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3(히2:5-18)
시편 22편은 고난의 시로서 다윗의 찬양이며 고백이다(히2:6-8).
다윗 왕조는 대대로 원수의 박해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고 찬양하였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22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대입한다.
이러한 대입을 통하여 모든 연약함을 친히 몸으로 체휼하신 아들의 직무를 설명하고 있다.
왜 시편 22편을 아들에게 직접 대입하고 적용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본체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옛 뜻과 경륜이 아들을 통하여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다윗왕국은 구약의 하나님 나라이다.
대리 통치자 다윗을 통하여 율법으로 경영된 여호와의 나라이다.
따라서 다윗 왕조를 대적하는 것은 여호와를 대적하는 일이다.
다윗이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 그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모독을 받는 일이다.
따라서 다윗은 자신의 대적자와 원수로부터 여호와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그런데 히브리서가 다윗의 시를 아들에게 대입한 것은
하나님의 옛 사역이 하늘에 속한 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율법의 나라인 다윗왕국이 종말의 천국으로 온전케 되었다는 말이다.
땅에 대한 옛 사역이 하늘에 속한 영원한 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아들의 사역을 대제사장직과 왕직을 연결하여 설명한다.
히브리서 초반부는 아들의 대제사장직을 말한다(히2:19, 17-18, 3:1, 4:14-5:4).
히브리서 중반에서는 아들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고 말한다(히5:5-10).
또 히브리서 초반부에서는 아들의 대제사장직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그 내용은 왕권에 관한 내용이다(히5:5).
대제사장이면서 왕으로서의 직무 수행을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아들에 대하여 성전제도를 토대로 설명한다.
휘장 안의 영역은 사도들이 말하는 하늘이다.
하늘에서 영광의 보좌에 좌정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구약에서 여호와께서는 율법으로 옛 백성과 세상을 통치하셨다.
따라서 모세는 최초로 세상 창조와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질서를 설명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인간과 세상을 규정하고 설명한다.
이러한 모세의 언어와 개념을 따라
히브리서 기자도 대제사장과 왕권을 연결하여 아들을 설명한다.
아들에 대하여
“죽음의 고난을 받으셔서 영광과 존귀로 왕관을 쓰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 앉으심이 합당하도다”
라고 말한다(히2:10)
또 히브리서는 맏아들의 개념을 따라 아들을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셔서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
죄와 사망 아래에 신음하는 자를 구원하기 위함이다(갈4:4-5).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주려 하심이니”
라고 말한다(히2:14-15).
예수께서는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
예수의 고난은 모든 사람을 위한 고난이며 만물을 정결케 하기 위함이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이루시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만물로 복종케 하셨다.
그러나 저에게 만물이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교회가 직면하여 있는 현재 상황이다.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형제들을 영광으로 이끄심을 말한다.
그래서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는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을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의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라고 말한다(히2:10).
이 일을 누가 이루었는가?
맏아들의 개념을 사용하여 예수께서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말한다.
예수께서 고난을 감당하신 것은 많은 아들을 영광으로 이끄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온전케 되심이 합당하다고 말한다.
많은 아들을 이끌어서 영광으로 들어가게 하는 일에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다는 것이다(히2:10)
따라서 히브리서는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다.
따라서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
라고 말한다(히2:11).
이처럼 그 아들의 고난을 통하여
많은 아들을 이끌어서 영광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은 대제사장으로서 행하신 일이다.
예수께서 많은 형제를 하늘의 성소로 불러들이신 대제사장임을 강조한다.
이처럼 히브리서는 모세 율법과 제도를 따라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주가 되심을 설명한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 혈육에 속하여 사망 아래에 계셨다.
혈육에 함께 속하였다는 말은 사망의 권세 아래에 거하셨다는 말이다.
이는 율법의 통치 아래에 계셨다는 의미이다.
율법 아래에 거함은 죄 아래에 계신 일이다.
이것이 율법 아래에 세워진 옛 백성의 비참함이다.
따라서 혈육에 함께 속하였다는 것은 사망의 권세 아래에 거함을 의미한다(히2:14).
로마서의 말대로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대로 계셨다는 말이다(롬8:3).
왜 예수께서 혈육에 속하여 사망 아래에 거하셨는가?
이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율법이 시행되는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런데 인용된 시편 22편은
원수들의 핍박 중에서 받은 여호와의 구원을 백성에게 찬양하는 내용이다.
구원의 하나님을 선포하여 의지하도록 하는 내용이다(시22:22-23).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방의 권세를 사망의 권세와 그대로 연결한다.
이는 신구약에서의 여호와의 통치질서의 특징을 보여준다.
구약성경은 땅에 대한 일을 기록하고 신약성경은 하늘에 대한 일을 말하고 있다.
구약에서 여호와께서는 이방의 권세로부터 다윗과 그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다윗의 시를 인용하여
아들을 통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히2:14-15).
이처럼 히브리서는 종말에 보냄을 받은 그 아들이
많은 아들을 영광의 보좌로 인도하시는 구원의 주라고 말한다.
이 아들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만물을 정결케 하시며 위엄의 우편에 앉으신 분이라고 말한다.
히브리서는 아들의 제사장직을 통해서 주어진 구원을 설명한다.
제사장은 자기 백성의 대표자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영광스러운 관을 쓰고 나아간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잠시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있다.
영원히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지성소에 거하지 못한다.
이 말은 영원히 하늘에 거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왕좌에 앉아서 율법의 통치를 집행한 대리 통치자이다.
율법도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온전한 뜻이 아니다.
휘장 밖 죄의 질서에 맞춰진 여호와의 뜻과 경륜이다.
따라서 다윗이 받은 구원은 이방의 권세로부터의 구원이다.
이는 세상적인 구원이라는 말이다.
이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받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다.
그는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이며 만물을 붙드신 보존자이다.
그는 죄를 정결케 하신 구원자이며 위엄의 우편에 앉으신 만유의 주이시다.
그는 만유의 후사이며 모든 권세가 그에게 복종한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위엄의 우편에 앉으셔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
그러나 만물은 아직 아들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그리스도만을 보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자들의 신앙이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흘러 떠내려갈까 조심하라.
이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온전한 심판이 있다”
고 경고한다.
아들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영광을 받으심은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그 아들은 형제들처럼 혈육에 속하셨다고 말한다(히2:14).
그 아들은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으로서 죄를 정결케 하셨다고 말한다(히2:15).
이처럼 그 아들은 형제들과 한 모양으로 혈육에 속하셨던 분이시다.
그 결과 그 아들도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시험을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고 말한다(히2:18).
히브리서 2장 후반부는 고난을 받는 왕과 대제사장을 연결하고 있다.
시편 22편은 고난을 받는 왕의 이야기이다.
고난을 받는 왕을 대제사장직과 연결한다.
이는 종말의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히브리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교회가 받는 고난이다.
이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제사장이 통치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은 구약에서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백성들을 축복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지성소에 나아갈 수 있는 자도 대제사장이다.
영광의 관을 쓰고 여호와께 제사하는 자도 대제사장이다.
그러나 나라 백성이 생육하고 번성한 후에 하나님 나라는 왕을 통해서 경영된다.
그러나 초창기의 하나님 나라는 제사장이 다스리고 경영하였다.
사무엘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왕과 제사장을 연결하고 있다.
그런데 구약에서 제사장과 왕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택함을 입도록 하고 있다.
이방인은 결코 제사장이나 왕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다.
아들도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셨다.
이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애기 위함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여 종 노릇하는 자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이는 천사를 붙들기 위함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기 위함이다”
라고 말한다(히2:14-16).
이처럼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시험을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고 말한다(히2:18).
하늘에 속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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