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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정에 두 종교가 있으면 불행이 오는가?/마10:35

열려라 에바다 2023. 11. 15. 09:25

한 가정에 두 종교가 있으면 불행이 오는가?/마10:35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통하여 오직 참된 구원의 방편을 기독교에만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다른 종교들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기독교와 대립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그것은 사탄의 계략이기도 하다. 사탄은 기독교를 파괴하기 위하여 기존의 선한 방편의 종교들까지도 영적으로 악용하는 것이다. 이렇듯 그리스도와 베리알은 병립할 수 없다. 하물며 한 가정 안에 기독교와 그외의 다른 종교가 존재한다면, 그로 인한 대립과 불행은 막을 수 없다. 과정적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가정 안의 인간 관계의 굴절과 반목을 유도한다. 궁극적 입장에서 볼 때 다른 혈육들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신자에게도 커다란 불행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양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서로 양보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편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한 가정 안에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인이 되셔야 한다. 성경은 당초에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명하였지만, 불가피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경륜을 신앙하며 가정의 일치를 위한 신앙적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다가 어떠한 계기로 복음을 접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생의 중간에서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하여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모태신앙인 사람이나 믿은 지 오래 된 사람들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뜨겁게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새로이 믿게 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게 되는 의문과 갈등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 가정에 두 종교가 있으면 그 가정에 불행이 오는가 하는 것이다 믿지 않는 가족들은 새로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는 식구에게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그것은 한 가정에 두 종교가 있어서라든가, 원래 믿던 신이 노(怒)해서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새 신자에게 매우 큰 부담을 주어 신앙 생활을 주춤하게 만든다. 과연 한 가정에 두 종교가 있으면 불행한 일이 발생하는가?


1. 사탄의 영향력


 1) 공중권세 잡은 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영적인 시각으로 볼 때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과 사탄의 영역이다.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아 하나님을 대리하여 피조계를 다스릴 권세를 부여받은 인간은 사탄의 꼬임에 넘어감으로 그 권세를 사탄에게 넘겨 주고 말았다(눅4:6). 그러므로 사탄은 이제까지 세상의 왕이요 공중권세를 잡은 자로서 세상을 다스려 왔다(엡2:2). 그러나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값을  치루고 그 권세를 다시 찾았다(행20:28; 히3:12; 계5:9). 이처럼 사탄은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으나(눅11:18) 아직도 그의 활동을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고 있다(막13:22; 갈6:11,12; 벧전5:8).


 2) 구원의 의미 
 어떤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얻는 다고 할 때 이 '구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영역(領域)의 이전(移轉)이다. 즉 이전에 사탄의 영역에 속해 있던 자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할 일(눅15:7)이지만 사탄에게는 극히 분노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새로이 믿은 사람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그의 영역에 속했으므로 괴롭게 할 일이 전혀 없었지만 이제는 사탄의 원수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약4:4). 사탄은 믿는 자를 타락시키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성숙한 삶, 성공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실패하게 만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그러므로 새로 믿는 자의 가정에는 믿기 전보다 어려운 일이 더 많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2. 복음의 특성


 1) 복음과 세상
 이러한 갈등과 어려움은 사탄의 역사로만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복음 자체가 갖는 특성 때문에 일어나기도 한다. 복음은 한 가족을 최고로 결속시켜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가정에 심각한 분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것은 복음이 파괴적인 것이거나 모순투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을 접한 각 사람의 부패한 심성과 반항적 기질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믿음 때문에 민족들, 백성들 또는 교회들과 가족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복음을 100%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신자와 불신자간에 그리고 심지어 신자들 사이에도 갈등과 불화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 그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오히려 인간의 악함이 드러나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롬7:7-13). 복음 역시 죄인인 인간들 사이에 들어가서 진리와 불의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2) 두 종교의 문제
 이러한 갈등과 불화는 본질적으로 복음이 가지는 진리성과 그것에 따라오는 배타성에서 오는 것이다. '불화하게'로 번역된 헬라어 dicasai(디카사이)의 본뜻은 '둘로 나누다'이다. 이 단어가 시사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신자의 불신자의 관계가 결코 연합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복음은 검과 같이 날카롭기 때문에(히4:12) 가족들 중 신자와 불신자들 사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한 가정에 속한 구성원들간의 관계가 좋지 못할 때 그 가정의  되어가는 일들이 잘못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예수 자신의 경우에도 나타나는데, 사역 초기의 예수는 그의 가족들로부터 미쳤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던 것이다(막3:21). 불신 가정에서 한 사람이 믿게 되면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긴장과 분쟁, 불화가 자연히 발생하면 여기에서 환난과 시련이 오게 된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복음이 그 가정에 불행을 가져온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3. 믿음과 행복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결과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흔히 주장하듯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 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으므로 더욱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암3:2).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만을 징계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기 위해서인 것이다(히12:5-13). 믿음은 외형적으로 볼 때 믿지 전에는 없었던 어려움과 불행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세상적인 관점에서만 판단한 것이다. 신자들이 갖는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인 풍요함이나 사업의 성공만이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져 간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복음이 한 가정에 불행을 가져온다고 하는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며 궁극적인 시각에서 볼 때 그것은 신자의 행복을 가져오는 결과를 산출한다. 하나님의 열심(사9:7)이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결국은 최종 목적인 영화(롬8:29,30)를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이 성도의 행복인 것이다.


 예수의 복음은 이 세상의 거짓과 불의를 드러내며 진리와 불의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한 자들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고 멀리하려고 한다(요3:19,20). 복음은 항상 이와 같이 이중성을 가진다. 그것은 신자에게는 승리의 향기요, 불신자에게는 죽음의 냄새인 것이다(고후2:15,16). 신33:9과 미7:6의 인용은 예수가 가족들을 이간시키고 가정을 파괴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복음이 자연히 일으키는 결과를 보여 주면서 혈연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함을 강조 한 것이다. 한편 불신 가족을 전도하는 일에도 더욱 힘써야 함을 가르친다(행16:31).
 


 1. 세상 종교의 특징


 1) 경전이 불분명함
 기독교에 있어서의 경전은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뿐이다. 그러나 타종교에 있어서의 경전(특히 힌두교와 불교)은 엄청나게 많으며 복잡다단하다. 이는 가지각색의 인간적 철학에서 기이한 어록들을 한데 모으거나 편집한 것들이기에 통일성이 빈약하며 출처가 모호한 경우가 많이 있다. 또 어떤 종교에 있어서는 경전이 없으며 비밀한 의식으로 대체되기도 하는데 이는 매우 맹목적인 신앙적 습관이나 현실 도피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2) 진리가 여러 가지임
 이방 종교에 있어서는 그 가르침과 경전들이 여러 가지이듯이 진리에 대한 해석도 가지각색이다. 이는 살아 계신 참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진 완전한 진리(성경)와는 달리 인간적 깨달음과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각자 가르침의 정도나 경험에 따라 진리에 대한 해석도 갖가지로 나타난 것이다.
 
 3) 구원관이 애매모호함
 기독교에 있어서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사함받고 현세에서와 장래에 구원을 보장받는 것임에 비하여 이방 종교에서는 구원관이 애매모호하다. 불교에서는 세상에서 공덕을 많이 쌓으면 부처가 된다고 하는가 하면 사람이나 짐승으로 다시 태어나 살아가게 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구원자도 없고 확실한 구원의 기준도 특징지어져 있지 않다. 단지 막연한 기대와 어중간한 신념에 불과한 것이다. 
 
 4) 인간의 기계적 노력을 강조함
 기독교에 있어서의 봉사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자발적 헌신이거나 자원인 경우가 많은 반면 이방 종교는 기계적 노력이나 봉사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불교에 있어서는 부처상 앞에서 의미 없는 절을 수천 번 강요시키는가 하면, 힌두교의 분파들에 있어서는 일정한 고행을 의무적으로 거치게 하며, 이슬람교에 있어서도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종교적 작업들을 반복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5) 인간이 신을 찾아감
 기독교가 이방 종교와 가장 다른 일면이 있다면 타락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친히 찾아와 주셨다는 데 있다. 따라서 성도의 신앙적 행위는 그 찾아오심과 부르심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반면에 이방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 설정하고 선택한 신을 인간 스스로가 찾아가서 무엇인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 애쓴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들이 얻어내는 것은 삶의 조그만 깨달음은 될지 모르지만 결코 무한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진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본성이 부패할 대로 부패한 인간은 자의로 하나님을 발견하거나 찾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2. 우상 숭배

 1) 우상의 특징
 ① 무익한 것이다(사44:9,10). ② 아무런 능력도 생명력도 없다(렘10:5; 시115:5-7). ③ 귀신과 교제하는 행위가 된다(고전10:20,21).
 
 2) 우상 숭배의 원인
 인간은 본래 종교적 심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본성이 부패한 결과로 인해 허망한 데 빠지기 쉽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심성에 대해 예리한 지적을 해주고 있는가 하면(행17:22-29), 신랄하게 꾸짖기도 했다(롬1:23-25).
 
 3) 우상 숭배자에 대해 성도가 취할 자세
 
 ① 자신을 지킨다(요일5:21). 
 우상 숭배자를 설득하거나 회개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상 숭배자에게 오히려 설득당하거나 함께 동화되는 일이 없도록 먼저 자기를 지키는 것이 요구된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과 어울리실 때 그들과 자리를 같이하시면 음식을 나누시기도 하셨지만 결코 그들의 허물이나 습관에 동참하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리스도 자신의 고귀한 성품을 그들에게 보이심으로 그들을 변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눅19:1-10).
 
 ② 우상 숭배를 못하도록 권면한다(행14:1 5). 
 우상 숭배는 어리석은 일이요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될 수 있는 한 우상 숭배나 그와 같은 행위들을 볼 때 그만 두도록 권면하거나 종용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가까운 사이거나 골육의 친척이 그러할 때는 바울이 그 동족들을 위해 애썼던 모습을 거울삼도록 해야한다.
 
 ③ 우상의 제물을 멀리한다.
 고대에 있어서의 '우상의 제물'이란 우상을 향한 제사 의식에 쓰여진 고기를 말한다. 고대 근동에 있어서의 고기는 대게 제사에 바쳐진 이후의 것이었다고 한다. 다니엘이 왕의 진미를 거절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단1:8). 여호와의 성민에게 있어서 그것은 매우 가증한 음식물이기 때문이다. 현대에 있어서의 우상의 제물이란 하나님보다 귀히 여기는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찾는 모든 행위를 지칭함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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