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교부, 박해, 이단, 분열

열려라 에바다 2022. 11. 18. 11:06

교부, 박해, 이단, 분열

 

1. 교부

 

교부는 헬라어로 “아버지”라는 뜻을 가졌는데, 2세기 이래로 “교부”라는 명칭이 교회 지도자들에게 붙여졌다. 특별히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에서 신앙의 수호하고, 가르침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거룩한 아버지”라고 불렀다. 비켄티우스는 “각자가 처한 시대와 장소에서 보편교회에 속한 신자들과 계속 교제하며 그들과 신앙적인 일치를 지속적으로 이루고, 바른 스승이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을 교부로 지칭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면에서 교부들은 경건하고 올바른 신앙을 가진 초대교회의 교사, 신학자,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교부들은 사도 시대 이후에 사도들의 가르침을 계승하면서, 초대교회의 신앙의 연속성과 일치를 수호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초대교회 당시 신앙의 문제나 갈등이 생기면 확실하게 세울 수 있는 증인, 스승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가르침이 절대 진리인 것은 아니고, 그들의 가르침이 오직 성경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신앙의 규범과 일치할 때만 그들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었다.

 

 

교부의 기준

 

1. 교리의 정통성 : 교부들은 항상 바른 신학을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한다. 물론 교부들이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오류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통 교리 형성에 기여한 사람들을 교부라고 불렀다.

2. 고대성 : 초대교회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이어야 한다. 사도들이 죽은 뒤 1세기 말 ~ 6세기 말까지 활동했던 교회 지도자들을 지칭한다. (예외 -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8세기 인물)

3. 삶의 거룩성 : 그들의 삶은 경건하고, 지도자로서의 품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4. 교회의 승인 : 교회사 속에서 교부로서의 권위를 자연스럽게 받은 자들이어야 한다.

 

 

교부의 분류 : 속사도 / 변증가들 / 니케아 공의회(325) 이전 교부들 / 니케아 공의회(325) 이후 교부들

 

 

1. 속사도 교부

 

이들은 사도들과 교분을 가지거나, 혹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거나, 혹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계승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고난과 핍박의 시대 가운데 교회가 흩어지거나 무너지지 않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반대로 심오한 글을 쓴다든가,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화시키는 작업은 하지 않았다. 그들의 글을 보면 고난에 찬 성도들을 위로하고, 믿음을 잃지 않도록 격려하고, 천상을 기대하는 삶을 살도록 격려한다. 이런 이해에서 보면 속사도 교부들은 교회의 위로자, 상담자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 인물 : 로마의 클레멘트(빌4:3),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서머나의 폴리캅

 

 

이그나티우스 : 그의 이름 뜻은 “불같이 뜨거운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별명은 “하나님을 모시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의 신앙이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데, 다만 전설에 막9:36-37에 나오는 “어린아이”가 바로 이그나티우스라고 한다. 이그나티우스는 사도 요한, 바울, 베드로에게 배운 사람으로서, 69년 소아시아 안디옥의 감독으로 활동했다. 트라얀 황제 시대 때(대략 108년), 안디옥에서 로마로 압송되어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중심에는 세 가지 관심사가 있었다. 첫 번째 관심사는, 교회들이 각자가 속한 감독의 권위 아래서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이그나티우스는 교회는 감독을 통해 일치를 이룬다고 보았다. 또한 감독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였다. 그는 핍박의 시대에 교회가 흔들리지 않도록 감독에게 많은 권위를 부여했다. 그에게 있어서 감독은 교회에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직분이기 때문에 감독 없이 모이는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일 수가 없었다.

 

 

두 번째 관심사는 거짓된 가르침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그가 염두에 둔 것은 가현설 신봉자와 유대주의자였다. 가현설이란 예수님은 완전한 신이고 단지 인간으로 보인 것뿐이라는 주장이다. 즉, 예수님의 인성(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으로, 영지주의 이단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는 “하나님의 피”를 담대히 말하곤 했다. 만약 하나님인 그리스도가 진실로 우리의 인성을 입지 않았다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그나티우스가 자신의 순교를 받아들인 유일한 동기도 그리스도가 실제로 성육신하셨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또한 그는 유대주의를 경계하였는데, 이들은 서신서에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기독교 율법주의,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이 구약성경의 본질을 오해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만약 계속해서 유대주의를 따라 산다면, 이는 우리가 은혜를 받지 않은 자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가장 경건한 선지자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유대주의자들의 잘못은 구약시대 신자 자체가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데 있다.”라고 말하였다.

세 번째 관심사는 자신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그는 안디옥에서 로마로 압송되면서 7통의 편지를 썼는데, 그가 서머나에서 로마교회로 쓴 편지를 보면,

 

 

“내가 단지 기독교 신자라고 불릴 뿐만 아니라, 신자답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내 사랑이신 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썩을 양심을 탐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맛보길 원합니다. 또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그의 보혈을 마시기를 원합니다. 나는 고난당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할 것이며, 그와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떡으로 바쳐질 수 있도록, 맹수들의 이빨에 의해 제분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밀입니다.”

라고 하면서 구명운동을 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폴리캅(69-156) : 폴리캅은 2세기 중반 로마제국 내 아시아 지역에서 봉사한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사도적인 교회와 직접 관계를 가졌던 마지막 교회지도자였다. 그는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오래 봉사했는데, 당시에 일어난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86세의 고령의 나이에 로마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에도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기도하며, 체포하러 온 자들을 손님처럼 영접하고 음식을 대접하며 1시간 기도할 여유를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성난 무리로 가득한 투기장에 끌려온 고령의 그를 총독은 존경하는 모습으로 가능하면 비극적인 결과를 피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제물만 드리면 살려주려고 했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를 놓아주리라”라고 말하는 총독에게 그는 “80년 동안 내가 그를 섬겨왔는데 그는 내게 어떤 해도 입힌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어떻게 모독할 수 있습니까?”라고 답하였다. 총독이 화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하자 폴리캅은 “당신이 붙이는 불은 한 시간 동안 타고 꺼질 것이나, 앞으로 올 심판의 불은 영원히 타게 될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폴리캅은 산 채로 화형을 당했고, 이 소식이 로마 제국 전역의 교회에 전해졌다. 이후 계속된 박해에서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서만 감독 폴리캅의 신실한 증거에 큰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2. 변증가들

 

초대교회 당시 유대교도 로마 제국도 기독교를 이단으로 박해했고, 지식인들도 비판했다. 이런 유대교와 이방 지식인들의 이론적인 공격으로부터 기독교를 변증한 사람들이 변증가들이다. 이들은 2세기 초~ 3세기 초까지 활동했다. 기독교 진리를 설명하고, 기독교가 이교보다 탁월함을 변증했다.

이들은 이방지식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기독교를 알기 쉽게 증거하려고 철학의 옷을 입혀서 소개했다. 당시 그리스 철학이 로마의 정신을 지배했는데, 그래서 그리스 철학의 옷을 입혀서 기독교를 소개했다. 그러나 이것이 헬라화된 기독교, 변질된 기독교를 만드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 : 유스틴, 아데나고라스, 아리스티테스 등

 

 

유스틴 : 사마리아(고대 세겜)에서 살았던 유스틴은 젊어서부터 철학에 심취하였고, 철학을 통해 하나님을 보기를 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스틴은 가이사랴에서 한 노인을 만났는데, 이 노인의 위엄 있는 모습과 겸손에 큰 감명을 받았다. 노인은 선지서를 인용하여 기독교가 참 진리임을 설명하고, 복음을 전파했다.

또 에베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저들의 믿음이야말로 가장 참되고 고상한 철학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이후 그는 30여년 동안 여행과 전도와 저술을 통하여 초대 교회 신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특별히 철학자의 외투를 입고 로마 제국 전역을 다니면서 이방 지식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의 대표작인 “변증”은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기독교 진리를 이해하기를 바라면서 쓴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주된 논박은 이것이다. 첫째 흔히 사람들이 우기는 것과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가 아니다(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부도덕하지 않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반란을 선동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이성에 호소해서 기독교를 소개, 변호, 증거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가장 분별 있는 것이기에 기독교 신앙을 배제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기독교 가르침과 헬라 철학 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내고, 기독교가 바른 종교임을 드러내려고 했다. 그는 사도적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었지만, 지나친 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기독교를 그리스 철학화시킨 아쉬운 점도 있었다(소크라테스도 바른 정신, 참된 것을 추구했으면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말했으며 존경받는 철학자들은 기독교에서 최상의 개념을 몰래 차용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유명한 저작인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에서는 유스틴이 철저한 삼위일체주의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을 구별된 세 위격으로 본다. 또한 그는 구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를 많이 찾았으며, 구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해석하였다. 로마에서 돌아온 유스틴은 로마 관리들에게 밀고를 당해 165년에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된다. 그리하여 “순교자 저스틴”으로 불리기도 한다.

 

 

3. 니케아 공의회 이전 교부들.

이들은 이단들에게 대항하면서, 기독교의 교리적 체계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대표적 인물 : 이레네우스, 오리겐, 키프리안, 터툴리안 등

 

 

이레니우스(130-200) : 이레니우스는 서머나 출신으로 서머나 감독 폴리캅의 제자로서, 소아시아에서 로마로, 다시 프랑스 리옹 지역으로 옮겨 거기서 사제로 봉사하다가 감독이 되었다. 사도 요한이 적그리스도라고 정죄한 영지주의를 신학적으로 분석 비판하고 사도적인 교리를 파수하였다. 그는 당시에 퍼지고 있던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영지주의 이단의 실체를 드러내고 경고하기 위해 “이단에 대한 배격”이라는 책을 썼다.

이레니우스는 하나님께서 만약 육체를 멸시해서 성육신하기를 거부하셨다면 구원은 있을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책에서 예수님이 단순히 참 사람인 체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육체가 되셨음을 논증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왜 육신을 취한단 말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총괄갱신 이론을 설명한다. 이 개념은 그리스도가 처음 아담에게서 비롯된 타락을 없애는 두 번째 아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타락에서 에덴동산으로의 회복 정도가 아니라 완전으로 나아가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류가 성숙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소망은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의 영원한 교제 안에서 양자된 자로 성부의 사랑을 받아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과 함께 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에 참여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인간은 본래 창조된 목적에 이른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에 포함되는 창조의 웅대한 계획이다.

 

 

이러한 창조와 계시와 구속의 하나님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동일한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는 신구약의 단절을 주장한 말시온 이단에 대항하여 한 분 하나님과 신구약의 통일성을 주장했다.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웅대한 계획의 핵심 열쇠는 바로 성육신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 자신과 같이 되게 하려고 그의 초월적인 사랑으로 우리와 같이 되셨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단순히 하나님의 신현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덧입게 하기 위해,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일이라는 것이다(삼위일체론).

 

 

터툴리안(160-220) : 그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이후 로마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43세의 나이(195년 경)에 기독교인들이 순교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극심한 고통의 상황을 기독교인들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신앙을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고, 개종하게 된다.

터툴리안은 하나님은 하나의 본질을 가지고, 삼위로 계신다는 삼위일체(Trinity)라는 신학용어를 처음으로 고안해낸 인물이기도 하다. 성자께서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지만, 구별된 위격을 가지신다고 하면서, 성부, 성자, 성령의 각 위격성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은 이후 공의회나 후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터툴리안은 단순하고 강직한 성격을 가진 금욕주의자였다. 그가 기독교에 매력을 가진 것도 기독교인들의 엄격한 윤리생활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후 그는 이단인 몬타누스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에 그는 기독교인들의 윤리생활이 점점 해이해져가고, 교회생활이 형식화되어가는 것을 보고서 몬타누스파에 가입하게 되었다.

유스틴은 철학적 옷을 입혀서 복음을 전했는데, 터툴리안은 철학과 복음을 완전히 대조시켰다. 그래서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또한 신자들에게 박해를 피하려하지 말라고 권고하며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오리겐(185-284?) : 초기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과 무식한 자들의 종교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철학자들에게 복음은 너무나 단순하고 얕은 지식으로 보였다(고전1:26). 그런데 3세기 교회에 탁월한 그리스도인 학자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이었다. 그는 185년 경건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그의 아버지가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로 투옥됐는데, 그는 아버지에게 “가족들 때문에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후 그는 기독교 교리학교의 교사로 18세에 일하게 되었고, 밤낮 연구와 기도로 보내며, 고행과 금욕적 생활을 하였다. 그는 성경을 6개의 언어로 번역하고, 주해한 “헥사플라”라는 책을 내기도 했으며, “첫째 원리”라고 하는 기독교 교의학 서적을 내기도 했다. 또한 그는 “풍유적 해석(알레고리)”로 유명한데, 이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 때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후유증으로 생을 마치게 되었다. 오리겐은 동,서방 교회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키프리안(200-258) : 키프리안은 카르타고의 부유한 이방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246년에 회심을 하고, 248년에 카르타고의 감독이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감독이 된 것은 이미 그가 성경과 터툴리안의 저서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학적 논쟁보다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데시우스 황제 때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고 배교했는데, 박해 이후에 교회로 돌아온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문제로 교회에 갈등이 일어났다. 키프리안은 공회를 소집하고, 엄한 권징(일정기간 참회-회중 앞에 베옷을 입고 나타남-감독의 사죄선언)을 받은 후 이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가지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세력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키프리안은 “교회이 일치에 관하여”라는 책을 쓰게 된다. 키프리안은 박해 후 분열되는 교회 현실을 보고 교회는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또한 “교회에만 구원이 있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하며 “교회를 어머니로 갖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은 후대의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줄곧 인용되었다.

또한 키프리안은 감독의 권위를 강조했다. 공인된 감독을 중심으로 교회의 하나됨을 바랬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감독들이 베드로의 계승자이며, 로마의 감독이 베드로와 관련이 있다하여 특별하게 보았다. 이러한 사상이 교권 체제와 교황 정치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키프리안은 미사를 그리스도의 몸의 희생제물이라고 보면서 미사를 집행하는 사제의 권위를 높이고, 로마교회의 화체교리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는 발레리안 황제 때 유배를 갔다가 돌아와서 바로 사형선고를 받고, 258년 9월 14일에 순교하게 된다.

 


2.  박해시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신약 교회가 시작되었는데, 그 첫 번째는 예루살렘 교회였다. 이어 유대, 사마리아, 로마 전역으로 복음이 확산되고 교회가 성장했다. 그러면서 교회는 내, 외적인 여러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것은 내적으로 이단들의 등장, 외적으로 로마 제국의 박해였다.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부터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될 때까지 교회는 250년 동안 길고 모진 박해를 받게 되었다. 터툴리안은 이런 말을 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초대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서 세워지고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성장 속에는 모진 박해가 있었고, 그 속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왜 박해가 일어났는가?

 

 

1. 정치적인 원인

(1) 기독교 복음의 너무 빠른 확산. 교회가 박해 속에서도 로마 제국 전역으로 복음이 아주 급속하게 퍼졌다(하나님의 섭리적 도구들 : 제국 전역을 잇는 도로들, 헬라어 문화권). 이렇게 급속하게 퍼지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지배자들을 두렵게 하였다. 기독교 자체가 국가에 항거하는 정치 단체는 아니었지만, 비밀 장소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대해 로마 제국은 의심을 품었다. 비밀 장소가 제국 전역에 생겨나니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2) 로마 제국의 국가지상주의. 기독교는 어떤 형식의 우상숭배를 부인했다. 그런데 제국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기를 강요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종교의 신을 섬기고 따르기를 원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따르기를 거부했다. 기독교인들의 황제숭배 거부가 국가 체제에 대한 거부로 여겨졌다. (막1:1, 일제 신사참배는 국가에 대한 거부로 여겨졌다.)

 

 

2. 종교적인 원인

(1) 배타성. 로마 종교는 우상숭배와 연결되고, 로마제국의 축제와 문화가 미신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참여하지 않았고, 공공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거룩한 삶이 그들을 자극하였다(직업적 규제, 거룩한 행실로 세례 받음).

(2) 미신사상. 로마인들은 천재지변을 기독교인들에게 항상 돌렸다. 로마제국의 신들을 미혹하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천재지변, 기근들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며, 무신론자들인 기독교인들을 없애버리라고 하였다.

 

 

3. 사회, 문화적 원인

(1) 로마의 계급주의 사회. 기독교인들은 노예를 형제로 대했다(오네시모의 경우). 노예를 물건으로 대하는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은 사회체제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독교인들의 독특한 인간이해, 사회에 대한 인식이 로마인들을 분노하게 했다.

(2) 기독교인들의 생활태도에 대한 오해. 기독교인들은 은밀한 장소에서 몰래 예배하고, 교제했다. 그러니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의 모임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예배 드릴 때 난잡한 행위를 한다고 오해하고, 성찬을 사람의 피와 살을 먹는 식인행위로, 심지어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것으로 오해했다. 또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도 문란한 생활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로마의 사회체제(노예제), 문화(미신적 축제,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그들의 기독교에 대한 오해(예배, 성찬)와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정치적 도구화가 교회를 핍박하게 만드는 주된 요인이었다.

 

 

박해 시기

 

64-249년 : 박해가 지엽적이고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249-313년 : 데시우스 황제 때부터 60여 년 동안은 전국적인 박해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기독교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버리려고 함. 이 두 번째 시기에는 기독교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위협이 되는 종교라는 인식이 생겨서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이것은 로마 제국이 쇠퇴하는 것과 맞물려 있었다. 로마인들이 숭배하는 신들이 기독교인들 때문에 내린 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황제들은 자기들의 통치 부재, 리더십의 한계를 기독교인들에게 전가시켰다.

 

 

박해와 관련하여 유세비우스라는 교회사가는 이런 말을 하였다.

 

 

“그들은 날카로운 칼로 기독교인들의 손가락을 난도질했고, 쇠를 녹인 물을 그들의 머리와 하체에 부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산 채로 창자를 뽑히기도 했다. 고문이 얼마나 잔혹하고 괴기한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었다.

재판관들은 더 이상 고문할 방법이 없자 마구잡이로 기독교인들의 눈을 뽑고 사지를 잘랐다.”

 

 

로마 제국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기독교인들에게 고통을 가했다. 그래서 이후 박해가 끝난 뒤 교회로 돌아온 성도들은 거의 다 장애인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로마제국의 박해를 보면, 로마 제국의 날카로운 칼 앞에 아무런 힘도 없는 기독교인들이 무기력하게, 무참하게 쓰러진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런 박해는 결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었다. 박해는 영적인 권세에 대한 싸움이었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것은 칼을 휘둘러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로마 제국은 아주 쉽게 칼과 무력으로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면 기독교가 박멸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아무런 저항 없이 때리면 맞고, 찌르면 찔리고, 죽이면 죽었다. 이런 기독교인들이 결국 무쇠로 만든 칼을 이겨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박해 기간에도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적 통치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 교회는 참된 생명의 종교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그런 과정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가종교로 받아지게 된 것이다.

 

 

박해의 내용

많은 기록들, 사건들을 생각할 수 있지만, 교회사가들은 기독교 박해와 관련해서 10대 박해를 생각할 수 있다. 250년 동안 10대 박해가 일어났다. 네로, 도미티안, 트라얀, 하드리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명상록-5현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막시미누스, 데시우스, 발레리안, 디오크레티안 황제.

10대 박해를 언급한 사람은 4세기 제롬(히에로니무스)이었다. 380년의 연대기 책에서 10대 박해 기록을 남겼다. 이때로부터 일반적으로 초대교회 박해를 10대 박해로 다룬다. 그중 대표적으로 박해를 살펴보자면,

 

 

네로 (54-68년). 이 치세기간에 64년 7월 18일 저녁에 큰 불이 로마에 일어났다. 이 불은 27일간 불이 났고, 로마시의 2/3, 14구역 중 10구역을 초토화시켰다. 이재민만 25만 명이었다. 이 불이 난 이후에 로마 시에서 소문이 돌았다. 이 불을 일부러 네로 황제가 도시를 정비하기 위해 냈다고 소문이 났다. 또 불이 났을 때 황제는 궁전의 꼭대기에서 현악기를 가지고 “불타는 트로이”를 연주했다고 소문이 났다. 이런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그 누명을 기독교인들에게 씌운 것이다. 그 결과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다. 이 때 베드로, 바울이 순교하게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61-180년). 아우렐리우스는 팍스 로마나를 이끈 5현제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보원을 두고 기독교인들을 색출해냈다. 이전에는 신고하고 기독교인으로 밝혀지면 처벌했는데, 아우렐리우스는 적극적으로 정보원을 두고 조사했다. 그리고 발각이 되면 고문을 하였다. 또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마다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여 박해했다.

이 당시에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해 글을 썼던 많은 변증가들이 활동했다. 그중 한 사람인 저스틴(유스티누스)가 죽었고, 폴리캅이라는 목회자도 순교했다. 또 프랑스 남부에서도 50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데시우스 (249-251). 이전까지의 박해와 달랐다. 당시 쇠퇴기에 있었다. 그래서 데시우스는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를 강요했고,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강요했다. 이것을 칙령을 내려서 어느 누구도 빠짐없이 충성맹세를 하고, 제사를 드리도록 하였다. 이 때 기독교인들은 배교 아니면 순교 아니면 도망을 선택해야 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많은 순교자들이 나오고, 배교자들도 나왔다.

이 때 대표적인 순교자는 로마의 감독 파비안, 예루살렘 교회 감독 알렉산더, 안드리아 출신의 교부 오리겐이 순교했다. 아프리카 교회는 배교자 문제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기도 했다. 배교한 자들을 다시 받을 것인가, 받을 것인가 하는 논쟁 속에 교회가 갈라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크게 4부류로 나눠진다.

순교자, 고백자(순교할 각오로 박해자들에게 맞섬. 그러나 박해가 끝날 때까지 죽지는 않음), 도피자, 배교자. 당시에 배교를 하면 증서를 만들어줬다. 신상을 적고, 맹세문, 증인의 진술도 있었다. 이런 배교자들이 큰 문제가 되었다.

 

 

디오크레티안 (284-305). 이 사람은 유능하였는데, 어머니는 노예였다. 대단히 똑똑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 딸, 모든 종들이 기독교인이었고, 많은 신하들이 기독교인들이었다. 그가 즉위하고 19년 동안 대단히 관용적이었다. 그런데 딸이 결혼하고 사위가 왔는데, 그는 발렐리우스였다. 사위가 장인에게 와서 신으로 숭배 받을 것을 부추겼다. 그래서 디오크레티안도 자기를 신으로 숭배하게 했고, 303년, 304년에 네 차례에 걸쳐 칙령을 내렸다. 교회당을 파괴하라! 재산을 몰수하라! 기독교 서적을 불태워라! 기독교인들의 로마 시민권을 박탈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모든 교회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투옥시키고, 로마 신들에게 희생 제사를 드릴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로마 신들에게 제사 드리게 했다. 그래서 거절하면 고문하고 사형시켰다.

 

 

250년 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끝나게 되었다. 디오크레티안이 건강 악화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고, 발렐리우스가 즉위했다. 그도 처음에는 기독교를 박해했으나, 건강이 악화되고, 313년에 관용적인 칙령을 내리고,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내려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 박해시대가 끝나게 된다.

 

 

박해 시대의 성도들의 유산, 지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세주 라는 단어의 앞글자로 만든 비밀표식이다

 

1. 익투스 : 성도와 성도가 교류할 때 비밀리에 쓴 암호문이다. 헬라어로 각 단어가 의미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이것을 절반을 한 사람이 쓰면, 나머니를 다른 사람이 써서 기독교인임을 확인했다.

 

2. 카타콤 : 로마 그리스 전역에 있었던 지하 묘지였다. 이 지하묘지가 3세기 극심한 박해 때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거대한 흙산에 구멍을 뚫고, 그것이 통로로 연결되었고, 복잡한 미로를 따라 묘지, 예배당, 피난처를 형성하였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카타콤은 묘지이면서, 예배당이면서, 피난처였다. 카타콤은 교회가 가장 힘들 때, 가장 귀한 피난처가 되었다.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의미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카타콤의 모습

 

박해의 결과

 

- 긍정적인 면 :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는 성장하였다. 이것을 통해 기독교가 참된 종교라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 하드리안 황제 시대에 변증서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하드리안 황제에게). “저들은 육신을 가지고 생활하나 육신을 따라서 살지 않으며,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박해를 받고 가진 것은 없으나 풍족을 느끼며, 부끄러움을 당하나 수욕 가운데서도 영광을 받으며, 벌을 받으면서도 참된 생명에 이르는 것을 기뻐하는 자들이다.” 그 당시의 신앙인들의 태도, 정절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이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고, 로마 제국의 칼을 이기고 승리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칼이 아니라 헌신과 사랑이 이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 부정적인 면 : 순교자들이 많이 발생했다. 일반 성도들이 보기에 대단해 보인다. 그래서 존경을 넘어서 숭배의 자리에 이르렀다. 당시 이교세계에는 영웅숭배가 만연했다. 이것이 기독교 안으로 들어와 “성인숭배, 유물숭배”문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또 영웅이 사라지면 교회가 혼란해진다. 그러나 교회는 인물에 의해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다. 인물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말씀을 수종들고 섬기는 자들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집중하니깐 영웅주의가 발생하게 된다.

또 오리겐 교부는 기독교인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처럼 다른 사람을 속죄하는 효력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것은 우리가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박해 때 배교한 사람들에 대한 처리문제.

 

신앙이 약해서 배교하고 난 이들이 박해시대가 끝나고 나서 돌이키고 회개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들을 막아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면 받아들여야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거룩함이 순수함이 중요하냐? 사랑과 관용이 중요하냐? 이런 논쟁이었다. 이것이 함께 가야하는데, 박해 시대 이후 신앙의 순수성을 아주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반대 급부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교회가 갈등에 빠지게 되었고, 아주 엄격한 신앙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갔다.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사람들로 교회가 이루어진다고 본 이런 이단들을 “도나투스주의자(분파주의자들)”라고 한다.

 

 

기독교는 혹독한 박해를 잘 견뎌냈지만, 그 이후에 박해와 순교에 대한 바른 신학적 정립을 하지 않았고, 교회는 깊은 혼란의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한국 교회도 똑같이 겪었다. 신사참배 문제에 있어서 갈등을 겪었다. 박해와 순교에 대한 바른 신앙의 정립, 신앙고백의 내용을 정립하고 어떤 신앙을 계승해야할지 그것을 규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다.

박해를 견뎌낸 사람, 배교한 사람에 대한 신앙적인 정립이 없다. 순교자들에 대한 존중, 신사참배 배교자들의 문제, 회개 문제에 대해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런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이단들의 출현

 

 

- 영지주의 : 아시아의 이방 종교와 그리스도의 신화와 철학사상이 혼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영지주의는 그 종류가 다양하여 이들의 공격을 막기가 어려웠다. 이들은 초자연적인 특별한 지식, 영적 지식을 중시했다.

 

 

영지주의는 그리스 철학인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 철학에서 창조된 현실 세계는 신들의 실수로 만들어진 것이며,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어서, 죽음을 통하여 마침내 영혼이 해방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육체는 천하고, 무가치하고, 더러우며, 영혼은 맑고, 숭고하고, 좋은 것으로 여기는 이원론 사상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기독교적인 용어나 표현과 혼합이 되었다. 이 영지주의는 사도시대에 이미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고,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를 “적그리스도”라고 불렀다. 이들의 사상이 교회 안에서 그대로 들어오면서 진리의 핵심적인 부분에 심각한 공격을 가했다.

 

 

영지주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선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이었다. 또한 인간의 육신을 천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였다. 오히려 물이 관을 통과하듯 그리스도는 마리아를 통과해 지나갔다고 주장했다(가현설 - 예수라는 인간의 몸을 도구로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성육신을 부정하면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구속 사역이 부정된다. 육신의 고난, 대속의 죽음, 육체의 부활도 부정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성경도 제 마음대로 편집했다(말시온 성경). 영지주의는 결국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흔드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죄의 문제가 아니라 육신의 가졌다는 사실에 있었다. 이들에게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주시하여 육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육신을 천대하였기에 두 가지 상반된 극단으로 치우쳤는데, 한 쪽은 육신은 쓸모없고, 육신은 영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는 방종주의로 흘렀다. 또 다른 극단은 육체를 증오하면서 금욕주의로 치우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복음이 자기들의 교리와 맞지 않는 경우 허구적인 성경(위경)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이러한 영지주의 문서들이 비밀스럽게 보존되어 왔고, 정통기독교의 문서들이 오히려 가짜라고 주장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최근에 나왔던 “다빈치코드”다. 이것은 영지주의와 역사수정주의가 뒤섞여 만들어진 절묘한 신화다. 1946년에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한 농부가 베드로행전, 도마복음, 빌립복음이라는 문서를 발견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렇게 비밀스러운 영적인 지식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전해진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항해서 사도 요한은 일찍이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서 강조했었고, 모든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육체의 부활 기사가 나온다(눅24장).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육체의 부활에 대해 말한다.

 

 

- 말시온주의

 

영지주의의 한 분파다. 말시온은 반유대주의적 관점으로 성경을 보며, 구약의 하나님을 잔인하고 저급한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 최고의 하나님으로 구분해서 보았다. 또한 구약의 하나님은 무자비한 유대인들의 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었고, 신약의 하나님은 자비의 복음으로 자신을 나타내었다고 보았다. 결국 말시온은 신약과 구약, 율법과 복음,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원론적인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성육신, 그리스도의 재림, 육체의 부활을 부정했으며, 구약을 폐기하고, 신약에서도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들만 정경으로 인정했다.

교회에서 출교 당한 그는 부유한 재산으로 가난한 로마 교회 신자들의 환심을 사기도 했지만, 결국 쫓겨나게 되었고(144년), 독자적인 분파 세력을 만들게 되었다.

 

 

- 몬타누스주의

 

몬타누스는 이방 종교의 제사장으로 있다가 개종하여 목사가 되었고, 절제와 금욕, 도덕 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는 주의 재림의 날을 계시로 받았다면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였다(다미선교회와 같은). 심각한 문제는 보혜사 성령이 자기에게 나타나 새로운 계시를 준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막시밀라와 프리스킬라와 함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하고, 무아경의 경지에 이르며, 새로운 계시 운동을 펼쳤다.

 

 

이외에도 사벨리우스주의(양태론)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에 세 위격으로 계실 수 없고, 한 분이신 하나님이 단지 어떤 때는 성부로, 어떤 때는 성자로, 어떤 때는 성령으로 세 가지 양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성부, 성자, 성령은 우리가 보기에 구별되지만, 실제로는 단일한 하나님밖에 없는 것이 된다(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 성부와 성자의 대화, 사랑, 성령을 보내심의 문제. 하나님 아버지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또 아리우스주의가 있다. 이 이단은 참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밖에 없으며, 성자는 피조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즉,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으며, 창조된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성자는 99% 하나님일지라도 성부와 동등한 하나님은 아니시다. 참 하나님이 아닌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되실 수 없다는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이 이단 사상은 교회에 매우 해를 끼쳤으며, 니케아 공의회가 열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후 아타나시우스와 어거스틴에 의해 정리가 된다.

 

 

특별히 말시온주의와 몬타누스주의의 경우, 성경 목록을 편집하고, 제 마음대로 정했다는 문제가 있었다. 말시온은 성경을 축소했고, 몬타누스주의는 성경을 확대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정경 채택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 때까지는 각 성경이 따로 읽혀지고 있었는데, 하나로 모아 통일된 신약성경 목록을 만들게 된다. 알려진 최초의 신약 목록은 무라토리안 정경이다. 이것은 3세기가 되면서 지금의 목록과 거의 비슷한 목록이 되었다.

그렇다면 정경이 채택되는 근거는 무엇인가? 누가 무슨 권위로 정경을 채택하는가?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성경의 목록을 인간이 결정하고 채택한다면 결국 성경보다 인간, 교회의 권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 정경 : 영어로 캐논(canon)이라고 불리는 정경은 기준, 규칙, 목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갈6:16, 고후10:13,15,16). 교회가 일련의 책들을 표준, 규범으로 격상시킨 것이 아니라, 이 책들을 신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정경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권위를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교회는 신적 권위를 가진 책들을 사후에 인지하고 고백하고, 그 책들을 정경으로 수납했다. 이 정경은 교회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완성된 단위로서의 성경 전체다.

 

 

(1) 사도성 : 사도 저작의 원리. 이것은 광의로 해석해서 사도적인 사람들까지 포함시켜 이해했다(터툴리안, 파피아스, 저스틴, 이레네우스). 형식적인 사도성보다 사도의 ‘신뢰성’, 그 책의 ‘정확성’이 더 중요했다.

(2) 신앙의 규칙 : 아직 정형화되지 않고 구두 전승으로 내려오고 있던 신앙고백이다. 이것은 사도들의 복음 전파와 고대 교회의 세례 의식을 통하여 형성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신앙고백으로 정형화되었다.

(3) 성경의 자증 : 성경은 사람들이 인정하기 이전에 벌써 정경으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신적 권위를 성경의 ‘자증’이라고 한다.

(4) 성령의 내적 증거 : 신자의 마음속에 성령이 역사하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고백하게 된다.

 

 

우리가 가진 신약 목록은 397년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만들어졌고, 397년에 공식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 때 덜컥 성경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이미 300년 이상 공적으로 읽히고 인정되던 책들이었다.

 

 

이러한 이단들을 대처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사도신경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역사는 초대교회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만들어진 연대나 저자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고대에는 사도신경이 예수님 승천 후 10일 뒤 사도들에게 한 구절씩 성령의 영감으로 전해주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전설에 불과하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직접 만들었다기보다 사도적 신앙을 잘 요약하는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신경은 초기 로마 교회에서 새신자가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배우고 고백하는 증표에서 기원한다고 본다. 사도신경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판별”하는데 사용됐다. 특히 이단들이 난무하고, 교회가 체계적인 조직 없이 지역적으로 흩어져 있는 가운데, 이단과 정통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통일된 교리와 고백이 없었다. 그래서 잘못된 사상을 방어하기 위해 공동으로 고백할 신앙의 내용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필요로 의해 사도신경이 형성되었다.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이 있기 전에 이미 신앙의 규칙과 여러 교부들이 사용한 신앙 고백문들이 있었다. 사도신경은 이런 것들을 포괄한 보편적인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신경은 방대한 성경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한 것이기도 하고, 성경 전체를 해석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신앙고백은 이단들에 대항하여 진리를 수호하고, 흩어져 있는 교회들의 일치를 도모하고, 후대에 바른 신앙을 계승하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교회를 내적으로 튼튼히 하고, 외적으로 방어하는 최고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일찍부터 성경과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대의 변천에 따라 교회는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여러 신앙고백을 작성하여, 성경의 진리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4,제국교회사

 

 

콘스탄티누스

313년을 기점으로 이때부터 Christendom이 시작된다. 이 개념은 한 나라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이 있는 나라에서 교회와 정치가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주요인물이 바로 콘스탄티누스이다. 그는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다.

 

 

305년에 디오크레티안 황제가 물러나고, 제국은 동,서로 나눠서 통치되었다. 제국 동방의 황제 갈레리우스는 311년에 기독교를 공인했다. 제국 서방에서는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패권을 두고 싸웠는데, 이때 열세였던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제국의 서방의 황제가 되었다고 한다(312년). 그 후 313년 밀라노 칙령을 만들게 되는데 그 때 기독교는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받게 되었고, 황제는 기독교에 대한 핍박을 금할 것을 명한다. 그리고 사실상 기독교 평화시대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기독교의 양적 성장과 번성이 시작되었다.

 

 

이 후 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되고, 일요일을 쉬는 날로 법 제정을 했다. 성직자들에게는 병역 면제, 세금 면제를 했다. 또 박해 때 몰수했던 재산을 반환하고, 교회가 자기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또 기독교가 국교가 아님에도 파괴된 이교도 사원을 다시 세우는 것을 금하였다.

 

 

Christendom의 장점과 단점

장점 : 교인들이 늘어남,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기반이 됨, 핍박의 시대에 할 수 없었던 것을 하게 됨(교회회의를 하고 신앙을 체계화, 조직 정비)

단점 : 신앙의 수준이 하락, 권력과 출세와 부유함을 위해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교리논쟁과 공의회

왜 공의회(The Ecumenical Council)라는 표현을 썼을까? 이전까지는 핍박시대이기 공식적일 수 없고, 모든 교회들이 전부 모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밀라노 칙령이 있었기 때문에 공의회가 가능했다. 이때로부터 300년간 교회는 기독론 논쟁, “예수는 누구인가?”을 하게 된다.

 

 

1. 니케아 공의회 : 삼위일체 논쟁, 예수님은 아버지와 동등한 하나님, 니케아 신조

 

 

- 아리우스는 318년부터 325년까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로 있었다. 그는 “성부와 성자는 본질이 서로 다르다”는 견해를 가지고 가르쳤다(터툴리안 - 한 본질, 세 위격). 그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없는 가운데서 지음을 받은 피조물에 속한다고 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들에게는 시작이 있으나 하나님에게는 시작이 없다”는 주장을 하며, 성자는 탁월한 신이지만 어떤 특정한 시점부터 존재했다(오리겐은 eternal generation)고 주장했다. 즉,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성부와 동등한 하나님이 아닌 낮은 하나님이라고 본 것이다.

 

예수님은 본질과 영원성에 있어서 완전한 신이 아니라 제2의 신, 종속된 신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이지만 영원한 신이 아니고, 완벽한 인간도 아니다, 신과 인간의 중간에 있었던 존재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소위 유사본질(homoi ousia)이라고 하는데, 반대로 아타나시우스는 동일본질(homo ousia)을 주장하였다.

 

 

이 때 콘스탄틴 황제는 교회의 분열로 인해 통일된 제국의 평화가 위협 받는다고 판단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국 감독들의 공의회를 니케아에서 소집했다. 이것이 바로 교회 역사상 첫 번째로 열린 세계적인 교회공의회(the first ecumenical Council)였다. 제국의 비용으로 약 300명의 감독들과 자문위원들이 회의에 참석했고, 황제는 명예의장이 되어 분열을 초래한 문제를 해결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교회의 분열은 영원한 영혼에 관련된 것이므로 전쟁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했다.

이 때 아리우스주의를 대표해서 온 소규모 파견단은 아주 몹쓸 대접을 받았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견해를 그들이 표명했을 때, 어떤 감독들은 귀를 막았고, 어떤 감독은 멱살잡이를 하기도 하였다.

니케아 공의회 결과로 아타나시우스의 정통 교리가 채택되었고, 공의회는 성부, 성자의 관계에 대한 교회적인 신조를 작성하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니케아신조이다. 그 결과 신조 속에 그리스도는 ‘성부로부터 나시고 지음을 받지 않으셨으며’ ‘아버지와 같은 본질에 속한다’는 진술로 성부, 성자 관계를 분명하게 했다.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와 두 감독 외에 모두 이 신조에 서명을 받았다. 이 니케아 신조는 동서방 교회 모두가 받아 사용하는 보편적인 신조이다.

 

 

- 부활절 날짜도 결정, 성탄절 날짜도 결정, 사순절 기간이 40일인 것도 결정.

 

- 평가

1. 예루살렘 공의회(주후 40년) 이후 첫 번째 공의회.

2. 교회에서 신학이라는 주제를 회의를 통해서 결정하는 첫 번째 사례.

3. 이 회의를 주도, 결정하는 것에 정치적 개입의 문제가 있었다.

4. 니케아 신조가 만들어짐 (모든 교회들이 공통으로 따르는 유일한 신조가 니케아 신조다.)

5. 니케아 신조를 사용하는 교회를 Catholic Church가 된다. (아리우스는 가톨릭이 아님)

 

 

- 아타나시우스

교회사에는 신앙을 위해 박해 받다 생명을 잃은 순교자들도 있지만,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다 무서운 수난을 겪은 투사들도 있다. 그중 아리우스 이단에 도전하고, 추방과 유배 등 갖은 수난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싸워 승리한 투사가 있으니 그가 바로 “불멸”이라는 이름 뜻을 가진 아타나시우스다. 그는 296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그곳 감독 알렉산더의 서기로 발탁되었고,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타협을 모르는 강력한 정통교리 수호자였다.

 

 

그는 아리우스 이단이 득세하자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소집됐을 때, 알렉산더 감독과 함께 참석하여 아리우스가 이단임을 밝히는데 큰 기여를 했다. 니케아 공의회 2년 후 알렉산더가 별세하고, 아타나시우스가 감독이 되었다. 그런데 이단으로 정죄 받았던 아리우스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득세하게 되었고,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정통파를 지지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아리우스를 다시 받아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신조에 서명하지 않으면 복권시킬 수 없다고 단호히 거부하다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집트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오는 밀 수입을 막고 있다는 모함, 그가 아르세니우스 감독을 살해하고 그 뼈를 마술에 사용했다는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잠적했던 아르세니우스를 찾아내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였다. 그러나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갈리아 지방에서 감금당하게 된다. 이 때 아리우스는 죽고, 그는 “이교주의 대항하여”, “성육신에 관하여”라는 위대한 저작을 쓰게 된다.

 

이후 다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 복권되지만 다시 아리우스주의자들에 의해 고소를 당하고 로마에서 7년 간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다시 복권되었지만, 아리우스주의자였던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그를 체포하고자 5천 명의 군사들을 그가 기도회를 인도하는 교회로 보냈다. 그는 혼란한 상황 가운데 수도사들의 도움으로 광야로 피신하였고, 광야 사막에 은거하면서 “아리우스주의에 대하여” “성 안토니오 전”을 집필하게 된다.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리고, 마른 웅덩이와 공동묘지에 숨어 지내기도 하였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를 없애고자 혈안이 되었지만, 도리어 이러한 공격으로 인해 아타나시우스는 광야에서 이단 사상을 배격할 무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는 평생 5번, 20년 가까운 세월을 유배생활로 보내면서도 삼위일체 신학의 정통을 지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으며, 아리우스 이단을 배척하는데 강력한 주장으로 초지일관한 신학자였다. 또한 은둔자들의 영향으로 교회의 영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까지도 정통 교회가 보편적으로 수용하는 보편 신조 가운데 하나인 ‘아타나시우스 신조’도 그가 정통 교리의 투사였음을 잘 보여준다.

 

 

이교주의에 대항하여 : 마카리우스라는 초신자에게 기독교 신앙을 소개하기 위해 집필된 책이다. 여기서 그는 형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형상은 인격적 지식과 교제를 토대로 하는데, 곧 인간 정체성의 중심에는 그리스도를 알고 교제하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몰두하도록 지음 받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등졌고, 이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성육신에 관하여 : 이 책에서 그는 태초에 천지를 지으신 동일하신 말씀이 피조물의 갱신을 성취하셨다고 주장한다. 인간을 완전히 멸망에 두지 않으시고, 말씀이 오셔서 인간을 재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재창조와 구원이 단순히 구원된 지위를 받거나 하나님의 어떤 복이 아니라 구원은 성부와 성자와의 참 교제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리우스는 이 구원을 빼앗아간 것이다. 진실로 성자는 우리로 하여금 신적 존재가 되도록 인성을 취하셨다.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 아리우스주의는 하나님이 어떠해야 하는지 철학적인 전제로 시작한다. 본질적으로 그들의 하나님은 사변적인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기원이 없는 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원이 없는 분으로 보거나, 창조자로 먼저 정의한다면 매우 추상적인 하나님이 되고 만다. 하나님은 기원이 없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시다. 우리는 아들로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로 안다. 우리는 아들을 통해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성경이 말하지 않는 다른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고, 우상숭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은 창조자이기 전에 먼저 아버지셔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리우스가 말하는 고립되고 외로운 기원되지 않은 존재가 아니라 풍성한 사랑과 생명을 가진 아버지시기에 창조 사역이 일어났고, 그로부터 모든 좋은 것들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타나시우스는 “낳는 것”과 “만들어진 것” 간의 구별을 명확히 했다. 한 주체는 오직 자신과 동일한 종류의 것만을 낳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을 낳고, 성부는 성자를 낳으신다. 반면 어떤 주체는 자신과 다른 종류의 것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도넛을 만들고,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다. 사람이 도넛을 낳을 수 없고, 하나님이 세상을 낳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사람을 만들 수 없고, 하나님도 역시 아들을 만들 수 없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과 동일 본질을 가지고 계신데, 이것은 동일한 한 하나님을 절반씩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하나님, 동일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동일본질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즉시 우리는 성부와 더불어 성자의 존재를 나타낸다.

 

 

그런데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영원한 성자를 부정함으로서 결국 성부의 존재 자체와 정체성을 부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이 이렇게 처절하게 싸우는 이유는 결국 하나님의 정체성과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위해 싸우는 것이었다.

 

 

- 안토니

사도 시대 이후 교회가 점차 제도화되고, 신앙의 열정이 식으면서 교회생활은 빠르게 세속화되었다. 특히 기독교가 공인되고, 사람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교회에 물밀 듯이 들어오면서 교회는 더욱 세속화되었다. 이 때 세상을 멀리하고 외딴 곳으로 가서 금욕생활을 하면서 수도원 생활의 길을 연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안토니였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부자청년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19:21)에 감명을 받고, 자기의 모든 토지를 부락민에게 주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하며, 매일 한 끼의 식사를 하며, 맨바닥에서 잠을 잤다.

313년 기독교 공인 이후 박해가 그치고, 제국의 보호를 받는 특권집단이 된 기독교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리하여 참된 그리스도인과 외식적인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런 교회의 속화에 실망하여 순수한 신앙생활을 원한 안토니는 묘혈 속에 들어가 살았다. 아타나시우스가 쓴 안토니의 전기를 보면 이 당시 12년 동안 안토니는 마귀에게 괴로움을 받으며 살았는데, 그 모든 시험을 다 이겼다고 한다. 이후 그는 세상으로부터 더 멀리 떠나 버려진 옛 요새에서 20년간 사람들과 멀리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러한 안토니의 경건 생활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집을 짓고 소박하게 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안토니는 그들에게 금식, 기도, 자비의 사역에 대한 상담을 하고 지도했다.

 

 

그는 은둔 생활만 한 금욕주의자만은 아니었다. 100세가 다 된 350년 경 아리우스 이단을 배격하기 위한 여행을 하기도 하고, 이로 인해 아타나시우스는 그를 존경하며, 이상적인 수도사로 그를 소개했다. 안토니는 105세에 별세했는데 혹 자신이 미신적인 숭배의 대상이 될까 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묻어달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안토니 이후, 금욕하고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수도사가 되는 전통이 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되었다. 안토니의 젊은 제자 파코미우스에 의해 수도사들의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었고, 종교개혁 시기까지 많은 수도원이 생겨났다.

 

 

 

 

5.  공의회, 분열

 

오늘날 기독교회가 믿고 고백하는 중요한 교리들은 여러 세기에 걸친 토론과 교회 공의회의 수용을 통해 전해 내려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논란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해결됐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성을 가졌다면 그의 인성은 어떤 것이며, 신성과 인성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논란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2-4번째 공의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2.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81년)

 

시리아의 감독이었던 아폴리나리우스는 니케아 신조를 따라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으면서도 그의 인성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되심(신성)과 참 사람(인성)이 되심이 어떻게 조화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의 마음은 부패하고 육신의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한 그는 로고스가 인간 예수의 마음에 들어오신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인간은 육체, 영혼,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리스도는 육체, 영혼, 로고스로 구성되어 있어서, 인간의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은 그는 하나님의 말씀도 스토아 철학의 눈으로 읽었고, 예수님은 참으로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고, 감정의 충동을 받지 않은 분이었으므로 절반만 사람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사람의 슬픔과 두려움을 다 알고 겪으신 완전하고 참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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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아폴리나리우스의 가르침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황제(370-395)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두 번째 교회 공의회를 소집했다. 황제는 아리우스파에 반대한 정통신앙의 수호자였고, 이 공의회는 아폴리나리우스의 가르침을 정죄하고, 그리스도는 참된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으로 계속 고백하였다. 나아가 공의회는 성자뿐만 아니라 성령도 동등한 신적 본질을 가졌다는 것을 확증했다. 그리하여 기독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교리를 받아들이고 고백하게 되었다.

 

 

3. 에베소 공의회(431년) (Nestorius vs Cyril)

 

이어서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가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예수님이 참 사람(인성)이심을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 신적인 나와 인간적인 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신성과 인성을 “분리”시켰다. 신인 양성은 물과 기름처럼 떨어져 있으며, 인간이 성전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인간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인간 예수만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했지,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을 당했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나누어져 있었다면 십자가 위에서 수난 당한 것은 그의 인성이었으며, 이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구주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네스토리우스의 양성 분리의 가르침으로 인해 교회 안에 논쟁이 생기고, 황제 테오도시우스2세는 431년에 에베소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반대했던 시릴을 지지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먼저 도착해서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이어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했던 안디옥 학파가 도착하여 시릴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이렇게 서로 갈등할 때 로마의 감독이었던 셀레스틴이 중재를 하고, 결국 시릴파가 200 대 43으로 이기고 네스토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제국의 동쪽으로  쫓겨나게 된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 탁본

 

 

결국 네스토리우스파는 제국 바깥으로 쫓겨나게 되었고, 이후 페르시아에서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거룩하고 보편적 사도적인 교회에 분리되어 나갔지만, 네스토리우스파는 페르시아, 시리아, 아르메니아, 인도, 몽골, 중국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들은 상당히 번성하여 중국 당나라 시기에 사원을 만들고, 오랫동안 중앙아시아에서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십자군 전쟁 시기까지 있게 된다. 그러나 이슬람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거의 소멸하다시피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앗시리아 그리스도인들로 알려진 네스토리우스의 추종자들이 있으며, 중국에서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발견되어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의 역사가 드러나기도 했다.

 

 

4. 칼케돈 공의회 (451년)

 

이렇게 아리우스, 아폴리나리우스,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삼위일체와 기독론의 진리가 보존되었지만, 문제는 계속해서 일어났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님의 인성이 “분리”된다고 주장했다면, 이번에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 원장이었던 유티케스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융합”되어 단성이 된다는 주장을 했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여 예수님의 신성이 인성을 흡수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바다에 한 방울의 포도주가 떨어지게 될 때 포도주가 큰 바닷물에 흡수되는 것처럼, 성육신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에 흡수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신인 양성론에 반대되는 “단성론”이라 한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인간성은 사라지고, 예수님은 신성만 가진 분이 되기에 우리들의 구주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유티케스의 단성론 주장은 이집트에서 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다(콥트 교회). 이에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디오스쿠르스는 데오도시우스 황제에게 요청하여 449년에 에베소에서 공의회를 열게 된다. 그러나 이 공의회는 극단적인 혼란과 싸움으로 얼룩져버렸다. 유티케스의 세력이 로마 감독 레오1세가 파송한 대표자들을 거절하고, 유티케스의 주장을 수용할 뿐 아니라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받은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까지 폐기해버렸다. 결과 레오 1세는 이 공의회를 ‘도적 공의회’라고 불렀다.

 

 

데오도시우스2세가 죽은 후 그의 누이 풀케리아가 황제가 되고, 451년에 칼케돈에서 공의회가 다시 열리게 된다. 칼케돈 공의회에는 400명 이상의 감독들이 참석하였고,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디오스쿠르스는 지난 번 공의회 때의 비행 때문에 출교를 당했다. 논란이 된 교리 문제는 로마 감독 레오 1세가 제안한 그리스도의 양성에 관한 성명서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는 혼합되지 않고, 변함이 없고, 분열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는 양성을 가지신...참된 하나님이시고 참된 사람”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로서 그리스도의 양성에 대한 칼케돈의 정의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요1:1) 사람으로(행17:31) 완전한 신인 양성을 가지신 구주라는 성경적 교리의 마무리를 짓게 된다. 당시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은 이단들과 싸우면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바로 고백하고 후대에 전해주게 되었다.

 

 

two natures(인성과 신성) in one person.(한 인격 안에 두 본성이 있다.)

but, inconfusedly, immutably, indivisibly, inseperately. (뒤섞이지 아니하고, 서로 혼동되지 않고, 분리되지 아니하고, 나뉘지 않는다.) 이것은 100대 100이다. 75대 25, 50대 50이 아니다.

 

  이단들 주장 교회 진리
신성 아리우스 예수님은 성부와 동등한 하나님이 아니다. 교회 예수님은 성부와 동등한 하나님이시다.
인성 아폴리나리우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아니다.
교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시다.
분리 네스토리우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된다 교회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되지 않는다.
융합 유티케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며 인성은 흡수된다. 교회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거나 인성이 흡수되지 않는다.

 

 

- 동서방 교회의 분열(105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의 수도를 330년 서방 로마에서 동방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후 두 도시는 700년 동안 서로 대립해왔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 교회는 생활면이나 신학 면에서 갈수록 서로 큰 차이를 보이며 멀어져 갔다.

 

 

동서 교회가 서로 충돌하게 된 중요한 원인은 신학적인 차이와 교권의 문제였다. 동방은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서방은 라틴어를 사용했다. 성찬식에서 서방은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고, 동방은 누룩 있는 빵을 사용했다. 서방의 사제들은 독신이었지만, 동방의 사제들은 결혼을 했다. 서방의 사제들은 수염을 기르지 않았지만, 동방의 사제들은 수염을 길렀다.

 

 

신학적으로도 크게 3가지 차이를 나타내었다.

 

첫째, 서방교회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강조하는 칼케돈 신조를 고수한 반면, 동방교회는 차츰 그리스도의 신성만 강조하는 단성론 쪽으로 기울었다.

 

 

둘째, 성상에 대한 논쟁이었다. 처음에는 성상에 대한 차이가 없었으나, 점차 차이가 생겨났다. 동방의 황제 레오 3세는 성상 제거에 대한 칙령을 726년에 발표하고, 병사들이 교회당과 수도원에 있는 성상들을 강제로 철거하거나 파괴했다. 황제는 성상이 2계명에 위반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에 대해 로마 감독 그레고리우스 2세는 레오 3세의 성상 제거 행위를 정죄하고, 그에 동조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파문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열리고, 양측 모두 성상을 예배하지 않고, 경외하는 것이 옳다고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서방 교회는 이후 성상을 숭배하게 되고, 동방교회도 성상과 성화에 대해 신비적인 경험을 강조하게 되었다(동방 교회의 신비적 예전, 신격화)

 

 

셋째, 성자와 성령의 관계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니케아 신조는 원래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서방에서 샤를마뉴 대제 때에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필리오케) 나오신다’라고 첨가하게 되었다. 이것을 필리오케 논쟁이라고 한다.

 

 

서방 교회는 아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동방교회는 이것을 거부했다. 특별히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포티우스(810-895)는 동방 교회의 탁월한 신학자로서 성령이 아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신성의 일치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보고,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라고 하셨다(요15:26; 행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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