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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백성의 구제1.

열려라 에바다 2023. 12. 10. 14:34
천국백성의 구제1.

천향추천 0조회 1223.12.10 06:02댓글 0

 
 
천국 백성의 구제1(마6:1-4)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한다(갈4:4-5).
이는 마태복음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이다.
마태는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이심을 강조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셔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보내신 것이다.
따라서 마태복음 첫 마디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말한다(마1:1).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인이 가지고 있던 구약성경의 언어와 개념,
곧 모세 언어와 모세의 개념과 틀을 따라 이루어진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틀도
    “옛사람에게 말한바 이러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구조이다.
이는 이전의 율법통치와는 다른 새로운 통치시대를 여시는 선언이다.
이처럼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은 모세 언어와 개념의 틀을 뼈대로 한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서는
모세의 자리에 앉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언급하고
6장에서는 모세율법 아래의 경건과는 다른 천국의 경건,
모세의 제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경건과는 다른
천국의 서기관인 제자들의 경건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삶의 특징은 무엇인가?
사람에게 보이는 삶이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대리통치자를 통해서 율법으로 통치하셨기 때문이다.
사람 판정관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율법으로 다스리신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언급된 사람은 율법으로 백성들을 지도하고 판단하는 판정관들이다.
그들은 모세 당시에는 천부장과 백부장, 오십부장과 십부장들이며
예수 당시에는 모세의 자리에 앉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고 말씀하신다(마6:1).
이 말씀은 마태복음 6장의 주제이며 서론의 위치를 차지한다.
나머지 언급은 율법 아래의 의로운 삶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의 삶을 대비하는 내용이다.
이는 옛 언약 백성의 삶 방식과 제자들이 살아야 할 삶 방식을 대비하는 내용이다.
이는 율법의 통치 아래에서의 생활 방식과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의 생활 방식을 대비하는 말이다.
천국 백성의 경건은 모세율법과 제도를 토대로 한다.
이는 천국의 질서는 율법의 질서를 완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질서는 하나님의 참되고 온전한 뜻이 시행되는 질서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온전한 뜻이 시행되는 질서를 말씀하신다.
율법 아래에 있는 옛사람의 경건과 대비하여 천국 백성의 경건을 말씀하신다.
따라서 예수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산상수훈은
모세율법과 제도를 연구하고 해석하여 본래의 뜻과 정신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다.
이는 모세율법 자체와 율법의 시행세칙인 장로들의 유전까지 폐하신 가르침이다.
이처럼 마태는 예수께서 율법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주시는 분으로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고 말씀하신다(마6:2).
외식하는 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그들 모두는 율법 아래에 있는 옛 백성이다.
그들은 모세율법을 따라 여호와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모세가 전한 율법 위에 서 있다.
이스라엘이 의로운 삶을 살고자 할 때는 모세율법이 규정하는 방식을 따라,
율법을 따라 규정한 판례집인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모세의 자리에 앉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한다.
이처럼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사는 것이 여호와 앞에서 의로운 삶이다.
그래서 어려운 형제를 돕고자 할 때는,
율법의 판결과 판례를 모은 장로들의 유전이 정한 구제의 대상과 방식을 따라,
삼 년마다 모은 십일조로 어려운 형제들을 구제하였다.
해가 질 무렵에 길거리에 객이나 이방인이 있으면
율법의 규정과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집안으로 들였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율법에 부착하여 성소에 계시는 여호와와 함께 하는 의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의 구제는 구제를 시행하기 위한 틀과 방식이 있었다.
장로들의 유전에는 어떤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어느 때까지
구제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규정되어 있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좀 더 세밀한 부분까지 만들어서 시행하였다.
이는 모세가 전한 율법을 지키기 위함이다.
모세율법은 613개의 항목만 있을 뿐 백성들의 삶 세세한 부분까지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말하는 바를 따라 대상과 방법, 분량과 한도 등을 규정하여 구제를 시행하였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에 신실하게 행할 수 있도록,
모세율법에 부착한 의로운 백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장로들의 유전과 같은 율법의 시행세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고 말씀하신다(마6:1).
여기에서 언급하는 사람은 율법으로 백성들을 판단하는 재판관,
율법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가리킨다.
그들은 율법 아래에서 먼저 된 자이며 큰 자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백성들보다 가까운 위치에 세우신 자들이다.
그들은 율법을 따라 백성들을 판단하고 재판함으로,
백성들에게 모세율법을 지도하고 가르침으로,
여호와의 백성으로 살도록 하는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이다.
특히 재판관들은 율법에 신실한 여부를 따라 백성들의 의로운 여부를 판단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율법에 순종하여 언약의 복을 누리며 살았다.
이것이 모세율법 아래에 세워진 이스라엘의 삶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내가 아무도 모르게 구제를 하였으니까 여호와께서 아시고 의롭다고 하시겠지”
라는 삶은 율법 아래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게 하는 구제는 용납되지 않았다.
이러한 구제는 율법을 어긴 불의한 행동으로 판단되어서 정죄가 되었다.
이는 여호와의 율법 통치질서를 범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구제는 사람 판단관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였다.
재판관을 통해서 율법이 명하는 바를 따라 제대로 구제가 시행되는지를 판정받아야 하였다.
이는 율법에 부착하여 의롭게 행한 여부를 판정받는다는 말이다.
율법에 부착한 의로운 구제로 판정되면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 세워진 이스라엘의 의는 사람에게 보이는 의이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그들은 율법에 따라 행하여 이미 자기의 상을 받았느니라”
고 말씀하신다(마6:2).
율법을 행하여 받은 상은 무엇인가?
판정관에게 의롭다고 판정되면 하나님의 성소에 출입할 수가 있다.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복을 누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 나아온 부자 관헌의 고백에서도 잘 드러난다(마19:16-22).
그가 부자가 된 것은 율법을 잘 지켜서 신명기에서 약속된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마19:20).
그러나 판정관에 의해서 율법을 범한 것으로 판정되면 그는 불의한 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는 기업인 가나안땅에서 쫓겨나게 된다.
또 왕에게 죽임을 받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할 수도 있다.
이것이 모세율법 아래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삶의 질서이다.


예수께서는
   “이제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고 말씀하신다(마6:4).
이제는 어느 때인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이후 시대이다.
율법의 통치가 종결되고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가 시작된 때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때이다.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칭하신다.
따라서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소에 계시지 않는다.
이제는 하늘에 믿는 자의 아버지로 계신다.
하늘의 성소에서 은밀하게 아들(자녀)이 된 자의 구제를 보신다.
이전의 율법 아래에서처럼 사람 판정관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보시지 않고,
이스라엘의 눈에 보이는 질서를 따라 공개적으로 판정하지 않고,
하늘에서 은밀한 중에 보시고 상을 주신다(마6:4).
이처럼 예수께서는 종말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관계로 믿는 자를 대시는지를 말씀하신다.
이처럼 예수께서는개혁신학의 가르침처럼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세상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언약적이며 구원 역사적으로 말씀하신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대리통치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삶을 감독하고 의로운 여부를 판정하셨다.
그러나 종말에는 아버지로서 하늘에서 계시면서 믿는 자의 경건 생활을 보시고 상을 주신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이전과는 새로운 경륜의 시대가 열렸음을 말씀하신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것처럼 하지 말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 앞에서 상을 받도록 하라”
는 말씀을 통해서
구약과 다른 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하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셔서 이전과는 다른 새 시대를 여셨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하는 새 시대를 선포하신다.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은 모세율법과 제도의 틀을 따라 시행된다.
그래서 모세 제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은밀하게 하라”
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늘의 아버지만 아시도록 은밀하게 구제할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모세 언어에 의하면 오른손은 몸 전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은 몸 전체까지라도 모르게 하라는 말이다.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알도록 하라는 뜻이다.
이러한 구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모세가 전한 율법과는 전혀 다르다.
모세가 명한 율법의 내용과 충돌하고 대립하는 내용이다.
모세율법이 명하는 구제는 반드시 사람에게 보이도록 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율법에 합당한 여부를 판단하도록 사람 판정관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약에서 여호와께서는 대리통치자를 세우셔서 율법으로 통치하셨다.
이제 예수께서 오심으로 옛 통치질서는 바뀌게 되었다.
종말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통해서 자기 백성과 세상을 경영하신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로서 말씀하시고 대하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자신의 권세를 직접 행사하시기 때문에
천부장이나 백부장, 제사장이나 서기관,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 판정관의 판정은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자기 백성의 구제를 직접 챙기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고 말씀하신다(마6:4)


신구약에서의 윤리적인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구약의 율법통치에서는 종으로서 삶과 윤리가 요구되고
종말의 그리스도 통치에서는 하나님 아들(자녀)로서 삶과 윤리가 요구된다.
구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풍성함을 고아와 과부에게 나타내는 의로움이다.
가난한 친족의 기업을 무르는 일도 이스라엘이 율법의 의를 나타내는 일이다.
이처럼 율법을 따라 행하는 삶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영광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의로움이며 상급이기도 하다.
그러나 종말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셨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율법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함이다(갈4:4-5).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따라 자기 백성을 대하거나
율법이 명하는 바를 따라 섬김을 받지 않으신다.
율법이 규정한 각종 제사나 예물, 십일조를 드리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다.
율법이 규정한 각종 제물과 예물, 십일조는 땅에 속한 죽은 것들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통하여 생명의 질서가 세상에 도입되었다.
그러므로 종말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산 제사이다.
산 제사는 산 제물로 드리는 제사이다.
산 제물은 하나님 앞에서 산 자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우리 자신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살아가는 삶이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 말한다(롬12: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는 삶,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동참하는 삶,
가난하고 궁핍한 형제들을 돌아보는 연보에 참여하는 삶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는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이다.
그러므로 산 제사는 하나님의 아들(자녀)로서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는 삶이다.
우리의 몸을 드려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삶이다.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