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요1:1-12]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열려라 에바다 2022. 11. 6. 15:17

1장 1절-12절. (지난 설교 복습 1)


1절-12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하는데, 무슨 말씀이 계셨다는 거냐? 여기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사람의 말로 ‘말씀’으로 표현이 되어 있지만 원문은 ‘로고스’다. 로고스는 인격체를 말한다. 이 인격체는 원인 동기 목적, 소원 정신 사상 철학을 다 가지고 있는 유형적으로 나타나기 이전의 실상을 말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러니까 언제부터인지 모를 태초부터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살상이 있다는 거다. 이 실상은 선재적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러면 이 분이 왜 있는 거냐? 무엇을 염두에 두고, 누구를 염두에 두고 선재적 그리스도가 있는 거냐? 뭘 알게 하려고 당신이 실상적으로 계신 거냐? 이 뒤로 죽 보면 나를 향한 말씀이다.


노인들이 옛날얘기를 해 줄 때 ‘옛날 옛날에’ 라고 시작을 하는데, 이 옛날이 언제의 옛날을 말하는 거냐? 그리고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에’ 라고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얘기를 전개하는데, 이 모두는 이 옛날얘기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옛날을 상상하면서 실감 있게 들으라는 거다. 그런 것처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하는 것도 이 말을 듣는 나로 하여금 그 분이 인간으로 오시기 전부터 나를 향한 소원 목적이 있으니 이 면을 생각해 보라는 거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다고 하는데, 언제의 태초냐?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기 전부터,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시간이 생기기 전의 태초다. 세상을 만든 후에 말씀이 계셨다고 하게 되면 이 말은 ‘태초부터’ 라고 하는 용어의 뜻과 맞지도 않을 뿐더러 신앙의 이치가 달라진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세상부터 취하고 예수를 믿어라’ 이런 이치가 나오게 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하신 것은 세상을 만들기 전에, 내가 태어나기 전에, 그러니까 나보다, 세상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요, 귀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창:에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었다고 하는데, 이 말에는 예수 그리스도성을 입을 수 있는 인간으로 지었다는 뜻이 들어 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냐?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 이방신을 섬기고 조상에게 제사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조상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들어가 있는 거다. 그 분의 실상이 조상들에게도 있고, 우리들에게도 있고, 자자손손 있는 건데도 인간이 이 분께서 자기를 지으신 목적에서 이탈이 되어 사는 것은 형벌이고 심판이다.


우리가 그 분의 절대적인 주권을 안다면 우리의 신앙이 ‘무엇보다 무엇이 먼저다’ 하는 게 딱 잡혀 들어가지만 이걸 모르면 예수님께서 하신 활동의 어느 부분만 잡고 자기에게도 그렇게 해 달라는 식의 신앙이 되어버린다. 이건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님과는 적대적인 신앙이고, 예수님께 얻어맞을 짓을 하는 거다. 세상의 것은 당신이 알아서 주시는 거고, 당신을 영접하고 당신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를 귀히 여기고 인도하신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로고스다. 인격체다. 이 분이 우리 인간의 원형이요, 인간 자기는 그 분만큼 가치가 없다. 그러나 그 분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당신처럼 실상의 온전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면을 두고 우리를 안타까이 여기고, 사랑하기도 하고, 징계도 하시는 거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시간적으로, 또 인격의 동등체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 말씀, 곧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존재적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전제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 닮는 자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들어간다. 신령한 성질로 들어간다. 인간 자기를 이렇게 닮아지도록 만든 분이 하나님이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영접하라. 그 분의 모든 언행심사와 인격성과 성품을 닮으라는 거다. 모양새를 닮지 말고 그 분의 인격을 닮아라. 성품을 닮아라. 속성을 닮아라. 인간 자기가 이 속성을 가진다면 하늘나라에서 존귀 영광자로 영원히 산다.


이렇게 믿으면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인간은 영과 육의 결합체로 만들어졌다. (중생한)영은 신령성에 속하는 거고, 몸 신체 육신은 물질성에 속한다. 신령성에 속하는 것은 영원히 가는 거고 인격체이고, 물질성에 속하는 것은 임시성이다. 그리고 마음이나 이성으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신비스런 자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존재다. 마음이나 이성은 육에 속한다. 이런 자기 존재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멀리 하고 육신만 위해 사는 자는 피부와 골각은 인간이지만 짐승처럼 본능으로 사는 거다. 우리는 인간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얼굴 모양 형태 신장을 보지 말고 이것을 움직이는 사람 속의 원 인간을 봐라.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은 영의 양식이요, 영에 속하는 거다. ‘내 살과 피를 먹어라.’ ‘살’을 먹으라는 것은 언행심사를 통한 이룰구원을 이루라는 거고, ‘피’를 먹으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라는 거다. 이런 삶을 살면 하나님의 성품이 입어진다. 이게 이룰구원이다. 참 신비스럽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라고 하니까 니고데모가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라고 했다. 니고데모는 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물질성적인 것밖에 모르는 거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는 성경을 못 깨닫는다. 말씀을 들을 때 이성적으로 잘 이해가 안 되면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서 자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점차 영의 생각으로 들어가지만 처음부터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라고 하며 마음을 탁 닫아버리면 이 사람의 마음은 길바닥과 같아서 이 사람의 마음에 아무리 말씀의 씨가 떨어지더라도 새가, 마귀가 다 주워 먹는다. 말씀이 필요가 없다는 사람은 결국은 마귀에게까지 무시를 당하게 된다.


말씀을 늘 즐겨 듣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점점 깨달아지고 사람이 고상해진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더 가고, 뭐든지 주고 싶어 하신다. 이런 사람은 주님께 달라고만 하지 않고 나눠주는 자가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건데, 이것을 우리의 신앙에 적용하면 우리는 육신이 말씀이 되어야 한다. 즉 육신위주로 살던 내가 말씀의 이치를 듣고 실천 실행을 하면 말씀의 성품으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씀의 인격으로 사는 사람은 말씀화로 된다. 이건 하나님과 같이 사는 사람이다. 이렇게 되면 자기 속에서 생산적인 사고방식이 나온다. 이게 기독교 신앙이다.


2절-3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라고 하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보통 하나님께서 인간을 말씀으로 지었다고 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데 우리는 더 깊이 생각을 해야 한다.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인간 나를 지을 때 내가 언행심사나 손으로 만지고 생각하고 하는 모든 것을 통해 당신처럼 닮아지는 설계가 들어 있다는 거다.


일반이치나 과학적인 법칙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거다. 그런데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이걸 잘 써먹는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것을 써먹으면서도 영적으로는 못 들어온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눈으로 보여지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을 일반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역시 영적으로 못 들어온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영적으로 들어오고, 못 들어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자유에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세상의 모든 이치와 법칙을 통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더 많이 깨닫고 믿음이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는 거다. 세상만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과학의 이치와 법칙도 우리의 구원도리와 이치를 벗어나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인간이 이것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이치와 법칙을 어기거나 세상의 욕심을 따라 살게 되면 자기 멸망만 가져오게 된다. 쉽게 말하면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겠다고 원자탄을 만든다면 인간은 부족성이 많고 허점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이 원자탄으로 인해 인간이 멸망을 당할 수도 있다.


만일 예수님을 향해 핵폭탄을 터뜨리면 예수님이 이 폭탄에 녹아버리겠느냐, 그대로 있겠느냐? 핵폭탄의 원리를 누가 만든 거냐? 하나님이 만드셨다. 이 원리를 만든 분이 이 폭탄에 녹아버리겠느냐? 그 이전에 핵폭탄이 터지게 하고, 안 터지게 하는 게 주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없느냐? 말하자면 핵폭탄은 성경에 나오는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과 같은 거다. 예수님은 이 풀무불 속에서 아무 해함이 없이 거니셨다.


성경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본질로 성품화 된 성도를 지키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라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바른 믿음의 길을 간다면 이 사람은 자기 목숨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전입신고를 해 놓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핵폭탄이고 뭐고 무서운 게 없다. 자기의 목숨을 천국에 옮겨 놓는 일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는 거다.


인간 네가 어떤 마음을 가지던 네 자유에 달려 있다. 이 자유를 가지고 말씀을 듣고 바른 선택을 못하면 너는 망한다. 네 자유로 인해 네가 죽고, 네가 멸망당하고, 네가 구원이 없이 죽는 것은, 즉 신앙실력이 없이 죽는 것은 네 탓이다. 문제는 교회 인도자들이 말씀을 듣는 자들로 하여금 바른 이해타산을 가질 수 있도록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교회 인도자가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된다’ 라고 가르친다면 이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마귀의 종이다. 이런 교훈은 일반 도덕적인 면이나 생활에 쓸 것은 하나도 없고, 분별도 없고, 흑암뿐이고, 이건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거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던, 어느 장소나 어느 환경에서도 이성적 감정으로 산다. 그러니 사람이 뭐가 되겠느냐?


진리는 사람의 사상과 정신을 하나님 쪽으로 교정한다. 그런데 진리이치의 말씀을 듣고 안 듣고는 인간 자기의 자유에 달려 있다. 예수님은 고쳐주려고 하시는데 달아나면 못 고친다. 그런데 알고 보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는 자기가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자유가 없는 거다. 다 지옥이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영이 살았기 때문에 다 천국에 가기는 가는데 천국에서의 누림과 영광을 위해 ‘이제는 네가 알아서 하라. 듣든지 말든지 네 책임이다’ 이렇게 들어가는 거다. 그러니 가르칠 때 귀담아 들어라.


부모가 아이들을 키울 때 학교공부는 학교에 맡긴다고 해도 집에서는 정서적인 교육을 해야 하겠는데 학교에만 맡기고 그냥 내버려두면 아이가 뭐가 되겠느냐? 집에서 산만한 아이가 학교에 가면 잡히느냐? 이게 큰 문제다. 아닌 말로 우리교인들이 교회에서 교정되지 못하고 맨날 먹고 마시고 떠들고 있다가 그대로 천국에 들어간다면 어찌 될까? 주님께서는 분명히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했는데 교회에서 이게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믿는 자기가 이렇게 살다가 아닌 말로 하나님의 진노가 세계의 교회나 한국교회에 쏟아지면 자기는 안 죽는 거냐? 무슨 말이냐? 왜 이방인들이나 세상 속화된 교인들의 정신을 따라 사느냐는 거다. 영과 육의 결합체인 현재의 자기가 현실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고 하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면 안 된다.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이 되는 거냐?


믿는 사람이 육의 생각, 세상의 이해타산을 가지고 살면 육으로 열매가 열린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그러니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의 근원을 바로 알아야 한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적인 이해타산으로 들어가고, 이렇게 되면 영인성장이 된다. 이렇게 사는 사람의 주격은 영이다. 예수 믿으면서 영 주격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육 주격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데, 현재의 자기가 이성을 가진 자로서 자유를 가지고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할 수 있지만 또한 이에 따른 심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지어진 너를 부정하지 말아라.


믿는 사람이 영 주격으로 살지 않으면서 세상에서 존귀영광을 얻고자 하면 자기 욕심대로 되느냐? 이런 정신으로 살면 네 몸은 주님의 몸인데 주님이 어떻게 취급을 하시겠느냐? 세상만물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건데 믿는 네가 물질에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잡으러 다닌다고 해서 네 소원대로 되는 거냐? 세상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지는 것이 믿어지느냐? 안 믿어지면 믿음이 없는 거다.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3절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라고 했으니 당신의 능력을, 당신의 손을, 당신의 성역을 통하지 않는 만물이 있느냐?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라고 하는데, 이 생명이 어디 안에 있다고 하는 거냐? 만물 속에 생명이 있다는 거냐, 그 만물을 만드신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이냐?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라고 한 것을 보니 주님 속에 생명이 있다는 거다. 그래서 만물을 보고 일반이치를 깨닫는 사람은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거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