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35:9-14]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열려라 에바다 2022. 8. 22. 09:26

35편 9절-14절: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저희가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저희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굽히고 슬퍼하기를 모친을 곡함같이 하였도다.

 

9절: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육 구원보다 영혼구원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나라에 붙잡혀서 노예생활을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육적인 해방보다 죄에서 해방을 시켜주는 것이 더 중요하고 시급하게 여기신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죄에 포로가 되거나 죄 아래 살게 되면 육신적으로 노예가 된다. 이걸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육신의 노예에서 풀려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먼저 죄의 노예에서 풀려나야 한다. 이치가 그렇다. 몸이 풀려나기 전에 마음이 먼저 풀려야 한다. 그러면 몸은 마음을 따라서 나오게 되는 거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의 영혼구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의 영혼을 예수님께서 먼저 당신의 십자가의 보혈로 살리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영혼이 중생이 된 거다. 예수님께서 아담으로부터 선악과를 따먹고 내려오던 우리의 원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은 그 밑에 예수를 믿는 우리도 다 죽은 거다. 이게 대속이다. 이렇게 하심은 당신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뜻이 들어있다.

 

예수님께 십자가의 대속으로 우리의 죽었던 영을 먼저 살리신 거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의행으로 사셨는데, 이것 역시도 우리를 대신해서 살아주신 것이니, 이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말씀을 따라 살면 예수 믿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악성이나 악행이나 세상의 풍속과 습관을 따라 살던 것들이 점차적으로 빠져나가면서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는 거다. 이것도 구원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구원인데, 이것을 기본구원이라고 한다. 그 다음에 이것을 기초로 하고, 반석으로 하고, 기준으로 하고, 터전으로 하고 그 위에 자기의 믿음의 집을 세워나가는 것도 구원이라고 한다. 성경에 보면 ‘너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구원을 말하는 거다. 이것을 ‘이룰구원, 건설구원, 성화구원’이라고 한다. 이렇게 이룰구원을 이루어 나가면 자기 속에 들어있던 하나님 앞에 나쁜 성질과 행동들이 서서히 고쳐져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1년, 2년, 10년, 20년 믿어 들어가면 고쳐지는 면이 많이 있어야 한다. 하나도 안 고쳐졌다고 하면 문제가 있는 거다. 첫째는 목사님이 옳은 진리를 주느냐? 성도 속에 옳은 진리가 들어가면 이룰구원이 이뤄져 나간다. 그런데 목사님이 옳은 진리를 주지 않으면 교인들은 받고 싶어도 못 받는 거고, 이렇게 되면 여전히 악한 성질이 그대로 들어있게 되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 속에 옳은 진리지식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더러운 구정물이 빠져나오지를 못하고 그대로 머물게 되는 거다.

 

‘구원’이라고 할 때 지옥에서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나가는 것도 구원이다. 뿐만 아니라 더 들어가서 신령천국에 들어가서 그 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리며 하나님처럼 마음껏 기쁘고 즐겁고 쾌락하며 영원히 행복한 것도 구원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일차적으로 영혼구원을 얻어야 만이 되는 거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영혼구원이 가장 중요하다. 영혼구원을 얻은 우리 기독자들이 일상생활에서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은 다 이 영혼구원에 딸려 들어가는 거다.

 

우리가 신령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까지 포함된 영혼구원을 염두에 두시고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세상을 만들기 전에,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예정하고, 계획하고, 그리고 계획한대로 창조를 했고, 그 다음에 섭리 역사로 구원계획을 진행하시고, 또 보존을 하시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의 영혼구원 때문에 이 우주만물을 창조를 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도 이를 위한 바탕을 깔게 해 주기 위해서 오신 거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현재적으로 훈련 연단을 받는 것도 역시 우리의 영혼구원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 환경, 짐승도, 미운 사람 고운 사람도 다 몰아붙이는 것은 무엇 때문에? 우리의 영혼구원 때문에. 하나님을 닮게 만드느라고. 이를 위해서 낮에도 환경이 돌아가고 밤에도 환경이 돌아가는 거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돌리신다.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다. 자기를 제외해 놓으면 성경을 깨달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누구 때문에 오신 거냐? 나 때문이다. 크게 말하면 우리 때문에 오셨다. ‘우리’라고 하는 여기에 내가 빠지면 안 된다. 자기가 들어있지 않는 ‘우리’는 없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도 우리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우리에게 사건 환경을 몰아붙여서 지나가게 하는 것도 우리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그리고 세상을 불에 태우는 것도 우리의 영혼구원 때문이다. 그러면 현재적으로 자기에게 주었다가 뺏어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자기의 구원 때문이다. 사람을 출생을 시키는 것도, 죽게 하는 것도 다 우리의 구원 때문이다. 이 면이 이해가 되느냐? 이걸 이해를 못하면 남 원망으로 돌아간다. 이건 구원을 모르는 사람이다.

 

자기에게 닥친 사건 환경에 대해 원망 불평으로 돌아가게 되면 이 사람은 이룰구원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리고 원망 불평을 하는 사람 속에는 사단 마귀가 그 안에 들어앉아 있는 거다. 사단 마귀 악령은 예수 믿는 사람 속에 들어가는 거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항상 들어있는 거니까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기는 늘 주의를 해야 한다. 자기 몸이 아무리 깨끗해도 하루만 씻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파리들이 막 날아오고, 모기들이 막 붙는 거다. 깨끗하게 씻으면 오라고 해도 안 온다. 우리는 예수 믿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이방 세상 사람들은 육신구원은 잘 알지만 자기의 영혼구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이방종교에는 우리 기독교처럼 영혼구원이 없다. 아는 지식도 없고, 가르쳐 주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영혼구원이 있다. 영혼이 거듭나는 것이 있고, 영혼의 양식도 있고, 영혼의 성장도 있고, 영혼의 누림도 있다. 진리의 성도들은 자기의 이 영혼구원에 대해 익히 알고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의 영혼구원에 대해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영혼구원을 얻은 우리는 왕족이다. 그런데 왕족이지만 영능의 실력이 없는 게 문제다. 그래서 마귀가 심심하면 와서 건드리는 거다.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마귀가 건드리니까 ‘잉’ 하고 울면서 하나님에게 마귀가 자꾸 건드리니까 마귀를 없애달라고 한다면 이거 쓰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가기만 하면 얻어맞고 우는 걸 싫어하신다. 이기고 돌아오는 걸 좋아하신다.

 

우리가 이기고 돌아오려면 영능의 실력이 있어야 되는데, 맨날 ‘믿습니다.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많이 주실 줄 믿습다’ 라고 한다고 해서 영능의 실력이 생기는 거냐? 이건 믿음이 아니다. 말씀의 깨달음이 많은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실속 있는 믿음을 가진 거다. 하나님도 이걸 믿음으로 인정을 하신다. 자기 속의 악한 요소가, 악한 자들이 멸망이 되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자기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은 세상적인 요소로 되는 게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된 이 영혼구원을 염두에 두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다. 이 영혼구원이 기뻐서 여호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거다.

 

10절: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내 모든 뼈’라고 하는 것은 다윗 자기의 몸 전체를 말한다. 왜냐? 뼈란 그 사람의 몸을 지탱하고 세우는 역할을 한다. 신앙적으로 자기를 지탱해 주고 세워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 자기를 바로 세우고, 지탱해 주고, 보호해 준다는 의미에서 ‘내 모든 뼈’ 라고 표현을 한 거다.

 

사람이 뼈가 없으면 어떻게 되느냐? 문어처럼 돼버린다. 뼈가 있기 때문에 앉고 서는 거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의 뼈는 무엇으로 되어있는 거냐?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영혼의 뼈가 되어야 한다. 자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 이것도 나쁘다, 저것도 나쁘다’ 하게 되니 줏대가 없는 사람이 돼버린다. 말씀이 있어야 자기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거다.

 

그러면 믿는 자기는 현재까지 무엇이 정신적 사상적으로 자기를 세웠다고 보느냐? 밥이냐? 배가 고프면 육신이 자꾸 구부러진다. 밥을 먹어야 밥 힘으로 바로 서게 된다. 신앙인이 바로 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야, 진리의 깨달음이라야 그 정신이 바로 서고 그 사상이 바로 선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힘이 없다. 고집이 세다고 해서 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건 똥고집이다. 말씀을 잘 깨달은 사람의 고집은 아량도 있고, 신앙도 바로 지키게 된다.

 

말씀이 있어야 다윗 자기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거고, 그 다음에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라고 했으니까 이는 다윗과 같은 신앙사상을 가진 자들을 향해서 다윗 자기의 모든 뼈라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자기와 같은 신앙사상을 가진 자들을 다윗 자기의 동족시하고, 형제시하고, 자기 배경시하는 거다.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그’란 여호와 하나님을 말한다.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신다’는 것은 가난한 자를 악한 자들에게서 건지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신다’고 했는데, 가난한 것도 구별을 해야 한다. 물질 면에 가난한 자는 물질이 풍부한 자들에게 이용이 되고 정복이 되기 마련이다. 그 다음에 영적인 면이 가난한 자, 즉 깨달음에 가난한 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 면에 가난한 자, 하나님의 도덕성이 풍부하지 못해서 가난한 자, 능력적인 면에서 가난한 자는 교회는 다니면서 깨달음이 없고, 남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사람이 세상적 이질적으로 신앙하는 자들에게 붙들리면 그들에게 감염이 되고, 영적인 면에서 농락을 당하게 된다. 그들의 이용물이 돼버린다. 남에게 이용을 당한다는 것은 아는 게 없다는 말이다. 아는 게 없으면 이용을 당하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용해 먹는 게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것을 받고 네 것으로 만들어라. 네가 성숙한 자가 되어라. 지혜로운 자가 되어라. 이치를 바로 깨달아라. 총명한 자가 되어라’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에 수십 년을 다녔어도 이게 없다면 너는 다 이용을 당한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열심히 충성봉사를 했는데도 거짓 종이나 마귀에게 이용을 당하고, 죄를 짓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면 얼마나 원통한 일이냐?

 

우리는 믿는 정신이 강해야지 비 맞은 소통처럼 허벌렁하면 안 된다. 물질에 조금만 손해를 보면 눈을 뒤집고 달려들면서도 신앙 면에서는 자기의 정신이나 마음이나 예수 믿는 사상이 비 맞은 소똥 같지는 않으냐? 우리는 죄악성에 감염이 되거나, 비진리적인 정신에 감염이 되거나, 영적인 면에서 이용을 당하거나 농락을 당하면 안 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져주신다고 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영적인 면과 육적인 면에서 무엇이 궁핍한 것이고 무엇이 가난한 것인지를 바로 구별해서 사람을 건질 줄 알아야 한다.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부터 육적인 면이 가난한 것에서 건짐을 받았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자기가 물질적 부요자가 된 것이 값어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건져준 사람의 신앙이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를 건져준 사람의 신앙을 따라야 옳은 거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고기를 많이 잡게 했다. 이 때 베드로가 그 고기를 둘러메고 자기 집으로 갔느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따랐다. 이게 옳은 거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부터 육의 맛을 한 번 보면 그것만 자꾸 맛보려고 한다. 예수를 믿으라고 물질적으로 육신적으로 도움을 주는 건데 하나님의 선과 사랑을 역이용하는 자들이 세상에 아주 많다.

 

OOO목사님이 공부(주-의왕 포도원제일교회에서 김경형목사님과 김정학목사님이 교역자 및 신학생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하러 나오는 목사님 중에 교회를 새로 시작한다고 하면 공구나 자재나 돈을 가지고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만들어 주시곤 했는데, 나는 그거 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런 일을 별로 안 한다고 한다. 그동안 김목사님이 교훈을 부지런히 받고 진리로 바로 서라고 그렇게 사랑을 베풀었는데도 이제는 자기를 안 도와주니까 야속하다고 하면서 돌아섰다고 한다. 이건 저주 받을 사람이다.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 이용을 당하면 안 된다. 지혜로워야 한다.

 

11절-13절: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저희가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거짓 증인을 세워서 없는 죄를 자기에게 뒤집어 씌워서 죄인으로 만들 때는 참으로 속이 상하고 억울한 거다.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을 해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놓는 일이 있다. 우리가 예수를 바로 믿다보면 이런 때가 간혹 있을 수 있다.

 

아합 왕이 거짓 증인을 내세워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사건이 있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나,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날 때 다윗을 모함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다윗은 자기에게 환난 핍박을 주는 악한 자들을 위해서 기도를 했다. 이 때 만일 다윗 자기의 잘못으로 환난 핍박을 받는 거라면 반드시 회개를 해야 한다. 회개치 않는다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는 거다. 은혜가 중단이 되는 거다. 그런데 13절에 보니 성도다윗이 ‘나는 저희가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라고 했다. 그러니까 다윗을 해롭게 하는 자들이 회개를 해야 하는데 그들은 회개하지를 않고 다윗이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길 위해서 금식하며 기도를 했다는 거다. 이것은 주님의 심정을 가진 중보의 기도다. 다른 사람의 죄를 자기가 둘러쓰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는 것은 중보의 기도다. 다윗이 이 기도를 했다. 그리고 다윗이 이렇게 기도를 하니까 그 기도가 자기에게로 돌아왔다는 거다.

 

그렇다면 다윗이 다른 사람을 위해 한 기도가 다윗 자기에게로 돌아왔다고 하는 이것이 다윗의 이 기도가 응답이 됐다는 말이냐, 안 됐다는 말이냐? 다윗의 기도가 잘못됐다는 말이냐, 회개치 않는 그들이 잘못됐다는 말이냐, 다윗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냐?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핍박을 주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 속에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가 잘된 거냐, 잘못된 거냐?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 주면 그들에게 재앙이 안 와야 할 텐데 하나님의 재앙으로 죽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도가 잘못된 거냐, 그들이 잘못된 거냐? 회개치 않는 그들이 잘못된 거다.

 

성경에 보면 원수를 위해서 기도를 하라고 하면서 이 기도가 상달이 되면, 즉 죄인이 회개를 하면 그 형제를 얻는 거고, 회개를 안 하면 그 기도가 기도를 한 사람에게 돌아온다고 했다. 그러니까 성도의 기도는 손해가 없는 거다. 기도가 응답이 되면 형제를 얻는 거고, 그들이 안 받겠다고 하면 그 기도가 나에게 돌아오는 거다.

 

그렇다면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이 자기에게 축복이 오기를 바라면서 남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하겠느냐, 상대가 회개하길 원하면서 기도를 해야 하겠느냐? 형제의 죄를 짊어지고 자기가 죽을 죄인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야 한다. 남을 위해 ‘그를 용서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라고 한다면 그 마음을 누가 아시느냐? 하나님이 아시고 자기도 안다.

 

14절: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저희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굽히고 슬퍼하기를 모친을 곡함같이 하였도다.’ 이 기도를 보면 다윗이 친구와 형제와 모친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 수 있고, 또한 그런 것처럼 다윗 자기를 해하려는 자들 역시도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가 없었다.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누군가가 다윗처럼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을 안다면 오늘날 자기는 회개가 되겠느냐? ‘아무개씨가 나 때문에 힘들게 기도를 하고 있구나’ 라는 걸 알 때 왜 회개를 못할까? 오늘날 자기가 회개치 않는 것은 자기를 향해서 다윗처럼 기도를 해주는 자가 없어서냐? 이를테면 자기만을 사랑해 주면 자기가 회개를 하겠는데 자기를 사랑해 주는 자가 없어서 회개를 안 하는 거냐?

 

성경에 보면 자기가 범죄를 하면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 기도를 하신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나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를 하시니까 내가 회개를 해야지’ 하고서 회개를 하느냐? 성령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탄식하는 걸 아느냐, 모르느냐? 회개치 않는다면 어떤 모양으로서 건 멸망을 당하게 된다.

 

내가 주님의 심정으로 대적자를 위해서 기도를 하면 그 기도가 대적자에게 응답이 되기도 하고, 아니면 그 선한 기도가 자기에게 축복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니까 기도를 하는 게 좋으냐, 안 하는 게 좋으냐? 하는 게 훨씬 좋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기가 축복을 못 받는 것은 왜 그럴까? 맨날 자기를 위해서만 기도를 했지 남을 위해서는 기도를 안 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 어쨌든 악한 자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면 자기에게는 은혜가 넘치는 거다. 그러니까 손해가 없다.

 

자기도 바로 서 나가고, 또한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를 하는데, 이런 자기를 저주하는 자가 있다면 나를 저주하는 그 자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내려진다. 이 저주는 가정적으로도 오고, 사업적으도 오고, 사건적으도 온다. 하나님의 저주가 오면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누굴 잡고 싸울 수도 없는 거다. 항거를 할 수가 없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다른 설교를 더 보시려면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