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여호와께 감사하라 / 시편 136:1-9

열려라 에바다 2022. 6. 22. 08:46

여호와께 감사하라 / 시편 136:1-9

 

 

오늘은 한국 교회가 함께 지키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출23:16)고 맥추절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맥추절의 의미는 첫 열매를 거둔 것에 대하여 천지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정신에 따라 한국교회는 보리를 추수하는 계절인 7월에 맥추감사주일을 지켜 왔는데 최근에는 농사를 거의 짓지 않기 때문에 상반기를 지켜 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로 맥추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 자신들이 농사를 짓지 않아도 그리고 보리와 밀농사를 하지 않아도 맥추 감사절의 의미는 절대로 퇴색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양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농사를 짓던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많은 농산물이 들어와서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가고 있지만 중국 사람이 농사를 지었던 한국 사람이 농사를 지었던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풍족한 양식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과 그 양식으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만약 중국에서도 양식이 많이 나지 않아서 우리가 양식 때문에 걱정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한다고 하면 얼마나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농사를 짓지 않아도 맥추감사절의 의미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많은 양식과 먹거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저는 밥을 앞에 놓고 식사기도를 드릴 때 마다 감사가 절로 나옵니다. 이렇게 한 끼도 거르지 않고 매일과 같이 먹을 수 있는 풍족한 양식을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농사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땅에 이렇게 많은 양식을 주셔서 이렇게 풍성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맥추감사의 의미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는 맥추감사절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36편은 26절까지 진행되면서 매절마다 감사라는 말이 등장하는 감사에 대한 성경의 대표적인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원래 예배용 찬송으로, 찬양대가 감사의 내용을 말하면 온 회중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고 화답하는 것으로 불려 진 찬송입니다. 찬양대가 ‘이러 이러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러면 온 회중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고 화답하는 형식을 지닌 이 시는 비록 26절에서 끝나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감사의 내용과 조건을 찾는다면 26절에서는 도저히 끝날 수 없을 것입니다. 몇 백절까지도 계속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백만 번의 감사’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기 위해서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는데 그 책의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사라는 말을 백만 번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출판을 받지 못했는데 저자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감사가 얼마나 큰 가를 이 책을 통해서 표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조건을 따지자면 얼마나 많은 감사의 조건이 있겠습니까?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으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주 중요한 몇 가지 감사의 내용이 나오는데,

 

먼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고 있다는 것이 감사할 내용입니다.

 

1절부터 3절까지를 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노래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성품은 선하시며 인자하시며 모든 신위에 뛰어난 분이시며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님이십니다. 그런 주님께 감사하라는 것이 1절부터 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감사의 조건과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런 좋으신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게 된 것입니다.

 

흔히들 사람을 만남의 존재라고 하면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만남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는데, 그 만남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부모님, 배우자를 잘 못 만났어도 하나님만 잘 만나면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부모님, 배우자를 잘 만났어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 사람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홀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솔직히 신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닌 거짓된 우상을 섬기며 그것에 얽매여서 이 세상에서도 불행하게 살고 저 세상에서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제 고종 사촌 가운데 이단 사상에 빠져서 인생을 망친 사촌이 있습니다. 이 친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하숙을 하는데 그 집이 바로 그 이단에 빠진 집이었습니다. 친절하게 잘 해 주는 것에 거절도 못하고 한번 내 디딘 것이 결국 그곳에 깊숙이 빠지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이 사촌이 군대에 갈 나이가 되었는데 군대를 기피합니다. 그러니까 국가에서 잡으러 다니고 그것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 직장 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그래서 막노동판에서 일을 하다가 크게 다쳐서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병을 비관하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잘못된 종교, 이단 사상, 불건전한 종교에 빠져서 몸과 마음과 재산과 생명까지 망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 한 민족이 5천년 역사 속에서 가장 잘 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에는 이조 말엽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본이나 중국이 우리보다 100년 이상 기독교의 복음을 먼저 접했습니다만 아시아에서 전 민족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한국이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 민족이 역사상 가장 잘한 일이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만약 이조 500년을 지배했던 유교 문화가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공자가 망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금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유교 문화를 가지고는 지금의 축복을 누리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지금같이 잘 살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다른 종교나 사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복음으로 인하여 한국의 근대화가 이루어졌고 나라의 독립이 당겨졌고 오늘과 같이 잘 사는 나라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선하시며 인자하시며 모든 신위에 뛰어난 신이시며 모든 주위에 뛰어난 주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민족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불에 태워 나에게 달라는 몰렉과 같이 잔인하지 않습니다. 가정을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 입산수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바다에 던져야 바다가 잔잔하고 한 해 동안 풍어를 얻게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자기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칼을 쓰라는 마호멧과 같이 무자비한 분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며 인자하신 분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홀로 만유를 통치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고 복 받게 하셨으니 이것보다 더 감사한 내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은 정말 놀라운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4절부터 9절까지는 하나님의 창조사건을 가지고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지혜로 하늘을 지으셨고 땅을 물 위에 펴셨고, 큰 빛을 지으셨고, 해로 낮을 주관케 하셨고,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찬양하며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존재 근원 자체에 대하여 감사하는 찬양입니다. 오늘의 내가 있게 된 존재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있었기에 내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있었기에 내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부모님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기에 부모님을 공경하고 감사해야 하듯이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존재하게 된 우리들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세 번째로,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10절부터 15절까지를 보면,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애굽의 장자를 치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육지같이 통과케 하시고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켰습니다. 그것을 감사하자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는데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받아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을 감사하며 찬송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는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여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작은 수뢰정의 함장으로 있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둠속에서 일본 구축함의 공격을 받아 작은 수뢰정이 박살이 나고 13명 선원가운데 2명이 죽고 맥마흔이라는 부하는 얼굴과 팔 다리에 화상을 입어 헤엄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케네디가 그의 몸에 구명대를 입히고 그 끈을 입에 물고 네 시간을 헤엄쳐 섬까지 끌고 가 목숨을 살렸다고 합니다. 맥마흔씨는 제대 후 우체국에서 은퇴할 때까지 일했는데,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두 사람은 계속 전화나 편지 왕래를 통해 친교를 유지하였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수차례 ‘내가 도와 줄 일이 있으면 서슴치 말고 말하라’고 했지만 그때마다 맥마흔씨는 ‘내 생명을 구해 주었는데 그 이상 무슨 도움을 받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감사할 뿐입니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케네디도 물론 훌륭했지만 구차한 손을 벌리지 않고 생명의 은인에 대하여 평생 감사하고 그를 위해 기도한 맥마흔씨도 훌륭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생명을 구해 준 사람을 위하여 평생 기도하고 죽는 순간까지 감사했다는 맥마흔씨의 마음씨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가져야 될 줄 믿습니다. 죄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구원의 사실, 내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이 놀라운 은혜에 대하여 맥마흔씨 이상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다른 것이 없어도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생활이 오늘 우리들의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지켜 주시고 인도하신 은혜입니다.

 

16절부터 26절까지를 보면, 이스라엘을 지켜 주시고 인도하여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 40년 동안 지켜주셨습니다. 40년이 지난 후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기 위하여 그 나라의 모든 왕들을 물리쳐 주셨고 모든 대적에게서 이스라엘을 건져 주셨습니다. 그랬기에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지켜주시고, 하는 사업을 도와주셨고, 가정과 직장을 지켜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는 맥추감사주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는 찬송가도 있지만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이 결코 여러분들이 잘 해서가 아닙니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세심하게 지키시고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이 자리에 있기까지 보이게, 보이지 않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고넬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이방인으로 최초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는 백부장 고넬료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나오는데요,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먼저 고정 관념을 깨트리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더럽다 하지 말라는 말씀을 3번이나 하십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욥바 무두장이의 집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라는 환상을 기도하는 가운데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이방인으로 최초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 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런 환상과 말씀과 긴 과정을 통하여 베드로를 만난 고넬료가 받은 축복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보면 고넬료가 받은 축복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것 뿐 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렇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간섭하시고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핵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 중 최고의 축복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를 믿으면 물질의 축복, 명예의 축복, 진급의 축복 기타 잘 되는 축복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데 고넬료의 사건이 보여주는 최고의 축복은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축복이요 그것이 신앙생활의 결론입니다.

 

고넬료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다고 갑자기 백부장에서 천부장으로 진급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보직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단지 예수를 믿은 것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은 것이 이렇게 큰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이 없고 부족해도 내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고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사실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이것을 시시하게 생각하고 여기에 어떤 세상적인 복을 주셔야 그것이 최고의 축복인 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은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구원받고 성령을 받은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최고의 복이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진정으로 감사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