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본부 http://www.kmcweb.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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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회는 영어로 Methodist(규칙주의자)이다. 진정한 감리교회의 유일하고 분명한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복음을 전파하여 온 민족과 세상을 구원하고 복음을 통해 개인,가정,사회,국가를 변혁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고 오순절과 같은 성령에 충만한 삶을 실천하며, 성서적 성결을 우리의 삶 속에 성취하여야 한다. 감리교회는 모든 노력을 여기에 집중하며 여러 교파와 함께 협력한다. 「교리와 장정」은 감리교회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역사와 전통적 교리를 밝히고 헌법과 규칙을 제정함으로 교인들을 올바로 훈련시켜 감리교회를 부흥 발전시키는 데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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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감리회는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진정한 한국교회가 되기 위하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성경에 계시되었고, 전통에 의해 조명되고, 개인적 경험에 의해 살아 움직이게 되며, 이성에 의해 확인된다는 웨슬리의 유산을 계승하여 복음이 한국 문화에 뿌리 내려 열매 맺게 하는 신학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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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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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감리교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성경이 기독교 교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원천이요, 표준임을 믿는다. 성경의 저자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에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세상과 화해하게 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구약성서 39권과 신약성서 27권으로 되어 있는 우리의 성경은 구원에 필수불가결한 원천이요, 믿음과 실행의 참된 법도와 안내이다. 성경은 우리 믿음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모든 믿음에 대한 해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측정하는 기준이다.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성경은 최우선적이다. 그리고 전통, 체험, 이성, 토착문화는 성경연구에 필수적이다. 우리의 신학은 성경 안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와 그 계시의 초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들을 해석하는 데 여러 유익한 방법들을 수용한다. 우리 신학의 과제는 성경본문의 축자적 반복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말씀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데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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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통 |
성경연구를 돕고 신앙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하기 위하여 웨슬리는 기독교 전통, 특히 교부들의 신학서들과 초교파적 신조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교훈과 웨슬리 동시대의 영성에 관한 문서들을 참고했다. 전통은 기독교 신앙공동체들의 모범적 유산이다. 이 전통은 역사적 과정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안에 간직된 복음의 진리는 모든 기독교인이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은 인간의 잘못으로 얼룩지게 되며, 이때 성경은 전통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따라서 전통의 비판적 수용은 기독교 신앙의 불변하는 진리와 그것의 사회적, 시대적 의미성 사이의 균형잡힌 이해를 추구하게 한다. 기독교 전통은 오늘날 전세계에서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구원하고 해방하는 복음의 능력이 행사됨으로 더 다양하고 풍요로운 것이 되기 위한 도전을 받고 있다. 그러한 도전이 새로운 전통이 되는 길은 그것의 참됨과 정당함을 성서와 우리교회의 교리적 입장에 비추어 분별하고 신앙공동체의 합의를 얻음으로 가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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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체험 |
기독교 복음의 증언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전통에 의해 전달된다 해도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체험하기 전에는 아무 효력이 없다. 전통이 교회에 연관된다면, 체험은 개인과 연관된다. 성경에 계시되고 전통에 의해 조명된 복음의 진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우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짐으로써 살아 움직이게 된다. 웨슬리는 체험적 신앙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실한 신뢰며 성령의 내적 증거와 외적 열매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 체험은 개인적이며 동시에 공동체적이다. 우리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모든 피조물에 주어짐을 체험한다. 특히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포와 기아, 고독과 절망 그리고 잘못된 경제 구조, 핵 시대가 초래한 인류와 생태계의 위기 등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체험은 성서적 규범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하며 또한 그것은 성경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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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성 |
성경을 이해하고 그 메시지를 광범위한 지식의 세계와 연관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신학은 이성을 필요로 한다. 웨슬리는 성경적 진리의 증거를 인간의 체험, 곧 중생과 성화의 체험에서 찾았지만, 이와 함께 일상적 삶의 체험과 결부된 상식적인 지식에서도 찾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를 체험함이 인간의 언어와 이성을 넘어섬을 알고 있지만, 우리의 신학작업은 이성을 조심스럽게 사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함을 또한 인정한다. 성경, 전통, 체험으로부터 발전된 기독교 교리는 비판적 이성에 의해 그것의 일관성과 명료성을 획득해야 한다. 계시와 이성, 신앙과 과학, 은총과 자연 사이의 연관성을 식별하려는 신학적 노력은 신앙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믿을 수 있고 그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교리를 형성할 수 있게 한다. 우리의 신학은 기계론적 자연관과 상업주의를 업고 생명을 조작하는 데 동원되는 과학과 기술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하며, 생태학적 생명이해를 모델로 하는 새로운 과학운동에 대해서는 개방적인 자세로 대화할 과제를 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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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토착문화 |
1930년 12월에 한국에서 남감리교회와 북감리교회가 한국 감리교회로 통합하는 역사적인 자리에서 그 통합을 위한 방침을 제정하는 전권위원들은 한국 감리교회의 성격을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진정한 한국 교회라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 감리교회는 "진보적이므로 생명이 있는 이의 특색을 가졌으니 곧 그 시대와 지방을 따라 자라기도 하며 변하기도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적 교회가 되게 하자는 것은 "교회생활 중에 무엇이든지 한국에서 된 것이 아니면 내버린다는 협소한 말이 아니라" 도리어 "고금을 통해 전래한 바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서 예배에나 행정에나 규칙에 잘 이용하되 한국문화와 풍속과 습관에 조화되게 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국 감리교회가 진정한 한국 교회가 되도록 하는 데 있어서 성경, 전통, 체험, 이성과 더불어 한국의 문화를 중시하는 신학의 수립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이는 진정으로 복음적이며 한국적인 찬송가를 짓는 과제를 비롯하여 한국 감리교회의 예배, 신조, 영성, 선교와 같은 구체적인 신앙생활의 전 영역에서 복음이 한국인들의 문화와 심성에 뿌리 내려 열매 맺게 함을 말한다. 한국 감리교회는 21세기 아시아와 세계 선교의 주역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 감리교 신학은 그리스도의 우주적 복음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뿌리 내려 열매 맺어 온 과정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세계 교회와 세계 신학이 공유하게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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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성공회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중심으로 1553년 42개조 종교강령을, 1562년 39개조 종교강령을 발표했다. 1784년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영국 성공회의 39개조 종교강령을 25개조로 줄여서 감리회 종교강령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웨슬리는 39개조 중에서 칼뱅의 예정론이 들어간 17조, 칼뱅의 출교정신을 반영한 33조, 영국국교로서 영국 성공회가 세속권세에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37조 등 모두 14개조를 삭제하고 25개조로 감리회의 종교강령을 확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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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조 성 삼위일체를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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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하시고 진실하신 하나님 한 분만 계시니 그는 영원무궁하시고 무형무상하시며 권능과 지혜와 인자하심이 한이 없으시고 유형 무형한 만물을 한결같이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의 성품의 일체 안에 동일한 본질과 권능과 영생으로 되신 삼위가 계시니 곧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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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조 말씀 곧 하나님의 아들이 참 사람이 되심 |
성자는 곧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요, 성부와 동일하신 본질인데 복받은 동정녀의 태중에서 사람의 성품을 가지셨으므로 순전한 두 성품, 곧 하나님의 성품과 사람의 성품이 나뉘지 못하게 일위 안에 합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참으로 하나님이시요, 참으로 사람이신 한 분 그리스도이신데 참으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매장되시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한 제물이 되시었다. 이는 사람의 원죄만 위할 뿐 아니라 범죄한 것까지 위함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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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조 그리스도의 부활 |
그리스도께서 과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시어 완전한 인성이 붙은 모든 것과 육체를 다시 가지시고 천국에 오르시며 마지막 날에 만민을 심판하시려고 재림하실 때까지 거기 앉아 계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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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조 성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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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은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오신 위(位)이신데 그 본질과 위엄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동일하시고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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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조 성경이 구원에 족함 |
성경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하였으므로 무엇이든지 성경에서 볼 수 없는 것이나 그로 증험하지 못할 것은 아무 사람에게든지 신앙의 조건으로 믿으라고 하거나 구원받기에 필요한 것으로 여기라고 못할 것이다. 성경이라는 것은 구약과 신약의 법전을 가리킴이니 그 말씀의 참됨을 교회에서 의심없이 아는 것이다. 법전의 모든 책의 이름은 아래와 같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4대선지서, 12소선지서와 보통으로 인증하는 신약의 모든 책을 우리도 법전으로 여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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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조 구약은 신약과 서로 반대되는 것이 없음 |
대개 신격과 인격이 겸비하여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홀로 하나인 중보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허락하신 것은 신구약에 동일하게 있으므로 옛날 조상들이 잠깐 동안 허락을 바라보았다 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 좇을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바 예법과 의식에 관한 법률은 그리스도인을 속박하지 못하고 또 모세의 민법에 관한 교훈도 어느 나라에서든지 당연히 채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나 어떤 그리스도인이든지 도덕이라 일컫는 계명을 순복하지 아니하지 못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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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조 원죄 |
원죄는(펠레지인들의 망녕된 말같이) 아담을 따라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요, 아담의 자손으로는 각 사람의 천연적 성품이 부패한 것을 가르침인데 대개 인류가 근본적 의에서 멀리 떠나 그 성품이 늘 죄악으로 치우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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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조 자유의지 |
아담이 범죄 한 이후로 인류의 정황이 그와 같이 되어 자기의 본연의 능력과 사업으로서 마음으로 돌이키며 준비하여 신앙에 이르러 하나님을 경모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선한 의지를 얻게 하시는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받으실 만한 선한 사업을 행할 능력이 없고 선한 의지가 우리에게 있을 때에는 그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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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조 사람을 의롭게 하심 |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음이요,우리의 행한 것이나 당연히 얻을 것을 인함이 아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위로가 넘치는 도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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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조 선행 |
선행은 비록 믿음의 열매요, 또한 의롭다 하심을 따라 오는 것이로되 능히 우리의 죄를 없이하지 못하며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위엄 하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선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하고 기뻐하시는 바요,참되고 활발한 신앙으로 좇아 나오는 것인즉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같이 선행을 보고 그 활발한 신앙이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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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조 의무 외의 사업 |
하나님의 계명 밖에 자원하여 더 행하는 일을 의무 외의 사업이라 하는데 이는 오만하고 불경건한 사람만이 하는 말이니 여기 대하여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기가 하나님께 당연히 할 바를 다하였을 뿐더러 하나님을 위하여 의무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하였다 하나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대하여 밝히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명한 것을 다 행하되 말할 때에 무익한 종이라 하라 하시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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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조 의롭다하심을 얻은 후의 범죄 |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에 고의로 범하는 죄마다 성신을 거역하여 사유하심을 얻지 못할 죄는 아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얻은 후에 죄에 빠지는 사람에게 회개함을 허락하시는 은혜를 얻지 못한다 할 것이 아니요, 우리가 성신을 받은 후라도 얻은 바 은혜를 배반하고 죄에 빠졌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나 우리의 생활을 개정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 거할 동안에 그들이 죄를 더 범하지 못한다 하는 자들이나 죄를 범한 뒤에 참으로 회개할지라도 사유하심을 얻지 못한다 하는 자들은 정죄하심을 당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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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조 교회 |
유형한 그리스도 교회는 참 믿는 이들의 모인 공회니 그 가운데서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또 그리스도의 명령하신 것을 따라 성례를 정당히 행한다. 이 모든 필요한 일이 교회를 요구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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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조 연옥 |
연옥과 사죄와 우상과 유물에 경배하고 존중함과 성인의 이름으로 기도함에 관한 로마교의 도리는 허망하고 위조한 것이다. 성경에 빙거할 수 없을 뿐더러 하나님의 말씀에 반항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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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조 회중에서 해득할 방언을 쓸 것 |
예배당에서 공중 기도할 때에나 혹 성례를 행할 때에 교우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초대교회의 규례를 분명히 위반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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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 조 성례 |
그리스도의 설립하신 성례는 그리스도인의 공인하는 표적과 증거가 될 뿐더러 더욱 은혜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시는 선한 의지의 확실한 표니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묵묵히 역사하시어 우리의 신앙이 활동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더욱 굳게 하는 것이다. 복음에 우리 주 그리스도의 설립하신 성례가 둘이 있으니 곧 세례와 주의 만찬이다. 견신례와 참회와 신품과 혼인과 도유식들 다섯 가지를 성례라 하나 이는 복음적 성례로 여기지 못할 것이다. 그 가운데 어떤 부분은 사도의 도를 오해하므로 된 것이요, 어떤 부분은 성경에 허락하신 생활의 정형으로 된 것이다. 그러하나 하나님께서 명하신 드러나는 표적과 의식이 없으므로 세례와 주의 만찬과 같은 성질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설립하신 성례는 우리로 하여금 응시나 하든가 휴대하고 다니라는 것이 아니요, 우리로 하여금 적당히 사용하게 하심이다. 그러므로 성례를 합당하게 받는 이에게만 유익한 결과와 효력이 있고 합당치 아니하게 받는 이는 사도 바울이 말씀한 바와 같이 자기에게 정죄함을 받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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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조 세례 |
세례는 공인하는 표와 그리스도인을 세례받지 아니한 사람과 분별하게 하는 표적이 될 뿐더러 중생 곧 신생의 표가 되는 것이요, 또 어린이에게 세례를 행하는 것도 교회에 보존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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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조 주의 만찬 |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당연히 있을 사랑을 표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성례이다. 그러므로 옳고 합당하고 믿음으로 받는 이들에게는 떼인 떡을 먹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이요, 또한 이와 같이 그 복된 잔을 마시는 것도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는 것이다. 변체,곧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즙의 물체가 변화한다 함은 성경으로 증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성경의 명백한 말씀을 거스르며 성례의 본뜻을 그르침이요, 또 이로 인하여 미신이 많이 생긴다. 만찬 때에 그리스도의 몸을 주고 받아 먹는 것은 천국적, 신령적 방법으로만 할 것이요, 또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먹는 방법은 오직 신앙이다. 만찬의 성례를 유치함과 휴대하고 다님과 거양함과 경배함은 그리스도의 명하신 것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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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조 떡과 포도즙 |
평신도에게 주의 잔 마심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대개 그리스도의 규례와 명령대로 주의 만찬에 두 가지를 일반 그리스도교인에 같이 행하는 것이 당연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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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한 번 제물이 되심 |
그리스도께서 한 번 제물로 드리신 것이 온 세계의 모든 죄 곧 원죄와 범죄를 위하여 완전한 구속과 화목과 보상이 되었은즉 그 밖에 다른 속죄법이 없다. 이러므로 「미사」제를 드리며 또 거기에 대하여 보통으로 말하기를 신부가 그리스도를 제물로 드리어 산 이와 죽은 이의 고통과 범죄를 면하게 한다 함은 참람된 광언이요, 위태한 궤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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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 조 목사의 혼인 |
하나님의 법률에 그리스도교의 목사들은 독신생활하기를 맹세하라든가 혼인을 금하라든가 하신 명령이 없다. 그러므로 목사들도 모든 그리스도인과 같이 자기의 뜻에 경건하다고 생각하면 혼인하는 것이 마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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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 조 교회의 예법과 의식 |
예법과 의식을 각 곳에서 꼭 동일하게 할 필요는 없다. 대개 예법과 의식은 예로부터 같지 아니하였고 또 나라와 각 시대와 각 민족의 풍속을 따라 변할 수 있으나 다만 하나님의 말씀과 틀리게 하지 못할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든지 자기가 소속한 교회에서 만들어 보통 실행하기로 인정하였고 또 하나님의 말씀과 틀림이 없는 예법과 의식을 사사 주견으로 짐짓 드러나게 파괴하는 이를 책벌하되 교회의 통용하는 법을 반항하는 것과 연약한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한 이도 처벌할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그와 같이 하지 못하게 함이다. 교회마다 예법과 의식을 만들기도 하며 고치기도 하고 혹은 폐지하기도 하여 모든 일이 교훈이 되게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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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 조 북미 합중국 통치자 |
대통령과 국회와 각 주 주립 의회와 각 주 지사와 내각은 인민의 대표로 연방 헌법과 각 주 헌법에 의하여 북미 합중국의 통치자들이다. 이 합중국은 주권적 독립국이므로 어떤 외국 치리하에 붙지 아니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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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 조 그리스도인의 재산 |
그리스도인의 보물과 재산을 가질 권리와 가질 일에 대하여는 어떤 사람이 허망하게 자랑함과 같이 공통하게 통용할 것이 아니다. 그러하나 각 사람은 마땅히 자기의 소유를 가지고 힘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너그럽게 구제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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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 조 그리스도인의 맹세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 사도 야고보가 그리스도인이 헛되고 경홀히 맹세하는 것을 금지하신 것을 우리가 공인하거니와 어떤 사람이 관장에게 요구함을 당할 때에 믿음과 사랑으로 인하여 맹세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교리에 금지함이 없는 줄로 생각한다. 다만 선지자의 교훈대로 공의와 주견(主見)과 참됨으로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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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1880년대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갈망하는 한국인들은 만주와 일본에서 기독교 복음을 접하고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이들이 해외에서 출판한 한글 성서들은 매서인을 통해 국내에 들여와 읽혔고 그 결과 많은 세례 지원자들이 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1883년 9월 미감리회 볼티모어 연회 소속인 가우처(John F. Goucher) 목사는 외교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 중이던 민영익을 만난 후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우처 목사는 미감리회 국외선교부에 한국 선교 착수를 촉구하였고 일본 주재 미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 로 하여금 한국 선교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중국과 일본에서 감리회선교를 개척했던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24일 내한해서 ‘학교와 병원 사업을 해도 좋다’는 고종의 윤허를 받았다. 이에 미감리회 국외선교부는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부부와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부부, 국외여선교부는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Scranton)을 초대하여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이들 중 아펜젤러 부부가 제일 먼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내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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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감리회의 선교는 교육과 의료, 문서 사업으로 시작되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한국 근대 교육의 요람이 되어 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하였으며, 시병원과 보구여관은 한국 근대 의료사업의 요람이 되었다. 감리회 출판사에서 펴낸 성서와 서적은 복음 전도에 유효한 도구가 되었고 한글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1887년 7월 24일 배재학당 학생 박중상이 첫 감리교 세례교인이 되었고, 1887년 10월 9일 서울에서 오늘의 정동제일교회의 모체인 ‘벧엘예배당’이 설립되었다. 1897년 서울과 인천, 평양에서 엡웟청년회가 창설되었는데 이는 오늘의 감리교 청년회와 청장년선교회 및 남·여 선교회의 모체다. 선교 초기부터 신학반과 신학회를 조직하고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추진하여 1901년 최초 한국인 목사로 김창식 목사, 김기범 목사를 배출했다. 미감리회에서는 1902년 하와이 이민 선교를 시작으로 북만주와 몽고, 일본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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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감리회 선교의 시작은 개화파 지도자 윤치호가 망명중인 1887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세례 받고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면서 부터이다. 그는 미국에 유학할 때부터 남감리회 국외선교부에 한국 선교를 촉구하였다. 이에 1895년 10월 18일 중국에 있던 헨드릭스(E. R. Hendrix) 감독과 리드(C. F. Reid) 선교사가 내한하였고 이듬해 8월 리드 부부가 서울에 정착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 1897년 5월 2일 고양읍에 첫 남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 남감리회에서도 배화여학교, 한영서원, 호수돈여학교, 구세병원 등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였고, 태화여자관을 비롯하여 개성, 원산, 춘천 등지에 여자사회관을 설립하여 한국 근대 사회복지사업의 문을 열었다. 남감리회는 선교 초기부터 신학교육에 있어서 미감리회와 협력하였고, 1907년에 두 교회 연합으로 협성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남감리회는 1907년 동만주 선교를 시작으로 만주, 시베리아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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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의 회개로 시작된 부흥운동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거쳐 1909년 백만명구령운동으로 연결되었다. 한국인들은 이 부흥운동을 통해 회개와 중생과 성결을 체험하였고, 기독교적 가치와 윤리 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신앙체험을 바탕으로 복음을 주체적으로 해석하려는 토착 신학이 감리교 신학자들에 의해 수립되었다. 노병선 목사는 기독교를 동양과 서양을 포괄하는 ‘하늘의 종교’이자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은혜의 종교’로 변증하였다. 최병헌 목사는 동양 전통 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절대성’을 규명하였다. 이같은 토착 신학은 성서와 기독교 신앙 전통에서 동양의 문화·종교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여 수구 세력의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해소시켰으며, 기독교가 민족 문화와 종교 전통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문화선교의 길을 열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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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저항하는 감리교인들의 민족운동은 구국기도회로 시작하여 다양한 항일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전덕기 목사는 상동교회 엡윗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많은 민족운동가들을 규합하여 국권 회복운동과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경기도 이천지방 구연영 전도사는 교회 청년들로 구국회를 조직하여 민족 계몽운동을 벌이다가 아들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희생되었고, 같은 해 강화읍교회 김동수 권사도 의병운동과 관련되어 두 동생과 함께 일본군에 희생되었다. 1911년 105인사건 때 윤치호, 서기풍, 안경록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3·1운동 때 이필주 목사, 신홍식 목사, 정춘수 목사, 최성모 목사, 오화영 목사, 신석구 목사, 박동완 전도사, 박희도 전도사, 김창준 전도사 9명이 민족대표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루었다. 3·1운동 당시 교회는 만세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그로 인한 희생도 컸다. 수원지방의 제암리와 수촌리, 화수리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당이 일본군의 방화로 불탔고 교인들이 희생되었으며,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과 평양 남산현교회 부목사 박석훈 등이 옥중 순국하였다. 3·1운동 이후에도 감리교인들은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단체, 애국부인회 등 민족운동 단체에 적극 참여하였고, 농촌계몽운동, 절제운동 같은 민족주의적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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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한국 교회의 자립 의지가 높아지면서 미감리회와 남감리회 지도자들은 교회 합동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924년 두 교회 ‘교회진흥방침연구회’를 중심으로 교회 합동을 추진키로 하고 1925년 ‘남북 감리교연합기성위원회’가 조직되어 교회 합동을 위한 실무작업에 착수하였다. 미감리회와 미남감리회 총회에서도 한국 교회의 합동운동을 인정하였고 1930년 11월 18일 남북 감리회 대표 22명으로 합동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30년 12월 2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창립 총회가 서울에서 열려 초대총리사로 양주삼 목사를 선출하고 한국 감리교회의 ‘자치교회 시대’를 열었다. 한국 감리교회는 그 설립 취지로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조선적 교회’의 3대 원칙을 선포하였으며 신앙 및 신학 원리로 8개조 “교리적 선언”과 16개조 “사회신경”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모든 의회 구성을 평신도와 성직자 동수로 하여 평신도의 역할을 증대시켰으며, 여성 성직의 문호를 개방하여 1931년 연합연회에서 한국 최초로 여선교사 14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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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한국교회가 점차 신앙적 영성과 사회적 지도력을 상실한 채 비판을 받고 있을 때, 이용도 목사는 부흥회를 통해 영적 각성과 교회의 갱신을 촉구하였다. 그의 몰아적이고 체험 중심적인 신비주의 신앙이 일부 교회로부터 견제와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보여 준 진솔한 ‘예수 중심’의 신앙과 삶은 큰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영성 회복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또한 1930년대 한국 교회는 진보·보수 신학 사이에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웨슬리 복음주의 전통에서 진보적 신학을 수용하였던 정경옥 목사는 ‘신앙에서는 보수주의, 신학에서는 자유주의’ 입장을 취하면서 ‘신학의 현대화’와 ‘신학의 향토화’를 추구했고, 경건적 신앙 실천을 바탕으로 성서의 절대 권위를 강조했던 변홍규 목사는 보수적 신학 전통을 계승하며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 발전에 기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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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기 교회는 ‘신사참배’를 비롯한 일본의 국가 종교의식을 강요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일제의 회유와 위협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점차 강력해지는 일제의 억압 하에 한국 감리교회는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되었다가 1945년 7월 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흡수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신앙양심과 민족의식에 투철한 신앙인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쟁하였다. 예산제일교회 청년·학생들이 ‘학생속회’를 통해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하다가 발각되어 투옥되었고, 모곡교회의 민족운동가 남궁억 전도사에게 영향을 받은 홍천과 춘천 지방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은 ‘십자가당’을 만들어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투옥되었다. 그리고 동부연회의 철원읍교회 강종근 목사, 회양읍교회 권원호 전도사, 천곡교회 최인규 권사 등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쟁하다가 옥중 순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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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8·15해방과 함께 남북 분단의 비극을 맞았다. 38선 이북에 있던 교인들은 1946년 서부연회를 재건하였으나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극심한 수난을 받았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공산정권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되었고, 철원에서는 장흥교회 청년들이 애국청년단을 조직하여 반공투쟁을 벌이다가 투옥되었다. 결국 북한에 있던 많은 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고, 이후 북한 교회는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6·25 전쟁으로 많은 예배당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전쟁을 겪은 후 남과 북사이에 정치·문화·종교적 갈등과 대립 구조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런 민족의 분단상황에서 교회는 내적 갈등과 분열로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 감리교회도 해방 직후 재건파·복흥파 분열을 시작으로 1954년, 1970년, 1974년에 각각 교회 분열의 아픔을 겪었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합동함으로 ‘하나된 감리교회’ 전통을 이어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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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 감리교회는 미연합감리회 선교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재건과 복구 작업을 신속하게 전개하였다. 그리고 1968년 온양에서 개최된 한·미 선교정책협의회를 계기로 한·미 감리교회는 선교의 동반자 관계를 정립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감리교회는 교회 부흥과 민족 구원의 선교적 사명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1964년 김활란, 홍현설의 발의로 시작된 민족복음화운동은 초교파적 대중부흥운동으로 연결되었고, 1974년 시작된 ‘5천 교회 1백만 신도운동’과 1987년 시작된 ‘7천 교회 2백만 신도운동’은 교회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해방 당시 5만 명 수준이던 교세가 1984년에 90만 명, 1996년 현재 7개 연회, 국외선교연회, 서부연회, 183개 지방, 4,700교회, 135만 명 교인을 넘게 되었다. 이처럼 교회 성장을 이룩한 한국 교회는 해외 선교를 통한 세계복음화에 적극 참여하였다.
1958년 볼리비아 선교를 시작하였고, 1965년 ‘감리교 선교 80주년 기념사업’으로 사라왁 선교가 시작되었으며, 1970년대 태평양 동아시아 지역, 1980년대 동남아시아 중동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 그리고 1990년대 러시아와 동유럽, 중국 등 옛 공산권 지역으로 선교가 확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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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된 교회’
를 지향하는 한국 감리교회는 해방 후에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한성서공회, 대한기독교서회, 한국찬송가위원회, 기독교방송, 대한기독교교육협회, 기독교청년회, 여자기독교청년회를 통한 초교파 연합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아시아교회협의회, 세계교회협의회, 세계감리교협의회 등 국제적 교회일치운동 기구에 참여하면서 아시아와 세계 교회 신학과의 교류를 통해 감리교회의 선교 및 신학적 과제를 확인하였다. 1960년대 이후 감리교 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토착화 신학’은 기독교 신학 전통에서 한민족의 종교·문화 전통을 재해석함으로 동·서 신학의 교류와 대화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신앙인의 적극적인 사회 현실참여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선교’ 신학 입장에서 1961년부터 산업선교가 시작되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의 인권 회복과 노동 환경의 구조적인 개선을 위한 노력으로 발전된 산업 선교는 1970년대 들어서 사회정의 구현운동,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1980년대 노동운동,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 환경운동, 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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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감리교회는 ‘선교 1백주년’을 맞아 1984년 6월 24일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기념 연합예배’를 드렸고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신앙선언”을 발표하였으며 1985년 4월 5일에 개최된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기념대회’에서는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기념대회 선언문”을 채택하여 선교 1세기를 정리하고 선교 2세기를 전망하는 신앙과 신학적 결의를 밝혔다.
그리고 1990년 10월 29일 ‘기독교대한감리회 자치 6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자치 60주년 선언문”을 통해 한국 감리교인들은,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는 교회와 민족 앞에서 그리고 나아가서 세계의 참된 평화를 위하여 우리의 선교적 사명을 마음 속에 되새기면서’ ‘새로운 각성과 결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할 것’을 다짐하였다.
한국 감리교회는 한 세기 역사를 통해
1)성서, 전통, 이성, 체험을 바탕으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웨슬리 복음주의 신앙 전통 2)한말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족이 처한 사회·국가적 상황과 현실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의 구원을 구현하는 민족주의 신앙 전통 3)기독교 복음을 한민족의 역사·문화적 전통에서 주체적으로 수용·해석하는 토착적 신학전통 4)‘하나의 복음’,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 일치운동 정신에 입각하여 다른 교파 교회와 대화와 협력을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신앙 전통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역사 및 신앙 전통을 계승한 오늘의 한국 감리교회는 민족과 세계 복음화, 민족의 평화 통일 그리고 세계 인류의 평화공동체 구현을 위한 선교 사명이 있음을 확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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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들어오면서 한국감리교회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노력했다. 위대한 감리교회 선언을 통해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WMC 대회를 유치하는 등 세계화가 시작되었으며, 이어 감리교회의 미래를 위해 300만 총력전도운동을 전개하여 감리교회 배가 운동에 앞장섰으며, ‘정직합시다.’라는 사회운동을 전개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특히 2003년 호남선교대회를 광주에서 개최함으로써 감리교회의 역동적인 잠재력을 확인할 수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제26회 총회에서 피선된 신경하감독회장과 감독들은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를 선언하고 영적대각성운동을 전개해 우선 감독회의에서 금식기도회와 자기반성의 영적대각성 선언식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제주선교대회를 통해 열악한 제주지역에 선교열기를 일으켰다. 제19차 세계감리교 대회를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한국감리교회 위상을 드높였으며 세계의 감리교회들이 우리와 선교협약을 요청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실한 감리교인이란 주제로 희망 프로젝트를 세워 감리교인의 성화를 향한 삶을 강조하였으며, 부산에서 영남선교대회를 개최하여 영남지역의 선교역량을 강화시킴으로써 든든히 서가는 감리교회를 세워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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