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여전도회 헌신 예배

열려라 에바다 2012. 1. 20. 16:49

여전도회 헌신 예배

치유 받고 시중 든 여인

마가복음 1:29-31

오늘은 치유 받고 주님을 시중 든 베드로 장모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마가복음에 이적의 책입니다. 고치신 일, 오병이어의 기적, 귀신을 쫓아내신 일등이 모두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이적을 고대하면서 믿음의 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업상의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병이 들어 고질화 되였을 때, 아이들의 문제, 법률적인 문제들, 우리 마음을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고 오해했을 때....... 여러 가지 사안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극적인 도우심을 기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이적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병들어 죽게 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을 찾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늘 건강한 자기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음을 잊고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병중에 고침을 받은 사람보다 늘 건강하여 잘 살고 있는 사람이 더 이적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범상치 아니하신 섭리 가운데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베드로 장모의 병이 고침 받은 이 사건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그 말씀을 들음으로 고침 받고 은혜 가운데 사는 우리들의 바르게 섬기는 법을 깨달아 알아야 할 것입니다.

1. 안식일을 거룩이 지키라고 하십니다.

이 이적은 안식일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막1: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라 하셨으니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베드로의 장모 집에 야고보 요한과 함께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건강해져서 주님을 수종들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다는 것과 병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상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무엇을 하는 날입니까? 그 날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날이요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구원의 회개와 말씀과 감사와 영광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죄인에게 내려지는 복된 날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치신 일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①. (마12:10-15)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고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하셨습니다.

②.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하셨는데 이 날도 바로 안식일이 였습니다.

③. (마14: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④. (마19:2)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⑤. (눅6: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 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⑥. (눅7:2) 백부장의 사랑하는 병들어 죽게 된 종을 고쳐 것도 안식일에 하신 일이요

⑦. (눅7:21)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하셨는데 이 일도 안식일에 하신 입니다.

⑧. (요5:7-9)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⑨. (요9: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⑩. (행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하셨으니 이와 같이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많이 고치신 것입니다.

안식일이 무엇입니까?

예배학이라는 신학 과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성경적 근거를 탐색하며 바르게 드리기를 배우는 학문입니다. 예배학에서 예배를 바르게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약의 제사 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는 구약의 제사 법에 근거하여 연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주일도 그렇습니다. 주일의 개념과 바르게 성수 주일 하는 법은 구약의 안식일에서 배워야 합니다. 안식일과 주일은 공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날입니다. 그리고 허락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며 헌신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주님의 인식일 치유에서 예배는 회당 예배가 많았는데 그 회당 예배는 찬송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듣는 예배입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고 은혜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체험하는 일도 예배를 통해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축복도 예배를 통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성수 주일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로 말미암아 병든 영혼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주일에 우리들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사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베드로 장모만 안식일에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그에 못지 않게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는 날이 주일입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를 바르게 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이유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생략한다 던지 적당히 드린다던지 성의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잘 드림으로 심령의 상처를 치유 받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도록 해야 합니다.

2. 이 이적은 베드로의 집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베드로는 결혼을 하였기 때문에 가정이 있고 장모님이 계셨습니다. 그가 전도를 다닐 때도 자기 부인을 대리고 다닌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보아서 베드로는 대단히 가정적인 사람이 였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모든 것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셨고 그 말씀에 따라 베드로는 누가복음 5:11에 보니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하였습니다.

즉 그는 아내에게 남편 노릇도 제대로 못했고, 장모에게 사위 노릇도 제대로 못했을 것입니다. 물른 그의 부모에게 자식 노릇을 제대로 못한 사람임에는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주님을 열심히 따르는 만큼 가정 일에 정성을 달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가정 생활에도 다소간의 지장이 있고 사회 생활에도 지장이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지혜롭고 슬기롭게 조정을 잘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함께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선 주변의 식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처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모두 그렇듯이 주님을 따르며 그 가족들의 생계에 특별한 책임을 지지 못하고 있는 점을 발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들의 가족들이 주님을 따르는 사도들을 배안시하고 멀리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주님과 사도들의 뒷바라지를 잘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의 가족들도 사도들 못지 않게 주님을 사랑하고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이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가족들의 저항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가족들의 신앙 수준이 여러분의 신앙 수준이 되도록 사랑하고 신앙적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신앙적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교회 일에 열심을 내다보니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가족들이 신앙생활에 염증을 느끼는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협조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주님을 섬겨야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임하는 것입니다.

“(막10:29-3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새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씀을 지나치게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가정을 버려도 좋다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딤전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정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말씀이지 문자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가정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가정을 버리면 100배를 더 받게 하신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가정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 누구보다도 가정의 식구들에게 헌신적이고 백배나 더한 사랑을 베풀어 하나님의 일에 지장이 없이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모 마리에게 잉태되었을 때 요셉은 가만히 파혼을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요셉을 감동하셔서 이 일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되었을 때 요셉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이해가 부족한 식구들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 찬동하도록 성령님의 감동이 있어지게 기도하십시오.

사도 베드로의 가정에서 일어났던 주님 섬김의 아름다운 사건이 우리 가정에도 있어야 우리 모든 식구들이 주님을 잘 섬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3. 주님께서 베드로는 장모의 병을 알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당신의 집에 모실 때 장모의 병을 고쳐 달라는 목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식사 대접을 하기 위해 보신 것인지, 아니면 피곤하신 주님을 쉬게 하려고 모신 것인지, 자기 집 근처에 왔음으로 차나 한전 대접할 생각이 였는지 모르겠으나 장모의 병 때문에 주님을 모신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데”하였으니 장모가 불편한 것을 베드로가 말한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들의 속사정을 주님에게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아도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계시면 족한 일입니다.

베드로 장모의 병도 예수는 미리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행동에서 볼 때 장모의 병을 고쳐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주님께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아오시는 것이나 우리 심령에 임재 하시는 목적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몸이 아픈 아이들이 엄마가 옆에 있어도 칭얼대며 엄마를 찾는 것처럼 늘 칭얼대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집사는 기도할 때마다 울고 예배 드릴 때마다 인상을 찡그리며 울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못하게 했습니다. 주님께서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계신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이요 감사요 영광입니다. 그리고 평안입니다.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하신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죄인에게 주실 수 있는 모든 은총과 축복이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너무 주님을 채근하지 마십시오. 다윗은 “(시139: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찬송가 가운데 주님이 늘 동행하신다는 가사 말이 있습니다.

「304장3절」 홀로 누워 괴로울 때 헤매다가 지칠 때 부르시던 찬송 소리 귀에 살아옵니다 반석에서 샘물 나고 황무지가 꽃피니 예수님과 동행하면 두려울 것 없어라

「427장3절」 나와 동행하시고 모든 염려 아시니 나는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 내가

「491장3절」 주 은총 매일 내게 더하네 나 주 안에 늘 기쁘다 저 악한 죄 길에서 지키네 나 주안에 늘 기쁘다 나 주 안에 늘 기쁘다 나 주 안에 늘 기쁘다 주 나와 늘 동행하시니 나 주 안에 늘 기쁘다

이 찬송들이 거짓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4. 주님께서는 그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습니다.

의사들간에 쓰는 은어 중에 ‘G. O. K'라는 은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아신다(God only Know)'라는 뜻으로 의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의학적 수단과 방법을 다 쓴 후에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뜻으로 쓴다고 합니다. 몇 년 전 만해도 불치병으로 생각되던 많은 병들이 현대 의학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해 점차 그 위세가 꺾이고 상당수 많은 병들은 간단한 약물 치료로 완치가 가능할 만큼 현대 의학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최첨단 시설에서 막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의사들이나, 첨단 장비로 환자들을 진찰한 많은 의사들이 마지막 장벽에 부딪치면 ‘G. O. K'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의사들의 치료 대상인 사람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손을 잡아 일으킨다는 말은 ‘크라테시스’라는 말인데 ‘움켜쥔다’는 말입니다. 그 뜻은 가만히 손을 얻는다든지 손을 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힘있게 잡아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만 하셔도 병든 사람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손을 데시기만 해도 되는 일입니다. 집에 오시지 않으셔도 멀리서 병든 사람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여인의 손을 잡아 힘있게 낚아 체여 벌떡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 점을 우리가 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여인의 병에 대하야 의사인 누가는 그가 쓴 복음서에서 “(눅4: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 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열병은 사람의 의식을 잃게 합니다. 아마도 요세 병 가운데 심한 장티브스 같은 병일 수가 있습니다. 말을 해서는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강한 텃칭을 하신 것입니다. 즉 주님은 의식이 없는 환자라고 해도 강력한 힘을 그에게 전하여 벌떡 일어 날 수 있는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병든 사람을 고치실 때 모두 같은 방법을 쓰시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여러 가지 형편과 믿음을 보시고 가장 적절한 처방을 내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구는 그렇게 해서 당장에 병을 고침 받았는데 나는 그렇게 했는데도 병이 낳지 않더라 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만져서 고친 사람, 말씀으로 고친 사람, 명령을 하여 순종함으로 고침을 받은 사람, 집단적인 치료를 하신 경우, 한 사람을 치료하신 경우, 친구의 믿음을 보시고 고치신 경우, 각각 그 방법이 다르니 모두 믿음으로 병고침을 받도록 마음의 준비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병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모든 일에 내게만 쓰실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적절한 방법을 쓰십니다. 다른 사람은 그렇는데 나는 왜 이렇는가 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게 주신 은혜가 가장 귀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이 병든 사람을 고치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여인이 병고침을 받은 후에 예수를 시중 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시중 들었다는 말은 주님만을 시중들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기적이 있기 전에도 몇 가지 이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사람들은 예수를 알고 있었고 또 예수를 따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시중 든다는 것은 자기 집에 온 많은 사람들을 대접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마음에 감동과 감격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교회를 시중드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섬김과 축복의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요, 성도의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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