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폴더

"험하지만, 사랑 앞에 서면서"

열려라 에바다 2023. 9. 21. 11:33
"험하지만, 사랑 앞에 서면서"
 

봉서방추천 0조회 4323.09.21 02:23댓글 0

 
 

옮겨온 글입니다


오래전, 상영되었던 한편의 영화가 생각난다. '러브스토리'(Love Story)라는 영화의 대사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랑이란? "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은? 대등한 관계를 요구한다.
사랑은? 한쪽이 잘났다고 우기고 누르며 윽박지를 때도 그로인해 상대방이 억울함과 부족함을 느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랑은? 따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향한 가장 평범한 사랑의 행위는 무엇인가?
지자체 공원의 휴게실과 부속 화장실에서 청소하시는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의 이야기다. 사랑은? "휴지는 휴지통에, 꽁초는 재떨이에 버리는게 사랑임을 그 나이 그 직업에서 이제서야 깨달았다."라고 했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누군가 그것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혀야 한다. 쓰레기를 쓰레기 통에 버리는 것은 너무나 평범한 일이다. 또 으시될 일도 아니다. 누가 알아 주지도 않는다. 거기에 시기 질투도 없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그런데 세상 살다 보면 느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어려운 것 보다 쉬운 것을 더 못하는 같아 보인다. 쉬운 것, 평범한 것 꾸준히 하는 것 그게 사랑이지 싶다.

성경에 나오는 복음서의 말씀들 내용은 어려운 것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말씀 행하는 것을 그렇게 힘들어 한다.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은 원래부터 사랑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은 작가만의 생각일까?

우리의 과거 어떤 시절의 삶속에서. 다시는 생각하기도 끔찍하고 어렵고 싫은 일들이 한 동안은 우리를 괴롭혔지만, 지난 세월을 살펴보면, 그 일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다행히 평탄한 삶을 살아갔다면 절대하지 않았을 일들을 경험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일이 없었다면 영혼이 무엇인지? 인생이 얼마나 짧은가? 무엇이 진리인지? 어떤 것이 더 가치 있는가? 그러한 인생의 심오한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를 생각할 때 ‘나의 나됨‘은 절대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면 인정하게 된다. 여기서 성경은 믿음을 요구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그분의 방법, 이런 일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해답은 이 지점에서 인간에게 재차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해를 구하는 설명이 아니다. 지금 보편타당성을 가지는 인간 세상의 상식과 또한, 거창하게 인권적 차원에서도 생각해 보자. 타자에 의해 자신에게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자신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 우리의 인생을 자신의 동의도 없이 간섭하시며 인도하시고 지배하셨지만, 그분이 보여주시는 것은 그 분의 ‘사랑’이었음을 깨달을 때, 마음의 평화와 기쁨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그 유익은 소수의 받아들일 수 있는 일부 가능한 자만이 가지는 큰 은혜의 축복이다.

그분의 ‘사랑’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이다. 굳이 표현한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러기에 절대자, 그분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언어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영적인 작업을 요구하고 있다. 이 작업을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세상 비록, "험하지만, 사랑 앞에 서면서" 한 생명이라도 살아나게 하는 거룩한 작업에 동참해 보았으면 좋겠다.

사람은, 등 따시고(따뜻해지고) 배부르고 편안해지면 어느새 상대방에게 다양하고 기울어진 이기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따지며 무섭게 저울질하는 갑의 사랑으로 변하는 경우를 자주 보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부름받아 나온 사람’들의 모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를 보자. 일부의 모습은 세상의 구태를 능가하고 있다.
끊임 없는 분규와 갈등 중에는 언제나 무엇이든 더 가지겠다는 ‘소유’가 깊이 숨어 있다. 결국 탐욕과 교만이다. 여기에 세상의 모든이가 떠 받치고 숭상하는 가치까지 슬그머니 침투해서 ‘미디어’를 통해 부추긴다.

지금 단단히 오염되어 있다. 그렇지만, ‘탐욕과 교만’에서 언제쯤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인지. 여기서, 이들은 그 판을 세상으로 가져가는 인간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 그러면 세상은 그들의 리그(league)안에서 쾌재를 부르며 환호한다. 곧, 그들은 몸가짐을 가다듬고 한 목소리로 양자를 조롱하며 비난하며 꾸중한다. 나중에 누구든 한쪽이 세상에서 이기는 자가 된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어리석고 둔한 자가 되어 권위를 상실하고 있다. 이긴 쪽도 이미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이 정해진 이치다. 드디어 세상이 사랑의 공동체를 걱정하고 있다. 철저히 이기적인 자신들을 위해서다. 이게 ‘정상’인가? 아니다.

이 사랑의 공동체 권위는 어디 있는가? 당연히, 성직자의 ‘영적권위’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성직자는 ‘사적 권위’에 몰두하고 있다. ‘사단‘이 무엇인가? 괴물의 모습인가? 대단한가? 전혀 아니다. 서로어려운 말 하지 말자. 누구든 알기 쉽게 이야기해 보자. ‘가짜 사랑’이다. 세상에서 조건부 사랑을 하는 자다. 그들에게 평안이 있겠는가? 없는가? 없으면 가짜다. 위장된 사랑과 미소로 간이나 보면서 절대자 그분을 섬기는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신실하게 신앙생활하려는 사람조차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 자가 바로 불신자의 삶으로 인도하게 하는 가짜가 아니고 무엇인가? 소위 힘 있는 성직자라는 간판을 달았을 때의 가장 큰 유혹은 자신이 ’무오‘하다는 ’오류‘의 적폐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다.

다행히 힘 있는자가 자신이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복 받은 사람이다. 최소한, 섬김의 자리, 겸손의 자리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조금 이라도 마음에 죄 때문에 평안함이 없다고 생각되면, 조건없이 곧 바로 지체없이 가야 한다. 집으로 가서 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빛도 없고 이름도 없고 가장 약하고 낮은 자리 많이 아픈 자에게 가서 때로는 의심도 받고 누명도 쓰고 험한 말도 듣고 추한 모습을 보는 가운데 인격이 존재하는 삶인가? 고민하는 가운데 이 세상 어떠한 생명도 지극히 귀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지금까지 자신이 행하여 온 수많은 작업을 하면서 대접받으며 박수받고 조명받은 것은 껍데기인 줄 새삼 터득하는 것이 복이라 생각해 본다.

지금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조건 없는 십자가 사랑의 은혜를 깨달으며 "험하지만, 사랑 앞에 서면서" 우리가 소원하는 복되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화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