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관련자료

결혼-현재에 산다

열려라 에바다 2023. 6. 8. 10:31
II.결혼-현재에 산다

정열, 지식, 애정-사랑에의 열쇠는 어디?
세 가지 전부, 그것에, 달빛과 장미꽃, 나날의 양식, 관대와 관용, 기억과 망각.
생각나는 여러가지 물건, 빌린 작은 방,
생각나는 진주에 햄 에그.
사랑에 못을 박아 폐쇄해 두면?
그대 머지를 뒤집어 쓰고 곰팡이가 나고, 움추려 들고 말아, 그늘에서-
태양의 혜택을 알지 못하게 되면, 눈과 비와 폭풍우의 은총을 알지 못하면,
한 칸의 보금자리 속에서 단란한 새들이,
미친듯한 무정의 바람에 부들 떨면서도-.
모든 배역에 임하는 것, 때문에 사람에 못을 채워 잠궈 버리지 않고.
-카알·샌드버그

5. 결혼에 무엇을 구하는가
"이야기하고 싶지 않는 것인데요······"
"이야기하기 싫은 것? 무언지 모르지만 들어주지. 본 마음을 말해주는 편이 좋아요."
"그렇게 듣기 거북한 것인가······"
"듣기 거북하면 자리를 떠도 좋아요."
"대체, 어떻게 해 주기를 원하고 있는건데!"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래요."
"들어주고 있쟎은가?"
"그래요, 자, 이야기하니까 잠자코 들어요."
"여하튼 듣고 싶은 것이 많이 있던 참이요."
"그런데, 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어요. 당신에게 바라는 것이 많이 있단 말이예요!"

어떤 대화를 어딘가에서 들어 본 적이 없을까? 자신이 바라고 있던 것을 상대에 향하여 솔직히 권하는 것은 그다지 손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하는 데에 일종의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무언가 중대한 결괄르 초래할지도 모른다든가, 자신의 이미지를 나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상대에 대하여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고 마는 것은 아닐까 등과 같은 두려움을 품고 있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즉 바라고 있는 것을 말해도 그것이 상대에게 인정받지 못하지는 않을까 하는 점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이러한 두려운 마음은 사라에 의해서 맺어진 관계를 쌓아가는데 장애로 된다. -바라고 있는 것을 솔직히 말하고 그에 따르거나 깊은 애정에서 싹튼 친근감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확실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고 있는 것을 상대에게 전하거나 상대가 자신에게 바라고 있는 것을 묻는 것이 쉽지가 않다. 바라고 있는 것에 대한 힌트를 상대에게 준다든가, 반대로 감춘다든가, '심리적 게임'을 통하여 표현하는 방법에 의존하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예를 들면 "프라이버시를 살리고 싶다(혼자 하기 바란다)."는 기분을 방에 들어가면서 문을 꽈당!하고 소리나게 세게 담음으로써 은근히 표현한다느가, 책을 읽고 있을 때 누가 이야기를 걸면 찌푸린 얼굴을 한다. "스스로 자유롭게 되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총족하기 위해 아내 자신 명의의 은행 구좌를 개설한다. 물론 이 경우는 '바라고 있는 것'은 상대에게 숨겨져 있다. 하나의 사례를 소개해 보기로 하자.

어떤 커플이 아이들 일로 상담하러 왔다. 11세의 사내 아이가 학교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첫째는 노는 시간, 점심 때, 하교시 등 언제나 동료와 떨어져서 혼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수업 중에도 창밖을 바라다 보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활기가 없고 성적도 떨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머리가 나쁘지는 않다. 집에서나 자신의 방에 오랫동안 틀어박혀 있는 경우가 많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분명치 않는 등과 같은 일로 해서 걱정이라고 부모는 말했다.

아이들의 이러한 행동과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나서 신경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로 해서 어머니 자신이 자주 멍청하게 되거나 백일몽에 걸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들은 이러한 행동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하는 것을 꼭 닮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 뿐만이 아니고 아버지도 무언가 잔뜩 비밀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예컨대 포르노 사진을 집의 작업실의 도구 넣는 곳의 뒷쪽에 숨기거나 하고 있었다. 이 같은 아이들은 어머니 뿐만이 아니고 아버지의 모델에 따르는 것이다.
카운슬링 장면에서는 세 사람 모두 혼자 시간을 바라고 있다는 각자의 욕구가 말했졌다. 이 홀로되는 공간, 즉 프라이버시를 요구하는 욕구는 인간 모두에 공통된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것을 이 가족은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가족은 정서적인 교류를 정말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얻어지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이나 분노의 감정에서 각자가 안으로 틀어박히고 말았던 것이다. 즉 비틀어진 형의 프라이버시 세계에 각자가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카운슬링을 추진해 가는 중에 이 가족은 더욱 자신들이 진정코 바라고 있는 것에 힌트를 준다든가 숨기는 대신에 상대에게 권하고 서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 가족은 각자의 욕구를 건강한 방식으로 충족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본 장에서 인간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여러 가지 기본적 욕구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다. 또 현재 안고 있는 욕구를 인식하는 방법을 기술해 보기로 하자. 질서, 안전, 자유, 모험과 용기, 소유물과 프라이버시, 존경, 신뢰, 평동, 진실, 헌신적 노력 결의, 책임 등은 친숙한 말인데, 이들이 인간의 기본적 욕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것은 약간 낡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것에 의해 돈이나 권력을 얻는 다는 것 자체가 오늘날 인간의 기본적 욕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은 개념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는 불가결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들 기술에서 그것을 이해해 주기를 기대하고 싶다.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욕구

현재 시점에서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여러 가지 욕구는 대개 과거의 경험과 깊이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 예를 들면 안전을 바라는 욕구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선 아이들 대에 충족되지 못했던 욕구는 이윽고 어른이 되어 결혼했을 때 밖으로 부상한다. 그것도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낸다. 인간에게는 신체적인 안전을 구하는 욕구가 있으며,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몸의 위험을 느끼며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이러한 사례를 소개하기로 하자.

수잔이라는 여성이 카운슬링을 받으러 왔다. "언제나 나는 두렵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특별히 무언가 두렵다는 것은 아닐지라도"라고 그녀는 말한다. 언제부터 그렇게 느끼게 되었는가 하고 물으면 언니가 고등학교 때 라틴어 성적이 내려갔을 때 아버지가 곧잘 격노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가 아닐까 하고 말한다. 언니보다 4살 아래인 그녀는 언니가 아버지로부터 두들겨 맞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을 들었을 때 몸이 부들부들 떨렸던 것이다. 아버지는 감정적인 사람으로 이성을 잃을 때 언제라도 위험이 자신에게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한다는 동기에서 그녀는 열심히 공부를 해서 좋은 성적을 올리고 행실도 좋으며 '착한 아가씨'가 되도록 힘썼던 것이다.
감정적인 분노의 표현에 대한 그녀의 공포는 그로부터 몇 년간 계속되었다. 예를 들면 가게의 점원이 기분 나쁜 얼굴을 하면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가르치고 있던 국민 학교 2학년 학생들이 맞잡고 싸울 때 그녀는 기절하듯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결혼한 상대는 뜻밖에도 무엇이나 소리를 지르며 노하거나 문을 난폭하게 닫는 감정적인 사내였다.

그래서 그러한 남편에 대하여 이전에 자신의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자신을 억제하고 남편의 말대로 했던 것이다. 그녀는 류마티스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남편에 대한 분노를 안으로 향하도록(무의식적으로)하여 악화시켰던 것으로, 이윽고 그녀는 자신을 중요하게 하는 것, 자신에게도 욕구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녀는 분노 감정의 표현 방식을 배우게 되었다. 공포감이나 자신을 비하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용기를 갖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이 수잔과 같이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인정하게 되기를 바란다. 심신증(心身症:현재는 정신 생리적 질환이라고 부른다)을 생각한다든가,위기적 상황에 처하기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과거에 속박되어 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바란다. 과거에 의해 현재를 망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질서(秩序)
우리 생활의 각종 영역에는 질서가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서 생각하고 싶은 질서라 함은 연속 절차라든가, 정리 정돈등과 같은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 예를 들면, 봄의 뒤에 여름이 온다. 낮의 뒤에 밤이 된다. 달의 움직임에는 싸이클이 있다.그리고 인간은 이들 질서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구 뿐만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몸, 그 자체가 질서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 것에 의존하면서 나날의 영위를 계속하고 있다. 심장의 고동, 뇌의 기능, 위장의 소화기능, 근육의 작용, 모두가 질서를 갖고 기능하는 것을 예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더우기 사람들은 정부나 지방 행정을 위시해서 각종 사업체, 교육기관, 지역 사회의 단체 등에 의해서 정해진 질서에 의존하면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정해진 대로 연금이 지불되기를 기대한다. 질서가 존재하지 않으면 혼란해진다. 자연의 세계가 그러하고, 우리들의 몸이 그러하며, 사회 시스템이 그러하듯이 질서가 있는데서 안전이나 연속성이 초래되는 것이다.

이 연속성, 즉 일정한 질서를 갖고 일을 예정할 수 있다는 것은 결혼 생활에 있어서는 중요한 욕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떤 결혼관에 의한 것이라도 변함 없다고 해도 좋다. 결혼 생활에 있어서의 질서는 어떤 경우에는 정리 정돈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부엌을 좀더 정돈할 수 없을까?"라고 남편이 처에게 제안한다. 또 때로는 질서는 사람에게 명령을 하거나, 받거나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앞서 남편의 고충에 아내가 "왜 하지 않고 나쁘다고만 해요?"라고 반문하면 남편은 "왜라고? 내가 해야할 거리라고 말하고 있는거야! 내 명령이야!"라고 응답하는 남편은 가정이 자신의 생각으로는 그 표현(명령)에 따라서 질서가 유지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 속에서 곧잘 행해지는 "누가 무엇을 하는 건가?"라고 하는 논의의 배경에도 질서를 구하는 욕구가 존재한다. 가사의 어느 부분은 누구의 책임인가 하는 것은 때로는 예측되며, 때로는 공개적인 의논으로 정해진다. 전통적으로는 남편이 아내의 경제르 ?위해 노동한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래서 아내가 가사의 책임을 진다. 이것은 오늘날 상당히 변화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역할 분담의 내용이나 방식이 바뀌고 있다고는 해도 가정에 질서가 없어도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질서가 있는 정리정돈이 필요하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예측성, 안정성, 편의성을 위해서는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현재 많은 사람이 경제, 사회생활, 가족생활, 성생활 면에서 질서가 가져다 주는 편의를 찾아 결혼하는 것이다.

결혼 생활에 있어서의 질서는 자주 합의함으로써 구해지며, 유지된다. 예를 들면 한 쪽의 심신이 피로에 지쳐 있는 때에 상대의 위로나 원조를 바란다. 이러한 쌍방의 정신적인 욕구에 서로 어떻게 대응하는가 등과 같은 것을 의논하고 합의한다. 때로는 그것이 암묵의 이해에 의해 행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합의사항을 깨닫고 있지 않는 커플이 뜻밖에도 많은 것이다.

그런데 결혼 생활에 질서가 없어서는 안된다는 측면이 있음과 동시에 반면에 질서가 도를 넘어서는 문제가 일어난다는 측면도 있다. 나날의 영위가 모두 예정대로 행해진다는 것도 문제이다. 즉 질서가 지나치면 문제인 것이다. "벗은 옷을 그 자리에 방치하면 집안 일이 엉망이 돼요!" "이 딱는 것을 또 잊어 버렸어!" "식사가 끝나면 곧 정리 정돈해야 하지 않는가!"등과 같은 정돈을 요구하는 말이 곧잘 발해진다. 질서, 정돈에 포로가 되고 말면 결혼 생활이 파탄하는 경우도 있다. 계획적이지 않는 변화, 자연 발생 등이 때로는 없으면 생활은 지겹게 되고 매너리즘 화하여 반감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가정 생활이 무겁고 고통스럽게 되고 가정이 형무소 같이 느껴지며 상대가 엄한 간수로 보일지도 모른다.

한편 한 쪽만 변화하는 것도 문제를 낳게 된다. 예를 들면 몸단장을 아름답게 하고 있던 사람이 급하게 되면 하지 않게 된다는가, 언제나 묵묵히 인내하고 있던 사람이 자기 주장을 하기 시작한든가 항상 일의 결단을 하는 입장에 있던 사람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같은 것이 가정 속에서 '기대되고 있는 질서'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대를 걸고 있던 사람 측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변화란 본인의 사고 방식이나 우선 순위를 바꿀지도 모른다. 혹 다른 새로운 질서의 존재 방식을 요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반드시 상대에게 이해되어 있지 않는 때에, 상대의 합의를 얻고 있지 않을 때에 문제로 된다.
이러한 변화가 때로는 서서히 행해지기도 하고 급속히 해해지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어쨌든 긴장 상태나 질서의 교란을 초래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소의 고통이 따르더라도 인간 생활에 있어서 불가결한 질서를 얻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더우기 질서의 변화는 스트레스를 초래한다. 원래의 질서와 새로운 질서가 얻어지기까지의 사이에서 사람들은 안전이 위협받는 느낌을 갖는다. 예컨대, 회사의 사령으로 전근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것이 결혼 생활을 위협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전근이나 이주는 불?안이나 반감을 초래하는 경우가 곧잘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에 대하여 부정적인 변화의 상황도 있다.
대망하고 있던 아내의 임신, 승급 등과 같은 것이 가져다 주는 변화는 기대감이나 환희를 초래할 것이다. 결혼 생활에 있어서 어떤 혼란이 생긴다든가 질서가 교란되는 경우가 생겼을 때 사람들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데, 그 경우에 그것이 불안을 초래하는 것이다. 또 불안은 스트레스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질병으로 되는 경우도 있다. 더우기 가족의 질병이 가정을 혼란 상태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례가 있다.

실비아가 불만 투성이었다. "가정은 남성의 성이다."라고 어릴 때부터 들어 왔으므로 "가정에서 중요한 것은 주인인 남편이 모두 정하고 아내는 거기에 항상 따르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자라 왔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의 기분에 맞고 바라는 식사를 준비하고, 남편이 바라는대로 의상을 몸에 걸쳐 왔다. 남편의 의견에 합의하고 남편의 요구에 따르는 성 생활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인격이나 권리가 상실되고 있는 나날의 영위에 그녀가 교통 사고를 당해 수개월간 몬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변화가 생겼다. 자신의 태도가 결과적으로 결혼 생활을 파탄시키고 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남편은 실비아에게 이같이 말했다.

"마치 상처입은 작은 개같이 무엇이나 내가 해주도록 매달리는 것은 중지해줘. 이제 침대에서 나와 스스로 하면 어때. 자신이 할 수 있잖을까! 여하튼 나에게 매달리는 것은 중지해 줘!"
이 남편의 말을 들은 실비아에게는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이 한마디로 그녀는 눈을 떴던 것이다. 그 후는 결혼 생활에 있어서 질서의 존재 방식이 변하게 되었다. 그녀는 후에 바깥 일에 취업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봉사하는 것 이외의 방법으로 자존심을 높이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물론 이같은 변화가 하룻 밤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녀의 말하는 경향이 있는 성격이 바로 고쳐졌던 것도 아니다. 또 남편의 고자세의 주인다운 행동이 바뀌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에 있어서 질서의 변화는 서서히 찾아왔던 것이다.

안전(安全)
안전을 구하는 욕구는 질서를 구하는 욕구와 같이 관련되어 있음과 동시에 이 양자는 인간으로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욕구이다. 인생에 있어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위험적 상황을 많은 사람들은 어쨌든 극복한다. 결혼도 위기를 극복한다. 그리고 그 결과 개인이나 결혼도 성장한다. 그런데 불안정(안전성의 결여)한 상태가 길게 계속되면 부부 관계의 붕괴를 초래하는 경우도 많다. 심신의 붕괴를 초래하게도 한다.
안심삼에 대한 최대의 파괴적 위협은 그 개인의 안전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하고 공포감에 사로 잡혔을 때 경험한다. 그 같은 강한 공포감에 사로잡혔을 때의 모양을 제니퍼는 이 같이 증언하고 있다.

나는 강간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 이후 줄곧 공포와 불안감에 계속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직 저녁이었습니다. 일에서 돌아가는 귀로였습니다. 인적이 드문 외딴 작은 집에 혼자서 살고 있었습니다. 집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뒤에서 두 사람의 사내가 덥쳤습니다. 아마도 창에서 몰래 침입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들겨 맞고, 강간당하고 질질 끌려 갔으며, 전연 알 수 없는 마을 도중에 내버려졌던 것입니다. 그 때 이후 잠을 잘 수가 없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베드의 밑에 막대기를 숨겨 두거나 침상 밑에 칼이나 피리를 두거나 했습니다. 그러게 해도 만역 누군가가 들어왔을 때 과연 나는 움직일 수 있을까 하고 불안했습니다. 아마도 두려운 나머지 몸울 움직일수가 없게 됨다면 소리도 지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누군가가 격노하거나 난폭한 행위를 하거나 하는 것을 보면 몸이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또 알 수 없는 사람이 내쪽으로 급히 다가서거나 하면 두렵게 됩니다.

지금도 남편보다도 앞서 내가 귀가했을 때 집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곧 두렵습니다. 밤에는 매일 저녁 반드시 문이나 창문을 닫고 있는지 여부를 몇번이고 확인하고 침상에 들어갑니다. 이전에는 신선한 공기가 좋고 창을 열고 누워있을지라도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문을 닫은 채 잠자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두려워서 울움을 터뜨리거나 하는 때에는 조용히 안아 주었습니다.
이러한 밖으로부터 가해지는 위협은 파괴적이다. 그것은 강간 경험에 한정되지 않는다. 수입이 적고 그 때문에 나날의 양식을 얻는 것이 위협받는다든가, 실업, 불치의 질병, 커다란 사고, 홍수 등과 같은 큰 재난도 파괴적으로 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이 가져다 주는 스트레스나 불안이 협력하여 대응할 필요를 느끼게 하는 결과 오히려 부부 관계를 강화하고 가깝게 하는 경우도 있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경우도 있다. 불안이나 위기감에 사로잡혔을지라도 대응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결과적으로 부북 관계가 더욱 친밀하게 되며, 더욱 의의있는 것으로 될 수가 있다.

그런데 안전을 위협받는 것을 때로는 결혼 생활 자체가 만들어 내는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처의 학대는 미국에서는 드물지 않다. '····하지 않으면 네 뼈를 부러뜨리고 말겠어.' 등과 같은 위험이 행해지는 경우가 많아 아내들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같은 남편에 대하여 보복을 하는 아내, 시험하는 아내도 있다. 근년에 이같은 처의 폭력적 보복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이 늘어나고 있다고 보고 되고 있다. 앨리스는 분노가 가득한 여성으로, 술에 취하게 되면 이성을 잃고 난폭하게 된다. 그녀의 차에 깔려 죽을 뻔하거나 남편이 차고로 피하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 더우기 간접적인 위협이 몰래 숨겨진 공포로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화를 낸다든가, 심야의 귀가와 같은 행위 등이 좋은 예이다. 문을 난폭하게 닫고, 경멸적인 눈, 욕하거나 무관심한 태도와 같은 것은 결혼 생활이 잘 되어 가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메시지로서 받아 들여진다. "이혼에 이를지도 모른다."라는 메시지가 발신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되게 된다.

위협이라는 것은 대개 그 크기에 관계없이 연모의 정이나 우정, 애정을 상실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감정이 없어지고 난 후에도 여러 가지 이유에서 결혼 생활을 계속하는 경우가 곧잘 있다. 예를 들면 의무감이라든가 적어도 어떤 종류의 안정(경제등)이 얻어지기 때문이다. 이혼에 수반하는 심적인 고통이나 경비를 생각해서 참는 경우도 있다. 폭력행위가 있는 경우에는 상대로부터 떠나려고 하면 반대로 몸이 위험하게 된다는 이유에서 참는 경우도 있다. 이같은 경우에는 대개 결혼 생활은 지속되어도 심리적으로 거리감을 갖게 되고 지나치게 침묵하게 되거나, 상대에게 무관심하게 되거나 한다. 성 생활면에서도 불감증이나 임포텐스로 된는 경우도 있다.

자유(自由)
건강한 결혼 생활에 자유는 빠뜨릴 수가 없다. 물리적인 자유, 생각, 의견의 자유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많은 문화 사회에 있어서 여성의 물리적인 자유(자유로운 신체)가 부정되어 왔다. 노예는 물론 모양상으로 자유였던 여성도 자유가 없었다. 집에 폐쇄되어 있는 여성, 예컨데 고대 그리이스의 아테네 상류 사회의 여성들, 발의 성장을 막아 주거에 고정되어 있는 고대 중국의 여성들이 그 좋은 예이다.

오늘날에는 결혼의 상대에 의해서 가해, 속박 받고 있는 자는 적을지 모르지만, 결혼 생활에 자유가 없다고 느끼는 자는 적지 않다. 문에 속박되거나 족쇄를 채우는 대신에 오늘날에는 상대가 밖에 나가는 사람, 특히 이성과 교제하는 것을 여러 가지 수단으로 막는다. 예를 들면 돈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다든가 교통수단(차 등)을 뺏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물리적인 자유가 방해 받는다. 또 심리적으로 압력을 가하는 경우도 사용되어 진다. 사회 통념이나 도덕적인 계율 등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이혼의 가능성이 엿보이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심리적으로 짖궂게 구는 것이 물리적 구속의 수단으로서 곧잘 사용되어 지는 것은 그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에가 있다.
"나는 밖에 나갈 때에는 반드시 어디에 가는가를 남편에게 고하도록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학 출신의 아내가 말했다.

"어디에 가는가를 고하지 않으면 남편은 크게 화를 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다른 남성과 만난다는 것을 이야기 하면 그는 몇 주간이고 나에게 냉담한 태도를 취해요."라고 탄식한다.
이 부부관계에 있어서 자유, 구속에 관하여 부부는 곧잘 싸움을 한다. 예를 들면 "밖에서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유고 뭐고 없잖은가?"라고 해서 아내의 취직에 반대한다.

"나도 더욱 열심히 일해서 수입을 늘리고 가정을 좀 더 부양해 갈 수 있기 때문에 밖에서 일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아요? 모두가 하고 있기 때문에 흉내내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집에 있는 것이 당신의 의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요!" 이렇게 말하는 남편의 무모한 말에 처는 반론한다. "그렇게 말해도 당신은 밖에 놀러 나가잖아요! 친구들과 골프하러 가거나 하잖아요! 왜 나만 밖에 놀러 나가서는 안 돼요!"

이같이 결혼 상대의 행동을 통제하려고 하는 시도는 상대를 통제하려고 하는 사람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불안감의 표시인 것이며, 또 상대에게 통제받고 있는 측의 불안의 표시라는 점도 있다. 이같은 습관을 바꾸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선 "왜 통제를 바라는가?"하는 것이다. 상대의 행동을 통제하기를 바라는 사람의 욕구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규제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바라는 욕구를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에릭 호퍼는 이같이 주장한다.

"정말 '소유자'는 자유롭고 자신의 소유자이며,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주지 않고 얻은 풍부한 소유자이다. 자신의 능력의 가능성을 발전시키고 활용함으로써 그 부를 얻는 것이다. 한편, 정말로 잃은 자는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주어 스스로가 풍부하게 된 자이다. 또 타인의 자유를 침해함으로써만 스스로가 자유롭게 될 수 있는 사람이다. 공포심을 타인에게 주고 의존심을 상대에게 더하게 함으로써만 자신을 쟁취하고, 타인을 가난하게 함으로써만 스스로 부를 얻고 있다."

물리적 자유에 더해서 생각과 의견의 자유도 결혼 생활에서 중요하다. 이것도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라고 생각된다. 갈등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의견의 자유를 갖지 않는 커플이 뜻밖에 많은 것이다. 상대에게 동의하는 것이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 또 의견이 틀리거나 동의하지 않는 것이 이미 불안정한 관계를 더욱 위태로운 상태로 만들지 않을까 하고 두려움을 품고 있다.

다른 의견을 갖는 것은 때로는 재미있는 일이며, 관계를 자극하게 한다. 매너리즘화한 관계에 자극을 주기도 한다. 의견의 차이로 정치, 소유권, 남녀의 성별 역할, 육아 방법, 돈의 사용 방법, 여가 활동 등에 관한 것이 많다. 의견의 자유로운 표현을 서로 인정하고 있는 커플은 상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또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며, 자유롭게 또 반대의 의견을 진술한다. 그렇게 하는 데서 새로운 통찰에 이끌리거나 한다.

의견을 갖는다는 것, 자신의 의견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혼동하는 사람도 개중에 있다. 자신의 신념을 강하게 주장하는 과정에 있어서 독선적으로 되는 사람이 있다. 요컨대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더욱 고착시켜 가기 때문에 그 생각을 움직일만한 사실은 제시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는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말할 필요도 없다.

한편 나는 남편과 정치적인 일에서 의견을 달리하며, 곧잘 언쟁을 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이 올바르고 상대가 잘못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서로의 확신이 강했기 때문에 그대로의 상태로서는 결혼생활 그 자체가 파괴되지 않을까 할 정도였다. 이윽고 우리들은 자신의 생각이 올바름을 밑받침하는 데 충분한 사실을 풍부하게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조차 사실 모두를 전하고 있지 않는 점도 눈치채게 되었던 것이다.

남편은 "내가 믿지 않을만큼 나긋나긋하다."(현재 그렇다는 것이다)고 말해서 웃었다. 나는 남편이 믿지 않을만큼 편견이 있다(현재 그렇다는 것이다)고 해서 웃었던 것이다. 편견은 비관용을 초래하고 자유를 구하는 욕구의 장애로 된다. 그리고 비관용적인 태도는 완고함을 자주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어떤 사람은 완고한 신념을 품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믿고 있는 주체'와 '믿고 있는 내용'을 혼동하는 결과인 경우가 많다. 사람은 믿는 것 이상의 존재이다. 개인의 지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이것을 확실히 인식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결혼 생활에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주의, 주장을 상대에게 강요하고 동의를 강요하는 것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의견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수반되는 것이다. 이 감정에도 의견과 똑같이 자유가 필요하다. 결혼 생활에 있어서 감정을 규제받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특정한 감정만이 계산되고 그 이외의 감정은 비난의 대상으로 되며 부정된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화난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하지만 그 상대는 자신의 살맛 없음을 조심 조심 표현을 하는 치우친 자유를 가진 커플이 결코 적지 않다. 또 오늘날 감정에 대해서는 관용적이지만 상대의 감정의 표현에 비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커플도 많다. 쌍방이 자유를 바라고 있으면서 상대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자유나 시간을 주고 있지 않는 것이다.

모험과 용기
변화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준다. "오랫동안 친숙해져 있는 방식은 최선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잘 이해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라고 자신에게 타이르고 잘 이해될 수 없는 것은 피하는 편이 무난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변화에는 모험이 필요하다. 모험을 일을 해 나가는데 위험을 각오하는 경우도 있다. 그 때문에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나 시선함을 피하는 결혼 생활은 지루함을 곧잘 초대한다. 나날의 영위를 계속하지만 서로 자아 실현을 달성할 수 없는것이다.

지루함은 무관심을 초래하며, 또 심신 모두 상대와의 사이에 거리를 만들게 되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노하거나 폭력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연모의 정이나 성욕의 감퇴를 초래한다. 상대를 반하게 하거나 불륜 관계로 달리게 하는 경우도 있다. 혹은 지루함 때문에 신선함을 구하기 위한 용기가 생겨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상대의 말대로 하고 있던 사람이 자기 주장을 하기 시작하면 위험을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또 일벌레처럼 일 중독이었던 사람이 일을 쉬고 긴장 이완 하는 데서 위험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것이든 간에 새로운 행동 양식이 그때까지 유지되어 온 부부 관계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그것이 위협을 상대에게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상대는 그 변화에 놀라게 되며, 당혹하고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같은 예가 있다.

결혼하여 5년째인 팀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처인 쥬디를 나는 사랑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때로는 친구들과 고기잡으러 나가고 싶어 하거나 맥주를 마시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치 큰 범죄라도 저지를 것처럼 소란을 피윱니다. 지긋지긋해요. 덕분에 수일간을 망치게 되고 맙니다. 독점적으로 되지 않고 보다 더 자신의 취미를 갖고 싶어요. 또 질투가 많습니다."

용기라 함은 전진하는 것, 두려워 하지 않고 무언가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용기의 반대는 무감동한 것이라고 심리학자 롤로 메이는 정의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차피 무엇을 해도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하려고 하지 않는다." "변화는 힘이 자신에게 없기 때문에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라는 태도이다.

변화를 찾아서 모험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은 것'과 같은 것이지 않을까? 적어도 반쯤 죽은 것과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들 우주속의 모두는 항상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이나 알기 어려운 것이나 모두가 변화하고 있다. 별의 운행도 변화한다. 지구도 지축에 의해 회전하고 있다. 산도 분화한다. 꽃이나 수목에도 생명의 한계가 있다. 인간도 똑같다. 탄생 순간 부터 나이를 먹음에 따라 늙음으로 향하고 있다.

이같이 변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끊임없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자는 결혼 생활에 있어서 살아있는 변화도 수용할 수 있음에 틀림이 없다. 살아 있는 변화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데에는 모험이 필요한 것이다. 거기에는 도박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모험을 피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중요한 요소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것도 운명에 몸을 맡겨 버리고 마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를 찾는 대신에 스스로 운명의 노예로 되는 것이다. 다음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필립과 쥬디 두 사람이 결혼 카운슬링을 받으러 왔다. 성 생활이라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으며 별거를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필립에 의하면 "아내는 결코 내 마음에 들도록 해 주지 않아요. 다만 가만히 누워 있을뿐, 모두 내 쪽에서 이니셔티브를 쥐지 않으면 안 돼요." 라는 것이 불만이었다.

한편 쥬디 쪽은 "언제나 바쁘고 피로해져 있어요. 내 쪽에서 요구하면 "자 빨리 해요."와 같은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예요. 나는 그와 달라서 그처럼 바로 느낄 수가 없답니다. 시간을 끌기를 바라고 있는 사이에 이미 상대방은 하고 있는 거예요. 모처럼 느끼기 시작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끝내고 곁에서 코고는 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에, 이같은 비극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더 이상 이득을 보기는 틀렸습니다."와 같은 불만이 있다.

이 예에서 분명한 바와 같이 성 생활에 있어서도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모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용기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오랫동안 마음 속에 쌓였던 반감이나 두려운 마음을 표출시켜 이야기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원망을 말하고 분명히 하는 경우도 용기가 필요하며, 모험으로 된다. "지금 당신을 원하지 않아요."라든가 "몸을 서로 맞대는 것은 좋지만 섹스는 오늘밤 하지 말아요."라든가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되어서 싫습니다."등과 같은 것을 상대에게 전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결코 적지 않은 것이다.

즉 용기를 갖고 행동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 되는 용기를 갖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용기는 자신의 존재의 핵심이 되는 것을 존중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어서 자신에게 없는 것을 연기하여 만들어 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를 얻기위한 노력은 일생의 과제가 아닐까? 종교 개혁의 선구자인 마르틴 루터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사해를 돌파하는 것 이상으로 이 지구상에 도전해 볼만한 무엇이 있다는 건가?"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로부터 도피하여 자유를 찾은 여로를 말하고 있다. 지도자인 모세를 따라서 그들은 사해를 건넜다. 즉 인생이라는 것은 마치 노예(문화나 낡은 도덕, 무지, 시민을 부리는 권력鶂라등에 의해서 강제된 노예 생활)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로 되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나는 "승리하기 위해 태어나라"(역자역, "자아실현의 열쇠"(Born To Win)속에서 이같이 말했다.
"자율에 따르는 자유를 경험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친밀함을 받아 들이는 용기, 타인과 솔직하게 대면하는 용기, 인기 없는 입장을 취하는 용기, 타인의 인정을 받거나 못받거나 관계없이 자신에게 충실하게 되는 용기, 자신의 입장에 걸맞는 용기,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용기, 독특한 존재로서 자기자신으로 되는 용기가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길을 때때로 불안정하며 불확실한 것이다. '용기 거기에 인간의 최고의 덕이 있다.-한정된 지식과 불충분한 증거에 입각해서 발을 내디디는 용기-그것은 모든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로버트 포스터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소유물과 프라이버시
건전한 결혼 생활에 있어서는 개인의 재산, 소유물이나 프라이버시의 욕구가 존중되며 받아 들여진다. 많은 커플은 부동산, 고급 가구 등과 같은 재산으로서 가치있는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이지만, 그외 동시에 '자신의 것'을 갖고 싶어하는 개인의 욕구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자신의 도구 상자,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시집, 자신이 중요시하고 있는 꽃, 식물 등과 같이 작은 것, 값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받는 데 의이가 있다. 이들에게 그 개인의 과거의 경험이나 생각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옛날 의복을 버리지않고 갖고 있었다. 유행의 리바이블에 의해서 또 입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 자신이 버리기 아까운 태도를 끝까지 관철시켜 왔던 것이다. 그들 의복에 집착해 있는 것은 정말로 애정이 깃든 생각이 그 하나하나에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 젊어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을 때 내가 입고 있던 의복은 모두 구세군이나 자선 단체가 경영하고 낡은 의복 가게로부터 싸게 사들인 것이었다.

나의 남편은 이같은 나의 낡은 것에 집착하는 습관을 잊어 버리고, 나의 낡은 의복을 내가 알아서 하도록 잠자코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남편에게는 별도로 악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도 나로 서는 중요한 것인데, 그것을 나로부터 탈취해 간다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행위였다. 나의 프라이버시, 나 개인의 생활이 침해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윽고 나의 소유물이 몰수 되고 말았다. 그것이 싫었던 것이다. 이같은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은 다행이었다.

이러한 개인이나 공동 소유물이나 소유권에 대해서 곧잘 이해하기 위해 대화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화만이 아니고 서로 확인한 후에 그 처분 등에 대한 결정을 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공유 재산(부동산 등)을 상대의 동의를 얻지 않고 은행에 담보를 맡겨 대부를 받거나, 내버려 두거나 할 수는 없다. 돈에서도 똑같다. 쌍방이 일하고 있지 않음에도 ?루구하고 스스로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돈을 갖고 있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들 부부는 결혼하기 전에 하나의 약속을 교환했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남편의 수입은 남편 자신의 것이며, 남편 자신의 경비는 남편 자신이 지불한다. 남편의 아이도 남편의 것, 아내의 수입은 아내 자신의 것이며, 아내 자신의 경비는 아내 자신이 지불한다. 아내의 아이는 아내의 것-쌍방은 상대의 승인을 얻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다." 이와같은 약속에 입각해서 금전적인 면은 공식적인 문서를 교환하고 아이들 일에 대해서는 서로 대화하여 이해했다. 덕분에 우리들 부부는 정치적인 일로 싸움은 할지라도 이들 일로 싸우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의 케이스를 소개해 보기로 하자.

도리스와 쟈크는 별거 중이다. 의사인 쟈크는 수입이 많았지만 아내인 도리스가 '낭비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혼하여 더 심해졌는데, 쟈크는 도리스를 아직 열애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참을 수 가 없습니다. 도리스는 예산을 세워서 사용하지 않아요. 나는 덕분에 그녀의 낭비벽을 보충하기 위해 점차 분주하게 일하지 않으면 안돼요.유행하는 의복 이라든가 새 차라든가, 집과 같은 경비가 증가할 뿐입니다. 정성을 다했다고 느낍니다. 물론 모든 재산은 두 사람의 명의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의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자신을 위해 어느 하나도 살 수가 없는 한편, 나의 빌린 재산은 증가할 뿐입니다."

이 예와 같이 어느 한 쪽이 다만 '주는 것'뿐이며 다른 한쪽 편은 다만 '받는 것' 뿐인 결혼은 건강한 결혼 생활이 못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 기술한 개인이 자신의 소유물을 갖고 싶다고 하는 욕구는 프라이버시, 즉 개인의 생활을 지키고 싶다는 욕구와 깊이 관계되어 있다. 예를 들면 개인 앞으로 온 편지를 무단히 개봉하지 않는다든가, 전화를 끊는다든가, 돈주머니를 조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요컨데 '자신만의 공간'이 결혼 생활에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일을 다시 기술해 보기로 하자.

나의 프라이버시는 우리집의 '황색방'에서 보호되고 있다. 이 방에서 나는 집필을 위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나의 생활 계획을 이 방에서 세운다. 엷은 노랑 카페트와 꽃 모양의 커튼 라인과 노란새 긴 의자, 엷은 색의 책상과 의자 책꽃이-100% 만족하고 있을 수는 없지만 이것은 내 방에서 어느 것도 없어서는 안 된다. 나의 남편도 자신의 공간을 갖고 있다. 그의 퍼서넬러티를 잘 나타내고 있는 공간이다. 그 자신의 소유물이 보기 좋게 배열되고 가지런히 되어 있다.

이러한 물리적인 공간과 동시에 심리적인 공간을 구하는 욕구를 서로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꿈, 야심, 공상을 펴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와 동시에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상대가 무언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말했을 때 그것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한 때에 "그런 것은 잘 될 수 없어요!. 쓸모없는 아이디어예요!"등과 같은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파괴적이다. 이것에 관하여 이전에 들은 적이 있는 훌륭한 충고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서로 상대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여 서로의 꿈을 신중히 취급할 것."

존경·평등·진실

각자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한다는 것은 개인의 물질적 소유물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것에 한하지 않는다. 개인의 신체, 마음, 정신, 즉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 개인 전체를 존중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무언가를 함으로써가 아니고,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그 자체가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들이 무언가를 수행하는데 대한 존경도 필요하다. 명예나 부라든가 보수나 명성 등과 같은 것에 관해서가 아니고, 우리들이 수행한 것을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를 모두 갖고 있다.

어떤 종류의 작업이 존중받지 못했다고 하자. 그 작업을 하는 사람 자신에 의해서나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존경받지 못했던 것이다. 결혼 생활에 있어서는 변소나 목욕탕의 청소, 식사후의 정돈, 차고의 청소, 눈 치우기 등과 같은 작업을 모두 빠뜨릴 수 없다. 이들 작업에 의해서 가정의 질서가 유지되며, 정돈을 가져다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작업이 일상적인 것이며, 자동적으로 행해지는 형태이기 때문에 '대단한' 작업 '가치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자도 또한 그것에 의해서 이익을 받고 있는 자도 이러한 근육 노동은 두뇌 노동보다도 뒤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태도는 기품 높은 인텔리에 곧잘 보여지는 것이다.

이같이 개인의 인격이나 그 개인의 하는 일이 두 사람의 관계나 생활을 위해 유익하다는 사실을 인정받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할 경우에는 불건전한 가치의 순위 부여가 행해지고 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신의 일이 상대의 일보다도 가치가 있다'와 같은 생각이 생겨나는 것이다. '나의 일이 가치있으며 중요하기 때문에 내 쪽이 당신보다도 가치가 있다"라고 하는 논리가 싹트게 된다.

결혼 생활에 있어서 예를 들면 수입이 많다는 것 때문에 한 편에서 다른 편보다도 중요하여 가치가 있다고 하는 사고 방식이 싹트게 되면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개중에서도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응석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커플도 있다. 그러한 커플의 생활에서는 질서가 지켜지고 있으며, 모두가 결정에 따라 움직여진다. 즉, 이러한 커플은 평등이라든가 존경과 같은 것에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또 그들을 구하기 위해 현상을 바꾸는 용기를 갖고 있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진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모험을 싫어하지 않는 커플도 있다.

그러한 예를 다음에 들어보기로 하자.
조이와 하브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보수적이고 대부분의 시민이 남녀의 성별 역할의 전통에 따르고 있는 마을이다.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에서 가사와 육아'라고 하는 역할 분담에 따른 각각의 가족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이와 하브는 사람들의 비판을 각오하면서 스스로의 행동 방식으로 생활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보수적인 사람들과의 어울리기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했다. 두 사람 공히 일하러 나갔다. 가사, 육아도 두 사람이 분담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 가족에 대한 책임은 두 사람이 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하기로 하고 자신들의 지역 사회에 대하여 하나의 모델을 제시했던 것이다. 하브는 매주 목요일 맨즈 클럽 모임을 결석했다. 목요일?은 조이의 야근날이어서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하브에 대해 남자들은 처의 엉덩이에 붙어다니는 약한 벌레라고 비판했다. 조이의 어머니도 똑같이 옛날 사고 방식에 따라 아이를 돌보는 것은 어머니의 책임이며, 남편이 그 일 때문에 중요한 남자 동료와 만나는 데에 나가지 않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자기자신의 생각에 충실하며, 진실하게 산다는 것이 굳이 모두를 말로 밝힐 수는 없다. '진실을 고백한다'는 것은 아니다. 진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러한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의 신념에 입각해서 행동한다. 그 행동이 상대에게 인정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위험을 각오한다. "자신이 자신에게 불충실하게 있을 수는 없다."라고 어느날 그는 아내에게 이야기 했다. "자신의 직장에 있는 여성과 2개월 정도 만나고 있다. 그녀의 성적 매력에 끌리고 있다. 당신이 자신의 신체적인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이 불만인 것이다. 너무 살이 쪘다. 그대와 아이들로부터 떠나는 것은 정말 싫었지만 집안의 일이 견뎌내기 힘들어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예와 같이 결혼 생활에 진실하게 살 결의에 도달한 때에는 자신의 사고 방식이나 기대를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자신들의 결혼 생활에 있어서 힘의 균형, 편의, 정신적 측면, 애정의 재생 가능성, 우정을 구하는 욕구, 애정의 관계에 대한 헌신적 노력 결의, 진실하게 사는 노력 등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서로 이햐기하고 이해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

헌신적 노력 결의(commitment)와 책임
커미트먼트(commitment)에는 무언가를 한다는 것을 약속한다는 의미가 있다. 자신의 시간, 에너지, 몸, 기능,소유물을 소정의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결의를 한다. 결혼과 같이 극적인 계약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혹은 그러한 형태를 취하지 않고 마음이나 머리속에서 '계약'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계약'이나 '약속'이 결혼전에 행해지기도 하고 결혼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하는 경우도 있다. 확실히 의식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막연하게 행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성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과 결혼한다는 것은 같지 않다. 어느쪽이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다르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혼하는 커플이 확실히 증가하고는 있지만 사람들은 결혼 생활을 오랫동안 계속되길 원하는 결의를 갖고 결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다만 함께 살고 있는 커플은 장래에 대해서 보다 현재의 관계에 헌신적 노력 결의를 하며, 깊고 긴 관계를 맺기를 피하고 있다. 정서적, 성적, 경제적인 결의가 충만되어 있는 사이에는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관계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더욱 깊은 관계로 헌신적 결의를 요구하는 동서자도 있다.

릴리와 스티브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대학생으로 이미 4년에 걸쳐서 함께 공부하고 있다. 학사 과정에서 석사 과정에 들어가고 있는 두 사람으로서 공부에 많은 시간이나 에너지가 필요하다. 돈도 든다. 두 사람 모두 장학금과 아르바이트의 수입으로 어떻게든 생활이 될 수 있는 상태이다. 이윽고 릴리가 임신함으로써 상황은 변화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관계를 중요하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태어날 아이를 위한 안정된 부모로 되기 위해 결혼하기로 했던 것이다. "친구중에는 결혼하여 곧 이혼한 사람이 많았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서로에게 정말 헌신적 노력 결의를 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진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은혼식을 축복하도록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연인과의 별리의 심적 고통을 반복하여 맛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고, 또 깊은 우정으로 결부되어 있다. 다만 동거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도 가능했다. 법적으로도 어떤 구속도 없는 생활의 편리함을 알고 있다. 싫어지게 되면 헤어지는 것도 간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혼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헌신적 노력 결의가 서로 상대에 대하여, 그리고 결혼 생활에 대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새로운 책임을 맡을 결의를 했던 것이다. 사전에 의하면 '책임을 진다'는 것은 '법적, 윤리적으로 타인의 이익과 타인에늬 배려에 대한 책무를 수행한다'라는 의미이다. 책무나 의무에 대해 신뢰받는 행동을 한다는 의미이다.

결혼에 있어서의 경제적 책임은 일반적으로 남편에게 부가되어져 있다. 그리고 가사와 육아는 주로 아내의 책임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성별 역할 분담의 사고 방식은 변화하고 있다. 남녀는 평등하다는 의식에서 전통적으로 명확히 분별되어진 성별 역할 분담을 답습하지 않는 커플이 증가하고 있다.

과거에 많은 문화에 있어서는 성 행위를 의무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앞에서도 기술했다. 그같은 사회에서는 부부는 서로의 성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법적으로 의무지어져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남편이 6개월 이상 성 불능이라든가, 처가 성 행위를 거부하고 있는 경우에는 이혼의 법적 근거가 된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법률이 이혼을 간단하게 허가하지 않는 사회, 나라에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법적 책임과 같이 윤리적인 책임도 그 사고 방식에 있어서 보여진다.어떤 사회나 국가에서 허용되어 있는 행위가 다른 곳에서는 불륜 행위로 간주되며, 사형의 대상으로 되는 경우도 있었다. 간음은 장기간 사형의 대상으로 되어 왔다. 오늘날은 다르다. 오늘날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커플이 적지 않다. 마이켈의 사례를 소개해 보기로 하자.

어떤 회사의 상급관리직에 있는 30세. 출장이 많은 마이켈은 자신의 성 생활을 변호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처인 루이스는 즐기지 않아요. 때문에 다른 여성과 섹스하고 있어요.' 이에 대하여 루이스는 다음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 "여하튼 우리들은 살고 있는 마을에서 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의 웃음 거리로 되기는 싫어요. 게다가 하면 나에게 분명치 않게 해주거든요."

'상황적 윤리'라는 말이 있는데 어떤 상황에 있어서는 허용되지만 다른 상황에 있어서는 허용되지 않는 윤리관을 의미하는 말이다. 여기에서 에릭 에릭슨의 말을 인용해 보기로 하자.
'무엇이 법적이며, 법적이 아닌가 라든가, 무엇이 도덕적이며, 도덕적이 아닌가를 알고 있는 자가 무엇이 윤리적인가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매우 도덕적인 사람도 비윤리적인 것을 행할 수 있으며, 다른 하년 이 도덕적인 것을 행하고 있는 윤리적인 사람도 내심의 갈등에서 비극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책임을 수반하는 윤리적인 의미 때문에 가치관의 갈등이 생기는 때 고뇌를 초래하는 경우가 곧잘 있다. 낸시의 사례를 통하여 설명해 보기로 하자. 낸시는 17세로 임신 7개월이다. 갓난 아기의 물건을 사는 체 하고 훔쳤기 때문에 붙들리게 되었다. "도리가 없어요. 랜디는 아이를 원치 않고 있어요. 그래서 갓난 아기의 의복을 살돈을 전혀 주지 않아요. 어쩌면 좋겠습니까?" 라고 절규하여 울었다.

모든 관계에는 책임이 수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어떤 사람이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싫어 싫어 "하고도 수행한다. 어떤 사람은 전혀 서행하지 않는다. 그 책임에 대해서 곧잘 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이 수행되지 않는 다는경우도 있다. 상대로서 책임을 명확하게 하기 때문에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추측에 입각해서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상대에 대하여 기대하고 있는 것을 상대가 알 고 있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로부터 자신이 필요로 하는 욕구는 강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강한 욕구로부터 상대에 대하여 과잉적으로 헌신적 노력 결의를 주고 마는 것이다. 상대로부터 요구되는 기쁨 때문에 상대에게 지나치게 해서 그 과잉 커미트먼트에 눈치를 채고 책임을 회피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상대를 잘 섬기거나 상대가 좋은대로 하고 있는 사람이 급히 '발단'을 일으키며 자유를 요구 하고 나온다. "자신으로 되는 자유를 원한다."라든가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하고 싶다."라고 하는 표현은 그때까지 상대에 대한 책임을 많이 느끼는 한편 자신을 가볍게 하고 있는 사람이 곧잘 말한다.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들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좋다.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는다는 데에서 시작해 보면 좋다. 나는 매일 집을 나서기 전에 한 시간을 곧잘 자신만의 시간으로서 즐긴다. 명상의 시간이다. 정적한 때임과 동시에 낮 시간과는 다른 생물의 움직임을 느끼는 때이기도 한다. 공기는 상쾌해서 나의 피부를 비단같이 싸 준다. 창을 통하여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들의 속삼임이 귀에 들려 온다. 잔디밭 위를 뛰어 날으는 메뚜기가 보인다. 이윽고 수탉이 한 가닥 높은 소리를 내고 암탉들을 잠에서 깨게 한다. 바로 이 때가 우주의 일부라는 것을 자작하게 하고 경험하게 해 주는 시간이다. 하룻밤 잠을 잔 후 다시 나의 감각을 불러 일깨우고 하루의 계획을 세우거나 때로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거나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고 지내는 시간이다. 한 시간 거기에서 나 자신에 대한 책임과 하나로 되는 것이며, 나는 그것을 지킬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결과 나 자신으로서나 타인으로서도 그 날이 유익한 하루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사람?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함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로서 인생에 있어서 역할이라든가, 책임 자체가 그 개인 이상으로 중요하게 되고 마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책임을 수행하고 끝냈을 때-예를 들면 퇴직하거나 아이들이 보금자리를 떠나 독립했을 때 그렇게 말하고 사람은 보다 유익하지 못한 사람으로 되고 만다고 생각하거나 실속없는 기분으로 되고 만다. 이러한 사람은 그때까지의 인생에 있어서 개인적인 취미등에 관심을 기울이지았기 때문에 이같은 상태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사람은 고령이기 때문에, 혹은 몸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젊을 때와 같은 에너지를 이미 갖고 있지 않다. 또 그 시점에서는 서로 새로운 결의를 굳게 하거나, 종래의 결의를 재확인하는 에너지를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특히 청년 중심으로 되면서 우리들이 살아오고 있는 사회에는 사랑에 의해서 맺어진 관계를 늙어서도 육성하고 계속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다. 로버트 브리우닝은 한편 이같이 노래하고 있다.

나와 더불어 늙기를 원한다.
최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므로.
최초가 그를 위해 만들어진
인생의 최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므로.
사랑에 의해서 맺어진 결혼 생활을 희망하는 커플은 각자가 자기 자신으로 되는 책임과 커플로서의 책임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한 데에서 그 책임이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서도 기뻐하면서 수행할 수가 있게 된다. 또 새로운 노력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도전할 수 있게 된다. 또 두 사람이서 결의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더우기 하나의 책임이나 일이 전체의 책임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에 이를 때 거기에서 깊은 신뢰감이 두 사람 사이에 육성되는 것은 아닐까?

신뢰와 용서
결혼이 '성스러운 계약'을 맺은 관계로 성장했을 때 서로에 '사랑하고 존경하며 위로하는' 맹세가 교환되게 되는 것이다. 이들 말이 두 사람의 정신적 결합을 나타내는 맹세로된다. 남편에게 이혼을 신청 받았다고 하는 부인이 카운슬링을 받으러 왔다. 눈물 섞인 소리와 함께 더불어 다음과 같은 불만을 말했다. "우리들의 결혼은 신이 정한 데에 따른 것이라고 두 사람 모두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때문에 우리들 결혼은 특별히 축복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째서 이지경으로 되었을까요. 신에 의해서 맺어진 영혼이 어째서 파탄될까요!" '성스러운 인연'은 단순한 사회적인 의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결혼이 단순한 사회적인 습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결혼은 단순한 편의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으로서는 '신뢰'라 함은 '있는 것'(being)보다도 무언가를 '하는 것'(doing)인 것이다.

예를 들면 "그대가 집을 말끔히 정돈해 주는 것을 신뢰하고 있다." "그대가 나의 친구를 중요시 해 주는 것을 신뢰하고 있다." "그대가 착실하게 예산대로 돈을 사용하는 것을 신뢰하고 있다."와 같은 표현에서의 '신뢰'는 상대가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동해 준다고 믿고 있다는 의미여서, 즉 상대헤 대한 기대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성스러운' 관계로서 경험되는 결혼 생활에 있어서는 상대를 신뢰한다는 것은 정신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서로 쌍방의 정직함에 의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하는 것만이 아니고 상대의 존재 그 자체, 즉 상대가 그 사람인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같은 형태에서 신뢰받는 것은 자신이 존경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뢰를 상실한다는 것은 파국을 의미한다. 재앙이 있을뿐 이든가 고통을 초래한다. "신뢰받고 있기 때문에 실망했다!"라는 탄식을 듣는다. 진실을 중요하게 하는 커플로서는 고백, 보상, 용서 등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결과보다도 과정이 때로는 중요한 경우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지는 않는 것이다.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상처받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타인을 상처 입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불륜의 행위는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고, 결혼 생활을 파괴시키는 원인으로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상태가 발생했을 때에 그 파프너는 신뢰가 밑받침 되었다고 느낄 수 있으며, 또 자신이 버림 받는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또 그 상대를 용서하지 않는다고도 생각할지 모른다. 또 그 상대는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쌍방을 맺는 신뢰가 손상되고 만 것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때로는 복원하고 싶은 상태로 되고마는 경우가 많은것이다. 다음 사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프레드는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고 이같이 말했다. "별로 자신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말하자면 하룻밤만의 일이었기 때문에-그대가 야근으로 피로해 졌을 때 그대 친구들인 애디스가 방문해 왔다. 서로 슬픈 일이 있었어요. 술을 조금 하던 중에 어느 사이엔가 침대에 들어가 있었던 거예요. 특별히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남편의 변명에 대하여 패기는 울면서 이같이 답했다. "당신으로서는 아무렇지도 않다 하더라도 나 자신은 남편과 친구를 하룻밤 사이에 잃어버렸어요. 그것이 저로서는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가, 당신에게는 분명치 않아요! 당신이나 애디스를 더욱 신뢰할 수 없는 것이예요! 나의 마음을 굉장히 상하게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잖아요!"
타인에 대한 신뢰를 상실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는 것도 파국적으로 되며 그로 인해 절망적으로 되는 경우가 있다.

"당신을 더욱 신뢰할 수 없다."라는 표현뿐만 아니라 "자신을 더욱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라는 표현을 우리들은 곧잘 듣게 된다. 이같은 자신이 신뢰할 수 없게 된다는 상태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면 자신의 가치관에 따른 행동이 취해질 수 없다든가 싫은 것을 하고마는 때라든가 자신의 언약을 지킬 수 없다고 하는 때에 발생한다. 자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때의 고통을 다음 말이 잘 전하고 있다.

"유혹에 지고 마니 어쨌든 정말로 나는 단정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죄악감 때문에 자실하게 될 정도였어요. 이같은 것은 더 이상 바(bar)에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자신에게나 아내에게나 맹세했습니다. 술을 마시면 마치 말처럼 마시고 마는 것은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귀가하기전에 한잔 마시고 바에 들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차가 충돌하고 그 차에 타고 있던 아이들과 큰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프론트의 유리를 돌파하여 얼굴에 상처를 입혔던 것이기 때문에. 도대체 자신은 어째서 이런 것일까? 어째서 자신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일까?"

이같이 자신이 맹세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강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말며 고독감이 엄습해 오는 것이 보통이다. 이 케이스의 남성과 같이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결국 이 남성은 유감스럽지만 자살하고 말았다. 자신의 행위를 보상하는 노력을 태만히 하고 용서를 얻을 기회를 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뢰를 상실했을 때에 그 문제를 인정함으로써 진실로 대치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 비현실적인 기대를 사대에게 거는 것을 포기하고 그 상대가 인간인 점을 인정하며, 그 행위를 용서하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또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보고 "이 나는 대체 어떻게 된건가? 밖에 비치는 나와 안에 숨겨진 나의 참된 모습을 확실히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같이 자기 자신을 '수용'할 수 있게 되면 자기 방어적으로 되는 것을 막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이유를 말하거나 하지 않게 된다. 또 피해자나 박해자의 역할을 연출하지 않아도 될 수 있게 된다. 즉 자신을 용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용서'라 함은 '반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그치고 방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반감을 포기하는 것과 상대를 용서한다는 두 가지의 요소를 갖고 있다.

'방면'이라 함을 벌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벌한다'는 것이 성 생활을 거부한다든가, 대화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된다든가, 약속에 늦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등과 같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혹은 "이제는 당신은 두 번 다시 믿지 않겠어." "두 번 다시 사랑하지 않는다!" "용서할지라도 절대 잊지 않겠어"와 같은 표현을 나타내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상대에게 많은 고통을 주고 있는 것에 눈치채지 못한 채 상대를 벌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용서한다는 것은 상대를 벌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우기 용서는 자신만이 올바르다고 하는 생각이나 자신은 완벽하다고 하는 생각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또 "스스로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당신이지요."와 같은 대화 방식을 곧잘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그 상대를 방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벌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애정 대신에 증오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반감을 나타내며 용서하지는 않는다.

물론 상대가 신뢰할 수 없게 된 때에는 반감을 품는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문제가 발생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대화가 필요하다. 그것도 장시간의 대화, 서로의 생각만이 아니고 마음속의 생각, 감정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비로소 서로를 용서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완전하게 되는 것을 확실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완전히 가치있는 목표는 아니고 '전체적인 것, 그 자체를 이상으로 해야할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전체적인 인간으로 되는 것은 일생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이른바 순례가 아닐까? 그 순례의 여로에서 우리들은 여러 가지 과제나 문제에 부딪친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하나 하나 해결하는 노력을 신중히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사랑하는 커플이 밤에 서로 이야기함으로써 그 다난한 인생의 여로는 걸어 가기가 쉽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6. 결혼에 있어서 문제
"일찍 돌와와 준다고 말했잖아요."
"그래, 말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과 잠깐 한잔 했지."
"덕분에 음식이 완전히 식어버렸어요."
"나와 상관하지 말고 그대로 해요."
"나는 관계 하겠어요! 아이들과 한 시간과 같이 있지 않고선."
"또 시작이군. 언제나 그 모양이야. 귀찮게 말하네!"
"그런데 당신은 내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것을 절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집에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 대화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의견이나 가치관이 충돌하는 데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연애 감정에 빠지거나 경제적 안정을 구하는 데에 마음을 쏟고 있는 커플은 결혼 생활에 있어서 이윽고 부딪칠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문제를 예상할 수가 없다. 완벽하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예상해도 엄격한 현실에는 눈을 닫고 있다.

결혼 생활에는 문제가 계속 일어난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게 되며 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문제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해결 방법을 배우는 것 자체가 즐거운 학습으로 된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나 상대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기회로 된다고는 예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편 문제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그들은 문제를 도전으로서 받아 들이기 때문이다. 쌍방의 대인 관계에 관한 능력을 시험하는 문제를 환영한다. 전근, 전거에 따르는 문제, 차를 살 때 등에 발생하는 의견 차이들도 쌍방의 이해를 깊게 하는 기회로서 마다 하지 않는다.

한편 문제 해결을 피하는데 열중하는 커플도 적지 않다. 예를 들면 경비가 예상 이상으로 나왔다는 문제. 학교의 성적이 떨어져도 아이들 자신이 그것에 무관심하다든가 냉담하게 된 부부 관계, 여가를 어떻게 보낼까 하는 문제 등에 성실하게 대처해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 해결을 피할 수는 있어도 문제의 발생을 피할 수는 없다. 인생에 있어서 문제는 계속되는 것이다. 개인이나 대인 관계에 관련된 문제는 모두 결혼에 연결되는 것이다. 작은 문제도 발생한다. 예를 들면 이를 닦는 방법의 문제, 쓰레기를 버리는 당번, 아이들의 통학에 따르는 당번과 같은 것에서 이해를 달리 한다거나 불만을 느끼는 일상 생활 장면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큰 문제도 나올 것이다. 실업, 늙은 부모와의 동거, 교통 사고 등과 같은 비극적인 문제도 일어날 수 있다.

문제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데에는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문제가 크게 되고 손을 댈 수 없는 상태로 되기까지 내버려 두고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가 적을 때 인전하는 것을 게을리 하거나 해결을 방치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작은 문제를 크게 만들고 만다. 그리고 위기적 상황에 이르러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무언가 구체받을지도 모르는 결혼도 붕괴하고 만다. 다음 로라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우리들이 결혼하고 아직 6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은 때 제이는 다른 여성과 함께 하고 싶다고 해서 이혼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던 것이다. 더우기 몇 년 전에 일일지라도 지금 생각을 돌이켜보면 나에게 전남편과의 아이들이 둘이 있었는데, 필시 그것을 부담스럽게 느꼈던것 같았습니다. 결혼 했을 때 두 아이가 딸린 나와 결혼하는 것이 제이로서 어떤 문제로 될까는 이미 생각하고 예상했던 일이지만 제이가 아이들과 함께 살 수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잊어 버렸습니다."

저번 날 밤의 일을 지금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농담으로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제이의 변화사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변호사는 그의 친구였습니다. 나의 친구이기도 합니다만. 변호사는 나에게 이같이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밤에 제이가 나가는 경우가 많아도 참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에 대해 무엇이나 말하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것을 그를 나무라거나 하면 필시 화를 내고 물건을 정리해서 집을 나가게 된다고 생각해도. 그리고 그와의 섹스를 기뻐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가요? 자신의 기분에 대해 말하지 않는 적이 있었어요?"
그렇게 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혼을 피하기 위해 결국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4개월 후에 남편은 내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바보예요! 그녀는 당신과 이혼하지 않으면 나를 죽이겠다고 위협했어요. 내가 나빴어. 다시 한번 시작해보고싶소!" "나는 당신을 체념하지 않았어요. 물론 옛날로 되돌아가 주기를 바래요."라고 대답했다.

로라는 고통을 경험했던 결혼 생활을 되살리는 방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부가 서로 아이들로부터 해방되어 혼자로 되는 시간의 필요성을 빨리 알아차렸었다면 이러한 고통스러운 경험을 피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결혼 문제에서도 일목요연한 면도 있다. 예를 들면 정치에 관한 의견의 대립, 자녀 육아에 관한 의견의 차이, 돈의 사용 방법과 같은 문제 등. 한편 명백하지 않는 문제도 있다. 몸도 마음도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어쩐지 상대에 대하여 불만이라든가 큰 문제로 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해도 일의 중대성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같은 결혼에 있어서 명백한 문제는 물론 불명료한 문제를 인식하는 방법을 본장에서 생각하기로 한다. 또 실제로 많은 커플은 어떻게 문제에 대응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싶다. 더우기 어쨌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싶다. 더우기 어쨌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는 것도 아울러 생각해 보고 싶다.
욕구, 의견, 가치관의 대립

개인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가치관이 대립하는 때, 결혼 생활에 관한 의견이나 상대에 대한 사고 방식이 다른 때 등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개인의 심신과 건강, 정신 면의 건강을 유지해 가지 위해서는 이들 영역의 욕구(need)가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들 욕구는 물질적으로 충족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창문에 자물쇠를 잠그는 것으로 몸의 안전을 요구하는 욕구는 충족될 것이다. 몸의 포옹이라는 행위에 대해서 마음의 안정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는 경우도 가능하다. 이러한 사물이나 행위에 의한 대립은 그 상대에 따라 문제가 인식되고, 그 문제의 해결에 부응하고 있는 증명으로서 느껴지는 것이다.

욕구가 대립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경우엔느 대게 쌍방의 욕구가 달리하고 있는 것으로, 그것이 충족되지 않느다고 느끼는 때에 나타난다. 때문에 어떤 욕구를 느끼며 그 욕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가 분명해져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휴일에 한 쪽이 느긋하게 잠자고 피로를 회복하고 싶다고 하는데 대하여, 다른 한편은 집에 있으면 휴식이 즐어들기 때문에 함께 어디엔가 나가고 싶어 한다.

이같이 쌍방의 욕구가 대립하는 경우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고 상대에게 욕구를 맞추는 타협의 길을 선택한다. 혹은 개인의 욕구 충족보다도 두 사람의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지금으로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는 것을 뒤로 미룬다. 이러한 타협이 얻어지지 않는 문제라면 그것은 상당히 중요한 가치관이 엇갈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결혼관이라 함은 결혼 생활이 어떠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예를 들면 편의성으 ?중요하게 생각한다든가, 정신성이나 연모의 정에 의한 연대, 우정이나 애정에 의한 결합이 중요하다든가 하는 사고 방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같이 결혼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나 태도가 다르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면 어느 한 쪽이 격한 연애 감정을 요구하고 있는데 대하여 어느 한 쪽은 우정에 입각한 위안을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쌍방의 상이한 태도가 결혼 생활의 여러 가지 면에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를 들면 휴일에 어디로 갈까, 친구 관계의 존재 방식, 돈의 사용방법 등에 필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아내의 방식은 믿음이 깊은데 대하여 남편의 방식은 무관심하고, 회사의 교제를 아내에게도 중요하게 하고 싶어 하고 있는 경우 등에는 아내가 신앙상의 의무를 부과하는 것과 남편 회상의 교제에 남편과 함께 나가는 것이 양립할 수 없다는 문제로 고민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의견이라는 것은 수정하거나 변경하거나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가 않다. 예를 들면 상대의 시각에서 다시 생각하는 노력을 해 봄으로써 의견을 바꾸게 되는 경우도 있다. 또 의견이 서서히 변경되는 경우도 있으며, 새로운 발견이나 자각을 얻어 급히 변화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한편 상대에 대한 기대와 쌍방의 역할에 관한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강하게 대립하는 경우도 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사고 방식을 수용하고 갈등을 피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커플은 서로 상대에 대하여 그리움, 연모의 생각으로 충만되어 있을 때에는 심신이 공히 친밀한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있으며, 다른 때에는 심리적·물리적인 공간을 설정할 필요를 느끼며, 각각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관여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의 관심은 때로는 무대상의 스포트라이트와 같이 하나의 장소, 하나의 물건에 집중하는 경우도 있으며, 무대 전체를 비추는 라이트와 같이 광범위하게 미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결혼 생활에 있어서 배드 매이킹(bed making)을 하거나 말거나 내버려두고 있다든가, 신문을 정돈하지 않는다는 사소한 사건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경우도 있으며, 다른 한편 따뜻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 마음을 기울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의 차이는 성별 역할에 관한 것에 많이 보여진다. 남성은 전통적으로 하나의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대하여 여성은 몇 가지의 일을 한 번에 보고있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다.

울부짖는 젖먹이, 펄펄 끓고 있는 탕, 계속 울리고 있는 전화 등에 단번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여성의 입장인 것이다. 이러한 다른 입장이나 역할을 넘어서 또 상대의 입장에서 사건을 보는 데에서 자신의 견해(의견)을 바꿀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쌍방의 의견을 수정하거나 보충하는 경우도 가능한 것이다. 나아가 한편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눈독을 들이는 경우가 많은데 대해 다른 한편 나날의 생활 문제에 느끼지 못했던 경우나 쌍방이 관심의 대상을 달리하고 있는 경우 등에는 상당히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그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가치관을 달리하고 있는데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가치관이라 함은 개인의 인생을 지탱하는 신념이며, 인간은 자신의 가치관을 유지하기 위해 싸움도 하며 자신의 생명을 거는 경우조차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가치관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지 않으며, 또 가치관에 입각해서 자신이 정한 우선 순위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가치관은 개인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 세계에 이바지하는 가치, 의미에 관한 기본적인 신념이다. 이러한 개인의 신념에 입각해서 가치관은 그 개인의 생각, 감정, 태도, 행동에 항상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가치관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안전, 자유, 종교적 구제, 정의, 연대, 우정 등과 같은 것은 상당히 중요한 가치관이라고 생각된다. 그 개인의 사는 방법, 성격, 목표 등을 좌우할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나날의 행동이나 개인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가치관, 이른바 일상적 가치관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청결, 효율, 정돈, 원조적 태도, 창조성, 애정, 기민, 협력성, 매력 등과 같은 것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자신의 가치관을 언어화하거나 행동으로 표시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인간인가를 다른 사람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나타내어진 가치관에 의해서 그 사람의 정체성이 명확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혼의 구제'를 중요시하게 되며, 과학자는 진리를 중요시 할지도 모른다. 가치관은 그 개인의 이미지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치관의 충돌은 상당히 심각한 대립을 초래할 수 있게 된다. 또 자신에 대해서 신념이나 사물의 사고 방식에 대한 도전을 받게도 된다. 이렇게 하여 다른 사람과의 충돌이 자주 가치관에 대한 도전이나 위협으로 될 수 있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도 있다. 결혼 상대가 일에 관하여 뇌물을 받는다든가 폭력을 행사한다든가,불륜 행위를 하고 있는 등과 같은 윤리나 법률에 위반하는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로 발전하거나 결혼 생활이 파괴에 이르는 경우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기술해 온 개인의 욕구, 결혼관이나 가치관은 개인적인 성장이 추진되고 또 결혼 생활의 영위가 계속됨에 따라 변화하는 경우도 있다. 쌍방의 욕구를 서로 충족하는 것이 가능한 때로 있고 그렇지 못한 때도 있는 것이다. 같은 결혼관이나 상당히 유사한 생각을 품을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한 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는 그러한 차이에 의한 문제는 해결될 수 있으며, 또 해결하면서 영위를 계속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불행히도 대립이 격화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 경우에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여부를 판단하는 데에는 단지 욕구가 충족되어 있지 않는 것이 원인인가, 그렇지 않으면 의견이 서로 차이가 있기 때문인가, 혹은 가치관의 충돌에 의한 것인가를 확인하면 좋다고 생각한다. 대게 많은 결혼 생활에 있어서 문제는 이들 세 가지의 것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은 어떤 커플의 카운슬링에서의 인용이다. 이 세 가지 관계를 보이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남편: "나는 아내와의 성 생활이 불만스럽습니다. 아내는 섹스에 흥미가 없어요."
아내: "그렇게 말하지만 먼저 나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아요. 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한송이 꽃이라도 좋은데 나에 대한 애정을 보인다면 그런 기분으로 되지 않겠어요!"

남편: "설마, 아이가 아니잖아요. 꽃을 바라다니. 뭐?"

아내: "그럴지도 모르겟습니다만 한송이의 꽃이라도 당신의 마음이 들어 있다면 틀려요. 요컨데 나는 단지 당신의 성욕의 배설구로 되고 싶지 않아요. 내가 성의 도구만으로 취급 된다면 마치 쓰레기 상자와 같은 느낌이예요. 정말로 비참한 생각이 들어요. 자신의 몸이 불결하다는 느낌이예요. 사랑받고 싶으며,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는 느낌이예요. 알겠습니까?"

남편: "······나의 손님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정중히 대해 준다면 그대를 더욱 좋아하게 될 거예요."
이러한 모양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된다. 이 커플은 욕구의 갈등에 따라 생기는 문제에 번민하고 있다. 즉 남편의 성적 욕구와 아내의 정서적 안정의 욕구가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결혼관의 차이도 있다. 남편이 성적 욕구의 충족이나 사회적 편의를 중시하는 결혼관을 갖고 있는데 대하여 아내 쪽은 로맨틱한 요소를 중시하고 있다. 이 커플의 문제는 신혼 기분이 사라지고 성적 매력이나 정열적인 연애 감정이 감퇴하기 시작한 결혼 2년째 경부터 시작되었다.

결혼 전에는 심신이 모두 친밀한 관계로 되고 싶다고 하는 꿈을 서로 말했었지만 10년간 같은 것을 반복하는 나날을 보내온 결과 또 문제가 아직 작았던 때에 해결하는 것을 태만히 해온 결과 장래의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신선함이나 즐거움의 결여, 마음을 닫아 버린 태도 등에 의해 두 사람의 관계는 성장하는 것이 아니고 피상적인 외관만의 사귐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더우기 이 부부로서는 주로 편의성의 충족이 결혼 생활의 중심으로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아내는 남편에 대한 연애 감정이 살아날 가능성을 전혀 믿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로서는 이번에는 남편이 확실히 작용하여 경제적으로 안정된 장래를 기대할 수 있는 방식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 남편 쪽은 처음부터 출세하는 것, 그리고 수입이 많은 것이 중요했으며, 그 때문에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자신을 이해하고 지원하여 주기를 바라고 있다. 특히 직업상 손님을 집으로 초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러한 때에 아내가 매력적인 여주인공으로 행동해 주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이 두 사람은 각자의 의견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상대의 의견에 대한 비난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쌍방이 자신의 생각을 고집함에 따라 쌍방 사이에 골이 깊어 졌다. 이윽고 이 부부는 분노에 가득찬 결혼 생활을 1년간 보낸 후 이혼했지만 그로부터 3년후에 다시 결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 자신들의 심경을 이같이 고백한다.

"우리들은 이제 싸우는 것을 두렵게 느낀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지금까지와 같이 다만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하려고 하는 대신에 어떻게 해서든지 두 사람의 관계를 소중히 해간다는 기분으로 되고 있습니다."
이 부부의 예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욕구를 느끼는 데에서 결혼관을 서로 이해하고 나아가 그 결혼관과 가치관의 관계를 명확히 할 때까지의 과정을 도시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신체적·심리적욕구)->(결혼관의 이해)->(윤리관과의 관련의 이해)->(문제의해결 대립의 해소)
그런데 쌍방의 가치관이 양립할 수 있는 것인 경우에 생기는 문제는 무언가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양립할 수 없는 경우에는 대립·갈등이 생기며, 쌍방의 사이에 거리가 만들어지고 신체적, 심리적인 친밀함이 희박하게 된다. 이윽고 별거하며 이혼에 이르는 경우가 보통이다. 또 쌍방으로서 많은 고통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1830- 1886)은 이같은 세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별거는 천국의 기쁨 모두를 가져다 준다.
그렇지만 희망없는 지옥의 고통 모두를 수반한다."
경제, 육아, 배우자의 부모와의 관계
돈에 관련된 문제, 육아에 관한 문제, 배우자의 부모와의 문제는 결혼 생활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직면하는 고뇌의 씨앗이다. 적어도 그 중의 하나로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세가지 모두에 번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이들 일로 남편과 언쟁을 한다, 경비에 대한 논의를 한다, 쌍방의 부모의 일로 싸운다, 그것이 일상의 일로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해결방법을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번민한다.

그것이 서서히 두 사람의 관계에 앙금을 만들게 된다. 어느 것도 똑 같은 것, 하찮은 일로 언쟁하는 것이 타성화 되며, 그러한 것의 반복이 지루함을 초래한다. 이윽고 결혼 생활의 붕괴에 이르는 것과 같은 위기적 상황으로까지 발전한다. 은행 구좌의 밸런스를 조사해 두는 것은 누구의 책임이라든가, 아이들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은 누가 한다는 역할 분담에 관한 것 등, 가령 어떤 사소한 일에도 곧잘 말다툼을 하며, 문제 해결에 이르지 못하고 방치하여 두면 결혼 생활에 있어서 거북한 장애로 된다.

금전에 관련된 다툼은 일상적으로 많은 커플이 마치 바로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받아 들이고 있는 것 같다. 신용 카드를 남용한다. 정해진 예산에 따르지 않고 낭비한다. 술 사교를 위한 낭비가 많아진다. 도박에 빠진다. 무리한 가옥을 구입-의복에 낭비한다. 가구를 지나치게 사 들인다. 이러한 것이 커다란 경제상의 문제로 발전할 수 밖에 없다. 어느 한 쪽이 마치 아이들처럼 앞 일을 생각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경우가 있다. 그 상대는 부모와 같이 잔소리가 심한 통제를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것을 구입할 형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잖아!" 와 같은 비난의 말을 한다. 그것은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라도 근본적인 해결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수입액을 명확히 알고, 경비 예산을 세워서 그에 따라 초과할 수는 없다. '예방에 우선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세 명의 아이를 갖고 있는 커플의 예를 소개해 보기로 하자. "우리들은 착실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죠가 전근 명령을 받게 되면서 무언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던 일이 일어났으며, 게다가 나도 일을 그만 두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아이들의 이에 버침대를 붙이는 예기치 않았던 큰 경비가 거듭되었기에 생활은 야단이 났습니다!"

이같은 예기치 않았던 일에 부딪치는 것은 드물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은 사태에 대비해서 대책을 세워 두는 것이 필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 않으면 집이나 차를 저당하여 대부를 받는 파국으로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뒤에 위기적 상황으로 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경제상의 문제를 피하는 데에는 일정한 금액을 결정하여 정기적으로 긴급시 비용으로 저축해 두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충고를 타인으로부터 받은 것이지만 그에 대하여 앞의 죠는 이렇게 반론하고 있다. 그것이 귀찮아 졌어요. 거기에다가 언제나 앞 일을 걱정하면서 인생을 살아나가는데 매일 즐거움이 없지 않겠습니까? 지루한 생활이 싫다고 하는 죠에게 다른 하나의 충고는 자신이 자유롭게 사용하는 작은 금액을 할당한다는 것이었다. 쌍방이 어떤 금액 정도는 자신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금액을 결정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경비와의 균형을 생각해서 타당한 금액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계획적인 배려를 태만히 하는 데에서 부부 관계를 위태롭게 하거나 가정 경제의 파탄을 초래하게 된다.

육아 문제를 다음으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아이들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육아를 어떻게 할까 등과 같은 것이 부부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경제상의 말썽과 같이 육아에 관계되는 문제를 부정하거나, 피하거나, 싸우거나,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가 곧잘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서 쌍방이 반감을 품게 되거나 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서로 대화하고 행동하는 도리밖에 달리 길은 없다. 아이들에게는 양친이 필요하며, 양친은 싸움보다 육아에 관계되는 많은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고 있는 편이 바람직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친자간의 역할 관계에 관계되는 싸움이 때때로 가정 속에서 커다란 문제로 된다. 이 문제는 때로는 공개적인 싸움으로 되는 경우가 있다. "말한대로 어김없이 하세요!" "싫습니다." "뭐?"라고 하면서 부모의 손이 올라간다. 때로는 숨겨진, 간접적인 형태를 취한다. "말한대로 곧 해요!" "음···TV를 보게 놔 두세요!" "처음이니까···어김없이 하나까, 걱정말고!····"라고 말하며 그 후에도 가사를 돕지 않는 아이에게 아버지는 화를 낸다든가 체념하고 만다.

이러한 육아에 관한 일상 문제가 부부간의 커다란 부담요인으로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가치관에 관계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부모들로서는 집안이 정돈되고 기분좋게 산다는 것이 중요한데 대하여 아이들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 때문에 아이들의 방 청소와 같은 사소한 일로 큰 싸움이 된다. 그러한 갈등의 대립이 생긴 경우에 쌍방이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 들이지 않는 일이 많은 것이다.

가족은 하나의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족의 일원이 고통을 느끼거나 문제를 일으키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한 예를 보기로 하자.
수지라는 여자 아이가 카운슬링에 동행해 왔다. 학교에서도 상당히 문제가 있으며 두 사람의 누이 필리스와 마아가렛을 짖궂게 해서 괴롭힌다는 것이다. 부모는 수지가 '문제아'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수지 자신은 스스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동생들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언제나 두 사람이 함께 하나로 되어 나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거예요. 그러한 때에 아버지는 언제나 동생들 편으로 되어 나에게 나쁘게 말해요. 어머니는 그러한 때에 곧 다른 방으로 가라고 합니다. 실은 수지는 어머니가 데려온 아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아이인 두 사람의 동생들을 아버지가 특히 사랑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수지의 편으로 되거나 하면 아버지와의 관계가 거북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데려온 아이의 부모가 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움을 눈치채지 못하고 아이들이 있는 부모와 결혼하는 자도 많은 것 같다. 앞의 배우자와의 이별(죽음이나 이혼등에 의한)에 의하여 많은 심적 고통을 경험한 친자와 새로운 가족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결혼하고 마는 것이다.
아이들로서는 이별을 강요받은 부모와의 마음의 심적 관계를 끊는 것은 용이하지가 않다. 그 연대감을 무리하게 끊도록 하면 모든 사람이 고통받게 된다. 아이가 딸린 부모와의 결혼 생활이나 가정생활의 어려움을 경시하고 이상화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고통받게 되고 마는 것이다.
또 부모끼리 결혼 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바로 그 딸린 아이와 새로운 부모가 사랑에 의해서 맺어지고 서로 수용하는 관계로 된다고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며, 혹은 언제까지 그렇게 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혼한 가족의 모든 사람이 불안감, 죄책감, 반감과 같은 감정을 다소라도 품는 것은 보통인 것이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부모에 대해서 보다도 낳은 부모에게 충실하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부모 쪽으로서도 그러한 아이에 대하여 질투심 등을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그 아이에게 고통을 느끼게 하거나 과거의 일을 무리하게 잊어 버리게 하려고 하는 것은 없을까? 그리고 그러한 것이어려운 노력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상당한 지혜나 기능이 필요하다. 결혼은 새로운 상대와 동시에 가족 전체를 ꊨ요시하고 싶어한다면 가령 자신의 아니나 데려온 아이가 증오스러운 언동을 보인다고 해도 사랑을 갖고 이해하고, 수용하고, 사랑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재혼에 따른 데려온 아이와의 문제와 똑같이 배우자의 부모 문제도 복잡하다. 대체로 자신의 부모나 가족에 대하여 변호적으로 되며 상대의 부모나 가족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되기 쉬운 법이다.

"나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가족의 일에 관하여 그런 말을 할 수 없어요!" "당신의 어머니는 언제나 나의 일을 나쁘게 말해요!" "당신의 아버지가 우리들의 아이 앞에서 난폭한 말을 하는 것을 원치 않아요!"등과 같은 비난의 말이 자주 상대에게 행해지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충고는 간단하다. 요컨데 비판하지 않으면 좋다는 것이다.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동정하여도 좋지만 비판하는 것은 좋지 않다. 자신의 가족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되고 있는 때에 상대가 똑같이 비판하는 것이라면 그 본인은 급히 도전적으로 되며, 자신의 가족을 지키는 입장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부모나 다른 가족, 친척인 사람들과 비교하여 배우자는 '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꽤나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다음으로 고령으로 된 친족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조부모, 양친이나 다른 친족이 나이를 먹고 타인을 돌보며, 경제적·정서적인 지원을 필요로 하는 상태로 되었을 때의 문제이다. 나이가 먹은 부모 모두가 지금까지 고통이나 수고라든가 경험에 입각한 인생의 지혜 때문에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을 수는 없다. 개중에는 아이들이 무언가 참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부모가 아이들을 회피하거나 무시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더우기 아이들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강제하기 때문에 싫어지는 부모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 있어서는 독신으로 된 모친의 1/3은 아이들과 동거하고 있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들 동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많은 문제를 불러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 차이는 동거하기 전의 친자 관계가 어떠했던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동거하기 전의 건전한 관계를 유지해 온 친자는 동거한 후에도 더욱 훌륭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보모나 다른 친족이 결혼한 아이들과 동거하지 않는 경우에도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아이들이 부모에 대하여 경제적인 원조를 강요하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강요하거나 등을 하여 부모의 희생을 강요받고 있다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반대로 아이들이 희생을 강요받는 경우도 있다. 쌍방의 욕구 대립이 생기고 가치관의 충돌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문제를 인식하고 한계를 정하는 것을 게을리하면 마치 참을성에 비해 에너지를 허비하기 쉽고 사랑에 의해 맺어진 생활로부터 그만큼 멀어지게 되고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제한을 설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한 예를 다음에 소개해 보기로 하자.

젊고 아주 매력적인 아내이며 어머니인 '진'이라는 여성이 카운슬링을 받으러 왔다. 남편과 사별한 자신의 어머니와의 문제로 상담하고 싶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언제나 전화해서 말다툼하지 않는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시간이 적어져서 곤란을 겪고 있어요'라고 말하는데 실은 어머니의 일은 구실이며, 자기 자신의 결혼 생활에서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와 전화해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충고에 따라 어머니에게 전화하는 것을 지금까지와 같이 하루에 두번씩 하지 않고 이틀에 한번씩 하도록 했던 결과 그녀는 자신의 결혼 생활 문제에 대처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문제가 개선되었던 것이다. 도 어머니의 문제나 기분도 개선되었다고 말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어머니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네가 자기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생각하게 되면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너에게 언제나 전화하는 것을 바라지 않지만 그것을 너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분명치 않았던거야!'라고.

위기적인 문제
결혼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커다란 시련으로 되는 위기적 상황에 부딪치는 경우가 몇번이고 있다. 위기적 상황은 교통 사고, 화재, 죽음에 이르는 병 등과 같이 전혜 예기치 않은 때에 비극적인 형태로 방문해 올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태에 충격을 받고 믿어지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이 보통이다.

결혼 생활에 있어서는 어떤 일정한 위기적 상황의 때를 거쳐 이윽고 비극적인 결과에 이르는 경우가 곧잘 있다. 예를 들면 장기간 질병의 결과 사망한다든가, 직업상의 문제가 계속된 후에 실업한다든가, 지불이 될 수 없었던 결과로 상대로부터 소송당하는 등과 같은 사태에 직면한다. 이러한 이른바 예기되어 있던 시험에는 준비할 시간이 있기 때문에 대응 준비가 될 수 있다. 어떤 상태에 이른 때 위기적 상황이 악화하여 표면에 드러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그러한 사태에 부딪친 때 더욱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는 생각으로 되는 경우가 있다.
위기에는 천재와 같이 자기의 운명을 이미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한편 통제될 수 있는 것, 자신의 대응 방식에 따라서 그 결과를 좌우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와같은 위험은 불안감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같은 것은 그러한 상황에 있어서는 적절한 결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지 않는 결단을 하고 만다는 걱정이 있다. 또 최선의 방법을 고르는 대신에 어느 길도 최선이지는 않지만, 그 어느 곳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상황도 곧잘 있는 것이다. 이같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결단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위기적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위기에 전력을 투입하여 도전하는 사람으로서 '일단 유사시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사람들로부터 보여진다. 이러한 사람의 병은 결국 치유된다든가 몸이나 마음, 정신과 같은 것은 때를 거쳐서 힘을 부활하는 것이며, 인간에게는 모두 건강을 회복하는 힘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믿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거듭하고 그 과정이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본다.

다른 한편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 또 그것을 알고 있음으로써 얻어지는 자신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도 있다. 위기에 만난 경우 소위 '필요한 때에 기가 죽고 만다'는 사람은 무능력한 상태로 되고 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존심이 죽고 마는 것이다. 어떤 나이 젊은 어머니는 이러한 고백을 하고 있다. "나는 자신이 없고 불안합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곧 마음이 전도되고 맙니다. 도움을 구하러 누군가에게 전화를 할지라도 다이얼을 차분하게 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위기적 상태에 부딪친 후에는 반드시 병석에 들어눕게 되어요."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위기도 있다. 그러한 위기에는 몇 가지의 비극적인 요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서 인생이나 결혼 생활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다음 예를 보기로 하자.
나의 남편의 딸 레노아는 미인으로 많은 재능을 가진 여성이다. 농업을 영위하는 남편과 두명의 아이(딸)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 어느날 말을 타다가 자신의 경도에 단단하게 부푼 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정밀 검사를 받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악성이었기 때문에 급기야 한쪽 다리와 허리 일부를 절단하는 큰 수술을 받았던 것이다.
하루밤 사이에 그녀는 신체장애자로 되고 말았다. 이 불행한 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비극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지만 그녀도 남편도 그렇게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두 사람으로서 '문제'가 도래했다는 것은 틀림이 없었지만 그것으로서 모두가 끝났다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아내이며 어머니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잊지 않았다. 이윽고 심한 통증을 억제하기 위해 약에 의존하는 데서 탈출하려고 하는 결의와노력에 따라 약을 단절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차의자에 의지하는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결의와 노력에 의해 의족을 사용하여 걷게 되었다.

의족이라고 해도 허리 뼈의 일부를 절제하고 있었기때문에 허리를 벨트로서 잡아매지 않으면 안된다. 나아가 다시 수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인어같은 수영 방식 뿐이지만 훌륭하게 수영하게 되었다. 말도 다시 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한쪽 다리밖에 없을지라도 섹시한 여성으로 계속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파국적인 참사에 부딪친 것이 아니었던가? 현실은 다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것이다. 두 사람의 결혼이 서로 사랑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서로 사랑하는 생활에도 문제가 생기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역자 주:문제는 해결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공간의 문제
지금까지 기술해 온 결혼 생활에 있어서 문제는 욕구, 의견, 가치관의 차이와 같은 상당히 명확한 대립으로 되어 나타났던 것이지만 이외에 잠재적인 문제도 있다. 예를 들면 공간이나 시간, 지루한 감 등과 같은 문제이다.
우선 공간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결혼 생활에 있어서 물리적, 심리적 공간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지 않는 커플이 의외로 많은 것이다. 쌍방이 상대의 공간에 출입하는 것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공간(space)은 장소(place)와 깊이 관계되어 있지만 양자는 똑같지는 않다. 영어의 place는 물리적인 영역을 나타내는 말이다. 한편 space는 세 가지의 측면을 가진 영역으로서 정의될 수 있다.

신체적 공간이 그 중의 한 측면이다. 사람들이 신체적 공간을 찾는 욕구는 개인에 따라서 다르다. 또 때와 상황에 따라서도 다를 것이다. 예를 들면 수면중의 신체적 공간은 적어도 괜찮은데 반하여 춤을 출 때에는 보다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1930년대나 40년대에 유행한 것과 같이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춤을 추는 것과 같은 스타일에서는 그다지 많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다. 반대로 각자가 몸을 움직여서 춤추는 스타일의 댄스에서는 넓은 공간이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자신의 신체적 공간에 관하여 자작하고 있지 않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용모나 신체의 동작 등에 자신이 없거나 싫어한다는 이유 등에서 자신의 신체적 공간의 내측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또 자신의 신체적 공간이 밖의 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가 분명치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한다든가 고독감에 사로잡히고 말거나 할 때에 비로소 자신의 신체적 공간의 현실이나 욕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개중에는 그렇게 깨닫는 것을 방해하는 데 힘쓰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몸이 어디엔가 고통을 느낀 때에 약에 의해서 그 고통을 잊어 버리고 만다. 그 결과 자신의 몸을 느끼지 못하고 만다. 이같은 약의 효과는 자주 '무감각'한 경험을 초래한다. 그러한 경험은 '마치 자신의 몸의 밖에서 자신의 몸을 보고 있는 것 같다'등과 '몸으로부터 자신이 나갔다고 하기보다도 몸 전체가 공중에 떠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이와 유사한 상태를 사람들은 수면중에 꿈을 꾸고 있을 때 곧잘 경험한다. 자신이 어디에 특별한 장소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은 무언가 물리적 공간을 갖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각각 타인으로부터 침해받을 수 없는 개인적인 공간을 갖고 있다. 때로는 그것은 일정한 장소일지로 모른다. 특별한 밤이라든가 자신이 홀로되는 은둔의 장소이거나 자신의 소유물이 채워져 있는 사람이거나 한다. 또 개인적 공간은 일시적인 경우도 있다. 어떤 여성은 매주 화요일밤에 도서관에 간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때를 즐긴다. 그녀는 도서관을 자신의 '공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앞장에서도 기술한 바와 같이 이러한 물리적 공간을 찾는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의 하나인 것이다. 이것을 항상 침해하는 관계에서는 필연적으로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상대(파트너)의 책상을 '청소'한다는 이름으로 서랍을 조사하는 행위는 상대의 물리적 공간을 침해하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물리적인 공간이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은 앞에서 기술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도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사람은 아이들 때에 넓은 공간이 있는 주거에서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사적인 공간을 특히 중요시하게 되거나 '자신의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는 각 가족이 각각의 물리적 공간을 중요시하여 가족 간의 거리를 설정하는 것을 중시한다. 때로는 그 때문에 부족간에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조차 있다.

다음으로 심리적인 공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생각이나 원망을 품는 사적인 공간을 모든 인간은 필요로 한다. 그와 동시에 이 심리적인 공간을 타인과 사로 나누고 싶은 욕구를 사람들은 갖고 있으며,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체적 공간을 서로 나누면서, 즉 몸은 상대와 함께 거주하면서 서로의 마음이 다른 장소에 있는 상태에 있을 때 불만을 느낀다. 남편이 "바깥의 일을 집에 갖고 돌아온다."고 할 때 곧잘 처는 불만을 품는다. 혹은 가계의 문제나 아이들 문제를 아내가 이야기하는데 남편은 흥미를 보이지 않고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당연하면서 결혼 생활하는 데서 일어나며 때로는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하나의 패턴으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상대와 있을 때 항상 바깥의 '연인'과 함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든가, 바깥 일이나 작업일을 항상 염두해 두고 있는 것이라면 그 두 사람은 '소중한 자기'를 서로 나누지 않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즉 정서적으로 동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뿐만인가 물리적으로도 진실한 의미에 있어서 '함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들 부부는 그때 그때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서로 질문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같이 질문받으면 즉시 그러면서도 정직하게 대답하도록 정했다. 그러한 때의 상대의 답에 놀라는 경우가 곧잘 있다. 어떤 장소로 향해서 우리들은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 도중에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지요?"라고 들었을 때 "손자와 함께 풀에서 즐기고 있다."라고 내가 답하고 "골프장에서 완벽한 플레이를 하고 있는 꿈을 꾸고 있다." 라고 하는 단순한 질문을 물음으로써 같은 심리적 공간에 자신들이 되돌아 오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초심리학의 세계에서 탈체 경험(탈체경험:자신의 몸밖의 체험)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의 경험에 의한 레포트에 의하면 그 사람의 퍼서낼러티의 중요한 부분, 혹은 '영이 몸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밖으로 나가며, 또 다시 체내로 되돌아온다고 하는 것이다. 의료의 분야에 있어서도 사망에 임하거나 죽음 직후의 경험을 연구하고 있는 사람의 레포트에 의하면 죽음을 아주 가깝게 경험한 사람이나 의학적 죽음으로 인정받고도 소생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체험을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더우기 "한 번에 두 곳의 다른 장소에 있다"고 하는 경험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또 공상은 사람을 다른 장소에 옮기는 힘이 있으며, 편지로 원격지에 있는 사람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온다'고 하는 경험을 초래한다.

사랑에 의해서 맺어진 부부 관계에 있어서는 상대의 존재를 느끼는데 항상 신체적으로 함께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생각을 품는다고 한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상대와 함께 거주하면서도 상대의 존재를 서로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의 사정이나 질병이라든가, 혹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필요로 되고 있는 등과 같은 이유에서 서로 격리되어 있을지라도 상대의 존재를 신변가까이 느끼고 있음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특히 최근의 나의 경험을 이야기해보자.

정열적인 연앨르 하고 있던 어떤 남성이 베란다에서 몇 명의 사람들과 앉아 있다. 수명의 사람이 그에게 이야기를 걸어 왔지만 그는 전혀 그에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느꼈던 것이다. 그의 몸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춘 상태로 되어 있다. 그의 눈은 마치 먼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서 나는 내심으로 생각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의 몸은 의자 위에 있을지라도 진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떤 공간에 살고 있을까? 먼곳? 그렇지 않으면 여기에? 혹은 동시에 각각 다른 장소에 있는 것일까?"라고.
시간의 문제

결혼 생활에 있어서 시간도 하나의 중요한 영역이다. 어떤 커플은 항상 때의 엇갈림을 경험하고 있다. 결혼 생활에 있어서 행복감은 상대와의 시간의 길이나 질을 어떻게 평가할까에 관계되어 있다. 즉 상대와의 시간의 쌍방 평가에 따라 시간이 즐거웠던 것인가,그렇지 않으면 지루한 때였던가,결정되어 지는 것이다. 그 경험 장식에 따라서 오래 느껴지거나, 짧게 느껴지거나 한다.
시간이라는 것은 대체로 시계나 달력 등에서 계산되는 것과 같은 때의 흐름의 양으로서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예를 들면 '착실하게 시간에 돌아갈 수 있다'등과 '7월 5일이 우리들의 기념일'이라고 하는 '때'이다. 그런데 '때'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계산되어 왔다. 태양, 달, 별 등에 의해서 계산되며, 초시계나 불시계에 의해서도 계산된다. 물론 기계적인 시계에 의해서도 계산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때가 표준화되고 그리니치 시간에 의해서 때의 정확성이 결정되고 있다. 미국에서도 동부와 서부는 각가 다른 표준 시간으로 생활이 영위되고 있다. 여름에는 여름 시간이 설정되거나 한다.

때는 공간에 있어서 움직임에 의해서도 계산된다. 지축에 따라 일회전 하는 데에 요하는 시간이 하루를 구성한다. 반대로 공간이 시간에 의해서 계산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로스앤젤레스로부터 샌프란시스코 사이는 차로 6시간 거리에 있다.'라고 하는 표현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때'에는 우리들이 경험하는 것과 언제나 같은 것이 아니라는 측면도 있다. 예를 들면 시리우스(이리별)를 밤에 공중에서 본다는 경험은 실은 구년전의 빛을 보고 있는 것이어서 그것을 보는 시점에서 이미 시리우스는 다른 위치에 있게 된다. 즉, 지금 보고 있는 별은 전혀 별개의 곳으로 이동해 있는 것이다.

아인쉬타인은 '때'가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우주선에 타고 있는 비행사가 스피드를 내면 그의 시계는 지체된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것에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지구에 돌아온다. 그리고 우주에서의 비행은 불과 수일간이었다고 하는 생각에 반하여, 현실은 수년이었다고 하는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결혼 생활에 있어서의 '때'의 경험 방식에 대해서 말하면 이러한 것이 있다. 상대가 자신을 보고 하하 웃는다. 그 '하하!' 웃음도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예를 들면 애정)을 반영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과 때를 지났을 때의 경험을 생각해 내고 있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하하 웃고 있는 그 사람을 '여기'와 다른 별도의 시간과 공간에 살고 있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도 있다. 늙은 부부가 지금 이 시간에 상대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그리운 과거의 좋았던 시대의 상대를 응시해 보고 있는 경우도 있을 수도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때'는 '최량의 때(primetime;골든 아우어)'라고 불려지는 상태의 시간이다. 이 프라임타임에 있어서는 쌍방이 자신의 최선을 상대에게 주고. 또 상대에게 자신의 관심을 최대한 기울인다. 상대에게 진실을 말한다. 애정을 머금고 상대의 말을 경청한다. 즉, 쌍방이 마음으로부터 상대와 함께 한다고 하는 때이다. 그같은 때에는 쌍방이 서로 '지금 여기에(now and here)'살며 문제와 대치하며 해결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따라서 친밀감을 육성할 뿐만 아니라 쌍방의 욕구나 가치관에 서로 부응하고 있다. 한편의 눈이 TV를 본다든가, 한편의 귀가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등과 같이 다른 공간에 있는 상태가 아니고 상대에 대하여 자신의 최선을 다해 주고 있다고 하는 때인 것이다.

이같은 프라임 타임과 대조적인 것이 '나머지의 때'이다. 맛이나 향기를 잃은 '나머지의 것'으로서의 시간이다. 오염된 공기, 더럽혀진 몸과 같이 신선함을 결한 때이다. 하루의 길이나 가사를 끝내는 등에 찾아드는 때와 같은 것이다. 음식물의 '나머지 것'에는 아직 맛있는 것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머지의 때'는 먹을 것이 없다. 적어도 결혼에 영양을 주고 풍부하게 하는 것과 같은 자양분은 없다고 해도 좋은 것이다.
결혼 생활에 있어서는 서로 상대에 대하여 프라임 타임을 주지 않고, '나머지의 때'를 서로 줄 때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더우기 다른 종류의 때도 있다. '도전의 때'이다. 결혼 생활에 있어서는 항상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며, 또 낡은 문제와 대결하지 않을 수가 없는 때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러한 때에 문제와 대결하기를 거부한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문제에 도전한다. 도전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는 자주 위기에 부딪힌 때에 경험한다. 물론 그같은 일시적인 경험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더욱 장시간에 걸쳐서 경험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몇 가지의 예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정년 퇴직 후에 이른바 '흔들이 의자(rocking chair)의 생활'로 허리를 낙착시키고 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인생의 사는 보람을 상실하고 만 사람들이다. 새로운 도전을 피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에 반하여 그러한 은둔 생활을 거절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취미나 일을 갖는다거나 새로운 직업을 개척하거나 그리고 고령에 달해서도 도전의 때를 경험하거나 젊을 때와 변함없이 충실한 나날을 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 사람들은 '때'에 대하여 어떤 새로운 의미를 주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또 낡은 것에 대해 도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기술해 온 바와 같은 '때'에 추가해서 '때의 밖(時의 外)'에 살고 있다고 경험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다른 새로운 개념이 아니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러한 현상이 설명되어 오고 있다.
'때의 밖'에 산다는 현상은 우리들이 보통으로 경험하는 때를 초월한 때의 경험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실제로 두 시간은 경과했는데 수분이었다고 경험을 하거나, 반대로 수시간을 경과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실제는 수분간이었다고 하는 경우가 곧잘 있다.

결심한 성 행위에 열중하고 있던 시간들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이러한 때의 시간은 앞에 기술한 프라임 타임(prime time)과는 좀 다른 것이며, 프라임 타임과 같이 때가 시계 시간과 정비례 한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시계의 시간을 초월한 '때의 밖'의 경험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을 초월한 때는 아주 영원한 때의 일부로 참여하든가, 다른 세계의 아름다움을 맛본다고 하는 정신적 경험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몸 밖의 경험이어서 말로 표현하기도 곤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기술해 온 것에서 분명한 바와 같이 때와의 쌍방의 관련 방식이나 때의 의미 부여가 다른 경우에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관한 문제를 쌍방의 이해와 협력에 의해서 해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레스토랑에서 식사에 아내를 꾀어내는 것보다도 하루의 가사가 끝난 '나머지 시간'부터 아내를 해방하고 낙착된 프라임 타임의 때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또 한편의 파트너가 상대에게 챌린지 타임(도전의 때)으로서의 인식을 촉구하고 문제 해결을 하는 노력을 강요하는 경우도 가능하다. 이같이 쌍방이 '때'에 대한 쌍방의 관련 방식이나 쌍방이 경험하고 있는 '때' 종류를 서로 이해함으로써 결혼 생활에 있어서 이 중요한 영역에서의 지지를 얻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 가져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