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37:18-27]의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열려라 에바다 2022. 11. 6. 15:15

37편 18절-27절: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18절: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신다고 하는데, 이게 날짜의 개념인지, 또는 사람의 성품이 온전하게 닮아진 그 온전의 개념인지? 그리고 세상인간들이 자기의 완전한 날을 알고 사는가, 모르고 사는가? 자기가 사람이 만들어지는 면에 완전하게 되는 그 날을 알고 사는 건가, 모르고 사는 건가? 우리 예수님을 믿는 기독자들은 자기가 완전하게 만들어지는 그 날을 아는가? 대부분의 기독자들이 세상 마지막 날이 되면 이 땅은 불에 타고 예수님을 믿는 자기는 천국에 간다고 하는 정도밖에 모른다.

 

우리는 실력적으로 능력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입어지는 하나님의 온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덧입은 온전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온전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도덕성, 온전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능력성의 실상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날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냥 단순히 날짜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언제 건 그렇게까지 온전하게 입어진 그 실상이 드러나는 날이 있다 그 말이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이 점을 알아야 되겠다. 이게 나의 날이다. 자기의 모든 것이 드러나는 그 날을 위해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예수님을 어떻게 믿어나가야 되겠다고 하는 게 있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 각자마다가 그 날에 어떻게 어느 정도로 나타날 것인지 다 아신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아무렇게나 살 수 있느냐? 성도 각자마다에게 하나님의 바라심이 있는 것이니 이것을 아는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만들어져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림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들어진 그 실력대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고 살았다. 광야에서 실력을 많이 닦은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많이 정복을 하게 된다. 많이 정복을 하니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되는 거다. 역사적으로 이것을 보여줬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살면서, 광야를 통과하면서 육신적으로 자녀를 낳는데, 이 속에는 하나님의 영능의 실력의 교훈이 내려가는 거다. 그러니까 자손이 많은 족속은 그만큼 세력이 큰 거다. 이건 영적으로 신앙실력을 계시하는 거다. 우리도 세상에 살면서 그래야 한다. 자녀들 속에 무엇을 집어넣느냐? 영원히 가는 것을 집어넣는 건가, 임시적인 것을 집어넣는 건가? 성경대로 믿어라. 그러면 그대로 된다.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기업으로 주셔서 영원히 가게 하신다. 신령한 천국에 들어가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덧입은 영인의 성장과 영능의 실력대로 그 천국을 다스리고 누리게 해 주신다. 이건 변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칙이다. 우리가 일반적 경험으로 볼 때도 심은 대로 뿌린 대로 나고 거둔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많이 심으면 많이 난다. 생명이 있는 것으로 심어야 생명적인 것을 거둔다. 생명이 없는 것은 아무리 많이 뿌려봐야 날 리가 만무하다.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이 다르고 별과 별의 영광도 다르다’고 했다. 사도바울과,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오른 쪽 강도가 천국에서 상급이 같아서는 안 되는 거다. 일을 하는 사람과, 일을 안 하는 사람을 같이 취급할 수는 없는 거다. 높고 낮음과, 긴 것과 짧은 것, 넓은 것과 좁은 것, 맑은 물과 더러운 물, 하나님과 인간, 육지와 바다를 똑같이 취급할 수 없는 거다. 다르니 만큼 용도가 다른 거다. 특히 도덕성을 가진 우리 인간은 의인과 죄인, 의와 죄가 차이가 있다.

 

이런 것을 성경적으로 못 깨닫겠으면 세상적으로도 이런 이치가 있으니 이런 것을 보고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라. 이 이치를 무시할 거냐? 신앙 믿음에 대해서는 이치가 더 밝아야 한다. 만일 예수를 잘 믿은 사람이나, 제대로 믿지 못한 사람을 일률적으로 다 똑같이 취급을 해 버린다면 인간을 자유자로 인격자로 만든 이유가 없어진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불의가 되고, 하나님의 공의성도 다 깨지고 만다.

 

인간 자기가 몰라서 은연중에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성을 지워버린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나 자기에게 하나님의 공의성이 지워지느냐? 아니다. 지워지지 않는 거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가 내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매인 것인데 내가 심판을 안 받으려고 하면 안 받아지는 거냐? 그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성은 절대적이다. 이 점을 명심하라. 우리가 세상에 거하면서 생업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업이고, 본업을 위해서 이 부업을 하는 거다. 업이 바꿔지면 이방 불신자처럼 떨어져 버린다.

 

19절: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어떤 사람이? 의인이. 그러면 의인이 왜 환난의 날에 부끄럽지 않을까? 환난의 날이 되면 인격 면에 수치가 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의인들은 환난의 날에 부끄럽지 않을까? 그것은 평소에 환난을 이길 수 있도록, 환난에 넘어지지 않도록, 환난을 이용하고 나올 수 있도록 진리실력을 자기 자체화로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환난’이라고 할 때 육신의 눈으로 알 수 있는 가견적인 환난과, 영의 눈으로만 알 수 있는 불가견적인 환난이 있다.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의 환난을 볼 줄 알아야 만이 눈에 보이는 가견적인 환난도 이길 수 있는 거다. 눈에 보이지 않는 환난을 보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환난에 휘말리게 되어있다. 넘어지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환난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틀림없이 진리를 버리고 산 거다. 진리 속에는 신앙의 성격과 성질의 향방과 흐름을 볼 수 있는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진리를 잡고 산 사람이라면 눈에 보이는 환난은 물론이고 눈에 보이지 않은 환난도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진리의 눈을 가진 거다.

 

그리고 환난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에게 다 올 수 있는 환난이 있고, 믿는 사람에게만 오는 환난이 있는데,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면 ‘사람의 정신 사상이나 소원이나 목적이 어디로 흐르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고, 사람이 사는 것을 보고 ‘그 목적으로 살면 땅으로 내려가겠구나. 향상이 되겠구나. 아래로 내려가겠구나’ 이걸 알게 되는 거다.

 

신앙정신 사상이 세상 쪽으로 되어있다면 이것은 땅 쪽이다. 신앙정신이 땅 쪽으로, 세상 쪽으로 되어있다면 이 사람은 환난이 오면 그만 넘어지는 거다. 그러나 영의 눈이 밝은 사람은 환난이 왔을 때 ‘아, 이건 시험이구나. 이건 환난이구나’ 하면서 자기를 다스리고, 제재를 하고, 말씀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기근이 뭐냐? 하늘로부터 비가 오지 않아서 산천초목이 다 말라 죽고, 강도 메마르고, 농사도 흉년이고, 사람이고 짐승이고 먹을 것이 없는 거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것을 미리 아는 성도 요셉이 나온다. 이 요셉이 바로 왕이 꿈꾼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해몽을 해 주었고, 그 꿈이 역사적 사실로 다가올 것을 알고 준비케 해서 애굽의 7년 흉년을 국가적으로 잘 보내게 했고, 그리고 가나안에 살던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이 애굽에 내려와서 그 흉년을 무사히 넘긴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본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창고에 곡식이 많아서 부자이고, 여호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전부는 못 먹고 굶주리는 것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이 말씀은 믿는 성도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구약의 요셉의 경우를 가지고 육적인 면에 붙여서 해석을 하면 안 된다.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않고 기근의 날에 풍족할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18절의 말씀에 밝혀 놨다.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18절의 사람이 되어서 19절의 복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영적 신앙사상으로 보면 틀림없는 말이 된다.

 

‘기근’에는 물질적 기근이 있고, 영적인 진리 면의 기근이 있다. 국가적으로 물질적인 기근이 왔을 때는 모든 백성이 다 기근을 겪기 때문에 만일 그럴 때 곡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가 있다면 이 부자는 맞아 죽는다. 모두가 기근을 겪고 있는데 어느 부자가 자기만 먹으려고 곡식을 감춰놨다가는 그 날로 죽는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는 영의 눈이 밝아서 미리 준비한 사람은 영의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게 된다.

 

영의 눈이 밝아서 시대적으로 나이적으로 진리의 기근이 올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미리 내다보는 사람은 ‘마지막 때에 거짓 종들이 많이 나온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미리 준비를 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영적인 기근이 오기 전에, 젊었을 때, 눈 밝을 때 성경을 많이 보고 깨달아서 그 어떤 환난이 와도 능히 이기고 나올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을 닦아놓는다. 이게 없이 살다가는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 어느 시에 쳐버리면 그걸로 끝나는 거다. 그 때서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할지라도 이미 늦었다. 그대로 가는 수밖에 없는 거다.

 

젊었을 때, 힘 있을 때 쉬지 않고 짬짬이 부지런히 진리이치를 깨닫고 영능의 실력으로 자기 자체화로 만들었다면 이런 성도는 영적 기근의 때에 다른 사람들은 기근을 당할지라도 풍족한 믿음생활을 하게 된다. 자족이 되니 꾸러 다니지 않는다. 이 성도는 신약성경의 미리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와 같다. 말씀준비, 깨닫는 준비는 평소에 하는 거다.

 

20절: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 악인은 멸망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 되어 없어진다. 그러니까 악인은 물질적 부자로 살지라도 영적인 면에서는 이미 멸망이 되어있는 거다.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악인은 물질부자라 할지라도 이미 망한 사람이다.

 

영적인 면에서 산 것은 없고, 살아있는 것은 없고, 성장된 것도 없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악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무슨 악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선의 사람으로 되어있지 않으면 이 사람은 악인이다. 평생을 예수를 믿으면서 열심히 살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선한 인격으로 바꿔진 것이 없으면 이 사람은 인격 면에서 망해버렸다. 우리가 인격 면에 망한 사람을 참 많이 볼 수 있다. 성경을 일반이치로만 아는 것은 예수 믿는 게 무엇인지를 통 모르는 거다. 이건 망한 거다. 뭐가 망했느냐? 사람이 인격 면에서 망했다. 불쌍하고 처절한 거다.

 

일반 계시적으로 사람은 태어나는 길로 성장을 한다. 육신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모든 감성이 성장이 되고 발달을 한다. 그런 것처럼 인간은 영육 결합체요, 영이 중생한 성도는 인격이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자라야 하는 것인데 자라지를 못했다면 이 사람은 그 면에서 멸망을 받은 거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다음에 오는 것이 뭐냐? 불의 심판의 사람밖에 안 되는 거다. 인간인데도 아무 쓸모가 없다.

 

21절: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악인은 날마다 꾸고, 날마다 떼어먹고, 날마다 도망을 다니느냐? 이런 사람이 간혹 있기도 한데, 일반적인 이런 식의 악인을 말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으면 안 된다. 그러면 ‘악인은 꾸고 갚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악인의 것이 아니다. 악인 자기가 가지고 나온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기의 몸도 목숨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악인은 하나님의 것을 사용을 하면서도, 즉 꾸었으면서도 하나님께 대해 감사할 줄도 모르고, 기독교인 같으면 심지어 십일조까지 떼어먹는다. 감사는커녕 원망과 불평으로 사는 것이 악인이다.

 

우리 교인들, 자기가 1년 동안 십일조를 안 하고 살아봐라. 어떤 현상이 벌어지나? 우리교회 어린이들은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은 데서 십일조를 떼어서 내는 모양인데, 어떤 어린이는 십일조를 하는 금액이 상당이 많던데 이건 아마 부모가 감사까지 포함해서 하라고 주는 것 같다.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악인은 어떻게 한다? 꾸고 갚지 않는다. 그러나 의인은 진리이치이던 물질이던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의 것으로 베풀고 나눠줄 줄을 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앉긴 거지는 의인이다. 그러나 물질부자는 진리도 못 주었고, 왜냐하면 형제들이 못 받았으니까. 그리고 자기의 일락만을 위해 살았다. 여기서 물질구제를 하는 사람이 의인이라고 생각지 말아라. 일반적으로 좋은 일과, 하나님 앞에서의 의인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22절: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 누가 땅을 많이 차지하고, 누가 끊어지느냐? 우리교인들은 이런 걸 읽으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축복계대에 들어가지?’ 하면서 읽느냐, 아니면 그냥 읽고 마는 거냐? 구약에서 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했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이방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죽거나 쫓겨났다.

 

주의 복을 받은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했는데, 땅을 받는 것이 주의 복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주의 복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차지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한 애굽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했느냐? 그러니까 ‘주의 복을 받은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을 먼저 생각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의 복이 먼저 들어가는 거다. 말씀의 복을 받은 사람은 그 다음에 ‘이런 거, 저런 거 사용하라’ 하고서 주시면 그 준 것을 복되게 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의 복을 못 받은 자가 물질적으로 뭘 많이 가지게 되면 그걸로 인해서 저주가 되고, 앙화가 되고, 죽는 거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님의 복을 모른다. 그래서 주님의 복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물질기준으로 자꾸 말을 하고 있다. 그러니 믿음이 들어가느냐? 안 들어간다. 사람이 저질이 된다. 물질 면에 자꾸 줄어들고 가난해지면 이게 무슨 신호냐? ‘더 게으르게 살아라’ 이 말이냐, ‘부지런 하라’ 이 말이냐? 부지런 하라는 거다. 이게 다 이룰구원의 정신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복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그 땅의 주인이 되어서 그 땅을 활용하며 살았지만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니 가진 것도 다 빼앗기고 모두가 포로로 끌려가거나 죽어버렸다. 그러니 땅의 복을 받는 기준이 뭐냐? 말씀을 받고, 안 받고에 있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의 복을 받지 못하면 참과 거짓에 대한 구별 분별의 지식이 없기 때문에 상대방이 말로써 자기를 어디고 끌고 가는지를 모르니 그냥 속는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으냐? 그래서 노력 없이도 돈이 들어온다고 하는 말에 얼마나 많이 당하느냐? 이런 유혹에 물질 욕심쟁이는 망하는 거고, 영적인 차원에서 이치를 못 깨닫는 사람도 망하는 거다.

 

어디를 가던 주의 말씀을 따르면 능력자요, 실력자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인데, 이런 사람은 이 땅의 모든 것을 주님처럼 나와 다른 사람의 이룰구원으로 이용을 하면서 산다. 자기 손에 가지고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그걸 잘 이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자타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데 쓰게 한다. 이것이 주님의 복을 받은 자들이다. 주님의 것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 주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이게 땅을 차지한 사람이다.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자기를 구원할 복음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구원의 말씀의 이치에 대립을 한다. 이들은 저주를 받고 끊어지는데, 끊어지면 영적 성장도 없고, 영적 실력도 없고, 영적 누림도 없고, 영적 활용도 없고, 영적 후손도 없다. 영적인 면에서 전부 끊어져 버린다. 모두 끊어졌으니 이게 저주다. 그래서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아무리 부자로 살고 뭘 어쩐다고 해도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니 저주다. 저주에 그냥 놓여져 있는 거다.

 

주님의 것을 받고서 주님의 것이 성장이 되고, 이것이 자기 것으로 생산이 되고, 건설이 되고, 또 자기 뒤로 대가 이어져 간다면 이것이 얼마나 좋으냐? 이게 아닌 도의 말씀이 자기로부터 끊어지면 자기는 저주가 된다. 기독자들은 영의 눈을 가지고 모든 사물을 보고 인격 면에서 깨달을 줄 알아야 하겠는데 이게 안 되고 있다면 저주 속에 들어있는 거다. 우리는 무엇이 참 복이고, 무엇이 참 저주인지를 알아야 한다.

 

23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길로 가라고 정하셨다는 것이냐?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걸어가라’, 즉 ‘어떻게 살아가라’고 하는 것을 말씀으로 알게 해 주셨다. 이 말씀대로만 하면 현재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게 되고 천국에서 영원한 존귀 영광의 누림성이 있다는 것을 성경으로 다 가르쳐 주셨다. 인간이 이 길로 걸어가는 것이 인간을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걸음이다. 많은 선지 사도들과, 많은 하나님의 종들과, 많은 영적 이스라엘이 이 길로 걸어갔고, 다윗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 길로 가려고 애를 썼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정해준 그대로 가지 않으면 자기에게 고통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정해준 걸음이 정확한 거다. 여기에서 옆걸음을 치거나 넘어지면 자기에게 고통이 오는 거다. 그리고 모든 사물이 그런 자기를 대적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같은 하나의 종교가 아니다.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고 하는 자기의 마음에 달린 종교가 아니다.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

 

자기가 어느 교회에 다니다가 그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어떤 피해를 봤다면 ‘에이, 나는 이제 교회에 안 나가련다’ 하면서 교회에 안 나가면 끝나는 거냐? 믿되 옳은 교회를 찾아서 다녀야 한다. 그런데 보면 교회에서 피해를 당했으면 교회를 안 나가는 사람이 있다. 참으로 불쌍한 거다. 물론 그렇게 만든 목사도 불쌍한 존재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하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았으니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하고 성경으로 통해서 하나님께 물어야 할 인간 자기다. 하나님을 안 믿어서는 안 된다. 믿되 정확하게 하나님 앞에 정로로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믿는다고 해도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자기는 끊어지는 줄 알아야 한다.

 

24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넘어지지만 아주 못 일어날 정도로 쓰러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사람이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실수를 해서 넘어지는 일이 있다. 넘어지면 그만큼 마음이 아프다. 우리 기독자들도 진리의 길, 좁은 길을 가다가 행동이나 생각을 잘못해서 넘어지기도 한다. 안 넘어질 수는 없으나 한 번 넘어지고 두 번 넘어지느니 만큼 불행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으로 붙드셔서 아주 못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손으로 붙드신다 함은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는데, 어떤 징계의 사건을 주어서 정신을 번쩍 들게 해서 진리의 길을 가게 한다든지, 또는 진리의 종들을 보내서 깨닫게 해서 진리의 사람으로 세운다는 거다. 이런 체험을 한 적이 있느냐? 자기가 교회에서 누구 때문에 넘어져서 그 사람을 쳐다보기도 싫고 교회에 나오기도 싫지만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하면서 교회에 나오게 될 때 이것이 인간 편에서 보면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추스르고 교회에 나오는 거지만 신앙적으로 생각해 볼 때는 이게 누가 붙든 거냐? 마귀가 붙든 거냐? 하나님께서 붙드신 거다. 그러니까 자기가 그런 일이 있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시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감사할 줄을 알아라.

 

25절: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수십 년 동안을 관심 있게 보고, 경험을 하고, 체험을 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거다.

 

‘의인’이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의 말씀, 진리이치, 도덕이치, 생명이치대로 살아간 사람을 말한다. 이런 의인을 하나님께서 믿단다고, 쓸모없다고 버리시겠느냐? 혹자들은 의인이 환난 핍박을 받아 순교를 당해서 없어지면 하나님으로부터 비참하게 버림을 받았다고 할런지 모르겠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의인이 육신이 순교를 당할지언정 신앙정조를 버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의인의 신앙을 널리 알려서 후손들로 하여금 그 신앙을 본받게 하신다. 이럴 경우 의인이 버림을 당한 것이 아니라 영광자로 더 올리는 사건이 되는 거다.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자손’이라고 하면 몇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부모의 신앙정신 신앙사상을 이어받은 아들이나 딸이나 후손들을 말한다. 두 번째는 육신의 아들딸은 아닐지라도 교훈적으로 자기의 신앙정신을 이어받은 제자들을 말하기도 한다. 세 번째는 의인의 신앙은 결실이 풍부한 것이기 때문에, 즉 천국의 누림성이 많다는 점에서 그 누림을 자기의 자손이라고 하기도 한다. 즉 의인들은 받을 것이 많다 그 말이다. 이런 면을 놓고 볼 때 의인의 자손은 거지가 없다는 거다. 이해가 되느냐?

 

26절: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부요하기 때문이다. 없으면 못 주고, 가난하면 못 주는 거다. 그러면 무엇이 부족할 때 종일토록 베푸는 거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주어도 주어도 끝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종일토록 줄 수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진리이치가 다함이 없다.

 

말씀에 참 부요자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면 그 자손이 복을 받게 되는데, 성경에 보면 다윗이 요나단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 있어서 요나단이 죽고 난 뒤에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왕궁으로 불러들여서 왕자처럼 대접을 하고, 그의 조부 사울의 재산까지 다 준 일이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는 의인이 신령한 은혜를 베푼 그 행위는 영원 궁극적인 신령세계에서 누림으로 받게 된다는 거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의인은 하나님의 것을 베풀고 준다. 그리고 그 자손이 복을 받는다. 그래서 27절에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라고 하는 거다. 믿는 우리는 세상소원 목적을 따라가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의 사람으로 되고, 선을 행하라. 말씀의 사람으로 된 것만큼 행동으로 나타나는 거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