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우리에게도 이런 유혹이(삼하12:1-15)

열려라 에바다 2022. 8. 20. 09:10

우리에게도 이런 유혹이

사무엘하 12:1-15 (권호만 목사)

 

최근에 집권 여당의 당 대표가 성상납의혹으로 대표직에서 해임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본인은 부인하고 있고 언젠가는 사실 여부가 밝혀지겠습니다만 유망했던 30대의 젊은 당 대표가 미끄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유혹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당 대표가 아닌 한 나라의 왕이, (대통령이) 유혹을 받아 무너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그 당사자인데요,

유혹에 무너지기 전 그는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경건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목동으로 양을 치고 있을 때 그는 가족 중에서도 가장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린 소년으로서 골리앗을 넘어트릴 때는 거룩한 분노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였던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군대의 장군으로 발탁되었을 때 그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열심히 충성하였습니다.

이때는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시고 능력이라고 믿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을 때, 오히려 다윗에게 여러 번 기회가 있었지만 원수와 같은 사울 왕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종에게 손을 댈 수 없다고 하면서 죽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맡겼습니다.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아름다운 신앙을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왕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모든 권한을 손에 쥐었습니다.

이제는 자기가 직접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될 만큼 국력도 든든해졌습니다.

부하들이 전쟁에 나가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지만 다윗은 한가하게 낮잠을 즐겼습니다.

유혹은 물론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지만 그래서 누구라도 조심해야 할 것이지만 특별히 한가하고 여유가 있고 살기 좋을 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다윗이 그 때 전쟁에 나가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면 이러한 죄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 철학자 중 쇠렌 키에르케고르가 매춘의 유혹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무척 괴로워하면서 ‘저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고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기도하였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드디어 대답을 발견하면서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깨끗함, 진정한 마음의 깨끗함은 오직 한 가지 목적에 몰두하는데 있다.

신적인 목적, 하나님의 목적 앞에 몰두할 때 나는 내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느낀다.’

다윗은 자기에 맡겨준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한가하게 지내다가 악한 마귀에게 기회를 주고 말았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지붕 위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유혹을 느낍니다.

멀리서 보는 여인은 심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실제로 예쁠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는데 두 가지 다였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유혹은 언제나 아름답게 포장되어 다가옵니다.

하와가 느꼈던 그대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합니다.

유혹의 충동을 느낀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그 여자가 누구인가를 알아보게 합니다.

갔다 온 신하가 ‘그 여인은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여기에서 우리는 이 신하가 하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은 그 여인은 절대로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엘리암은 다윗의 모사인 아히도벨의 아들이었습니다.

함께 국정을 논하고 정책을 입안하는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수석비서관 정도 되는 아히도벨의 손녀딸이라는 말입니다.

거기다가 다윗의 충성스러운 장군이며 지금 국가를 위해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우리아의 아내였습니다.

이런 여인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그 여인을 건드리는 것은 절대 안 되는 일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에 보면 그가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져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하나님, 저를 이 정욕에서 건져주십시오!” 하고 회개를 하면서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자신이 기도를 하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건져주지 마소서!”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잘못된 것인 줄 알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그냥 유혹에 빠져보겠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다윗이 그 신하의 말을 들었을 때 그도 분명 고민하지 않았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최측근인 아히도벨의 손녀딸이며 자신의 충실한 장군인 우리아의 아내, 왜 고민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럴 때 다윗은 요셉처럼 당장 그 곳에서, 그 생각에서 뛰쳐나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한편으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한 편으로는 한번 유혹에 빠져보자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유혹에 속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지금 당장,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곧바로 그 자리에서 그 생각에서 뛰쳐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유혹에 빠진 다윗은 이런 부하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인들 데려다가 간음을 하고 맙니다.

그런데 곧바로 문제가 생기는데 아이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오발은 백발백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준 사격을 해도 명중하기 어려운데 오발을 한 것은 꼭 사람을 죽인다는 뜻입니다.

몇 년 동안 임신을 하려고 해도 안 생기기도 하는데 왜 나는 한 번 잠자리를 같이 했는데 임신이 되었는가? 다윗의 근심이 시작됩니다.

왕이 칠 계명을 어기고 간음을 행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의 아내와 간음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백성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주변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들을 무슨 낯으로 대하고 특히 아히도벨과 엘리암과 우리아를 어떻게 쳐다볼 것인가?

죄라고 하는 것은 지을 때는 아름답게 보여서 별 걱정이 없지만 짓고 나면 말할 수 없는 걱정과 근심이 따라오게 됩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실을 은폐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불러서 전쟁의 근황을 묻는체하고 집에 가서 쉬라고 특별휴가를 줍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기가 자기 아이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이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충성스런 우리아가 두 번이나 말을 듣지 않고 집에 가지 않자 다윗은 더 악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군대 장관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 고의적으로 우리아를 죽이라는 끔찍한 지시를 합니다.

우리아를 죽이기 위해 죄 없는 군사들이 함께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또 다른 죄를 낳고 작은 죄는 더 큰 죄를 낳게 마련입니다.

다윗은 간음죄를 해결하기 위해 살인죄를 범하였습니다.

작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 더 큰 죄를 짓게 되지만 그렇다고 죄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죄는 절대 은폐하거나 숨기는 것이 아니라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것이 죄에 대한 최선의 자세입니다.

 

우리아와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장례는 아주 성대하게 치러졌을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 전사한 용맹한 군인들은 국가의 영웅이며 이들을 위해 나는 끝까지 책임을 다할 것이라는 그럴듯한 연설과 함께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치러지지 않았겠습니까?

장례가 끝난 후 다윗은 밧세바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이 음모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고 알아도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아는 전쟁에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것이요, 밧세바가 낳은 아이는 결혼을 한 후에 낳은 다윗의 합법적인 아이로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범죄같이 보이는 이 살인죄를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다윗의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한 번 더 반복)

성도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범죄는 없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곳에서 행하는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을 다 아시고 다 보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모를지라도 하나님은 낱낱이 알고 계십니다.

그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 거짓이 없는 솔직한 삶을 사는 것이 삶의 지혜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그냥 두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잊혀 질 텐데 왜 굳이 일 년이 지난 다음에 나단을 보내서 들추어내실까?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낸 것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그래서 다윗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했기 때문에 나단 선지자를 보내 죄를 책망하게 했습니다.

다윗 왕을 찾아간 나단 선지자는 한 비유의 이야기를 합니다.

“한 성에 가난한 사람이 작은 양 한 마리를 가족처럼 아끼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이웃 부자 집에 손님이 왔을 때 그 부자는 자기의 많은 양들은 건드리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 애지중지하는 그 양을 빼앗아 손님을 접대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노발대발 하면서 '그 놈은 마땅히 죽을 자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마땅히 4배를 배상해야 한다고 열을 냈습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 "당신이 바로 죽어 마땅한 그 사람이라" 고 다윗을 책망합니다.

당신의 처첩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남의 하나밖에 없는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죽였으니 바로 당신이 그 못된 부자가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나단 선지자의 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정말 곱씹어야 할 말씀입니다.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정말 화를 내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반성을 하지 못하는 내가 그 사람일 수 있고 그 다윗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육 간에 성장하지 못하고, 발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프면 진짜 아픈 것이고 남이 아프면 꾀병을 부린다고 비판합니다.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부득이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고 남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시간관념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가 졸면 너무 피곤해서 어쩔 수 없는 자연적인 현상 때문이고 남이 졸면 예배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비판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한 그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 민감하고 내 자신에 대해서 냉철하고 항상 내 자신을 살펴보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을 보면서 그것을 빼라고 비판하는 사람을 향하여 먼저 너 자신의 들보를 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비판의 대상이요 자신이 교육의 대상이요 자신이 변화의 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항상 먼저 살펴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십니다.

이렇게 자신을 살펴보면 자신은 절대 괜찮은 사람이 아니고 남보다 나은 사람이 아니고 누구 못지않은 부족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따끔한 지적을 받은 다윗은 곧바로 철저한 회개를 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습니다.’

내가 그 죄를 졌고, 내가 죽을 놈이라도 인정했고, 자신의 죄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했습니다.

책망을 들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감추는 것으로, 변명하는 것으로,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으로, 오히려 화를 내는 것으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죄를 즉시 인정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살필 때, 자신의 죄를 인정할 때 그런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다윗이 이런 일을 경험하고 난 후 그는 항상 무슨 일에든지 남을 책망하고 남을 비판하기에 앞서 자신을 살피는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남을 이해하는 모습을 갖게 되니까 이해도 되고 어떤 사람도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밧세바와의 불륜의 관계로 생겨진 아이가 병이 들더니 점점 시들해 졌습니다.

다윗은 아이의 생명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신하들은 다윗이 그 사실을 알면 방성대곡할 줄 알고 알리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사실을 안 다음에 오히려 음식을 먹고 그 사실을 겸손히 받아들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언젠가 죽어야할 존재임을 깨닫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는 다윗의 지혜가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아들 압살롬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무서운 기세로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때 다윗은 신발을 제대로 신지 못한 체 피난길에 오르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사울왕의 친척이자 신하였던 시므이가 다윗을 좇아오면서

‘네가 사울 왕을 쫓아내더니 지금 그 대가를 치른다.’고 하면서 개를 쫒듯이

돌을 던지며 저주를 하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쫓겨 도망가는 것도 죽을 지경인데 이런 수모를 당하니 얼마나 화가 나고 성질이 났겠습니까?

군대 장관들은 저 놈을 당장에 죽이자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군대 장관들을 제지하면서 이런 유명한 말을 합니다.

‘내 몸에서 난 내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는데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자기 몸에서 난 아들도 반역하는데 이 사람이 이렇게 못할게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이해를 합니다.

다윗은 어느새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용서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살펴보면 남을 책망할 것이 없습니다.

자신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면 크게 화낼 일도 없습니다.

나도 별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자가 남을 이해할 수 있고 남을 용서할 수 있고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고 나도 살고 남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의 죄는 덮어두고 항상 남의 죄만 들추어내는 사람은 전혀 성장이 되지 않고 남을 용서할 수 없고 자신도 죽고 남도 죽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무섭도록 자신을 살피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자신에게 정직한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2022.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