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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인도하여 주시리라' 십자군 전쟁(1096년 ~ 1272년)

열려라 에바다 2022. 9. 30. 14:50

'신이 인도하여 주시리라' 십자군 전쟁(1096년 ~ 1272년)

 

팔레스타인을 다스리는 셀주크 투르크가 이슬람 교를 믿으며 기독교 순례자들을 학대하자 교황 우르반 2세가 십자군 운동을 제창했다. 십자군 전쟁은 결과적으로는 실패였으나 서유럽의 도시들이 십자군 원정에 힘입어 동서 교통이 활발해지고 상업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셀주크 투르크, 기독교 순례자들을 학대하다

십자군 운동은 로마 교황의 세력이 등등하던 때에 일어났다. 중세에는 순례 의식을 중요시하였다. 순례는 고생스러운 여행과 위험을 겪으며 성지를 참배하고 영혼의 구원을 얻으려고 행해졌다. 수많은 순례지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곳은 그리스도의 무덤이 있는 예루살렘이었다.

11세기에 아라비아인을 내몰고 팔레스타인을 다스리게 된 셀주크 투르크는 이슬람 교를 열렬하게 믿으며 기독교 신자를 적으로 생각하여 기독교 순례자들을 학대하였다. 때문에 서유럽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셀주크 투르크의 손에서 탈환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셀주크 투르크 / 기독교 순례자들을 학대하고 동로마 제국을 공격한 셀주크 투르크의 영토.

교황 우르반 2세, 하인리히를 궁지에 몰아넣다

때마침 동로마 제국이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을 받아 서유럽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때 교황 우르반 2세(재위 1088~1099)가 나섰다.

우르반 2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후 그레고리우스 7세의 정책을 이어, 성직 매매와 성직자의 혼인을 철저히 금하는 동시에 성직 서임권을 교황이 차지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카노사의 굴욕'의 주인공 하인리히 4세가 세운 교황 클레멘스 3세를 추방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교황 우르반 2세 /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고 십자군 결성을 주창한 교황.

우르반 2세는 하인리히를 궁한 지경에 몰아넣는 데 힘을 쏟아 1093년에 하인리히의 아들 콘라트를 신성 로마 황제로 세웠다. 콘라트는 교황의 지지를 등에 업고 부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하인리히 4세는 이 사건 이래로 실의에 빠져 나날을 보냈다. 우르반 2세는 마침내 스승 그레고리우스 7세의 원수를 갚은 셈이었다.

우르반 2세,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종교회의를 개최하다

1095년에 우르반 2세는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받고 있는 비잔틴 제국의 알렉시우스 1세로부터 구원을 요청받게 되었다. 그 요청은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투르크의 위협으로부터 기독교 국가 비잔틴 제국을 지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동방에서 이동해온 셀주크 투르크는 1055년에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1071년에는 비잔틴 제국군을 격파하여 해안지대를 제외한 소아시아를 점령했으며, 그 후에도 시리아와 예루살렘을 지배 아래 두고, 1095년에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건너편 해안까지 공격해온 것이다.

교황 우르반 2세는 1095년에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종교 회의를 개최하였다.

클레르몽 종교 회의 / 우르반 2세가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결성을 주장하며 설교하고 있다.

그는 회의에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서구의 기독교도여,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근동의 기독교인을 구원하는 일에 진군하자.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시리라.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싸우다 쓰러지는 자에게는 죄 사함이 있으리라."

로마 교회 주도의 교회 재통합을 위해 십자군 운동을 제창하다

그가 성지 회복을 위해 십자군 운동을 제창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1054년 그리스도 교회의 동서 분열이 있은 이래로 거의 일관되게 동방의 비잔틴 제국과 그 교회가 로마 교회에 대해 우위에 서 있어온 역사를 이번 기회에 역전시켜, 로마 교회 주도로 동서 양 교회를 재통합해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교황의 연설을 들은 청중은 감격한 나머지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고 외치며 성지 회복을 위해 싸울 것을 맹세하였다. 편성된 군대는 복장과 깃발에 십자가 표지를 붙였기 때문에 십자군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십자군, 8회에 걸쳐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다

다음해인 1096년, 역사적인 제1회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였다. 십자군은 3년에 걸친 고된 행군과 전투 결과 1099년 7월 15일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그때 우르반 2세는 중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상태였고, 성지 탈환의 소식이 닿기 전인 7월 25일에 사망하였다.

1차 십자군 /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있는 십자군.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은 1096년부터 1272년까지 근 200년에 걸쳐 모두 8회 파견되었다. 제1회 때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했으나, 그 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실패한 이유는 횟수를 더할 때마다 국왕과 제후 그리고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경제적 이해에 따라 좌우된 탓도 있으나, 상대편인 이슬람 편에서 영걸한 지도자가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슬람 교도를 공격하는 십자군 / 성전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졌던 십자군 원정은 가장 추악한 전쟁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마드리드 국립도서관 소장.

살라딘, 지중해 정세를 분석해 외교를 전개하다

그 당시 북아프리카에는 이집트에 이슬람의 시아파인 파티마 왕조(909~1171)가 성립되어, 시리아에서 모로코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뿐 아니라 시칠리아 섬과 몰타 섬까지 차지하여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이 파티마 왕조의 재상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고, 마침내 파티마 왕조를 쓰러뜨린 것이 살라딘(재위 1169~1193)이다.

살라딘 십자군에 맞서 이슬람 세계를 지킨 용맹한 용사이자 인도주의자.

그는 새로 아이유브 왕조(1169~1250)를 열었다. 술탄이 된 살라딘은 당시 지중해의 정세를 정확히 분석해 교묘한 외교를 전개하였다. 비잔틴 제국과 이탈리아 여러 도시와 동맹을 맺은 후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및 예멘을 차례로 정복하였다. 1187년에는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 왕국을 타도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이슬람 교도 살라딘, 기독교도의 예루살렘 순례를 허용하다

예루살렘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제왕(帝王) 십자군이라고도 하는 제3회 십자군(1189~1192)을 일으켰다. 살라딘은 침입해온 영국 왕 리처드 1세가 인솔하는 십자군과 격전을 벌이며 마지막까지 예루살렘을 지켰다. 1192년에 양국은 휴전 조약을 체결하고, 살라딘은 기독교도의 예루살렘 순례를 허용하였다.

살라딘은 경건한 이슬람 교도이며, 군인으로서도 용맹하고 과감한 용사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는 전투와 휴전 교섭에 즈음해서는 항상 인도주의적 정신을 발휘하여 약속을 성실하게 지켰다. 그는 십자군을 격퇴한 다음해에 병을 얻어 5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실패로 끝난 십자군 전쟁, 서유럽에 활기를 불어 넣다

십자군 전쟁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으나, 이 사건을 통해 서유럽에는 활기가 넘치게 되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 문화의 중심지였던 도시들이 십자군 원정에 힘입어 동서 교통이 활발해지면서 상업이 다시금 활기를 띠고, 도시가 번성하게 된 것이다.

북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상인들은 지중해 무역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십자군 장병을 태운 배가 돌아올 때는 동방의 후추와 향료며 보석과 명주 등을 싣고 왔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십자군 전쟁이 없을 때에도 이어졌다.

지중해 무역이 주로 사치 상품을 다룬 반면, 발틱 해와 북해의 무역에서는 곡물 · 생선 · 목재 · 모피 등 주로 생활필수품을 다루었다. 이 무역은 독일의 뤼벡과 함부르크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이 두 무역의 중계지에 위치한 독일과 프랑드르(지금의 벨기에)에도 도시가 생겨났고, 이탈리아의 피렌체는 모직물로 번영하였다. 은과 동의 광업으로 번영한 남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에는 대부호 푸거 가(家)가 등장했고, 그 재력은 능히 신성 로마 황제까지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