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스크랩 땅에 서신 나의 대속자

열려라 에바다 2023. 10. 3. 11:33

땅에 서신 나의 대속자


욥기 19:13-26
13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14 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15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16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간청하여야 하겠구나
17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18 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19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
20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
21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22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
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인생 가운데 가장 쓰라린 아픔은 친구에게 상처를 당하는 아픔입니다. 원수에 의해 상처를 당하는 것도 아프지만 어느정도 예측한 것이기에 부지 중에 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욥은 조금도 기대치 않다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철저한 버림을 받습니다.


욥기 19장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현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세 친구와 단절되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친구가 될 때는 서로에게 뭔가 끌리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끌림은 상대의 어떤 행동 때문이라기보다 그 사람 자체에게 끌리는 것입니다. 친구 관계란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대화가 잘 되고 기분이 좋은 것을 말합니다. 또한 어려울 때나 기쁠 때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때 욥은 그의 세 친구들, 즉 엘리바스, 빌닷, 소발과 매우 친하게 지냈습니다. 서로 왕래하며 음식도 나누고 선물도 주고 격려도 하고 좋은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욥은 대단한 부자이며 성품이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많은 은혜를 끼쳤습니다.


그러나 욥은 갑자기 쫄딱 망하고 자녀들을 한 순간에 다 잃었으며 그의 몸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지독한 악창에 걸립니다. 그러자 친구들의 마음은 서서히 변하더니 결국 욥을 멸시하며 자신들의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심지어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욥이 그렇게 망하게 된 것은 숨겨진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제 욥은 그의 친구들이 그를 저버림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그는 우애를 나눌 대상을 잃었습니다. 그는 그가 격고 있는 일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 상태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욥기 8장에서 욥의 친구 빌닷의 제1차 공격을 보면 그는 욥에게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욥 8:2)라고 하며 고함을 칩니다. 그는 욥이 패망한 것은 그의 자녀들이 범죄했기 때문이라고 공격합니다.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느니라”(욥 8:4).
사랑과 위로는커녕 이 얼마나 악독한 말입니까?


욥기 18장에서 두번째 공격 때에는 버럭 화부터 내며 욥을 공격합니다.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욥 18:4)
욥기 16장을 보면 욥은 하나님께서 그를 찢으신다고 탄식했습니다(욥 16:9). 그런데 지금 빌닷은 욥이 분에 못이겨 스스로 자기 자신을 찢고 있다고 정죄합니다.


빌닷이 왜 이렇게 화가 났습니까? 욥이 세 친구들을 짐승처럼 여기며 그들을 모욕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욥 18:3).


욥기 12장을 보면 욥은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같은 하찮은 피조물도 다 알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너희는 어째서 모르냐고 반론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욥 12:7-9).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빌닷은 자신을 짐승으로 여기고 부정하게 본다면서 욥의 말을 받아서 친 것입니다. 빌닷은 평소에 욥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욥이 망하자 이번 기회에 욥을 박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버럭 화를 낸 빌닷이 소리칩니다.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욥 18:4).
즉, “네가 울분을 터뜨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바뀌겠느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욥을 훈계한 빌닷은 “악한 자를 노리는 올무”에 대해 장황한 연설을 합니다. 그리고 욥이 그 모든 올무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다며 조롱합니다. 즉, 욥 너는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그의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라”(욥 18:5-6).


빌닷은 욥을 악인이라고 부르며 욥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욥에게 비취이던 등불은 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빌닷은 빛, 불꽃, 등불 이렇게 세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욥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영원히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정죄합니다.


이처럼 욥을 악인으로 설정한 빌닷은 일종의 저주를 퍼 붓습니다. 욥기 18장 7-10절입니다.
[
7 그의 활기찬 걸음이 피곤하여지고 그가 마련한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
8 이는 그의 발이 그물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려들며
9 그의 발 뒤꿈치는 에 치이고 그의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
10 그를 잡을 덫이 땅에 숨겨져 있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목에 있으며
](욥 18:7-10)


“그물, 올가미, 덫, 올무, 그를 잡을 덫, 함정”은 온갖 포획도구를 뜻하는 단어인데 빌닷은 6 종류의 도구를 사용하면서 욥이 그런 올무에 걸려 철저하게 패망했다고 선언합니다.


이어서 빌닷은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욥을 놀라게 하고 “사망의 장자”가 그의 몸을 먹을 것이며 “공포의 왕”이 그를 붙잡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욥 18:11, 13, 14). 빌닷은 이방인들의 사상인 “죽음의 왕”을 공포의 왕이라 부르며 공포의 왕이 이제 곧 욥을 데리러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빌닷은 재앙과 기근이 욥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제 곧 죽음의 왕이 병든 욥을 덮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욥 18:12). 사실, 욥의 집은 불타 없어지고, 그의 뿌리는 밑에서부터 말랐습니다(욥 18:15-16). 그의 자식들은 모두 죽었고, 이제 욥의 대를 이을 자손도 없습니다. 즉, 그의 뿌리가 밑에서부터 말라비틀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이름과 씨는 이 땅에서 멸절될 것입니다. 욥이 죽으면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욥 18:17-19).


아무튼 욥의 처지가 어찌나 처참한지 동쪽과 서쪽에서 오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놀랄 것입니다(욥 18:20). 욥의 친구인 빌닷은 이렇게 말하면서 욥은 참으로 불의한 자이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단정합니다.
“그의 운명에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 오는 자가 깜짝 놀라리라.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욥 18:20-21).


결론적으로 빌닷은 욥에 대해 “악인”, “불의한 자”, “하나님을 모르는 자”로 판단하였습니다. 빌닷은 상황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일이 잘 풀린 사람은 ‘선인’, ‘의로운 자’, ‘믿음이 좋은 자’입니다. 그러나 일이 안 풀린 사람은 ‘악인’, ‘불의한 자’, ‘믿음이 가짜인 사람’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도 빌닷 같은 사람이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도 전혀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향해 인내하며 견디고 있는 욥을 향해 이러한 판단을 하는 빌닷의 독이 담긴 말을 들어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고난 당할 때 이런 빌닷 같은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때 우리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듭니까? 어떤 심정이 되겠습니까? 악독을 품기 쉽고 미움과 저주를 내뱉기 쉽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향해 왜 이런 친구를 허락하셨냐고 넉두리 하며 분노하고 싶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욥의 입장에 처하게 되면 많은 갈등과 번뇌가 시작됩니다. 아마 거의 예외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결국 이겨냅니다. 하지만 선한 일을 하다가 억울한 오해와 고난을 당하게 되면 참으로 많은 내적인 갈등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실까?
살아계시다면 왜 악이 허용되고 악이 승리하는 것일까?
세상에 이렇게 악이 가득한데 하나님은 대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왜 유난히 내 인생을 혹독하게 다루시는가?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듣고 계시는가?
내 기도에 응답하실 의향이 없으신가?
기도 응답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내가 혹시 하나님께 속은 것은 아닐까?
혹시 이렇게 고난을 당하다가 영원히 패배하는 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끝까지 주 하나님만을 믿다가 패가망신하는 것은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당장 뛰쳐나가서 내 힘대로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꼭 이렇게 손해보며 주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이런 질문은 이 시대의 모든 욥들이 하는 공통된 질문입니다. 


세 친구에게 철저한 따돌림과 정죄를 당한 욥은 지독한 고독으로 들어갑니다. 너무나 외롭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도 절절한 외로움 속에서 허덕이며 살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마음 속 깊은 곳의 허무와 고통을 털어놓기가 어렵습니다. 진정으로 나의 고통과 고민을 이해하고 함께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몇이나 있습니까? 진심으로 “그 친구 때문에 나는 외롭지 않아”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복이 차고 넘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다 외롭습니다.


욥은 극단적인 외로움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친구들이 완전하게 욥과 절교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제 욥은 오직 홀로 서야 합니다.


빌닷의 독이 담긴 저주스런 판단을 들은 욥이 이제 빌닷의 말에 대답합니다. 감정은 상할대로 다 상하였고 더 이상 세 친구들에게 아무런 위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다같이 욥의 대답이 담긴 19장을 보겠습니다. 2-3절입니다.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욥 19:2-3).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지금까지 욥의 세 친구는 너무나 많은 아픈 말로 욥의 마음을 짓부수었습니다.


욥은 깊은 낙심 가운데 그의 친구들이 그의 곁에 서서 그를 위로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송곳처럼 찌르는 고통스러운 말과 저주와 오해의 말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욥 19:3).
“열 번이나”라는 뜻은 “쉬지 않고 끝없이 철저하게”라는 뜻입니다. 즉, “참으로 지독하고 끝없이 너희가 나를 학대하는구나”라는 뜻입니다.


4절을 보면 “비록 내가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라고 하는데, 이 말은 “그래 너희가 나의 진심을 끝까지 무시하고 믿지 않으니 너희들 멋대로 판단하라”는 뜻입니다. 그 대신 “더 이상 내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욥도 그들과의 친구 관계를 정리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욥의 입장에서는 그의 진심을 끝까지 믿지 않고 오직 벌어진 사건만 보고 그를 무시하고 조롱하고 판단과 정죄를 일삼는 그들과는 더 이상 친구 관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욥은 그들에게 답변합니다.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하려니와”(5절)


“너희들이 교만하여져서 멋대로 생각하든 말든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그 대신 오직 증거가 있으면 그 증거를 가지고 말하라. 그러나 너희가 알아야 할 것은, 사실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6절).


여기서 “억울하게 하시고”라는 원어는 (아바트)인데 문맥 속에서 올바로 번역한다면 “뒤집어서 무너뜨리다”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나를 철저하게 뒤흔들어 놓으시며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셨다”라는 뜻입니다.


이로 인한 결과에 대해 욥은 7절부터 12절까지 말합니다. 쉬운 성경으로 읽습니다.
[
7 내가 ‘폭력이야!’ 하고 외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고,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지만, 그 곳에 정의는 없구나.
8 그분이 내 길을 막고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며, 내 길을 어둠으로 가리셨구나.
9 나에게서 영광을 가져가시고, 내 머리의 면류관을 벗기셨구나.
10 그가 사방에서 나를 치시니 내가 죽게 되었고 나무를 뽑듯 내 희망을 뽑아 버리시는구나.
11 내게 화를 내시고, 나를 마치 원수 대하듯 하시며,
12 그의 군대를 내게 보내시니 그들이 내 집 주변을 둘러쌌구나.
](욥 19:7-12)


제가 젊을 때에 처음으로 욥기를 대할 때는 욥의 이러한 말들이 하나님께 대한 오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해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욥은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벌어진 영적인 싸움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욥의 말이 오해가 담겨있다고 하면 그가 한 말 전체를 다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는 자연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고, 천체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습니다. 사람 사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욥이 하나님에 대해 한 말이 오해일 수 있다면 그가 한 말 전체가 오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갈등하는 가운데 욥기를 반복하여 읽게 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욥기에서 욥이 한 말은 전부 진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욥기 19장 역시 비록 그가 아직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은 상태이고, 또한 하늘의 사건을 모르는 상태라도 그의 고백은 진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심령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며 그의 절규하는 소리 역시 그리스도의 영의 절규인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방법을 사용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절규와 고민 가운데 주의 뜻에 항복합니다.
[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 26:37-40)


지금 이러한 주의 심령이 욥의 심령 가운데 담겨 있습니다. 아무튼 저는 욥이 아무리 인간적으로 의인이라 할지라도 대속자이신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고는 구원과 승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욥은 계속 하나님께서 그를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를 원수처럼 대하시니 그의 희망이 나무가 뽑히듯 사라졌다고 절망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막고 욥을 치고 욥의 장막을 포위하여 진을 쳤다고 신음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욥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능자가 진실하고 의로운 욥을 대항하시는데 욥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확인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박대하시니 이제는 주변 모든 사람이 다같이 그를 멸시하며 조롱합니다. 이미 개역 개정으로 말씀을 봉독했지만 다시 13절부터 19절까지 쉬운 성경으로 읽어봅니다.
[
13 그분이 내 형제들을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아는 사람들이 모두 낯설게 되었구나.
14 내 친척들이 나를 외면하고, 내 친구들 역시 나를 잊어 버렸구나.
15 내 집에 사는 사람들이나 여종들도 나를 모른 체하고, 낯선 사람처럼 대하는구나.
16 내 종을 불러도 대꾸조차 하지 않으니 내가 사정을 해도 소용 없구나.
17 아내마저도 내 숨기운을 싫어하고, 내 형제들도 내 옆에 오기를 싫어하며,
18 심지어 어린이들까지 나를 멸시하고, 내가 일어서면 나를 놀리는구나.
19 내 모든 친구들이 나를 거부하고, 내가 사랑하는 자들도 등을 돌리는구나.
](욥 19:13-19)


17절에 개역 개정은 “내 허리의 자식들”이라고 하고 쉬운 성경은 “내 형제들”이라고 번역한 원어를 보면 (리브네 비테니)인데 “나의 태에서 나온 자녀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같은 모태에서 함께 나온 아들들”이라는 뜻으로서 욥의 친 손주들, 또는 욥의 친 형제 자매들을 말합니다. 또한 17절을 보면 아직 욥의 아내가 욥 곁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욥의 아내는 처음에 욥이 재앙을 당할 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며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러한 어리석은 욥의 아내는 쫄닥 망한 병든 욥을 지겨워하고 싫어하면서 고통 가운데 있는 욥을 괴롭힙니다. 이 얼마나 악한 아내입니까?  이런 아내의 본심을 알게 된 욥의 비참과 슬픔은 어떠했겠습니까? 욥과 같은 의인에게 이러한 어리석고 변덕스런 천박한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아이러니합니다.  


욥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제는 몸의 고통과 심적인 고통을 토로합니다.
[
20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
21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22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
](욥 19:20-22)


욥이 친구들에게 “내 살로도 부족하냐”라고 한 말은 내 몸에 발생한 모든 재앙을 보면서도 불쌍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계속 내 영혼까지 공격하느냐는 반문입니다.


사실 욥의 몸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입니다. 그의 몸은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더러운 종기에 걸여 진물이 나는 상태였습니다. 욥은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장으로 몸을 긇어야 했습니다(욥 2:7-8). 그의 몸은 벌레들이 가득 달라 붙어 있었고, 악창으로 곪은 곳마다 먼지로 진물러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몸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모든 자녀들이 다 한 순간에 죽었습니다. 또한 그의 삶의 일부라고 불리는 소유물이 다 붙타거나 노략질 당하여 완전 거지가 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비참한 지경에 있어도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그의 영혼까지 깊게 공격합니다. 지금 욥이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22절)


욥기 19장에 나오는 욥의 긴 탄식 속에는 완전한 고립과 소외가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놓치 않은 상태지만 그럼에도 완전한 거룩과 공의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진노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의로운 욥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고 완전한 고통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흠없는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속량 없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의 대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욥의 고통은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의 고통을 예표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으신 철저한 단절과 고독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의 좁은 길이요, 구원의 좁은 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날에도 우리 성도들에게 이와 비슷한 고통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길은 앞뒤로 다 막혔고, 기도 응답은 전혀 없습니다. 명예와 재산도 잃었고, 사람들도 다 떠났습니다. 그래도 건강이 있다면 일어설텐데, 건강마저 잃고나니 남은 것은 호흡 밖에 없습니다. 진퇴양난이며 사면초가가 된 상태에서 가장 의지하였던 가족들과 친구들마저 다 떠납니다. 전에 내게 큰 신세를 졌던 자들과 전에 나를 알기를 하늘처럼 알았던 자들마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심한 모욕과 멸시와 조롱은 도를 넘어섭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 내게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만일 욥이 주의 은혜 가운데 23절 이하의 내용을 몰랐다면 그는 영원히 잃은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을 저주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한없이 키득거리며 하나님을 조롱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욥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깊은 고난 속에 있는 욥에서 이 우주에서 가장 소중하고 깊은 깨달음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 깨달음은 다름 아닌 구속자 예수님에 대한 깨달음이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부활과 함께 영원한 나라가 임한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깨달음에 의해 욥의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확신으로 변합니다. 그의 믿음의 인내는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로 오심으로 인하여 칭찬을 받고 보상을 받으며 그의 믿음이 옳다는 사실을 신원 받을 것입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가장 깊은 고난 가운데 욥이 얻게 된 깨달음은 그의 소원대로 믿음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남겨지는 위대한 진리가 되었습니다. 욥은 그 깨달음을 얻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
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욥 19:23-24)


그러면 그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25절 이하입니다.
[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28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까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29 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욥 19:25-29)


대속자가 살아계시다는 깨달음입니다. 대속자가 없으면 이 땅의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영원한 멸망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입니다. 이 땅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누구인지 잘 압니다. 바로 하나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은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대속자가 되셨습니다.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요 왕이요 말씀이 되셨습니다.


욥은 그 대속자 덕분에 그의 죄와 저주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면서 죽음 이후에도 다시 부활할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때 욥은 이 귀한 깨달음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너무나 흥분해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내가내눈으로직접그분을만나보게될것이다. 그분이없다면내가아무리선하게살았을지라도하나님앞에영원한저주밖에받을것이없는데, 그대속자때문에나는하나님과화목하게될것이다. 아, 그런데그대속자는나처럼사람이로구나. 나는그분을내눈으로보게될것이구나. 나도역시그분처럼부활의몸을입겠구나. 아, 이사실을알게되니너무흥분되어견딜수가없구나.”
이러한 내용이 바로 25절에서 27절 내용입니다.


28절부터 욥이 말합니다. 욥은 그의 친구들이 말하는 그런 죄악을 범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 앞에 맘대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욥 역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인간에게는 그가 선하든 악하든 대속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욥이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친구들이 지적하는 그런 죄를 범한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자기 의로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알고, 그래서 고민하고 번뇌하였는데,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대속자가 이 땅에 서게 될 것을 알게 되면서 환한 빛이 그의 마음에 비쳐진 것입니다.


이러한 대속자를 알지 못하는 친구들, 즉, 이 땅에서 받는 재앙을 보며 사람들을 판단하기에 성급한 친구들을 향해 욥이 결정적인 말을 합니다. 너희가 만일 대속자를 알지 못한다면 영원한 심판과 함께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것이 의인 욥이 깨닫고 발견한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인간들이 오해하는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악인은 아닐지라도 그럼에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요, 이러한 중보를 알지 못하고 세상적인 형통과 비참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안다 모른다”를 판단하는 것은 결국 대속자를 알지 못한채 영원한 심판을 받아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욥은 지금까지 고통의 한 복판에서 그리스도를 계속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가 없구나”(욥 9:32-33)
라고 하며 판결자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욥은 또한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겠다”고 고백하며 자신의 생명의 문제를 오직 하나님께 의탁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친히 욥의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입장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주 하나님은 죽기까지 주만 믿는 욥을 향해 대속자에 대한 깨달음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에 욥이 고백합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데 계시니라.”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오니”(욥 16:19, 22).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욥 17:3).


그는 계속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담보가 있어야 하고 중재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왔던 것입니다.


이제 그 담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량이며 그 중재자는 다름 아닌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시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인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원한 진리를 욥은 구약 시대에 고난 가운데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복음 중에 복음이요, 진리 중에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이 바랐던 그 분은 이미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의 대속 사역을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과 같은 고난 가운데 처할지라도 욥이 지나간 영적 어두움을 통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실제하시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며 대속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또한 그분이 보내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욥이 깨닫고 붙들었던 대속 신앙을 그대로 이어 받으면서도 이미 속량을 이루신 우리의 구속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입장입니다. 이 점에서 욥과 다릅니다. 즉, 욥은 미래적으로 대속자를 바라보았지만, 우리는 이미 오신 대속자 및 지금 나와 인격적으로 교통이 가능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욥이 그토록 바랐던 그분을 이미 성령 안에서 연합한 상태로 있으면서 장차 육체로 다시 오실 그분을 바라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으니”(엡 2:5-6)


(그러므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3:2).


우리는 욥이 누릴 수 없던 다른 차원에서 주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 안에서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당장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대속자를 만난다는 것은 그분 안에서 우리 주 하나님을 만나뵐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히브리서의 주제입니다.
[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우리는 어느날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26절에서 개정 개역은 육체 밖이라고 번역하였지만, 원어 (미베샤리)는 “나의 육체로부터”라는 뜻으로서 부활의 상태, 곧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뵈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거듭난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하나님을 만나뵙는 것을 뜻하고, 주의 재림 때에 영광의 부활체를 입고 눈과 눈으로 주 예수님을 만나뵐 것을 뜻합니다.


욥은 이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그의 부활의 상태에서 어서 빨리 뵙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즉, 욥의 신앙은 “그리스도”를 간절히 바라는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욥의 모든 고난의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기에 실린 모든 고난에 대한 해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속량 및 부활과 함께 그가 영원한 중보자로 계시는 영원한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위로이며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아웅다웅하면 우리는 인생의 수수께끼를 영원히 풀지 못한채 고통 당하다가 영원한 멸망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나라가 있으며 그 나라가 임할 때 모든 공의가 완전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나는 과연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자격이 되느냐 하는 것이 진정한 문제가 됩니다. 그 자격은 ‘믿음’입니다. 신뢰입니다. 영접입니다.


욥은 자신 정도면 하나님을 만날 자격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욥의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만날 자격이 더더욱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욥이 깨달은 것이 이 땅에 서신 대속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서실 자격이 있습니까? 완전한 의가 있습니까? 그분의 자녀임을 확증해 주는 영생이 있습니까? 이 모든 은혜가 전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 그분을 영접하기 바랍니다. 왕으로 대제사장으로 내게 말씀하시는 그 선지자로 그분을 영접하기 바랍니다. 즉,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량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로 알고 구주로 영접하기 바랍니다. 영접은 그분과 언약을 맺는다는 뜻입니다. 끊어질 수 없는 영원한 결혼을 한다는 뜻입니다. 새언약의 시대는 이미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아멘하고 주의 청혼을 받기만 하면 새언약을 맺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영접하고 이제 남은 삶을 주와 동행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백성이며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19-20).


그리고 이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은 자들마다 만왕의 왕이요 주이신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당장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늘 마음을 주께 모으고 약혼한 신부처럼 정결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이 세상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 세상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영원한 천국이 누려지며, 또한 그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힘든 일을 당해도 억울해하지 말고 주의 나라에서 더 큰 것으로 보상해 줄 것을 믿고 계속 깨끗하고 진실하고 정직한, 사랑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그려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의와 거룩의 상태에 거하는 청결한 마음과 보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깊은 하나 됨을 성령 안에서 맛보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장차 주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영광과 상급으로 우리에게 보상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의 특권이며 장래의 소망입니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주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하나님처럼 우리의 성품이 아름답고 거룩하고 용서와 사랑을 베푸는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5).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대속자로 알고 믿으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아무리 착하고 선할지라도 백만분지일의 에누리도 없는 완전한 심판 앞에서 심판을 받고 영원한 영벌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에 이미 이 땅에 서셨고, 지금은 만왕의 왕이시며, 이제 다시 이 땅에 서실 우리의 영원한 대속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인 성령에 의해, 그분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참된 성도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