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역사서

열려라 에바다 2023. 9. 19. 12:08

역사서

구약성경 39권은 주제별로 구성되었는데 모세 오경 – 역사서 – 시가서 – 예언서의 순서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역사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만이 아니라 역사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건을 주목하고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들은 무시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역사서가 사건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루고 계신지, 역사적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에서부터 에스더서까지를 역사서라 부르는데, 가나안 정복에서부터 바벨론 포로기와 귀환까지 이르는 1천 년에 가까운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을 각 시대별로 구분하여 연대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대 연대(B.C.) 관련 성경
가나안 정복시대 1405-1390 여호수아
사사 시대 1390-1050 사사기, 룻기
통일왕국 시대 1050-931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상, 하 1-9장
분열왕국 시대 931-586 열왕기상 12-22장, 열왕기하, 역대하 10-36장
바벨론 포로기와 귀환기 586-400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역사는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 하는데, 승리했을 때의 업적은 과장하여 기록하고 패배할 경우에는 아예 기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역사 왜곡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완전한 사실만을 기록합니다. 역사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보는 관점을 사관()이라 하는데 성경의 역사서 또한 두 가지 관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의 역사는 보는 관점을 신명기적 관점과 역대기적 관점으로 구분합니다.

 

신명기적 역사관이란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사상으로 역사를 보는 것인데 이것을 신명기적 역사관이라 합니다. 이를 ‘사필귀정, 인과응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범죄 – 징계 – 회개 – 구원의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단순히 사건의 반복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며, 회개와 순종을 통한 구원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열왕기서를 읽으며 주목할 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라는 구절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명기적 관점으로 기록된 책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상·하입니다. 열왕기서는 남북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반면 역대기서는 남 왕국 유다의 역사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열왕기서와 역대기의 기록 시대가 다르고 다른 관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역대기서는 포로기 이후에 기록되었고 포로기 이후 예루살렘이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역대기서에서 강조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다윗 집안의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다윗 왕조 회복의 희망을 주기 위함입니다.

2. 고레스의 명령으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백성들의 성전 재건을 강조하였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동안에도 그들의 주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성전 재건에 대한 뜻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역대기는 성전과 제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역대기 관점으로 기록된 책은 역대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이며 저자는 에스라서를 기록한 에스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사시대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주요 성읍들을 점령하고 각 지파들이 정착하며 가나안을 정복해 나갔지만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성읍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사후 각 지파들은 분배받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력투구하지만 당시에는 아직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도 없었고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 문화적으로 가나안의 악한 풍습의 영향을 받아 타락의 도가 심해졌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이방인의 손에 붙여 징치하셨고, 그들이 회개할 때는 사사들을 세워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때 활동했던 사사들은 15명에 이르렀으며 두드러지게 활약한 사사는 옷니엘, 기드온, 삼손, 사무엘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사시대를 끝내고 왕정을 열었던 사람이 사무엘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워 사사시대는 끝나게 됩니다. 이 때가 B.C.1050년경입니다.

 

통일왕국 시대

사무엘의 노쇠와 그의 아들들의 악행으로 사무엘 사후의 이스라엘의 향방을 염려한 장로들은 사무엘을 찾아와 왕의 옹립을 요구합니다(삼상 8:1-5). 사무엘의 염려와 경고 가운데 제비를 뽑아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왕으로 세웁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에 대한 시기로 말미암아 치욕스런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제2대 왕으로 등극합니다.

 

유다 족속의 왕으로 옹립된 다윗은 7년을 헤브론에서, 이스라엘 온 지파의 왕으로 즉위하여 예루살렘에서 33년간 통일 왕국을 형성합니다(삼하 5:5). 통일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다윗은 가나안을 정복하며 주변국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는 밧세바와의 간통으로 인해 그의 말년은 ‘칼이 네 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리라’(삼하 12:10) 하신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그 결과 압살롬의 반역이라는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다윗 언약’은 계속 지켜주십니다. 그 후 다윗의 왕권은 솔로몬에게 위임되고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군사적 성공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남으로 애굽 시내까지 북으로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확장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대내외적으로 성공하였지만 솔로몬은 건축 사업에 주력하여 백성들의 과도한 노역과 공물로 백성들의 원성을 사는 원인이 됩니다. 결국 이 일은 솔로몬의 사후 남북 왕국의 분열이라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분열왕국 시대

솔로몬의 무리한 건축 정책으로 인한 노역과 과도한 세금으로 인해 민심이 떠난 상황에서 솔로몬 사후 즉위한 르호보암은 계속 솔로몬의 강압 정책을 수행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 통일 왕국에서 북부 10지파가 갈라져 나가 왕국의 분열을 초래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은 세겜에 수도를 건설합니다. 수도 세겜은 오므리왕 때에 사마리아로 천도할 때까지 수도의 역할을합니다(왕상 16:24). 그리고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예루살렘, 남유다로 향할 것을 막기 위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형상을 세우고, 이 금송아지 제단이 예루살렘 성전을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초대 왕 때부터 금송아지 숭배(이것을 여호와 숭배라 여겼습니다)로 시작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역사는 왕조가 바뀌는 반역을 거듭하다가 남 유다보다 먼저 멸망하게 됩니다. 반역에 성공하여도 그 왕권은 1,2년에 불과했고 심지어는 7일천하로 끝마치는 왕도 있었습니다.

 

당시 앗수르 압제하에 있던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는 앗수르에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고 애굽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는 사마리아를 포위한 끝에 B.C. 722년 결국 사마리아를 점령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는 남 유다에 대해서도 무력 도발을 시도하지만 앗수르는 신 바벨론 제국에 의해 수도 니느웨가 함락됩니다(B.C.612년). 앗수르는 애굽의 도움을 받아 재기를 꿈꾸지만 유다 왕 요시아가 이를 저지함으로 실패합니다. 그리고 남 왕국 유다 또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시드기야 왕 때에 멸망합니다(B.C. 586년). 이렇게 하여 931-586년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분열왕국 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바벨론 포로와 귀환

이스라엘의 포로시대는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지만 이미 B.C.733년과 722년 두 차례에 걸친 북이스라엘의 앗수르 포로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세 차례에 걸친 남 유다의 포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B.C.605년 제 1차 바벨론 포로 : 다니엘과 세 친구들

B.C.597년 제 2차 바벨론 포로 : 여호야긴 왕, 에스겔

B.C.586년 제 3차 바벨론 포로 : 빈천한 사람들을 제외한 사람들

 

앗수르와 바벨론의 속국정책은 차이가 있습니다. 앗수르는 속국의 유력한 자들, 앗수르에 대항할만한 능력 있는 자들을 포로로 끌고 가 앗수르 곳곳에 흩어져 살게 하였고, 앗수르 사람들을 사마리아에 이주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은 혼혈화가 이루어졌고,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서도 사마리아 사람들이 개처럼 취급받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의 속국정책은 역시 유력한 자들을 포로로 끌고 가 바벨론의 교육을 받게 하여 공무원으로 일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자신들의 관대함을 포로들에게 보여주어 반란을 도모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포로들은 유배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허용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종교생활과, 장로들이 이끄는 공동체 조직을 갖는 것도 어느 정도 허용 받았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유대인들의 거주 지역에서는 은행이나 상업이 발달했던 흔적을 찾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유대인 포로들이 바벨론에서 어느 정도는 자유로운 경제생활을 했음을 말해줍니다. 느부갓네살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에윌므로닥은 포로된 유다 왕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석방시키고 왕궁 내의 저택을 주기도 했습니다(렘 52:31-34). 이러한 포로시대는 70년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포로들에게 편지하여 그곳에서 집을 짓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라고 충고하기도 했습니다(렘 29:1-10). 그리고 70년이 차면 귀환하게 될 터인즉 여호와 신앙을 굳게 지킬 것을 조언하였습니다(렘 29:11-14). 이러한 메시지는 예루살렘 멸망과 포로 생활이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역사의 주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이끌어 시온으로 돌리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사40장). 그 때에는 유일신 여호와의 신앙이 만국에 전파될 것이라 강조하였습니다(사 66장).

 

마침내 때가 되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역사적 순간이 옵니다. 바사 왕 고레스가 바벨론에 이어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였고, 그는 속국의 문화적, 종교적 관용 정책으로 시온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도록 했으며 예루살렘 성전 재건 허락을 공포하였습니다. 고레스 칙령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의 포로 귀환이 이루어졌고,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B.C.539년 제 1차 포로귀환 : 고레스 왕 때 스룹바벨 인도하에

B.C.457년 제 2차 포로귀환 : 아닥사스다 1세 때 에스라 인도하에(스7:1-10)

B.C.444년 제 3차 포로귀환 : 아닥사스다 1세 때 느헤미야 인도하에(느2:1-11)

 

스룹바벨 인도하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 성전재건을 시작하지만 성전의 기초를 쌓고 곧 중단합니다. 막상 귀환했지만 예루살렘의 형편이 너무 어려웠던 것입니다. B.C.536년 시작된 성전재건은 B.C. 520년까지 16년간이나 중단됩니다(스3-6장, 느1-6장). B.C.520년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사역으로 성전재건이 시작되어 4년이 지나 B.C.516년에 성전을 완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70년이 차면 귀환하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렘 29:10). B.C. 605년 제 1차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B.C.536년 귀환함으로써 70년만에 돌아오리라는 말씀이 성취되었고, B.C.586년 무너진 성전이 70년이 지난 B.C.516년에 재건됨으로써 이스라엘의 영적인 귀환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재건을 완공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다시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안식일과 각종 절기를 잊고, 제사장들까지도 이방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B.C. 457년 제사장이며 학사인 에스라 선지자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사경회를 통해 영적침체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각종 죄악을 청산하고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에스라의 귀환 목적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여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스 7:10)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에스라는 역대기의 저자로 알려집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에스라는 남왕국 유다의 정통성과 신정국가의 면모를 나타내고,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성취를 보여주기 위해 역대기를 기록합니다. 따라서 역대기는 같은 시대의 역사를 다루면서도 열왕기서와 그 내용이 다릅니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의 순종을 교훈하기 위해 기록되었다면, 역대기는 제사장적 입장에서 신정 체제의 재건을 촉구하기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다윗의 이상적인 통치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그의 후손 아사,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와 포로기 이후에는 ‘참 이스라엘’ 유다의 신실한 성도들을 보여주고 이들과 맺어진 하나님과의 언약은 영원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역대기서가 강조하는 것은 메시야적인 왕이며 제사장 다윗을 통해 그분의 언약 백성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것입니다. 오랜 기간 포로 생활로 저하된 ‘참 이스라엘’로서의 자긍심을 되찾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인도해 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역대기가 제사장직과 제사 제도, 성전, 레위 지파와 찬양대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보다 13년 뒤에 귀환한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재가를 얻어 총독으로 임명받아 귀환합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하고 총독으로서 백성들의 경제 사회적인 문제들을 훌륭하게 처리합니다(5장). 이뿐만 아니라 에스라를 통한 율법교육(7:73-8:12)과 초막절을 다시 지키도록(8:13-18) 하는 등의 신앙개혁을 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에게 허락받은 13년의 임기를 마치고 다시 수산성으로 돌아간 느헤미야는 1년 후에 다시 돌아왔는데(13:6-7) 그 사이에 다시 악습이 만연하게 된 것을 보고 제 2차 신앙개혁을 일으킵니다. 공무를 집행하던 중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느헤미야와 동시대에 활약한 선지자는 말라기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 후 하나님은 더 이상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십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하여 ‘회개’를 외칠 때까지의 기간을 ‘신,구약 중간기’라 부릅니다. 이 신구약 중간기를 하나님의 침묵기라고도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세계사에서 일어난 사건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만이 아니라 온 세계의 역사를 다스리심을 보여주십니다. 신구약 중간기에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역사를 다니엘의 예언(단 7-11장)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환상을 통해 예언된 다니엘 7-11장은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성취되었기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다니엘서가 기원전 2세기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