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왕으로 취임하신 예수 그리스도1(마3;13-17)
천향추천 0조회 1223.10.22 09:51댓글
언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에 맺은 계약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기로 한 합의이다.
여호와와 그의 백성은 언약 당사자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언약을 따라 각 시대 백성의 하나님으로 일하신다.
이러한 하나님 사역은 신구약 백성의 본질과 삶의 질서를 결정한다.
언약 당사자의 의로움도 언약에 대한 신실함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의는 개혁신학의 주장처럼 법정적 의가 아니라 관계적인 의이다.
이는 언약에 대한 신실함이 의로움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심은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모세율법과 제도이다.
모세율법과 제도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계시이며 방편이다.
이는 여호와께서는 중보자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에서 모세율법과 제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모세율법과 제도는 구약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계시이다.
모세 제도는 여호와의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의로운 제도이다.
그러나 모세율법과 제도는 온전한 구원과 생명을 주지 못한다.
이는 죄의 울타리 안에서 시행된 여호와의 옛 경륜이기 때문이다.
이는 휘장 밖 죄 아래에 세워진 옛 백성의 완악한 수준,
옛 백성의 종과 어린아이와 같음에 맞춰진 여호와의 뜻과 경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율법을 지키더라도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는 말이다.
옛 언약 당사자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죄는 언약 당사자로서 신실하지 못한 것이다.
이 말은 여호와의 언약을 범한 일이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범하여 이방 땅 바벨론 포로가 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언약이 신실하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심을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종말에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여 아들로 세우기 위함이다(갈4:4-5).
이는 아들을 통해서 다윗왕국과는 다른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기 위함이다.
아들의 나라는 휘장 밖에 세워진 다윗왕국의 단순한 연장선이 아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경영되던 다윗왕국의 단순한 회복이 아니다.
아들의 나라는 죄와 사망이 범접하지 못하는 나라,
휘장 안 하늘에 속한 나라,
율법과는 다른 하나님의 참된 뜻과 경륜이 시행되는 나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는 아들(자녀)로 구성된 나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 백성들을 휘장 안 하늘의 성소에 세우신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신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가 종말에 보내신 아들을 통하여 등장한 것이다.
이 나라의 왕은 의의 길인 모세율법과 제도를 통하여 오실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을 따라 율법 아래에 나셨다(갈4:4).
율법 아래에 있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하신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셔서 모든 의를 이루고자 하신 것이다.
세례란 무엇인가?
이전의 권세에 대해서는 죽고 새로운 통치 가운데 세워짐을 의미한다.
노아와 그의 식구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죄가 차고 넘치던 옛 세상 속에서 살았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홍수를 발하셔서 옛 세상을 심판하시고 물로 세례가 된 새로운 세상을 마련하신다.
이에 노아와 식구들도 옛 세상으로부터 죽고 새로운 백성으로 구원을 받는다(벧전3: ).
노아는 물로 세례가 된 새 세상의 머리로 세워진다.
이처럼 세례는 이전의 권세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로 서는 일이다.
따라서 세례는 죽음과 함께 죽음으로부터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을 나타낸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라.
출애굽 이후에 다 구름 아래에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났다.
그들은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전10:1-2).
광야의 구름과 홍해를 지날 때
이스라엘은 바로의 권세에 대해서는 죽고 여호와의 소유된 백성으로 서게 된 것이다.
이전의 바로의 권세에 대해서는 죽고 이제는 여호와의 거룩한 백성으로 새롭게 된 것이다.
언약의 표시인 할례도 마찬가지 의미이다.
몸의 일부인 살을 베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할례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옛 출생방식을 통해서는 죽고 여호와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러한 죽음으로부터의 새로운 출생은 구약에서 주어진 생명에 대한 약속이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제물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먹고 마시는 교제를 하였다.
제물의 피를 뿌리고 하나님의 단의 제물과 하나님 상의 떡을 먹고 머시는 교제를 한 것이다.
이처럼 구약에서는 옛 생명의 죽음과 죽음을 통한 새로운 생명의 약속이
구약에서 주어진 세례의 의미이다.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기 위함이다(갈4:4-5).
율법 아래는 어디인가?
율법의 통치가 시행되는 옛 세상이다.
이는 율법의 통치가 시행되는 유대 사회를 가리킨다.
그런데 유대 사회를 다스리는 자는 헤롯과 율법의 죄고 통치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이다.
헤롯과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거절하고 죽이려고 한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고향인 베들레헴에 살지 못하고 이방의 갈릴리 지방 나사렛 마을에 살게 된다.
때가 차매 예수의 전령인 세례요한의 활동이 시작된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고 외친다(마3:1-2).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나아온 백성들에게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푼다(마3:5-6).
예수께서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하여 요단강으로 나아오신다.
이에 요한이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내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오시나이까”
라고 말한다(마3:14).
왜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가?
이는 모세가 시내산에 강림하신 여호와를 만날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의 옷을 빨아서 3일을 기다리게 한 것과 같다(출19:14-15).
세례요한은 자기 뒤에 오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예루살렘과 유대 땅 사방에서 나아온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푼 것이다.
이 때에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기 위하여 요한에게 나아가신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기 백성들처럼 세례를 받으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께서 나아오심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내게로 오십니까?”
라고 말한다(마3:14).
이에 예수께서는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고 말씀하신다(마3:15).
마가복음은 예수의 세례사건에 대하여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라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기록한다(막1;9-11).
그러나 누가복음은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때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라고 기록한다(눅3:21-22).
이는 예수께서 모든 백성의 일원으로 함께 세례를 받으셨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처럼 누가복음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자기 백성의 모든 고난과 죄에 참여하시는 분이심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을 언급하지 않는다.
요한 사도는 이튿날 세례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과 예수 위에 성령이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자신보다 먼저 계신 분이시다”
라고 증거한다.
이처럼 요한복음의 시작은 창조 사역의 7일 구조로 기록하여 복음 증거의 발전과 완전함을 도모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세례를 받으셨다”
고 말한다(마3:13-15).
이는 예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 아들이심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복음서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내용이 다르다.
이는 각 책이 강조하는 차이 때문이다.
마가복음은 맨 앞에 세례요한에 대한 언급을 배치하여 강조한다.
그러나 세례사건에서는 세례요한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된 사실을 강조한다.
이는 예수께서는 때가 차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례요한은 그의 전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예수의 세례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한다.
이는 두 복음서에서 예수의 세례사건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은 백성들이 다 세례를 받을 때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고 말한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백성들처럼 세례를 받으셨지만 맨 마지막에 받으신 것으로 기록한다.
이는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완성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말하기 위함이다.
마가복음도 예수를 마지막 세례를 받으신 분처럼 기록한다.
따라서 마가가 말하는 예수는 물에서 즉시 올라온 마지막 승리자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세례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회개의 사역을 행할 때에,
세례요한이 먼저 된 자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정죄하던 때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나아와서 세례를 받으셨다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예수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또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이방의 땅에 가까운 갈릴리 지방 나사렛에 은거하시던 예수의 등장을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특히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요단강에 이르렀다고 기록한다.
이는 예수의 낮은 신분이나 고난과 대비되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 아들의 등장과 승리를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요단강에 이르러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고 말한다.
이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천국의 왕으로 등극하신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하늘에 속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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