한 것을 알고서 될수 있는 대로 빨리 디모데로 하여금 로마로 올수 있도록 재촉하려고(4:9,21,참조 4:6-8)
② 그를 권하여 바른 교리를 굳게 지키며, 모든 거짓 교훈으로 부터 그것을 변명하며, 선한 군사로서 고난을 인내하도록 하려고 기록 하였다. 이 두번째 목적이 전체 서신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아볼로는 율법에 정통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학자였다.

고대의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의 도시였다. 필로와 같은 대학자의 고장이었으며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된 것이었다. 아볼로의 학구열은 대단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학문을 닦은 후 예루살렘으로 왔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세례 요한을 만났으며 거기서 다시 주님의 제자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결국은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났으며 마침내는 바울을 만나게 되어서 복음의 진수를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 아볼로는 세례 요한의 회개를 외치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다녔다. 아볼로를 세례 요한의 제자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행 18:24-25).

 그는 일찍부터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며 주의 복음을 전했으나 복음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행 18:25).

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AD 53-58년경)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 도착하여 그곳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세워서 준비를 하게 하고는 자신은 유대 가이사랴로 갔을 때이다. 바울은 그 길로 예루살렘과 안디옥을 거쳐서 갈라디아와 비시디아 브루기아를 차례로 돌아서 에베소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때 난데없이 아볼로가 에베소에 날아들었다. 아볼로가 주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지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들어본즉 무엇인가 좀 미흡한 데가 있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아볼로를 불러서 주의 도를 자세히 풀어서 일러주었다(행 18:26-27).

 아볼로가 여러 가지 학문에는 조예가 있지만 주님의 도는 바르게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볼로는 그 길로 바울이 떠나와서 비어 있는 고린도로 건너갔다.

 고린도에 갔을 때 교회의 환영을 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란 웅변이나 학문만 가지고는 바르게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볼로가 건너가자 교회는 곧 분파가 일어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볼로를 좋아하였다. 그런가 하면 역시 깊은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바울의 복음의 깊이를 따르지 못하는 아볼로의 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나는 베드로파를 하겠다고 나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나는 그리스도파라고 주장하였다.

 아볼로는 뛰어난 웅변으로 많은 제자를 얻었는데, 특히 고린도교회에서는 아볼로파가 생길 정도였다(고전 1:12).

 극심한 분파주의자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고린도교회를 바로 잡아보려고 무진 애를 써보았지만 끝내 수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볼로는 에베소에 있는 바울의 곁으로 건너왔고 두란노서원에서 바울에게 복음의 진수를 익히게 되었다. 아볼로는 기초학문을 잘 닦은 사람이라 진전이 빨랐을 것이다. 바울은 다시 고린도로 건너가라고 많이 권했지만 아볼로가 얼마나 혼이 났던지 다시는 고린도에 갈 뜻이 없다고 했다(고전 16:12).

 

 아볼로는 당대에 뛰어난 학자요 구약에 정통한 설교자였지만 이름도 없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 복음을 배운 것으로 보아 배움에 열심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겸허한 인물이었던 듯하다(행 18:25).

 당시 전도자의 대부분이 이방인보다는 유대인들에게 더 많은 핍박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당에서 담대하게 주의 복음을 증거한 점은 그가 용기 있는 전도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행 18:26).

 

 많은 제자들이 생겨나고 자기 의사와는 무관하게 아볼로파가 형성된 것을 볼 때 뛰어난 설교자이며 인격적으로도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성경에 대해 뛰어난 지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에는 무지했기 때문에 복음의 본질을 배워야 했던 것이다.

 

 성경에 대해 많은 지식을 소유하는 것과 복음의 진수를 깨닫는 것은 다른 것이다. 복음을 들음으로써 아볼로의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더욱 큰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복음은 우리로 주의 자녀가 되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게 하는 것이다.

 뛰어난 학자 아볼로가 천막 제조업자인 브리스길라 부부에게 복음의 도를 배웠다는 사실은 신분이나 지위 때문에 오히려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많은 지식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행 18:24-28).

 

 전승에 의하면 후에(AD 63년경) 아볼로가 그레데에서 사역을 했다고 한다. 그때 바울은 제 1차 로마 감옥에서 풀려나와 다시 그레데와 에베소, 마게도냐를 여행하는 중이었다. 바울은 그레데 섬에 디도를 떨어뜨려 두었다. 그래서 바울이 그레데에 있는 디도에게 편지를 하면서 그곳의 아볼로와 교법사 세나를 먼저 니고볼리로 보내어 사전에 선교를 위한 준비를 하게 하였다(딛 3:13).

 

 

아시아 일곱 교회

아시아 일곱 교회란 주후 1세기말에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의 서부 지역에 존재했었던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를 말한다. 이 교회들을 탐방하기 위해서는 여행사를 통해 현지에 직접 가보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러나 굳이 많은 돈을 들여서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사실 지금은 가봐야 옛날 교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돌무더기와 약간 남은 파편들뿐이다. 차라리 앉아서 성경 말씀과 고대의 기록들을 통해 과거의 세계로 여행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 이 글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교육위원회 발간 「교회와 교육」 1997년 5월호(pp.45-48), 6월호(pp.47-50), 7/8월호(pp.43-46), 9월호(pp.49-52), 10월호(pp.47-50), 11월호(pp.39-42), 12월호(pp.51-54)에 게재되었던 <초대교회 탐방> 시리즈 원고를 묶은 것임.

 

 

I. 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계 2:1-7)

 

 

1. 바울과 요한이 목회했던 교회

 

그러면 먼저 에베소 교회부터 가보기로 하자.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서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항구 도시이다. 서쪽으로는 에게해가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카이스터(Cayster) 강이 흘러 들어오는 교통 요로에 자리잡고 있어 일찍부터 중요한 상업, 무역 도시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주후 1세기에는 인구 25만 명을 가진 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로 번창하게 되었다. 이 에베소에는 큰 운동 경기장(스타디움)이 있었으며,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과 2만 5천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극장이 있었다(행 19:29). 또한 에베소에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네 배나 큰 아데미 신전이 있었다(행 19:27).

 

기독교 역사적으로 볼 때에 에베소는 사도 바울이 목회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2차 전도여행 때 잠깐 들러 복음을 전했으며(행 18:19), 3차 전도여행 때 와서 약 2년 반 동안 이곳에서 목회하였다(행 19장). 그 당시 에베소의 인구와 전략적 중요성을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이 이렇게 에베소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복음 전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이 떠난 후에는 디모데가 와서 목회하였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목회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후에 이곳에서 오랫동안 목회한 중요한 지도자는 사도 요한이었다. 그가 언제부터 이 교회를 담임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90년대 말,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이 교회를 맡아서 복음을 전한 마지막 사도였다. 그러다가 도미티안 황제 때에 큰 핍박이 일어났을 때(93-94년) 그는 밧모(Patmos)라는 섬에 유배되었는데, 그때 그가 환상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기록한 것이 곧 요한계시록이다(계 1:9-11).

 

 

2. 이단을 막아낸 교회

 

우리 주님께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가 요한계시록 2-3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이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먼저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다. 칭찬의 핵심은 에베소 교회가 이단을 잘 막아냈다는 것이다(계 2:2-3).

 

정확히 언제 어떤 이단들이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1세기말에 많은 이단들이 일어나서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 이단들은 주로 영지주의(靈知主義)적 색채를 띠는 것으로서, 교묘하게 기독교 신앙과 혼합하여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요한일서에서도 읽을 수 있다. 거기에 보면 그때에 이단들이 에베소(또는 에베소 주변)의 교회에 들어왔으나 교회가 그들의 정체를 간파하고 그들을 물리쳤다고 말하고 있다(요일 2:19). 이들은 영지주의 영향을 받아서 예수와 그리스도는 서로 다르다고 하며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였다고 한다(요일 2:22, 4:2,3).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당시 에베소에 들어왔던 이단은 ‘니골라 당’이라고 한다(계 2:6). 이 니골라 당이란 이름은 이레네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하나였던,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행 6:5)에서 온 것이라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하여튼 이들은 그 당시 교회를 미혹하던 이단임에는 틀림없다. 이들은 에베소 교회뿐만 아니라 버가모 교회에도 들어와서 성도들을 미혹하였다. 이 니골라 당은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 발람처럼, 성도들을 꾀어서 우상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였다(계 2:14,15).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이런 이단들의 미혹과 시험을 잘 뿌리치고 막아내었다. 그들의 거짓된 것을 잘 드러내고 물리쳤다. 이것은 그 당시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 세력들에 대한 중요한 승리요 크게 칭찬받을 일이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아마 사도 바울에게서 3년간 성경을 잘 배워서 뿌리가 깊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떠나면서 당부한 말씀을 잘 기억하고 흉악한 이리들을 잘 분별하고 막아내었을 것이다(행 20:29,30). 무엇보다도 사도 요한이 목회자로서 강단을 지키고 있는 것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3.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이러한 칭찬과 함께 책망을 받았다. 그것은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4절).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 바울의 전도를 받았을 때는 은혜와 사랑이 충만했을 것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을 깨닫고는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했을까? 그래서 주님의 계명을 따라 형제를 사랑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혹 누구에게 허물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싸주고 덮어주고 등등 ··· 참으로 사랑이 풍성한 교회였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단들의 도전을 받아 그들과 싸우다 보니 그만 사랑이 식어져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걸핏하면 형제를 의심하고 조금만 이상해도 따지고 들고, 여차하면 잘라내고 하다 보니 그만 차고 냉랭한 교회가 되고 말았다. 복음의 진리는 지켰지만 사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 받게 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하려고 애쓰다 보면 이래저래 충돌이 있게 되고 갈등과 긴장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와는 반대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사랑이 최고다”라고 하면 혹 교회는 평안하고 사랑이 있을지 모르나, 교회의 순수성은 없어지고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고 바르게 운영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 보면 자칫 사랑이 약해지기 쉽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아무리 교회를 순수하게 올바르게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는 쌀쌀한 교회가 된다면 이것은 결코 좋은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에베소 교회가 바로 그러하였고, 이 때문에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주님으로부터 준엄한 책망을 받게 되었다.

 

 

4. 처음 사랑의 회복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래도 에베소 교회를 사랑하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져라.”(5절) 첫 사랑을 잃어버린 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해결책이 여기 있다.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가 먼저 할 일은 자기가 어디서 떨어졌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떨어졌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 원인을 찾아내어야 한다. 우리나라 성도들은 무엇을 회개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막 회개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다. 병의 원인도 모르고 약을 아무리 투여해 봐야 소용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발견한 다음에는 회개하여야 한다. 그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회개란 자기의 잘못을 자백하는 것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을 실제로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그런데 여기에 주의할 것이 있다. 우리나라 성도들은 사랑을 너무 감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처음에 가졌던 그 기쁨, 가슴 뿌듯함, 물밀듯이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 그 첫사랑의 기쁨을 다시금 회복하려고 몸부림치는 성도들이 많은데, 이것은 잘못이다. 그러한 감정적인 사랑은 대개 처음 믿을 때에 주어지는 것이지 그 후에 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첫 사랑이란 젊었을 때 처음 사랑할 때에 있는 것이지, 결혼하고 나서 10년, 20년이 지나서도 그런 애틋한 감정이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지속된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한다고 할 때 그런 감정이 회복되도록 기도하고 가만히 기다려서는 안 된다.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그러한 ‘감정’의 회복이 아니다. 주님께서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내라는 의미이며, 또한 교회 안에 형제들을 사랑하며 돌보라는 뜻이다. 대수롭지 않은 것이면 형제의 잘못을 꼬치꼬치 캐묻고 따지지 말고,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며,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위로해 주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참 사랑의 성숙이다. 아름다웠던 옛 시절은 추억 속에 고이 묻어두고 지금은 옆에 있는 남편(아내)과 자녀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어려운 형제들을 돌아보고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 이것이 참된 사랑의 회복이며 성숙한 사랑의 실천이다. 그리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고 예전보다 더 큰 은혜를 내려 주실 것이다.

 

 

II. 죽도록 충성한 서머나 교회(계 2:8-11)

 

 

1. 로마에 충성한 서머나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약 50여 km쯤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마치 우리 나라의 태안반도처럼 길쭉하게 튀어나온 반도의 남쪽에는 에베소가 자리잡고 북쪽에는 서머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서머나는 옛날 루디아(Lydia) 왕국 때부터 중요한 무역도시로 발전하여 큰 부를 축적하였다. 이 도시에는 스타디움과 도서관이 있었으며 아시아에서 제일 큰 공공극장이 있었다. 대서사시인 호머(Homer)가 바로 이 도시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머나는 로마의 충실한 동맹이었다. 수차의 카르타고와의 전쟁 때 서머나는 로마 편에 서서 지원하였으며, 로마 황제를 위한 신상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서머나는 무엇보다도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였다. 이 도시는 바다를 바라보는 경사진 곳에 세워져 있었으며, 아름다운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파구스(Pagus) 언덕의 거리는 ‘황금의 거리’라고 불리웠다. 그 거리의 양쪽 끝에는 신전이 있었다. 그리고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사시사철 신선하고 시원한 기후를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오늘날 이 도시는 ‘이즈미르(Izmir)’라고 불리는데, 소아시아 일곱 도시 중 현존하는 유일한 도시이며 오늘날 터키의 유명한 관광휴양지로서 구라파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2. 유대인들의 훼방

 

이 서머나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아마 서머나가 상업도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의 유대인들은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으며, 로마의 관청에 열심히 고소하였다. 그러니 동족이 동족을 고소하는 그런 꼴이 되었다. 로마 사람이 볼 때에는 같은 유대교끼리 서로 싸우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글라우디오 황제는 주후 49년경에 유대인들을 향하여 로마를 떠나라고 명하기도 했었다(행 18:2 참조). 서머나에서도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몹시 괴롭게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모세의 율법을 폐하는 자들이라고 비방하기도 하고, 사회 경제적으로도 압력을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특히 핍박 때에는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관리들에게 넘겨주었다.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서머나 교회를 주님께서는 먼저 위로하셨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9절) 여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3)라고 하신 ‘팔복’의 말씀이 메아리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머나의 성도들은 진정 복 있는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받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주님 때문에 ‘찌들리고 박해받는’ 가난한 자들이었다. 곤고한 자들이었다. 이들을 가리켜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천국이 바로 이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바로 이들을 위해 천국을 예비해 두셨고 또한 현세에서도 그들과 함께 하시고 위로해 주신다.

 

그리고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정체를 말씀해 주신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내가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며 그 증거로 할례 받은 것은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었지만, 실상은 ‘사단의 회’라고 하신다. 무서운 말씀이다.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성도들을 훼방하고 핍박하는 자들은 아무리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실상은 ‘사단의 회’인 것이다. 아무리 육신적으로 할례를 받고 유월절을 지키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참 유대인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에게서 났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스라엘 나라에 있는 저 유대인들이 참 유대인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참 유대인이요 참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며, 이 세상 어디서든지 주의 뜻을 행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다.

 

 

3. 10일 동안의 환난

 

주님께서는 이러한 서머나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그 교회가 앞으로 당할 환난을 미리 가르쳐 주셨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10절). 여기서 ‘10일 동안’이란 꼭 문자적으로 10일을 가리킨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10일’이란 ‘끝이 있는 한정된 기간’을 뜻한다(Greijdanus). 길지 않은 짧은 기간을 뜻한다. 실제로 서머나 교회를 포함한 소아시아는 93-94년 도미티안 황제 때에 큰 핍박을 받았고 또한 113년-114년 트라얀 황제 때에도 큰 핍박이 있었다. 그 당시 핍박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로마제국의 ‘결사 금지법 위반’이었고, 둘째는 ‘국가 제의 불참’이었다. 이 ‘국가 제의’는 황제를 ‘주(主)’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으며 많은 순교자를 낳게 되었다.

 

 

4. 죽도록 충성하라

 

 

이 모든 어려운 사정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나라 교회의 장로 장립식이나 권사 취임식 때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다. 그래서 대개 “죽도록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라” 또는 “죽는 날까지 쉬지 말고 열심히 봉사하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열심히 교회 예배와 모임, 회의 등에 참석하고, 기도 많이 하고 교회 일 열심히 하고, 또한 물질적으로도 있는 힘을 다해 섬기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것은 사실적으로는 옳은 일이고 좋은 일이지만, 본문의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원어의 문장을 그대로 직역하면 “죽음까지 충성스러워라”가 된다. 이 말은 곧 죽음에 이르는 한이 있더라도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뜻이다. 옛날에 신하가 한 왕에게 끝까지 충성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곧 변절치 말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라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라는 임금을 섬기는 신하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한다.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 와도, 심지어 죽음이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 충신(忠臣)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신앙이며 곧 순교신앙이다. 예수 우리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키는 것, 이것이 참된 믿음이고 참된 충성이다.

 

 

5. 생명의 면류관

 

주님께서는 이렇게 끝까지 충성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10하). 이 세상에서의 생명은 잠깐이지만 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생명은 영원하다. 영원히 빼앗기지 않는 생명을 주신다. 이것을 그 다음절에서 다시 확인해 주고 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11절). 이 세상에서 비굴하게 생명을 조금 연장받은 사람은 죽어서 영원한 불못에 던지우지만(계 20:15), ‘죽도록 충성한 자’ 곧 믿음의 절개를 굳게 지킨 자에게는 이러한 둘째 사망의 고통이 없으며 우리 주님과 더불어 영원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서머나 교회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킨 교회였다. 2세기에 이 교회를 맡아서 목회했던 지도자는 폴리갑(Polycarp)이었는데, 사도 요한의 제자였다. 충성스럽게 주님의 교회를 맡아 섬기던 폴리갑은 155년경에 핍박을 받아 순교하였다. 화형장에 끌려갈 때에 로마의 총독이 그에게 다시 말하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그리스도를 비난하고 그를 모른다고 하라. 그러면 내가 너를 놓아주리라.” 그러나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내가 86년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겨 왔는데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나의 주이시며 왕이시요 구주이신 그분을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 그의 왕을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떠한 위협과 어떠한 협박도 그의 충성을 바꿀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화형대의 불은 한 시간 정도 타다가 꺼지고 말지만, 주 예수를 배반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불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신하들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다. 이런 왕이 우리에게 계심을 기뻐하고 이 왕을 믿고 섬길 수 있게 된 것을 우리 모두 감사드리자. 그리고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 와도 이 주님을 배반하지 않으며 죽도록 충성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성도들이 다 되도록 하자.

 

 

III. 발람의 교훈을 지킨 버가모 교회(계 2:12-17)

 

 

1. 양피지의 생산지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약 65 km쯤 올라가다가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계곡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아시아’ 주의 행정 수도인 버가모가 나온다. 서쪽의 에게해에서 약 15 km쯤 떨어진 내륙 지방에 위치한 버가모는 해발 약 300 m의 뿔 모양의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였다. 로마의 문필가였던 플리니(Pliny)는 이 도시를 가리켜 ‘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도시’라고 불렀다. 버가모는 주전 3세기에 많이 발전하였으며, 주전 2세기에는 ‘헬레니즘 문화의 꽃’으로 불리었다. 이 도시에는 20만 권이 넘는 책을 가진 도서관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버가모는 양피(羊皮) 종이의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예전에는 나일강 유역의 갈대 껍질로 만든 파피루스 종이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주전 2세기에 양의 가죽으로 만든 종이가 발명되었다. 이것은 고급 종이로서 인기가 있었으며, 주후 4세기 이후에 성경을 필사할 때에 많이 사용되었다. 오늘날 이런 양피지(羊皮紙)를 독일어로는 ‘페르카멘트(Perkament)’라고 하는데, 이는 곧 ‘버가모(Pergamum)’라는 지명에서 나온 말이다.

 

 

2. 사단의 위(位)가 있는 곳

 

이 도시의 윗부분에는 여러 종교적 건물들이 있었다. 제우스신의 제단이 있었고, 치료의 신이라고 하는 뱀 모양의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 신당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신들의 제단이 있었다. 그래서 본문 13절에 보면,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고 했다. 곧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는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버가모는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다. 주전 29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이곳에 자기를 위한 신전을 세우도록 허락하였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이 신전에 끌려가 “가이사는 주이시다”라고 고백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이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고난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은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라고 한다(12절). 이것은 버가모의 로마 총독이 사람들을 마음대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 소위 ‘칼의 권한(ius gladii)’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비교된다. 육신의 목숨을 주관하는 이가 로마 총독이라면 사람의 생명을 참으로 주관하시는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낸다.

 

 

3. 충성된 증인 안디바

 

이런 주님께서 먼저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을 칭찬하신다. 어려움 가운데서 신앙 생활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먼저 위로와 칭찬의 말씀을 보내시는 것이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13절) 여기서 말하는 안디바(Antipas)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후대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안디바는 1세기 말 도미티안 황제 때 놋쇠로 만든 황소 모양의 솥에 집어넣어져서 서서히 구워서 죽임 당했다고 한다. 참으로 잔인한 죽임이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을 보고서도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은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참으로 귀한 신앙이었고 진짜 신앙이었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였던 것이다.

 

 

4.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이렇게 굳건한 믿음을 가진 버가모 교회였건만 잘못하는 것이 또한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믿음이 좋으면 잘못하는 게 어디 있겠는가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믿음이 아주 좋은 교회도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하는 게 있을 수 있다. 버가모 교회도 순교할 만큼 믿음이 좋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하셨다(14절). 그것은 곧 그들 가운데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었다(14절). 발람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던 거짓 선지자였다. 그는 모압 왕 발락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기 위해 멀리서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도록 막으시고 도리어 축복하도록 하셨다.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후에 발람 선지자가 꾀를 내어 모압 여자들이 그들의 신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우상의 제물을 함께 먹게 하고 모압 여자들과 행음하게 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 회중에 하나님의 큰 진노가 임하게 되었다(민 22-25장).

 

주후 1세기에 버가모 교회에도 이와 비슷한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니골라 당’이라고 불리었는데(15절), 에베소 교회에도 들어와서 문제를 일으켰던 이단들이다. 이 니골라는 이레네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초대 교회 ‘일곱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였다고 한다. 그는 원래 이방인이었는데 나중에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이었으며 후에 기독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중에 타락하여 문제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의 가르침은 기독교 신앙에다 우상 숭배와 음행을 합한 타협주의 노선이었다. 기독교인도 얼마든지 우상에게 제사 드릴 수 있고 음행해도 괜찮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자 버가모 교회의 믿음이 옅은 자와 어리석은 자들이 이 가르침에 미혹되었다.

 

 

5.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

 

이런 자들, 곧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답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회개하라”는 것이다(16절). 긴 말이 필요 없다. 오직 잘못된 가르침과 행동을 떠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회개치 않는 자에게 엄중한 경고를 내리셨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16절)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주님의 무서운 심판이 속히 임할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끝까지 자기를 더럽히지 않고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흰 돌’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17절). 여기서 ‘감추었던 만나’란 것에 대해 너무 신비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생하도록 내려 주시는 하늘 양식을 뜻한다. 곧 주님을 끝까지 잘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시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흰 돌’이란 것에 대해서도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면 안 된다. ‘희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것 또는 승리를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그 돌 위에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새 이름’은 믿음으로 승리한 자의 이름을 뜻한다.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이 주어졌듯이 주님을 끝까지 믿어 이긴 자들에게는 승리의 새 이름이 주어지는 것이다.

 

 

6. 이기는 자들

 

버가모 교회는 한편으로는 주님을 믿는 믿음을 잘 지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된 교훈을 따르는 자들을 용납하고 말았다. 이들을 쫓아내지 않고서 용납한 것은 아마 ‘사랑’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을 사랑해야지, 그들을 용납해 줘야지 하다 보니 교회 안에서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음행하는 자들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교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도무지 참으실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버가모 교회 성도들의 이중성을 보게 된다. 한편으로는 주님을 잘 믿고 싶고, 그래서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순교도 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음행하는 자들을 용납하였다.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도 버가모 교회 성도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한편으로는 주님을 잘 믿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과 타협하여 적당히 죄와 더불어 살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좋은 게 좋다”, “편하게 살자”는 식의 신앙이 만연해 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은 ‘진리’에 관심이 없다. 평신도들뿐만 아니라 목사와 장로들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는 너무 관심이 없다. 그저 좋은 대로 생각하고 그저 편한 대로 움직인다. 이런 식의 주관적, 인본주의적 신앙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죄악을 과감하게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순수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 이런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감추었던 만나’와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준비하고 계신다.

 

 

IV. 이세벨을 용납한 두아디라 교회(계 2:18-29)

 

 

1. 동업조합의 도시

 

두아디라(Thyatira)는 버가모에서 동쪽으로 약 60여 km쯤 떨어진 내륙에 위치한 도시였다. 두아디라는 셀류커스(Seleucus) 1세에 의해 군사 요새로 건설되었으며, 주전 19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로마 치하에서 이 도시는 공업 및 상업 도시로 번창하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자주색 천이 유명하였는데,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만난 자주 장사 루디아가 바로 이 두아디라 성 출신이었다(행 16:14). 이 도시에는 또한 각종 동업조합(同業組合, guild)이 발달하였다. 그 곳에는 모직 조합, 직조 조합, 염색 조합, 제혁 조합, 도기 조합, 제빵 조합, 대장장이 조합, 노예매매 조합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동업조합은 각 조합마다 수호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각 회원들은 그 조합에서 가지는 제사 의식에 참여해야 했으며, 또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이어서 음란한 행사가 이어졌다. 그 당시 두아디라 사람들이 살아가려면 이 동업조합에 가입해야만 했고, 그러면 우상제물을 먹고 음행에 가담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두아디라 성도들은 참으로 어려운 입장에 있었다. 먹고살자니 조합에 가입해서 죄를 지어야 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자니 먹고살기가 힘들고 ···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성도들이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생활 하기 힘들다고 호소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2. 거짓 선지자 이세벨

 

이럴 때 사람들은 수를 찾게 된다. “무슨 좋은 수가 없나?” “신앙도 지키면서 장사도 잘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이런 비법을 찾고 있을 때 해결사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본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세벨’은 원래 옛날 이스라엘 아합 왕의 아내였다. 그는 원래 시돈 왕의 딸로서 아합 왕에게 시집 와서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바알 숭배를 크게 퍼뜨린 자였다(왕상 16:30-33, 왕하 9:30-37). 그래서 ‘이세벨’은 우상 숭배를 퍼뜨린 사악한 여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두아디라에 있던 거짓 선지자 이세벨도 이처럼 성도들을 꾀어서 우상을 섬기게 하고 죄를 짓게 하였다.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20하). ‘가르침’이 미혹의 수단이었다. 요즘의 이단들도 가르침을 주요한 미혹의 수단으로 삼는다. 무슨 재미있는 성경 공부나 무료 신학교 운영 등을 통해 솔깃한 가르침을 퍼뜨려 사람들을 미혹한다. 성경 공부도 좋고, 무슨 과정도 좋지만 우리는 거기서 그들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궁극적으로 무엇을 목표로 하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보고 판단하여야 한다.

 

아마 이 여자 이세벨은 영지주의(靈知主義)에 속하는 이단이었던 것 같다. 영지주의란 영혼과 물질의 이원론을 주장하는 가르침으로 그 당시 소아시아 일대와 지중해 연안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사상이었다. 이 영지주의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육체는 악하다 하여 금욕하고 절제하는 고행주의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는 원래부터 악하니 어쩔 수 없고 영혼만 깨끗하면 된다고 가르치는 반(反)율법주의 계통이었다. 아마 이 이세벨은 이 두 번째의 것으로 영혼과 육체는 서로 관계가 없기 때문에 몸으로 무슨 죄를 짓든 영혼의 구원에는 상관없다고 가르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이세벨의 가르침에 두아디라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미혹되었다. “그럼 그렇지, 구원이란 영혼의 문제인데 부득불 육체를 좀 더럽혔다고 해서 구원에야 지장이 있겠나? 게다가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니까 할 수 없이 세상과 좀 타협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렇게 스스로 반문하며 위로하였을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가 일제 때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고 국가의례라고 변명하면서 신사 앞에 절하던 모습과 비슷하다. 이 세상에서 말씀 그대로 다 지키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어렵지 않은가? 적당히 조금만 타협하면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을 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느냐?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상 앞에 절하고 죄를 지었을 것이다.

 

 

3.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간계를 다 아신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그냥 가만히 두시지 않으신다. “···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23절) 여기서 ‘뜻’이란 말은 원어 상으로는 ‘신장’ 즉 ‘콩팥’을 가리킨다. 이것은 또한 사람의 ‘기질’ 또는 ‘성질’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욕구와 감각의 근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박윤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깊은 곳에 들어 있는 생각과 마음을 다 아신다. 그들이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속이고 변명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속마음을 다 아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 여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벌하시기 전에 먼저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그렇지만 그 여자는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지 않았다(21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를 침상에 던지시겠다고 하신다(22절). 곧 병들어 눕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소아시아에서 발견된 여러 비문 조각들에 보면 그 당시에 음행을 인하여 벌 받아 병든 사실이 적지 않다고 한다(Moffat). 그리고 그 여자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회개치 않으면 다 큰 환난 가운데 던지시겠다고 한다(22절). 이것은 곧 시행될 임박한 심판을 말한다. 간음과 같은 큰 죄에 대해서는 현세에서 즉각적으로 심판하실 때가 많다. 뿐만 아니라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이시겠다고 하신다(23절).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악행을 하고 회개치 않는 자에게는 때때로 무서운 벌을 내리신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며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이심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4. 믿음의 정절을 지킨 성도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에는 여자 이세벨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믿음의 정절을 지킨 성도들도 있었다. 이들을 가리켜 주님께서는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라고 말한다(24절). 여기서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은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아니한”으로 번역해야 더 정확하다. 이들은 소위 ‘사단의 깊은 것’에 관계하지 않았다. 그들의 죄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거짓 선지자는 자기의 가르침을 ‘깊은 것’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즉 그의 가르침은 ‘깊은 진리’요 ‘심오한 깨우침’이라는 주장이다. 오늘날도 이단들과 타종교들, 또는 철학자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이 깊고 심오하다고 주장한다. 감히 범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깊고도 심오한 진리를 가지고 있는 양 자랑한다. 이에 비해 기독교의 가르침은 너무나 단순하고 쉽다고 비웃는다. 세속적인 지식인들은 경건한 성도들을 비웃고, 세상의 철학자들은 성경을 따르는 신학자들을 비웃는다. 이런 것들은 다 옛날부터 있어 온 사단의 기만이요 조롱이다.

 

 

5. 너희에게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

 

그러나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아니하고 그 죄에 동참하지 않은 성도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다른 짐을 지울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소위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슨 깊고 오묘한 이상한 것을 알지 못한다고 책망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게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신다(25절). 그렇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잡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이미 우리에게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신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신앙이란 자꾸만 새로운 것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신앙이란 옛날부터 내려오는 신앙, 이미 있는 신앙을 굳게 붙드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무작정 새로운 것을 좇아가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무슨 ‘새로운 성경 공부’니 또는 ‘기성 교회에서는 배울 수 없는 새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너무 현혹되면 안 된다. 우리는 ‘새롭다’, ‘앞서간다’, ‘깨었다’, ‘탁 트였다’는 말을 들을 때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붙들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슨 새로운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에게 있는 것을 굳게 잡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지금 세상의 유혹과 이단의 미혹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아주 그럴 듯한 말과 가르침으로 우리를 꾀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을 끝까지 의지하는 자,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굳게 붙드는 자는 거기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참된 믿음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소박한 것이다.

 

 

V. 영적으로 죽은 사데 교회(계 3:1-6)

 

 

1. 부유했던 사데

 

사데(Sardis)는 소아시아 반도의 서쪽에 있는 항구 도시 서머나에서 동쪽으로 약 70 km 쯤 떨어진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 루디아(Lydia) 왕국의 수도였던 사데는 주전 1,200년경에 건설되었는데, 3면이 가파른 벽을 이루고 있어 적이 쉽게 침입할 수 없는 천연의 요새였다. 이런 자연적 조건으로 사데는 크게 번창하였다. 주전 7세기에 루디아 왕국에 알리아테스라고 하는 유명한 왕이 있었는데, 그가 57년간 통치하는 동안 루디아는 아주 부강한 나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어서 그의 아들 크로에수스(Croesus)가 왕이 되었을 때에 루디아는 전설적인 부를 축적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에 ‘크로에수스처럼 부유한(as rich as Croesus)’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부귀와 영화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사치하고 방종하게 되었으며, 국력도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자연적 지형만 믿고 경계를 게을리 하다가 주전 549년과 218년에 두 번이나 기습을 받아 점령당하기도 했다(3절 참조).

 

 

2.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사데 교회처럼 혹독한 비판을 받은 교회도 없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1절). 뿐만 아니라 “내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라”고 하셨다(2절). 칭찬은 없고 책망만 받은 교회였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죽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병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어떤 부위에 병이 있다면 그 부위만 치료하든지 도려내면 되지만, 영적으로 죽는 것은 마치 온 몸이 병들어 전체로 죽어 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데 교회는 외적으로는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모임과 각종 행사도 활발하고 많은 신앙의 모양들이 있었다. 외적인 신앙의 형태들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죽은 상태’였다. 내적 생명력, 참된 사랑, 성령의 능력에 있어서는 죽은 상태나 다름없었다.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이 사데 교회에서는 거의 전반적인 문제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무슨 문제로 서로 싸운다 할지라도 영적으로 살아 있다면 그래도 가망은 있다. 과거에 한국 교회가 많은 싸움과 분열을 겪었지만, 그래도 영적 능력과 내적 생명력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적으로 죽은 교회는 다시 회복하기가 어렵다. 비록 분쟁은 없다 할지라도 조용히 죽어 가는 교회는 살리기가 힘든 것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지금 이런 위기를 겪고 있지 않은지 염려된다. 외형적으로는 그 어느 때 못지않게 풍부하고 활발하다. 주일의 공적 예배 외에 각종 성경 공부와 지회 모임, 새벽 기도회와 수요 기도회 및 금요 철야 기도회, 찬양과 율동 등 정신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바쁘게 돌아간다. 그러나 각 개개인에게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 내적 생명력이 과연 얼마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갈급해하며, 메마른 영혼을 달래지 못해 방황하다가 지친지도 이미 오래 되었다. 더 이상 교회에서 무엇을 기대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잠자는 교회는 흔들어 깨우면 되지만, 아무리 부르고 외쳐도 일어나지 않는 교회라면 이미 죽은 교회가 아닌가 하는 섬뜩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래도 아직 살아 움직이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3. 남은 바 죽게 된 것

 

이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데 교회를 향하여 교회를 주관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처방을 내리시는가?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하신다(2절). 아직 죽지 않고 남은 것이 조금은 있다는 말씀이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 여기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 그것은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것,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것, 그것을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해결의 길이 있고, 침체에 빠진 우리 한국 교회의 나아갈 길이 있다. 교회가 침체에 빠졌다고 해서 예배 형태를 완전히 바꿔 버리든지 또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든지 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요즘 교회를 활성화시킨다고 해서 교회에 온갖 전자 악기와 드럼까지 동원하고 있지만 그런 외적인 것들이 교회에 참된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는 없다. 또는 강대상을 치워 버리고 멀티미디어 영상 매체를 동원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열린 예배’라는 이름하에 전통적인 설교 대신에 연극과 쇼를 전개하는 경향까지 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해결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4. 처음 신앙의 회복

 

이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3절). 처음에 기쁨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며 감격하던 그때의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라는 의미이다. 복음성가가 없어도, 찬양과 율동이 없어도 얼마나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며 감격했었던지, 별스런 성경 공부나 프로그램이 없어도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재미있고 은혜가 되었던지, 그리고 좋은 예배당 건물이 아니어도 마루 바닥에 꿇어 엎드려 얼마나 눈물 흘리며 기도했던지, 그 옛날의 순수한 신앙을 다시금 회복하고 굳게 하라는 말씀이다. 무엇이 우리의 그 뜨거웠던 열정을 빼앗아 갔으며, 무엇이 그 순수했던 믿음을 흐리게 만들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온 세계가 놀라고 온 세계에 자랑하던 한국 교회의 믿음과 열심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그것을 빼앗아 갔단 말인가? 우리는 각자 그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밝혀 내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온갖 요란한 대회나 행사에 앞서 한국 교회의 현 상태를 진지하게 진단하고 그 참된 원인을 밝혀 내어야 한다. 그래서 그 원인을 발견하고 나면 그것을 회개하고 고쳐서 원래의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여야 한다. 혹시 물질의 풍요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덜하게 된 것은 아닌지, 또는 텔레비전에 마음이 빼앗겨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 것은 아닌지, 아니면 교만해져서 어지간한 은혜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각자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고치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만이 참된 해결의 길이요, 다시금 은혜를 회복하는 길이다.

 

 

5.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그러나 사데 교회에 남은 자들이 몇 명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데 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4절). 아무리 죽은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남겨 두시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실망스런 모습들이 많지만 그래도 절망치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보실 때에 합당한 자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이다. 곧 죄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믿음의 정절을 굳게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자이다. 그저 열심히 봉사하고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 성도들은 그저 시간과 물질을 바쳐 교회에 충성하고 열심히 움직이면 믿음이 좋다고 하고, 세상의 죄와 타협하는 것은 문제삼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주님께서 보실 때에 합당한 자는 그 사람이 얼마나 물량적으로 많이 움직이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죄악에 물들지 않느냐에 있다.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조용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여 죄와 타협하지 아니하는 자, 이런 사람이 주님께 합당한 자이다.

 

사데 교회도 우리 한국 교회처럼 외적으로는 활발하게 움직였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대부분 죄와 타협하고 말았다. 마치 그들의 많은 활동이 그들의 죄를 보상해 줄 수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서.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죽은 자’라고 책망하셨다. 그들의 많은 활동은 돌아보지 않으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의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성도들이 있었으니, 주님께서는 이들을 축복하시고 “흰옷을 입고 자기와 함께 다닐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의 이름은 하늘의 생명책에서 결코 흐려지지 아니하며, 또한 주님께서도 그 이름을 하나님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겠다고 하신다(6절). 왜냐하면 천국은 ‘깨끗한 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VI. 말씀을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계 3:7-13)

 

 

1. 형제를 사랑한 빌라델비아

 

빌라델비아는 사데를 지나 서쪽의 에게해로 이르는 긴 계곡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주요 무역로의 요충이 되었으며 상업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또한 로마의 우편 도로가 이곳을 지나 페르시아로 통했기 때문에 ‘동으로 향하는 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도시의 이름이 빌라델비아(형제 사랑)로 붙여진 데에는 그럴 만한 역사적 이유가 있었다. 주전 2 세기에 아탈루스(Attalus) 2세는 자기 형이 암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 소문이 거짓임이 판명되고 형이 그리스에서 돌아왔을 때에 그는 곧 왕위를 내어 주었다. 또 한 번은 로마 당국이 그에게 형을 무너뜨리고 대신 왕이 되라고 권고하였지만, 그는 이것도 거절하였다. 그래서 그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Philadelphus)’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여기서 ‘빌라델비아(Philadelphia)’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2. 말씀을 지킨 교회

 

이런 형제 사랑의 미덕을 가진 빌라델비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께 칭찬받은 아름다운 교회였다. 이 교회가 칭찬받은 이유는 주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8하). 빌라델비아 교회는 능력이 적은 교회였다. 성도들 수도 적고 부요치 못했을 것이다. 학식도 많지 않고 사회적으로도 권세가 별로 없는 미약한 교회였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칭찬하셨다. 왜냐하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말씀을 따랐다. 곧 극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고 하신다(10절). 우리 주님의 말씀은 ‘인내의 말씀’이다. 인내가 없이는 결실하지 못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을 믿고 그 결실을 보려면 인내해야 한다. 끝까지 주님을 잘 믿어야지, 좀 어렵고 환난이 닥친다고 중간에서 포기해 버리면 허사가 되고 만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다. 끝까지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잘 지켰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칭찬하신 것이다.

 

 

3. 계명을 지키는 신앙

 

요즘 우리나라 교회는 이 점이 소홀히 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어떤 교회는 아주 뜨겁다고 한다. 손뼉을 치며 찬송을 힘차게 부르고 또 온갖 전자 악기와 드럼을 동원해서 떠들썩하게 예배드린다. 이런 소란스런 분위기 가운데서 예배를 드리다가 바깥에 나오니 갑자기 기분이 썰렁해진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한 잔 하고 가자”면서 술집으로 향하거나 또는 나쁜 곳으로 향하면 그 뜨거웠던 예배가 다 허사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얼마나 뜨거운 예배를 드렸느냐, 얼마나 찬송을 힘차게 불렀느냐를 보시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를 보시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뜨겁다” 또는 “은혜 받았다”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이다. 이것은 ‘내 마음’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내 혼자 가지는 기분이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지키느냐 하는 데 있다. 주님께서는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21). 사도 바울도 다음과 말하였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전 7:19) 계명을 지키는 신앙,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이 올바른 신앙이요 주님이 칭찬하시는 신앙이다. 그저 ‘뜨겁다’든지 ‘은혜롭다’든지 하는 것은 그 자체만 가지고는 주님 앞에 칭찬받을 것이 못된다. 그것은 내가 느끼는 것이요 내 마음이 기뻐하는 것이지, 아직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 열린 문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상급을 약속하셨다. 우선 8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복음 전파의 문을 활짝 열어놓겠다는 뜻이다. 곧 구원받는 성도들을 계속 보내주시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지킨 대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다. 어떤 목회자는 이렇게 말한다. 먼저 교인들을 끌어 모아 놓고 나중에 교육시키겠다고.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먼저 나의 말을 지켜라. 그러면 네 앞에 열린 문을 두겠다고.

 

다음에 9절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나타내 주겠다고 하신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이 말씀은 빌라델비아의 성도들을 핍박하던 유대인들 중에서 몇 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뜻이다. 온갖 욕과 비방을 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법정에 고소하고 죽이는데 앞장섰던 유대인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사단의 회’라고 낙인찍혔던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그런 일이 빌라델비아에 일어났다. 이것은 기적적인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일이다. 이것은 곧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시기 위해 특별히 행하신 것이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시험의 때’란 아마도 주후 113-114년의 트라얀(Trajan) 황제 때의 핍박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겠다”는 것은 원어상 “시험의 때에 지켜 주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시험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당할 때에도 지켜 주시겠다는 뜻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지켰으므로 주님께서도 그 교회를 지켜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지켜 주신다. 특히 환난 날에, 시험 당할 때에 우리를 지켜 주신다.

 

 

5. 권면과 약속

 

이러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권면은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11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는 말씀은 두아디라 교회와 사데 교회에 이어 세 번째 나오는 말씀이다. 그것은 이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진 것을 굳게 잡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잡으라고 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한다. 우리에게 계시는 예수님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잡고 나아가야 한다.

 

그리할 때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 있다. 그것은 그에게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과 그 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시겠다는 것이다(12절).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귀한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과 그의 구원이 확실함을 말한다. 그러한 자를 주님께서 확실하게 구원하시고 높은 자리에 앉히시겠다는 뜻이다.

 

 

6. 참된 성도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렇게 과분한 칭찬과 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 성도들의 수가 많아서인가? 재정이 넉넉한 교회라서 그런가? 아니면 권세 있는 성도들이 많아서인가? 아니다. 오직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다. 극한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기 때문”이다. 곧 순교신앙을 가지고 끝까지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사랑하시고 복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적은 능력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지켜 나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며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오늘날 외적인 모양은 요란하지만 참된 신앙이 희박해져 가는 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참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VII.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계 3:14-22)

 

 

1. 부유한 라오디게아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에서 남동쪽으로 약 70 km 쯤 떨어진 내륙에 위치한 도시로 요즈음은 에스키 히사르(Eski-hisar)라고 불린다. 라오디게아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가는 무역로와 버가모에서 남쪽으로 가는 무역로가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는 로마 시대에 매우 부유한 도시로 성장했다. 주후 60년에 지진이 나서 도시가 파괴되었을 때, 라오디게아가 로마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재건한 것을 보면 이 도시가 얼마나 부유했던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도시에는 은행이 발달하였으며 유명한 의학 학교도 있었다. 특히 귀에 바르는 약과 눈에 바르는 안약은 이 도시에서 생산하는 유명한 의약품이었다고 한다.

 

이 라오디게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다.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중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아마 에바브라가 전도하여 설립한 것으로 추정된다(골 4:12 참조). 그런데 이 교회에 주신 주님의 말씀은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 심한 책망과 징계의 말씀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권면과 아울러 약속의 말씀도 주셨다.

 

 

2. 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다”는 것이었다(15절).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데는 재미있는 지리적인 배경이 있다. 라오디게아 북쪽으로 10 km 쯤 떨어진 곳에 히에라볼리(Hierapolis)라는 도시가 있었다. 여기에는 지금도 유명한 야외 온천이 있는데, 이 온천수는 평평한 고원 지대를 흘러서 라오디게아 맞은 편에 떨어졌다. 그런데 처음 히에라볼리에서는 뜨겁고 미네랄 성분이 많던 물이 흐르는 사이에 식어서 라오디게아에 도착했을 때에는 미지근한 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라오디게아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 이 사실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람들은 ‘차다’는 것은 영적으로 지치고 피곤한 자들에게 신선한 힘을 공급해 주는 것을 뜻하며, ‘덥다’는 것은 열심을 내어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 그래서 교회가 신선하게 되든지 뜨겁게 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희랍어의 ‘차다(프쉬크로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바람은 19절에 있는 대로 “열심을 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진심은 덥게 되는 것이다.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는 것은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결단을 촉구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를 하려면 열심히 하든지 아니면 치우든지 하라”고 했을 때 부모의 본심은 ‘열심히 하는 것’이며 ‘치우는 것’은 본심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3.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교회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왜 이렇게 미지근한 교회가 되고 말았을까? 그것은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하여졌기 때문이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17절에 있는 대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자기 만족에 빠진 교만한 교회였다. 그러나 실상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기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교회였다(17하).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향하여 권면의 말씀을 주셨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8절) 사실 이 말씀은 권면이라기보다 책망에 가까운 말씀이다.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무역을 통해 부요하여 교만해졌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불로 연단한 진짜 금을 사서 진짜 부자가 되라는 말이다. 그리고 “흰 옷을 사서 입어라”는 말은 라오디게아에서 생산되는 까운 같은 겉옷(trimita)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말은 라오디게아에서 만든 안약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진짜 안약을 사서 발라 자신의 참 모습을 보라는 의미이다.

 

 

4. 사랑하는 자를 책망함

 

그 다음에 또다시 주님의 권면이 나온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절). 여기에 보면 주님께서는 그래도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신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한다고 하신다(히 12:6 참조). 따라서 책망과 징계도 사랑의 행동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징계가 없으면 죄의식이 없어지고 예사로 죄를 짓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점점 나쁜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것을 방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따라서 참 사랑은 책망과 징계를 포함한다. 그리고 또한 어떻게 할 것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곧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는 것이다. 별다른 수가 없다. 열심을 내고 회개하는 것만이 문제 해결의 길이다.

 

 

5. 문밖에 서서 두드림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20절) 이 구절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구절이다. 사영리 책자의 제일 끝에 나오는 ‘영접’ 촉구의 말씀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원래 본 구절의 의미는 ‘불신자’에게 영접을 권유한 것이 아니라 이미 믿는 ‘신자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이다. 그렇지만 조금 원용해서 불신자에게 예수님 영접을 촉구하는 말씀으로 사용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우리 주님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신다. 원문에 의하면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계속’ 두드리신다고 되어 있다. 우리 주님은 끈질기게 회개를 촉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전파되고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의 마음 문을 여는 것이다.

 

 

6. 축복된 교제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와 더불어 먹겠다고 말씀하신다(20하). ‘더불어 먹는다’는 것은 축복된 교제를 말한다. 주님과 함께 가지는 친밀한 교제를 말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친밀한 교제가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며 즐겁다. 그러나 주님이 떠나가시면 우리는 허전하고 외로우며 불행해진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것이다. 자기의 아집과 교만한 마음과 강팍한 마음을 버리고 주님께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다시금 우리와 함께 하시며 복된 삶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이 나와 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21절) 우리 주님을 잘 믿고 승리하는 자는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복을 누리게 된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우리 주님은 우리의 행위를 아신다. 마음의 숨은 생각도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피할 수도 없고 거짓으로 속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사람이 아닌지?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나 실상은 가난하고 벌거벗은 자가 아닌지? 착각 가운데 살아온 나의 인생은 아니었는지?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문을 열자. 우리의 마음 문을 활짝 열자. 다른 사람의 문이 열렸는지 닫혔는지 거기에는 신경 쓰지 말고 나 자신의 문을 활짝 열도록 하자. 그러면 주님께서는 또다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실 것이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축복스런 주님의 교제가 함께 하시기를 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예비하신 큰 권세와 영광에 함께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빈다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

  지 역 사도행전 내 용(사건) 동행자 비 고
1차 수리아안디옥 13:1-2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 교사 중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세움    



실루기아,구브로 13:4 배로 이동 바울,바나바,마가

살라미,바보 13:5~12

Bitmap

밤빌리아,버가 13:13 바보에서 배로이동 마가요한 돌아감(예루살렘으로)



비시디아안디옥 13:14~50 회당에서 바울의 설교, 유대인들의 핍박 바울, 바나바

이고니온 13:51~14:5 회당에서 설교, 많은사람 회심, 유대인들 돌로치려함 Bitmap

루스드라 14:6~19 앉은뱅이 고치심,유대인들(안디옥,이고니온에서 온)이 돌로침 Bitmap

더베 14:20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음



루스드라,이고니온,안디옥 14:21 제자들에게 환란을 예언함, 금식기도 부탁



비시디아,밤빌리아 14:24 이동



버가,앗달리아 14:25 이동



수리아안디옥 14:26 배를 타고 들어옴, 선교 보고함.



예루
살렘
종교
회의
수리아안디옥 15:1 어떤 사람이 유대에서 와서 무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된다고 함 바울, 바나바,
몇 사람




15:2 바울과 바나바와 저들과 변론함, 예루살렘으로 사람을 보내기로 결정



베니게,사마리아 15:3 이방선교에 대하여 전함



예루살렘 15:4~20 바리새파 :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해야 된다고 주장
베드로 :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준다고 변론함 바나바와 바울 : 이방인에 대한 표적과 이적을 선교 보고함
야고보 : 베드로와 다윗의 예를 들며 이방인도 예수님의 구원이 합당 말함




수리아안디옥 15:22~35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편지로 보내와 서로 기뻐함 바울,바나바,유다,실라





유다와 실라는 돌아감 바울,바나바

2차 수리아안디옥,구브로,길리기아 15:36~41 바나바와 마가는 구브로로, 바울과 실라는 길리기아로 전도를 떠남 Bitmap

더베,루스드라 16:1~5 디모데 할례 줌,(딤후3:11-함께 고난당함) 바울,실라,디모데 딤후3:11
브루기아,갈라디아,무시아 16:6~7 성령이 아시아(에베소)로 가지 못하게 함 Bitmap

드로아,마게도냐(네압볼리) 16:8~11 밥에 환상에서 마게도냐로 오기를 청함 누가가 동행함(우리) 딤후4:11
빌립보 16:12~40 루디아 만남,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고침, 주인의 신고로 옥에 갇임. 바울과실라가 기도 중에 지진, 간수 구원, 옥에서 풀려남



압비몰리,데살로니가 17:1~6 회당에서 강론(3주), 유대인의 시기, 떼를 지어 소동이 일어남



베뢰아 17:7~14 성경을 상고함, 유대인(데살로니가에서 옴)들의 소동, 실라와 디모데 남음



아덴 17:15~34 너희가 범사에 종교성이 많다고 함 바울

고린도 18:1~17 브리스길라, 아굴라(본도 유대인) 만남-글라우디오 황제 때 추방됨 Bitmap 살전,후1:1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 실라와 디모데 내려옴,1년6개월간 가르침 바울,디모데,실라,누가




데살로니가전, 후서, 갈라디아서 쓰심 Bitmap




회당장 소스데네(고전1:1) 바울의 고소와 매 맞음 브리스길라,아굴라동행
겐그레아 18:18 머리를 깎음



에베소 18:19~21 유대인들과 변론, 떠남, 브리스길라, 아굴라 남음



가이사랴, 예루살렘, 안디옥 18:22 안부를 묻고 안디옥으로 감



3차 수리아안디옥, 갈라디아, 브루기아 18:23 모든 제자를 굳게 함, 에베소에서 아볼로 에베소로 보 냄 바울, 실라,
디모데
고전4:17,고후1:19
에베소 19:1~20 12제자 세례 줌. 3년간 목회(20:31) 소스데네.
브리스가
고전1:1




고린도에서 찾아온 사람(고전16:17),
질문편지(고전(7:1),고린도전서 씀








바울의 예정지(고전16:5~8), 헌금하라(고전16:1)





19:21~22 바울의 예상경로(마게도냐->아가야->예루살렘),
디모데, 에라스 먼저 보냄






19:23~41 에베소 소동, 아데미여신 사건



마게도냐 20:1 고린도교회 문제생김(바울이 진짜 사도가 아니라고 함)







눈물로 쓴 편지가 있음(고후2:4), 세 번째 방문예고(고후12:14,13:1) 디도 고린도로
보냄






디도 만남(고후7:6~7), 고린도후서, 위로받음(고후1:3~7) 디도 돌아옴





헌금강조(고후9:1~15)



헬라(그리이스,아가야,고린도)마게도냐 20:2 3개월 머뭄, 로마서 씀, 뵈뵈를 보냄(롬16:1),마당발 임(롬16:3~15)







로마를 서바나(스페인)의 전도 전초기지 예정(롬15:23~28)



빌립보, 드로아 20:4~12 유대인의 해함을 피하기 위해 육로를 택함, 대표자(헌금)들, 유두고 청년



앗소, 기오, 사모, 밀레도 20:13~38 밀레도에서의 고별연설, 순교의 마음(행20:24)



고스,로도,바다라,베니게,두로 21:1~6 제자들 만류함(예루살렘 가지 말라고)



돌레마이,가이사랴 21:7~16 빌립 집사 집에 유함, 선지자 아가보가 결박을 예언함



예루살렘 21:17~26 야고보 방문



로마행

21:27 성전에서 잡힘





23:12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 40여명



가이사랴 23:23~35 가이사랴 헤롯 궁에 갇힘





24:1~26 벨릭스 총독





25:1~26:32 베스도 총독. 아그립바 II세



로마 27:1~28:31 로마행 배를 탐, 로마에서의 전도



1차 구금 골로새서 옥중서신 두기고와 오네시모 함께 보냄(골4:7~9) 바울, 마가,
아리스다고
골4:10
빌레몬서 오네시모의 용서를 구함(몬1:10), 빚 갚음(몬1:19) 에바브라, 데마,
누가
몬1:23~4
빌립보서 에바브라디도 헌금전달(빌4:18), 죽을병 듬, 나음(빌2:25~30)



에베소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4차 디모데전서 목회서신 디모데 에베소에서 목회(딤전1:3)





디도서 디도 그레데 섬에서 목회(딛1ㅣ5)



2차 구금(디모데후서) 옥에 갇힘(딤후1:8), 어서 오라(딤후4:21) 바울, 누가 딤후4:11

서신서 I (바울서신 13)

바울서신 전체요약(13): 포인트 복습

주요교리(3)
•로마서(1:14-17): 구원을 이루라 (구원교리: 칭의와 성화): 개인구원

•고린도전서(1:10): 삶의 문제를 분별하라 (사랑의 삶)
•고린도후서(12:9): 거룩하기로 결단하라 (깨끗한 삶)
•갈라디아서(5:1): 성령의 소욕을 따르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옥중서신(3)
•에베소서(4:1): 교회와 성도의 관계 (교회=그리스도의 몸)
•빌립보서(1:25):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성령충만)
•골로세서(2:9-10): 예수님은 누구인가(그리스도의 충족성)
•데살로니카전(5:11)후(2:15):  재림의 주님을 올바르게 소망하라 (격려)

목회서신(2)
•디모데전서(3:14-15): 믿음의 선한 싸움 (목회행정)
•디모데후서(4:5): 고난을 겪으면서 끝까지 전하라(목회헌신)
•디도서(1:5): 바른 교리를 전파하라 (지도자의 인품)

옥중서신(1)
•빌레몬서(10-11): 예수사랑으로 사회변화

바울서신 책별요약(13)

로마서
▪작성시기: 3차 여행중 고린도에서 3개월간 체류중 작성 (AD57)
▪배경: 로마교회는 바울에 의해 세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전도를 염두에 두면서 기록.
▪특징: 대표적인 서신서로 첫번째로 등장
--사도들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한 로마 교회에 기독교 신앙의 기본 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로마는 (하나님의) 복음으로 시작해(1:1), (나의) 복음으로 마칩니다(16:25).

고린도전서:
교리적 서신서로 두번째로 등장
▪기록시기: 3차 여행중 에베소 3년 체류기간중 작성 (고린도 가기전 AD 55)

▪배경: 2차여행중 개척한 고린도교회(1.5년사역)의 분쟁과 음행 소식을 듣다가 마침내 3차여행중 에베소 사역시(2년) 편지를 쓴다. 50km 떨어진 고린도교회의 육신적 분쟁을 바로잡고, 올바른 교리와 성도자세를 가르친다 (다시방문 약속).
▪구성:
•••교회연합과 분열(1-4장)
-----십자가의 도와 신앙윤리. 지혜로서 분쟁 말라;
•••고린도교회 문제들(5-8장).
•••성찬/교리(9-16)
-----외인 악행은 하나님 판단, 교회내 악한자는 관계끊고 내쫒으라(5:9-13);
-----너희몸은 성령의 전(6:19);
-----그밖에 우상제물,
-----십자가의 도와 신앙윤리.
-----지혜로서 분쟁 말라;
-----십자가의 도와 신앙윤리.
-----지혜로서 분쟁 말라;
-----성찬식(편당배제),
-----신령한 은사(교회는 한몸), 사랑, 부활등  실제적인 문제들을 많이 다룸
-----(편지전달: 고린도 3형제 전달설, 디도 전달설)

 

고린도후서: 디도의 고무적 보고후 기록
▪기록시기: 3차여행중 마게도냐 잠시체류중 (아직 고린도 가기전, AD 56)
▪배경: 교회의 육적문제가 다소 해결되었다. 그러나  마게도냐인들 처럼 연보를 고린도에서도 준비할것을 권면한다.  또한 거짓 교사들의 사주로 일부 성도가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므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과 복음의 정당성을 변호한다.
▪구성:
•••바울의 사역(4장-7:1).
•••연보(7:2-9장).
•••바울의 자기변호(10-13장)
▪참고:연보의 원리및 목적. 바울의 개인적이고 자전적인 내용. 사도의 고난.
내세적 종말사상, 화해의 직분과 복음, 문자(옛계약)와 성령(새계약)의 대비

갈라디아서
※로마서의 축소판

▪기록시기: 1차여행 직후 또는 3차 여행중 (남갈라디아설 vs 북갈라디아설)
▪목적: 거짓교사들의 다른복음을 반박, 할례등 율법행위아니 믿음으로 구원.
---사도권을 밝힘: 자신이 전한 복음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구성: 바울의 사도적 권위 (1:10-2:21), 이신칭의(3:1-5:12), 성령의 삶(5:13-6:18)
▪내용: 구원 받은 개인이 구원의 진리를 굳게 잡고 이단에 물들지 말아야 함. 유대주의자들이행함(할례와 율법)을 강조하여 갈라디아 교회를 미혹할 때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 다는 진리(이신칭의)를 강조하고 있다.
▪특징: 로마서와 유사(로마서 축소판: 율법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
※이 책의 주제는 ‘자유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선언문’ 또는 ‘그리스도인의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 책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이 온다는 새 언약에 대한 설명입니다.
▪구성: 갈라디아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장과 2장은 바울의 간증, 3장과 4장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고 5장과 6장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에 대해 언급합니다.

에베소서 (옥중서신, AD 62): 교회론 (소아시아의 수도)
※골로새서와 쌍둥이 서신: 155구절중 절반 가량이골로새서 본문과 평행.
▪목적: 이방인과 유대인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하여.
▪구성: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1-3장), 성도의 생활(4-6장)
▪내용: 옥중서신. 교회는 비밀의 경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교회론), 교회직분에 대한 언급, 그리스도인의 관계. 마귀와의 영적투쟁(전신갑주),
에베소서 요약

벨립보서 (옥중서신, AD 62): 에바브로디도가 편지 전달 (마게도냐 동부지방)
▪배경: 유럽 최초의 교회(자주장사 루디아와 한 간수의 회개, AD50년경 설립). 옥중의 바울은 어려움 당하는 빌립보교회에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의 권면함. 이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기뻐하는 역설적인 신앙임.
▪구성: 그리스도의 겸손(2장), 믿음으로 난 의(3장), 그리스도안에서의 삶(4장)
▪참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기쁨의 서신, 바울의 개인적이고 내세적인 사후관 등장(1:21-24). 비하와 승귀(2장), 손할례당(3장), 연보칭찬(4장)

골로세서 (옥중서신, AD 62): 기독론 (소아시아 남서부 라오디게아 동쪽 )
▪배경: 골로새 교회는 에바브로가 세움 (4:12-13: 바울이 직접 방문 안했음).
교회에 침입한 이단사상을 막기 위해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충족성을 가르침.
(이단사상: 유대교의식주의,  거짖철학(옃지주의), 금욕주의, 천사숭배)
▪구성: 그리스도의 우월성(1장), 참된가르침 (2장), 그리스도인의 새생활(3장)
▪특징: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충만하심을 강조, 라오디게아 교회와 밀접한 관계(함께 읽어라). 에베소서와 쌍둥이 서신.

데살로니가전서 (2차 여행중, 고린도에서 기록)
▪배경: 계속지도해야할 개척교회의 모델 (디모데 보냄).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성도들은 모든 생활에 있어서 거룩함을 회복해야 할 것을 가르침
▪주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생활
▪참고: 믿는자의 본이 된 교회, 임박한 종말(재림)사상, 매 끝장마다 주의 재림 언급, 성도의 휴거문제를 언급 (나팔소리,4:16-18), 항상기뻐하라(5:16-18)

 

데살로니가후서 (전서의 재림에 대한 오해를 자세히 설명: 고린도에서 기록)
▪배경: 종말론의 폐단을 시정한다.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시기에 대한 오해로
발생한 문제해결을 위해 바울은 재림의 징조와 재림을 대비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주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추가설명
▪참고: 주의 재림문제, 배교/불법자/적그리스도의 문제언급, 훈계와 권면이
많음, 살장을 통해 주의 재림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을 바로잡기 위함

디모데전서 (목회전반에 대한 신학적 지침)
▪배경: 교회조직과 목사 및 리더쉽의 자격을 가르치는 목회지침으로서 성도들을 인도하기 위해 경건을 강조.

▪주제: 교회 지도자들의 신앙자세 - 배교와 타락을 특별히 경계
▪참고: 목회 현장의 실제적인 문제 취급, 신학적 문제보다 윤리-도덕적 문제가 많음, 교회 직분에 대한 언급(3:1-14), 초대교회 신앙전승 인용(3:16)

디모세후서 (목회자의 영성과 인품강조)
▪내용: 바울의 유언서로 끝까지 충성하라는 메세지입니다. 2차로 투옥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 사역의 완수를 위해 끝까지 충성할 것을 권고하면서 인내와 말씀, 성령의 능력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주제: 하나님의 일군꾼에 대한 권면
▪참고: 개인적인 목회서신, 신학적인 내용 보다는 전도자의 자세와 마음 가짐에 대한 언급, 성경관
※설교요약:

디도서
▪내용:바울은 그레데 교회에 있는 젊은 디도에게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전하면서 옳은 행실은 올바른 신앙이 전제될 때 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주제: 바른교훈에 합당한 목회자의 삶
▪참고: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용어들이 많이 등장, 거짓교사에 대한 경고, 교회직분에 대한 언급(장로,감독 1:5-9)

빌레몬서
▪내용: 빌레몬(가정교회 목자)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것을 부탁하며, 오네시모가 용서받을 때 유익한 자가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주제: 성도들 간의 용서와 형제애
▪참고: 가장 짦고 개인적 성향이 강한 바울의 옥중친서, 노예제도에 대한 바울의 입장을 엿볼수 있음

 

'기독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대한 카운슬러 바나바  (0) 2022.05.10
본디오 빌라도  (0) 2022.05.10
모퉁이돌  (0) 2022.05.09
성경 속에 나오는 10가지 성전  (0) 2022.05.09
성경에서 사용한 상징적 수(숫자)와 666  (0) 2022.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