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는 가면을 벗으셔도 됩니다.
< 교회이니 이제 그만 가면 벗으셔도 됩니다 > 손성찬
'페르조나'
'가면'이라는 의미로 한 인격이 어떤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쓰는 것,
혹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을 위해 쓰는 내면의 가면을 지칭하는 심리학의 용어입니다.
물론 아빠가 됐는데도 애하고 먹을 것 갖고 싸우면 안되는 것 처럼,
각자 역할에 맞는 것들이 있기에 가면을 쓴다는 것이 꼭 나쁜 의미는 아니며, 때로는 이것이 어른이 되었다는 징표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래 자신의 인격과 착용한 가면의 모습이 너무 이질적으로 여겨질 때,
혹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남들이 원하는 모습을 비쳐지길 지속적으로 강요당할 때는 심리적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때문에 이런 가면놀이에 지친 현대인들은 마치 감기에 걸리듯 우울감에 빠지며, 심해지면 우울증으로 이어집니다.
더 이상 내가 내가 아닌 것 같고, 홀로 된것같은 고립감에 너무 외롭습니다.
분명히 이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대를 가리켜 ‘가면 무도회’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실제 자신의 희노애락은 가면 밑으로 감추고, 주어지는 음악에 맞추어 끝없이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세태를 풍자하는 표현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역시 일종의 가면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요구받기도 합니다.
자신의 현재 신앙상태나, 성화된 정도와는 별개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원하든 원치않든 가면을 쓰게되지요.
이게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솔직히 전도도 잘 못하면서, 문턱을 넘으려는 분들에게 자꾸 가면 씌우지 맙시다.
모두가 인정하는 한국교회 문화도 아닌, 개교회의 문화를 너무 들이대지 마십시요.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들에게 양복 입히려고 하지마십시요.
누군가에게는 일상복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족쇄처럼 다가옵니다.
억하심정의 일탈이 아니라면, 때가 되면 다 사리에 맞게 알아서 맞추십니다.
또한 제가 남자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남자들에게 너무 여성성을 강조하지 마십시요.
지나친 온순함과 온정주의를 강요당하는 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또한 모태신앙와 비모태신앙은 다르고, 신앙의 연한이 긴 분들과, 이제 막 진입한 분들의 사고구조가 다릅니다.
안그래도 외국어같은 교회 언어 배우는데도 힘든데, 피부색깔까지 바꾸라고 하는 것은 좀 너무해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복음을 듣고 찾아왔다가 비복음적 요소에 넌더리를 내며 적응하지 못하고 떠납니다.
다행히 믿음의 힘으로 적응하더라도 이내 재미가 없어집니다.
가면쓰고 돌아다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자기의 진정성과 실제를 드러낼 수 없는 것은 결국 부정적 감정으로 다가옵니다.
전통적 의미의 그리스도인 상을 너무 강요하지 마십시요.
그것은 일종의 프레임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리 신앙 안으로 진입했을 지라도, 본래 머물던 인격과 성품의 출발선이 상대적으로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 가면쓰기를 가장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아마도 저 같은 교회 사역자들일 것입니다.
어느 날 멘탈이 많이 흔들리더군요.
그 날 특별히 맘을 크게 상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럴까하며 스스로 그 날과 그 어간의 날들을 복기해보니 알겠더군요.
억울한 것을 잘 못참는 제 성향과는 반대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미안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고 사과만 하고 다녔던 제 행적이 기억났습니다.
제가 스티브 잡스인 줄 알았습니다.
제가 사과나무도 아닌데, 제 모든 영양분을 짜내, 사과를 만들어서 나눠주다보니 심력이 소진된 것이지요.
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멘탈이 탈탈 털립니다.
주일에 사역 마치고 집에 돌아와 우는 사역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착한 인생들은 우울감에 괴로워하고, 어떤 이들은 인격성 장애로 흘러갑니다.
얼마나 그 마음들이 화석처럼 굳어지는지… 대놓고 가면 쓰고 응대하는 감정노동자들은 오죽하겠습니까?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가면쓰기를 요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새 고착화된 가면놀이가 교회의 공동체됨을 망치는 주범으로 여겨집니다.
'이곳은 교회입니다' 라는 말은 '교회이니 빨리 가면 쓰세요'가 아니라 '교회이니 이제 그만 가면 벗으셔도 됩니다' 라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니까 가면 벗으셔도 됩니다는 사실을 진정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물론 바램입니다.
벗으란다고 쉽게 벗겨질 가면들이 아닙니다.
어느정도의 사회화 과정을 거치다보면, 어느새 가면이 내 얼굴인지, 내 얼굴이 가면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신공이 발휘되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반영구적 화장, 아니 분장이 이루어집니다.
어찌나 강력한 접착제로 붙여져 있는지, 타인의 강제력으로는 절대 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타인의 힘으로 강제적으로 하려다간 얼굴피부가 같이 떨어질 지경입니다.
그러나 분명 벗겨져야할 것입니다.
가면놀이가 지속될 수록 너무 외롭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가면을 벗고 마주대할 수 있는 사람, 잠시라도 진면목을 보여주며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답습니다.
단순한 접목인지 모르겠지만, 이솝우화의 하나인 ‘해와 바람’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서로 누가 더 강한지를 두고 겨루던 해와 바람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외투를 빨리 벗기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강함의 기준을 정합니다.
이에 바람은 있는 힘껏 바람을 불어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려 하나, 그러할 수록 나그네는 외투를 더 단단히 걸어잠그고 움켜쥡니다.
이에 전심전력을 다해 더 강한 바람으로 응수하나, 나그네는 그럴수록 더 움크리며 외투를 부여잡습니다.
결국 포기합니다.
그런데 해는 바람과는 달리 강제하지 않고 그저 햇살을 내리쬐어 줍니다.
결국 나그네는 그 따뜻한 햇살의 온기에 스스로 외투를 벗어던지게 되지요.
마치 이 나그네의 외투가 우리네의 가면과 비슷합니다.
벗겨내려 한다면 살점이 같이 떨어져 나오거나, 혹은 더 두껍고 강력한 가면을 착용합니다.
결국 따스한 온기를 느껴 벗어도 되겠다 여겨 스스로 벗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넘쳐나는 공동체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타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오픈하고, 공유하며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신비 아닐까요?
가면을 벗어던지고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며,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서로 하나되어 영적인 교제를 하는 것이 진정한 기적입니다.
사랑만이 이와 같은 오묘한 기적을 일으킵니다.
나아가 한두 사람의 호의를 넘어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사랑만이 이와 같은 난관에 빠져있는 현대인들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신비한 기적을 일으킵니다.
존경하는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말로 마무리해봅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만 허용된다.
서로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운 사람들만이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
오직 내 자신과 성품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빚어졌을 때에만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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