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본디오 빌라도

열려라 에바다 2022. 5. 10. 08:04

빌라도는 주후 26-36 년 동안 총독으로 있었다. 역사의 기록은 그를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로 끌고 온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 이방인에 의해 죽임을 당함에 대해 예수께서 예언하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2. 당시 산헤드린은 사형시킬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로마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예수께서 정죄를 받으신 것은 신성모독죄였기에 반드시 돌로 침을 당해야 했다. 바로 이 일을 유대인들이 사도행전 7 장에서 스데반에게 행하였는데, 그들은 로마 사람들에게 이 일에 대한 허락을 요청하지 않았다. 나는 이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예수께 신 21:23 에 기록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게 하기를 원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메시아인척 하는 이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기를 원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참으로 “저주”(참조, 갈 3:13; 골 2:14)를 받으신 것이다!

"그 시체를 밤새도록 그대로 두지 말고 그 날에 그를 매장하십시오.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시체를 그대로 두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신명기 21:2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성경에도 “나무에 달린 사람마다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갈라디아서 3:13)

"우리에게 불리한 율법의 채무 증서를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 버리셨습니다."(골로새서 2:14)


헬라어 사본에서 이 부분에 대해 변이가 나타난다. 고대의 여러 좋은 사본에서 빌라도의 이름이 폰티우스로 나타난다(참조, 벌게이트 역). 이 이름은 눅 3:1; 행 4:27; 딤전 6:13 에도 나타나고 있다. 초대 교회의 글에서 두 이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로마의 티베리우스황제가 다스린 지 15년째가 되던 해에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 총독으로 있었다. 그리고 헤롯은 갈릴리 지방의 왕으로, 그의 형제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왕으로, 루사니아는 아빌레네 지방의 왕으로 있었으며(누가복음 3:1)


I. 출신
가. 태어난 장소와 때는 알려지지 않음
나. 기병대 출신(로마 사회의 중상층)
다. 결혼을 했지만 자녀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음
라. 이전의 행정관으로서의 지위(여러 직임을 그가 맡았었을 것이다)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음


II. 그의 성격
가. 두 가지의 다른 관점
1. 필로(레가티오와 가이움, 299-305)와 요세푸스(유대고대사 18.3.1 과 유대전쟁사 2.9.2-4)는
그를 잔인하고 동정심이 없는 독재자로 묘사했다.
2. 신약(복음서들, 사도행전)은 그를 나약하고 쉽게 다룰 수 있는 로마 총독으로 표현했다

나. 바울 바네트(예수와 초기 기독교의 발생, 143-148 쪽)는 이 두 관점에 관한 가능성이 있는 설명을 한다.

1. 빌라도는 주후 26 년 친유대주의자였던 티베리우스에 의해 총독으로 임명된 것이 아니라(참조,
필로, 레가티오와 가이움, 160-161), 티베리우스의 반유대파 고문관인 세자누스에 의해 임명되었다

2. 티베리우스는 집정관으로서 황제의 배후에 있었고 유대인을 미워했던 L. 아엘리우스 세자누스에
의해 정치적인 손해를 입었다(필로, 레가티오와 가이움, 159-160).

3. 빌라도는 세자누스의 보호를 받았고 그에게 감동을 주려고 노력했다:
ㄱ. 다른 총독들이 하지 못했던 로마의 깃발을 예루살렘에 옮겨 옴(주후 26 년). 로마 신들의
상징은 유대인을 격노하게 했다(참조,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8.3.1; 유대전쟁사 2.9.2-4).
ㄴ. 로마인들이 숭배한 형상들을 새긴 동전을 찍어냄(주후 29-31 년). 요세푸스는 그가 유대인의 법과 관습을 의도적으로 전복시키려고 노력했다고 말한다(참조,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8.4.1-2).
ㄷ. 예루살렘에 도수관을 건설하기 위해 성전의 보물을 취함(참조,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8.3.2; 유대전쟁사 2.9.3).
ㄹ.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희생제사를 드릴 때 여러 명의 갈릴리 사람들을 죽게함(참조, 눅
13:12).
ㅁ. 주후 31 년에 예루살렘 안으로 로마인의 방패를 가져옴. 헤롯대왕의 아들은 빌라도에게
그것을 치워달라고 간청했지만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티베리우스에게 편지를 썼고 그는 바닷가에 있는 가이사랴로 그것들을 옮기도록 명령하였다(필로, 레가티오와 가이움, 299-305).
ㅂ. 사마리아인들이 그들이 잃어버린 종교적인 신성한 물건들을 찾고 있을 때, 많은 사마리아인들을 그라심 산에서 죽게함(주후 36/37 년). 이일은 빌라도의 상관(시리아의 장관 비텔리우스)으로 하여금 그를 쫓아내어 로마로 보내게 했다(참조,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8.4.1-2).

4. 세자누스는 주후 31 년에 처형되었고 티베리우스가 정치적으로 완전히 힘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므로 ㄱ-ㄹ항까지는 빌라도가 세자누스의 신임을 얻기 위해 행했을 것이다. ㅁ과 ㅂ항은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얻기 위해 시도한 것이지만, 불리한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5. 친유대적 황제가 복위하여 유대인에게 친절히 하라는 공식적인 서신이 티베리우스로부터 총독에게 보내어졌다((필로, 레가티오 와 가이움, 160-161). 예루살렘의 유대지도자들이 티베리우스와의 관계에서 빌라도가 가진 정치적 취약성을 이용하였고 또 그를 조종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였음이 명백하다. 바네트의 이러한 견해는 빌라도에 대한 두 관점을 적절하게 제시한다.


III. 그의 운명
가. 그는 소환되어 티베리우스가 죽은 직후 로마에 도착했다(주후 37 년).
나. 그는 다시 임명되지 않았다.
다. 그 이후의 그의 생애는 알려지지 않았다. 많은 추측이 있지만,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기독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수아에 대한 놀라운 사실 10가지  (0) 2022.05.10
위대한 카운슬러 바나바  (0) 2022.05.10
바울의 전도여행  (0) 2022.05.09
모퉁이돌  (0) 2022.05.09
성경 속에 나오는 10가지 성전  (0) 2022.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