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민족의 최후 항쟁지 맛사다
맛사다는 원래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며, 사해의 서쪽 해안 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위의 유대 광야의 산들과는 고립된 맛사다는 동쪽의 사해 변으로는 400미터 높이의 절벽을 이루고 있고 서쪽으로는 주위의 계곡보다는 100미터 이상으로 솟아있는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맛사다 요새의 정상은 길이 600미터, 가장 넓은 곳의 폭이 300미터인 평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후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과 1960년대의 발굴을 통하여 맛사다 요새의 역사적, 고고학적 모습들이 상세하게 밝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맛사다는 1838년 엔 게디를 탐사했던 미국의 로빈슨(E. Robinson)과 스미스(E. Smith)에 의해 처음으로 역사적 유적지로 확인됐습니다. 1842년에는 미국인 선교사 월콧트(S.W. Walcott)와 영국인 티핑(Tipping)이 맛사다에 직접 올라가서 비교적 정확한 지도를 작성하였고, 1848년에는 미국인 해군 장교 린치(J.W. Lynch), 1851년에는 프랑스의 드 소시(F. de Saulcy), 1858년에는 레이(E.G. Rey) 등이 차례로 맛사다를 탐사하였습니다. 나아가 1867년 영국의 워렌(C. Warren)과 1875년의 콘더(C.R. Conder)에 의해 맛사다의 구체적인 구조물들이 차례로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맛사다의 본격적인 발굴은 1963-1965년 동안 히브리 대학의 야딘 고고학 교수(Y.Yadin)의 주도하에 전 세계에서 모인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맛사다의 최초의 주거 역사는 동석기 시대(서기전 4300-3300)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들의 흔적은 남쪽 절벽에 위치한 동굴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 당시의 모직 천 조각, 거적, 토기 류 등이 발견되었으며, 이들의 주거는 유대 광야의 골짜기 동굴에서 자주 발견되는 동석기 문명의 한 유형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왕정시대인 주전 10세기 이후에도 북쪽 절벽 근처에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주거했던 흔적을 이 곳에서 발견된 당시의 토기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맛사다는 주전 150년경 마카비
가문의 요나단에 의해 처음으로 요새로 이용되었으나, 이 후 헤롯 대왕(서기전 37-4)은 백성들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항상 대피할 수 있는 광야의 요새로서 맛사다를 계획적으로 축성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비축해 놓았습니다.
주전 40년 자신의 적대 세력인 안티고누스와 파르티아 군대에 쫓기던 헤롯은 가족들을 맛사다에 숨겨놓고 동생인 요셉으로 하여금 800 여명의 군사로 이들을 보호하게 하였으나 당시 안티고누스에 의해 포위된 헤롯의 가족 일행은 갑자기 쏟아진 폭우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로마로 망명한 헤롯이 로마의 세력을 등에 업고 유다의 왕으로 임명받아서 로마 군을 이끌고 유다 지방을 정복한 후 맛사다를 다시 찾은 헤롯은 언제 있을지 모르는 유대 민족의 반란과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의 공격 위협에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서 주전 37-31년 사이에 맛사다를 본격적으로 요새화 했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 이 곳에는 소규모의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요새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주전 150년경 헤스몬 왕조의 왕들이 맛사다를 본격적으로 요새화 할 때 가장 어려운 문제가 바로 물 공급 및 저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주전 40년경 헤롯은 왕
이 되기 전 반대파에게 몰려서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과 부하들을 맛사다 요새에 숨겨두고 로마로 떠난 다음 무사히 돌아와서 맛사다를 방문했을 때 그들이 빗물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말을 전해 듣고 헤롯은 요새의 첫 번째 조건으로서 종합적이고도 완벽한 물 공급 및 저장 체계를 구상하였습니다. 맛사다의 급수시설은 계곡의 댐과 수로 등의 물 공급 체계와 지하 저수탱크들로 구성된 물 저장 체계로 크게 양분됩니다.
헤롯은 먼저 맛사다 서쪽의 유대 광야에 위치한 북쪽의 벤-야이르 골짜기와 남쪽의 맛사다 골짜기 등 두 곳에 댐을 건설하였고 이 곳으로부터 맛사다의 북쪽 절벽의 중턱에 두 줄로 파 놓은 저수탱크까지 수로로 연결하였습니다. 따라서 겨울철 우기에 유다 산악지대에 비가 내리게 되면 자연히 댐으로 막은 골짜기는 거대한 호수로 변하게 되고 이 물은 폭이 1.4미터나 되는 수로를 통하여 맛사다의 저수탱크로 운반되어 집니다. 댐의 높이에 따라 맛사다 계곡에서부터 이어지는 수로는 상부 저장 탱크들로 연결되었고, 벤-야이르 계곡의 물은 하부 저장 탱크들로 운반됩니다. 물 저장 탱크는 정방형으로 파여졌으며 상부에는 8개 그리고 하부에는 4개가 배치되었고 탱크 하나 당 용량은 약 4천 입방미터이고 전체는 약 4만 입방미터에 달하는데 이는 400명의 군대가 100년간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양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뱀길(snake path) 근처와 정상의 여러 군데에도 7개의 저장 탱크가 있어서 겨울철의 빗물을 저장하거나 북쪽 절벽의 12군데의 저장 탱크에서 끌어올린 물을 임시로 저장하기도 하였습니다.
맛사다는 북쪽의 궁전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1400미터 길이의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성벽은 4미터 두께의 칸막이 성벽(casemate wall)으로서, 1.4미터 두께의 외벽과 1미터 두께의 내벽 사이에는 작은 돌들로 채워져 있거나 수비대의 방으로 건설됐습니다. 맛사다의 성벽은 70개의 수비대 방과 30개의 망대, 그리고 4개의 성문으로 구성돼 있는데, 네 개의 성문은 모두가 동일한 설계로서 벤치로 둘러싸인 네모난 방에 바깥쪽으로 통하는 외문과 안쪽으로 통하는 내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네 개의 성문은 위치에 따라 각각 뱀 길 문, 서문, 남문, 수문 등으로 구분되어 집니다.
맛사다의 창고는 공공건물로서 별도로 건설된 것과 특정한 건물에 딸린 것 등으로 구분되는데 대표적인 공공 창고는 바로 북쪽의 로마식 목욕탕 옆에 위치한 것입니다. 창고는 중앙의 복도를 중심으로 양편에 폭 4미터, 길이 27미터의 방들이 건설되었으며 각방의 입구는 복도를 향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당시 보관되었던 중요 식량들은 밀, 보리 등의 곡식류, 올리브유, 무화과, 대추야자, 건포도 등의 건과 류, 그리고 포도주 등이었으며 각각 적합한 항아리에 담겨졌음이 발굴을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창고의 벽면과 천장은 석고로 덧칠해져서 방수의 효과를 가져왔고, 특별히 들어가서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의 방바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석고로 칠해진 웅덩이가 패여 있어서 이 곳이 포도주나 기름 등의 액체 류를 부어 놓고 항아리에 담았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맛사다의 북쪽 절벽에는 삼층의 테라스에 각각 건설된 세 개의 궁전이 있습니다. 이 테라스는 바위를 계단식으로 깎은 다음 돌로써 축대를 쌓아 완성하였습니다. 상궁전(upper palace)은 왕족이 주로 기거하던 곳으로서 절벽 가장자리에는 반원형의 회랑이 딸린 전망대가 있으며, 이 곳에서 유대 광야와 푸른 사해, 그리고 건너편의 모압 산지를 잘 바라볼 수 있게 설계 되어 있습니다. 전망대의 뒤 쪽에는 온갖 진귀한 화초로 꾸며진 정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층 계단 중 한 가운데 위치한 중궁전(middle palace)은 그리스의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둘러싸인 원형의 정자를 건설하였고, 발굴에서 발견된 지붕 장식을 통하여 화려한 로마식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맨 밑의 하궁전(lower palace) 직사각형의 회랑과 한 가운데의 뜰과 부속 목욕탕이 딸린 연회장이 있었으며, 특별히 남쪽 벽에 그려진 채색 벽화는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어서 당시의 화려한 궁전의 모습을 추측 하여 볼 수가 있습니다. 이 하궁전은 가파른 절벽에 돌로써 축대를 쌓고 건설되어서 당시 건축술의 수준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상궁전에서부터 중궁전을 통해 하궁전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직사각형의 기둥을 중심으로 계단이 사방으로 감아 내려가는 형태로 설계되었으며 모든 계단은 지붕을 만들어 실내로 통하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현대를 기준으로 보아도 탁월한 건축 설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 궁전은 이 요새의 행정과 의전을 진행했던 중심적인 공공건물로서 3900평방미터 넓이로 맛사다에서 가장 큰 건물입니다. 이 궁전은 숙소와 집무실, 작업실, 창고, 사무실 등의 네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숙소는 한 가운데의 실내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둘러싸인 방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개에 달하는 집무실의 바닥은 검은색과 붉은 색의 돌들로 만들어진 매우 아름다운 기하학적인 무늬와 포도, 무화과 잎, 석류 등의 식물 모티브가 조화를 이루는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고, 이 모자이크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집무실 옆에는 욕조가 딸린 목욕탕이 있으며 건물 외벽에 설치된 계단으로 미루어 서궁전은 이층으로 건설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헤롯은 북쪽의 궁전 입구에 화려하고도 웅장한 로마식 목욕탕을 건설하였습니다. 이 목욕탕은 마당과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당에는 모자이크로 바닥이 장식되어있고 나마테아식 기둥들로 받쳐진 지붕으로 덮인 회랑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목욕탕 건물은 원래 로마식의 전통적인 여섯 종류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네 개의 방으로 소화하였다고 추정합니다.
① 탈의실(apodyterium): 벽에는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고 바닥에는 검은 색과 흰색의 삼각형 타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이 방은 탈의실 및 기름 맛사지(untorium)의 기능도 담당했울 것으로 보입니다.
② 온탕(tepidarium): 이 방은 탈의실과 마찬가지로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바닥은 타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③ 냉탕(frigidarium): 냉탕은 온탕으로 들어가서 오른편에 위치하며 계단식으로 된 욕조에는 방수 석고가 칠해져 있었고 항상 찬물을 채워 놓았습니다.
④ 열탕(caldarium): 열탕은 전체 목욕탕 건물의 절반을 차지하는 가장 큰 방입니다. 이 방에는 북쪽 벽의 아치형 홈에는 석영으로 만들어진 얕은 욕조(labrum)가 있었고 남쪽의 사각형 홈에는 욕조(balneum)가 설치되어서 납으로 된 파이프를 통하여 목욕탕 외부에서 항상 찬물이 흘러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열탕은 항상 바닥이 뜨거운 관계로 물을 부어서 수증기가 일도록 하여 일종의 증기탕(subartorium)의 역할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⑤ 난방 구조: 열탕을 항상 뜨겁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닥은 온돌(hypocaust)의 구조로 되어 있었고 구들 밑의 바닥에는 높이가 65센티미터가 되는 200여 개의 특수한 내연벽돌로 쌓은 기둥들이 구들장을 받치게끔 되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열탕의 벽과 천장에도 네모진 토관으로 덮여 있어서 아궁이에서 나오는 뜨거운 공기가 이 토관들을 통해 순환됨으로써 열탕은 일종의 사우나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열탕의 독특한 온돌식 난방 장치와 벽의 네모진 토관들은 발굴 결과 일부가 현장에 잘 보존되어서 20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신약시대 당시의 로마식 목욕탕의 자세한 구조를 일목요연하게 살펴 볼 수 있도록 한 귀중한 자료입니다.
주전 66년부터 맛사다를 차지했던 열심당원들은 대부분의 건물들을 자신들의 숙소로 개조하기 위해 바닥의 타일과 기둥, 그리고 나무판들을 뜯어내어 건축자재로 활용하였습니다. 북쪽의 삼층 궁전에서 화살촉과 갑옷의 비늘 등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맛사다에서 가장 화려했던 이 건물들이 열심당원들의 수비대가 주둔했던 막사로 활용되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서쪽 궁전은 헤롯 시대와 마찬가지로 행정적 중심지로 이용되었고 그 외의 건물들은 숙소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이 곳에서는 요세푸스의 증언대로 열심당원들이 자결하기 직전 가구와 무기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불로 태운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열심당원들이 새로 건설했던 건물들은 임시로 지은 숙소들 외에 주로 종교적 목적의 회당과 정결 예식용 목욕탕인 미크베(mikveh) 등입니다.
맛사다 요새의 북동쪽 성벽에 건설된 회당은 130평방미터 넓이의 규모로 당시 유대 회당의 건축적인 전통에 따라 제단 방향이 예루살렘이 있는 북서쪽을 향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즉 회당에 들어오는 예배자들은 자연히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입니다. 북서쪽 모퉁이의 20평방미터 크기의 방에는 유리와 청동제의 그릇들이 발견되었고, 회당의 바닥에서는 “마아쎄르 코헨(제사장의 십일조)”이라고 적힌 오스트라콘(토기조각 기록), 신명기와 에스겔서 두루마리 사본 조각이 발견되어서 이 건물의 용도를 분명하게 하였습니다. 다른 회당과 마찬가지로 맛사다의 회당 내부에는 네 단으로 된 벤치가 둘러 싸여 있었으며 한 가운데는 두 줄로 이어진 기둥이 있어서 이층의 난간을 받치게끔 한 것으로 보입니다. 맛사다에서 발견된 두개의 미크베 중에서 남쪽의 성벽에 건설된 것은 유대교 할라카에 의거한 완벽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미크베는 빗물이 모여서 고일 수 있게 한 저수장, 정결 예식용 욕조, 그리고 실제로 몸을 씻는 장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맛사다에서 발견된 650여 개의 동전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조 연대가 새겨진 유대 전쟁 동전들입니다. 이 동전들은 주전 66년을 기점으로 제 1년부터 제 5년까지 주조되었으며, 특히 제 4년과 제 5년의 동전들이 다섯 개나 발견되어서 서기 70년 예루살렘 이후에도 유대인들이 스스로 동전을 주조할 만큼 여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맛사다에서는 모두 700여개의 오스트라카가 발견되었으며 각각 히브리어, 아람어, 희랍어, 그리고 라틴어로 된 기록들입니다. 특별히 이 중에서도 아람어와 히브리어 오스트라카는 이들의 기록 시기가 정확하게 주전 66-73년 사이이기 때문에 고문자학 비교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맛사다의 오스트라카는 창고에서 발견된 물품 표와 식량 배급표, 주거 지역에서 발견된 소유주 명패, 회당에서 발견된 제의 관계 기록, 그리고 수문 근처에서 발견된 열심당원들의 지도자 벤 야이르 등의 이름이 새겨진 12개의 추첨용 명패 등으로 분류되어 집니다.
맛사다에서는 창세기(46:7-11), 레위기(4:3-9), 신명기(33), 에스겔서(35-38장), 시편(81-85편, 150편) 등의 구약성경의 사본들과, 벤-시라의 지혜서(39-44장), 요벨서 등의 외경, 그리고 안식일 시편 등 모두 14 점의 두루마리 사본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주전 70년 여름 예루살렘을 함락시켜서 4 년에 걸친 유대 민족의 대 로마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던 로마 군은 당시 맛사다를 점령하여 끝까지 항거하던 열심당원들을 일종의 광야 전투 훈련을 목적으로 3년에 걸쳐 포위 및 정상 공격을 통해 완전히 섬멸시켜 버렸습니다. 로마 군들은 그들이 주둔했던 진지와 포위 돌담, 그리고 결정적으로 요새 함락을 가능케 했던 경사로 등의 유적이 오늘날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어서 맛사다를 답사하시는 분들을 오늘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8개의 진지가 건설되었으며 이 중에서도 맛사다 건너편 북서쪽 언덕에 위치한 요새 F는 로마 십군단의 실바 장군이 직접 지휘했던 본부가 있었던 곳입니다. 이들 진지에서는 나바테야 토기가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요르단의 페트라를 수도로 한 광야의 전문가들인 나바테야인들도 맛사다 점령에 용병으로 참가했음을 알 수 있으며, 동전 류가 주전 120년경에 주조된 것까지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서기 73년에 맛사다가 점령된 이후에도 로마 군이 계속해서 주둔한 것으로 추정되어 집니다. 8개의 진지는 약 9000여명의 로마군들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라고 합니다.
맛사다 주변의 진지들을 연결하는 폭 1.8미터, 길이 3.5킬로미터의 포위 돌담은 몰래 도주하려는 열심당원들을 감시하기 위한 것으로서 로마 군들의 철저한 전투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맛사다의 서쪽에 축조된 경사로는 지금까지 고대 로마 세계에서 건설된 공격용 경사로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잘 보존된 것입니다. 실바 장군은 길이 200미터 높이 100미터의 경사로를 건설하고 30미터 높이의 공성퇴 탑을 동원하여 성벽을 파괴시켰습니다.
맛사다에는 주전 5-6세기에 기독교 수도사들은 맛사다 정상에 교회당과 부속 건물을 건설하여 일종의 수도원을 운영하였습니다. 이 교회 건물의 바닥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오늘날까지 잘 보전되어 있고, 요새의 이곳 저곳에도 당시의 수도사들의 주거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주후 1 세기의 유대인 역사가였던 요세푸스(Josephus)가 기록한 ?유대 전쟁?를 통하여 맛사다가 헤롯의 요새 궁전인 동시에 유대전쟁(서기 66-73) 당시 유대인들이 끝까지 로마 군에 항거했던 최후의 비극의 격전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후 66년 유대 전쟁이 시작될 때 갈릴리 지방 출신인 유다의 아들 메나헴은 960명의 극우파 민족주의자들인 “열심당원”들을 이끌고 당시 소수의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던 맛사다 요새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이 곳에 저장된 물, 식량, 의복, 무기류 등의 보급품을 체계적으로 준비하여 로마 군에 대항하는 새로운 거점을 확립하였습니다. 유대 전쟁이 로마의 월등한 군사력으로 주전 70년 여름에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의 파괴로 끝을 맺게 되자 맛사다는 팔레스타인의 마지막 유대인들의 보루가 되었습니다. 당시 맛사다의 지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살해당한 메나헴의 뒤를 이은 그의 조카 엘리에제르였습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유대인 반란의 진압 목적을 이미 달성한 로마군의 총사령관 티투스(Titus) 장군은 장차 아라비아 지역으로의 진출을 예상한 광야 전투의 훈련을 목적으로 주후 73년 당시 유다의 총독이었던 실바(Silva) 장군으로 하여금 로마 제 10군단을 이끌고 맛사다를 점령하기 위한 대규모의 포위 작전을 실시하게 하였습니다. 로마 군은 2년에 걸친 무수한 정상 공격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요새 꼭대기의 견고한 성벽을 파괴시키기 위해 공성퇴(battering ram)를 끌고 올라갈 수 있는 돌 판으로 포장된 경사로를 6개월에 걸쳐서 건설합니다. 맛사다 요새의 유대인들의 격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경사로가 완성되어 공성퇴가 성벽을 무너뜨렸고 다음날 아침이면 성벽이 파괴된 곳으로 로마 군이 진격해 올라올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바로 이날 밤에 유대인들의 지도자 엘리에제르 벤야이르는 모든 유대인 전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합니다.
“이 모든 일은 동족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이며, 이러한 처벌이 적군인 로마 군에 의해 자행되지 않도록 우리가 스스로 심판하도록 합시다. 따라서 내일 아침에 로마 군에 잡혀서 온갖 수모를 겪느니 차라리 오늘밤에 우리가 아직 자유의 몸일 때 스스로 영광의 죽음을 택합시다.” 이 말에 감동한 각 가족의 가장들은 아내와 아이들을 죽인 다음 남자들이 한 곳에 모여 열 명을 추첨하여 그 열 명이 나머지 사람들을 죽였고 남은 열 명이 한 명을 추첨하여 아홉 명을 죽인 후 그도 최후로 자결하였습니다.이러한 비극적인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바로 맛사다입니다.
령천 교회 중동 선교사
데이비드 김 목사 제공
글쓴이 : 데비드 김 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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