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성령의 은사들

열려라 에바다 2024. 2. 2. 10:12

성령의 은사들

 

우리는 그 동안 성령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분이 신자 개개인 안에서 역사하시는 측면에 초점을 맞춰 왔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때 먼저 성령의 ‘선물’ 또는 ‘세례’를 받는다. 그 후로는 계속해서 더욱 풍성하게 성령 충만을 받기를 추구해야 하며, 그 결과로 성령의 열매가 삶에서 무르익어 나타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은사들도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사용되도록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주어진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교회에 대해서 쓸 때, 종종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대조시킨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성령의 사역의 결과다. 교회는 하나인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다양한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에게 각각 다른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선물(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성령)은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고, 성령의 은사들(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교회의 사역을 다양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영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똑같은 진리가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그 통일성의 근거를 '카리스'(charis, 은혜)에, 그 다양성의 근거를 '카리스마타'(charismata, 은혜의 은사들)에 두고 있다.

신약 성경에는 성령의 은사들을 열거하는 본문이 네 군데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본문은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온다. 로마서 12:3-8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보다는 짧은 목록들이 에베소서 4:7-12과 베드로전서 4:10에 나온다. 이 본문들과 성경의 또 다른 부분에서 우리는 영적 은사들의 특성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얼마나 많은 은사가 있는지, 그 은사들과 타고난 재능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모든 은사가 다 기적적인 것인지, 오늘날에는 어떤 은사들이 존재하는지, 그 범위 (누구에게 주어지는지)와 출처(누구로부터 주어지는지) 그리고 그 목적(무엇을 위해 주어지는지) 등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영적 은사들의 특성

고린도전서 12:4-6에서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의 목적은, 비록 은사는 다양하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한분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이 진리를 세 번이나 기술하고 있는데, 매번 은사들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각 다른 위격과 연관시킨다(“성령은 같고”, “주는 같으며”, “하나님은 같으니”). 그는 또한 그 은사들을 나타내기 위해 세 개의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첫째(4절)는 '카리스마타'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둘째(5절)는 '디아코니아이'(diakoniai)인데, 이 말은 봉사의 여러 형태를 가리킨다. 셋째(6절)는 '에네르게마타’(energémata)로서 에너지, 활동 또는 능력을 말하는데, 이것은 같은 하나님이 모든 성도 안에서 '에너지를 공급하시거나’, ‘영감을 불어넣으시는 것'('에네르곤', energon)이다. 그리고 각 그룹에는 '여러가지' 또는 '여러 분배'('디아이레세이스', diaireseis)가 있다. 이 세 단어를 함께 묶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은사들은 사람들이 특정하게 각자에게 맞는 봉사의 일을 하는 데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여하신 일정한 재능들이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 또는 ‘카리스마'는 재능만을 의미하거나 사역이나 직분만을 의미하지 않고,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는 재능을 말한다. 더 간단히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은사와 그 은사를 발휘할 수 있는 역할을 가리키거나 아니면 어떤 역할과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는 은사를 가리킨다.

우리는 이제 이 은사들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을 던질 준비가 되었다. 이 질문들은 은사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켜 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다양한 은사들이 존재하는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세 가지 은사, 즉 '방언과 예언과 병 고치는 은사'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분명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세 가지 은사들 외에도 다른 많은 은사들이 있다. 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들」이라는 제목의 책과 소책자를 본 적이 있다. 그 책의 저자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병행시키고자 성령의 은사를 아홉 개로 국한시키려고 한 동기는 이해하지만, 그러나 은사의 수를 그렇게 제한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고린도전서 12장의 초두에 나오는 목록에는 아홉 가지 은사가 열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장의 말미에 나오는 두 번째 목록에는, 거기에도 아홉 가지 은사가 열거되어 있지만, 그 중 다섯 가지 은사만 앞의 목록과 일치할 뿐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2장만 보더라도 열세 개의 은사가 나타난다. 그리고 로마서 12장에는 일곱 개의 은사가 기록되어 있고(그 중 다섯 개는 고린도전서의 두 목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에베소서 4장에는 다섯 개그 중 두 개는 새로운 것이다)가 나오는 반면, 베드로전서 4장에는 두 개의 은사가 나오는데, 그 중 하나("누가 말하려면")는 앞의 목록들에서 특별하게 언급된 적이 없는 은사다. 이 다섯 가지 목록을 비교해 볼 때, 한쪽 목록의 어느 은사가 다른 쪽의 어느 것에 해당하는지가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는 모두 합쳐서 스무 개 이상의 은사가 나온다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더욱이 이 다섯 목록을 합친 것이 성령의 모든 은사를 다 망라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이미 같은 장(고전 12장)에 나오는 두 목록에도 고작 다섯 개의 은사만 중복되고 각 목록마다 새로운 은사가 네 개씩 나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에베소서의 목록에는 고린도전서 12장의 두 목록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두 개의 새로운 은사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이 다섯 목록에 전부 나오는 은사는 하나도 없으며, 열세 개의 은사는 그 중 한 가지 목록에만 나온다. 이로 볼 때 이 목록들에 나오는 은사들은 훨씬 더 많은 전체에서 제한된 일부를 골라낸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열거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 외에도 우리는 역사나 경험을 통해서 성령께서 성경의 목록에나오지 않는 은사들을 사람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찬송 작사가 찰스 웨슬리의 능력은 복음전도자였던 그의 형 요한 웨슬리의 은사에 못지않은 '카리스마'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복음성가 가수들, 기독교 시인들 그리고 기독교 문학, 작곡, 방송이나 텔레비전 등의 영역에서 뛰어난 영적 은사(나는 그러한 재능들을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는가? 다시 돌아가서 살펴본다면, 다섯 목록 중 오직 한 곳에만'복음 전하는 자'가 나온다. 이 은사는 어떤 형태로든지 전도하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포괄적인 은사를 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다양한 전도의 은사들에 대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전도에도 여러 종류의 은사가 있다는 것, 즉 대규모 전도 집회를 이끄는 은사와 가정 전도의 은사 또는 우정 전도, 간헐적인 접촉을 통한 전도, 교습식 전도, 문서 전도, 그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전도를 위한 은사들이 있다는 것을알 수 있지 않은가?

나는 깊은 영적 체험에 대해서처럼 영적 은사들에 대해서도 감히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자 한다. 우리의 하나님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다양성의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인간적인 성향은 하나님을 우리 자신이만든 인위적인 틀 안에 제한하고자 하고, 그분을 '테이프로 붙여서 고정시키려고 하며', 또 경험이나 사역 양쪽에서 융통성 없는 고정 관념(stereotype)을 만들어 내려 한다. 그러나 창조의 하나님은 끝없이 다양한 매혹적인 피조물들을 만드셨고, 인간 내에서도 인종적으로나 기질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패턴을 만드셨다. 성경은 구속의 하나님도 같은 분으로 제시한다. 그분의 구원의 지혜는 '다채로운 것'(polupoikilos, 엡3:10, 한글 개역 성경에는 '각종'으로 번역되어 있음-역주)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접두사만 제외한 같은 단어가 영적 은사들을 베푸시는 그분의 은혜에도 적용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사를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사용해야 한다는 권면을 듣는다(벧전 4:10, poikilos, '다채로운’ 또는 ‘얼룩진'). 이 단어는 대리석이나 수놓은 천, 동양식 양탄자를 묘사할 때 쓰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정교한 태피스트리 같고, 영적 은사들의 풍부한 다양성은 그 전체적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여러 색깔로 된 여러 실들이 섞여서 짜여진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다양한 은사들이 존재하는가?" 라는 우리의 처음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신약 성경에 명기된 스무 가지의 은사가 있으며, 다양성을 사랑하시고 후히 주시는 분인 살아 계신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은사들을 주실 수 있다.” 바울은 이 주제를 소개하면서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강조한다. 성령은 한 분이시지만 은사는 여러 가지고, 직임도 여러 가지며, 역사도 여러 가지라고 그는 쓰고 있다(고전 12:4-6).

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의 관계

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어떤 사람들은 관계가 '전혀 없다'고 대답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둘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전혀 없는 것처럼 말하거나 글을 써 왔다. 이 두 입장은 모두 극단적인 것 같다. 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 사이에는 틀림없이 뭔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재능을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그러기에 우리는 사람들이 예술적인 '은사' 나 음악적인 '은사'를 가졌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천부적인 은사를 타고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새 창조, 즉 교회의 하나님은 그분의 구속받은 자녀들에게만 '영적 은사들'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을 구별하는 것은 영적 은사이며, 몸의 각 지체는 서로 다른 은사나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사실로부터 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 사이에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결론을 쉽게 내려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창조의 하나님과 새 창조의 하나님은 같은 분으로서, 그분은 그 둘 모두를 통해 그분의 온전한 뜻을 이루어 가신다. 이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실 때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렘 1:5). 바울도 자신이 사도로 부름받은 것에 대해 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아들을 나타내신 하나님은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였다고 말한다(갈 1:15-16). 이 두 구절은 부르심의 시기를 나타낼 뿐 아니라 예레미야나 바울의 탄생 이전에 하나님이 장차 그들에게 일어날 일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을 보여 주고 있음을 주목하라.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그들의 탄생 이전에 하나님이 후에 그들을 불러서 맡기실 사역을 위해 그들을 이미 성별 또는 구별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삶의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 전혀 연결점이 없다고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시기 전에 이미 그들에게 실제로 자질들을 주셨고(현대 용어로 표현하자면 유전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자질들은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후에 비로소 그들에게 나타나서 쓰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성경의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과 더 부합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그들의 삶의 전후반부에서 모두 활동하셨으며, 그 둘을 완전하게 짜 맞추셨다. 이와 비슷하게, 성경의 모든 저자들은 그들의 기질, 성장, 경험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먼저 준비되었다가 그 후에 그들의 됨됨이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성령의 영감을 받았던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선지자와 사도들의 경우는 오늘날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와 반드시 같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나는 성경은 오히려 그러한 반론과는 반대로 가르친다고 답변하겠다. 왜냐하면 우리 각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목적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 목적은 '영원하신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작정되었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딤후 1:9, 문자적 번역).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셔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실 것을 예정하셨다(엡 1:4-5).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받았는데, 그 일은 바로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시작하실 때부터 마지막을 계획하셨다는 이 근본적인 진리는 우리가 자연과 은혜 사이에, 우리의 회심 이전과 이후 사이에, 연속성이 없다고 쉽게 결론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경고한다. -

타고난 재능과 영적인 은사가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두 번째 이유가 있다. 몇 가지 '카리스마타'는 기적적인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물질적인 속성을 지닌 영적 은사들이다. 아마도 그러한 은사들의 가장 분명한 예를 찾는다면 바울이 로마서 12장에 기록한 목록의 마지막 세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라(롬 12:8).

앞의 예들이 '카리스마타'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 단어 자체는 6절 초반부에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목록 전체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처럼 '한 몸에 많은 지체'라는 은유(4-5절)밑에 나온다. 그리고 로마서 12장의 목록에 나오는 일곱 가지 은사는 전부 거의 동일한 패턴을 따라 제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세 은사는 무엇인가? 이 셋 중에서 가운데 것은 헬라어의 원뜻을 따를 때 그 의미가 불분명하다. 그것은 ‘도움을 주는 사람' (RSV)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다스리는 사람' 또는 '이끌어 가는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따라서 데살로니가전서 5:12이나 디모데전서 5:17에 나오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장로들을 가리키는 데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머지 두 은사는 의미가 아주 분명하다. 하나 '구제하는 자’)는 돈을 주는 것을 가리키는데, 특별히 에베소서 4:28에서처럼 '빈궁한 자'에게 주는 것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긍휼을 베푸는 자' 이다. 물론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거나 긍휼을 베풀 수 있다(또 베풀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역할들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만 주시는 '영적 은사'라고 여길 수 있겠는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은사 중 하나가 회심 후에 갑자기 돈 벼락을 맞는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지 않은가! 물론이다. 나는 그 은사를 가진 사람이 회심하기 전에 이미 자원줄 수 있는 돈과 섬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에 우리 모두가 동의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새로운가? 타고난 자질을 영적인 은사로 바꾸어 놓는 요인은 그 목적(그들이 줌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목적)과 동기(그들을 이끌어 가는 동인)에 있음이 분명하다. 어쨌든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들이다. 불평이나 마지못해 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말한다. 구제하는 자는 자신의 은사를 '관대함으로 발휘해야 하고(8절, 문자적 의미),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회심 전의 타고난 재능과 회심 후의 영적 은사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유사한 연관성은, 바울이 로마서 12장의 초두에서 언급하는 두 가지'카리스마타', 즉 '가르치는 자'(7절)와 '권위하는 자'(8절)에도 나타난다. ‘가르치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그러나 '권위하다'('파라칼레오', parakaleo)는 동사는 '구걸하다' 또는 '간청하다'에서부터 ‘격려하다', '위안하다', '위로하다'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두 동사는 공적으로 말하는 사역의 서로 다른 두 측면, 즉 한편으로는 교훈을 주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권면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권면’(‘파라클레시스', paraklésis)은 분명히 연설(행 13:15)이나 글(히 13:22)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주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라클레시스'는 그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서, 개인적인 우정이나 동정, 사랑 등이 가져다주는 격려와 위로를 포함한다. 물론 비그리스도인들도 교훈과 격려를 베푼다. 세속적인 세상에서 우리는 흔히 사용하는 표현처럼) '타고난 교사'라든지, 또는 이해심이나 친근한 느낌, 또 타인에 대한 민감성 등을 갖춘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그러한좋은 자질들을 가지고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 또그들을 격려해 준다. 그렇다면 비그리스도인 교사나 격려자들과 이러한 영적 은사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자연의 하나님과 은혜의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이미 말한 내용에 비추어 볼 때, 회심 전에는 가르치는 직업에 종사하지 않았던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이 가르치는 영적 은사를 주신다든지, 또는 기질적으로동정심이 부족하거나 친절하지 못한 형제 자매에게 권위의 은사를 주신다는 것은 왠지 처음부터 그럴 개연성이 없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물론 하나님께 불가능한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은사는 그분이 주시는 타고난 재능과 잘 들어맞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것이, 영원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 성경의 하나님과 더 조화를 이루지않겠는가? 예를 들면, 자신의 땅을 팔아 바치고(37절) 또 개인적인 우정을 통해(행 9:26-27; 11:25-26 자신의 독특한 사역을 감당했던 바나바(행 4:36)와 같은 '권위자'는 적어도 창조에 의해 그러한 잠재적 가능성을 이미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듯 가르치는 은사와 권위하는 은사의 경우에는, 이미 드러나 있거나 아니면 잠재해 있던 타고난 자질들이 강화되고 증대되고 '기독교화되는 것'에서 그 특색들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회심 전에도 이미 재능 있는 교사였던 사람이 회심한 후에 가르침의 '카리스마'를 받고 더욱 통찰력과 명료함 그리고 적실성을 가지고 가르칠 수도 있을 것이다.또 천성적으로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 회심 후에 '권위'의 영적 은사를받아서, 그의 기독교적 교훈(예를 들면, 살전 4:18; 딛 1:9)과 기독교 신앙의 따스함과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 권면'(빌 2:1)과 같은 특별한 기독교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뒷부분에 열거한 모든 성경 구절들에는 '파라칼레오'나 '파라클레시스'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이 모든 성경의 증거들은 타고난 재능과 영적인 은사 사이에 너무 분명한 경계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한다. 17세기에 존 오웬(John Owen)은 자신의 명저 「성령론」(Pneumatologia) 또는 「성령에 관한 강론」(A Discourse Concerning the Holy Spirit)에서 두 종류의 성령의 은사를 구별했는데, 그것은 "인간 지성의 모든 능력과 기능을 뛰어넘는 것과 인간지성의 기능을 비상하게 증가시킨 것이다."

모든 영적 은사는 기적적인 사인가?

어떤 사람들은 이 질문에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카리스마타'가 기적과 관련되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질문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요즘 어떤 사람들은 '카리스마적'이라는 말을 '기적적인'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질문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가 말한 것을 반복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즉 어떤 은사들은 기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며, 무척 평범하고 심지어는 단조롭게 보인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은사나 권위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나 긍휼을 베푸는 은사는 기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 또는 '믿음'(고전 12:8-9) 등도 그 용어만 보아서는 그것들이 기적적이거나 기적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할 명백한 이유가 없다. 본문이나 문맥은 그렇게 볼 만한 아무 이유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혜나 지식의 은사인 경우는 (그것들을 표현하는 은사와 더불어 그 은사들이 특별히 많이 주어진 것으로 보고, 또 믿음의 경우는 칭의나 성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역을 위해서 주어진 특별한 강도의 믿음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일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예를 든다면 솔로몬은 지혜의 은사를 받았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영웅들은 믿음의 은사를 받았다.

그리고 바울과 베드로는 둘 다 ‘섬기는 것'을 영적 은사로 보았다(롬 12:7 벧전 4:11). 여기에 쓰인 단어는 '디아코네오' (diakoned)로서 목회 사역이나 일상 사역(이것일 가능성이 더 크다) 등 어떤 종류의 사역이든 지칭할 수 있는 말이다. '호 디아코논'(bo diakonón)은 식사 때에 시중드는 사람을 말하는데 (눅 22:26-27), 같은 단어가 마르다가 하던 집안일에 대해서도 쓰였다(눅 10:40). 다음으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28에서 RSV가 '서로 돕는 것'(antilémpseis)과 '다스리는 것'(kubernēseis)으로 번역한 '두 카리스마타'를 언급한다. 처음 단어는 신약의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도움' 또는 ‘돕는 행위’로 정확하게 번역되었다. 이것은 '봉사'와 같은 의미를 지닌 또 하나의 일반적인 단어인 것 같다. 반면에 '퀴베르네세이스'는 '행정'을 의미한다. 아른트-깅그리치 어휘 사전(Arndt-Gingrich Lexicon)은 “복수형은 교회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담당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는 부연 설명을 달고 있다.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 '퀴베르네테스'(kubernētēs)는 배의 '키잡이’, ‘수로 안내인’ 또는 ‘선장’을 가리키는 말로서(행 27:11), 고전 헬라어에서는 예를 들면 도시의 시장과 같이 세속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은유적으로 가리켰다. 이로써 볼 때 '퀴베르네세이스'는 사람들을 인도하거나 다스리는 은사를 의미하며, 교회 프로그램의 한 부분을 책임지는 조직적인 능력이나 회의를주재함으로써 지혜롭게 위원회를 '조정해 가는 지도력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기적적인 은사들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기적을 행하는 것'이나 '기적을 행하는 자'는 모두 기적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마찬가지로 '병 고치는 은사'나 '병 고치는자' 그리고 '여러 종류의 방언'과 '방언 통역'도 같은 범주에 든다고 할수 있다(고전 12:9-10, 28-29). 이러한 은사들을 기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면, 오늘날에도 그 은사들이 주어지는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한해답을 얻기 위해 기적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에 대해서는 숙고해 보지도 않은 채 단순히 "예"나 "아니오"로 쉽게 답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나는 “예”나 “아니오”식의 순진한 답변은 둘 다 극단적인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오늘날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거나 (더 심하게는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독단적으로 "아니오"라고 답하는 것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입장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유로우시며 우주를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을 가지신 창조주이시다. 그분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 모든 자연은 그분께 복종한다. 그분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을 뿐아니라 지금까지 행해 오셨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그분의 능력을 제한하며, 그분에게 어떤 것은 하실 수 있고 어떤 것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와 반대되는 입장 역시 마찬가지로 견지될 수 없다. 이 입장의 극단적인 형태는 하나님이 하시는 거의 모든 일이 기적적이라는 견해를 취한다. 그러나 기적은 그 정의상 비범한 사건으로서, 하나님이 정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일하시는 방법에서 창의적으로 이탈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활동을 오로지 기적적인 사건들에서만 찾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마술사 같은 존재로 둔갑시킨다. 우리 모두는 초자연이 아니라 자연 안에서 그리고 기적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우선적으로 일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계시를 바로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긴급한 일이다. 하나님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는 지극히 높은 분이며(단 4:32), 그분께는 “열방은 통의한 방울 물 같고,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을 뿐이다”(사 40:15). 또한 하나님은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는 재판장이시다" (시 75:7). 태양을 떠오르게 하고 비를 내리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마 5:45), 계절의 주기를 유지하고(창 8:22; 행 14:17),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며 (시 89:9), 공중의 새를 먹이고 들의 꽃들을 입히며 (마 6:26, 30), 사람의 호흡을 주장하시는 분(단 5:23)도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역사와 자연을 통해 쉬지 않고 일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기 시작하면 우리는, (예를 들어) 아무 수단도 사용하지 않건 아니면 물리적·심리적·외과 수술적 수단을 다 사용하건 관계없이, 모든 치유가 하나님이 베푸시는 치유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전자는 '기적적인 치유'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한 반면, 후자는 기적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둘 다 똑같이 '하나님의 치유'이다.

조금 덜 극단적인 이 두 번째 입장은, 비록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기적적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기적이 주님과 사도들의 사역에서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일상적으로 나타나도록 하셨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기적에 대한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자들로서는 이 입장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 여러 기적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의 하나님이 단지 기적의 하나님만은 아니듯이, 성경 또한 단지 기적에 대한 책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 역사의 많은 부분에는 기적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이 구약 시대에 속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던 세례 요한은 전혀 기적을 행한 적이 없다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요 10:41). 사실상 우리가 성경에서 기적이 나타나는 곳을 찾아보면, 마치 밤하늘에 별들처럼 그 기적들이 한데 뭉쳐서 나오는 곳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에는 그러한 성운이 네 군데 나타난다. 첫째는 모세 시대이고(애굽에 내리신 재앙들과 홍해를 건넌 사건 그리고 만나와 광야에서 물을 찾은 일 등), 둘째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의 시대이며, 셋째는 주님의 생애 동안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들의 시대이다. 이들은 율법, 선지자, 주님, 사도라는 계시의 주된 네 시대를 이룬다. 그리고 기적들의 주된 목적은 새로운 계시의 시대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선지자 모세의 독특성은 그가 행한 기적들의 독특성에 의해 확증되었다(“그 후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모든 이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신 자더라", 신 34:10-11). 이와 비슷하게, 주 예수님의 사역도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증거하신 것이다(행 2:22). 또한 하나님은 사도적 목격자들의 메시지를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gifts)"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다”(히 2:3-4). 그러므로 사도행전(Acts)을 '사도들의 행전'(the Acts of the Apostles)으로 부르는 것은 옳다. 왜냐하면 누가가 이 책에서 기록한 모든 기적은 사도들이 행한 것이며(참고 행 2:43:5:12), 예외가 되는 두 경우조차도 사도들이 안수하여 개인적으로 위임한 자들이 행한 것이었다(6:8: 8:6-7). 바울도 자신이 행한 기적들을 '사도의 표 된 것'이라고 묘사했다(고후 12:12)."

그렇다면 오늘날 기적에 대한 주장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는가? 완강한 의심의 눈초리(“오늘날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나 무비판적인 수용"물론, 기적은 언제나 일어나지")은 안 된다. 그보다는 다음과 같이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 묻고자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날 기적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적에 의해 그 진정성이 증명되어야 할 특별계시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며 또한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기적을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특수한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3)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16:17-18)라는 말씀은 현대 성경들에서는 마가복음 끝에 작은 글씨로 부록처럼 실려 있는 소위 '긴 결말'에 나온다. 이와는 다른 '짧은 결말'도 대개 함께 실려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긴 결말의 사본상의 근거가 빈약한 것을 이유로 마가복음이 8절에서 급작스럽게 끝나거나, 아니면 (더 그럴듯하게는 본래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을 실은 결말이 있었는데 그 부분이 분실되었다고 보는 견해를 취한다. 후자의 견해는 후대 사람이 긴 결말을 첨가했다는 결론을 설명해 준다. 어쨌든 이 긴 결말에 근거해서 기적이 일상적으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근거가 취약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진정한 마가의 저작이 아니며 따라서 진정한 주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영적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주어지는가?

우리는 이미, 은사를 다루고 있는 성경의 네 목록이 은사를 총망라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과, 또 그 목록들에 나타나지 않은 영적은사가 오늘날 주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제 우리는 그와 정반대의 가능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즉 그 목록들에 열거되어 있는 스무 개 또는 그 이상의 은사들이 오늘날 다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기적적인 은사들에 관한 것은 잠시 옆으로 미루어 놓고, 우리는 '사도'와 '선지자'가 오늘날 교회에 존재하는지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카리스마타'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다 주어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사람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은사가 중단될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말하거나 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그들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바로 그 근거가 있다.

'사도'라는 말은 신약 성경에서 대략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한 본문에서는 그 말이 모든 그리스도인, 즉 예수님이 보내심을 받은 사람'(헬라어 apostolos)이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요 13:16 고 말씀하셨을 때 의미하신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에 의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고 따라서 교회의 사도적 사명에 동참하고 있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는(요 17:18; 20:21), 우리도 모두 가장 넓은 의미에서 '사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된다면, 그것은 단지 일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카리스마'는 아니다.

둘째, 이 말은 적어도 두 번은 '교회의 사도들'(고후 8:23; 빌 2:25), 즉 한 교회로부터 다른 교회로 특별한 임무를 띠고 파견된 메신저를 묘사하는 데 쓰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말은 선교사들이나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파송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카리스마'로서의 '사도'가 지닌 의미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도'라는 말이 나타나는 두 개의 목록에서 이 말이 목록의 맨 처음에 나타난다는 것과(고전 12:28-29 엡 4:11), 고린 도전서의 목록에서는 사도를 '첫째'로 지칭하면서 처음 세 은사가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첫째, 둘째, 셋째”).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각 목록에서 우위가 주어져 있는 사도의 은사는 열두 제자(눅 6:12-13)와 바울(갈 1:1) 그리고 아마도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갈 1:19)와 한두 사람이 더 포함되는 '그리스도의 사도들'로서, 바로 그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의 그룹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역사적 예수님, 특별히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자들(행 1:21-22; 고전 9:1; 15:8-9)이라는 점과, 그리스도에 의해 개인적으로 임명되고 권위가 주어졌다는 점(막 3:14) 그리고 가르치는 사역을 위해서 성령의 특별한 영감을 받았다는 점(예를 들면, 요 14:25-26; 16:12-15)에서 독특하다. 그러므로 이 목록에 나타난 그러한 일차적인 의미에서는 그 은사의 성격상 그들의 계승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오늘날에도 '선교사'라는 이차적인 의미의 '사도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선지자들'은 어떤가? 물론 교회의 역사에서 선지자적인 영감을 가졌다고 주장한 자들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참된 것들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예언'과 '선지자'에 대한 우리의 정의에 달려 있다. 이 표현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는 구약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선지자는 신성한 계시가 주어지는 통로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던 자들이며 따라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했던 자들이었다(예를 들면, 출 4:12; 7:1-2; 렘 1:49; 23:16, 18, 22, 28). 이 용어에대한 이러한 핵심적인 성경적 의미에서 보면, 더 이상 선지자는 없다고말할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 안에서 완성되었으며, 성경의 정경은 완성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선지자들'은 앞에서 언급한 에베소서와 고린도전서의 목록에서 사도들 다음에 오고 있으며,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몇몇 본문에서 함께 묶여 있고그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터(그들의 가르침 때문에)라고 제시되고 있다(엡 2:20: 3:5). 건축 설계에 대한 아주 초보적인 지식만 있어도 우리는 일단 건물의 기초가 놓이면 그 위에 건물이 지어지고, 기초 자체는다시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따라서 직접적이고 새로운 계시의 통로로서의 '선지자들'이라는 일차적인 의미에서는 이 '카리스마'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따라서 더 이상 교회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라거나 또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선지자'는 이와 다르게 그보다 약한 의미로 쓰일 수 있다는주장이 있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선지자 아가보(행 11:28:21:10-11)와 같은 자들이 있을 수 있으며, 그들의 역할은 계시를 더하는것이 아니라 장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와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나는 조심스러워진다. 19세기 초에, '여선지자들'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실처럼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과 그의 '보편적 사도적 교회’(Catholic Apostolic Church)의 신용을 격추시켰던 일은 없었다. 나 자신의 관찰도 이러한 사실을 확증해 준다. 나 자신도 이루어지지 않은예언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는데, 그 결과 관련된 사람들은 정직하지못한 행동을 하게 되거나 환멸을 느끼게 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적인 사역을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적인사건을 해석하거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여기기도한다. 하지만 구약의 선지자들의 경우 그들이 받은 신성한 영감과 이런측면의 사역을 구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언의 은사를 성경을 강해하거나 설교하는 것, 또는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 (고전 14:3)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바울은 생명이 있는 설교를 예언으로 보았으며, 그러한 설교를 통해 설교자 자신이 힘을 얻고 성령의 감동을 얻는다고 보았다”고 썼다.”

하지만 이 모든 해석은 예언에 대한 성경의 고견에는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선지자는 일차적으로 미래에 대한 예견가도 아니고, 정치적인 해설가도 아니며, 생동력 있는 설교가도 아니고, 위로를 전달해 주는 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입으로서 새로운 계시의 통로이다. 바울이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모든 '카리스마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한데 묶은 것(엡 2:20: 3:5:4:11 고전 12:28)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는(이차적인 의미와 사역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우리는 교회에 더 이상 선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가르침의 방법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경 안에서 이미 완성된 그분의 계시에 대한 강해이다.

‘은사적' 이라는 말

지금까지 '카리스마타'의 성격을 살펴보면서 그에 따른 몇몇 질문들에 대해 묻고 대답해 왔다. 이제 나는 '카리스마타'의 성격을 잘못 전해 주는 ‘은사적’(charismatic)이라는 영어 형용사가 오용되는 몇몇 경우에 대해 온건한 반대를 제기하고자 한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사역에 대해 말할 때 '사적'이라는 말과 '제도적'(institutional)이라는 말을 대치시킨다. 그들은 (감독과 장로처럼) 목사와 교사는 '제도적인 반면, 선지자는 '은사적'이라고 부르면서, 전자는 교회가 임명하지만 후자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임명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잘못된 것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교회의 공식적인 인준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은 자들을 인준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성경에 의하면 목사와 교사도 선지자만큼이나 '사적' 이고(엡 4:11), 따라서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서도 그 직분을 임명해서는 안 된다. 신약 성경은 사역을 위한 자격을 갖추도록 '카리스마'를 부여받지도 않은 채 사역에 임명되는 사람처럼 우스꽝스러운 예외를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존 오웬은 그와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표현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미리 준비시키시기 전에는 그 누구도 사역의 직분에 임명할 권한이 없다." " 한 걸음 더 나아가, (예를 들어서) 신약은 '가르침의 은사'와 '가르치는 자의 은사'를 구별하지 않는다(예를 들면, 고전12:28; 롬 12:7; 엡 4:11)고 말할 수 있다. '카리스마'는 직분과 은사가합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최근에는 언론인들이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또는 '카리스마'를 지닌 정치가나 예술가들에 대해 쓰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그들이 이 말을 사용할 때는 매력과 천재성이 합쳐진 모습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위 말하는 '카리스마적인' 인물은 빛을 발하는 성격을 가졌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는 세속적인 스타들에게 이 말을적용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또한 신약 성경의 '카리스마타'는 마치 눈에 확 들어오는 은사들만 가리키는 것같이 잘못된 인상을 주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긍휼을 베푸는 일, 관대함, 행정 등과 같이 눈에 띄지않는 일들도 진정한 성경적인 의미에서 똑같이 '카리스마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셋째, 이미 앞에서 언급한 현대의 '은사주의적' 운동이 있다. 나 자신의 입장을 말하자면, 나는 이 표현을 그 어떤 표현보다도 좋아하는자들을 위해 예의상 사용할 따름이다. 사실 나로서는 그러한 용법이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이 별로내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말은 전체 교회에 마땅히 속한 '은사적’이라는 칭호를 교회 안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 교회는 은사적인 공동체로서, 지체들이 자신의 은사 '카리스마타')에 따라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은사의 범위: 은사는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지금까지는 영적 은사들이 무엇인지를 그 풍성한 다양성, 타고난 재능과의 관계, 눈에 띄는 것들뿐 아니라 평범한 것들도 포함된다는 점 등을 염두에 두고 정의해 보았다. 이제는 그 은사들의 분배에 관해 살펴보자. 은사는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우리의 즉각적인 답변은 은사의 종류가 다양하다면 그 분배도 다양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카리스 마타'는 선택된 소수의 특권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신약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비록 그 중 자신의 은사를 묻어 두고 있거나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한 가지씩은 봉사를 위한 영적 은사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증하는 근거를 제시해 준다. 이 주장에 대한 증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 영적 은사들이 열거되어 있는 신약 성경의 네 장이 모두 이러한 사실을 보여 주는 직접적인 표현들을 담고 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롬 12:3-6).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11).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4:7).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4:10).

각 절에 강조체로 된 단어들은 '파스'(pas, '모든') 혹은 '헤카스토스’(hekastos, ‘각')이다. 은사란 널리 퍼져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것이야말로 매우 놀라운 일이다.

둘째, 몸의 은유가 나오는데, 이것은 바울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즐겨 소개하는 표현이다. 교회는 인간의 몸을 닮았는데, 이 둘은 모두 각각 독특한 기능을 담당하는 많은 지체들로 이루어진 통합적인 체계다. 바울이 영적 은사들을 지칭한 신약 성경의 세 본문(롬 12장 : 고전 12장 : 엡 4장)에서 모두 몸이라는 은유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과 '카리스마타'는 필연적으로 함께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세 군데 강해 중 두 군데에서는 그들 사이의 연관성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의 논증은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몸에서처럼 그리스도의 몸에서도 각 장기나 지체는 어떤 기능을 갖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각 지체가 서로 다른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롬 12:4-6).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12, 14, 27).

모든 그리스도인이 은사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어떤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무런 은사도 받지 못하고 간과되거나 뒤로 처지는 일이 없다는 사실은 교회에 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서 근본적인 것이다. 이 진리는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교회의 삶을 바꾸어 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역 교회의 전통적인 이미지는,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하는 목회자가 소수의 헌신된 핵심 사역자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반면, 대다수의 교인들은 교회의 삶과 사역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거나 전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몸(모든 지체가 활동적이며, 각 사람은 전체의 건강과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특정한 역할을 담당함)이라기보다는 버스운전 기사 한 명이 졸고 있는 많은 승객들을 태움)를 연상시킨다. 나는 실로 교회의 이러한 잘못된 이미지가 '은사주의적 운동'의 성장을 설명해 주는 주된 이유 중 하나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운동은 (교역자들이 평신도들을 억압하는) 성직주의에 반발하여 나타난 항의이며, 하나님이 평신도들에게 은사를 주셔서 그들로 감당케 하시는 책임감 있는 지도력을 발휘하도록 평신도를 해방시키자는 호소이다.

많은 지역 교회들(특별히 그 목회자들)은 회중이 평신도 지도력의 은사를 갖추지 못했다고 불평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아무것도 시도하려 하지 않고 또 그나마 겨우 시도되는 것들을 목회자가 손에 꼭 움켜쥐고 통제하려고 하는 데 대한 전형적인 변명이다. 그러나 성경은 각 지역 교회에게,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용한 것과 같은 말을 주고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니라." 이것이 바로 성경과 눈에 보이는 현상이 서로 맞지 않는 점이다. 나타난 현상은 회중이 은사를 지니지 못했다고 하는 반면, 성경은 "터무니 없는 소리! 그럴 수 없다. 너희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평가 사이에 드러나는 이러한 괴리 현상은 신앙의 위기를 촉발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그분의 말씀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분이 각 지역 교회에 그 생명과 건강, 성장과 사역을 위한 모든 필요한 은사들을 이미 주셨거나 또는 적어도 주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기꺼이 믿을 것이다.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이 은사를 가진 일꾼들을 일으켜 주시도록 간구하는 것, 의식적으로 묻어 두었거나 무의식적으로 소홀히 여기고 있는 은사가 없는지 끊임없이 찾는 것,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은사들을 활용하도록 그들을 격려하는 것(참고, 딤전 4:14; 딤후 1:6) 그리고 그들에게 그런 기회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물론 스스로 봉사하고자 하는 자원자들을 위한 자리는 언제나 있다. 하지만 교회의 지도 체계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준비시키셔서 섬기도록 부르시는 방식에 민감하게 열려 있는 것이 더욱 건강하고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이다.

나는 1971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유럽 전도 회의(Europe Congress on Evangelism)에서 언론인이자 방송인이며 네덜란드 성서공회의 정보 담당 비서관인 얀 반 카펠레베인(Jan van Capelleveen)의 지혜로운 말에 놀랐던 일을 기억한다. 그는 ‘지역 교회의 영적 기회와 영적은사들에 대한 목록'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다시 말해서, 각 교회마다 한 그룹씩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이며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자원들(또는 주실 필요가 있는 자원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목표를 찾는 일과 그 목표에 필요한 자원을 짝짓는 일은 현대 경영학의초보적인 원리이겠지만, 성경은 경영학이 그런 원리를 생각하기 훨씬이전에 이미 그런 것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어쨌든, 지역 교회를 성직주의에서 건져내거나 교인들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몸이며 그 몸의 모든 지체는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단순한 성경적원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바로 이러한의미에서 전체 교회는 '은사적 공동체' 이다. 왜냐하면 그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한 가지 이상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적 은사들의 원천: 은사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카리스마타'의 다양한 성격과 광범위한 분배를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그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해야 한다.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신약 성경은 이것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현한다.

첫째,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헬라어 자체가 이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카리스마타'는 '카리스'(charris)를 부여하는 것인데, 이 '카리스'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호의다. 다음 구절들을 생각해 보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카리스)대로 받은 은사(카리스마타)가 각각 다르니…(롬 12:6).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도레아', dörea)의 분량대로 은혜(카리스)를 주셨나니(엡 4:7).

각각 은사(카리스마)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카리스)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이러한 표현들의 강도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 신약 성경에서는 '카리스마'가 영적 은사들뿐 아니라 구원에도 적용되고 있음을 상기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카리스마)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전적으로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에 돌리는 일에 익숙해 있으며, 이 사실보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러나 봉사를 위해 주어지는 '카리스마타’ 역시 영생의 ‘카리스마’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베푸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역에서도 시기심이나 자랑의 여지는 결코 있을 수 없다.

둘째,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영의 선물이다. 고린도전서 12장은 문자적으로 "신령한 것들에 관해서는" (peri de tón pneumatikön)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RSV는 “영적 은사들에 관해서는”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카리스마타'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바울은 의도적으로 이렇게 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의 사역에 관해 여러 방면에서 쓰고자 했기 때문이다. 즉 성령은 우리에게 영적 은사들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셔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시고(3절),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마실 때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한다고 발이나 귀가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다." 만일 온 몸이 거대한 눈이라면 어떻게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또 만일 온 몸이 거대한 귀라면 냄새는 어떻게 맡는단 말인가? 그렇다. 몸은 보아야 할 뿐 아니라 들어야 하며, 들어야 할 뿐 아니라 냄새도 맡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셔서 각자 맡은 독특한 역할을 하게 하신 것이다. 만일 그분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자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다. 따라서 어떤 기관이든 자신을 경멸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없다.

이와 반대되는 죄는 자만심이다(21-26절). 눈은 손을 경멸하거나, 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깔보고 무시할 수 없다. “나는 너 따윈 필요없어. 너는 고작 손일 뿐이야. 물론 무언가를 붙잡거나 쥘 수는 있겠지.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너는 쓸모 없어. 왜냐하면 너는 볼 수 없으니까.” 또 머리는 자신의 유리한 위치에서 발을 내려다보면서 거드름을 피우며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다. "나는 네가 필요 없어! 너는 단지 투박하고 무거운 신발에 갇힌 늙은 발에 지나지 않아. 나는 네가 굼뜨게라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해. 하지만 나는 뇌를 담고 있지. 중추신경 조직을 보관하고 있단 말이야. 나는 생각하고 계획하고 결정하는 일을 하지. 나는 너 없이도 잘 해 나갈 수 있어." 바울은 이러한 종류의 오만한 말을 부인할 뿐 아니라, 반박하고 있다. 그는 “이뿐 아니라 하나님은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이 더욱 귀한 것들을 입을 수 있도록, 그렇게 몸을 만드셨다"고 말한다.

요약하자면, 자기 경멸의 목소리는 "나는 쓸모없어. 네게는 내가 필요 없지" 라고 말하는 반면, 자만심의 목소리는 "너는 쓸모없어. 나는 네가 필요 없어" 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너희는 서로 필요로 하고 있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다른사람에게 주신 은사는 모두 중요하고 필요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함께,몸의 각 지체가 모두 제대로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건강한 몸을 이룬다.

우리가 자신과 타인을 경멸하기를 그만둘 때에만 “몸 가운데 분쟁이 없게 된다" (25절). 하나님은 불화를 싫어하신다. 그분의 뜻은 "지체들이 함께 서로의 고통과 기쁨을 나누면서 서로 똑같이 돌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시기와 헛된 욕심에서 건져 줄 수 있는 유일하고 위대한 진리는, 영적 은사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분의 은혜와 그분의뜻을 좇아 나누어 주신다는 것이다. 존 오웬의 유쾌한 문구를 인용한다면, 은사는 "하나님이 임의로 나누어 주시는 하사금"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든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든, 그 은사들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영적 은사의 목적: 은사는 무엇을 위해 주어지는가?

하나님의 선물은 사용되기 위해 주어진다. 인간의 몸의 기관은 기능을 담당한다.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도 그들의 은사를 활용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청지기들”이며, “선한청지기”가 되라는 명령을 받았다(벧전 4:10). 바울은 “받은 은사들을 사용하자”(NIV)고 썼다(롬 12:6). 그렇다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영적 은사들을 교회에 주신 목적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은사의 주된 목적이 수혜자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위해 그것들을 사용해야 하는 것처럼 말함으로써, 은사를 '사랑의 선물'로 취급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은사의 주된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며, 따라서 은사를 활용하는 우선적인 영역을 회중 예배로 봄으로써, 은사를 '예배의 선물'로 취급한다. 그러나 성경은 은사의 주된 목적이 교회에 덕을 끼치는 것', 즉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봉사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둘 다 하나님의 은사를 다른 사람들, 즉 교회를 섬기기 위해 비이타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

각각 은사(카리스마)를 받은대로…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따라서 영적 은사들은 우리 자신들(수혜자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고, 강건하게 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세우는 것'의 의미다(참고. 엡 4:12, 16).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떤 은사는 다른 은사보다 더 귀하게 여겨진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어떤 은사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더 큰 은사'를 열심히 사모해야 한다(고전 12:31).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은사의 상대적 중요성을 평가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유일하게 가능한 답변은 그 은사가 덕을 세우는 정도에 따라서'라는 것이다. 모든 '카리스마타'가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전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세우는 역할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그 가치는 더욱 커진다. 바울은 이 점을 아주 분명하게 밝힌다. 그는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썼다(고전 14:12).

이 기준에 의하면 가르치는 은사야말로 가장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만큼 그리스도인들을 세워 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사의 목록이 나오는 신약 성경의 본문들에서 가르치는 은사 또는 은사들이 맨 처음에 등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도들이 가르침의 우선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현대 교회에 매우 중요한 적실성을 시사한다. 전 세계에 걸쳐 교회는 성경을 강해하는 자들이 부족하여 영적 빈곤을 겪고 있다. 대중적인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들은 회심자들을 훈련시켜 줄 교사들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이다. 교사가 부족하여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덜 중요한 은사들에 집착하거나 또는 주의를 빼앗기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 일부 사람들에 의해 많이 강조되고 있는 은사인 '방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방언이라고 알려진 현대의 현상이 신약 성경에 나오는 은사와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던 신자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 즉 외국어로 말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던 언어들은 모두 군중 속의 여러 그룹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행 2:4-11).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현상도 이와 동일할 것이라는 강력한 신학적 언어학적 추정이 있다. 첫째, 헬라어 문구들이 거의 똑같다. 그리고 성경 해석학의 기본적인 원리 중 하나는 같은 표현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둘째, '글로사'(glassa)라는 명사는 입 안에 있는 기관과 언어라는 단 두 가지 의미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NEB가 "황홀경에서 내뱉는 말들' 이라고 번역한 것은 언어학적 근거가 없다. 이것은 번역이 아니라 해석이다. 이와 비슷하게, '방언을 통역함'이라고 할 때 사용되는 동사도 언어를 통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고린도전서 14장이 전체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을 숭상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유치함과 같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고전 14:20) 성경의 하나님은 합리적인 분으로서 비합리성이나 불가해성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이러한 해석은 몇 가지 해석상의 문제점을 제기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과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을 예리하게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양쪽에 나오는 현상이 동일하다고 보는 논증, 즉 알아들을 수 없는 황홀경의 말들이 아니라 적어도 현장에 있는 일부 사람들(오순절 때처럼)에게는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들이었다는 논증의 강점을 생각할 때 그러한 문제점들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물론 고린도와 같이 여러 언어가 사용되던 항구 도시에서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 방언들을 통역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만일 이 은사가 결국 언어와 관련된 것이었다면 우리는 왜 바울이 그것을 목록의 끝에 넣었거나 또는 다른 세 곳에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이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마치 모세가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던 것처럼, 민 11:29).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은사는 좋은 것이며 사모할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언은 그 자체로서는 (다시 말해서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떠나서는) 덕을 세울 수 있는 특정한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경건의 삶에 도움을 받기 위해 방언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현대의 현상은 어떠한가?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있어서 방언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자유함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을 자유케 해주는 일종의 '심리적 해방감'을 맛보았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을 굳이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반면에 (고전 14장을 살펴볼 때) 바울이 통역 없이 회중 앞에서 방언을 말하는 것을 전적으로 금한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는 또한 말하는 자가 자신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개인적으로 방언 말하는 것도 강하게 저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3절은 종종 간과되는 구절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비생산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바울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는 자신이 '영으로' 기도하고 찬미하지만 또한 '마음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답변한다. 그는 마음이 적극적으로 개입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찬미란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어떤 독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의 맨 앞에 나오는 구절들에서 사도가 예언과 방언을 대조하면서 예언하는 자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반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말했으며, 따라서 사도는 개인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고 지적하고 싶어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결론이 바른 추론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두 가지 이유로 인해 나는 그러한 결론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첫째, 신약성경에서 '덕을 세우는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세우는 사역을 말한다. '오이코도메오'(oikodomeo)라는 헬라어는 문자적으로'세우는 것'을 의미하며 도시, 집, 회당 등을 세운다고 할 때 사용된다.이 단어는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교회에도 적용된다. 예수님은 “내가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18)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요" (고전 3:9)라고 말했으며, 베드로는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벧전 2:5)라고 말했다. 이러한 기본적인 뜻에서출발해서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을 '강건하게 하는 것, 확립하는 것, 덕을 세우는 것'에 사용되게 되었다. 누가는 팔레스틴의 교희가 “든든히 서 가고"라고 썼으며, 바울은 그의 사도적 권위가 "너희를 세우려고" 주어진 것이라고 썼다(행 9:31; 고후 10:8; 12:19; 13:10).이에 더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덕을 세우는 일”(롬 14:19)에 힘쓰고, “피차 덕을 세워야 한다(살전 5:11; 참고. 롬 15:2; 엡 4:29; 유1:20). 그리고 만일 누군가가 교회를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울은 '진리' (행 20:32 참고 골 2:7)와 '사랑' (고전8:1; 참고. 10:23)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세우는일에 대한 강조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현저하게 드러난다. 예언하는 자가 그의 메시지로 “덕을 세우는 것" (3-4절)은 물론, 회중 예배에서는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 해야 하고 (26절 : 참고. 17절), 모든 그리스도인은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해야 한다(12절 : 참고.5절). 이렇게 덕을 세우는 일에 대한 신약 성경의 일관된 강조를 생각해볼 때, 우리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말하는 단한 번의 유일한 예외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겠는가? 바울이 쓴 것은 분명 어느 정도 아이러니를 담고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문구는그 말 자체로 거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세우는 것은 결코 신약에서 말하는 덕을 세우는 것이 될 수 없다.

둘째, 우리는 이미 살펴본 대로 모든 영적 은사들은 봉사의 은사이며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으로서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한것이라는 가르침에 비추어 이 표현을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한 가지 은사만은 그 자체의 존립을 위하며 공동의 유익이 아닌 개인적유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이 은사를 잘못사용하는 것이라고 결론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가르침의 은사를 가진사람이 그 은사를 자신에게 개인적 지침을 주는 일에만 사용한다면, 또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자기 자신만 고친다면, 우리는 그러한 자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분명히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사를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따라서 이와 같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 내게는, 바울이 방언을 말하는 자가 자기를 세우는 것에 대해 쓸 때, 그의 목소리에는 조소까지는아니라 하더라도 일종의 풍자적 느낌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의 목적을 분명하게 설명했기 때문에 고린도교인들이 그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이해했고, 따라서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모든 ‘카리스마타’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다. 바울은 에베소서 4:11-12에서 이 원리를 가르치는 은사에 적용한다.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들에게 각각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가 되는은사를 주셨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무슨 목적을 위해서인가?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쓴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가르치는 자의 우선적인 목적은그리스도인들(성도)을 그리스도인의 성숙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사역으로 이끄는 것, 즉 교회와 세상에서 그들이 감당해야 할 사역을위해 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목사는 교사가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이 말은 그들이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사역을 마치 자신의것인 양 질투 어린 마음으로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그들은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신 은사를 그들이 잘 활용하도록 격려함으로써 사역들을 더욱 확대해 가는 사역을 맡은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그들은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온전한 연합과 성숙을향해 나아가도록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12-13절).

사도 바울의 마음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사로잡아야 할 이 영광스러운 목표는 진리와 사랑이라는 한 쌍의 영향력을 통해서만 성취될수 있다. 우리가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향해 범사에 자라가기 위해서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해야 한다" (15-16절). 진리는 그리스도인과교회들이 영적 성숙을 향해 자라가기 위해서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은 자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진리를 명확히 이해하고 꽉 붙잡지 않으면 우리는 “어린아이같이 되어 모든 교훈의 풍조에밀려 요동하게 되기 때문이다(14절). 그러나 진리는 사랑으로 따뜻해지고 부드러워지지 않으면 차고 딱딱해질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말한 것이다(고전 8:1). 우리는 모두 아이들의 건강한 정서적 발달에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가를 알고 있다. 만일 이것이 인간 가족에게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가족에게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는가? 그래서 영적 은사들을 말하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 사이에 고린도전서 13장이 있는 것이다. 모든 '카리스마타'가 봉사, 즉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위해 주어지지만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은사들이 사랑 안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랑 없이는 모든 은사가 제아무리 굉장하다 하더라도, 아무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13:1-3). 그래서 사랑은 가장 높은 은사보다도 더 귀한 ‘제일 좋은 길'이다(12:31). 그러나 우리는 은사와 사랑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필요가 없다. 이 둘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함께 속해있기 때문이다. 참 사랑은 언제나 봉사를 통해 나타나며, 특히 봉사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를 사용하는 데서 나타난다.

사실, 사랑과 진리가 함께하고 또 사랑과 은사들이 함께한다면, 사랑과 봉사 역시 함께한다. 참 사랑은 언제나 봉사를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은 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사랑, 진리, 은사, 봉사라는 네 측면을 가진 끊어질 수 없는 고리 또는 원과 같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사랑은 봉사를 통해 나타나고, 봉사는 은사를 사용하며, 가장 귀한 은사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고, 진리는 사랑 안에서 말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요소는 다른 요소들을 포함한다. 우리가 어디서 시작하든지 이 네 가지는 함께 작용한다. 그러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고전 13:13).

 

성령의 약속, 성령의 충만, 성령의 열매, 성령의 은사들

존 스토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