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관련 예화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경건 생활에 대해 정제된 지혜를 제공해주는 고전으로는, 16세기 도미니칸 수도회에 속했던 평신도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연습]을 들 수 있다. 그 책에서 그는 편지와 대화를 통해. 눈 코 뜰새없이 바쁜 일상생활 중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계속 자각하며 살 수 있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시지 않는다. 때때로 하나님을 잠시 생각하고, 경배하며, 그분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하며, 당신의 슬픔을 그분께 내려놓고, 슬픔 가운데서도 당신에게 주시며 이미 주신 은총들을 생각하고 감사하며 산다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힘든 일이 아님을 알 것이다. 하나님은 되도록 자주 당신이 하나님과 함께 당신의 슬픔을 위로하기를 원하신다. 당신이 식사할 때든지,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라도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라. 잠깐잠깐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다. 당신은 크게 외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보다 더 가까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러한 경건의 훈련은 우리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며,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자주 생각하도록 우리 마음을 훈련시킬 때, 이루어질 수 있다.
기도의 주제가 되지 못할 만큼 중요하지 않은 문제는 없다. 우리가 연습하고 훈련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음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약4:8
같이 가는 길
한 여행자가 말과 당나귀에 짐을 싣고 먼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모두가 기뻤으나 도중에 당나귀가 먼저 지치게 되었다. 그래서 당나귀는 동행하는 말에게 "견디기 힘이 드니 나의 짐을 조금만 덜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같이 친구삼아 가던 말은 당나귀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힘에 지친 당나귀는 얼마 못 가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 주인은 당나귀가 지고 가던 모든 짐과 죽은 당나귀의 털가죽까지도 벗겨 말의 등에 실었다. 결국 울상이 된 채 그 여행이 다 끝날 때까지 말은 큰 고생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돕고 보살펴야 쉬워진다. 혼자만 잘 살려다가 결국은 고난을 혼자 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삶
엘리자벳 빌타의 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가 2층 침실에서 일하다가 창밖을 내다보며 잠깐 쉬는데 빨랫줄에 아름다운 파랑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찬란한 햇빛을 받고 있는 파랑새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얼마간 넋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다 일을 다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꾸 그 파랑새가 또 보고 싶어졌다. 아직도 그 파랑새가 앉아 있나 밖을 내다보다 이번에는 실망하고 말았다. 그처럼 아름답던 파랑새가 누런 암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해가 구름 속에 가려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움은 빛과 이토록 중요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빛이 찬란하면 찬란할수록 더 아름답고 고귀해 보인다. 특히 인간은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여 빛을 발하지 않는 이상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그리스도가 없는 미는 마치 어둠 속에 있는 한 송이의 장미와 다를 바 없듯이 그리스도 없는 삶이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돈과 명예 역시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 없는 지식은 교만해지고 그리스도가 없는 과학은 결국 불행한 오점을 찍을 뿐이라는 것을 절대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너희는 나를 따르라“(요14:6) 길이 없으면 진보가 없으며. 진리가 없으면 지식이 있을 수 없고. 생명이 없이는 삶이 있을 수 없느니라. 내가 길이니 너희는 나를 따라야 하고. 내가 곧 진리이니 너희는 나를 믿어야 하며 내가 곧 생명이니 너희는 나를 소망해야 하느니라. 나는 영원히 멸하지 아니할 길이요. 그릇됨이 없는 진리이며. 영원한 생명이니라.
나는 가장 곧은 길이요. 가장 높은 진리이며. 가장 참된 생명이요 축복받은 생명이며 지음 받지 아니한 생명이니라. 너희가 만일 내 길에 머물고자 하면. 너희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며(8:31,32) 영원한 생명을 붙들게 될 것이니라. 만일 너희가 영생으로 들어가고자 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마19:17)
너희가 만일 진리를 알고자 하거든 나를 믿으라. 너희가 만일 완전하기를 바란다면 가서 너희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도록 하라(마19:21)
너희가 만일 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너희가 만일 복된 삶을 가지려거든 이 현세의 삶을 무시하도록 하라. 너희가 만일 하늘에서 높임을 받고자 한다면 이 세상에서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 하느니라(요12:25) 너희가 만일 나와 더불어 다스리는 자가 되려거든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하라(눅14:27) 이는 오직 십자가의 종들만이 축복과 참된 빛의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
영국의 애버딘시를 방문했을 때 나는 친구의 안내를 받아 이곳저곳 볼 만한 곳을 구경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여기는 빈민가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몇 군데 있는데 가보겠느냐는 얘기다. 친구는 뒷길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한참 가다가 3층 집을 가리켜 보이며
저기 저 방이 보이죠. 전에 거기에 하나님의 훌륭한 한 여성도가 살고 있던 곳이랍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질병가운데 살았지만 항상 명랑한 웃음을 잃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으로 항상 빛나던 성도였습니다.
하면서 말을 잇는다. 한번은 어느 전도자가 고든 미션에서 설교를 하는데 이 소식을 듣고 찾아 왔더랍니다. 이 전도자가 방에 들어서니 그렇게 가난한 처지에도 화창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할머니. 그리스도께서 이곳을 방문해 주신다면서요..”
하고 묻자 이 성도는
“아냐. 아냐. 그건 틀린 말이야.”
하고 대답하더랍니다. 이 할머니가 아마 가는 귀가 먹은 거지 하고 크게 한번 더 외쳤더니 역시
“아냐. 아냐. 그건 틀린 말이야. ”
하기에 이 전도자는 귀가 먹은 것이 틀림없구나 생각하고 귀에다 입을 갖다 대고
“할머니. 그리스도께서 이 집을 방문하시지 않습니까..”
하고 소리쳤답니다. 그러자 이 성도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그건 틀린 거야. 틀리고말고. 그분은 지금 여기 살고 계셔”
하더랍니다.
너와 함께 하리라
유대인들을 멸절시키기 위한 죽음의 나치 포로수용소에서의 일이다. 한 특별한 수용소는 일을 하기 위한 수용소였는데 포로들이 일을 하는 한 그들은 가스실에서 구제될 수 있었다.
솔로몬 로젠버그 가족 중에는 연로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80이 가까운 할아버지는 비인간적인 조건하에서의 장시간의 노동과 영양분의 결핍과 불결한 위생시설로 인해 곧 쓰러지게 되었고 이내 가스실로 옮겨지고 말았다. 솔로몬은 가족 중에서 두 번째로 가스실로 끌려갈 사람은 제일 어린 아들 데이빗이란 것 알고 있었다. 데이빗은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작업량이 점점 더 줄어들었던 것이다. 매일 아침 가족들은 각자 다른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가 밤이 되면 수용소로 서둘러 돌아오곤 했는데 이때마다 아버지 솔로몬은 혹시 막내아들이 가스실로 끌려가지는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과 전율로 몸을 떨어야 했다. 매일 밤, 막사에 돌아오면 솔로몬은 재빨리 데이빗을 찾았다. 그리고 나서 큰아들 야곱과 아내를 확인하는 것이다.
마침내 솔로몬이 두려워하던 날이 오고야 말았다. 일터에서 돌아와 보니 가족 중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솔로몬은 미칠 것 같았다. 그의 눈은 사랑스런 가족의 얼굴을 찾았다. 드디어 큰 아들 야곱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내와 어린 데이빗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재빨리 야곱에게 다그쳐 물었다. “얘야, 내게 말해다오. 데이빗이 오늘 끌려갔단 말이냐?” “네, 아빠. 오늘, 그들이 와서 데이빗을 데려갔어요. 데이빗은 이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요.” “그러면 네 엄마는 어디 있느냐? 네 엄마는 아직 건강하지 않느냐? 그들이 엄마까지 데리고 가지는 않았겠지?” 야곱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 사람들이 처음에 데이빗을 데리러 왔을 때 데이빗은 몹시 겁을 냈어요. 그리곤 울음을 터뜨렸지요. 그때 엄마가 말했어요. 울지 마라, 데이빗. 내가 함께 가서 너를 꼭 붙들어주마. 그리고 엄마는 데이빗이랑 같이 가스실로 가신 거예요. 데이빗은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4)
넘치는 삶
폴 칼슨이라고 하는 의료 선교사는 아프리카의 콩고에 가서 수많은 주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면서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을 치료를 해주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칼슨 박사님, 당신은 피곤하지도 않습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나는 항상 하나님과 가까이 생활하기 때문에 피곤을 알지 못합니다. 나는 매 순간 보람을 느끼며 살아갑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성경을 연구하고 말씀을 전하며 의료봉사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반란군에게 피살되어 순교 하였고, 그의 주머니 속에서는 포켓용 성경이 발견되었는데 그 첫 장에는 "평화"라는 글자가 쓰여 있더라는 것이다.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의 밀림 속에서 더위와 빈곤과 질병과 맞서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싸우던 선한 목자가 되심을 믿고 잔이 넘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당신의 삶의 잔은 어떠한가? 넘치는가? 모자라는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한 다윗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도록 하자.
단 한 치라도 떨어져 있으면
언젠가 한번은 자동차에 열쇠를 끼고 발동을 거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배터리가 약해졌으면 끄륵끄륵 하는 소리라도 날 텐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배터리가 완전히 죽었는가 싶어 살펴보았지만 배터리는 여전했다. 헤드라이트를 켜보니 아주 밝게 불이 들어왔다. 아무리 시동을 걸려고 해도 반응이 없었다.
시간은 점점 지나 약속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큰 일이 난 것이다. 마음이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로드 서비스(Rod Service)를 불렀다.
그 기술자가 한참 이것저것 만지고 나서야 붕- 하고 시동이 걸렸다. 하도이상해서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스타터(Starter)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열쇠를 넣고 돌리면 배터리의 힘에 의해 스타터가 돌아가고 그 힘이 자동차엔진에 시동을 걸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스타터로 연결된 제대로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리 배터리가 좋아도 스타터가 돌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붙어 있어야 하는 부분이 붙어 있어야 하는 부분이 붙어 있지 않고 떨어져 있으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단 한치만 떨어져 있어도 스타터가 하는 작은 부분이 작동이 되지 않으면 엔진에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성경 말씀에 [주 안에 거하라] 고 권면하신다.
주님으로부터 단 한 치라도 떨어져 나가면 인생 엔진에 시동이 걸리지 않는 법이다. 참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단 한 치라도 떨어져 나가 있으면 우리는 모두 죽은 생명이 된다.
당신이 나와 함께 가야만
약 150년 전 웨일즈에서 나이 많은 한 설교자가 조그만 읍에서 열린 전도집회에 설교 초청을 받았다. 회중은 이미 다모였는데 설교자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 목사님과 교역자들이 그 설교자가 묵고 있는 집으로 한 하녀를 보내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며 모든 준비가 다 끝났다는 말을 전하게 하였다. 그 하녀가 갔다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를 방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분은 어떤 사람과 이야기하고 계셨어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들은 "그것 참 이상하군. 모든 사람은 다 여기에 와 있는데, 가서 시간이 이미 지났으니 곧 오셔야 한다고 전하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하녀는 다시 갔다가 돌아와서 보고를 하였다. "그분은 지금 누구와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제가 들으니 그 분은 함께 있는 어떤 사람에게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나는 가서 설교하지 않겠읍니다'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그래, 그럼 이제는 기다리는 게 낫겠군." 목사님들이 대답하였다. 그 나이 많은 설교자는 성령께서 그와 함께 가셔서 그에게 권위와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이 설교하러 간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설교자는 그가 "그 권위"를 가졌다는 것을, 그리고 성령께서 그와 함께 가셔서 그를 통해 말씀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설교를 거부할 만큼 지혜로웠고 또 그만한 신령한 분별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도우시는 주님
얼마 전에 우리 남양만 두레 마을에 경상남도 통영에서 아주머니 한분이 왔는데 앉은뱅이였다. 몇 년 전에 장티푸스를 앓자 시댁에서 만일 예수를 믿지 않으면 병을 고쳐주고, 그래도 계속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고쳐주지 않겠다고 구박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병에 걸려 죽어도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바람에 시댁에서 아예 방에도 들여보내지 않아서 교회당 마룻바닥에서 매일같이 철야를 하다가 앉은뱅이가 된 것이었다.
앉은뱅이가 되고 나니 사람취급을 못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아주머니가 내가 설교한 테이프를 듣고는 '이 목사님을 만나면 내 병이 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다섯 달을 수소문한 끝에 나와 통화를 하게 되었고 남편에게 간절히 부탁해서 두레 마을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환난의 자리에서 자기를 부르짖는 사람의 소리를 꼭 들으시는 분이시다. 그 아주머니가 비록 나에게는 왔지만, 나는 그 분에게 예수님께 부르짖으라고 하며 기도사고, 안하던 안수까지 해주었으며, 비타민도 먹이고 채소죽도 끓여 먹이고 했더니 며칠 전에 그 아주머니가 기도 중에 무릎에 힘을 주고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개가 능력의 종이다. 불 받아라'하는 식의 '운동'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잉광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환난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르짖기만 하면 그 응답이 오는 것을 믿으면 된다.
사사 시대에 백성들이 부르짖는 대로 사사가 왔던 것처럼 지금은 심령의 능력으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께서 오신다.
도움의 낱말 뜻
1. 히브리어
으슈-아 - 구원, 도움, 승리.
아-자르 - 돕다, 구조하다.
트슈-아 - 구출, 구조, 도움, 원조, 승리, 정복, 구제, 구조물, 안전, 무사.
2. 헬라어
에피람바노마이 - 붙잡는다, 붙든다, 잡는다, 관심을 둔다, 돕는다.
에피코레게오 - 공급한다, 준다, 허락한다, 지탱한다, 받든다, 지지한다, 보급한다.
에피코레기아 - 공급, 보급, 지탱, 지지.
* 도움에 대한 성구
1. 누가 도우는가?
하나님 - 신33:29, 시54:4, 히13:6
그리스도 - 엡4:15,16, 히2:18, 4:15,16
성령 - 롬8:26, 빌1:19
천사들 - 단10:13,21, 눅22:43
2.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
자기백성 - 신33:29, 사41:10,13,14
고아 - 시10:14
시험받는 자들 - 히2:18
복음 전도자 - 행26:22
의인 - 시118:7,13
3. 도우심을 받는 방법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람 - 시37:40, 43:5
보좌 앞에 나감 - 히4:16
주의 얼굴을 찾음 - 시27:8,9
4. 주님의 약속
사41:10 - 너를 도와주리라
사44:2 -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49:8 -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고후6:2 -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5. 성도가 도와줄 자
딤전5:16 - 참 과부
욥29:12 - 고아
행20:35 - 약한 사람들
레25:35 - 가난한 자(겔16:49,요일3:17)
롬16:2 - 복음 전파자와 그 동역자들(고후1:11,빌4:3)
사1;17 - 학대 받는 자
사50:4 - 곤핍한 자
6. 성도가 돕는 방법
레25:35-37 - 너와 함께 생활하라. 이익을 위하여 돈을 꾸이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식물을 꾸이지 말라.
사50:4 - 학자의 혀를 주사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 알게 하소서
겔16:49 -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라
행16:9 -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행20:35 -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롬16:2 -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우라
고후1:11 -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빌2:25 -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동행
자신이 무척 존경하는 사람과 동행을 하면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하게 된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동행하고 계심을 의식한다면 내 몸과 생명과 시간의 주인이신 그분께 순종하고자 늘 애쓸 것이다.
동행하심을 알면서도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다.
동행하는 삶
성경 고고학을 가르치는 찰스 셔어라는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대부분의 자기 생애를 팔레스타인에서 고적답사와 연구를 하는 데 바친 분입니다. 그는 선교사로서. 고고학자로서 일을 하다가 고향인 미국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셨습니다. 그 분을 좋아하지 않는 학생들이 아무도 없었고 그 분의 인격 앞에 압도당하지 않는 학생들 또한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교수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처음에 학장님께서 방문을 하고 오셔서 희망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소생할 가능성이 도저히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다시 들려 온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생할 가능성이 조금은 보이는데 소생해도 그 정신이 정상적으로 되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계속 무의식 상태에 무언가 자꾸만 중얼거리는데 아무래도 제 기능을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학장님이 다시 중환자실에 가서 그 분을 보고 와서 학교 예배 시간에 아주 깜짝 놀랄 만한 보고를 합니다. 이 셔어 박사는 절대로 정신 이상이 되지 않을 것이며. 건강이 회복될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들어가서 보니까 중환자실에서 계속 독백처럼 중얼거리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시편 1편을 히브리어로 암송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평상시에 늘 말씀을 암송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만큼 말씀과 가까운 분입니다. 말씀이 그 인격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이 그 분과 같이 거닐고. 또 그 분은 계속 그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인격과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 나타나 있었던 것입니다.
딸의 믿음
영국의 스트라칸 목사님이 어느 날 서재에서 친구와 심각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 그의 딸이 들어왔습니다. 딸의 줄넘기 줄이 엉망으로 엉켜 있었습니다. 그의 딸은 아무 말도 없이 그것을 아버지에게 건네어 주고 조용히 방을 나갔습니다. 그는 친구와의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무심결에 그 줄의 매듭을 다 풀었습니다. 잠시 뒤에 그의 딸이 들어와 아빠. 고마와요!하고 깡충깡충 뛰어 나갔습니다.
스트라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께 이와 같은 태도를 가질 수는 없는지요.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맡겨, 주님께서 그것을 다 해결하게 할 수 있는데 왜 우리는 자기의 힘만으로 해결하려고 그토록 애를 씁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미친 듯이 일하고 있습니까? 직장을 바꿔야 할 것인가, 집을 파는 것이 잘하는 일인가를 결정하지 못하여 우왕좌왕 하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너무 많은 것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사소한 일까지도 주님께 맡기는 믿음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리빙스턴 선교일화
아프리카 선교 사업에 큰 공헌을 한 리빙스턴의 일화.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헌신하다가 영국에 돌아와 옥수포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던 날 예배시간에 학생들에게 설교하게 되었다.
그때 리빙스턴은 사자에게 공격을 받아 불구가 된 한쪽 팔을 옆구리 아래로 늘어뜨리고 고통스럽던 나날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내가 어떻게 고독과 고통과 역경을 이겨 나갔는지 그 비결을 지탱하게 해준 것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는 주의 약속이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내 곁에 서서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할 수 없었다면 저는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멍에를 같이한 자
일찍이 우리나라나 이스라엘에서는 밭을 갈 때 황소와 암소 두 마리가 같은 멍에를 끌고 갑니다. 따라서 두 마리는 보조가 맞아야 합니다.
한 마리가 다른 소보다 빨리 가거나 늦게 간다면 빙 돌아버립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 여러 번 보습 쟁기를 잡아보았습니다.
소걸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더딥니까? 그런 걸음으로 천천히 나아가는데도 보습을 땅에 대고 보니까 막 달아나는 것처럼 빨라 보입니다. 양쪽 소를 번갈아가면서 이쪽으로 몰기도 하고 저쪽으로 몰기도 하는데, 그 모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른쪽 소의 고삐를 탁 채서 빨리 가게 하면 보습은 왼쪽으로 돌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왼쪽 소를 빨리 몰면 이 쟁기는 오른쪽으로 돌아갑니다. 두 마리 소를 같은 보조로 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어느 한쪽이 앞서거나 뒤져도 안 되고, 가다가 한 마리가 숨을 돌리고 쉬어도 안 됩니다. 두 마리가 똑같이 발을 맞추어서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멍에를 같이했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래서 “멍에를 같이했다”는 말은 본디 부부간을 이야기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동업자간에도 이 말을 씁니다. 동반자요 가까운 협력자라는 뜻입니다. 적당히 협력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똑같이 균형을 잡은 동반자이며. 책임도 똑같이 지는 것입니다. 이쪽이 무너지면 저쪽도 무너집니다. 이쪽이 갈 때에는 저쪽도 가야 합니다. 이것이 동반자의 걸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4:3에서 표현한 '참으로 나와 함께 멍에를 같이한 자'란 이토록 절실한 관계입니다. 이것은 유기적이요 균형 잡힌 공존적 관계인 것입니다.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것입니다. 함께 멍에를 메었고 복음전파에 한마음으로 힘썼다는 각성과 인식을 가질 때에 자연히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삶의 운전석을 주님께
차 두 대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하나는 고통 받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고 달리는 앰뷸런스였고 또 한대는 최신식 모델의 세단이었으나 곡선을 마구 달리면서 다른 차를 초월하고 중앙선을 침범하여 위태위태하게 달리고 있었다.
결국은 몇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충돌사고를 일으키고 말 형세였다. 이들 두 대의 차량과 그들 행동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에서 왔을까. 엔진. 차체의 모양. 값의 차이. 아니다. 유일한 차이는 누가 운전석에 앉았었느냐 였다. 하나는 자비의 목적을 가진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술 취한 운전사였었다.
실패하고 냉담하고 영향력 없는 그리스도인과 행복하고 결실이 풍성하며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과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누가 삶의 운전석에 앉아 있느냐에 있다. 문제는 누가 당신의 마음의 운전석에 앉아서 운전을 하고 있느냐에 있다.
1초 후의 일도 알 수 없는 우리들이 아닌가. 창조주이시며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가. 유한하고 지치고 무거운 짐진 괴로운 나 자신인가. 전능하신 사랑의 왕 예수이신가. 허물과 질병. 미움과 질투의 교차로를 달리면서 생의 목적지도 모른 체 황급하게 내달리기만 하려 하는 나 자신인가. 아니면 아버지께로 가는 영생의 지도를(성경) 펴 놓고 인도 하시는 사랑의 목자 예수 그리스도신가.
삶의 운전석을 내어드려라. 마음의 조정실의 열쇠를 그에게 드리고 그 보좌에 앉으시게 하라. 그가 당신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왕좌인 영에 거처를 가지실 뿐 아니라 그 보좌에 앉아 결정자가 되게 하라.
손자를 위한 기도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스마트 박사가 경험한 이야기이다. 하루는 사고로 눈꺼풀이 크게 찢어진 어린 딸을 아버지가 안고 황급히 응급실로 들어왔다. 스마트 박사는 그 소녀의 상태를 살핀 후 소녀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찢어진 곳을 몇 바늘 꿰매야 하는데 따님은 마취를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스마트 박사는 소녀에게 “내가 바늘로 상처를 꿰맬 때 참고 뛰쳐나가지 않을 수 있겠니?” 하고 물었다. 이때 소녀는 “아빠가 내 손을 붙들어주면 뛰쳐나가지 않을래요. 하고 대답했다. 이 소녀는 아빠가 잡아주는 손에 매달려 상처를 꿰매는 동안 아픔을 참으며 한 번도 몸부림치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이 그 딸에게 어떤 힘을 준 것일까. 아버지가 손을 잡음으로 상처를 꿰매는 횟수가 줄어들거나 아픔이 줄어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손을 잡아줌으로 용기를 얻게 되고 참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원치 않는 환난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또한 역경으로 당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다. 세상을 이기신 능력 있는 주님이 오늘 나와 함께 계신다.
수갑을 찬 한 쌍
이 일은 매스추세추주의 체임브리지에서 있었던 일이다.
신랑 페르난 로우는 그의 친구들이 결혼식에서 신부를 납치해서 신랑을 골려주려고 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래서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신랑과 신부를 수갑을 차고 있었다. 그들이 목사 앞에 서 있었을 때 신랑의 한 팔은 신부의 다른 한 팔과 수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수갑을 찼기 때문에 유괴를 하려면 신랑도 같이 해야만 했다. 그들은 신혼여행도 수갑을 찬 채로 갔다.
신목여전
몇 해 전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 갔을 땐 천여 년 전에 지은 오래된 예배당이 있어서 구경하러 갔습니다. 헬라 정통 교회가 천주교와 좀 다른 것은 천주교는 예배당 안에 마리아의 성상과 성화를 만들어 놓았지만, 헬라 정통교회에서는 성상을 아주 폐지하고 성화만 허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들어가 보니 천장과 담에 여러 가지 옛날의 성화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그림이 있는가 하면 아주 큰 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그 눈입니다. 그 눈이 나를 내려다봅니다. 아마 그 뜻은 이 예배당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눈이 너를 보신다는 그 뜻을 알리기 위해서 그려 붙인 모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그 예배당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배당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십니다. 이 하나님의 눈은 성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딜 가든지, 온 세계에 이 하나님의 눈을 피할 데가 없습니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옛날 이런 사상을 좀 깨달았던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고서에 어떤 말이 있느냐 하면'신목여전'이란 말이 있습니다. 신의 눈이 번갯불과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번갯불과 같이 밝게 우리들을 살피십니다.
어느 선교사의 고백
나는 하나님과 가까이 살지 않는 죄와 그 위험성과 감사치 못하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나는 기도도 했고, 고민도 하고, 금식도 하고, 각오도 해 보았고, 성경도 열심히 읽고 오랫동안 묵상도 해 보았고, 열심히 봉사도 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는 매일 거듭거듭 실패하였고, 능력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겼습니다. 다른 해결 방책은 없는 것일까? 이렇게 계속 실패하는 삶을 끝까지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아바 아버지!'라고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자녀로서 갖는 특권을 내세울 수 없을 만큼 내게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예수 안에서는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음을 확신했으나 문제는 그것을 얻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했으나 그것은 생겨나지 않았고, 또 그것을 활용해 보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내 영혼의 고민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한 친구로부터 온 한 글귀가 내 눈을 뜨게 했으며, 성령께서는 내가 전에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얻으려고 노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신실하신 그 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분 안에서 쉼으로만 얻을 수 있다네...
이 편지를 읽고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의지하고 순종할 때 나는 그의 몸의 한 부분이며, 그의 육신과 뼈의 한 부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기쁘고 행복한 사실은 그리스도와 내가 한 몸을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떤 것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의 뜻을 이루실 수 있으며. 그의 뜻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에피소드
오래 전에 미국에 윌리암 헐스트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이 사람은 신문편집인, 즉 언론인이면서 동시에 고미술품을 수집하는 고미술 수집광이었습니다. 그는 유럽의 왕가에서만 사용되었다는 신기한 도자기 하나가 탐이 났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그 도자기의 자취를 추적했습니다. 얼마의 돈을 내고라도 그 도자기를 꼭 소유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그는 여러 해 동안 힘과 노력을 들이면서 찾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도자기는 벌써 언론인 출신의 미국의 어떤 사업가가 오래 전에 사갔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찾아 다녔습니다. 열심히 찾아 다녔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까 그 도자기를 산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이 오래 전에 이미 사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의 에피소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마어마한 값어치가 나가는 그 귀한 보화를 사서 자기 집의 광 속에 두고는 그 보화가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그것을 찾아서 헤매는 모습. 얼마나 어처구니없습니까?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고가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으니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완전한 의탁
중국 내지의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 박사는 믿음으로 중국 내지로 들어갔습니다. 점점 일이 많아지면서 사람과 돈이 필요했지만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테일러 박사는 무거운 정신적인 부담으로 인해 밤잠을 못 자면서까지 고민하다가 마침내는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심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요한복음 15장에 있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는 구절이 마음에 강하게 와 닿았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태양빛이 비치는 것처럼 그의 마음은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그 가지인데 내가 걱정할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은 나무이므로 가지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가지인 내가 수분과 양분을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다니 어리석었구나. 주님, 이 시간부터는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겠사오니 책임져 주옵소서.
테일러 박사는 그 자리에서 꿇어 엎드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시인하고 회개하며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평안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는 그 이후부터는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고 성공적인 내지 선교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 들이고 하나님을 의지한 이상 우리의 생활 속에 다가오는 문제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이 세상의 부와 권세가 아닙니다. 바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복잡한 장터를 엄마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에게는 그 무엇도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누가 좋은 것으로 유혹해도 엄마가 가고 있다면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엄마를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엄마의 인도하는 손길이 이 아이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이죠.
윌리암 콜게이트의 신앙은
[콜케이트 치약]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배후에는 역시 신앙인 콜케이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20세 때까지 양초제조 공장에서 기술자로 일했는데 완전히 기술을 익힌 23세 때에 조그만 공장을 차리게 되었다.
신앙이 돈독했던 콜케이트는 개업하기 전에 교회에 조용히 앉아서 기도한 후 담임 목사를 찾아서 조언을 청하였다. 노인 목사님은 50%의 주식은 그리스도께서 운영토록 하고 항상 그와 의논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가 창업한 양초와 비누제조 공장은 초반부터 하나님께서 축복하여서 금방 뉴욕에서 이름난 회사로 성장하였다.
콜게이트 비누는 제일 질이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고객들에게 배달하는 서비스를 뉴욕 최초로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후 1820년에는 그 유명한 [치약]이 탄생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신앙과 주식의 반을 하나님과 공동 투자하겠다는 생각으로 언제나 기도했고(의논했고), 또한 절반의 이익금은 하나님께 바쳤다.
그는 뉴욕에 자리 잡고 있는 [미국성서공회]에 많은 후원금을 지원했으며 신학교를 도왔고 말년에는 신학교 둘을 연합하여 콜케이트 대학교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임마누엘
어떤 사람이 기도의 부족을 느끼고 기도문을 열기 위해서 여러 달 동안 열심히 산을 다녔습니다. 그런 데를 가보니 기도하는 분들이 많았고, 열심도 대단해 보입니다. 바위를 두드리며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데 굉장해 보입니다. 그래서 그도 열심히 연습을 했습니다. 기도하다 보니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불이 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선교사가 가르치는 성경공부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 날 선교사가 그에게 기도를 시킵니다. 그래서 냅다 큰 소리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그때 선교사가 좀 놀랐는지 좀 진정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을 찾아 읽어 보십시오 그래서 읽었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선교사는 그에게 그 말씀을 믿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래서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선교사가 다시 질문을 합니다.
그 약속의 말씀에 의하면 주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제 옆에 계시겠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그렇다면 왜 그렇게 악을 쓰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 대신 당신이 기도를 하시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무척 기분이 나빴지만 그때 그 분이 기도한 그 기도를 그 사람은 지금까지 잊지 못합니다.
주여, 여기에 우리와 같이 계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 기도 소리를 듣는 순간 마음속에 느끼는 소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 저 사람은 하나님과 참으로 친한가 보다라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이 사실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임마누엘 신앙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는 임마누엘의 확신이 있다면 염려나 불안이나 떨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의 신앙이 있다면 누가 뭐라 해도, 어떤 위험이 있어도 의연하게 나의 길을 걸어갈 수 있고, 진리를 고수할 수 있으며, 최종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승리합니다.
어느 날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는데 집 앞에서 나의 아들 반석이가 자기 동갑내기인 아이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반석이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힘도 세었습니다. 두 아이가 엎치락뒤치락하더니 반석이가 밑에 깔리고 그 아이가 위에 걸터앉아 주먹을 불끈 쥐고 막 내려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반석이를 불렀습니다. “반석아!” 바로 그 순간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순간적으로 그 아이의 얼굴은 하얗게 되고, 반석이는 씽긋 웃더니 반석이가 그 아이가 했던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서 막 내려치려고 씩씩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전세가 역전된 것입니다. 반석이가 최종 승자가 된 것입니다. 아빠가 그저 한마디 “반석아”하고 불렀더니 승자가 된 것입니다. 아빠가 함께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놀라운 힘이 솟구친 것입니다.
인생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을진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임마누엘 아멘
13년간의 투병생활에 '임마누엘, 아멘'기도가 큰 힘이 되었다는 일본의 여류작가 미우라 아야꼬가 언젠가 누구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기독교에는 불교에서와 같은 염불은 없습니까? '나무아미타불'이라든가, '나무묘법달화경'이라든가, 뭐 그런 것이 없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에 염불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비슷한 말은 있습니다."라고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임마누엘, 아멘'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를 뜻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은 '부처와 함께 있다'를 의미하는 듯한데, 그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아멘'이라는 것은'참으로''진실로'라고 동의하는 말로서, 이것은 세계 공통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아멘'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다. 실로 그렇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나는 오랜 요양생활 가운데 문득 쓸쓸해지면, 곧잘 이 '임마누엘. 아멘'을 불렀습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전능하신 주님께서 내 곁에 계셔서 온전히 지켜주시는 줄 알고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어떤 좋지 않은 생각이 마음에 수치는 때에도'임마누엘.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주시는데, 좋지 않은 생각에 잠겨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 짧은 기도를 드리면 가령 누가 오해하여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아주신 다는 기쁨이 솟아납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이런 작고 짧은 기도에 의해서도 격려되고, 위로받으며, 힘을 얻도록 인도받는 것입니다.
임재하심의 체험
플라벨이라는 청교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바로 서 있는 칼빈주의자였으며 평신도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말을 타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말을 타고 한참을 가는데 갑자기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정이 감당할 수 없는 힘으로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힘이 점점 강하게 밀려들기 때문에 급기야는 말을 타고 가면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잠잠하니까 말이 가던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플라벨이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말을 몰지 않으니까 말이 제멋대로 돌아다녀서 여기저기 나무에 찔려 플라벨의 얼굴이 찢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내려와서 얼굴을 `씻고 다시 길을 나섰는데 그때의 느낌을 플라벨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약 내가 말 등 위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젖어있던 그 순간이 천국이 아니었다면 설혹 다른 데에 천국이 있다고 해도 내가 체험한 그것만큼은 좋지 않을 것이다.”
그 은혜스러운 날 저녁에 플라벨은 저녁 식탁 앞에 앉았지만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았습니다. 계속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침실에 들어가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임재에 사로잡혀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런데도 훗날 그가 기록하기를 “나는 어느 날 밤보다도 그곳에서 잔 그날 밤만큼 푹 쉰 날이 없었다. 그전에는 생전 알지 못하였던 것들을 내 영혼이 믿음으로 보고 들은 밤이었다”라고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이런 것이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조화된 삶
재미있는 게임 중에 부부의 한쪽 발목을 함께 묶고 뛰는 경기가 있다. 그런데 어떤 부부는 아주 조화 있게 잘 뛰지만 어떤 부부는 뒤죽박죽이 되다가 끝내는 넘어져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 조화를 이루어 한 걸음씩 보조를 맞추어 나갈 때 우리의 짐은 가벼워진다.
오래전에 미국으로 망명한 소련의 발레리나 미카일 바르시니코프가 워싱톤 D.C에서 2주일 동안 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더욱 인기가 올랐다. 2주일이 지난 뒤 미국인 발레리나인 겔시 커클랜드와 함께 공연을 하게 되었다.
미국인들은 발레가 끝나면 꼭 비평을 하는데 이 미국인 발레리나는 너무 자신이 없다든지 너무 자기에게 집착한 나머지 훌륭한 공연을 하지 못한다는 비평을 듣던 사람이다. 이런 미국인 발레리나가 소련인 발레리나와 함께 공연을 하는데 얼마나 잘하는지 모든 미국인들이 미국인 발레리나에게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자신을 보면 무능하고 부족한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파트너가 되어 주실 때. 내게 있는 모든 가능성과 능력을 발견하고 세상 사람들을 능가하는 조화 있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님 거기 계셔요
아이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평화로움 그 자체이다. 그런 아이를 들여다보며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어서 바르고 예쁘게 키워야지 하고 얼마나 많은 결심을 했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키우는 동안 이런저런 특이한 행동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이가 자는 동안 기저귀 빨래랑 우유병 삶기랑 할 일들이 태산인데 자주 깨어서 우는 바람에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물 묻은 손으로 달려가서 등을 토닥거리면 어느새 다시 잠을 잤다. 몇 달 지나니까 잠자는 시간이 길어져서 이것저것 일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 자던 아이가 한 번씩 고개를 쳐들고 엄마가 옆에 있나 없나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엄마가 옆에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 깊은 잠이 들었다. 조금 더 자라니까 자다가 “엄마! 엄마!” 하고 불렀다. 그러면 “응, 여기 있어” 하면 안심하고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편하게 깊은 잠을 잤다.
그렇게 열심히 엄마를 찾는 모습 속에서 우리가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도 주님과의 교제를 끊고 살아가면 근심과 불안과 번민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세상적인 근심과 번민, 두려움으로 잠 못 이루는 밤에도 주님이 옆에 계심을 확인하는 일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아버지의 존재를 얼마나 확인하고 사는가!
“주님, 거기 계셔요?”
주님과 동행하는 삶
어떤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아이가 아빠보다 먼저 달려갑니다. 그런데 앞에서 큰 개를 발견합니다. 개가 무섭습니다. 그래서 뒤로 돌아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아버지 손을 잡습니다. 손을 잡고 뒤로 돌아 미소를 지으면서 개를 봅니다.
그러나 개는 여전히 큰 개입니다. 그리고 개는 여전히 사납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안전합니다. 아버지 손을 잡았을 때 평안을 누렸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상태를 유지해야 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환경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평안은 한 인격자와의 관계에서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개의 장소에서 삽니다. 한 장소는 제한된 장소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몸과 같이 유한한 곳입니다.
그러나 또 한 곳은 무한한 곳입니다. 하나님만큼 무한한 세계입니다. 한 세계는 물질적인 세계이며 또 한 세계는 신령한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똑같이 실제적인 두개의 세계인 것입니다. 환난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실제적인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세상에서 있게 한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셨던 분이시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승리의 기도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즐거움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을 즐겁다 하며, 어진 친구를 만나 같이 있는 것을 즐겁다 한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있게 되는 즐거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니엘이 사자 굴에 갇혔을지라도, 주께서 사자의 입을 봉하여 해롭게 못한 때, 비록 사자 굴에 있었지만, 그 즐거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친구 세 사람이 비록 불화로 가운데 던진바, 그 즐거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이 밧모 섬에 정배 갔을지라도, 주께서 같이 하시고,계시를 보여 주시는 때, 그 즐거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보여 주시기도 하시며, 강론할 좋은 제목을 알려 주시기도 하고, 실수할 것을 붙들어 실수 못하게도 하시며, 잘못하면 통회하는 마음도 주시고, 우리 소망되는 하늘나라를 보여 알게도 하시는 때, 그 즐거움이야말로 어떠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와 같이 하면,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신자에게는 이에서 더한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창 5:21,23).
주님과 함께 사는 삶
빅토리아 여왕이 세운 양로원에 나이 많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여왕이 당신을 종종 방문을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 나는 몇 번 여왕의 심방을 받았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심방한 일이 잇습니까?"하고 또 한 번 물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난 심방을 받지 않습니다. 그분과 항상 같이 삽니다. 그분이 여기서 나와 같이 삽니다."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과 같이 살아야 되겠습니다.
주님만 바라본다면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 목사님에게 젊은 신학생 한 명이 찾아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도 낙망하신 일이 있습니까?그러자 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놀라운 답변을 했습니다.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은 낙망해 본 적이 없네. 나는 그동안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내 삶에 적용하고 있었지. 그 원리란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네. 나는 하루에 15분도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나간 일이 없네. 그때 이래로 나는 낙망을 모르고 살아왔어.
크신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내 주위의 사람들이 어떠한 비판을 가하여도, 조롱하며 비웃어도 우리는 크게 외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늘 하나님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처럼 핍박과 반대와 조롱을 당하신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분은 그러한 문제들을 끌어안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이 가셔야만 했던 십자가 그 길을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가실 뿐 모든 비웃음과 고난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주님만 생각하며 사는 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있었던 일입니다. 연합군의 지원병 중에서 독일에 보낼 스파이를 많이 뽑아 훈련을 시켰습니다. 독일식 음식, 군복, 언어, 이름, 생활풍습에 대하여 매일 맹훈련을 받습니다. 외모도 완전히 독일 군인일 뿐만 아니라 의식구조마저도 독일화되어 독일 사람으로 완전히 변했다고 인정될 때 비로소 스파이가 될 자격이 부여된다고 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마이크 스미스가 아니라 프리드리히 한스이고, 고향은 일리노이주 시카고가 아니라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바꿔졌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들이 그렇게 완전히 의식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받습니다. 그들은 훈련 마지막 단계에서 수십 리나 되는 먼 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고된 행군을 합니다. 피곤에 지쳐 깊이 잠든 사이에 새벽 두세 시경 갑자기 낯선 사람이 손전등을 들고 곤히 잠든 훈련병을 깨우면서 “네 이름이 뭐냐”라고 묻습니다. 그때 “제 이름은 마이크 스미스입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는 실격입니다. 그는 “제 이름은 프리드리히 한스입니다”라고 엉겁결에라도 독일말로 대답할 수 있을 때 정식 스파이가 된다고 합니다. 오직 한 가지 사실, 즉 나는 독일 군인이라는 것이 잠재의식에도 깊이 박혔을 때 스파이로서의 교육을 마치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어 어디에서 보아도 크리스천으로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로 모든 생각이 집중될 때에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세상의 정과 욕심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주님만 생각하며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평안
주 남선 목사가 일제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잡혀가 고문을 받고 있었다. 일본 경찰의 고문은 잔인하여 말로 다 형용하기 힘들었다. 엄지손가락 두개를 노끈으로 한데 묶어 대들보에 매다는가 하면. 고춧가루를 탄 물을 콧구멍에 붓기도 하고. 손가락 사이에 나무토막을 끼우고 짓누르며. 손톱 사이에 대나무침을 꼽고. 인정사정없이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이러한 악형을 한 차례 가한 형사는
잘 생각해 보고 마음을 돌이켜.
라고 주 목사에게 말했다.
백번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요. 참신은 하나님뿐 다른 신은 있을 수 없소.
또 다시 몽둥이가 사정없이 날아든다. 주 목사는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기절하였다. 얼마 후. 의식을 되찾았고 사방은 조용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 엎디어 이 시련을 이기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한참 기도하다가 우연히 시멘트 바닥을 만져 보니 추운 겨울 물로 젖은 시멘트 바닥이 불 땐 온돌방처럼 따뜻하였다. 그의 온몸은 포근한 담요에 싸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이 사르르 저절로 감겨 그는 깊은 잠에 잠겼다. 주 목사는 후에 이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포근한 담요는 우리 주님 자신이었어요. 나는 주의 품에서 평안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당신과 같이 고난 받는 자와 함께 계셨던 것이다.
진정한 원동력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막에서 잘 싸우기로 유명했던 아랍의 지도자 로렌스는 몇몇 아랍지도자들을 파리로 데리고 갔다. 그 이유는 그들이 베르사이유 평화조약에 관심을 표명하기 위해서였다.
이들 사막의 아들들은 파리의 정경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그중에서도 그들의 호기심을 가장 많이 자아냈던 것은 호텔방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물이었다. 사막에서는 물이 사치품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이곳 호텔방에서는 꼭지를 돌리기만 하면 자유롭게 끝없이 흘러나오는 소모품 같았다.
파리를 떠날 때가 되자 로렌스는 다른 아랍지도자들이 수도꼭지를 빼내는 것을 보았다. 그 이유는 자기네 아랍 지역에서도 이 신기한 물건을 통해서 마음대로 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로렌스는 그 수도꼭지들은 상수도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아주 어렵게 설득시켰다. "떨어져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 말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적절한 말인지 모른다. 우리가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을 때에만 복음의 능력과 평화가 우리 안에 흘러 들어오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저택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중년에 접어들어 그가 살던 도시의 향락주의적인 분위기에 환멸을 느끼고 시골의 전원을 찾아가 그곳에서 생활을 하며 또한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사회변화에 관련된 논문들을 저술했는데, 어느 청년이 그의 사회개혁적인 저서들을 읽고 감명을 받고서 먼 길을 달려 톨스토이의 집을 찾아왔다.
그런데 청년의 눈에 비친 톨스토이의 집은 자기가 생각했던 검소한 농토가 아니라 넓고 푸른 정원과 아름답게 꾸며진 큰 저택이었다. 이 청년은 대단히 실망했다. 청년이 톨스토이와의 면담이 이루어졌을 때 그는 톨스토이의 면전에서 "당신이 어떻게 농민과 노동자의 벗이 되며 대변자가 될 수 있습니까. 말로만 사회개량을 부르짖는 위선이 아닙니까?" 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톨스토이는 청년의 전곡을 찌르는 듯한 말에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대단히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으로 그들을 방문하시는 장면을 상상해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하와야! 잘들 지냈느냐?” 그들이 대답합니다. “안녕하세요? 저희들은 잘 지내고 있어요. 주님도 안녕하시죠?” “그래, 잘 지내고 있다. 아담, 넌 뭘 하고 있지?” “예. 딸기밭에 물을 주고 있어요.” “딸기가 잘 자라느냐?” “그럼요, 아버지. 아주 잘 자랍니다. 벌써 한 광주리나 따서 하와가 그것으로 딸기잼을 만들었는걸요.” “그래?” “예. 정말 맛있어요.”
이것이 하나님과 그들이 교제한 방법입니다. 그들은 삶의 평범한 것들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런 식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평범한 생활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종교제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셨을 때. 아담이 “하와, 어서 오르간에 앉아요. '만물들아 여호와의 권능을 송축할지어다'를 연주해줘요”라고 말했을 것으로 우리는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과 교제는 그것보다 훨씬 단순했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은 종교제도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입재해 계신 하나님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삶 전체를 통괄하는 것으로서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계속적인 인도체계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정상적인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
16세기의 카르멜회 수사였던 브라더 로렌스는 오랜 세월 동안 수도원 주방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주님의 일로 여기고 지속적인 사랑과 순종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임재하심을 실생활 가운데서 누리는 것을 어떻게 배웠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번철 위의 오믈렛을 뒤집을 때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 하다못해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 일까지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찾고 있다. 그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그분의 임재하심을 느끼기 위해 애를 많이 쓰고 있다. 무슨 일에나 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할 때에도 그 사랑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이 좀더 쉽고 직접적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하는 데는 복잡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정직하고 단순하게 그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
브라더 로렌스의 본을 통해 특별히 교훈을 받게 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게 된 것이 사색적인 많은 책들을 읽거나 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음식을 준비하는 자기의 일을 통해서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거룩함이라면 직장보다 더 좋은 훈련장은 없습니다. 까다로운 상사. 패배감과 부족감. 직장 일에 따르는 큰 압력 등은. 우리를 단련시키는 도구로 하나님께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며. 압력 하에서가 아니면 결코 표면에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를 성격상의 결점들을 다루도록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극단적인 별난 데를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여기고 할 때 일 그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
어떤 사람이 브라질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벨로 호리전테에 출판소가 있어서, 그는 적어도 매년 한 번씩 브라질을 여행하며 거기서 선교 사역을 하고 있는 여러 단체를 방문합니다.
한번은 서부 브라질을 떠나 벨로 호리전테로 가기 위해 비행기 출발 시간 수 분 전에 공항 매표창구에 도착한 적이 있었습니다. 매표 직원에게 그의 목적지를 말해 주자 매표원은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에 표를 끊을 충분한 시간이 없다고 완강하게 주장했습니다.
비록 그가 탈 비행기에 좌석이 남아 있었고 하나님이 인도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타야 했지만 그는 매표창구에서 돌아 나와 거기서 좀 떨어진 곳에 앉았습니다. 그 일에 대하여 그가 기도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포르투칼어로 방송이 나왔습니다.
공항이 안개에 싸여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즉시 그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65장 24절에서 약속하신 말씀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가방을 집어 들고 그는 서둘러 매표창구로 돌아가서. 비행기를 탈 충분한 시간이 있으니 표를 끊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직원은 마지못해 이 일을 했고 그가 표를 받자마자 안개가 걷히고 비행기는 이륙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가 어떤 일을 할 기회도 갖기 전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공하기를 원하시는데 자신의 성공의 기준에 따라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며, 그는 우리가 자신과 협력하여서만 성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동행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독립 운동가였던 로버트 브루스는 적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급히 뒤쫓아 온 적들은 그가 숨은 곳에 이르렀지만 마침 거미 한 마리가 그 동굴 입구에 줄을 치고 있었습니다. 추적자들은 만일 브루스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면 먼저 거미줄이 끊어졌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되돌아갔습니다. 브루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자그마한 거미의 뱃속에 나를 위한 피난처를 마련해 두시고. 또 적절할 때에 그 거미를 보내서 나를 보호하시려 줄을 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신비한 방법으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며. 그의 자녀들을 원수에게서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인생의 모든 여정은걸음(Walk, 한글 개역 성경에는 ‘행함’으로 번역되어 있음. 역자 주)" 이라는 한 가지 일에 집약 됩니다. 걸음은 지속적인 행동이며. 앞을 향한 움직임이며. 결코 멈추지 않으며. 언제나 전진합니다.
인생은 단순한걸음이 아닙니다. 때때로 환난 가운데서의 걸음이기도 합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래 쾌락은 고통과 섞여 있습니다.
시련과 갈등이 갈 길을 가로막는 것같이 보일 때도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자에게는 분명히 새로움과 구원이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는 성령이 전적으로 우리를 다스리실 때는 승리와 기쁨과 풍성한 삶. 초자연적인 삶을 보장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1960년 딘이 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말기의 고통을 겪을 때 찬양이 그의 삶에서 새로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겠지만, 이 땅에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사는 동안에도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딘은 그의 병실을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처소로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몇 달 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장에서 그의 가까운 어느 친구는 "그의 병실은 지성소 같았고, 그가 누웠던 침대는 설교단상 같았으며, 그에게 병문안 왔던 모든 사람들이 축복을 받았습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찬양을 했다고 해서 그의 암이 나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찬양과 믿음을 통하여 딘은 고통스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고 새로운 기쁨을 불러일으켰으며,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나, 축복 가운데 있을 때나 고난 가운데 있을 때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임재하심을 나타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임재하실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분이 임재하실 때 대적들은 꼼짝 못하고 사탄의 세력은 두려움에 떱니다. 그분이 임재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엄위하심과 두려우심과 영광과 기쁨과 능력 가운데 살게 됩니다. 사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에게 임재해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한 풍성함을 여러 면으로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그분을 찬양할 때입니다.
함께하고 있는데도
한 남자가 여러 달에 걸쳐 몇 차례고 거듭 사랑하는 여자에게 구애를 했건만. 번번이 야멸치게 퇴짜만 맞아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 여인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어느 때 어느 곳으로 만나러 오라며. 그 때 그 곳에서 그 남자는 마침내 애인 곁에 앉았다. 그러자 그는 호주머니에서 편지를 한 무더기 꺼내 놓았다. 지난 몇 달 동안 썼던 열렬한 연서들로서. 자기가 느끼고 있는 괴로움을 털어놓고 사랑과 결합의 기쁨을 맛보고 싶은 불타는 욕망을 고백하는 내용들이었다. 연인은 그것을 애인에게 읽어 주기 시작했다. 시간은 흘러가건만. 여전히 그는 읽고 또 읽고만 있는 것이었다. 결국 여자가 말했다.
참. 별 바보 같은 남자 다 보겠네. 이 편지는 그러니까 모두가 당신이 절 갈망하고 있다는 그런 얘기 아녜요. 그런데 보세요. 여기 당신 곁에 제가 앉았잖아요. 그런데도 당신은 줄곧 그 멍청한 편지나 읽고 있으니 대체 어찌 된 거냐 말예요.
열렬한 신봉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여기 네 곁에 내가 있지 않느냐. 그런데도. 너는 줄곧 머리로 나에 관하여 궁리나 하고. 혀로 나에 관하여 얘기나 하며. 책으로 나에 관하여 읽기나 하는구나. 언제면 고요해져 나를 맛보려느냐.
해상의 폭풍우
소설가 킹슬리는 터너의 화랑에서 <해상의 폭풍우>란 그림에 반해 버렸다. "어떻게 이런 명장을 그리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어느 날 어부 한 사람에게 폭풍이 휘몰아치던 어느 날 배에 오른 저는 마스트에 나를 결박해 달라고 어부에게 말했습니다. 굉장한 폭풍우였습니다. 배에서 도로 내리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결박을 당해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폭풍우와 마주 서서 그것을 피부에 느꼈을 뿐만 아니라 폭풍우의 일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듣고 있던 킹슬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글썽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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