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복음으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요 = 신명기22;1-12(240407)

열려라 에바다 2024. 4. 4. 08:04

복음으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요 = 신명기22;1-12(240407) 한상원 목사

 

 

PW : 믿음                BIW : 자유를 누리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이다.

 

 

손자와 할머니

 

한 남자가 최근에 건강한 손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우울함이 날로 심해지자 보다 못한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야. 손자를 본 게 기쁘지 않은가 보네?”

글쎄 그것뿐이라면 좋은 일지지만, 앞으로 할머니와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네.”

자기 아내를 두고 할머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가 할머니가 되었으면 자기는 할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은 영원히 늙지 않고 항상 젊고 팔팔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이야 그럴 수 있지만 늙어가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가는 세월, 오는 세월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저도 해마다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는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따라서 주어진 순리에 합당하게 살면 됩니다.

늙어가는 자신 때문에 너무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늙으면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많이 받는 것입니다.

야곱과 모세가 나이가 점점 더 많이 들어갈수록 더욱더 하나님과 가까이하면서 영적인 사람, 성령의 충만한 영성을 지닌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나이를 하나둘 더 먹어가면서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으로 깊은 은혜를 누리면서 영감이 넘치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4.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는 가치관에는 정결과 부정이라는 가치관으로 살아간다.

성경도 정결과 부정이라는 두 상반된 가치관으로 기록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결은 하나님의 편이고, 부정은 하나님의 편이 아니라고 판정을 내려도 과언이 아니다.

정결한 삶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치관이라고 한다면, 부정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가치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잘 살아도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삶은 어떤 삶일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삶은 부자로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뛰어난 학문 지식을 지니는 것도 아니고, 아주 탁월한 지능이나 재능을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니고, 좋은 가문의 출신도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함, 온전함, 완전함, 의로움을 따라서 정결함을 지닌 사람만이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가 되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지 않고 부정하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삼아주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정결함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정결함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계실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결함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하시는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어떻게 다가오는 말씀일까?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D4

 

 습득한 분실물을 본 주인에게 돌려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사람은 주변 사람들과도 좋은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언제나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심하면 다시 안 볼 사람들처럼 원수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주변 사람들과 좋은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너무나 좋은 일이건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안타깝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주인을 잃은 소나 양이나 나귀나 의복이나 기타 여러 종류의 분실물을 만날 때가 있다.

소나 양이나 짐승을 키우는 목자들은 소나 양이나 나귀를 보면 그놈의 주인이 누구라고 알 수 있다.

우리들은 동물을 키우지 않기 때문에 그놈이 그놈인 것처럼 보이지만,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대번에 그 짐승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저는 식물을 키우는데 식물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집에 갔는데 내가 키우던 식물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면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

아마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저가 종종 외국에 나가서 그 외국인을 보면 정말 분간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동남아 여행을 가면 마사지를 받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내 몸을 1시간 이상 만지면서 마사지를 해 준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얼굴이라도 알아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유심히 그 마사지하는 사람을 본다.

때로는 말도 걸어 본다.

그런데 마사지를 마치고 그 가게에서 나오면 도무지 누가 누구인지 분간이 안 된다.

모두가 다 똑같아 보인다.

그래서 우리들은 분간이 잘 안된다.

 

그런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가족들, 이웃들은 누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챈다.

다른 사람들은 분별하지 못하지만, 가족들은 쌍둥이들을 분별해 낸다.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 누가 언니이고 동생인지를 분간해 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좀처럼 분간해 내기란 쉽지 않다.

짐승이나 여타 분실물들도 마찬가지이다.

목축업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인을 잃어서 떠돌고 있는 소나 양이나 염소나 나귀와 같은 짐승들을 보면 이놈이 누구네 짐승인지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주인에게 끌어다 주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짐승이 누구네 것인지는 잘 아는 데, 그 사람이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원수의 것이라면, 그래서 다시는 얼굴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 사람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의 것이라면, ‘올커니 잘 되었네. 그렇게 내 속에 박박 굵어되더니 잘됐네. 저거 찾느라고 고생이나 실컷 했으면 좋겠네.’ 하면서 방치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설령 그 분실물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원수의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 주인에게 찾아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 그 분실물의 주인이 누구네 것인지 모를 때는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가?

그러면 분실물의 주인이 찾아올 때까지 잘 관리하고 지켜주다가 주인이 찾아오면 그 주인에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말고 그대로 돌려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비록 싫어하고 미워하고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그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고, 나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게 생각하고 배려하고 도와주고 이해하면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5:43-4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게,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답게 배려하고 기도하고 섬기면서 살라고 말씀하신다.

 

 혼합하지 말고 정결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5절에서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고고고고고대 중동사회에서는 남자는 명예요 여자는 수치라는 가치관으로 살았던 시절이다.

남자가 여자 옷을 입는 것은 명예로워야 할 남자가 수치스러운 여자의 옷을 입음으로 수치가 된다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는 행위도 수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증스런 행위로 간주하는 것이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거룩하고 온전하고 정결한 것이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거룩한 여인 정결한 여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정결하고 온전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9절에서는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을 다 빼앗길까 하노라.”라고 말씀하신다.

포도원이 있는 목적은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포도주는 없어서는 안 되는 과일음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포도주는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하는 필수품이다.

반드시 필요한 포도주를 만들어야 하는 포도원에 다른 식물을 섞어서 심으면 포도 농사도 제대로 할 수 없고, 포도원에 심은 다른 식물 농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꼴이 되는 것이다.

포도원에 다른 식물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는 두 가지 농사를 해야겠다는 욕망 때문이다.

두 가지를 해야 더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겠다는 욕망이 둘 다 망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욕망은 하나님 앞에 선 언약 백성에게 정결과 거룩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가져오는 꼴이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부정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가치관이기 때문에 포도원에 다른 식물을 섞어 뿌리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정결하고 거룩하고 온전해야 하는 것이다.

 

10절에서는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라고 말씀하신다.

소도 밭을 갈 수 있고 짐을 나를 수 있고, 나귀도 밭을 갈 수 있고 짐을 나를 수 있는 동물이다.

그런데 소는 정결한 짐승이고, 나귀는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된다.

정결과 부정이 함께 동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소는 소끼리, 나귀는 나귀끼리 겨리하여 밭을 갈거나 짐을 나르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11절에서는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양은 짐승이고, 베는 식물이다.

양은 식물을 먹고 사는 초식동물이다.

양식으로 먹는 식물로 만드는 실과 그 식물을 먹고 살아가는 양의 털로 만들어진 실로 옷감을 만들어서 입는다는 것은 격이 맞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밭을 갈거나 짐을 나르는 목적은 같을 수 있다. 옷감을 만드는 목적도 같을 수 있다.

밭을 갈거나 짐을 나르는 목적과 목표는 같을 수 있지만, 목적과 목표, 꿈과 비전이 같다고 해서 모든 것들이 다 합당한 것은 아니다.

같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말씀이다.

옷감을 만들어 옷을 만들어 입은 목적과 목표는 같을 수 있지만, 목적과 목표가 같다고 해서 그것을 위해서 하는 일도 같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6:24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라는 명목으로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돈을 벌어야 하는 목적이 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은 언제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정결하게 살아야 하는데, 정결하게 살아야 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부정과 함께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혼합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완전하고 온전하고 정결하신 분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것들과 혼합하는 것을 싫어하신다.

하나님은 단순, 청결, 순박한 것을 좋아하신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잘 지켜나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6-7절에서 길을 가다가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 새가 그의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보거든 그 어미 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되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새의 어미와 새끼와 알을 동시에 보았다면 새끼와 알은 가져가도 되지만, 어미는 놓아주라고 말씀하신다.

알은 주워서 집으로 가지고 사서 먹을 수 있지만, 어미 새는 놓아주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어미 새까지 잡아버리면 더 이상 알을 낳을 수 없다.

어미 새를 놓아줌으로써 어미 새는 계속 알을 낳으면서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사역을 진행시켜 나갈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로든 번식하고 번창하고 번영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어떤 경로로든 번식하고 번창하고 번영하는 길을 가로막고 차단한다면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세계가 멈추어 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일꾼들의 안전을 지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8절에서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라고 말씀하신다.

난간을 만들어 세워서 일꾼들이 안전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현대말로 공사판에서 아시바를 튼튼하고 견고하게 잘 매어서 일꾼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을 하다가 일꾼이 다치게 되면 피를 흘리게 되는 것이고, 피를 흘리게 되면 부정하게 된다.

하나님은 부정한 상황을 싫어하시는 분이다.

 

 옷단술을 만들어 달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12절에서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겉옷 네 모퉁이에 술을 만들어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겉옷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증표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겉옷을 입으면 저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겉옷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래. 너는 내 언약 백성이로다.”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 겉옷 네 모퉁에 술을 만들어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술이 바로 찌찌트(tzitzit)”라는 옷단술을 가리킨다.

옷단술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반드시 지켜야 할 613개의 율법을 의미한다.

613개의 율법에는 긍정적인 율법이 248개이고, 부정적인 율법이 365개이다.

그래서 겉옷에 옷단술을 매어 달고 입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613개의 율법을 잘 지키는 백성입니다.라는 신앙고백과 같은 의미이다.

613개의 율법을 잘 지키는 언약 백성이라는 증표로 옷단술을 매단 겉옷을 입는 것이다.

옷단술을 맨 겉옷을 입고 있으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려는 마음을 가진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당연히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겉옷을 입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서 예외 되는 것이 아니다.

겉옷을 입지 않았을 때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고, 겉옷을 입어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겉옷을 입었을 때와 겉옷을 입지 않았을 때의 느낌은 달라지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겉옷을 걸침으로서 하나님 앞에 선 자신들의 삶이 달라지듯이, 신앙인들이 종종 예배를 위해서 성의라고 하는 가운을 입으면 몸가짐과 태도와 자세가 달라지는 것이다.

어쩌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성의지만, 목사 가운 입으면, 장로 가운을 입으면, 찬양대 가운을 입으면, 헌금위원들이 가운을 입으면 뭔가 달라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좀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온전하고 정결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겉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신앙인들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으로 만들어지는 믿음의 옷, 의의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L4 & B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결함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라고 요구하시는 말씀은 율법이다.

율법은 그림자, 모형이다.

그림자, 모형은 실체를 보여줄 때까지만 필요한 것이다.

실체가 나타나면 더 이상 그림자나 모형은 필요치 않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은 613개이다.

613개의 율법 중에서 긍정적으로 “000하라라는 율법이 248개이고, “000하지 말라라고 부정적인 율법이 365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613개의 율법을 단 하나도 빼놓지 다 지키면 의인이요 정결한 자라고 인식한다.

613개의 율법 중에서 단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그 지키지 못한 하나의 율법 때문에 의인이 되지 못하고, 정결하지 못하고 부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율법에서는 율법이 정한 계명을 단 하나도 예외 되지 않고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만 의로운 삶을 산 사람, 의인이 되는 것이다.

의인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의인이 아니면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을 단 하나라도 예외 되지 않고 모든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사람은 지구촌에 생존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아무리 613개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려고 해도, 어쩌다가 613개 중에 하나라도 지키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613개의 율법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율법을 지킴으로 의인이 되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심으로 구원을 베풀어주셔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여 보내주심으로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이 지켜야 할 613개의 율법을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지켜주심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5:17-18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시는 분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길이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율법으로 인하여 속박을 받아야 할 이유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으로 이제는 더 이상 율법으로 구속하거나 속박하거나 징계하거나 저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8:31-32에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8:36에서도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누가복음 4:18-19에서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율법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지 못한다.

오직 하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고백하는 삶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의 복음으로 이제는 율법에서 완전히 해방받은 것이다.

율법에서 해방됨으로 이제는 완전한 자유,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참된 자유,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만 진리 안에서 복음으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복음을 벗어나면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 되어버린다.

자유는 죄가 아니지만, 방종은 죄가 될 수 있다.

자유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지만, 방종은 징계와 심판과 멸망을 초래하는 지름길이다.

 

그러기 위해서 언제나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 보혈과 복음의 길은 내가 가야 할 길을 우리 예수님께서 나 대신에 걸어가신 길이라고 확신해야 한다.

예수님과 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한 몸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과 나는 한 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내가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결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했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온 인류의 율법과 죽음과 죄와 사탄의 올무에서 이제는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주신 예수그리스도와 한 몸, 한 유기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는 고백이 다른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바로 나의 고백임을 확신해야 한다.

그럴 때에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인, 완전한 자유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믿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으로 이루어진 진리로 자유함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진정한 자유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하나님 말씀 따라 살아나기 http://cafe.daum.net/GRACEOFJES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