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philosophy , 哲學)이 뭘까?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 1787, 129.5*126.5cm, 캔버스에 오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 철학(philosophy , 哲學) ***
(요약)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 개설
철학이란 용어는 오늘날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어 철학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한 가지 개념으로 분명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철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갖는 포괄성과 다의성 때문에 철학 앞에는 관념론적 철학· 경험론적 철학· 실존론적 철학· 과학철학 내지 언어철학 등 각 철학의 주제와 특징에 따른 수식어가 항상 붙어 있다 또 지역적으로는 서양철학· 동양철학 및 한국철학이라는 명칭이 함께 쓰이기도 한다.
철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문이 이와 같이 다양한 주제와 광범위한 영역을 갖게 된 것은 이 학문이 오랜 역사를 통해 발달해 온 데다가, 철학을 행하는 방식이 철학의 개념을 규정해 왔기 때문이다.
철학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철학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생겨났고, 초기에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 철학이라는 용어의 발단 및 성격
철학이라는 용어는 원래 그리스어로 필로소피아(philosophia)를 뜻한다. 필로소피아는 필로스(philos, 사랑함)와 소피아(sophia, 지혜)라는 두 말을 합성한 것이다. 필로소피아라는 말을 그대로 번역하면, ‘지혜에 대한 사랑’ 또는 ‘애지(愛智)’를 뜻한다.
그러나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이 활동하던 당시는 아직 철학이라는 말과 개념이 없었다. 그들은 철학자라기 보다는 현자로 불렸고, 자신들의 활동을 철학이 아니라 역사(historie)로 규정하였다. 후대의 가필로 여겨지지만, 처음으로 자신을 철학자(philosophus)라고 소개한 사람은 피타고라스로 전해진다.
명사형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이전인 기원전 5세기 중반 아테네의 폴리스 공동체에서는 시민의 “정치적 덕”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적인 활동 및 지적인 교육에 종사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지혜 혹은 지식을 사랑하다”(philosophieren)라는 뜻의 “철학하다”라는 동사형 및 “지식을 사랑하는” 뜻의 “철학적”이라는 형용사가 이미 통용되고 있었다.
이후 명사형으로서의 철학은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등에 의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인 크세노폰·이소크라테스·플라톤 등의 글에서도 이러한 용례가 발견된다. 초기의 철학이라는 용어는 폴리스 시민의 “교육”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소피스트들이 상품처럼 지식을 돈을 받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파는 행위도 일종의 철학적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및 플라톤은 철학을 단순한 “지식의 전달” 내지 “지식의 과시”로 보는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철학을 참다운 앎을 얻기 위한 노력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지식의 과시”보다는 “참다운 지식”을 얻기 위해 대화를 통한 검토와 반박의 과정을 중요시했다.
대화를 통한 검토와 반박의 과정에 의해서 참다운 앎을 획득해 가는 자기 비판적 탐구정신은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이미 삶의 태도와 관련되고 있었다. 대화를 통해서 기존의 지식과 경험을 자기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판단해서 나온 참다운 앎에 따른 행위가 바로 자율적이고 이성에 근거한 윤리로 정초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참다운 “지에 대한 사랑”, 즉 철학은 ‘이론적 지식’ 뿐만 아니라 선악의 인식을 내용으로 삼으며, 비판적 자기 검토를 통해 올바른 실천적 행위를 목표로 하는 ‘실천적인 지식’을 뜻한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지행합일”의 성격을 띠게 된다.
앎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출발했던 “철학”의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인간 바깥의 자연세계 및 우주에 대한 이론적 앎, 그리고 인간의 올바른 행위를 다루는 실천적 앎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도 이론적 앎과 실천적 앎은 서로 떨어져 있는 별개의 것은 아니어서 이 양자는 철학의 용어로 통합되었다.
철학이라는 용어는 초창기에 “지혜에 대한 사랑 내지 추구”로부터 시작해서 소크라테스 이후에는 자기 비판을 통한 참다운 앎의 추구와 그 앎에 따른 실천적 행위로 이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서양철학의 발달과정
철학의 ‘용어’가 원래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안다고 해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단적인 대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철학은 ‘개별 학문’이 추구하는 현실의 한 영역이나 단면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전체성과 근원성을 문제로 삼는다. 또한 무전제성에서 출발한다는 근본적 특성이 있다. 그러기에 철학의 방법과 대상은 미리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각 시대마다 철학자들은 자기 자신과 세계를 전체적이고도 근원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철학의 방법과 대상을 새롭게 규정하며, 그 시대가 제기한 근원적 과제에 답하였다.
철학사는 각 철학자들이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철학함을 보여 주는 장이기 때문에,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몇 가지 시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1. 그리스철학
고대 그리스는 ‘철학’이라는 용어가 탄생한 지역이면서 동시에 많은 철학자들을 배출하여 철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을 규정지은 서양철학의 요람이다.
칸트(I. Kant)는 그리스에서 철학이 탄생한 의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리스라는 경탄할 만한 민족이 희망봉(希望峰)을 도는 항로를 발견한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사고방법의 혁명을 가져왔다.”
서기전 7세기경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식민지에 살았던 최초의 철학자들은 우주의 근원을 탐구하고 만물의 원인과 원리를 추구함으로써 철학을 시작하였다. 그들이 살던 지역은 중계무역이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이집트, 페르시아 등 이질적인 여러 문화가 서로 교차하고 있었고, 또한 물질적 풍요도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었다.
다른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그리스인들은 새로운 정신적 지평을 확장시킬 수 있었고, 그 때까지 지배했던 신화적 세계관을 벗어나 사고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물질적 풍요로 인한 넉넉한 생활은 사물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schole-]나 “한가”를 가능하게 하였다.
최초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신화적 세계관을 벗어나 모든 존재자에게 공통의 근원(arche-)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이 근원은 모든 사물을 이루는 원재료이자 사물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철학자들은 세계의 질서와 인간의 위치를 밝힐 수 있는 자연적이고 이성적인 원리인 근본법칙[logos]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흔히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을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학파, 엘레아학파[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제논, 멜리쏘스], 헤라클레이토스, 다원론자인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 그리고 원자론자인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로 언급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은 자연의 원질(原質, arche-)에 대해 각각 다른 해답을 찾았다. 탈레스는 물[水],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는 무한정자(無限定者)인 아페이론을,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공기,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는 불[火], 피타고라스는 수(數),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일자(一者), 엠페도클레스(Empedocles)는 흙·물·불·공기의 4원소, 아낙사고라스는 많은 씨앗[種子], 데모크리토스(Democritos)는 원자 등을 각기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지적하였듯이, 탈레스를 위시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주된 관심은 자연(physis)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체적으로 자연이 스스로 생명을 갖고 움직인다는 물활론적 입장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해답보다는 그들이 품었던 세계에 대한 물음과 합리적 설명 방식의 시도에 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의 원질에 대한 추구는 “신화에서 이성으로” 향한 새로운 애지 활동의 성과였던 것이다.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정치·문화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아테네 시민의 “교육”에 대한 요구가 더욱 커졌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에게 세련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소피스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대가를 받고 웅변술을 가르치거나 교육을 해주는 일군의 사람들을 뜻한다.
지금은 부정적인 인상이 강하지만, 원래 소피스트들은 지혜를 가르치는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소피스트들이 철학사에 기여한 공로는 철학의 관심을 자연에서 인간 탐구 중심으로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또한 전승된 도덕관념을 의문시하고 비판함으로써 윤리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언어와 인간의 사유를 철학적 문제로 다루었다는 점도 소피스트의 공로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소피스트들의 활동이 없이는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의 고전기를 생각하기 어렵다.
소크라테스가 등장한 이후에는 철학의 관심은 인간영혼, 선(agathon)과 덕(arete)과 같은 인간의 본성과 윤리적 문제로 더욱 집중되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서 출발하여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의 모든 성과들을 자신의 철학체계 안에서 성공적으로 재창조했다. 플라톤 철학의 중심은 이념을 뜻하는 이데아론이다.
이념은 “비물질적이고, 영원불변의 본질”로 설명되며, 이념의 세계는 가시적 세계와 구분된다. 가시적 세계는 지각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세계이지만, 이념의 세계는 모든 직관을 넘어 순수이성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념 중에서도 ‘선의 이념’을 철학적 문제의 중심으로 보았다.
그에게 선이란 존재의 목적과 원천을 묻는 윤리학적 의미를 넘어 “존재론적” 그리고 “인식론적”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
태양이 모든 것들에게 가시성과 생명과 성장을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자들은 선의 이념에 의해 존재하며, 전체 세계에 ‘질서’와 ‘척도’와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도 이 선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영역을 “체계적”으로 건축하고 “학문적”으로 정초하려 했다.
그는 『형이상학』에서 플라톤의 이념은 이념에 참여한 사물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이원론에 기초한 플라톤의 이념론과 결별한다. 그는 “사물의 본질이 사물 그 자체”에만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참다운 실재는 바로 개개의 특수한 사물이라고 보고 이것을 실체[ousia]라고 하였다. 이데아에 해당하는 보편으로서의 본질은 결코 특수를 초월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 속에 그것들의 공통적 성질로서 내재해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실체는 그것을 형성하는 소재로서의 질료(質料, hyle)와 이 질료를 일정한 종류의 사물로 현실화시키는 원리로서의 형상(形狀, eidos)과의 결합체라고 보았다.
질료는 일정한 실체로 나타날 가능성을 가진 가능태(可能態, dynamis)이며, 이 가능태가 형상을 실현한 것을 현실태(現實態, energia)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나아가는 이 운동원리를 엔텔레키(Entelechi 완전성을 향한 활동원리)라고 불렀다. 모든 사물의 본질[ousia]은 그 본질의 현실적인 전개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목적론적 사고를 자신의 형이상학의 중심적 입장으로 삼아, 세계[우주]를 목적론적으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는 전체 자연이 연쇄적인 계열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이 구조에 있어 가장 낮은 영역인 순수질료[제일질료]로부터 단계적으로 질료가 형상을 실현시켜가면서 가장 높은 영역인 순수형상으로 상승한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른바 제일철학(第一哲學)의 주제로 본 제일원리로서의 순수형상은 전혀 질료를 포함하지 않은 순수형상이기에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인다는 데서 ‘부동의 원동자(原動者)’라고 불렀다.
이것은 모든 만물이 움직여가는 궁극의 목적인 동시에 모든 생성의 궁극원인으로서의 완전자로 규정되는 순수정신 또는 신이다.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정복은 동방의 여러 문화를 그리스 본토로 전래하게 하여 ‘헬레니즘(Hellenisim)’이라고 불리는 혼합문화를 형성시켰다.
이 문화는 후에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갈 때까지 약 3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이 때의 철학은 이미 도시국가(polis)의 철학이 아니라 세계국가를 바탕으로 한 세계시민적 철학으로 변질되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은 스토아학파(stoics)의 금욕주의,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의 쾌락주의, 그리고 회의학파(懷疑學派, sceptics) 등이다. 스토아학파는 신적(神的)인 세계법칙인 로고스(logos)가 세계를 형성하고 지배하고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이성은 이 로고스의 분유(分有)로 있기 때문에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이 우주적 이법인 로고스를 따라 “자연과 일체를 이루는” 생활을 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성에 따르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힘으로 모든 쾌락과 충동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금욕을 통한 충동으로부터 해방된 정신적 평정(平靜), 부동심(不動心)의 상태를 무감동(無感動, apatheia)이라 부르고, 이 경지를 인간이 목적하는 참다운 행복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현자(賢者, sophos)로 보았다. 여기서 철학은 자신의 이성에 기초해 필연적 세계이성에 대한 통찰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초기 스토아학파로는 스토아철학의 정초자라 할 수 있는 크리톤의 제논과 크리시포스를 들 수 있다. 중기 스토아학파는 그리스 철학을 로마로 가져왔던 파나이티오스와 초기의 스토아학파의 윤리적 엄격성을 고수하려 했던 포세이도니오스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후기 스토아학파는 로마 시대의 세네카(Seneca), 에픽테토스(Epictetos)·아우렐리우스(Aurelius)황제 등으로 대표된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스토아학파와 다르게 인간을 보편적인 세계법칙으로서의 로고스와의 관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고립적·자연적 존재로서 파악하였다.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쾌락과 고통을 모든 실천의 기준으로 보고, 쾌락은 선이며 고통은 악으로 여긴다.
에피쿠로스(Epicouros)는 철학을 개인의 쾌락(hedone-), 즉 행복을 얻는 수단을 연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들은 진정한 쾌락을 ‘마음의 평정(平靜, ataraxia)’으로 보았고, 이 이상적 상태에 도달한 사람을 현자라고 하였다.
퓌론(Pyrrhon)에 의해 창시된 회의학파는 위의 두 학파를 모두 독단론이라고 배격하고, 일체의 이론을 단념함으써 ‘무감동’이나 ‘마음의 평정’을 누리려고 하였다.
외계의 사물은 단지 불확실한 지식을 줄 뿐이며, 사물의 진상(眞相)이 아닌 데서 사물에 집착하고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다고 보고, 불확실한 지식밖에 주지 못하는 일체의 판단을 중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판단중지(判斷中止, epoche-)에 의해 무감동이나 마음의 평정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어떤 일의 선악과 진위(眞僞)를 구별하려면 반드시 타인과 대립하게 되어 결국 마음의 평정은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헬레니즘시대의 철학은 불안한 현실세계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윤리 중심의 처세철학의 경향이 짙었다. 이에 반해 로마제국의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초월적인 신의 힘에 의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종교적인 경향이 농후해진다. 이 시대의 대표적 철학은 플로티노스(Plotinos)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에서 찾을 수 있다.
플로티노스는 모든 것이 일자[hen]로부터 유출[Emanatio]되었다고 한다. 일자는 스스로의 충만함으로 인해 모든 것을 방출해 낸다. 이렇게 일자로부터 유출되는 단계는 정신, 영혼, 물질의 순서로 진행되고, 일자로부터 멀어질수록 통일성과 완전성의 정도가 떨어진다.
정신은 만물의 영원한 원형상인 일자를 관조할 수 있는 영역이며, 영혼은 우주와 물질계의 개별적 사물들에 스며들어 생기와 조화를 부여한다.
모든 만물은 일자로부터 유출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모상인 일자를 지향한다. 인간의 개별적 영혼은 물질과 결합해 있기 때문에 일자의 영원한 원형을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의 정신을 방해하거나 흐리게 한다. 따라서 일자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정화”가 필요하다.
신플라톤주의에서 철학은 영혼이 물체의 그림자 세계를 극복하고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인간 영혼은 일자를 직접 관조할 수 있는 “망아”(ekstasis)의 경지에서 최고의 해방을 경험한다. 이러한 면모를 지닌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신 중심의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화하려 했던 중세 기독교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2.2. 중세철학
중세철학의 특징은 기독교와 철학의 결합에 있다. 중세철학의 시작은 플라톤의 아카데미가 유스티누스 황제에 의해 폐교된 529년으로 잡는다.
초창기 중세철학을 지배했던 기본적 주제는 “믿음”과 “앎”의 관계에 대한 문제였다. 기독교를 그리스철학에 의하여 합리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의도에서 생겨난 중세 기독교철학에 있어서 “믿음”과 “앎”의 관계는 필연적인 문제였다.
교부철학 중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철학적 체계화를 시도한 그노시스(Gnosis)학파의 클레멘스(Clemens)와 오리게네스(Origenes)는 신앙에 대한 지식의 우위를 주장하면서 다같이 이성주의(理性主義)편에 섰다.
클레멘스는 하느님이 철학을 원하며, 철학의 이성적 사용은 구원을 가져온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호교파(護敎派)측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철학이란 이교도의 것이며,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는 말로 신앙을 강조하였다.
철학은 교회의 신앙과 서로 대립하여 논란을 거듭하다가 서서히 교리의 체계화와 변신론의 필요를 위해 기독교 안으로 수용되어 갔다. 4세기에 접어들면서 기독교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황제에 의해 로마제국 내에서 하나의 종교로 공인되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삼위일체론, 그리스도의 신인론 및 원죄론이 공식적인 교리로서 결정되기에 이른다.
교부철학의 대표자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St.)는 “그리스도교 철학에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인간의 ‘믿음’은 자신의 인식 가능성을 전개시킬 수 있다고 보고, 다음과 같이 명제화했다. “인식하기 위해서 믿으라. 그리고 믿기 위해서 인식하라.”(Crede ut intelligas, intellige ut credas).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인식의 확실성을 자기 존재의 확실성에서 찾았다. “내가 속더라도 나는 존재한다.”(Si enim fallor, sum)라는 말로서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의식함으로써 그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의 선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데카르트와 달리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통해 자기 안에 거처하는 진리, 즉 진리의 근원인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려는 것이었다.
기독교 교리는 교부시대를 거치면서 대략 정비되었고, 그 뒤 철학의 역할은 그 교리를 좀더 체계적으로 설명, 논증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역할은 대개 교회 소속 학교(schola)나 수도회 소속 학원(schola)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 강론한 학자나 교사들에 의해서 수행되었고 이에 스콜라철학이 정립되었다.
선구자는 에리우게나(Eriugena)였다. 그는 “진정한 종교는 진정한 철학이요, 진정한 철학은 진정한 종교이다.”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노스의 유출설과 기독교의 창조설을 결합시키고자 했고, 만물은 신으로부터 전개되고 다시 신에게로 돌아간다고 논증하였다.
이성은 계시의 의미를 해명하는 과제를 부여받고 있으며, 교부들의 “권위”인 교리는 받아들여지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성에 맞게 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켄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St.)는 “참된 이성”은 필연적으로 기독교인들을 신앙의 진리로 이끈다고 보았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 내용을 교부의 권위나 성경의 도움 없이도 순전히 이성을 근거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는 『프로스로기온』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이성을 통해 필연적으로 증명하고자 하였다.
스콜라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Aquinas,T.)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 그는 철학의 영역은 이성에 속하고 신학은 신의 계시에 근거한다고 하여 이성과 신앙의 영역을 엄밀히 구별하였다.
그러나 철학과 신학은 다같이 진리로서의 신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보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의 입장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이른바 신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증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세계의 궁극적인 존재 원인은 ‘부동의 원동자’로서의 신이며, 모든 사물의 본성은 그것의 존재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질서의 계열이라고 하면서, 만물이 갖고 있는 상대적 완전성의 차이는 단계적으로 올라가서 최고의 완전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필연적 존재로서 논증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철학은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하여 이성적이고도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며, ‘자연의 빛’인 이성을 통해서 사물의 본성을 규명하고 지식을 획득하는데 반해서 삼위일체(三位一體)나 신의 육화(肉化)와 같은 신앙의 오묘성은 신의 ‘은총의 빛’에 의해서만 파악된다.
그는 경험적인 자연과 그것을 넘어선 초자연의 독자성을 구분하면서도 “은총은 자연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완성시킨다.”는 관점에서 큰 조화를 도모하였다.
후기 스콜라철학의 중요한 문제는 보편논쟁(普遍論爭)이었다. ‘보편’은 ‘개체’에 앞서 존재한다는 견해가 스콜라철학의 정통론이었다. 가톨릭교회란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개개의 신자들 내지는 개개의 교회들의 집합체가 아니고 그것을 초월하는 보편적 실재로서의 존재이며, 지상에 있는 신의 나라라였다.
이에 대해 요하네스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 J.)는 보편자는 오직 “말”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대변한다. 오캄(Occam,W.) 역시 “보편은 단순한 개념에 불과하며 단지 개체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하여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의 입장을 대표한다. 그는 보편이란 단지 개체를 대표하는 추상적 명사에 지나지 않고 참으로 실재하는 것은 개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은 경험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보편적인 신의 존재나 성질에 관해서는 엄밀한 의미의 학문이 성립될 수 없으며, 다만 믿음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보편을 대변하는 교회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개개인이 적극적으로 독자적인 자기 주장을 하게 된 당시의 시대적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오캄은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등으로 연결되는 학파의 “고대의 길”(via antiqua)과 반대로 형성된 “근대의 길”(via moderna)을 형성한다. 유명론에 의해서 지식과 신앙, 철학과 종교가 점차로 분리되고, ‘개인’과 ‘경험’에 눈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형성되었다.
2.3. 근대철학
근대 초기에 유럽사회는 ‘화약’, ‘나침반’, ‘인쇄술의 발달’로 문화사적 격변을 겪는다. 화약은 전쟁기술의 변화를 초래해서 기사 신분의 위상을 변화시켰다.
나침반에 의한 항해술의 발달은 유럽에 국한되어 있던 시야를 밖으로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인쇄술의 발달은 소수에 국한되어 있었던 지식과 글을 널리 빠르게 전파함으로써 지식층을 확대시켰다.
이제 폐쇄적이고도 배타적인 중세 교회의 지배로부터 역동적인 사회로의 진입이 시작되었고, 유럽의 학문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인문주의자들에 의한 개인주의적 ‘인간의 재발견’이 강조되고,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등에 의해 근대 자연과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철학 역시 근대로 접어들면서 교회의 독단적 진리나 어떠한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안 것만을 진리로 믿는 경향을 띠게 된다. 경험 또는 이성을 통한 지식과 사상만이 참다운 진리로 간주되었다.
근대철학은 프랑스· 네덜란드 및 뒤늦게 발달한 독일 등 유럽대륙에서 발전한 합리론(合理論, rationalism)과 영국에서 발전한 경험론으로 대표된다.
합리론의 철학은 감각적 인식이 아닌 순수 이성만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또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을 띤다. 근대 합리론의 대표적인 인물은 데카르트(Descartes, R.)이다.
그는 철학도 수학처럼 의심의 여지없는 확실하고도 명증적인 인식(certe et evidenter cognoscere)으로부터 추론가능한 명제를 연역(演繹)해서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가장 확실한 인식의 출발점인 아르키메데스점을 찾기 위해 ‘방법적 회의’를 한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그렇게 의심하는 자아의 존재만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를 가장 확실하고 자명한 원리이자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 원리를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아 확실한 현실의 구조를 밝혀 내려 했다.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만이 진리라는 데카르트의 주장은 기존의 주장이나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파악된 것만이 진리일 수 있다는 주장이 도출된다. 데카르트가 이렇게 이성에 부여하는 결정적인 역할 때문에 그의 철학과 그를 추종하는 철학에 “합리론”(Rationalism)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경험론(經驗論, empiricism)은 경험에 근거하여 외계의 개별적 사실을 관찰하고, 개별적인 감각적 인상에서 출발하여 확실한 지식에 이르고자 하였다. 합리론이 선천적 이성을 중심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중요시한 데 비해서, 경험론은 후천적 경험을 존중하고 관찰과 귀납적 방법을 중요시한다.
경험론의 선구로서 영국의 베이컨(Bacon, F.)은 종래의 학문을 무가치하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고, 학문의 혁신을 도모했다. 학문의 목적은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함으로써 사회를 유익하게 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라는 유명한 명제는 다름 아닌 자연에 대한 앎을 뜻하고 이 앎을 통해서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사물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그러한 인식을 방해하는 선입견이나 편견, 즉 우상(偶像, idola)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가 네 종류로 분류한 우상은 종족의 우상(idola tribus: 인간이라는 유적 본성에서 나오는 편견.), 동굴의 우상(idola specus: 개인이 가진 성벽, 교육, 습과 경향 등에서 나오는 편견.), 시장의 우상(idola fori: 언어로 인한 오해와 혼란에서 나오는 편견),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 잘못된 원칙이나 학설에 의한 편견)이다.
그는 학문 연구는 먼저 경험적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 사실이 수집, 정리되고, 다음에 그 사실의 원인과 법칙을 발견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방법이 바로 귀납법(歸納法, induction)으로 자연 인식의 참된 방법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는 학문을 인간의 정신능력인 기억·상상· 이성 세 가지에 상응하는 역사·문학·철학으로 구분하였다. 그에게 있어 철학은 최상위의 학문이며 모든 학문에 공통되는 기초를 대상으로 삼는 제일철학(Prima Philosophia)를 의미한다.
영국 경험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로서 경험적 인식론을 창시한 학자는 로크(Locke,J.)이다. 그는 데카르트가 주장한 본유관념을 부정하면서 생득적인 관념이란 없다고 하였다. 인간의 모든 관념들은 경험에서 오는 것이요, 우리의 마음은 원래 백지(白紙, tabula rasa)와 같은 것으로, 태어날 때 아무런 내용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로크는 인간의 지식은 경험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고 보았다. 로크에 따르면, 우리의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얻어 진 관념들 사이의 일치와 불일치를 지각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그의 철학에 있어서는 “순수이성”으로부터 나오는 “필연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나 다른 사람의 경험을 근거로 해서 참이라고 할 수 있는 “개연성”이 중요하다.
흄(Hume D.)은 경험론의 논지를 더욱 철저화해서 회의주의에까지 이르렀다. 흄은 단순관념의 결합이 유사(resemblance), 시공의 인접(contiquity in time and space), 원인과 결과(cause and effect)의 세 가지 연상법칙에 따라 이행되는 것으로 보았다.
자연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 사이의 인과관계도 사물에 속한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A와 B의 연계를 여러 번 관찰하면서 얻어진 습관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는 인과법칙에 기초하는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한 객관성이나 확실성에 대하여 회의를 품었다. 더욱이 사실에 관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사실로부터의 추리도 아닌 형이상학은 필연성은 고사하고 개연성조차 없는 공허한 궤변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합리론은 이성을 바탕으로 한 선천적 지식체계를 세우기는 하였으나 경험의 직접성을 외면한 데서 공허한 독단에 빠지기에 이르렀다.
경험론 또한 감각 내지 주관적 경험에 기초한 인식의 객관적 필연성을 확립하고자 했으면서도 흄에 이르러 회의론에 이르고, 자연과학의 확실성조차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양 극단의 철학은 어느 누군가에 의해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필연적 과제이었다.
이러한 과업은 칸트에 의하여 성취되었다. 그는 흄에 의해 ‘독단의 꿈’을 깼다고 한다. 그것은 종래의 모든 독단적인 형이상학을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흄의 회의론에 반대하여 수학과 자연과학이 참된 지식으로 성립할 수 있다는 근거를 밝히려고 하였다.
칸트에 의하면 참된 지식이란 객관적 필연성 내지 보편타당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선천적 종합판단이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 칸트철학의 중심 문제였다.
그에 의하면 지식 또는 인식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하거니와, 그 내용이 된 소재(素材)는 감성을 통하여 경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식은 소재만으로써 이루어지지 않고, 소재를 가지고 인식을 구성하는 형식이 필요하다.
소재가 경험적이고 후천적(a posteriori)인데 반하여 형식은 인식 주관에 선천적으로 갖추어 있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형식이다. 이 선천적 직관형식에 의하여 감성을 통해 받아들인 소재는 표상으로 얻어진다.
표상은 아직 통일되지 않은 잡다(雜多)에 불과한 것으로 아직 인식이 될 수 없다. 인식이 되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사유능력인 오성(悟性)에 의하여 또 하나의 선천적인 형식인 오성형식 내지 사유형식이 따라야 한다. 이 형식을 칸트는 순수오성개념 또는 범주(範疇)라 하여 이것을 12개로 나누었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인식은 감성이 직관형식을 통하여 받아들인 잡다한 소재를 오성이 사유형식에 의하여 종합, 통일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이 때 비록 소재는 경험적·주관적으로 받아들여졌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또 종합, 통일하는 형식들은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인식은 보편타당하며 필연적이라고 하여 인식의 선천적 종합판단이 가능하다는 근거를 해명하였다.
칸트는 인식이 주관의 능동적 활동에 의하여 구성된다고 보았으므로 이를 구성설(構成說)이라 하고, 이와 같은 인식론을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라고 불렀다. 칸트는 감성을 촉발하여 인식을 성립시키는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구분하였고 물자체의 세계는 인식될 수 없다고 하여, 이른바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입장에 섰다. 칸트가 현상계와 물자체를 다같이 인정함으로써 남겨 놓은 이원론은 이후 독일관념론이 풀어야 할 문제였다.
피히테(Fichte,J.G.)는 칸트의 ‘물자체’의 설정이 수미일관하지 못하다고 보고 칸트의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이성에 대립하는 인식대상인 비아를 절대적 자아에 의해 정립된 것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비아로서의 자연을 자아의 소산으로 봄으로써 지나치게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에 치우쳤다.
쉘링(Schelling,F.W.von)은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을 비판하고 동일성의 철학(Identit○tsphilosophie)에서 절대자(絶對者, das Absolute)를 상정하였다. 이 절대자는 자아와 비아, 혹은 정신과 자연, 주관과 객관의 구별 이전의 대립적 차별이 없는 ‘절대적 동일성’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완전한 무차별적 동일성에 기초한 쉘링의 ‘절대자’는, 절대자로부터 현상세계에 나타나는 유한자의 차별상을 해명하기 어려운 난점을 안고 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머리말에서 바로 그러한 점을 지적하고 쉘링의 절대자를 “모든 소를 까맣게 보이게 하는 밤”으로 비판했다. 헤겔(Hegel,G.W.F.)은 쉘링철학의 ‘절대자’ 개념의 한계를 의식하고 유한자의 피안에 있는 절대자는 참다운 절대자가 아니요, 유한자도 자기 속에 포함하고 이 유한자와 대립되는 무한자까지도 자기 속에 포함하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절대자이며, 이것은 모든 차별을 자기 속에 포함하는 구체적인 보편이라고 하였다. 모든 차별을 자기 속에 포함하는 절대자를 파악하는 것이 헤겔철학의 본질을 이룬다.
헤겔은 절대자를 이성활동으로서의 로고스(Logos) 혹은 이념(理念, Idee)이라 하고, 세계를 이 이념의 발전으로 보았다. 그는 이념은 스스로 발전하는 이성적·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세계이성(世界理性, Weltvernunft) 또는 절대정신(der absolute Geist)이라고 불렀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은 처음에 자연 속에서 소외되어 부자유한 상태에 있다가 역사를 거치면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옴으로써 자기 자신의 자유를 되찾는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는 이러한 정신의 발전에 따라 진행되며, 역사는 “일인의 자유”로부터 “만인의 자유”로 향한 필연적 발전을 한다.
헤겔이 역사철학을 통해 입증하고자 한 이성의 자기실현은 자연적 폭력과 낡고 불합리한 정치체제로부터 인간의 해방과 자유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헤겔에게 있어 철학이란 역사와 자연 속에서 이성의 필연성을 통찰하는 것이었다.
2.4. 현대철학
현대철학은 대체로 19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개되고 있는 여러 갈래의 철학을 통칭한다. 19세기 철학은 한편으로는 헤겔의 거대한 사변적 체계에 대한 반발의 양상을 띠며, 다른 한편으로 다윈의 진화론과 ‘산업혁명’의 폭발적 발전에 자극과 도전을 받는다.
19세기부터 현대까지 이르는 주요한 철학들로는 변증법적 유물론(Dialektischer Materialismus)· 생철학(生哲學, Lebensphilosophie)· 실존철학(實存哲學, Existenzphilosophie)·현상학(Ph○nomenologie)과 해석학(Hermeneutik), 실용주의(實用主義, pragmatism)·분석철학(分析哲學, analytic philosophy), 비판이론(Kritische Theoire) 등이 있다.
현대철학 중에서 중요한 철학적 입장을 몇 가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철학을 “과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그들은 헤겔의 철학을 전도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철학을 정초하려 하였다. 그들이 정초한 변증법적 유물론은 ‘물질’은 인간의 의식과 독립적, 객관적으로 변화 발전한다는 입장을 띤다.
물질의 변화발전의 법칙은 양에서 질(質)로의 전화(轉化)법칙, 대립물의 침투법칙, 부정의 부정법칙 세 가지로 정리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변증법적 유물론은 모든 존재에 타당한 사고방식이라 하고, 이것을 자연과 역사에 적용함으로써 자연변증법과 유물사관 또는 사적 유물론(史的唯物論)으로 구분한다.
자연변증법이란 자연현상 내에서 변증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유물사관이란 유물론적 입장에서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유물사관은 역사가 사회의 물질적 기초, 즉 경제적 생산관계에 의하여 전개되어왔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규정하고, 역사의 발전은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사회, 즉 공산주의사회로 이행해간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철학의 과제는 “세계해석”이 아니라 “세계변혁”이었다.
이미 헤겔이 생존하고 있을 때, 쇼펜하우어(Schopenhauer,A.)는 헤겔의 이성주의적 형이상학에 반대해 인간의 “삶에 대한 맹목적 의지”를 말함으로써 이성에 기초한 낙관주의적 인간관과는 다른 관점을 보여 주었다.
초기에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던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극복하고, 활동적인 생명력 자체인 “힘에의 의지”를 역설했다. 그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통해 기독교적 진리를 포함한 종래의 모든 형이상학적 가치체계를 부정하고, 그 뒤에 올 허무주의의 극복을 위한 모색을 자신의 철학의 과제로 삼았다.
니체는 삶의 근원인 힘에의 의지를 체현한 존재인 ‘초인(超人, übermensch)’의 이념을 내세워 낡은 도덕 대신에 새로운 도덕을, 현실적 삶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부르짖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의해 마련된 생철학적 기초는 베르그송(Bergson,H.)에게서 새롭게 생철학으로 나타난다. 베르그송은 진실로 실재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우주 전체를 일관하여 있는 근원적 생명이라 보았다. 그리고 이 생명의 특징은 자기로부터 새로운 것을 부단히 산출해 가는 창조적 진화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실재의 참된 모습은 기계론이나 목적론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실재 자체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직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직관은 개념적, 과학적 사유와 구별되는 것으로써 오직 대상의 내부로 들어가서 그 대상의 고유한 것, 즉 그것 외에 다른 것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과 합일하는 지적 공감(共感)이라 하였다.
생철학의 정신사적 의의는 한마디로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에 있다. 합리적인 관념론과 기계론적 유물론의 피안(彼岸)을 지양하고, 추상적 이상주의에 불만을 느끼며, 형식주의적인 체계철학에 저항하면서 인간의 의지, 생명의 자유,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비합리주의·직관주의의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해탈·직관 등에 의한 신비체험을 호소하는 생철학은 종래의 이성적 형이상학에서와는 다른 의미에서 또 하나의 관상적 사유의 방향을 취하였다. 또 현대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실증과학적 사고경향을 외면하는 데서 현대를 짊어질 철학으로서의 한계가 있다.
현대철학의 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실존철학은 생철학과 마찬가지로 비합리주의 경향이면서 어디까지나 인간의 개별성과 절대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실존철학의 연원은 일찍이 19세기의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S.A.)와 니체에게서 찾을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패전으로 불안에 직면한 독일에서 야스퍼스(Jaspers,K.)와 하이데거(Heidegger,M.)에 의해 주장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의 사르트르(Sartre,J.P.)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실존철학은 인간을 실존으로 파악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존이란 현실적으로 ‘지금·여기’에 있는 존재로서 본질적 존재와 대립한다. 다시 말하면, 개개의 인간은 참으로 독자적인 데서, 결코 한 사람의 인간이 가지는 특수성을 다른 사람에 의해 대치할 수 없는 데서, 본질적 존재와 구별한다.
인간도 역시 모두가 인간이라고 불리는 한에서 인간이라는 본질존재가 있을 수 있으나, 인간 일반이라는 것은 전혀 추상적인 것이기에 여기서는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구체성은 파악되기 어렵다.
따라서, 실존철학에서 실존이란 객관화하거나 대상화할 수 없는 인간의 내적 주체성이 강조되고, 각자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의 단독자·개별자로서의 존재를 뜻한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실존철학은 자기자신이 타인과 절대로 대체될 수 없는 실존임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실용주의는 19세기 말엽 미국에서 퍼스(Peirce,C.S.)에 의하여 제창되어, 제임스(James,W.)에 의하여 보급되고, 나아가 듀이(Dewey,J.) 등에 의하여 대성된 철학이다.
실용주의도 다른 경험주의적·실증주의적 철학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을 신뢰하고 모범으로 삼아서 건설하려는 철학이다. 실용주의는 주장하는 철학자에 따라 관점과 내용이 상이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 입장은 경험 내지 실생활을 중시하고, 지식을 본래 경험·실생활에 봉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점에서 상통한다.
실용주의는 이성주의 철학처럼 절대 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삶에 대한 효과와 유용성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실용주의는 상대적 진리의 입장을 취한다. 특히, 듀이는 자기의 입장을 도구주의(道具主義, instrumentalism) 혹은 실험주의(實驗主義, experimentalism)라고 불렀다. 듀이에게 관념·사상·사고는 보다 나은 민주적 사회를 건설하는 행동을 위한 도구이고, 그 조작은 자연과학의 실험에 견주어졌다.
실용주의와 함께 현재 영·미를 중심으로 하는 각국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철학은 이른바 분석철학이다. 분석철학은 초기의 논리실증주의(論理實證主義, logial positivism)와 근래에 유력하게된 일상언어학파(日常言語學派, ordinarylanguage school)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논리실증주의철학은 원래 마하(Mach,E.)의 실증주의 정신을 계승하려던 빈의 철학자 슐리크(Schlick,M.)·카르납(Carnap,R.) 등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비인 학파의 학자들이, 영국의 러셀(Russell, B.)이나 같은 비인 출신이지만 영국에 거주하던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L.) 등의 영향을 받아 주장하였다.
이들은 자연과학적 명제들의 정확성과 검증가능성을 이상으로 여겼다. 이들은 선천적 지식으로는 수학이나 논리학만을 인정했고, 경험적 지식은 검증 가능한 것이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종래의 형이상학적 명제들은 검증 불가능한 것이고 또한 선천적 지식에도 포함되지 않으므로 애매하고도 혼란한 것으로 거부된다.
논리실증주의에 따르면, 사실에 관한 연구는 모두 과학이 수행하는 것이므로, 다만 철학은 언어구조의 논리적 분석을 행하여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보통의 언어표현이 지니는 애매성을 제거하고 그것의 진위(眞僞)를 검증하는 것이라고 본다.
일상언어학파는 논리실증주의의 결함이 자각되면서 새로운 경향으로 대두된 학파이다. 이 학파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무어(Moore,G.E.)와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이다.
근래에는 라일(Ryle,G.)·오스틴(Austin,J.L.) 등의 옥스포드 철학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일상언어학파 역시 철학의 과제는 언어의 논리적인 분석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분석은 이제 더 이상 논리실증주의처럼 감각적 지각에 의해 검증될 수 없는 명제를 모조리 인식론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일상적인 애매한 언어표현으로 나타나 있는 문장을 의미가 확실한 명제로 바꾸고, 이것에 의해 상이한 형태의 언어표현에 대해서 각기 독자적인 논리구조를 발견해내려고 하는 것이다.
즉, 역사에 관해서 말하는 경우의 언어, 윤리에 관해서 말하는 경우의 언어 등은 비록 그것들이 감각적 지각에 의하여 검증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논리를 가지고 있고 그 독자의 용법이 있다는 것을 해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해석학은 논리실증주의와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해석학(Hermeneutik)은 “과학”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인간과 인간세계의 자연적 언어와 “이해”의 조건에 관심을 기울인다. 딜타이(Dilthey.W)는 정신과학을 자연과학과 구별해 정신과학의 학문의 기초가 되는 “이해의 역사성”과 그 방법으로서 “이해”를 강조한다.
그러나 가다머(Gadamer)는 하이데거를 따라 “이해”를 방법이 아니라 인간 현존재의 존재방식으로 규정한다. 그는 “이해의 조건”으로서 “선입견”을 재해석하고 끊임없는 해석학적 순환을 통하여 보다 나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논리실증주의가 자연과학적 명제의 정확성을 모범으로 삼음으로써 철학의 영역을 지나치게 좁게 만들어 버린 것에 반해, 해석학은 텍스트와 예술작품 뿐만 아니라 개인적, 사회적 행위의 모든 표현 형태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영역을 넓혀 놓았다.
호르크하이머(Horkheimer, M.), 아도르노(Adorno,W.)로 대표되는 비판이론(Kritische Theorie)은 현대의 산업문명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거부와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담고 있다.
그들은 주어진 현실과 조건을 긍정하고 그것을 또한 재생산하는 전통이론과 구분해서 자신들의 이론을 “비판이론”으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현대 사회가 “도구적 이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본다. 자연과 불합리한 권력으로부터 인간해방을 목표로 했던 계몽적 이성은 현대산업사회에 있어 “해방적 기능”을 상실하고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했다고 한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도구처럼 사용해서 자연을 지배하고 그것에 의해 생존하지만 그 대가로 인간 소외와 심각한 자연 파괴를 동시에 경험한다. 현대 산업사회의 도덕, 문화, 산업, 학문은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고, 이 도구적 이성은 인간과 자연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면서 위협하는 양상을 띤다.
그들은 더 이상 계몽이나 맑스주의가 가진 “혁명적 주체”, 즉 프롤레타리아를 믿지 않으며, 끊임없는 비판과 미적인 것에서 해방적 가능성을 발견하려한다. 80년대에 들어 서구적 근대사회와 이성지배적 담론에 대한 자기비판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들 [푸코, 데리다 등]에 의해서 계속 이루어졌다.
2.5. 현대의 위기와 철학의 과제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된 근대 서양철학은 인식하는 주체를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것은 흄의 경험주의나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그리고 칸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로크로부터 밀까지 이르는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도 개인은 합리성의 담지자로서 나타난다. 인식하는 주체는 이성의 힘을 신뢰하는 계몽의 주체였다. 독립적으로 행위하고 인식하는 주체, 계몽, 진보, 과학, 이성은 근대의 표어였다. 계몽의 목표는 자연적 폭력과 무지와 선입견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이성의 계발과 계몽에 기초한 근대학문은 기술적 자연지배와 물질적 풍요, 그리고 정치적 해방을 목표로 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 과학화와 기술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으며, 개인의 자유 또한 더욱 증대되었다.
계몽과 진보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확대해 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의 붕괴를 가져왔고, 기술적 자연지배로 인한 심각한 자연파괴를 가져왔다.
오늘날 서구철학에서는 모든 행위의 최종 근거로서의 “개인주의”와 그것이 가진 가치에 대한 비판적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심각한 자연파괴에 직면해서 ‘계몽주의’에 바탕을 둔 근대적 이성의 도구적 폭력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들려 온다.
매킨타이어(MacIntyre, A.)같은 철학자는 원자화된 “개인주의”에 기초한 윤리학은 결국 개인의 “느낌”이나 “취향”에 그 근거를 둘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인간의 윤리적 행위와 가치는 인간이 관계 맺고 있는 공동의 삶의 장, 즉 공동체로부터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요나스(Jonas H.)는 “책임의 원칙”을 통해 인간의 자연정복에 의한 생태학적 위기를 지적하고, 자연의 위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윤리적 원칙으로까지 요청한다.
이처럼 현대의 위기와 근대 이성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현대 서양철학의 여러 시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단순하게 서양문명의 모방과 학습을 강조하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의 전통과 현실적 지반에 다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철학적 전통과 현실 속에는 인간을 “공동체적 연관”속에서 파악하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강조하는 것 등 오늘날 되살릴 만한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을 하는 주체로서 우리는 한국이라는 지역적 울타리에 매여있거나 맹목적으로 전통에 집착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현대 세계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더불어, 철학하는 출발점으로서 한국의 역사적 현실을 자각하고 또한 그로부터 비롯된 사상에 대해서도 철저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 본 철학사가 가르쳐 준 철학하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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