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34:17-19]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열려라 에바다 2022. 7. 19. 07:42

34편 17절-19절: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17절: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신다는 것을 보니 악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의인과 악인에 대해 알아야 하겠는데, 예수님을 안 믿는 일반 세상 사람들은 남의 재산과 생명에 해를 끼치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사람을 악인이라고 하느냐? 그리고 우리 기독교회 교인들이 어떤 사람을 악이라고 하느냐? 하나님께서 악인을 보시는 눈과, 하나님의 자녀들인 교회가 악인을 보는 눈이 같아야 하느냐, 달라야 하느냐? 같아야 한다.

 

그러면 예수를 믿지만 속화된 교인들이 의인과 악인을 말한다면 무엇이라고 말을 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교인들이 의인과 악인에 대해 말을 할 때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해석을 해야 되는 건데 이들은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개념과 똑같은 말을 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해석이 어떤 거냐? 의인이라 할 때 뭐가 의인이냐? 하나님께서 보시는 의인은 정신도 사상도 소원도 목적도 취미도 추구성도 지향성도 가치판단 평가성도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로 가득 담겨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보지 못하면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도 고생만 한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닮아가지를 않는다. 성령님께서 이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지를 않는다. 성령님의 역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와 동반을 한다. 그러니까 옳은 말씀을 주고, 옳은 말씀을 듣고 먹고 할 때 성령님께서 자기 속에서 깨달음으로 역사를 하시는 거다.

 

성령님의 역사 중에 가장 좋은 역사는 깨달음의 역사다. 자기가 평소에 성경을 많이 읽었으면 말씀을 들을 때 이것도 깨달아지고 저것도 깨달아지고 자꾸 깨달아진다. 그러나 평소에 말씀을 보지 않는다면 설교를 들을 때 한 가지만 깨달을 수 있다. 물론 이것도 성령님의 역사다. 하지만 더 많이 깨닫기 위해서는 그 바탕을 성도 자기가 만들어야 한다.

 

돈을 빌려주면서 그 돈을 불리는 게 있느냐? 자기에게 돈이 있으니까 그 돈을 씨로 해서 돈을 불린다. 씨가 없으면 콩나물을 길러 먹을 수 있느냐? 그런 것처럼 평소에 말씀을 많이 읽어서 매 주일마다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것으로 자꾸 채워져야 한다. 안 그러면 깨진 독에 물 붓기다. 특히 여기 오신 분들은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은 주님께서 책임을 지고 해 놓으셨으니까, 천국은 어차피 들어가는 것이니까 이 면은 신경을 쓰지 말고 이 땅에 사는 동안 말씀을 깨달아서 천국을 다스리고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의 사람으로 되어야 한다. 이게 깨달음의 실력이다.

 

학생도 공부를 잘하면 그 실력을 가지고 선생이 되더라. 안 될 바에야 뭐 하려고 배우느냐? 형이 동생보다 세상에 먼저 나와서 먼저 배웠으면 동생을 가르쳐야지 안 가르칠 바에야 뭐 하려고 형이 되느냐? 형이라면 동생보다 많이 알아야 가르치는 거다. 형제가 뭐냐? 모르는 것을 서로 가르쳐 주는 거다. 약한 것을 서로 돕는 거다. 식구가 뭐냐? 가족이 부족한 것을 서로 채우는 거다. 그런데 탕진하는 자식도 있다. 이건 사람노릇 못한다.

 

생각도 마음도 소원 목적성도 하나님의 의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 무슨 역사냐? 성령님의 역사다. 그렇다면 오늘날까지 자기가 예수님을 믿어오면서 깨달아진 게 하나라도 있느냐? 얼마나 깨달았느냐? 그런 자기를 생각을 해 봐라. 자식이 학교에서 시험을 쳐서 100점을 맞아오기를 바라느냐, 0점을 받기를 바라느냐? 이 생각은 하면서 하나님 앞에 합격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것을 가득 넣는 사람으로 되고자 하는 생각은 없는 거냐? 하나님의 것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면 어디 덧나느냐? 자기가 손해가 나느냐? 하나님의 말씀에서 깨달아지는 것이 자기의 평생을 좌우한다. 자기의 영원을 좌우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생각하지 말아라. 주일 날 교회에서 목사님이 말씀하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지 말아라. 너의 영원한 축복과 멸망이 왔다 갔다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이 되었으면 영적 생명적으로 죽은 거다. 이런 자기를 살려주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고, 우리를 교회로 세운 것이고, 종들을 세워서 말씀을 주는 거다. 나를 복되게 만들려고, 나를 복의 기관으로 만들어 주시려고.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외침을 들으신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들으시는지 그 마음을 알고 있는 의인이다. 외친다는 것은 다급하다 그 말이다.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믿는 사람이고 안 믿는 사람이고 간에 홍수가 나고, 전쟁이 나고, 불바다가 되는 이런 눈에 보이는 환난의 고통은 다 안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이나 종교적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의인의 고통을 모른다. 그리고 일반적인 악한 사람들이나 종교적인 악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의인들의 고통을 만들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고통이 되는지를 모른다.

 

아이들은 깨닫지를 못해서 어른들의 정신적 고통을 잘 못 느낀다. 자라야 느낀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깨닫지를 못한 사람은 의인들의 고통을 모른다. 그 면에 대해 알지 못한다. 못 깨닫는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의인들은 의인들의 종말과 악인들의 종말을 잘 알고 있다.

 

‘의인이 외치매.’ ‘의인’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의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도 의인이요, 하나님의 의를 찾았느냐?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도 의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가졌느냐? 이 하나님의 의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도 의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를 찾는 사람은 희망적이다. 어떤 희망이냐? 하나님의 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하나님의 의를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될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의인이 외치매.’ 환난이 왔을 때 하나님의 의를 찾으려고 해도 하나님의 의가 보이지 않고 자기 속에도 밝혀지지를 않으니 하나님께 진리의 길을 밝혀 주시고 세상으로 속화되지 않게 붙들어 달라고 하는 거다. 환난 중에 의를 찾고, 이 의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인의 이런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어떤 방편으로서 건 건져주신다.

 

그러면 의인이 당한 환난이 어떤 환난일까? 이 환난에는 눈에 보이는 환난도 들어있고, 눈에 안 보이는 환난도 들어있다. 눈에 보이는 환난을 당했을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찾는 사람은 중심이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육신적으로는 세상살이에 환난이 아닌데 하나님의 의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을 때 이건 영적 환난인데, 이때도 이 환난 가운데서 자기 마음이 그 쪽으로 쏠리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도 대단한 사람이다.

 

육적인 환난이 왔을 때 신앙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인도대로 살겠다고 하나님의 의를 붙드는 기도를 하는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그런 것은 아닌데 하나님의 옳은 말씀을 찾을 수가 없고 전부가 세상 쪽으로 휩쓸려 갔음에도 그런 와중에도 물질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고 살고자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럴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어떤 방법으로 건 붙들어 주신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환난 가운데서 정금처럼 신앙이 연단되는 사람이 있고, 육적인 환난은 아니지만 진리환난 가운데서도 영특한 깨달음으로 높은 수준의 신앙으로 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건져주신다. 올려주신다. 높이신다. 빠지지 않게 해 주신다. 그러나 환난을 만났던 아니던 간에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저질이 되어있고, 소원과 목적이 저질적으로 되어있다면 이 사람은 눈에 보이는 환난에도 빠진 거고, 영적인 환난에도 빠진 거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신앙의 수준이 낮기 때문에 세상바람에 날려간다. 이럴 때 신앙의 수준이 높아지려는 부르짖음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고 붙들어 주신다.

 

자기가 현재 육신적 환난에 안 빠졌어도 정신과 마음이 세상 쪽으로 빠져 들어가는 게 있느냐? 이럴 때 기도를 해야 하는데 뭐라고 기도를 해야 하느냐? ‘내 마음이 약해서 나의 정신과 소원과 목적이 세상에 빠져 들어가나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건져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해야 한다. 이게 다윗의 기도다. 의인의 기도다. 이런 영의 눈을 가지고 있는 의인은 하나님께서 어떤 방편으로서 건 건져주신다.

 

그런데 자기가 세상에 계속 빠져 들어가면서도 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거기에서 빠져 나오려는 생각조차 없다면 하나님께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거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지 않는다. 자기가 의의 사람으로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는 거다. 우리는 의인이 되려고 하고, 의인의 기도를 해서 하나님께서 들으신 바가 되어야 한다. 환난에서 건진바 되어야 한다. 환난을 볼 줄 알아라.

 

18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왜 마음이 상하느냐? 첫째는 자기가 죄 지은 것에 대해 마음이 상한다. 자기가 죄를 지어놓고 자기가 자기를 나무라면서 마음이 상해서 한탄하는 것이 있다. 눈으로 보이는 죄이던, 행동 죄이던 하나님 앞에 바로 못 산 것에 대해 마음이 상한다.

 

두 번째는 남이 죄를 지은 것에 대해 마음이 상한다. 교회가 많다보니 별스런 교회가 다 있는데, 어느 목사가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내가 그 목사를 모르지만 마음이 상한다. 왜냐? ‘우리 주님의 얼굴이 어떻게 될까?’ 하는 면에서 마음이 상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안 깨달아지니 마음이 상하고,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못 살았을 때 마음이 상하고,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내려지는 은혜를 막아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마음이 상하고, 나로 인해서 주님을 욕먹게 하는 것이 마음이 상하게 되는데,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자기는 지금 무엇에 마음이 상하느냐? 자기 마음을 잘 살펴라 그 말이다.

 

자기 마음이 왜 상하느냐? 상대가 자기의 뜻을 안 따라주니까 마음이 상하느냐? 상대가 약속을 어기니까 마음이 상하느냐? 상대가 나에게 항상 잘 해 주다가 돌아서니까 마음이 상하느냐? 돈이 없어서 일이 안 풀리니 마음이 상하느냐? 상대에게 뜻을 맞춰주려고 하는데도 안 맞으니 속이 상하느냐? 어느 거냐?

 

마음이 상한 것이 세상에 속한 것이 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 있는데, 하나님에게 속한 게 뭐냐?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마음이 상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너무나도 시간이 많이 흘러서 마음이 상하고, 내가 나의 중심을 생각해 보면 ‘내가 왜 이렇게 헛되게 살았을까?’ 하는 면에서 마음이 상하고. 이런 게 있어야 자기를 볼 수 있는 거고, 자기가 보여질 때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는 거다. 내일 모레 죽는 한이 있더라도 고치려고 해야 한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 이것도 의인이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은 진리말씀을 주면 ‘가만 놔둬라. 난 내 식대로 이대로 살다가 죽으련다’ 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러면 그 삶이 자기 생각대로 살다가 자기 생각대로 죽어지는 거냐?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중심에 통회 자복하는 자를 어떻게 하신다? 구원하신다. 왜 통회 자복을 하는 거냐? 사람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확실하고 명확하게 알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선인 줄 알았는데 깨닫고 보니 저것이 선이고, 이것이 악인 줄 알았는데 저것이 악이로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어서 ‘내가 그동안 잘못 믿었구나. 내가 그동안 헛 믿었구나, 내가 그동안 헛 가르쳤구나’ 하며 마음 아픈 게 있는 거다. 이런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과거적 회고적 영감을 받은 거다. 성령님께서 과거를 생각케 하고, 현실에서 바로 깨달아 나가게 하는 역사다.

 

그동안 잘못 알아서 나의 이룰구원에 손해를 본 것에 대해 마음이 아파서 통회하고, 이미 지났지만 다른 사람의 이룰구원에 손해를 준 것에 대해 마음이 아파서 통회하고, 시간낭비, 물질낭비, 정력낭비 하며 자기의 일생을 낭비한 것에 대해 마음이 아프고, 사망운동에 동참하고 사망성공을 한 것에 대해 마음이 아프고, 나로 인해서 주님을 욕먹게 한 것에 대해 마음이 상해서 통회 자복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구원해 주신다.

 

마음이 아프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면 오늘날 나는 무엇에 마음이 아프냐? 아이들은 ‘우리 엄마 아버지가 왜 나를 태어나게 했나?’ 하며 마음이 아프다. ‘우리 엄마 아버지는 왜 돈을 많이 못 벌까?’ 하며 마음이 아프다. ‘우리 엄마 아버지는 왜 병이 들었을까?’ 하며 마음이 아프다. ‘나는 왜 공부를 못할까?’ 하며 마음이 아프다. 이런 것은 다 세상적이다. 이런 마음 아픔은 다 지나가는 거다. 이런 아픈 것들은 죽음의 선을 넘으면 못 따라온다.

 

엄마 아버지들을 보면 속아서 시집장가를 갔다고 하며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자식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다고 하며 운다. 슬프고 고달프고 고독한 이 마음을 위로받을 데가 없다. 헤어져도 위로가 안 되고, 붙어 살아도 위로가 안 되고, 그러니 어찌하면 좋을까? 그래서 하는 말이 ‘오늘 밤에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 한다. 그런데 ‘내가 눈을 감으면 자식은 어떻게 될까?’ 해서 또 아침에 눈을 뜬다.

 

인간에게는 완전이라는 게 없는 거다. 그러니 이유야 어찌 되었건 하나님의 주권 섭리를 전제하고 볼 때 자기의 현실은 모든 게 하나님의 허락 하에 된 것이니 ‘그래, 내가 버티면서 저 사람의 잘못된 것이 내 속에도 있으니 고치고 가자’ 라고 하면서 상대가 따라오건 안 따라오건 신앙의 경주를 하면서 나가라.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 식구 중에 한 사람이 교회에 안 나가니까 자기도 같이 교회에 안 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이 사람이 사랑이 많은 거냐? 기독교인은 건설적이라야 한다. 식구가 몸이 아파서 밥을 안 먹으니 나도 그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서 밥을 안 먹는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안 먹는 사람은 놔두고 나는 많이 먹고 일을 하고 돈을 벌고 하는 게 건설적이다.

 

다른 사람이 약속을 자꾸 어겨서 마음이 상하느냐? 돈이 조금만 더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마음이 상하느냐? 그렇다면 자기가 마음이 상하지 않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면 자기가 예수 믿는 마음이 들어가겠느냐? 아니다. 사람의 욕심은 무저갱 같아서 한이 없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가지면 물질의 힘을 가지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겠다고 한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한 번 탁 치면 발발 기는 거다. 우리에게는 통회 자복할 것이 많다. 에덴동산이 얼마나 좋으냐? 그럼에도 그 좋은 곳을 만족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그것도 빼앗기고 쫓겨나 버렸다. 그러니까 말씀을 어기면 자기의 행복이고 뭐고 다 빼앗기는 거다. 간단한 거다.

 

자기의 죄를 붙잡고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 다른 사람의 죄를 자기가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들어가서 통회 자복하는 자를 구원해 주신다. 물질적 구원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내 중심이 하나님 앞에 직통으로 통하게만 하라. 이러면 만능의 능력자 하나님께서 뭘 못하시겠느냐? ‘어떻게 해 줄줄 믿습니다’ 이렇게 하지 말고 자기가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고 애를 쓰다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이렇게도 나오고, 저렇게도 나오는 거다. 그 역사를 네가 볼 것이다.

 

19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의인에게 고난이 많다고 한다. 그러면 ‘의인에게는 고난이 없으면 좋겠는데 고난이 많다고 하니 나는 의인으로 살지 않아야 되겠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악인은 편한 거냐? 의인이건 악인이건 다 고난이 있는 법인데, 악인이 되어서 고난을 받고 싶으냐, 의인이 되어서 고난을 받고 싶으냐? 의인이 되어서 고난을 받는 게 가치가 있다.

 

또 하나는 악인이 되어서 평생 고생을 안 하고 행복하게 살다 가는 것이 좋은 건지, 아니면 의인이 되어서 평생 동안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이 좋은 건지? 둘 중에 선택을 하라고 하면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 확실히 의인이냐? ‘의인이라고 답했다가 진짜 고난을 당하면 어쩌나?’ 이런 마음이 드느냐?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다.

 

‘나는 이 진리신앙을 따르며 순교를 하겠다’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이 소리를 듣고 순교를 당하게 하시는 거냐? 그런 게 아니다. ‘내가 순교를 해야지’ 라고 하지 말고 잘 믿어나가되 순교의 정신으로 나가라. 그런다고 해서 이 사람에게 꼭 순교의 사건을 주는 게 아니다. 순교를 하고 안 하고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거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의인이 무슨 고난이 많을까? 의인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잘 되고 편하고, 악인은 고난이 많아야 할 텐데 왜 의인에게 고난이 많을까? 좋은 사람은 다 부자로 살고, 악한 사람은 다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데 왜 그렇지 않은 거냐? 그 이유는 믿는 우리에게 약을 올리느라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의인은 다 잘 되고, 악인은 계속 고통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일반사람들만이 아니라 목사님들의 세계도 이런 생각을 가진 분이 많다. 그래서 우리의 교훈이 특이하니까 ‘이 진리를 가지고 목회를 하면 교회가 부흥 발전이 될 거다’ 라고 한다. 그러나 교훈이 특이하다고 해서 교인들이 많이 오는 건 아니다. 옳은 교훈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게 아니다. 이걸 알지 못하면 이 교훈으로 목회를 하다가 실망하게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