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다보면...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는 것과
죄를 짓지 말라는 추상같은 표현이 숨이 막힐 정도로 많이 나옵니다.
말씀을 지키지 않거나 죄를 지으면... 당장에라도 버림받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 부분에서 한숨을 쉬며, 우왕좌왕하는 걸 봅니다.
'우리가 어찌 예수님처럼 말씀을 지켜 행하나...' 맞습니다...
아무리 거듭난 사람도.. 예수님처럼 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지키지 말라는 걸까요? 그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주님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지키는 걸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이 되어야만 100% 다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이 되어야 안 짓게 됩니다.
하여, 예수님은... 단 한방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이 되어, 말씀을 지키라며 요구하신 적 없었고,
단번에 장성한 모습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아십니다.
거듭나도... 단번에 그리스도의 모습과 똑같은 완성형은 없다는 겁니다.
그저, 그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해 가는 것뿐입니다.
비유하자면...
갓 태어난 아기는 엄마가 주는 젖을 먹으면서
성장해 가는데 처음에는 말하는 것조차 버거워 옹알이만 합니다.
옹알이가 끝나면, 배를 바닥에 붙이고서, 겨우 손과 발만 파닥거립니다.
이 시기에 걷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만,
더 성장하여 다리에 힘이 붙으면...
걷기를 시도하다 넘어졌다 일어서길 계속 반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꾸 넘어지다 힘들면.. 부모를 보면서 도와주길 원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잘한다 하며 기쁜 마음으로 아이를 일으켜 세워줍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면 또 일으켜 세웁니다.
부모가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왜 기뻐하는지 아십니까?
넘어져도 넘어져도 또 일어나 걸으려는 내 아이가 대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정 사랑하는 내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이런 모습을 볼 때,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넘쳐나는지 다 알 것입니다.
그런데, 갓 태어난 아이에게 '일어나 걸어봐라' 명한다고 걸을 수 있나요?
절대 불가능하지만, 아이가 성장해 가며 걷고자 하는 마음가짐 자체가...
부모의 입장에서는 너무 기쁜 것입니다.
하여, 아이가 발을 떼기 시작하면, 너무 기뻐 박수치며 난리도 아닙니다.
아이는 이것을 반복하며 씩씩하게 걸을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해 갑니다.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동안 부모의 사랑이 녹아듭니다.
이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양육 방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 생활하면서 넘어졌다 일어서길 반복합니다.
믿노라 하며 안 넘어지는 사람은.. 이 땅에 100%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가 넘어지는 걸 알듯, 주님도 먼저 아십니다.
부모는 아이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걸으려는 걸 기뻐하듯...
주님께서도... 내가 죄로 넘어질지언정...
주님이 도와주길 간절히 바라며 회개하고 일어서는 걸 매우 바라십니다.
또한, 주님 말씀을 100% 다 지킬 능력이 없다는 걸 알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키려고 하는 마음가짐...
주님은 그 동기를 귀하게 보시며 우리의 영성을 체크하십니다.
즉, 죄를 짓거나, 말씀을 못 지킨 것보다...
그다음 상황에 대해 어찌 대처하는지... 그걸 먼저 보십니다.
죄에 안주하려는지, 자포자기하는지, 애통하며 다시 일어서려 하는지...
이처럼, 마음의 중심과 동기를 살피십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동기)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예레미야 17장 10절)
그래서 우리가 부득불 어쩔 수 없이 죄로 넘어져도 자신의 죄를 주님께
눈물로 고소하며 회개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다시 일어나 걸어가라 하시며 능력을(은혜)을 주십니다.
죄성 앞에 무능한 우리가...
죄로 무너질 때, 바로 주님의 이런 은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흔히, 죄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소리이지,
(자기 죄를 정당화 하기 위해
죄는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은혜로 덮어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렇게 성장하며, 눈치 못 채는 사이 주님의 은혜가 곳곳에 녹아듭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을 성장시키는 주님의 양육 방식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넘어져도 일어나지 않으려 한다면...
부모 입장에서는 이 아이의 뭔가가 잘못되었다 하며 근심에 쌓입니다.
신체적으로 멀쩡한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해 가며 걷지 않으려 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런저런 죄로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나길 거부하며
진실된 마음으로 회개치 아니하면, 주님께서는 참으로 근심하심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신체도 넘어지고 일어나길 반복하며 성장합니다.
이렇게 어른으로 성장해 가면 어지간해서 넘어질 일이 점점 없어집니다.
다리에 튼튼한 근육들이 생겨 넘어지지 않을 만큼 힘이 붙었기 때문이고,
어쩌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아이때와는 다르게 바로 일어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로 넘어졌다가 일어나길 반복하며 믿음이 성장해 갑니다.
또한, 믿음이 크게 성장하면 할수록, 영의 근육이 단련되어 점점 넘어질
일도 없어지지만, 부득불 넘어져도 금방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성장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믿음을 굳건하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4장 13-14절)
이처럼, 믿음은 성장해 가는 것이지 첨부터 완성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믿음 좋다는 바울 사도조차도 완성형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죽노라' 하며 애통했던 것입니다.
이 땅의 생을 끝내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야만 완성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죄를 유발시키는, 공중권세의 사탄마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허나, 이 땅에 사는 한 죄의 권세 아래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몸도 성장할 때
몸의 관절 부위 같은 곳들이 쿡쿡 쑤시는 성장통을 경험하듯,
믿음의 성장 과정에서도 이런 성장통을 경험하는데 그게 뭔지 아십니까...
애통하고 가난하고 상한 심령.. 바로 이것이 믿음의 성장통이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통하고 가난하고 상한 마음이 언제 느껴지는지 아십니까...
죄짓지 말아야지 하다가 죄로 넘어졌을 때입니다.
하여, 나를 지켜보시는 코람데오의 하나님을 뵙기 두렵기도 하고,
나를 참으로 사랑하는 주님 전에서 죄를 범했기에 그분을 실망시킨 것이
너무나도 괴롭고...
또, 자신에 연약함에 실망하여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애통한 마음도 결국은... 죄에 대한 알레르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입니다.
즉, 죄가 너무 싫어 내 영이 민감히 반응하기에 나오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
가난하고 애통의 마음이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죄에 대해 민감하지 않기 때문에.. 알레르기 반응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만난 적 없어, 영이 잠자고 있기 때문에 죄에 둔감한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이 내 심장으로 들어와 역사한다면,
당연히 죄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말씀이 내 심장이 아닌, 머리에만 머물기에 영이 깨이지 않아
죄에 대해 둔감한 것입니다. 죄에 대해 민감히 느끼는 곳은 내 심장이지
결코, 머리의 관념적 이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역 중...
많은 분들을 만나다 보면 간혹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죄로 넘어지는 것에 대하여, '나는 왜 이런가, 난 안 되는 걸까?' 하면서
힘들어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쉬며, 괴로워하는 것을 간혹 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분들을 보며 참 귀한 믿음임을 느끼게 됩니다.
바울 사도의 그림자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장 31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장 24절)
바울 사도는...
분명 거듭난 믿음이고, 그 믿음의 깊이가 대단한 분입니다.
그런데.. 왜 날마다 죽는다고 하고, 왜 곤고한 사람이라며 애통했습니까...
바울 사도 역시 이 땅에 사는 한,
사탄마귀의 공중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아무리 거룩함을 유지하려 해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죄 앞에 자신의 나약함이 괴로워서 그랬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처럼, 왜 이런 현상이 생기냐 하면...
내가 믿음이 없을 때는...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영성이 어둡고 둔감하여
내 안의 죄성이 잘 안 보이기에, 죄에 대해 별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지만,
믿음이 성장하며 주님께 다가갈수록, 그분의 거룩한 빛으로 인하여
내 죄성이 더 잘 보이기 때문에 더욱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하여, 바울 사도처럼 주님께 더 다가선 사람일수록 죄가 더 잘 보이기에
그에 비례하여 더 애통한 마음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마치,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얼룩이 조금 묻은들 뭔 대수겠냐 하지만,
깨끗한 옷을 입었다면 얼룩이 조금 묻어도, 그것이 눈에 너무 잘 띄기에
너무 속상해서 빨리 세탁하려는 것과 똑같은 현상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일수록, 세마포에 죄의 얼룩이 묻는 것이
너무 괴로워, 애통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편 17절)
바울은 바로 이런 사람이라, 주님께 사랑받는 큰 믿음의 사도였습니다.
넘어져도 일어서려는 것... 그게 믿는 성도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죄로 넘어지는 것에 대해...
은혜(?)로 '퉁' 치며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도 큰 문제지만...
죄로 넘어졌다고 자신을 너무 학대하며 저주하듯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지만, 저주하듯 하는 것은...
자신을 정죄하는 아주 좋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 정죄는 마귀가 내 마음을 부추겨 절망에 빠뜨리려는 것입니다.
정죄는.. 형제에게도 절대 하면 안 되겠지만, 자신에게도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음의 말씀을 왜 하셨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중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3-6절)
윗 글에서 애통하다는 것은...
자신의 죄로 심령이 괴롭기 때문에 나오는 영적 현상이라 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건, 자신을 부인하였기에 세상 것이 내 안에 들어오는 걸
거부하는 영적 현상인데...
세상적인 것들이 비워지니, 그 비워진 심령의 공간에
주님으로 채우려는 거룩한 본능 때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또 그들이 원하는 걸 채워주시기에 배부른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장 31절)
바울 사도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숨 쉬는 동안에는 마귀의 공중권세를
절대 피해 갈 수 없기에 죄에 대한 애통의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난 성도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란 걸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애통의 마음이 없는 게 더 잘못된 것입니다.
애통하고 가난한 심령은 주님의 은혜로써, 거듭난 이들에게만 나타나는
거룩한 현상입니다. 하여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면 그분께 위로받으며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믿음이 성장하다 보면... 부침현상도 많이 겪게 되겠지만,
믿음은... '이 정도면 되었다' 하는 영적 정체기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지만... 멈춘 돌에는 반드시 이끼가 낍니다.
마찬가지로... 이정도면 되겠지 하며, 자만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마귀가 또아리를 틀지만,
뒤를 돌아보거나, 그 자리에 안주하려 하지 않고, 주님을 향해 달리며
넘어졌다 일어나길 반복하면서도, 쉼 없이 달음박질하는 성도들에게는
마귀도 또아리를 틀 수가 없습니다.
죄로 넘어지면 자포자기하지 말고, 그 즉시 회개하며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은혜에 힘입어 계속 달리십시오.. 주님이 도울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 달려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천국에 도착해 있을 것입니다.
랑별파파/ 다움카페: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사람들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는 것과
죄를 짓지 말라는 추상같은 표현이 숨이 막힐 정도로 많이 나옵니다.
말씀을 지키지 않거나 죄를 지으면... 당장에라도 버림받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 부분에서 한숨을 쉬며, 우왕좌왕하는 걸 봅니다.
'우리가 어찌 예수님처럼 말씀을 지켜 행하나...' 맞습니다...
아무리 거듭난 사람도.. 예수님처럼 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지키지 말라는 걸까요? 그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주님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지키는 걸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이 되어야만 100% 다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이 되어야 안 짓게 됩니다.
하여, 예수님은... 단 한방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이 되어, 말씀을 지키라며 요구하신 적 없었고,
단번에 장성한 모습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아십니다.
거듭나도... 단번에 그리스도의 모습과 똑같은 완성형은 없다는 겁니다.
그저, 그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해 가는 것뿐입니다.
비유하자면...
갓 태어난 아기는 엄마가 주는 젖을 먹으면서
성장해 가는데 처음에는 말하는 것조차 버거워 옹알이만 합니다.
옹알이가 끝나면, 배를 바닥에 붙이고서, 겨우 손과 발만 파닥거립니다.
이 시기에 걷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만,
더 성장하여 다리에 힘이 붙으면...
걷기를 시도하다 넘어졌다 일어서길 계속 반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꾸 넘어지다 힘들면.. 부모를 보면서 도와주길 원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잘한다 하며 기쁜 마음으로 아이를 일으켜 세워줍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면 또 일으켜 세웁니다.
부모가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왜 기뻐하는지 아십니까?
넘어져도 넘어져도 또 일어나 걸으려는 내 아이가 대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정 사랑하는 내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이런 모습을 볼 때,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넘쳐나는지 다 알 것입니다.
그런데, 갓 태어난 아이에게 '일어나 걸어봐라' 명한다고 걸을 수 있나요?
절대 불가능하지만, 아이가 성장해 가며 걷고자 하는 마음가짐 자체가...
부모의 입장에서는 너무 기쁜 것입니다.
하여, 아이가 발을 떼기 시작하면, 너무 기뻐 박수치며 난리도 아닙니다.
아이는 이것을 반복하며 씩씩하게 걸을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해 갑니다.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동안 부모의 사랑이 녹아듭니다.
이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양육 방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 생활하면서 넘어졌다 일어서길 반복합니다.
믿노라 하며 안 넘어지는 사람은.. 이 땅에 100%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가 넘어지는 걸 알듯, 주님도 먼저 아십니다.
부모는 아이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걸으려는 걸 기뻐하듯...
주님께서도... 내가 죄로 넘어질지언정...
주님이 도와주길 간절히 바라며 회개하고 일어서는 걸 매우 바라십니다.
또한, 주님 말씀을 100% 다 지킬 능력이 없다는 걸 알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키려고 하는 마음가짐...
주님은 그 동기를 귀하게 보시며 우리의 영성을 체크하십니다.
즉, 죄를 짓거나, 말씀을 못 지킨 것보다...
그다음 상황에 대해 어찌 대처하는지... 그걸 먼저 보십니다.
죄에 안주하려는지, 자포자기하는지, 애통하며 다시 일어서려 하는지...
이처럼, 마음의 중심과 동기를 살피십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동기)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예레미야 17장 10절)
그래서 우리가 부득불 어쩔 수 없이 죄로 넘어져도 자신의 죄를 주님께
눈물로 고소하며 회개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다시 일어나 걸어가라 하시며 능력을(은혜)을 주십니다.
죄성 앞에 무능한 우리가...
죄로 무너질 때, 바로 주님의 이런 은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흔히, 죄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소리이지,
(자기 죄를 정당화 하기 위해
죄는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은혜로 덮어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렇게 성장하며, 눈치 못 채는 사이 주님의 은혜가 곳곳에 녹아듭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을 성장시키는 주님의 양육 방식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넘어져도 일어나지 않으려 한다면...
부모 입장에서는 이 아이의 뭔가가 잘못되었다 하며 근심에 쌓입니다.
신체적으로 멀쩡한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해 가며 걷지 않으려 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런저런 죄로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나길 거부하며
진실된 마음으로 회개치 아니하면, 주님께서는 참으로 근심하심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신체도 넘어지고 일어나길 반복하며 성장합니다.
이렇게 어른으로 성장해 가면 어지간해서 넘어질 일이 점점 없어집니다.
다리에 튼튼한 근육들이 생겨 넘어지지 않을 만큼 힘이 붙었기 때문이고,
어쩌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아이때와는 다르게 바로 일어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로 넘어졌다가 일어나길 반복하며 믿음이 성장해 갑니다.
또한, 믿음이 크게 성장하면 할수록, 영의 근육이 단련되어 점점 넘어질
일도 없어지지만, 부득불 넘어져도 금방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성장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믿음을 굳건하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4장 13-14절)
이처럼, 믿음은 성장해 가는 것이지 첨부터 완성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믿음 좋다는 바울 사도조차도 완성형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죽노라' 하며 애통했던 것입니다.
이 땅의 생을 끝내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야만 완성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죄를 유발시키는, 공중권세의 사탄마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허나, 이 땅에 사는 한 죄의 권세 아래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몸도 성장할 때
몸의 관절 부위 같은 곳들이 쿡쿡 쑤시는 성장통을 경험하듯,
믿음의 성장 과정에서도 이런 성장통을 경험하는데 그게 뭔지 아십니까...
애통하고 가난하고 상한 심령.. 바로 이것이 믿음의 성장통이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통하고 가난하고 상한 마음이 언제 느껴지는지 아십니까...
죄짓지 말아야지 하다가 죄로 넘어졌을 때입니다.
하여, 나를 지켜보시는 코람데오의 하나님을 뵙기 두렵기도 하고,
나를 참으로 사랑하는 주님 전에서 죄를 범했기에 그분을 실망시킨 것이
너무나도 괴롭고...
또, 자신에 연약함에 실망하여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애통한 마음도 결국은... 죄에 대한 알레르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입니다.
즉, 죄가 너무 싫어 내 영이 민감히 반응하기에 나오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
가난하고 애통의 마음이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죄에 대해 민감하지 않기 때문에.. 알레르기 반응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만난 적 없어, 영이 잠자고 있기 때문에 죄에 둔감한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이 내 심장으로 들어와 역사한다면,
당연히 죄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말씀이 내 심장이 아닌, 머리에만 머물기에 영이 깨이지 않아
죄에 대해 둔감한 것입니다. 죄에 대해 민감히 느끼는 곳은 내 심장이지
결코, 머리의 관념적 이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역 중...
많은 분들을 만나다 보면 간혹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죄로 넘어지는 것에 대하여, '나는 왜 이런가, 난 안 되는 걸까?' 하면서
힘들어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쉬며, 괴로워하는 것을 간혹 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분들을 보며 참 귀한 믿음임을 느끼게 됩니다.
바울 사도의 그림자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장 31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장 24절)
바울 사도는...
분명 거듭난 믿음이고, 그 믿음의 깊이가 대단한 분입니다.
그런데.. 왜 날마다 죽는다고 하고, 왜 곤고한 사람이라며 애통했습니까...
바울 사도 역시 이 땅에 사는 한,
사탄마귀의 공중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아무리 거룩함을 유지하려 해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죄 앞에 자신의 나약함이 괴로워서 그랬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처럼, 왜 이런 현상이 생기냐 하면...
내가 믿음이 없을 때는...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영성이 어둡고 둔감하여
내 안의 죄성이 잘 안 보이기에, 죄에 대해 별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지만,
믿음이 성장하며 주님께 다가갈수록, 그분의 거룩한 빛으로 인하여
내 죄성이 더 잘 보이기 때문에 더욱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하여, 바울 사도처럼 주님께 더 다가선 사람일수록 죄가 더 잘 보이기에
그에 비례하여 더 애통한 마음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마치,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얼룩이 조금 묻은들 뭔 대수겠냐 하지만,
깨끗한 옷을 입었다면 얼룩이 조금 묻어도, 그것이 눈에 너무 잘 띄기에
너무 속상해서 빨리 세탁하려는 것과 똑같은 현상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일수록, 세마포에 죄의 얼룩이 묻는 것이
너무 괴로워, 애통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편 17절)
바울은 바로 이런 사람이라, 주님께 사랑받는 큰 믿음의 사도였습니다.
넘어져도 일어서려는 것... 그게 믿는 성도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죄로 넘어지는 것에 대해...
은혜(?)로 '퉁' 치며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도 큰 문제지만...
죄로 넘어졌다고 자신을 너무 학대하며 저주하듯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지만, 저주하듯 하는 것은...
자신을 정죄하는 아주 좋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 정죄는 마귀가 내 마음을 부추겨 절망에 빠뜨리려는 것입니다.
정죄는.. 형제에게도 절대 하면 안 되겠지만, 자신에게도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음의 말씀을 왜 하셨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중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3-6절)
윗 글에서 애통하다는 것은...
자신의 죄로 심령이 괴롭기 때문에 나오는 영적 현상이라 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건, 자신을 부인하였기에 세상 것이 내 안에 들어오는 걸
거부하는 영적 현상인데...
세상적인 것들이 비워지니, 그 비워진 심령의 공간에
주님으로 채우려는 거룩한 본능 때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또 그들이 원하는 걸 채워주시기에 배부른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장 31절)
바울 사도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숨 쉬는 동안에는 마귀의 공중권세를
절대 피해 갈 수 없기에 죄에 대한 애통의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난 성도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란 걸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애통의 마음이 없는 게 더 잘못된 것입니다.
애통하고 가난한 심령은 주님의 은혜로써, 거듭난 이들에게만 나타나는
거룩한 현상입니다. 하여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면 그분께 위로받으며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믿음이 성장하다 보면... 부침현상도 많이 겪게 되겠지만,
믿음은... '이 정도면 되었다' 하는 영적 정체기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지만... 멈춘 돌에는 반드시 이끼가 낍니다.
마찬가지로... 이정도면 되겠지 하며, 자만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마귀가 또아리를 틀지만,
뒤를 돌아보거나, 그 자리에 안주하려 하지 않고, 주님을 향해 달리며
넘어졌다 일어나길 반복하면서도, 쉼 없이 달음박질하는 성도들에게는
마귀도 또아리를 틀 수가 없습니다.
죄로 넘어지면 자포자기하지 말고, 그 즉시 회개하며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은혜에 힘입어 계속 달리십시오.. 주님이 도울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 달려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천국에 도착해 있을 것입니다.
랑별파파/ 다움카페: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사람들
출처: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사람들(온라인 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랑별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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