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감사 감사 영원히 감사 (눅 17:11-19)

열려라 에바다 2022. 11. 23. 11:20

감사 감사 영원히 감사 (눅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 시간에 “감사 감사 영원히 감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목이 감격스럽지요? 감사 감사 감사 영원히 감사, 실제로 있던 일입니다. 미국 텍사스에 사는 어느 기업인이 “백만 번의 감사”란 책을 썼는데 어떤 내용이냐 하면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백만 번 쓴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묘미는 내용이 같다고 그냥 넘기면 안 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록된 그대로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다 읽지 못해서 눈물 콧물이 터지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하며 살 수만 있다면 이 땅은 더 이상 세상이나 지옥이 아니라 완전한 천국으로 바꿔지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믿음이고 감사는 시인이고 감사는 찬양이고 감사는 영광 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감사를 백만 번씩 하시기 바랍니다. 백만 번이 많다면 100분의 1로 줄여 드릴 테니 만 번씩이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하실 수 있죠? 만 번도 많다면 천 번으로 깎아드립니다. 그러나 진정 감사할 의미를 안다면 기쁨으로 백만 번이 아니라 천만 번이라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한 나병환자가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 환자의 감사가 그런 감사입니다. 다른 아홉 사람들은 치유를 경험하고 너무 좋아 누구에게 보이려고 그랬는지 제 갈길로 흩어졌지만 이 사마리아인은 그 유혹을 물리치고, 그리고 다시 와서 감사하라 하신 말씀은 없었지만 그 감격을 고스란히 가슴에 품고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절하며 온전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당연한 일 같지만 보통 감사가 아닙니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진정 그 의미를 알고 드리는 감사였기 때문입니다. 17-1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인정하신 감사였습니다.


그럼 어떻게 영원히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1. 우리를 불러주신 아버지 사랑을 생각할 때 가능합니다.


11-13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알고 보면 이 것은 놀라운 복음입니다.


원래 유대인은 사마리아 길은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B.C.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고 포로로 잡힐 때 앗수르는 통합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 혼혈정책을 썼습니다. 그 결과 인종도 뒤죽박죽, 신앙도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하고 그 지방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개념으로라면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영원히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사마리아 길로 가셨습니다. 그것도 은혜인데 나환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들리셨습니다. 레13:45-46에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했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나환자는 사회와 격리되었습니다. 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몸은 다 뭉그러지고 피투성이인 데다가 옷을 찢고 머리까지 풀었으니 얼마나 흉측합니까? 보는 이로 하여금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가까우면 접근하지 못하도록 환자가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오지 말라 외쳤습니다. 이런 마을에 구세주가 들리셨다는 것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처럼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불러 주셔서 예수 믿게 해주신 것 얼마나 감사합니까? 율법대로라면 우리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엡2:12에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거기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구원해 주시다니... 우리보다 선하고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들 많습니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종교심 많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택해주시고 불러주신 은혜가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생각하면 우리는 영원히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엡1:3-6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찬양했습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불러주신 이 큰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면 다른 무엇도 감사할 수 없습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더 큰 은혜, 더 큰 능력, 더 큰 축복, 더 큰 건강, 그러니까 감사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불러주셨고, 세상은 우리를 버려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영원히 멸망 받을 죄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히 감사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생각하면 영원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13-14절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감사한 것은 주님은 그들의 소리 높여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레 13장을 보면 나병의 진단을 제사장이 했습니다. 치유 판정도 제사장이 합니다. 완치 판정을 받으면 저주의 격리에서 해방되어 집으로 돌아가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신 것은 치료의 말씀을 믿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믿고 가는 도중 놀라운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죄와 질병과 저주를 지실 예수의 십자가 공로입니다. 그래서 마8:16-17에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했습니다.


나병만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구원도 믿음으로 받습니다. 마1:21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했습니다. 롬1:17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이신득의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방법이 믿음임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믿음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놓았으니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논리로도 맞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죄에서 놓였는데 어찌 맘대로 삽니까? 그래서 롬6:2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죄가 사라져 새 사람이 되었는데 어찌 죄 가운데 삽니까?


예수 안에서 볼 때 우리는 죄에 대해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산 사람이므로 이제 할 일은 그 복음을 믿고 나환자들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죄과를 담당하셨음을 믿고 화평한 마음으로 나아가고, 내 못된 죄악성까지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믿고 죄가 나를 흔들어도 당황하지 말고 나아가고, 나를 구원하시되 영원한 영광과 함께 구원하심을 믿고 그 영광을 천국백성처럼 찬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넘어지고 쓰러지고 심령이 만신창이와 같지만 구원하셨다는 그 믿음으로 계속 전진하면 믿음이 점점 실상이 되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본문이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가상적 구원이 아닙니다. 고전15:1-2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 생각하면 우리는 그 구원의 은혜를 영원히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한 번은 이 찬송을 부르며 자동차를 몰고 가는데 얼마나 감동이 밀려오는지 찬송을 멈췄습니다. 내 영혼이 천국으로 빨려 올라갈 것 같아서, 자동차 사고 날 것 같아서요. 이처럼 우리가 영원히 찬송할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입니다.


3. 믿음으로 그 무엇이든지 누릴 수 있음을 생각하면 영원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15-19절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나환자 열 명 모두 믿고 순종하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들도 믿음의 사람들이니 어쩌면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현재는 만신창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한 걸음 한 걸음 제사장에게 나아간다는 것은 믿음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들이 감사만 안 했지 우리보다 훨씬 낫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기독교인들 중에 말로만 이신득의지 믿음으로 구원의 비밀을 체험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칭의를 말하지만 양심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적고, 거룩을 말하지만 성화도 믿음에 서야 다가온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공로예요. 이방종교 찾아가서 배우는 어리석은 행동들 그만해야 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열 명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감사한 것은 믿음으로 더 영광스러운 것까지 바라고 누리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일3:2-3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실 복이 얼마나 큰지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것만 빼고는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지 않으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당당한 자녀요 그리스도의 사랑 받는 신부요, 영생이 우리의 것이요, 영원한 천국도 우리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7-18절) 하신 이 책망은 다름 아닌 우리들을 향하신 책망입니다. 아버지 사랑으로 영원히 감사해도 부족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더 이상 하나님의 노여움이 되지 말고 우리를 불러주시고 온전케 하시고 영원한 영광을 허락하신 아버지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생각하며 영원히 감사하고 찬양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