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스크랩 사마리아 성

열려라 에바다 2022. 7. 29. 12:42

 

사마리아성에 대한 언급은 구약에서 100번 이상 언급 될 만큼 자주 등장하지만, 솔로몬 사후 50년이 될 때까지는 건설되지 않았다. 이 도시가 건설된 것은 B.C 875년 오므리왕에 의해서이다. 
왕상16:24절 “저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그 산 주인이 되었던 세멜의 이름을 ?아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여기에 그 이름의 기원이 있다. 
그러나 오므리는 이 도성을 완성하지 못했고, 그의 아들 아합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는 옛 수도 디르사보다 훨씬 진일보한 것이었다. 
아합은 두로 왕의 딸과 결혼을 할 만큼 이방 문물을 받아들였는데, 이 성읍은 페니키아의 숙련된 장인들에 의해 건축되어 상아궁(왕상22:39, 암3:15)이라고 불리울 정도였다. 
실제 이곳은 복층구조물이 있었음이 왕하1:2~17절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서 치명상을 입었는데, 이를 통해 이 건물이 높았음을 능히 짐작할수 있다. 그후 여로보암 2세(B.C 793~782)때에 사마리아성은 최대의 번영을 누렸으나, 선지자 아모스와 호세아의 사마리아성의 종말 예언처럼, 여로보암 2세 사후 얼마되지 않아 B.C 722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앗수르의 왕조실록이라 할수 있는 annlim에 의하면 살만에셀의 뒤를이은 사르곤 2세가 B.C721년에 사마리아 거민 27,290명을 사로잡아 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를 사마리아의 실제적인 멸망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이 사건은 성경 왕하17:23~24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동일한 앗수르 왕(아마도 사르곤 2세)이, 다른 정복지로부터 사람들을 옮겨다가 사마리아 여러 성읍들을 재건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에살핫돈(스4:2), 앗술바니팔(스4:10, 우리말 성경에는 오스납발)에 의해서도 이러한 점령지에 대한 강제 이주정책은 계속되었다. 
앗수르왕들에 의해 재건된 사마리아가 오므리가 건설한 것과 동일한 성인지 아니면 인근 지역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북이스라엘의 중심지역이었던것 만큼은 분명하다. 이렇게 해서 재건된 사마리아는 앗수르 속주의 수도역할을 했다. 느4:17에는 산발랏이 사마리아의 총독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가 팔레스타인 지역 원정 후, B.C331년에 사마리아성은 헬라의 직접 식민지가 됨으로 인해 새로운 전기를 맞게되었다. 퇴역 군인들을 이곳에다 대거 정착시키므로써 헬라화를 더욱 가속시켰다. 
알렉산더 사후 B.C 198년까지는 애굽의 톨레미 왕조에 속했다가, 그후부터는 시리아의 셀류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3권 275~279에 의하면 하스모니안 왕가의 요한 힐카누스가 B.C 107년에 이곳을 점령하고는 흔적을 알수 없을 만큼 완전히 파괴했다고 되어있다. 실제로 이때 이후로는 파괴된채 방치되어 있었다. 
B.C 55~57년에 로마의 수리아 총독 가비니우스가 사마리아의 복원을 명령해서(유대고대사 14권 86~88), 재건축이 시작되었지만, 이를 완성한 사람은 헤롯대왕이다. B.C 30년부터 시작해서 무려 10년에 걸쳐 이 사업을 진행시켰다.
이때 그의 후견자인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헬라식 이름인 ‘세바스테’라는 이름으로 도시의 이름을 바꾸었다.

(전쟁사 1권 403) 


 오므리왕의 궁전이 있던 그 자리에 헤롯은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신전까지 세우게 되었다. 또한 헤롯대왕도 이곳에다 알렉산더대왕 처럼 퇴역군인들을 거주시켰다(유대고대사 15권 292~298). 
연금을 지급받았던 사람은 무려 6,000명이나 되고 이들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이들은 갈라디아인, 드라기아인,게르만인등의 외국인 용병들이었다. 그래서 이도시는 더욱더 국제도시화 되었다. 
헤롯대왕 사후에는 아켈라오의 영지였으나, 학정으로 실각한후 로마 총독의 직접 통치지역이 되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여전히 총독이 직접 통치하고 있었다. 행8:5,14절에는 마술사 시몬의 본거지로 언급되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로마통치시기인 A.D 180~230년경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아합의 남은 행적과 무릇 그 행한 일과 그 건축한 상아궁과 그 건축한 모든 성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상 22:39).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그의 부인 이세벨과 함께 이스라엘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왕이다. 
이세벨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서 시집올 때 가져온 바알과 아세라를 이스라엘에 퍼뜨리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두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거의 죽였던 악독한 왕비였다. 
영국의 동양 연구소 주관 하에 시행된 사마리아 부근의 므깃도 발굴에서 아합 시대의 지층에서 당대의 아스다롯 신전이 발굴되었는데 그 부근에서는 이 신전의 제물로 바쳐져 죽임을 당한 어린 아이들의 뼈가 담긴 많은 항아리를 발견되었다.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얼마나 끔찍하였는가를 보여 주고 있는 생생한 증거이다. 


1908-1910년에 걸쳐 사마리아가 하버드 대학,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 영국 고고학회 등의 주관 하에 발굴되었다.  거기에서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가 처음 쌓은 왕궁의 기초(왕상 22:39)가 발굴되었고, 아합과 여로보암 Ⅱ세가 확장한 궁전과, 아합이 병거를 타고 아람 군대와 싸우다가 전사한 후 그의 피 묻은 병거를 씻었다는 사마리아 연못도 발견되었다.(왕상 22:38). 
아합의 상아궁의 진상이 1931-1933년 그리고 1935년 이후 계속된 사마리아 발굴에서 밝혀졌는데(왕상 22:39), 상아 궁은 상아를 조각해서 벽장식의 타일처럼 벽에 붙였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아합의 상아궁에서 발굴된 깨어진 상아조각품과 꼭 같은 상아조각품이 1845년 레이어드가 파내고 최근인 1957년 전후해서 말라완(M.E.L. Malawan) 교수가 팠던 니므롯(성경의 갈라로 앗시리아의 초기 수도)의 앗시리아 궁전에서 나온 것과 아주 흡사하였다. 
그 이유는 한 때 아합의 상아궁의 벽에 붙어 있던 상아 조각품을 기원전 722년 이스라엘이 망할 때 앗시리아가 떼 내어 부서진 것들을 그냥 버리고 가고 나머지 쓸만한 것은 가지고 갔기에 그곳에서 최초의 발굴때 그 조각들이 나온 것이다. 또한 완전한 것은 니므롯에 있는 앗시리아 왕궁의 벽에 붙인 것이다. 앗시리아가 망할 때 정복한 국가에서 다시 떼어갔을 것이다. 


 아합의 상아궁 발굴 때에 화장품과 화장품을 배합할 때 썼던 접시와 조그마한 석함도 나왔다(왕하 9:30). 
거기에는 검정, 초록, 빨강색을 담을 수 있는 작은 홈이진 곳이 있었고 가운데는 이것들을 배합하는 움푹 파인 곳도 있었다. 거기에는 아직도 불그스름한 색깔이 남아 있었 당시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있었다. 
사마리아 궁전 발굴에서는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Ⅱ(c.793-c.753 BC) 때부터 백성들이 왕궁 곳간에 세금으로 바친 기름과 포도주의 납세 지불문서가 10여 개의 히브리 도기 파편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이 납세 문서에 쓰인 인명 중 바알 이름이 섞어 있었습니다. 즉 아비바알, 바알사알, 바알라, 바알므오, 바알사갈, 메리바알 등입니다. 
또 다른 문서에는 "에겔리오"(Egeliou)라는 이름도 나왔는데 그 의미가 "여호와는 송아지"라는 우스운 뜻이다. 
이 말들은 벧엘과 단에 애굽의 신인 송아지를 섬긴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왕상 12:25-33; 15:34). 
이것이 바로 "여로보암의 죄"(왕상 13:33)이다. 


 1845년 영국인 레이어드(Henry Layard)가 니므롯을 발굴하다 앗시리아왕 살만에셀 Ⅲ세(859-824 BC)의 궁전을 발견했다. 그는 이곳에서 흑색 방첨비를 발견했는데 이 방첨비석에서 살만에셀 3세는 시리아와 이스라엘 등 팔레스틴 나라들을 정복하고 조공을 받는 일 등 그의 승리를 기록하고 그림으로 남겼다. 그런데 이곳에서 예후가 두 번째 단에 엎드리어 조공을 바치는 모습이 선명하게 부조되어 있고 바친 물건과 상황 설명이 쐐기 문자로 쓰여 있었다. 
예후는 열왕기의 주요 인물이다(왕하 9:20; 왕상 19:16; 왕하 9:1-10, 9:11-26, 30-37, 10:11-31). 


 이 방첨비의 맨 아래 부분에는 앗시리아가 기원전 841년 아람(시리아)왕 하사엘을 정복하고 중한 벌과 무거운 조공을 물렸다는 기사가 쓰여 있다. 하사엘은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해 아람왕이 될 것을 통지 받은 벤하닷 2세의 고급 궁중 관리(왕하 8:7-13; 왕상 19:15)였고 후에 왕이 된(왕하 8:14, 15) 그 하사엘이다(c. 842-c.805). 
그는 성경에 계속 나올뿐더러 한 때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까지 위협하였다(왕하 12:17, 18). 


 북방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살만에셀 Ⅴ세(왕하 17:7-18)에게 포위된 후 찬탈자로 앗시리아의 왕위에 오른 사르곤 Ⅱ세(사 20:1)에게 결국 함락되었다. 백성은 가장 잔인하게 살해당하든지 포로가 되어 갔다. 
역사에서 실제 인물로 취급 받지 못하고 오직 성경에만(사 20:1)나와 있던 사르곤 Ⅱ세의 궁전이 1843년 프랑스 사람 보따(P.E. Botta)에 의하여 코르사밧에서 발굴되었다. 그 곳에서 그의 석고로 된 부조와 많은 다른 기록들이 나왔는데 그의 업적을 쓴 비문 가운데 "나의 통치 시작, 다스린 첫 해에…거기에 살던 사마리아 사람 27,290명을 데리고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코르사밧에서 발굴된 '전시비문'(Display Inscription)이라고 불리는 기록에는 "나는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빼앗아 거기서 살던 27,290명의 거민을 데려갔다. 그들 가운데서 50대의 병거를 모아들였고 다른 사람들로 그들의 땅을 차지하게 하고 나의 관리들을 그들 위에 두어 그들에게 이전 왕의 조공을 부과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어 성경의 기록들이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일임을 밝혀 주고 있다(왕하 17:5, 24).


 북이스라엘은 19대 호세아 왕 9년(호 14:2, 3) 앗시리아의 포위 3년 만에 멸망했다.  
"북방 왕국에 내린 파멸은 하늘에서 직접 내린 심판이었다. 앗시리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이루시는데 사용하신 단순한 도구였다" 

~세겜~

















~세겜~



~사마리아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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