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거듭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이유
많은 분들이 성령으로 거듭나기 위해 열심을 다합니다.
그런데 뜻대로 잘 안 된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십니다.
골방기도 많이 하고, 기도원 가서 금식하며 기도하고,
여기저기 이름 난 곳에 찾아다니기도 하며
뭔가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고 하시며 안타까움을 토로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를 버리려는 진정한 결단(자기 부인, 회개)이 있었냐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으로의 태어남을 위해서는...
무엇 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게 있는데, 자기 부인(간절한 회개)입니다.
절박하고 애통한 심령으로 회개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회개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회개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힘들고 어렵습니다.
나의 모든 걸 부정하고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입술로만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19장 23-24절)
위 말씀의 배경은 유대의 젊은 관원이 구원은 받아야 하기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어찌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구원받아 영생할 수 있을지 심히 근심하여 예수님께 여쭤보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부자 관원에게 네가 계명을 다 지켰느냐 물어보십니다.
젊은 관원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구원을 위해 율법적으로만 지킴)을 다 아시는 예수님께서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하시며
그가 감추려고 했던 속 사람의 불편한 진실을 콱 찌르며 들춰내십니다.
부자 청년 관원은 이에 심히 고민하다가 결국 가진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시며
다시 말한다는 표현까지 써가시며 직설적으로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청년에게 말씀하신 부자란 의미는 무엇입니까?
지금 내가 가진 물질적인 재산일까요?
그렇습니다. 분명 물질적인 재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물질적 재물뿐만 아니라,
겉으로만 기계적으로 지키는 율법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것입니다.
형식에 몰두하여 내 자아가 바탕이 되어 내 의로 지키는 것은
폐기되어야 할 육신의 법입니다.
그 시대는 육신적으로 율법을 지키면 다 구원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는 우격다짐처럼 열심히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에
그들이 겉으로는 율법을 지켰으나, 마음의 중심은 사랑이 없기에
그런 육신적인 율법을 지켜봐야 구원과는 소용없음을 증거하십니다.
또한...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십니다.
차라리 물질적 재산만으로 한정되었다면 천국 가기가 쉬울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부자의 의미는... 가진 물질적 재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 중에 전 재산 다 털어서 불쌍한 사람 도와주고,
학교에 장학기금으로 바치고,
어떤 재단에 일임하여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키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럼 이들이 거듭날 수 있을까요?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받는 것이라면
천국 문은 좁은 문이 아닙니다.
위의 성경 말씀에 기록된 부자의 의미는 ...
물질적인 부자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 부자 청년은 그 재산을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든 스스로 모았든
그 마음속에는 더 가지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 시대 가난하고 병든 불쌍한 사람이 많은 걸 알면서도
그들을 위해 베푸는 긍휼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저 율법적 형식에만 치우친 도움이었습니다.
그가 만약, 탐욕이 없이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있었다면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처럼 행했을 겁니다.
그 탐욕의 마음이 그를 붙잡고 있었으며,
그것을 포기하지 못했기에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고,
거듭나지도 못하고 구원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지 못해 ,
그것들을 붙들고 있으면서(자기를 부인할 마음이 없으면서)
거듭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만 합니다.
자존심의 부자이면서 그것을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분노의 부자이면서 그것을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욕심의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판단의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정죄의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내 의의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남을 무시하며 빈정대는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는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 들었다고 분해하는 마음의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자신을 높이는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권력의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명예의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고집의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남을 이기고 싶어 하는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
이런 세상 배설물들의 부자이면서 포기하지 못 해 꽉 잡고 있으면서
열심히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고,
기도원에 가서 금식 기도하며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달라고
입술로만 소리높여 외칩니다.
그러면서 회개의 영을 부어달라고 외칩니다.
이렇게 오른쪽 손으로는 세상의 배설물로 가득한 것을 포기하지 못 해
꽉 잡고 있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주님을 향해 손짓하며 나에게 와달라고 외칩니다.
주님은 절대 무오하시며 선악 간에 융통성이 가장 없으신 분입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못 박는 분이십니다.
마음의 중심을 훤하게 아시는 주님께서... 내가 세상 것을 붙잡고 있으면서
거듭나게 해달란다고, 그분이 융통성을 발휘하여 성령을 주시겠습니까?
과연 회개의 영을 부어주시겠습니까?
썩은 녹슨 파이프에 은혜를 흘려보내시겠습니까?
썩은 녹슨 파이프에 은혜를 흘렸다가는
은혜가 변질되어 마귀에게 이용만 당할 뿐입니다.
성경의 이론만 앞세우며 지식으로만 다 무마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저 뜬구름 잡듯 관념적으로 입술로만 다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육적 세상적 삶은 포기할 마음도 없이 영적 나태함으로 그대로 묻어가면서
오직 은혜로 다 무마될 것이라는 악한 생각에만 의지한다면
영원히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에게 해가 되는 짓만이 죄가 아닙니다.
주님의 뜻에 어긋나면 그 모든 것이 다 죄에 들어갑니다.
탐욕, 자존심, 명예, 권력을 지향하는 마음, 분노, 판단, 정죄, 수군거림, 고집... 등등
이런 것을 품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죄이고
이걸 포기하려는 마음이 없이 양다리 걸치고
거듭나려 애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철옹성의 벽입니다.
이런 죄의 철옹성을 부숴버릴 마음도 없이
새 생명을 부어달라 외친들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 죄의 장벽을 먼저 포기하고 무너뜨리길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이 철옹성 같은 죄의 장벽이 무너뜨리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성령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육신적인 간절함일까요?
그것은 간절함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간절함은 위에서 열거한 죄의 장벽을
과감히 포기하려는 강한 결단의 마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행위 그 자체로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 기도의 행위 속에서 내가 쥐고 있는 세상의 배설물들을 단호히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함의 표현이자 증거입니다.
마음의 중심에 시퍼렇게 살아 숨 쉬는 죄의 부자를 과감히 포기하는
간절한 마음을 주님께 보여주십시오.
그것이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입술로는 용서해달라고 하면서, 나의 철옹성 같은 죄의 부자목록을
포기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없다면...
성령님은 결코, 우리에게 오시지 않습니다.
세상 죄를 포기하려는 마음이 간절할 때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하나둘 모두 청소하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회개는...
우리의 죄가 넘쳐 감당하기 어려우니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죄를 청소해 달라는 간절한 요청이 바로 회개입니다.
부자 관원처럼 세상 것을 포기 못 해 돌아간다면 회개는 없고
성령으로 거듭남은 없을 것입니다.
집 나간 탕자 둘째 아들도 모든 것이 깨지고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며
세상의 모든 배설물들을 포기하고
아버지가 아니면 도저히 살 수 없다는 항복선언을 하면서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매우 기뻐하시며 만나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 탕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입술로만 주님을 구하면서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진정으로 주님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 속에 숨어있는 모든 부자의 마음을 포기하십시오.
주님 앞에 진정으로 굴복하며 항복을 선언하십시오.
세상 속성을 포기하고 항복하고 굴복하는 마음이 바로 가난함의 심령입니다.
이 모든 것이 되었을 때
주님은 매우 기뻐하시며 탕자에게 하셨듯, 맨발로 뛰어가셔서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우리의 진정한 간절함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게 성령으로 거듭나는 유일한 방법이고,
주님을 구하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세상적 육적 죄의 부자가 되지 마시고,
가난하고애통한 심령이 되시길 간곡히 권면 드립니다.
반드시 만나주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장 17절)
랑별파파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사람들)
그런데 뜻대로 잘 안 된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십니다.
골방기도 많이 하고, 기도원 가서 금식하며 기도하고,
여기저기 이름 난 곳에 찾아다니기도 하며
뭔가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고 하시며 안타까움을 토로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를 버리려는 진정한 결단(자기 부인, 회개)이 있었냐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으로의 태어남을 위해서는...
무엇 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게 있는데, 자기 부인(간절한 회개)입니다.
절박하고 애통한 심령으로 회개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회개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회개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힘들고 어렵습니다.
나의 모든 걸 부정하고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입술로만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19장 23-24절)
위 말씀의 배경은 유대의 젊은 관원이 구원은 받아야 하기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어찌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구원받아 영생할 수 있을지 심히 근심하여 예수님께 여쭤보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부자 관원에게 네가 계명을 다 지켰느냐 물어보십니다.
젊은 관원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구원을 위해 율법적으로만 지킴)을 다 아시는 예수님께서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하시며
그가 감추려고 했던 속 사람의 불편한 진실을 콱 찌르며 들춰내십니다.
부자 청년 관원은 이에 심히 고민하다가 결국 가진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시며
다시 말한다는 표현까지 써가시며 직설적으로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청년에게 말씀하신 부자란 의미는 무엇입니까?
지금 내가 가진 물질적인 재산일까요?
그렇습니다. 분명 물질적인 재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물질적 재물뿐만 아니라,
겉으로만 기계적으로 지키는 율법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것입니다.
형식에 몰두하여 내 자아가 바탕이 되어 내 의로 지키는 것은
폐기되어야 할 육신의 법입니다.
그 시대는 육신적으로 율법을 지키면 다 구원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는 우격다짐처럼 열심히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에
그들이 겉으로는 율법을 지켰으나, 마음의 중심은 사랑이 없기에
그런 육신적인 율법을 지켜봐야 구원과는 소용없음을 증거하십니다.
또한...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십니다.
차라리 물질적 재산만으로 한정되었다면 천국 가기가 쉬울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부자의 의미는... 가진 물질적 재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 중에 전 재산 다 털어서 불쌍한 사람 도와주고,
학교에 장학기금으로 바치고,
어떤 재단에 일임하여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키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럼 이들이 거듭날 수 있을까요?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받는 것이라면
천국 문은 좁은 문이 아닙니다.
위의 성경 말씀에 기록된 부자의 의미는 ...
물질적인 부자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 부자 청년은 그 재산을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든 스스로 모았든
그 마음속에는 더 가지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 시대 가난하고 병든 불쌍한 사람이 많은 걸 알면서도
그들을 위해 베푸는 긍휼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저 율법적 형식에만 치우친 도움이었습니다.
그가 만약, 탐욕이 없이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있었다면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처럼 행했을 겁니다.
그 탐욕의 마음이 그를 붙잡고 있었으며,
그것을 포기하지 못했기에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고,
거듭나지도 못하고 구원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지 못해 ,
그것들을 붙들고 있으면서(자기를 부인할 마음이 없으면서)
거듭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만 합니다.
자존심의 부자이면서 그것을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분노의 부자이면서 그것을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욕심의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판단의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정죄의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내 의의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남을 무시하며 빈정대는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는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 들었다고 분해하는 마음의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자신을 높이는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권력의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명예의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고집의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남을 이기고 싶어 하는 부자이면서 그걸 포기 못 해 붙잡고 있습니다.
...........................
이런 세상 배설물들의 부자이면서 포기하지 못 해 꽉 잡고 있으면서
열심히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고,
기도원에 가서 금식 기도하며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달라고
입술로만 소리높여 외칩니다.
그러면서 회개의 영을 부어달라고 외칩니다.
이렇게 오른쪽 손으로는 세상의 배설물로 가득한 것을 포기하지 못 해
꽉 잡고 있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주님을 향해 손짓하며 나에게 와달라고 외칩니다.
주님은 절대 무오하시며 선악 간에 융통성이 가장 없으신 분입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못 박는 분이십니다.
마음의 중심을 훤하게 아시는 주님께서... 내가 세상 것을 붙잡고 있으면서
거듭나게 해달란다고, 그분이 융통성을 발휘하여 성령을 주시겠습니까?
과연 회개의 영을 부어주시겠습니까?
썩은 녹슨 파이프에 은혜를 흘려보내시겠습니까?
썩은 녹슨 파이프에 은혜를 흘렸다가는
은혜가 변질되어 마귀에게 이용만 당할 뿐입니다.
성경의 이론만 앞세우며 지식으로만 다 무마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저 뜬구름 잡듯 관념적으로 입술로만 다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육적 세상적 삶은 포기할 마음도 없이 영적 나태함으로 그대로 묻어가면서
오직 은혜로 다 무마될 것이라는 악한 생각에만 의지한다면
영원히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에게 해가 되는 짓만이 죄가 아닙니다.
주님의 뜻에 어긋나면 그 모든 것이 다 죄에 들어갑니다.
탐욕, 자존심, 명예, 권력을 지향하는 마음, 분노, 판단, 정죄, 수군거림, 고집... 등등
이런 것을 품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죄이고
이걸 포기하려는 마음이 없이 양다리 걸치고
거듭나려 애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철옹성의 벽입니다.
이런 죄의 철옹성을 부숴버릴 마음도 없이
새 생명을 부어달라 외친들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 죄의 장벽을 먼저 포기하고 무너뜨리길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이 철옹성 같은 죄의 장벽이 무너뜨리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성령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육신적인 간절함일까요?
그것은 간절함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간절함은 위에서 열거한 죄의 장벽을
과감히 포기하려는 강한 결단의 마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행위 그 자체로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 기도의 행위 속에서 내가 쥐고 있는 세상의 배설물들을 단호히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함의 표현이자 증거입니다.
마음의 중심에 시퍼렇게 살아 숨 쉬는 죄의 부자를 과감히 포기하는
간절한 마음을 주님께 보여주십시오.
그것이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입술로는 용서해달라고 하면서, 나의 철옹성 같은 죄의 부자목록을
포기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없다면...
성령님은 결코, 우리에게 오시지 않습니다.
세상 죄를 포기하려는 마음이 간절할 때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하나둘 모두 청소하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회개는...
우리의 죄가 넘쳐 감당하기 어려우니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죄를 청소해 달라는 간절한 요청이 바로 회개입니다.
부자 관원처럼 세상 것을 포기 못 해 돌아간다면 회개는 없고
성령으로 거듭남은 없을 것입니다.
집 나간 탕자 둘째 아들도 모든 것이 깨지고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며
세상의 모든 배설물들을 포기하고
아버지가 아니면 도저히 살 수 없다는 항복선언을 하면서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매우 기뻐하시며 만나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 탕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입술로만 주님을 구하면서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진정으로 주님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 속에 숨어있는 모든 부자의 마음을 포기하십시오.
주님 앞에 진정으로 굴복하며 항복을 선언하십시오.
세상 속성을 포기하고 항복하고 굴복하는 마음이 바로 가난함의 심령입니다.
이 모든 것이 되었을 때
주님은 매우 기뻐하시며 탕자에게 하셨듯, 맨발로 뛰어가셔서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우리의 진정한 간절함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게 성령으로 거듭나는 유일한 방법이고,
주님을 구하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세상적 육적 죄의 부자가 되지 마시고,
가난하고애통한 심령이 되시길 간곡히 권면 드립니다.
반드시 만나주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장 17절)
랑별파파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사람들)
출처: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사람들(온라인 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랑별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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