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37:12-17]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열려라 에바다 2022. 10. 30. 15:21

37편 12절-17절: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12절: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악한 자들이 누구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인간의 뜻을 세우는 자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자들이다. 그러면 왜 악인들이 의인 치기를 꾀하느냐? 의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면을 주장을 하고, 악인들은 불에 타질 세상 일에 목적을 두고, 즉 돈, 부자, 명예를 목적하며 살기 때문에 악인들이 자기들의 생각이나 목적과는 정 반대가 되는 의인들을 치는 거다. 의인들은 악인들의 결과를 미리 예측을 하고 불쌍히 여기지만 악인들은 자기들의 생각이나 목적과 정 반대가 된다고 의인들을 치는 거다. 사람을 치는 것에는 말로 치는 것도 있고, 행동으로 치는 것도 있다.

 

세상 사람들은 선악과 따먹고 나온 소원 목적과 그 지식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다 악한 것인데, 세상 일반적인 악인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하고, 종교적인 악인들은 자기가 믿는 신의 조력으로 종교적인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생명과를 먹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본질의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고자 한다. 그래서 구약에도 보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선지자들이 세상적인 종교적인 운동을 하는 악한 동족들에게 고난과 박해를 받았고, 신약의 사도들도 악한 이방인들과 악한 동족들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다.

 

악인이라고 할 때 한두 명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하나 둘이 모이니까 집단이 되는 거고, 이런 집단의 소원 목적은 전부가 세상을 향한 운동들이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그 전체성 속에 들어있다면 자기도 악인이 되는 거다. 우리 기독자들은 성경에서 보는 의인과 악인, 그리고 세상기준에서 보는 의인과 악인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13절: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주께서 왜 악인들을 보고 웃으실까? 좋아서 웃느냐, 나빠서 웃느냐? 악인들은 물론 자신들은 모르는 건데,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데도 이것도 모른 채 계속해서 세상을 주장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결과를 아시기 때문에 웃으시는 거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이 계속 그대로 나가면 망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도 계속 그 길로 가는 것을 볼 때 신앙인으로서 마음속으로 얼마나 우습고 측은하냐?

 

악인들은, 세상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종말과 죽음 저 넘어 궁극적인 결과를 모른다. 왜 모를까? 선악과 따먹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모르게 되어있고, 모르는 거다. 그 지식으로는 그 세계를 알지를 못한다. 그들의 지식이 아무리 높아도 그 지식은 하나님의 수준에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질이 다른 거다.

 

세상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것일수록 하나님을 향해서 반대의 입장에서 더 강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더욱 더 모르는 거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아예 아무 것도 모르고 세상에서 높이 올라가지도 않은 사람이라면 진리이치의 말씀을 듣기라도 하겠지만 세상에서 ‘내로라’ 하는 사람일수록 진리이치를 받고서 이 진리를 따르려면 자기가 세상으로 높아진 그것을 일단은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에 진리이치를 받기가 더 어려운 거다. 그러니 자기는 똑똑하다고 그러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지하고 교만한 거냐?

 

선악과 따먹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어느 나라 사람이던 ‘우리 힘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좋은 세상을 만들자’ 라고 하는데도 세상은 더 싸움이 일어나고 폭동이 일어나는 이유가 뭘까? 서로가 자기의 기준에 안 맞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꼬이는 거다. 더 높이 올라가면 결국은 무너지는 거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미련한 사람만 산다면 전쟁이 나겠느냐, 안 나겠느냐? 안 난다. 그런데 서로가 영리하고 똑똑하다고 주장을 하다 보니, 서로 잘났다고 하다 보니 전쟁이 일어나는 거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세상건설 목적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악인들은 마지막 그 날에 자신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모른다.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똑똑하다고 하는 그들이 이름을 날리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결과가 어떻게 된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속으로 웃으시는 거다.

 

14절: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악인이 칼을 왜 빼느냐? 죽이려고 빼는 거다. 왜 활을 당기느냐? 죽이려고 하는 것인데, 상대가 알게 하는 게 아니라 모르게 죽이려고 하는 거다. 사람을 죽이는 방편이 다양하고, 또한 무기도 다양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악인들이 탈취를 하려면 부자들을 죽이고 부자들의 재산을 탈취할 것 같은데 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궁핍하고 가난한 자들을 죽이는 거냐? 가난한 사람을 죽이면 무슨 소득이 있느냐?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을 왜 죽이는 거냐? 무엇을 말하는 거냐?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기준을 가지고는 성경을 못 푸는 거다.

 

여기서 ‘궁핍하고 가난한 자’란 진리이치에 밝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 깨달음이 많지 못해서 그 면에 가난한 자들을 말한다. 이런 자들은 깨닫는 면에서 비진리를 알아보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악한 자들의 목표물이 된다. 한 마디로 악한 자들은 성경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덤벼들지 못해도 성경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쉽게 덤벼들어서 채 간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물질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깨닫는 면에 둔감하면 악한 자들의 먹잇감이 되는 거다. 악한 자들의 이론과 그 주장성에 정복을 당하면 자기에게 있는 시간성, 노동성, 물질성이 얼마나 있던 간 다 빼앗기고, 영적인 기능과 지능적인 면에서 둔팅이가 되고, 성장을 못하고, 결국은 그 길로 자연생명도 죽고 마는 거다. 참으로 비참한 거다.

 

우리교인들은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에 밝아야 한다. 깨닫는 것은 교사들이 깨닫게 해 주더라도 성경을 읽는 것은 자기가 해야 한다. 앞으로 별의 별 옷을 입은 것들이 기독교 간판을 달고 많이 나올 거다. 스승 목사님이신 김석준목사님 밑에서 배운 제자들이 많이 있고, 또 스승 목사님이 가르치신 ‘체계적 신앙신학’이나 ‘조직신학’ 책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 나름대로 자기들 기준에 이 책들의 내용을 섞어서 자기가 깨달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들이 많을 거다. 이러면 주격이 달라지는 거다.

 

내가 설교한 요한계시록도 테이프로 내용을 복사한 것이 많이 나갔는데, 이런 걸 배웠다면 자기 것에 섞어서 전하려고 하지 말고 그걸 다 듣고 옳은 사상을 가지고 성경을 다시 파라. 가령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고 싶으냐? 네가 다시 파라. 그런 후에 책으로 내든지 해야 옳은 거다. 그러지 않고 여기저기서 많이 주워 듣고 자기 듣기에 좋은 것만 뽑아서 이리저리 짜깁기를 해서 전하거나 책으로 만들면 그 내용을 이치적으로 캐고 들어가면 이단소리도 있을 수 있고, 정신과 사상적으로 맞아 들어가지를 않는다.

 

그럼에도 이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짜깁기 된 그런 소리를 들으면 그동안 어디서도 듣지 못하던 말을 하니까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은 거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이 교훈을 배운다는 목사님들의 세계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예수님을 믿는 정신 사상을 모르는 거다. 나쁘게 말하면 거짓 종들이다. 옳은 진리 신앙사상을 가졌다면 아무 곳이나 가서 어깨동무하지 않는 건데 진리 신앙사상에 밝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안다고 하는 그것을 배경으로 해서 자기의 이름을 낼만한 사람들과 손을 잡고 어울려 다닌다.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정직한 자들’이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다른 길로 치우치지 않고 생명 길 좁은 길을 가는 자들이다. 일반적으로 정직한 사람은 일반 도덕적으로 거짓말을 안 하고 사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런 얘기가 아니다. 그런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왜 죽이려고 하느냐?

 

생명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일반적인 거짓말을 하면 되겠느냐? 안 된다. 그러면 성도를 살리기 위한 거짓말은 어떠냐? 성경에도 있는데, 라합이 여리고 군인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 이 거짓말이 누구의 기준에서 볼 때 거짓말이냐? 여리고 성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선악과 따먹은 기준의 입장에서 볼 때 라합이 거짓말을 한 거다. 일반사람들은 다 라합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라합의 말을 거짓말로 보겠느냐, 참말로 보겠느냐? 참말로 보신다. 이게 참 묘한 거다. 아니, 라합이 자기에게 온 천국의 복을 죽여야 되겠느냐, 거짓말을 해서라고 살려야 되겠느냐?

 

다른 예를 들면 6. 25때 목사님이 강대상 뒤에 숨었는데 인민군이 와서 어느 교인을 잡고 목사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일반적 기준으로 참말을 하려면 목사님이 숨은 곳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면 생명 길의 참말은? 가르쳐 주지 않는 거다. 왜 그런 거냐? 목사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거짓적인 사람이냐, 숨어있는 사람이 거짓적인 사람이냐? 이걸 알아야 한다. 이해가 되느냐?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누가 참 사람이고, 누가 거짓적인 사람이냐? 이 기준을 바로 세워야 한다.

 

또 한 예를 들면 자기 엄마가 엄마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을 피해서 숨었는데, 엄마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네 엄마 어디에 있느냐’ 라고 물을 때 자기 엄마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느냐, 참말을 해야 하느냐? 거짓말을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도 거짓말을 해서라도 생명을 살리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의 기준을 놓고 바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해석을 못한다.

 

정직한 자들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생명 길 좁은 길을 가는 자들인데, 악인들은 생명 길 좁은 길을 가는 정직한 자들의 사상을 죽이지 못한다. 육신은 죽일 수 있어도 그 정신 사상은 못 죽인다. 설령 악인이 정직한 사람의 몸을 죽인다고 하면 이 악인이 정직한 사람의 정신 사상이 거룩하고 옳은 것임을 양심적으로 알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양심적으로 고통을 겪게 된다. 이건 의로운 사람, 정직한 사람의 정신이 살아서 악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역사를 하는 거다.

 

우리는 정직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 정직해야 되느냐? 하나님 앞에 정직하다고 하는 것은 생명 길로 걸어가야 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이 되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인격화 시키는 것이 정직한 것인데, 이렇게 살지 않으면 거짓의 성도다. 하나님 앞에 악한 거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은혜를 주시기도 하고, 가져가시기도 하고, 몽둥이를 들기도 하시는 거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성도들에게 깨달음의 교훈을 줘서 하나님 앞의 복의 기관이 되도록 해야지 교인들의 정신 사상이 어디로 비뚤어져 있는지도 모른 채 공갈 협박이나 하고, 충성봉사나 강조하고, 육신의 물질적 복이나 많이 받으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 바로 되어야 물질적인 복을 줘도 바로 쓰는 거지 사람이 바로 되지 못했는데도 이 사람에게 물질적 복을 주게 되면 앙화다. 저주되게 써버린다.

 

15절: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악한 자들의 칼은 악한 자기의 마음을 찌르는 거고, 악한 자들이 자기들의 무기로 쓰는 이론과 주장들은 하나님 말씀 위로 걸어가는 정직한 자들의 정신과 사상을 찌르지 못한다. 그들의 힘은 정직한 자들의 강하고 수준 높은 세계에 미치지 못하는 거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궁극적인 신앙사상을 가져야 한다. 죽음 저 넘어 최고의 신앙사상을 가져야 한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 죽음 저 너머를 목적하고, 그 세계에서 살 수 있는 성분인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된 사상은 죽음 저 너머 세계의 질과 같은 것이니, 이 세상에서 악한 자들이 이런 사람의 육신은 죽일지라도 그 세계의 질로 된 사상을 어떻게 죽이겠느냐? 죽음 선 너머까지 따라가서 죽일 거냐?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진리 자체화 된 사상은 그 누구도 못 죽인다. 자기가 내버리거나 자기가 죽인다면 모를까 다른 사람이 못 죽인다.

 

정직한 자들의 말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요 영을 위한 말씀으로 악한 자들의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고 들어간다. 그래서 악한 자들은 자기가 뱉은 말에 자기의 마음이 찔리게 되고 그들의 기상은 활처럼 꺾이고 만다.

 

16절: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소유’란 가지고 있는 거다. 그러면 의인의 적은 소유가 무엇이냐? 의인의 적은 소유란 영원히 가는 진리 자체화 영능화 된 궁극적 실상적인 소유를 말한다. 이건 아무도 못 건드린다. 하나님도 못 뺏어간다. 이건 천국에 자기 것으로 등기이전을 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세상에서 소유한 것도 정직한 소유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한꺼번에 떼돈을 벌려고 하면 자꾸 잔꾀가 나오고 사람이 못써져 버린다. 그러니까 적은 돈을 벌더라도 노력 것 땀을 흘리는 게 가치가 있는 거다. 그런데 보통 보면 그러지 않고 땀을 안 흘리고 거저먹으려고 한다. 이건 안 된다. 일반적으로도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은 정직한 자기의 소유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많이 들어오게 할까?’ 하다 보니 사단 마귀의 꾀임에 빠지는 거다. 이 세상의 소유도 노력 것 해서 자기의 소유가 되어야 깨끗한 거다. 인간은 땀을 흘려야 신진대사가 잘 돌아가도록 지어졌다. 땀을 흘리며 일을 한 사람이 잠도 달다. 그래서 창:의 말씀은 저주 같은 축복이다.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많은 악인의 소유는 어떻게 들어온 거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취한 거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주일을 까먹으면서까지 돈을 벌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이자의 이자까지 칠 배나 빼앗아 갈 수도 있다. 부모가 주일을 까먹어 가면서까지 돈을 번다면 그 자식은 그 부모보다 한 술 더 뜰 거다. 이것도 알아야 한다.

 

소유에는 영원히 가는 소유가 있고, 임시성에서 끝나는 소유가 있다. 임시성에서 끝나는 소유는 언젠가는 없어지고 내가 죽으면 내버리고 가는 거다. 소유라 할 때 재산으로만 보지 말고 건강이나 나이도 다 소유다. 자기에게 허락이 되어있는 것을 자기 목적으로만 쓴다면 써버리는 즉시 그냥 끝나는 거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취한 것, 선악과 지식을 먹고 취한 것, 누림성의 땅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취한 것, 불타질 것을 목적해서 소유한 것, 이런 모든 악인의 부귀와 명예와 영광성 전부는 썩고 불타지고 심판 받을 것으로 소유가 된 거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가 이때까지 건강하게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게 있고, ‘무슨 하나님의 은혜냐? 내가 다 잘 한 거지’ 라고 하는 게 있는데, 연습으로라도 ‘다 내가 다 잘 한 거지’ 라고 해 봐라. 그 다음에 결과가 어떻게 오나? 무서운 소리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가 열심히 하니까 세상적으로도 잘 되게 해 주시는 것도 있지만, 가령 내가 목적하는 세상 일이 잘 되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더 큰 일이 벌어질 것인데 하나님께서 이걸 아시고 막으셔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큰 일을 안 당하게 막는 것도 있는 거다. 이런 일은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잘 모르는 거지만 어쨌든 하나님은 선이시니 선으로 그렇게 하시는 일이 있는 거다. 이런 게 다 사랑적인 면으로, 영인의 실력 면으로, 깨닫는 면으로 좋게 해 주려고 하시는 거다.

 

17절: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악인의 팔은 사람의 노력과 시간과 물질 투자성을 다 착취해 간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비진리적 세상적 종교적 사역적인 것을 다 포함한다. 팔은 주는 팔도 있고, 잡아 제치는 팔도 있다. 악인의 팔은 자기 소유로 잡아당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소유를 심판으로 산산이 흩으신다. 어떻게 흩으시느냐? 먼저 악인은 인격 면에서 다 깨져버린다. 악인의 일이 잘 되면 성공처럼 보일지라도 아니다. 이 사람을 들여다보면 인격적인 면에서는 수습할 길이 없다. 깨져버렸다. 쓸모가 없다.

 

요즘 한자를 풀어서 해석하는 사람이 있던데, 일반적으로는 좋은 말이지만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보면 엄청나게 교만하고 무딘 거다. 그게 다 선악과 따먹은 지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말이 아무리 좋아도 영원히 가는 효력성은 없는 거다.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의인을 누가 붙드신다? 여호와께서 붙드신다. 짐승은 건설 없이 그냥 본능적으로 먹고 본능적으로 동족을 퍼뜨리며 산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세상에서 누림성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누림성을 위해서 건설하며 자기 동족을 퍼뜨린다. 그리고 기독교 하나의 종교인은 도덕적으로 사회 질서유지를 위해서,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많은 봉사를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복지관도 하는 거다.

 

교회에서 복지관 운영하는 걸 말했는데, 진리본질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신령천국의 도를 많이 퍼뜨리고 심어서 그런 복지관이 안 나오도록 해야 한다. 복지관 같은 기관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하다 보니 멀쩡한 사람도 슬슬 놀면서 얻어먹으려고 하는 일이 생긴다. 이러면 무슨 가치가 있느냐? 우리교인들은 나이 들었어도 몸이 건강하면 일을 해야 한다. 하다못해 어린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라.

 

어느 일이 제일 값진 거냐? 어느 일이 최고의 일이냐? 하나님 앞에 의인은 자타의 온전한 하나님의 성품을 위해서 산다. 의인의 사역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온전을 위한 일을 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의 의인이 아니고서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대로 가르치는 교인이 있느냐? 대학이 있느냐? 없다.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을 알고 있는 우리교회 교인들은 긍지를 가져야 한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소원 목적대로 하는 의인의 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사역이고, 성자 하나님의 사역이고,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래서 이 성도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 달라붙어서 배경이 되어주신다. 이 사역이 아니면 전부가 사단 마귀 악령이 뒤에서 밀고 박수치는 사역이다. 삼의일체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은 의인의 사역이고, 이 사역은 누구만 할 수 있는 거냐? 목사냐? 집사냐? 의인이냐? 누구냐? 의인이라야 만이 할 수 있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