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관련자료

성경적 자녀 교육

열려라 에바다 2022. 6. 15. 07:31

성경적 자녀 교육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 신:6-9 *
 시작하는 말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중의 하나는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올바로 교육 할 것인가 이다.
이것은 시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인간답게 성장시키려는 교육적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올바른 교육에 의한 인생관을 정립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다.

단순히 부모가 가지고 있는 주관적 잣대로서는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과 미처 관(觀)을 정립하기도 전에 홍수처럼 밀려온 다양한 정보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굳어진 사고의 틀을 교정하기에는 너무 많은 문제점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현실의 난감한 장벽 앞에서 오늘의 부모들은 과연 어떻게 자녀들을 바르게 교육할 것이며, 이에 대한 올바른 교육적 기준과 대안은 무엇인가? 라는 역사 이래로 풀기 힘든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솔로몬은 인생의 낙(樂)을 찾기 위해서 일평생을 통하여 다양한 경험을 한 자이며 모든 것을 쟁취한 성공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대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세상의 쾌락·물질·권세·명예·지식·정보·문화 등의 일반적인 것들이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할 뿐 더러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기 위한 인간의 경쟁의식이 인간성을 파괴하게 되고 결국은 자만과 허탈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일찍이 '잠언'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성공적인 자녀교육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잠 1:1-5 참조)

그렇다면 성경적인 자녀교육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과연 올바른 자녀교육이 가능한 것인가?
또한 21세기에도 역사와 문화와 시간을 초월한 성경적인 자녀교육이 타당한 것인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에 대해 필자는 신구약 성경에 정리된 자녀교육을 토대로 하여 이상적인 「자녀교육관」을 제시하려고 한다.

Ⅰ. 성경적 교육의 내용

성경은 인간의 본분(本分)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하여 부모들로 하여금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교육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들이 어떤 내용을 어떻게 교육했으며, 무슨 목적을 위해서 교육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진리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교육의 내용과 다른 차원의 '교육의 본질' 이 함의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구약에 나타난 자녀교육

구약에 나타난 자녀교육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경으로 시작된다.(신 4:9-10 참조)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 형성의 출발점이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시작되어 성취로 이루어진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의 자녀교육은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로 형성된 이스라엘 역사를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는 교육적 목적에 도달하게 된다.

첫 번째, 과거의 역사를 해석한다.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의 교육적 특성은 열조로부터 시작된 역사를 해석하는데 있다.
이것은 단순한 민족사관을 정립하기 위한 역사 교육이 아니라 역사형성의 원리와 과정을 통해서 역사의 주관자를 알게 하여 경외하게 하려는 목적에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안은 역사형성의 원리와 과정에 있는데 먼저 원리를 살펴보면, 역사섭리의 출발점이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시작되어 철저하게 약속대로 성취 되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형성과정 역시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열방 세력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성취되고 있으며 나아가 주변국들을 일방적으로 주관하시면서 섭리하심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형성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실현된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역사를 해석하여 교육함으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실증시켜 알게 하려는 특수목적에 따른 자녀교육을 시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과거를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하게 된다는 것은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의미를 분석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를 한탄하거나 과거의 추억에 사로잡혀서 현실을 등한시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취하지 않게 될 것이다.

두 번째, 현재의 의미를 분석한다.
역사 해석을 통해서 모든 만사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정하신 분량과 목적과 때를 따라서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인식하게 되면 현재의 사건과 처해진 환경에 대해서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전 3:1-14 참조)
그러나 이러한 신관(神觀)이 정립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을 때인데, 그 원인을 자기의 죄책으로 또는 상대방의 책임으로 전가하게 된다.
이것은 죄책감에 의한 자학이나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과 분노를 유발시킴으로서 힘든 여건에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불의의 사고나 질병의 사태 앞에서 좌절과 원망의 이중고를 겪으면서 사람과 사회를 탓하게 된다.

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역사 해석을 통해서 올바른 신관을 정립하게 되면 어떤 곤고한 상황이라도 의지의 대상을 찾게되는 과정으로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즉 어려운 환경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의지하게 됨으로서 안정감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은 분명 고난의 삶을 살아가야 되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이 되리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시련 가운데서 의지의 대상을 찾음으로 평안을 얻게되고 형통한 가운데서 찬송의 대상을 찾음으로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미래의 소망을 제시한다
이스라엘 민족사는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시작된다.
약속이 있다는 것은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사만큼 처절하게 점철되어진 나라는 드물 것이다.

사 백년의 이집트의 식민지생활, 40년의 광야 생활, 300여 년의 가나안과의 전쟁사, 남북분단과 동족상잔(同族相殘), 바벨론에 의한 70년 포로생활, 로마의 식민지, 나치에 의한 유대인의 학살…등
그러나 그들이 완전히 파멸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던 힘은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소망'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지를 실감하게 하는 것이다.

소망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삶의 에너지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소망이 없으면 삶의 목표도 없고, 목표가 없으면 삶의 의미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육의 핵심은 인간에게 영원히 가치있는 소망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 교육의 참신성은 부모로부터 전승된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신지식(神知識)을 인식시킴으로서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하는 저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 신약에 나타난 자녀교육
신약에 나타난 자녀교육은 단편적인 명제로 정리되어 있다.(엡 6:4, 골 3:21 참조)
하지만 그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제로 제시되기까지의 본문 전체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일반적인 윤리적 잣대로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신인식(神認識)의 결과로 제시되는 종교적 차원의 특별한 성격을 파악하여 교육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主)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주의 교양과 훈계를 설명하기 이전에 主가 어떤 분이신 것을 먼저 알고, 그 분을 중심으로 교육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첫 번째, 부모가 하나님을 인식해야 한다.
에베소서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인간의 구원사역이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의 표현으로 실현된 것으로서 이것을 통해서 인식된 신지식을 부모가 자녀들에게 훈계하여 양육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
부모가 교육의 주체와 성격을 알지 못하고 교육한다는 것은 자칫 부모의 주관과 생각을 주입하게 되는 실수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성경적 자녀교육의 기준은 절대지식에 의한 것이며, 그 절대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참 진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하여 자녀교육의 원리를 설명하는데,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듯이 모든 만사의 섭리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부모들이 이와 같은 지식을 정립하고 있어야 자기의 생각대로 자녀를 교육하지 않게 되고, 자녀의 장래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되어 있음을 앎으로서 부모 자신이 먼저 마음의 평안과 여유를 갖게된다.

부모의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앙하는 결과로서 평안과 감사가 유지되어야 자녀에 대한 진정한 교육이 가능한 것이다.
교육이란 이론적인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먼저 부모들의 심리상태나 생활자세가 안정되어 그것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더 큰 효과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부모들이 먼저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고 경외한다는 것은 자녀교육의 초석이 될 것이다.

두 번째, 부모의 욕심대로 교육하지 않음.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를 통해 자기가 이루지 못한 것을 성취하기 위한 투사의 대상으로 알고, 대리만족을 얻기 위하여 과도한 교육을 강요함으로서 자녀들을 노엽게 또는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자녀교육의 실패를 의미한다.
부모에게 자녀는 자기의 욕망을 채워주는 대리만족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계획대로 세워져 가는 섭리를 배우게 하는 교육적 도구임을 알아야 한다.

자녀들을 부모의 욕심대로 키우려는 이면에는 자녀를 의지하려는 습성이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자녀는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사랑의 대상이라함은 자식이 독립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성장시킨 다음 부모를 떠나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녀를 독립적인 개체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녀와 부모 모두의 장래를 책임지고 키워간다는 신앙적 발로이며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특히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를 떠나 보내는 연습에 익숙해야 할 것이다.
만약 건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부모의 욕심에 길들여진 상태로 성장한다면 지나친 경쟁심으로 인격이 파탄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적인 자녀교육은 부모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자녀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육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녀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 것이며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자녀를 분노하게 교육하지 않음
자녀들이 부모들로부터 교육을 받을 때 분노하는 이유는 부모의 이상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경쟁심을 유발하거나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는데서 비롯된다.
자녀를 독립적인 개체로 생각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다는 것이며 그 자신의 독특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비교 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면서도 그런 사실을 망각하고 너무 많이 비교하거나 비교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인간 개개인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그 개개인에게 독자적인 성품과 독창적인 은사(恩賜)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각각의 분량이 정해져 있듯이 자녀들에게도 각각의 달란트가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달란트는 학교공부에 의한 성적으로 평가되는 것도 아니며, 좋은 학벌이나 성공의 여부에 의해서 판가름 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달란트를 주신 목적은 달란트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고 풍성하신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이것을 오용(誤用)해서는 안될 것이다. 달란트가 마치 성공의 수단으로 인생의 목적으로 전락되어 져서는 더욱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수를 방지하고 자녀를 교육할 때 자녀로 분노하지 않게 하려면 부모들이 철저하게 성경적인 신앙으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성경적 신앙이란 자녀의 장래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짐을 알고 부모의 욕심대로 키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며, 부모들은 자기의 기준에서 자녀를 평가하거나, 자기의 생각을 관철시키려는 무모한 행동을 삼가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인정하게 되고, 그 달란트의 용도를 바르게 인식하여 자녀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마음 자세로 자녀를 교육하게 되면 자녀들이 분노하는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 생각된다.

Ⅱ. 성경적 교육의 효능
성경적 올바른 자녀교육은 가치관의 상실로 권태와 허탈감 때문에 방황하거나 쾌락에 도취되어 살아가며 광분하는 세대들에게 인간이 살아야되는 이유·목적·가치·의미를 깨닫고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는 효능이 있다.

1. 인간의 본분을 정립한다.
인간의 본분(本分)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창세 이후로 수없이 많은 학자들이 고뇌하며 던진 질문 중의 하나이다.
그 만큼 자기를 안다는 것은 중요하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기를 올바로 알게 될 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본분을 바르게 교육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라 여겨진다.

첫 번째, 욕구의 상태를 안다.

보편적인 사람들은 '자아성취욕구'라 하여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을 추구하며 성취하기 위해서 살아간다고 볼 수 있는데 인간의 불행은 여기에 도사리고 있다.
욕심은 채워지지도 않을 뿐 더러 설령 채워진다고 해도 행복하지 못하다는데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심의 노예가 되어 일평생을 후회·한탄·허탈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간이 만족을 누리며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행복은 감각적인 쾌락보다는 지성적인 만족에 있다.
이것은 본능적 욕구를 제압할 수 있는 이성적인 진리로 충만해야 된다는 뜻이다.
즉 진리의 힘이 내재되어 있어야 본능적인 욕구를 절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사이래 이러한 진리를 찾기 위해서 철학과 종교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요구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리가 바로 성경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딤후 3:16-17 참조)

전도서 기자인 솔로몬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일평생 궁구(窮究)하여 살펴보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 결과 행복한 인간의 본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전 12:13)
솔로몬은 인생사를 통해서 만사가 인간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시 127:1)
그래야 욕심을 조절하며 포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단순히 욕심을 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비워진 마음이 하나님의 지식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마음이 비어있으면 고독하고 허탈해서 견딜 수가 없게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세를 알고 그분의 사랑으로 마음을 채운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며 그것이 곧 '행복의 비결'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경외의 대상을 안다.
인간의 본분이란 상대적인 인간의 관계보다는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서만이 정립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등한 상대의 인간 관계에서는 기준이 없고, 경쟁적 여건 속에서 서로의 주관만 존중되기 때문에 무엇이 올바른 인간관의 잣대가 되는지를 알 수도 없고 결정하기도 힘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과 상상을 초월하시고 만사를 계획·운행·섭리·지배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의 권세 앞에 서게 될 때 인간은 자기의 위치와 신분과 본분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고 인간의 무능함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알고, 인간은 노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알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나 인간은 사악한 존재임을 알게 될 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긍휼을 기대하며, 베푸신 은혜를 영원히 찬송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경외의 대상을 갖고 있는 인간이 행복해 질 수 있는 비결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절대적 주권을 지닌 주인을 알게되면 인간은 종의 신분임을 깨닫게 될 것이고, 종은 종으로서 모든 것을 주인에게 의뢰하고 의탁하게 되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과 근심할 필요가 없게 된다.
내 일생은 주인이 책임지셨다는 사실, 내 자녀의 장래를 주인께서 보장하고 지도하며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믿게 될 때 부모나 자녀 모두가 안정감을 얻으며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시131:1 참조)
이것이 바로 존경하는 대상, 찬양의 대상, 의지의 대상, 사랑의 대상을 찾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찬송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본분이라는 것이다.

2. 사리의 해석을 도모한다.
인생에 단 하루를 진정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하고 싶다는 인간의 간절한 소망처럼 인간의 행복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교육을 받게 되면 범사에 자족을 누리며 행복할 수 있는 원리를 터득하게 된다.(빌4:11-13 참조) 이것은 사리(事理)의 해석을 긍정적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첫 번째, 목적에 따른 해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에게 닥치는 불행에 대해서 인과응보(因果應報)에 의한 원칙에 의해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불행한 사람에게 심적으로 더욱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가 구약성경 욥기에 잘 나타나 있는데, 욥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불행을 한꺼번에 경험한 자로서, 모든 재산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자식이 죽고 아내가 떠나가고, 자신은 심한 피부병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 욥에게 친구들의 집요한 추궁이 시작되는데, 그 핵심은 욥에게 닥쳐온 불행의 원인이 자신의 죄과로 인한 인과응보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불행이 인과응보나 상선벌악(賞善罰惡)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왜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몰랐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가서 깨닫기를, 그 동안은 하나님을 귀로만 들었었는데 이제 시련을 겪고 나서 보니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욥 42:1-5)

이러한 욥의 고백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시련의 목적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영광을 보게 하여 경외하게 하려는데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시련을 통해서 진지해지고 마음이 가난해지며 겸손해 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인간의 마음이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을 보게되고 찬송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감은 누군가를 찬송하며 경외할 때 극에 달한다.
즉 스승의 날 찾아 볼 스승이 있어서 존경하고 찬송할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며, 어려울 때 의지의 대상이 있는 사람은 힘들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시련은 시련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의지하게 하고 인간 자신의 주제를 알게 함으로서 참다운 행복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한 섭리의 목적인 것이다.

두 번째, 결과에 따른 해석이다.
구약성경에 요셉이라는 사람은 사리를 긍정적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형들로부터 노예상인에게 팔리게 되었고, 팔린 다음에는 여주인의 모함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일이 이미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예고되었고, 예고된 대로 실현된 사건임을 주지 시키며 형들이 요셉을 판 것이 아니라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미리 보내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순간의 과정에 얽매여 인생의 전체를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해석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사 전체를 한눈에 보는 거시적인 해석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간혹 오늘 당면한 문제에 급급하여 조급하거나 세상을 포기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승부는 마지막에 있다.
과정상의 사건이 인생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끝에 가서 보아야 제대로 판가름 할 수 있다.
권투선수가 중간에 쓰러졌다고 해서 시합에 진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최후의 승자가 진정한 승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쓴 맛은 쓴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도리어 내일을 위한 도약의 발판이 된다면 어떤 일도 우리에게 나쁜 것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인간에게 주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새옹지마(塞翁之馬)처럼 결코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것이 결과에 따른 해석의 장점이다.
즉 무엇이든지 긍정적으로 해석 할 수 있다는 체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善)으로 끝맺으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최후의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으로서 과정적인 어려움이 곧 패배가 아니라 그것은 최후 승리의 영광에 대한 찬송의 감격을 위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해석체계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되어 의지하게 됨으로서 평안을 얻게 되고, 또한 모든 것이 아름답게 이루어진다는 결론에 도달됨으로서 긍정적인 마음과 소망을 갖게 되어 항상 기쁨과 감사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 끝맺는 말
성경적인 자녀교육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발생하는 모든 일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찬양하게 하는 인간의 본분을 알게 하는데 그 의의(意義)가 있다.
이것은 먼저 인간이 고난 중에 살아야 되는 이유를 뜻하는 것으로서, 고통이 수반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한 교육적 의도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건과 사태에 직면하게 되더라도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건과 상황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주제를 올바로 파악하게 하는 교육적 수단으로 이해하게 되며 그 결과 부정적인 시각보다는 긍정적인 차원에서 감사의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교육의 진수로서 고통 중에서도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인간이 살아야 되는 목적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면서도 삶의 원동력이 되는 중요한 쟁점이다.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사람보다 아무런 목적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에게 살아야 되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하는 인간의 본분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왜 인간의 본분이며, 그것이 인간에게 어떻게 행복을 가져다주게 되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피조물이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목적에 따라서 만들어 졌다.
그 목적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경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적을 알고 거기에 부합되게 사는 것이 곧 피조물인 인간의 본분이다.
이러한 맥락에 볼 때 삶의 목적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의 행복 역시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생각이 일치될 때 증폭된다.
이것을 화목(和睦)이라고 표현한다.(고후 5:18)
즉 피조물 인간의 생각을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어 상이점을 조절하게 될 때 해석의 기준이 갖고 목적이 동일하게 됨으로서 갈등이 해소됨을 뜻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불행은 안되는 일을 되게 하려는데 있다.
이것이 갈등과 고통의 요인이며 창조주와 피조물의 의식의 차이다.
이 의식의 거리감을 좁히는 만큼 인간은 행복을 누리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만사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만 섭리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를 깨닫는 것이 지혜요 현명한 인간의 처사이다.

성경적인 자녀교육이란 이상과 같은 지혜를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는 만큼 기쁨이 넘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외하는 만큼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가치관이 없는 이 시대에…
윤리의 잣대가 불분명한 이 시대에…
진리가 없는 이 시대에 「성경적 자녀교육」만이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희망과 행복의 지표(指標)가 될 것이다.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에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내가 너로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기록하여 너로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니"
(잠 22:17-21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