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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 십자군

열려라 에바다 2022. 11. 15. 09:45

유럽사/ 십자군

1. 개념 및 정의

 

샤를마뉴(Charles the Great, 742~814)

유럽사(歐洲史, european history)란 유럽의 역사를 연구하는 서양사(西洋紗, western history)의 한 분야이다. 일반적으로 유럽역사를 시대별 민족과 국가 중심으로 구분하여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유럽역사학계에서는 유럽을 하나의 동질적인 공간으로 보고 이를 직접적인 연구 및 서술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나타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학계의 동향에는 제도화된 유럽연합(EU)의 발전에 발맞추어 그 정체성과 역사성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럽이라고 말하면 지리적으로 유라시아대륙의 우랄산맥 서쪽 지역을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자연지리적 경계에 따른 개념구분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어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럽’이 지리적인 개념뿐만 아니라 문화적 개념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오리엔트(orient)’라는 단어가 실제보다는 제국주의시대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과 매우 유사하다.

‘유럽’이 문화적 개념으로 사용될 때 가장 정체성을 잘 반영해주는 것이 바로 ‘자유’와 ‘그리스도교’이다. 이 두 가지 관점은 오늘날 유럽의 개념 중 핵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먼저 ‘자유’는 이미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비유럽을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역시 중세시대 초기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Charles the Great, 742~814)의 라틴 그리스도교 세계의 통일 이후, 그리스도교적 유산을 통해 단일화된 로마-게르만적 그리스도교 문화로 중세 유럽을 이해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 또한 최근 유럽연합(EU)의 확장과정에서 문제가 되어 아직도 유럽의 경계를 명확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

2. 시대구분과 발전단계

유럽사의 시대구분과 발전단계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4시대(고전고대시대, 중세시대, 근대시대, 현대시대)로 구분하고 있지만, 정확한 연도별 시기의 시작과 끝은 학자들마다 다른 견해가 있으며 시대구분 자체를 부정하고 단순히 ‘17세기 유럽’, ‘18세기 유럽’과 같이 세기별 구분이나, ‘1, 2차 세계대전’과 같이 주제로 나누어 시대를 구분하여 서술하기도 한다.

 

1) 유럽 고전고대시대

 

 

알렉산드로스 왕(Alexandros the Great, BC 356~323)

유럽사의 기원은 서양사(western history)의 기원과 매우 유사하다. 문자 발명시대인 역사시대 가운데 고전고대(古典古代, classical antiquity)라고 불리는 유럽사의 첫 시대는 그리스 반도의 폴리스를 중심으로 변화, 발전한 그리스와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작하여 지중해를 중심으로 대제국을 건설한 로마를 가리키고 있다. 이 시대의 문화와 문명이 현재 유럽문명 또는 더 나아가 서양문명의 시작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고전’이라는 용어로 다른 지역의 고대문화나 문명과 서로 구별하고 있다.

유럽역사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 고전고대시대는 그리스 반도에서 폴리스가 등장한 기원전 약 7세기부터 시작하여, 아테네와 스파르타로 대변되는 고전 그리스시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Alexandros the Great, BC 356~323)에 의해 건설된 헬레니즘시대, 그리고 왕정으로 시작하여, 공화정으로 거쳐 제국으로 발전한 로마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고전고대시대는 로마제국의 동서 분열 이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에 끝난다. 이 시대를 이끌어 왔던 주체 민족은 그리스-로마인이었으며, 역사적 공간은 지중해와 그 주변이었다.

 

2) 유럽 중세시대

유럽 중세(middle ages)는 서로마제국의 멸망(476)에서 서양근대의 시작으로 보고 있는 르네상스(renaissance, 14~16세기)까지를 말한다. 하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르네상스보다는 종교개혁(reformation)이나 지리상의 발견(age of discovery)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봉건장원제도와 로마가톨릭으로 대변될 수 있는 유럽 중세를 서양학자들은 다시 초기, 중기, 말기로 다시 세분화하기도 한다.

유럽 중세 초기는 일반적으로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인한 대혼란과 프랑크 왕국의 건설이 가장 주된 사건이었으며, 중기에서는 봉건장원제도가 완전히 정착되면서 서서히 중세 유럽이 발전을 하는 시기였다. 농업혁명을 통한 상업의 부활, 도시의 등장과 발전, 서임권 투쟁을 통한 교황권의 확립과 십자군 원정이 이 시대에 중요한 사건으로 나타났다. 말기에 들어서면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흑사병, 교회의 대분열로 유럽 중세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된다.

 

3) 유럽 근대시대

유럽 근대는 시기적으로 본다면 르네상스를 시작으로 근대시민사회를 열게 되는 ‘프랑스대혁명(révolution française, 1789)’을 거쳐 2차 세계대전까지(1945)로 본다. 아울러 이 시대의 시작은 르네상스와 더불어 독일, 스위스, 영국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 교황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새로운 종교인 프로테스탄트(개신교)가 등장했으며 이는 이전 중세 유럽인들의 사상과 사고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아울러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하여 역사 공간이 마침내 신대륙과 아시아까지 확장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절대왕정’을 지나 유럽사회는 종전의 신분제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시민사회(civil society)’로 들어서게 된다.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이 발생하여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과 교통기관의 발달로 새로운 산업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산업혁명을 바탕으로 ‘제국주의(imperialism)’가 등장하여 유럽국가들 사이에 식민지를 두고 서로 충돌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은 바로 이러한 제국주의에 열중한 유럽국가들 사이의 결과물이었다. 1차 대전 이후에는 이탈리아(파시즘)와 독일(나치즘)에서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모든 행위가 민족과 국가와 같은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가 등장하였으며 이는 곧이어 발생하는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된다.

 

4) 유럽 현대시대

2차 대전을 끝으로 유럽은 ‘냉전’의 대결장이 되었다. 그리고 양차 대전 이후 다시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기 위하여 유럽국가들 사이에 새로운 국가연합체인 ‘유럽연합(EU)’이 탄생하게 된다. 시작은 6국가(베네룩스 3국,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의 경제공동체인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였다. 이 공동체는 ‘유럽경제공동체(EEC: European Economic Community)’를 거쳐 현재에는 ‘마스트리흐트 조약(Maastricht treaty)’에 따라서 ‘유럽연합’에 이르고 있다. 세계 전체 무역규모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경제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유로화의 단일 화폐 사용과 함께 점차 개별 국가를 뛰어넘어 새로운 공통된 이념과 체제를 가지게 되는 하나의 완전한 연합으로 발전해 가고 있는 과정이다.

 

3. 연구방법

1) 유럽사 연구방법

유럽사 연구방법은 그 시대별 다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고전고대시대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적힌 문헌을 바탕으로, 고고학적 발굴과 함께 연구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지역과 시기에 따라서 문헌사료가 부족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대부분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으로 지나간 과거를 다시 복원한다. 여기서 ‘사료’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의 사실을 담고 있는 자료를 말한다. 역사가들에게는 지나간 과거를 연구할 때 ‘사료’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사료’는 과거 사실을 전달해주는 수단이며 과거 사실의 저장고이다.

하지만 유럽 중세 때 제작된 많은 사료들 중에는 지나간 과거 사실을 그대로 완벽하게 전달해주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료에는 그것을 제작한 사람의 개인적 견해, 오류, 왜곡, 허위, 편견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 한계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유럽 중세 연구 역사가들은 사료의 진위와 함께 사료에 포함되어 있는 허위와 왜곡을 철저히 가려내는 작업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흔히 역사학(歷史學, history)에서는 부수적으로 ‘사료학(史料學, quellenkunde)’이나 ‘사료 비판’이라는 기초분야가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근대 이후에 들어서게 되면 다양한 민족별, 지역별 연구가 발생하면서 각 민족과 지역에 해당되는 문헌사료를 가지고 연구해야만 한다. 물론 이때도 역시 문자화되지 않은 유물이나 유적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전해오는 문헌사료의 양과 폭이 많아지고, 넓어지면서 역사가들이 다루어야 될 사료들 역시 확대된다. 문집, 연대기, 실록, 공문서, 조약, 일기, 회고록 등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문헌들을 직접 읽고 연구를 진행한다. 이렇게 다양한 종류와 방대한 양의 사료를 가지고 연구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사료에 적혀 있는 언어는 반드시 직접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료를 올바르게 연구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고대 그리스와 함께 라틴어에 대한 정확하고, 높은 언어적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유럽 중세 역시 대부분 라틴어로 적혀진 문헌을 가지고 연구를 한다. 그리고 근대 이후에는 국가별 해당 언어를 반드시 숙지해야 만이 역사가가 될 수 있다. 현재 관점에서 본다면 영어 어학능력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제2외국어로 연구대상 국가나 지역의 언어도 함께 가지고 있어야 연구가 가능하다.

먼저 역사가는 과거 사실을 전달해 주는 ‘문헌사료’를 ‘사료 비판’을 통해 잘못된 부분을 걷어낸 후 자신에게 필요한 사료들을 한데 모아 지나간 과거를 새롭게 글로써 복원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복원은 역사가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사관(史觀)’과 개인 능력에 따라서 다르게 서술될 수 있다. 결국 역사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나간 과거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시대정신에 입각하여 새롭게 해석하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다가올 미래에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나간 과거를 복원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현재를 이해하고 동시에 미래를 향한 인류의 긍정적인 진행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주요 용어 및 관련 직업군

1) 주요 용어

• 페르시아전쟁(BC 499~450): 총 3차례에 걸쳐 그리스 폴리스들과 동방의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발단은 페르시아의 팽창과 함께 이오니아 지역의 그리스 폴리스들이 페르시아 전제정치에 대한 저항이었다. 3번째 침공에서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이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 군대에 패하여 모두 전사하지만, 아테네를 중심으로 살라미스 해전에서 최후 승리를 거두어 페르시아를 물리치게 된다.

• 헬레니즘(hellenism): 시대적 개념과 문화적 개념으로 사용된다. 헬레니즘시대는 고전 그리스시대의 종말에서 로마의 지중해 통일까지로 알렉산드로스의 사망(BC 323)에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로마에게 멸망할 때(BC 31)까지를 가리킨다. 헬레니즘 문화는 그리스의 문화가 멀리 전파되어 이룩된 문화로 헤브라이즘(hebraism)과 함께 서양문화의 근간을 이룬다.

• 포에니전쟁(BC 264~146):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가 마침내 지중해로 진출하기 위해 그 당시 지중해 서쪽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카르타고와 3차례 충돌한 전쟁이다. 특히 2번째 전쟁에서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이탈리아 반도를 침입하여 로마군대를 물리쳤지만, 결국 로마는 스키피오 장군을 앞세워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 이 전쟁으로 카르타고는 완전히 사라졌으며, 로마는 지중해를 장악하여 마침내 대제국으로 가는 길을 열게 된다.

• 서임권투쟁(investiture controversy): 성직 임명권인 서임권을 두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 사이에 일어난 갈등이다. 그레고리 7세 교황은 교회의 세속화를 저지하고, 교황권을 세우기 위해 황제가 가지고 있던 서임권을 교황이 집행할 수 있도록 하인리히 4세 황제에게 요구하였으나 황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교황은 폐위와 파문으로 황제는 위협하고, ‘카노사의 굴욕(humiliation of canossa)’을 거쳐 서임권은 황제에서 교황으로 옮겨지게 된다.

• 교회의 대분열(western schism, 1378~1418): 가톨릭교회의 분열로 ‘아비뇽의 유수’ 이후 교황의 이중 선거로 인하여 2명의 교황이 등장한 시기를 말한다. 피사의 공의회에서 새롭게 교황을 선출하였으나 앞선 두 교황이 물러나지 않아서 잠시나마 3명의 교황이 존재하기도 했다. 결국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지기스문트 황제가 소집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면서 끝나게 된다.

• 과학혁명: 17세기 유럽에서 이루어진 눈부신 과학적 업적을 총괄하며, 단지 근대과학(近代科學, modern science)의 확립뿐만 아니라 정신과 의식의 거대한 혁명을 말한다. 특히 미적분을 개발한 수학(數學, mathematics)과 중력의 법칙을 발견한 물리학(物理學, physics)에서 놀랄만한 업적을 보였다. 이러한 17세기의 과학혁명은 미신과 종교적 편견을 타파하고 계몽시대를 준비했으며 합리주의의 소산인 동시에 그것을 강화하고 발전시켜 우주와 자연의 정복을 가능하게 하고, 자연과학(自然科學, natural science)과 산업 기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유럽연합의 아버지로 불리는 장 모네가 처음으로 구상한 석탄 및 철광석 채굴을 위한 프랑스-서독 간의 공동 사무소 설치에 관한 계획을 당시 프랑스의 외무부 장관 로베르 쉬망이 공식적으로 건의하여 시작된 경제공동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6개국은 석탄 및 철광석 채굴에 관한 조약(1951년 4월 18일)을 체결함으로써 유럽 내의 시장을 거의 장악하게 된다.

 

2) 관련 직업군

•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국가기록원, 각 지방자치 단체 문서보관서 공무원)
• 역사학자(대학교 서양사 교수)
• 기업체(국내 유럽 기업, 해외지사를 가지고 있는 국내 기업 등의 영업 및 관리직)
• 연구소 연구원(인문과학 연구소, 비교역사문제 연구소, 유럽 연구소)
• 언론 및 방송국(신문사 기자, 방송국 PD, 특파원)
• 교육계(중등과정 역사교사)
• 일반 사설학원(역사논술 교사, 사회 과목 교사)

참고문헌

  • 박혜정, “하나의 동질적 유럽사에서 유럽의 얽힌 역사로 -독일의 유럽사 서술 방법론 논의를 중심으로-”, 『서양사론』(2013년), 118권, 한국서양사학회, 87~120쪽.
  • Wikipedia, “Europa Geschichte”
  • 김승완 옮김(2012년), 『(처음 읽는) 유럽사』, 데이비드 메이슨, 사월의책.[네이버 지식백과] 서양사 - 유럽사 [European History] (학문명백과 : 인문학, 형설출판사)[출처] 서양사 - 유럽사|작성자 안수 집사님

 

로마인의 전쟁관에서의 타락

​로마사에 대해 Shaw님의 최근 포스팅(대표적으로 http://shaw.egloos.com/3380697 )들을 보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로마인에 전쟁에 대한 태도에 대해 막연히 가졌던 호의적인 생각들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습니다. 대략 몽테뉴의 수상록의 <포위된 곳의 대장이 협상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면>이란 편에 나온 아래와 같은 글을 읽고 로마인은 남다른 명예심을 갖고 항상 떳떳한 방식으로 전쟁에 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총독(Legat) 루키우스 마르키우스(Lucius Marcius)는 마케도니아(Macedon)의 왕 페르세우스(Perseus)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그의 군대를 강화할 시간을 벌려고 협상을 제의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로 인해 안심하고 잠들게 된 왕은 며칠간의 휴전을 체결했는데, 이 수단에 의해 그의 적에게 군대를 꾸릴 기회와 여유를 주었으며 나중에는, 그것이 왕의 마지막 파멸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나이든 원로원 의원들은 선조들의 방식을 생각하며 이런 절차를 그들의 고대의 관습으로 부터 타락했고 비난했다. 그들이 말하길 이는 용기에 의해서 싸우는 것이며, 책략이나 기습과 야습에 의한 것이 아니며 물론 거짓 패주나 의외의 돌격으로 적을 이기는 것이 아니며, 먼저 이를 선포하기까지는 절대 전쟁을 하지 않고 아주 자주 전투의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것이다. 이런 관대한 원리로부터 피루스(Pyrrhus)에게 그의 못믿을 의사를 에투루리아인(Etrurian)들에게 그들의 불충한 학교선생을 돌려보냈던 것이다. 이것은 진정 정직한 로마인의 절차이며 그리스인의 농간이나 , 카르타고인의 교활함과 전혀 관계가 없다.>



여기서 몽테뉴는 "오로지 용기에 의해 싸우며 적을 기만하는 어떤 수단도 거부하며 전투의 시간과 장소 까지도 미리 예약하는" 전쟁에서 보여질 것으로는 믿기지 않는 매너야 말로 고대 로마인이 명예롭게 생각하는 전쟁관이 간주합니다. 로마인의 전쟁관하면 흔히 로마가 한니발에 맞서서 보여줬던 당당하고 고집스러운 태도 그리고 훌륭한 적에 대한 존경 이런 것을 떠올리면 적어도 제2차 포에니 전쟁까지는 로마인의 경우 전쟁관 조차 저렇게 존경받을 만한 것인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근데 로마사에 대해 찾아보니 확실히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이후부터는 로마의 전쟁 방식은 완전히 바뀐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로마사에 관해 주로 읽던 시오노의 책이 주로 포에니 전쟁에만 촛점을 맞추고 동일한 시기의 공화국의 팽창을 위한 전쟁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갔던 것이 이 점을 간과하게 된 이유기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때까지만 저 주장이 유효한 것이지요.

공교롭게도, 몽테뉴가 인용했던 마케도니아와 전쟁하던 시기도 역시 2차 포에니 전쟁 이후고 정말 이 후로는 로마인들은 전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하는데 어느 정도는 합의가 되어 있고 여러 전쟁 범죄에 대한 "관용"의 분위기가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고대 공화국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늘 가지고 있던 그들이 앞에서 처럼 그런 비열한 승리에 대해 비난은 하지만 Shaw님의 포스팅 처럼 오늘날로 말하면 전쟁 범죄나 고대적 관습과는 거리가 먼 간계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공화국이 외적으로 팽창하는 동시에 몇몇 유력자들의 권력이 원로원을 능가하게 되는 조짐이 나타나는 기원전 2세기에 이런 것들이 집중되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한 번 그 사례들을 아래아 모아 보았습니다.

물론 Shaw님 포스팅의 누만티아에서 벌인 일도 그 한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켈티베리아인과 쌍벽을 이루는, 로마가 스페인에 설치한 두개의 속주(Province)의 직접 영향권 밖에서 말을 잘 듣지 않는 또 하나의 종족이 루시타니인(Lusitanian)들이라고 하더군요. 켈티베리아인은 이름처럼 갈리아가 있는 북쪽에서 루시타니인들은 서쪽에 치우친 오늘날의 포르투갈에서 주로 로마에 대항한 활동들을 해나간다고 합니다. 마치 스페인 내전에서 처럼 스페인 자체가 그렇듯 이들은 수적으로는 많지 않지만 지형을 이용해서 게릴라 전법을 펼친다고 합니다. 또 두 종족은 서로 공조도 잘해서 한 쪽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곧 이것이 다른 쪽에서 그 불길이 번지고 해서 로마를 특히 괴롭혔다고 합니다. 기원전 150년 경에는 세르비우스 술키피우스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란 사람이 법무관(praetor)가 되어 이 문제를 떠 맡게 되었는데, 다행히 일단 이 때 켈티베리아인과의 평화가 유지되는 바람에 루시타니 문제에 전력할 수 있게 됩니다.

 

루시타니인들이 궁지에 몰리자 사절을 보내서 항복할 테니 지난날 전임자와 했던 조약을 어긴 죄를 용서해달라고 했을 때 그 후에 그가 보여주었던 그의 잔인성은 로마 역사상 길이 남게 될 만한 것입니다.

 

우선 사절들을 얼르고 달래면서 그들의 불쌍한 처지를 동정하는 척도 하면서 "더 좋은 환경이 필요하지"하며 더 비옥한 땅을 주겠다고 꾀어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서 한데 집합시켜서 웅덩이를 파게 하고 그 자리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학살해 버렸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노예로 팔고 원주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그의 이런 학살의 동기는 그의 물욕 때문이었습니다. 갈바는 카토 같은 거물 정치인에게 기소당하지만 여러 잔꾀와 연설 실력으로 처벌을 면한다고 합니다. 이게 화근이 되어서 여기서 살아남은 비리아투스(Viriathus)란 인물이 다시 장성해서 로마에 반란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를 제거하는 방식도 썩 깨끗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내통자를 시켜서 잠든 반란 두목을 암살하도록 해서 가까스로 루시타니를 속주화하게 됩니다. (나중에 세르토리우스도 스페인에서 비슷한 운명을 맞는 것 같지만...-사실은 세르토리우스도 루시타니를 기반으로 반란하는 등 완전한 속주화까지는 좀더 시간이 걸리죠)

그리고 그리스의 해방자를 자처하는 플리미니누스란 인물도 별로 떳떳하게 이긴 것은 아닌 것 같더군요. 그가 테베를 점령하는 방식은 테베를 방문 도중에 그가 시민들의 주위를 끄는 동안 로마군이 성안으로 몰래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플리미니누스는 안티오쿠스와 로마의 화해로 다시 비티니아에 가 있던 한니발을 로마로 보내라고 그 나라 왕에게 요구해 한니발을 자살하게 만들었는데 이로 인해 로마정계에서 완전히 매장당하게 되지요. 로마의 한니발에 대한 이런 심한 대처 방식이 과연 필요한 것이었느냐하는데 대해서 플루타르크 역시 어느쪽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지만 당대 로마인은 불필요하다고 본것 같습니다.

이런 전쟁 범죄나 간계는 그렇다 치고 아래와 같은 무례함을 보여준 사람의 일화도 아주 유명하더군요. 이건 리비우스(LIvy)의 설명인데 시리아 셀레우코스 조의 안티오코스 4세가 로마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이집트 문제에 개입할 때의 일입니다.

<휴전이 만료된 후, 안티오코스(Antiochus)의 관리는 나일(Nile) 하구를 지나 펠루지움(Pelusium)으로 항해했는데, 그 간에 그는 아라비아 사막(Arabian Desert)을 가로질러 행군했고, 멤피스(Memphis) 주민과 나머지 이집트인들에게 용납된 후로는, 물론 부분적으로는 선의로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두려움에 의해서이지만, 그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짧게 행군해 갔다. 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4마일 떨어진 엘레우시스(Eleusis)에서 강을 건널 때, 로마 사절단이 그를 맞았다. 그들이 접근하자 인사하며 포필리우스(Popilius)에게 손을 건냈다. 이에 포필리우스는 그에게 원로원(senate)의 칙령이 담긴 필기 메모판을 건네며 우선 그것부터 읽으라고 했다. 칙령을 읽으며 그는 친구를 불러 그가 할일을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포필리우스는 그의 거친 기질처럼 손에 들고 다니는 막대기로 왕 주변에 원을 그리고 말하길 “당신이 이 원에서 발을 떼어 나오기 전에 내가 원로원에 가져갈 답을 주시라"고 했다. 왕이 잠시 당황하고 충격을 받고서는 "원로원 칙령대로 하겠노라"고 답해버렸다. 그제서야 포필리우스는 왕에게 손을 건네며 동맹과 친구로 맞았던 것이다.>

 


물론 이 직후로 안티오코스 4세는 다 거머쥔 이집트에서 손을 뗍니다. 도대체 로마의 사신인 포필리우스가 일국의 왕에 대해 한 무례한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 설명이 가능하지만 참 사람들 입에 두고두고 오르내리는 일화인 듯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 특히 공화국 로마의 위엄을 가장 잘 드러냈다고 칭송하기도 하는데 왠지 당나라 사신이 고구려왕과 포로송환문제로 멱살을 잡고 싸웠다는 이야기(?? 이건 기록상으로는 당나라 이전에 있었던 일이군요. 뭐가 혼동했던 듯 한데 당나라와도 비슷한 일이 있긴 했죠)가 생각나더군요. 오늘나르이 제국주의라고 해야 할까? 아마도 저런 포필리우스의 행동은 아시아의 한 왕을 결국 원로원의 지배를 받아야 할 사람 정도로 보는 걸 당연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안티오코스 4세 사후 셀레우코스 왕조는 헤롯의 유대처럼 되 버리더군요.

 


1. 십자군 (十字軍, Crusades

 

 

1. 십자군 (十字軍, Crusades)

 

십자군 발생의 종교적 배경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영토 팔레스타인에서 출현하고 탄압 속에서 성장하다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 311~337년)의 개종과 함께 로마를 사로잡았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로마 국가의 단계적인 그리스도교화로 이어졌다. 이렇게 로마가 그리스도교화되는 동안, 중동에서 그리스도교 이전의 종교는 유대교와 페르시아 종교를 제외하고는 전부 소멸되거나 또는 최소한 수면 밑으로 잠수하였다. 313년 밀라노칙령(Edict of Milan)으로 그리스도교를 인정한 로마는 더 나아가 380년에 제국의 국교로 만들었고, 이에 따라 대부분의 중동 지역은 자연히 그리스도교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출현하고 첫 6세기 동안에 중동에서 그리스도교 우위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을 때, 페르시아에서는 두 개의 왕조가 차례로 나타났다. 첫 번째는 파르티아왕조였고, 두 번째는 사산왕조였다. 이 왕조들은 중동지역의 영토를 가지고 로마와 다투었다. 이슬람을 세상에 선포하였던 무하마드(Muhammad/마호메트 Mahomet, 570?~632.6.8)가 태어났던 6세기에 페르시아의 사산왕조와 로마 제국의 후계국인 비잔틴제국은 끊임없는 전쟁상태에 있었다. 이와 같은 두 강대국들 간의 전쟁은 아라비아 반도를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아라비아 주민들은 양 강대국들의 관심과 원조를 받게 되었으며, 아라비아 반도를 통하는 무역로로 이동하는 물품들로 부유하여졌다. 이 중에서도 아라비아 반도의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가 된 메카는 국제 무역으로 많은 부를 누리게 되었다

교역의 직접적인 혜택은 상인들에게 돌아갔으며, 그들이 메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메카는 사막 지대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였으며, 유목민의 윤리가 지배하는 도시였다. 따라서 물질적 부의 축적을 추구하는 상인들의 행위는 도시의 사회적 긴장을 만들어냈고, 이런 현상은 메카 주변의 히자즈 지방에 있는 대부분의 도시들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대동소이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히자즈 지방은 새로운 사회 환경으로 인하여 그것에 맞는 새로운 사회 체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아라비아 반도 주민들의 대부분은 다신교도(多神敎徒)였으나, 유일신교(唯一神敎)인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도 아라비아 반도에 들어와 있었다. 이 유일신앙은 사회 개혁을 일으킬 이슬람에 영감을 주어, 이슬람도 유일신교로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와 함께 아브라함이라는 같은 신앙의 뿌리를 가지게 만들었다. 이런 배경 속에 시작된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를 석권한 후에 3개 대륙으로 진출하여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그리고 이슬람이 뻗어나가는 과정에서 중동 지역의 그리스도교는 사라지거나 미약하여졌다.

 

이슬람은 엄격한 유일신 사상, 개인의 도덕과 동정심에 대한 강조, 그리고 계시에 의해 기록된 경전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와 비슷하다. 무하마드는 쿠란(코란 Koran)을 종교적 권위의 궁극적 원천으로 선언했지만 신, 구약 성서 역시 신성한 영감에 의해 기록된 책이라고 인정하였다. 무하마드는 그리스도로부터 최후 심판의 교리, 육체의 부활 및 그 후의 보상과 징벌의 교리, 그리고 천사에 대한 믿음(그는 신의 메시지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주어졌다고 믿었다) 등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슬람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유일신 사상인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부정하며, 유일신 알라는 그의 신격(神格)에서 일위(一位)요, 그의 속성 그리고 그의 사역에서 일위, 즉 일(一) 인격(人格)뿐이라는 단일성(單一性) 유일신(唯一神)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자로 받아들여 존경스런 대상으로 간주하고 또한 그의 부활과 재림을 언급하고는 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으로 보는 것과 그를 성자로서 유일신 알라(하나님)와 일치시키는 신성론(神性論)을 주장하는 것을 이슬람은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이슬람은 아담과 이브를 인간으로 볼 때 예수는 인간의 아들로서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예수의 완전 인성론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필연적이며 부활과 재림이 있을 것이란 그리스도교의 믿음에 반하여, 이슬람은 인간의 원선설(原善說)을 주장하여 선의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에 대한 죄의 대속과 이를 위한 십자가상의 죽음이란 모순된다고 보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발생한 지역을 이슬람화 시키면서 성장한 이슬람은 그리스도교와 믿음의 뿌리를 공유하지만, 두 종교는 예수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근본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역사적, 신학적 배경은 십자군 전쟁의 발생과 진행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두 종교의 추종자들이 십자군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에도 많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십자군 발생의 원인

고대 로마제국이 동서로 양분된 후 시리아는 동로마 통치하의 속주가 되었으나 7세기 전반에 이슬람교도인 아라비아인에게 정복되었고, 638년에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시리아의 수중에 들어갔다. 한편 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더불어 예루살렘을 성도로서 숭앙하는 생각이 점차 높아졌는데, 11세기 중엽에 이르러 많은 그리스도교도가 개인 또는 집단을 이루어 성지 순례를 떠났다. 이 무렵 동방의 이슬람 세계 내에서는, 셀주크투르크가 세력을 신장하고 비잔틴 제국의 영내에까지 진출하여 시리아, 아르메니아, 소아시아를 지배하고 마침내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1092년에 셀주크 왕조의 통일은 깨어지고 그 영토는 왕족간에 분할되었다. 이 기회를 틈타 비잔틴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비잔틴 제국의 재흥을 꾀하려고 군사적 원조를 청하는 사절을 로마 교황청으로 보냈다. 이에 응답하여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최초로 십자군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알렉시우스의 요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 당시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 투쟁의 와중에 있었는데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가 보다 우위에 있었다. 1095년에 이르러 하인리히 4세는 군사적으로 지극히 강대해져서 우르바누스 2세는 그에게 쫓겨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도망 가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우르바누스 2세는 교황 최대의 적인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하여, 독일인을 제외한 모든 서유럽인에게 십자군을 호소함으로써 황제가 편협하고도 비그리스도교적인 박해자임을 알리고 아울러 영적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다. 또한 교황은 대규모 병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유럽의 내적 평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미 10세기말부터 프랑스 교회는 봉건기사들의 전투를 줄이기 위해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십자군 원정이 일반 민중에게서도 큰 호응을 얻은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서유럽은 100년 이상 인구가 급팽창했으나 그에 반해 농업생산은 제자리 걸음이었고 특히 1094년 흉년 이후 기근 현상은 심각해졌다. 농부들은 굶주림과 농노의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자발적으로 십자군에 들어갔고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은 비잔틴 제국의 붕괴나 십자군 원정을 돈벌이의 호기로 여겼다. 그래서 우르바누스 2세는 이 기회를 이용할 수 있는 동방원정이라는 어려운 사업을 택하여, 이를 통하여 유럽에서 교황권을 확립하고 비잔틴에서 그리스정교회를 로마교회 산하에 통일하려 하였다.

 

십자군 전쟁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하여 8차에 걸쳐 대원정을 감행하였다. 이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 원정단을 십자군이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십자군 전쟁이란 유럽이 생각하는 십자군 전쟁으로 그리스도교 성지를 지키기 위하여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1095년부터 1291년까지 레반트(Levant)에서 벌인 전쟁을 말한다. 레반트는 소아시아와 고대시리아 지방의 지중해 연안지방을 말하며, 어원은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의 ‘해가 뜬다’를 뜻하는 lever, levare에서 유래하여, 동쪽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 넓은 뜻으로는 그리스, 이집트까지도 포함된다. 원래는 유럽, 아시아, 이집트를 연결하는 대상(隊商) 루트 또는 침공 루트가 교차하는 지역으로, 중세 말기 이래 인도항로가 열릴 때까지 동서무역의 주무대를 이룬 지역이다.

십자군에게서 종교적 요인을 강하게 느끼게 됨은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보면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십자군을 간단히 종교운동이라고 성격 지을 수만은 없다. 봉건영주, 특히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였다. 그 밖에 여기에는 호기심, 모험심, 약탈욕 등 잡다한 동기가 신앙적 정열과 합쳐져 있었다. 대체로 십자군시대의 서유럽은 봉건사회의 기초가 다져지고 상업과 도시의 발달도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어서 노르만인의 남(南)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정복, 에스파냐의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 동부 독일의 대식민활동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주변 세계와의 경계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배경으로만 본다면 십자군도 정치적, 식민적 운동의 일환이 될 수밖에 없고, 종교는 이 운동을 성화(聖化)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 전쟁은 ‘그리스도교도가 그들의 성지에서 이슬람교도들에 의하여 성지 순례를 방해 받는다’ 는 호소에 호응하여 그들의 성지를 탈환하고자 하는 열의 속에서 시작되었으며, ‘이 전쟁에 참여해서 죽는 사람은 그들이 생전에 저지른 모든 죄를 용서 받는다’ 는 생각 속에서 진행되었다. 일반적으로 십자군 전쟁이 연대기적으로 기술되었기에 십자군이 집단적으로 8차에 걸쳐 순차적으로 이슬람 세계로 쳐들어간 인상을 주기는 하나, 실제적으로는 십자군의 원정행위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십자군의 활동과 성격을 인위적으로 구분해 보자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여러 번의 십자군 원정 중에 부분적이나마 유일하게 성공하였던 원정이며, 가장 종교적 열정이 높았으나, 가장 무질서하였으며, 가장 잔인하였던 원정이었다. 또한 이슬람 세계의 저항은 조직적이지 못하였으며, 상대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 회의석상에서 십자군에 관한 연설을 했다. 그는 성지 해방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명명하고 종군하는 군사들에게 신의 구원을 약속하였다. 그 후 교황의 호소를 전하기 위하여 각지에 사람이 파견되었다. 교황이 계획한 십자군은 주로 기사(騎士)들로 편성될 예정이었다. 각 지방에 파견된 사람들과는 달리 십자군에 대한 열을 멋대로 부채질하고 다니는 자들도 나타났다. 그 중에는 십자군 사상의 창시자로 불릴 만큼 전설적인 인물인 은자(隱者) 피에르도 있었다. 동쪽을 향해 떠난 원정대는 농민이 대부분인 민중십자군 부대였다. 우선 고티에가 이끄는 일단과, 이어서 은자 피에르를 따르는 한 부대가 출발했다. 양군은 헝가리, 불가리아를 통과할 때 이미 그곳에서 식량이 떨어져 약탈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수록 심한 보복 공격을 받았다. 양군은 합동하여 소아시아로 건너가 투르크군과 싸움을 벌이기는 했으나 결과는 대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다른 3개의 민중십자군 부대들의 원정으로 이어졌고, 그들에 의해서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특히 라이닝겐의 백작인 에미코의 박해는 처참하였다. 십자군에 대한 지나친 열성이 일찍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단 유대인에게로 쏠렸는데, 거기에는 부유한 유대인에 대한 경제적 증오심도 깃들어 있었다.

이 3개 부대는 헝가리인의 공격에 의해 괴멸되었다. 정규 십자군은 1096년 여름부터 4개 부대로 나뉘어 출발, 육해(陸海) 양로를 지나 이듬해 봄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였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큰 군세였는데 비전투원을 포함하여 5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 중 주력을 이룬 것은 프랑스인과 노르만인이었다. 합류한 십자군은 니케아 공략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진군했는데, 그 길은 험난했다. 소아시아를 진군하는 동안 투르크인의 공격, 그리고 심한 더위와 굶주림 등으로 상당수의 인원과 말을 잃었다. 시리아에 도착하여 첫 공격목표인 안티오키아의 공방전에만 8개월이 걸렸다. 점령 후에도 전력 회복과 주변지역을 정복하는 데 6개월을 소비했으며 그 동안 유행병에도 시달렸다. 그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지휘자들이 분쟁을 일으킴으로써 부하들의 불평을 싹트게 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 전면에 도착, 1099년 7월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거기서 처참한 유혈극이 벌어졌다. 십자군 병사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열광적인 신앙과 이교도에 대한 격한 증오심이 한 덩어리가 되어 십자군의 정신을 형성한 것이다. 당초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도 십자군 병사들의 일부는 시리아에 정주(定住)하였다. 정복지에는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키아 후령(侯領), 트리폴리 백령(伯領), 에데사 백령 등 4개국이 들어섰다. 또 왕국 안에는 요한기사단, 템플기사단, 조금 늦게 독일기사단 등의 종교기사단이 편성되어 성지 방위의 주요 군사력이 되었다. 영주는 성을 거점으로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상인은 도시에서 특권을 얻어 이익을 증대시켰으나 농민은 희망도 없이 예속상태에 놓였다. 교회와 수도원이 건립되고 교회조직도 정비되어 유럽의 제도와 관습이 그대로 옮겨졌다.

 

제2차에서 제3차까지 십자군 원정

 

십자군 원정은 여전히 열의가 높았으며, 대규모 연합 세력에 의해 대규모로 진행되었으나, 이슬람 세계의 저항도 모술의 아타벡 이마드 알딘 장기, 누르 알딘 장기, 그 뒤를 이은 이슬람 세계의 영웅 살라흐 알딘 알아유비(살라딘) 등에 의해 조직적이 되었으며, 이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이슬람교도의 손에 넘어가는 등 1차 십자군이 이룬 업적의 상당 부분이 무효화되었다. 이런 전세의 역전은 하틴 전투에서 이루어졌다.

1144년 에데사가 이슬람군에게 탈취되자 제2차 십자군이 파견되었다. 프랑스왕 루이 7세와 독일왕 콘라트 3세가 지휘자가 되었다. 시리아에서 다마스쿠스 공격이 계획되었으나 시리아 주재 십자군 병사가 적측의 감언에 속아 전열을 이탈했기 때문에 중도에서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두 왕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귀국하였다.

이집트의 명군(名軍) 술탄 살라딘이 1187년에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에게 승리를 거두자 그 여세를 몰아 각지의 도시와 요새를 점령하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이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제3차 십자군이 파견되었다. 이번에는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왕 필리프 2세, 영국왕 리처드 1세 등이 참가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는 소아시아의 키리키아강에서 빠져 죽었고 남은 군사만 시리아를 향해 진군하였다. 현지에서는 아콘 포위작전이 벌어졌는데도 필리프는 1년 8개월 늦게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게다가 그는 아콘 공략 후 곧바로 귀국해버렸다. 리처드는 키프로스섬 정복 때문에 필리프 보다 2개월이나 늦게 도착했다. 그 후 리처드는 살라딘과 교전, 몇 개의 도시를 탈환하지만 예루살렘 해방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그리스도교도의 성도 순례와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 후 아콘은 시리아에서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제4차 십자군 원정

 

이미 십자군을 일으키는 지도적 인물이었던 교황의 권위는 흔들리고, 구성된 십자군은 오직 상업적 이익에 눈이 어두운 상태였으며, 당초 목적지인 이집트를 멀리하고 그리스도교 도시 자라를 점령하여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으며, 비잔틴 황제 자리 다툼에 개입하기 위하여 비잔티움에 갔다가 비잔티움을 점령하고, 갖은 만행을 자행하고 그들이 점령한 비잔틴 제국의 땅에다가 그들의 라틴 공국을 세웠다.

제4차 십자군은 교황권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발동되었다. 군단의 편성은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황제나 국왕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최초의 십자군과 비슷하였다. 다만 먼젓번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이슬람군의 거점이된 이집트가 원정의 목표로 결정되었다. 이에 비해 군대의 수송을 담당한 베네치아는 내심 이집트와의 평화적 교역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하여 십자군은 약속한 수송비가 모금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베네치아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그들은 우선 달마티아의 츠아라를 치고 이어서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군하였다. 전부터 베네치아는 비잔틴 제국 내에 유리한 상업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최근의 정변으로 그것을 잃은 상태에 있었고 제노바와 피사에 눌려 있었다. 1204년 십자군은 정정(政情)의 혼란을 틈타 비잔틴 제국를 무너뜨렸다. 수많은 성유체(聖遺體)와 보물이 약탈당하고 수도의 일부와 항만과 섬은 베네치아 영토가 되었다. 그 밖의 비잔틴 영토도 십자군의 지휘자들에게 분할되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라틴공국이 성립되었다. 이 공국은 약 반세기 동안 존속하였다.

 

제5차 이후의 십자군 원정

 

제5차 십자군은 이슬람 세력의 저항의 중심지가 이집트라는 인식으로 이집트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나, 다 실패하고 말았다. 제6차 십자군의 독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협상으로 예루살렘을 되찾기도 했으나,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도 모두에게 비난을 받았고, 제7차 십자군 루이 9세는 이슬람교도들에게 포로로 잡혀 막대한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다.

제5차 십자군은 또다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제창으로 이루어졌다. 이 십자군은 아콘으로부터 이집트에 원정하고, 다미에타를 포위하였다. 작전은 성공하였으며 이슬람측은 다미에타와 시리아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이를 거절하고 카이로에 진격하였으나 격퇴되었다. 제6차 십자군은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행해졌는데 이제까지와는 다른 특징을 가진다. 프리드리히는 ‘세례를 받은 시칠리아의 술탄’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라비아의 풍습에 매혹된 황제였다. 그는 무력이 아닌 외교수단으로 이슬람측으로부터 예루살렘과 그 밖에 영토를 양보 받았다. 그러나 그가 돌아간 뒤에는 시리아 주둔 십자군 병사들 사이에 내분이 격화되어 그 사이에 예루살렘도 잃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루이 9세는 키프로스섬에서 이집트로 건너가서 다미에타를 점령했다. 이때에도 이슬람측은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을 제안해왔으나 전과 같이 이를 거부하고 카이로를 향해 진군했으나 만슬러 전투에서 대패하여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잠시 시리아에 머물면서 약간의 항구와 요새를 탈환하고 철수하였다.

 

십자군의 종말

 

십자군에 대한 저항 운동을 주도하던 아유브 왕조가 사라지고,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백인 노예 병사들인 맘루크 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하자, 신사적이던 아유브 왕조와는 달리 유목민적인 위계를 써가며 십자군 요새를 하나씩 점령하여 나갔다. 안티오키아가 이슬람군에게 함락되자 루이 9세는 최후의 십자군을 이끌고 출발하였는데, 튀니스를 공격하였을 뿐 그곳에서 죽었다. 시리아에서는 요새가 잇따라 함락되었고, 1291년 아콘마저 빼앗기자 십자군 원정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십자군의 실패 원인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성공은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분열에 큰 이유가 있었다. 그 후 이슬람 세력이 통일되자 반격을 당하는 상태가 되었다. 십자군은 전력도 충분하지 못하였지만 시리아 주둔 십자군 병사와 종교기사단, 새로 도착한 십자군병사, 상인 등은 상호간, 또는 각 내부에서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거기에는 영토문제와 경제적 이익의 문제가 있었고, 또한 형성되어가고 있던 국민적 감정 등에 의한 대립이 얽혀 있었다. 십자군 원정은 무질서, 약탈, 학살, 소년 소녀 십자군을 노예로 매매하는 등 추악한 일면을 드러냈으며, 시종일관 동서 무역에서 나오는 이익을 취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또 십자군 국가에서는 소수의 정복자가 많은 피정복민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그 기초는 항상 흔들리는 상태였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무지와 광신과 편협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슬람교도들의 증오심만 부채질하였다. 그리스도교도를 성지로 가게 한 서유럽의 팽창운동은 그 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십자군도 종말을 고하였다.

 

십자군의 영향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와해된 비잔틴 제국은 다시 부활하지만 이미 소국에 지나지 않았으며 몰락은 결정적이었다. 그 때문에 비잔틴 제국에 의해 이제까지 수행되어오던 유럽의 방벽 역할이 없어지게 되었다.

십자군 운동은 교황권의 후퇴, 국왕 권력의 강화와 중앙 집권화, 도시와 상업의 발달, 이슬람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문화의 발달 등 모든 일과 관계가 있다. 즉 교황에 의해 제창된 운동의 실패는 그대로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전사(戰死)에 의해 단절된 귀족가의 소유영지는 왕령(王領)에 편입되어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십자군 운동으로 최대의 경제적 이익을 본 것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였다. 십자군에 참가한 유럽인들은 미지의 이질적인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향을 과대하게만 평가할 수는 없다. 왕권의 강화는 필연적으로 봉건사회의 약화라는 내부 전개적 기본 요인을 안고 있었다. 봉건적인 분열상태에 있을 때에만 유럽세계를 관념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교황권은 왕권에 의한 중앙 집권화와 더불어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십자군 운동의 전제조건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규모의 군대를 먼 곳까지 보내거나, 다량의 식량과 무기를 모으거나 하는 일들이 어려웠을 것이다. 동방문화 유입의 중심지는 시칠리아와 에스파냐였지만, 유럽인들은 이교문화(異敎文化)에 접하면서도 최후까지 관용의 정신을 배우는 일이 없었다. 이슬람교도는 원래 관용의 정신이 풍부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의 공격을 계속하여 받게 되자 그들에게 점차 비관용성이 커져 갔고, 민족의식이 고취되어 갔으며, 성전(聖戰)에 대한 정열은 높아만 갔다.

십자군 운동의 추악한 면과 궁극적 실패는 그리스도교의 확산을 좀 더 영적이고 정신적이며, 평화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교회는 칼로써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양심에 호소하는 평화의 메시지로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유야 어쨋든 유럽의 그리스도교도 입장에서 보면 십자군 전쟁은 위대한 종교적 열정을 함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성지와 옛 그리스도교의 땅을 회복하려는 명예로운 원정이었다. 또한 십자군 운동으로 인하여 당시 유럽보다 앞서 있던 동방과의 접촉과 교류는 유럽이 중세의 긴 잠에서 깨어나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고, 유럽의 문명이 세계를 제패하는 근세의 기초가 되었다. 이와 같이 명예롭고, 진취적이며, 개척적인 원정은 후일에 그 개념이 확대되어 이교도가 점령하고 있는 땅을 그리스도교도의 땅으로 만들고자 하는 모든 활동이 십자군 운동 또는 전쟁으로 간주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런 유럽의 십자군 운동에 대한 개념은 유럽 문명이 세계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세계의 십자군 개념으로 확산되었다. 19세기 이후에, 십자군 운동이 서구 문명의 수호이며 이슬람 세계에 세워진 십자군 왕국들은 서구 문명의 전초기지라는 사고에 도전하여, 그것은 식민제국주의의 한 형태이며 그 왕국들은 불안정한 서구 식민기지였다는 비판이 있어 왔기는 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수의 비판은 유럽에서 흘러내려오던 십자군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크게 바꾸지 못했고 그대로 대다수 유럽인들의 관념으로 유지되어왔다.

 

서구 그리스도교가 보는 십자군 전쟁

서구 그리스도교도들은 십자군 전쟁이 다소의 물리적 이익추구, 정치적 욕심, 무질서, 무지 등의 비윤리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나, 최우선은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진행된 그들의 성지 탈환 운동으로 보고 있다.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리스도교 성지가 있는 레반트와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는 유럽만을 그들의 영역으로 보았고, 그 이외의 지역은 자신들의 영역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도는 자신들의 우위 지역에서 타종교를 절대 인정하지 않았으며, 특히 그리스도교와 유사한 다른 종교나 종파에 대하여 이단시하며 철저히 배척하고 잔인하게 탄압하였다. 그리스도교 발생 지역과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지역들의 이슬람에 의한 이슬람화와 이슬람과 기독교의 유사성이 십자군 전쟁 때 그리스도교로 하여금 이슬람에 대한 태도를 더욱 강경하게 만들었다. 이런 두 종교의 타종교에 대한 태도는 십자군 전쟁에서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그대로 드러났으며, 상대방을 인정하는 이슬람이 훨씬 자비롭고 융통성이 있어 보였고, 그리스도교는 무지하고 편협하며 잔인하게 보였다.

십자군은 비록 교황의 호소에 의하여 결성되었으나, 일인 지휘 체제가 아닌 다양한 집단의 여러 연합 세력이 뭉쳐 움직였으며, 그것은 여러 정치적, 경제적 욕망을 가지고 움직이는 집단이었기에 본래 십자군의 이상과는 다른 면을 많이 보였으며, 결국에는 지중해 동부연안의 무역개발계획이 주가 되는 상황을 연출하였다.

 

이슬람 세계가 보는 십자군 전쟁

 

피침자인 이슬람 세계는 십자군 전쟁을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교 성지 탈환 운동으로 보기보다는 유럽인의 이슬람 세계 침입에 더 많은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십자군의 침입을 레반트 지역에 한정하지 않고 유럽의 전 이슬람 세계에 대한 지속적인 침입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근세 유럽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모든 침입도 십자군 활동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슬람 세계에 대한 외부 세력의 모든 침입은 십자군 운동이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대다수의 이슬람교도들은 중세 유럽이 성지 탈환을 위하여 이슬람 세계 동쪽의 레반트 지역과 이집트를 침입한 전쟁부터 국토회복을 위하여 서쪽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으킨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전쟁까지를 십자군 전쟁으로 본다.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교 성지 탈환 운동과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를 제외하고는 16세기까지 이슬람 세계는 유럽에 대하여 공세적 입장에 있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세상을 이슬람교도가 지배하는 다르 알-이슬람(Dar al-Islam)과 이슬람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이슬람화 시켜야 할 다르 알-하르브(Dar al-Harb)로 구분하여, 다르 알-하르브를 다르 알-이슬람으로 바꾸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우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에는 전투적인 방법만이 아니라 평화적인 선교, 상거래, 외교 등의 모든 방법이 포함되나, 유럽과는 전투적인 방법인 지하드를 통해서 주로 이루어졌고, 이로 인하여 유럽은 그들의 생존을 몇 차례 위협 받기도 하였다.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이 절대 옳은 정의로 생각하면서 일단 다르 알-하르브 지역이 다르 알-이슬람 지역으로 바뀌면, 그 땅은 자신들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그 이후에 다른 종교가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은 침입으로 간주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에서 그리스도교도들에 의하여 수행된 레콩키스타는 그들에게는 침입이었지 재탈환이 아니었다. 사실상 이슬람은 그리스도교 지역을 이슬람화하면서 성장하였으나, 과거의 역사는 그들에게는 상관이 없고, 현재 자신들의 땅이 된 곳은 이슬람의 땅이라고 믿었다.

유럽 사가(史家)들은 십자군 운동이 정치, 경제, 종교적 갈등 등 복합적 요인에 의해서 발생하였다고 보는 반면, 이슬람 사가들은 종교적 갈등 때문에 일어났다고 본다. 이슬람교도들은 십자군 운동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사이의 분쟁에서 이슬람의 확산에 대한 그리스도교도의 최초의 반격이며 침략이라고 생각하였고, 이 침략에 대하여 지하드로 물리쳐 나가려고 하였다. 그들은 성전 개념인 지하드가 이슬람의 세계적 성격과 연결되어 있어, 세계 어디에서든 이슬람이 위협을 받으면 지하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하드는 이슬람교도이면 누구나 참여해야 하기에, 이슬람 지도자의 지휘가 없이도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려는 성격이 강하다. 지하드는 이슬람의 방어와 확산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데 반하여, 십자군은 교황의 호소에 호응하여 종교적이고 집단적으로 움직였으며, 또한 자신의 죄 사함을 믿고 움직였다. 지하드가 영구적인 성격을 가졌음에 비하여 십자군은 특별한 사건 때문에 발생하였다.

11세기 말 이슬람 제국의 확장이 멈추면서 ‘지하드’ 이상은 영향력을 잃었고, 투르크멘족의 소아시아와 이슬람 세계의 동쪽 변방 지대에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었다. 그러나 십자군의 침입이 레반트를 향하면서, 12세기 중엽부터 이슬람교도들이 이들의 침입을 물리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그들의 반격을 조직화하면서 지하드 사상은 다시 영향력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이슬람 지배자들의 정책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들의 지하드 사상은 이슬람 세계를 방어할 뿐 만 아니라, 이교도들이 이슬람의 계율을 인정할 때까지 싸우면서 이슬람 세계를 확장하려는 공격적 개념이었기에, 그리스도교와 싸우는 이슬람 지배자에게는 필요하고도 유용한 정신적 무기였다. 하지만 이슬람의 공격적인 지하드 개념과 그리스도교의 방어적인 성전의 개념에 반하여 실제로 일어나는 상황은 정반대였다. 중세의 이슬람 사회는 서유럽 사회보다 훨씬 덜 폐쇄적이었으며, 타종교에 대하여 관대하였다. 이유는 이슬람은 그리스도교, 유대교가 발생한 땅에서 선행의 두 종교를 바탕으로 발생하였기에 그리스도교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유대교도와 그리스도교도가 이슬람의 우위를 인정하면, 그들의 종교 행위를 탄압할 수 없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이슬람이 그리스도교의 발생지역과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지역을 이슬람화 시켰다는 것과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유사성은 십자군 전쟁 때 그리스도교가 이슬람에 대하여 더욱 강경하게 만들었다. 이런 두 종교의 타종교에 대한 태도의 차이는 십자군 전쟁에서 상대방에 대한 태도에서 그대로 드러났으며, 상대방을 인정하는 이슬람이 훨씬 자비롭고 융통성이 있는 것으로 보였고, 그리스도교는 무지하고 편협하며 잔인한 것으로 보였다. 이런 이유로 독실한 이슬람교도 군주였던 살라흐 알딘 알아유비(살라딘)는 그 신앙에 따라 행동하면서 자비로운 군주로 비추어지게 되었다. 이슬람은 지하드의 원리에 따라 개인적으로 지하드에 가담하기는 하나, 이스람군은 토착 이슬람 지배 세력에 의하여 지휘를 받으면서 지하드의 원리에 따라 약탈이 통제되었고, 이슬람의 전파를 위한 범위 안에서 그리고 이슬람 지배에 저항하는 다른 종교의 예배 물품들만 파괴할 수 있다는 제한 속에서 움직여 나갔다. 독실한 이슬람 수니 신앙을 고수하던 아유브 왕조(1169~1260년)의 군주들은 이 원칙을 지키려 하여, 적에게 자비를 베풀어 포로들에게 물과 음식을 제공하고, 제시하는 조건이 충족되는 포로는 석방하였으며, 이슬람 지배 체제를 인정하면 그들의 안전을 지켜주었다. 그러나 유목민의 전통을 가진 맘루크 왕조(1250~1517년)의 군주들은 지하드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고 잘 지키려고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스도교도들의 십자군 운동은 성지탈환이라는 원상회복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성전도 다소 방어적이며 일시적 의미를 지녔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십자군 운동이 침입의 상징이랄 수 있는 약탈, 파괴 등의 의미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유는 그들은 이교도의 존재를 원칙적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그 지배 영역 내에 있도록 인정한 이교도들에게도 끊임없는 핍박을 가했고, 끝까지 그 지역의 국외자로 남아 주변 지역에 끊임없는 싸움을 일으켰다. 또한 그들은 그들의 영토를 통과하는 대상들에게 거의 약탈 수준에 가까운 과세를 하거나 그들의 상품을 약탈하거나 하였다.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이슬람들은 그리스도교도들이 지배하는 지역 내에서 안정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며 빈곤화되었다. 원래 중동의 이슬람 세계는 침입자가 외국인이라고 하여도,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제도를 인정하면, 그들의 권한 행사와 지위에 있어서 어떤 차이를 느끼지 않는 사회였다. 이러한 경우가 십자군과 싸운 터키족에 해당된다. 그들은 중동에서 이방인이었으나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중동의 제도를 인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중동의 아랍 주민들에게 그들의 지배권을 행사하는 데에 아랍 지배자들과 어떤 차이를 느낄 필요가 없었다. 이에 반하여 십자군은 그들의 종교와 그들에 의해 자행된 침입을 상징하는 약탈, 방화, 파괴 등으로 인하여 이슬람들에게 침입자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었고, 그들에게 십자군은 침입자를 상징하는 의미가 되었다.

 

이슬람 사가들은 이슬람 세계의 확산에 대한 그리스도교도의 최초의 반격은 제 1차 십자군 운동(1096~1099년) 때부터가 시작이 아니고, 스페인의 톨레도시(市)를 1089년에 그리스도교도가 함락시킬 때부터라고 본다. 그리스도교 세계가 이슬람 세계를 반격함은 서쪽에서 스페인의 레콩키스타의 노력과 동쪽에서 예루살렘의 점령으로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후에 십자군 운동은 의식적으로 스페인으로 향하여 1147년에 리스본이 탈환되었다. 그러나 양 전선에서 거둔 전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스페인에서는 그리스도교측이 성공하여 이슬람을 밀어냈으나, 동쪽에서의 성공은 잠정적이었으며, 1291년에 아콘(아카)에 있던 십자군 기지가 이슬람교도들에게 함락되면서 무효화되었다.

 

스페인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이슬람 세계의 침입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응전한 면이 있었고, 레반트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종교적 열정에 의하여 이슬람 세계로 쳐들어간 면이 있었다. 이슬람 세계는 십자군의 잔인함, 무질서, 무지에 분노하기는 하였으나, 십자군이 침입한 레반트 지방과 이집트 등을 빼놓고는, 이 십자군 운동을 이슬람 세계의 변방에서 일어난 이교도의 침입 정도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에는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십자군 운동의 결과 지중해를 통한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교역은 증대되었으나, 이슬람교도 치하의 소수 집단의 비이슬람교도의 처지는 영구적으로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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