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맥추감사주일설교-보이지 않는 은혜에 감사(막4:26-29)

열려라 에바다 2022. 7. 2. 13:32

알지 못하는 은혜로 감사 (마가복음 4:26-29) 권호만 목사

 

어떤 주일학교 어린이에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엄마가 천원 줄 테니까 500원은 헌금하고 500원은 아이스크림 사먹어라. 알았지? 꼭 헌금내야 한다.', '네-에'

꼬마는 어깨에 가방을 메고 양손에 500원 짜리 동전 하나씩 꼭 쥐고 집을 나서 신바람 나게 주일학교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달려가다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동전 하나가 땡그랑 하고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하수도 구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꼬마는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한 손에 남아 있는 동전을 꼭 쥐면서 중얼거립니다.

'예수님, 죄송해요. 헌금이 그만 하수도 구멍에 빠지고 말았어요.'

하수도 구멍에 빠진 것은 헌금이고 내 손에 든 것은 내가 쓸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바꿀 수는 없을까요?

‘하수도 구멍에 빠진 것은 내 것이고 내 손에 든 것은 하나님께 드릴 헌금이다.’

감사를 하지 않을 핑계를 대기보다 어떻게 하든지 감사하는 조건을 찾고 감사할 수 있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축복하시겠습니까?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탈무드에 보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다.”라 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한 시인은 “주님! 주님은 제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게 한 가지만 더 주옵소서. 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렇게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반년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맥추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맥추감사절의 원래 의미는 보리농사를 짓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만 오늘날은 지난 반년 동안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로 지키게 됩니다.

오는 맥추감사주일을 맞으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면서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자라는 씨의 비유입니다만 이 비유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조건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다 씨를 뿌렸습니다.

이 농부는 씨를 뿌리고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싹이 트고 자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씨는 점점 자라고 성장하여 이삭을 패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농부는 그 씨가 자라고 성장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싹이 났구나, 이만큼 자랐구나, 이삭이 폈구나, 열매가 익었구나.’ 이렇게 알고 생각할 뿐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라는지는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알지 못하는데 그러나 자랍니다. 이만큼 커져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농부에게 두 가지의 은혜가 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보이는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농부는 분명 보이는 은혜를 힘입은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농부는 먼저, 뿌릴 씨앗이 있었고 씨를 뿌릴 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지을 건강이 있었습니다.

땅에 씨앗을 뿌렸을 때 잘 자라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게 되고 추수를 하여 농사를 잘 짓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농부에게 있어서 보이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처럼 보이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을 보면서 감사의 조건이 참 많은데, 제 눈에는 감사의 조건이 많이 보이는데도 감사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갑니다.

가족 모두가 건강하게 살고 있고 직장생활 잘 하면서 평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잘 자라고 좋은 집도 장만하여 누구 못지않게 잘 살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보이는 은혜가 너무나 분명한데 감사하지 못하며 불평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가정은 평생 불평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보이는 은혜를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보이는 은혜만 감사해도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보이는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하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추수감사 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손경민 씨가 쓴 ‘은혜’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에서 손경민 씨는 모든 것이 절대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1.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2.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후렴)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것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전 세계 60억 인구 가운데서 1/10에 해당하는 6억 인구의 하루 생활비가 1달러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기가 없이 사는 사람들의 수가 20억이 넘고요,

식수 시설이 없어 아무 물이나 마시는 사람들의 수는 10억이 넘습니다.

인간다운 삶은커녕 끔찍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한반도에서 이만큼 살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감사의 조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부러워하고 있습니까?

지난 반년 동안에 저에게는 외손자를 주신 보이는 은혜가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교회가 평안하게 하시고 목회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신 보이는 은혜가 있습니다.

저와 가족들에게 건강을 주시고 의식주에서 부족함이 없이 채워주시는 보이는 은혜가 있습니다.

자녀들을 늘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보이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분명하게 보시고 여러분들에게 주신 보이는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둘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농부에게는 이처럼 씨가 있고 땅이 있고 건강이 있고 농사를 잘 짓는 보이는 은혜가 있었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농부는 땅에다 씨를 뿌렸습니다.

그러나 그 씨가 어떻게 싹이 트고 어떻게 자라고 이삭이 패고 열매를 맺게 되는지는 몰랐습니다.

그저 씨를 뿌리고 며칠 지나서 가 보면 싹이 터 있었습니다.

또 며칠 지나서 가보면 이만큼 자라 있었고 또 얼마 지나서 가보면 이삭이 팬 것을 볼 수 있었을 뿐입니다.

이 농부는 씨앗을 뿌렸지만 싹이 트고 자라고 이삭이 패고 열매를 맺게 되는 과정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라있었고 열매가 맺었고 이삭이 익었습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절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룻기 서에 보면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좇아서 베들레헴으로 오게 됩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지만 생활이 막막합니다.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가서 재산을 몽땅 날려버리고 남편과 아들 둘을 잃어버리고 돌아온 나오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가난밖에 없었습니다.

생활을 위하여 뭔가를 해야 되는데 당시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추수가 끝난 다른 사람의 밭에 가서 이삭을 줍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룻이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이삭을 줍게 되는데,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먼저는, 돌아온 때가 보리를 추수할 때였습니다.

보리를 추수할 때 돌아왔기에 이삭 줍는 것도 가능했지 막상 추수가 끝났다면 그것마저도 할 수 없었고 생활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우연히 친족인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서 이삭줍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보아스가 ‘다른 곳에 가지 말고 내 밭에서 주워라.’고 허락하였습니다.

네 번째는, 일군들에게 룻을 건드리지 말고 일군들이 먹는 밥과 물을 함께 먹고 마실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이런 것으로 보면 이삭 줍는 것도 아무 곳에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삭을 줍고 저녁때 집에 와서 떨어보니 한 에바 쯤 되었습니다.

한 에바는 오늘날 단위로 보면 22리터 즉 한 말 정도 되는 양이었습니다.

하루에 한 말을 주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많이 주운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많이 주울 수 있었을까요?

물론 룻이 쉬지 않고 열심히 이삭을 주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주웠다고 많이 주울 수 있었을까요?

주울 것이 없는데 어떻게 많은 것을 주울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는 룻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한 가지 숨어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보리를 베는 일꾼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라.”(2:16)

보아스는 이삭을 줍는 룻을 위하여 일부러 곡식 단에서 조금씩 뽑아서 이삭을 많이 줍게 했습니다.

이것을 룻은 몰랐습니다.

룻이 아는 것은 내 밭에서 이삭을 주우라는 보아스의 배려였습니다.

목마를 때는 물을 마시고 밥을 먹을 때는 함께 와서 먹으라고 배려해준 보아스의 친절을 룻은 잘 알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룻에게 임한 은혜는 보이는 은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은혜, 알지 못하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룻이 하루에 한 말이나 되는 많은 이삭을 주울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게 배려하였던 보아스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고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도 보이지 않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나타나셔서 하늘의 현상과 자연의 현상을 이야기하면서 ‘네가 이것들을 아느냐?’ 고 물었을 때에 욥은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 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니이다.’고 합니다.(욥40:4)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욥이 하나님의 질문 앞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요즘 저의 집에 와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외손자를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있습니다.

손자를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졸리다’고 하면 재워주고, 배고프다고 하면 먹여주고, 놀고 싶다고 하면 놀아줍니다.

오줌 쌌다고 칭얼대면 기저귀도 갈아주고, 매일 목욕도 시켜줍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나중에 할아버지가 이렇게 자기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겠습니까?

이렇게 수고하여 엄마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기를 키웠다는 사실을 알겠습니까?

나중에 자기가 아들딸을 키워보고 손자를 키워보면서 막연하게 생각은 하겠지만 이런 구체적인 일들은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살아가는 모든 일에는 보이는 은혜가 있고 보이지 않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보이지 않는 은혜가 훨씬 더 크고 많습니다.

보여서 아는 은혜가 10이라고 하면 보이지 않아 알지 못하는 은혜는 90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는 않습니다. 알지는 못합니다.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한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욱 감사하였듯이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 가면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우리를 얼마나 돌봐주시고 우리를 얼마나 지켜주시고 인도하셨는지를 알게 되면서 그 은혜에 더욱 감사하게 될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반년 동안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이렇게 건강하고 평안하고 복된 삶을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선명하게 보였다면 여러분, 보이는 은혜로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만으로도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고 원망하지 말고

보이지 않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을 믿고

보이지 않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감사는 더하기(+)와 같아서 모든 것에 감사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집니다.

어떤 일이든지, 어디서든지 감사하면 플러스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빼기(-)와 같아서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없어집니다.”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빼앗기는 미련한 짓입니다.

그러나 감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계속 더해가는 비결입니다.

보이는 은혜, 보이지 않는 은혜에 감사하면서 플러스의 축복을 받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2.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