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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 시대의 주요 도시들

열려라 에바다 2024. 4. 11. 16:31

정착시대의 주요 도시들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부터 광야의 무법자로 등장하였다. 이방 족속들은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을 일컬어서 하비루라고 불렀다. 그들은 하비루의 출현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하비루들은 전능하신 야훼 하나님의 보호하에 막강한 기동력과 용감성을 발휘하면서 점점 가나안의 영토들을 장악해 나갔다. 이에 이방 족속들은 하비루들이 전진하는 것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주요 자료는 텔 엘 아마르나의 서신들에 기록되어 있다. 그 서신들은 야훼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든 족속들을 진멸하면서 가나안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는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증거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이스라엘을 근동에서 가장 막강한 민족으로 성장시키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반면에 이스라엘이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되는 원인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쇠퇴에 기인하였다. 이스라엘의 단편적인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은 모든 인생과 사건의 주관자이시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벌과 토지 분배라는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먼저 그는 가나안의 입구에 위치한 여리고를 점령하고 이어 아이를 점령하였다. 이후 기브온과 평화조약을 맺자 남방의 연합군이 기브온을 치려할 때 여호수아는 그 연합군을 아세가까지 추격하여 대파하였다. 이어 북쪽 지방을 점령할 때에도 하솔을 중심으로 가나안의 토착 세력들이 동맹군을 형성하여 한 곳에 '해변의 모래와 같이' 모여 있는 것을 무찔렀다. 남쪽과 북쪽의 동맹국 형성은 여호수아의 정복 활동에 크게 도움을 준 결과를 초래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할 때까지 주위의 주요 도시들이 존재해 있었다는 것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입증해 줌으로써 성경의 사건이 사실임을 알게 해준다.

 

 1. 여리고(Jericho)

 

 여호수아 6장은 여리고 성이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일시에 무너져 내린 것을 증언한다. 고고학적 업적은 이 기록을 고증하였다. 성경의 여리고는 현대의 여리고의 북서쪽 약 1.6㎞ 정도의 지점에 있었다. 가르스탱(J. B. E. Garstang0은 1941년에 여리고를 탐사하고 이 성이 주전 1400년경에 일시에 무너졌다고 했다. 그가 1400년으로 연대를 잡은 이유는 아멘호텝 3세의 이름이 새겨진 애굽의 보물과 1400년경에 수입된 것으로 보여지는 미케네 형태의 도기들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케년(K. M. Kenyon)은 주전 1400년 이후로는 이곳에 주거의 흔적이 없음을 간파하였다.

 

 2. 아이(Ai)

 아이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엣델(et-Tell)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그 이유는 여리고의 서북서 18㎞에 위치해 있으며, 여리고보다 975m 높고 북쪽은 골짜기가 있고 서쪽은 갈라진 틈이 많은 구릉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아이와 지리적 묘사가 매우 흡사하다. 1935년에 크라우스(J. Marquet-Krause), 1964-1972년에 콜어웨이(J. A. Callaway)에 의해 발굴되었다. 아이는 주전 3000년경에 번창하였으나 주전 2400년경에 아모리인에 의해 파괴당하였고, 다시 재건되었다가 후기 청동기 시대인 여호수아의 가나안 침입 때에 파괴된 고고학적 증거를 나타낸다.

 

 3. 텔 엘 아마르나(Tell el-Amarna)서신

 

 여호수아 9장 이하에는 여리고와 아이와 벧엘의 함락 이후 남방의 가나안 왕들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이스라엘과 대항하는 기사가 나온다. 이것은 아마르나의 서신에서도 나온다. 아마르나의 오늘날의 이름은 아크헤톤(Akhetten)이다. 카이로 남쪽 320㎞ 지점에 그 폐허가 남아 있으며, 주전 14세기경의 이집트 왕 아멘호텝 4세(Amenhotep IV) 치하 이집트 수도였다. 아마르나 서신의 중요성은 1887년 우연히 발견된 점토판에 설형문자로 새겨진 다량의 서신들이 성경 연구에, 특히 출애굽 시대의 팔레스틴의 정세를 확인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오늘날 확인된 점토판은 약 380개이다. 그중의 대부분은 주전 14세기경에 이집트의 바로인 아멘 호텝 3세와 4세에게 아시아 지역의 여러 지배자들이 보낸 편지이며, 그중의 절반은 팔레스틴과 시리아 지방에서 온 편지이다. 이 편지들은 이집트의 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된 이후의 아시아 지역의 내부적인 갈등과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틴에 정착할 때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 준다. 세겜의 라브아유(Labayu)는, 반유목민인 하비루(Apiru-이들은 그 편지에서 '소규모의 무장 집단'<small armed band>이라고 칭해졌다)와 동맹을 맺고, 중앙 고원지역에서 영향력을 확장시켜 가고 있었다. 이들 하비루들의 활약상은 인근의 많은 도시로 부터 보고되어졌다. 여러 도시의 왕들은 팔레스틴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 반유목민인 하비루족들의 위협에서 구원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특히 예루살렘 왕 아브디 히바(Ab야-Hiba)의 편지에는 하브루가 도시의 왕들을 쳐부수고 있는 것을 진술하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많은 이들은 이들 하비루가 여호수아의 영도하에 가나안을 침략한 히비르인들이라고 주장한다.

 편지에는 야느하무(Yanhamu)라는 이집트의 고관 이름이 나오는데, 이 사람을 요셉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이 이름이 셈족 계통의 이름이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 사람은 바로의 시리아 정복시에 식량이 부족할 때 곡물 조달을 책임맡았던 사람이다. 대부분의 편지들은 악카드어의 서셈어로 쓰여졌다. 이것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이전의 가나안어의 흔적을 보여 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4. 게셀(Gezer)

 

 게셀은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길에 위치해 있다. 주전 1468년경에 애굽의 투트모스 3세(Thutmosis III)에 강한 저항 끝에 굴복한 후 속국이 되었다. 게셀에서부터 온 아마르나의 서신에 의하면 게셀은 14세기까지 바로에게 원조를 요청하며 복종하였음을 보여 준다. 이후 레위지파의 도시로 되었으나(수21:21), 애굽의 메르넵타(Merneptah)는 일지에 다시 이곳을 정복하였음을 기록한다. 고고학은 주전 1200년경에 이곳이 블레셋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아마도 애굽의 지배를 받은 블레셋의 통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사실은 다윗이 이 지역에서 블레셋과 전투하였다는 삼하5:25의 기록을 증거해 준다.

 

 5. 하솔(Hazor)

 

 여호수아 11장은 이스라엘이 하솔을 점령하고 불살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솔은 북팔레스틴의 중심지에 위치하였으며, 그 왕은 야빈(Jabin)이었다. 하솔은 그 정치적인 영향력으로 인하여 불에 태워진 유일한 성읍이었다. 그러나 삿4:2은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이 이스라엘을 위협했음을 기록한다. 하솔에 대한 대대적 발굴은 1955-1958년에 이스라엘 발굴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중요한 점은 하솔이 상부와 하부의 2개 도시로 나누어진다는 점이다. 상부 도시는 주전 27세기경부터 계속적으로 거주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하부 도시는 주전 18세기에서부터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주전 14세기경부터는 큰 화재와 함께 더 이상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 하부 도시의 폐허는 여호수아의 정복으로 인한 것으로 돌려지며, 사사기 4장의 하솔은 상부 도시에 거주한 가나안인으로 판명되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은 초기에는 성공, 후기에는 실패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여호수아의 지도에 따라 하나님께서 순종한 초기의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들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많은 성읍과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성경의 기록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 백성이 주위의 여러 나라와 성읍들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들을 대적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받았다는 것을 위의 고고학 증거들을 통해 알 수 있다.

 

 

  1. 팔레스틴 지역의 고고학적 발견

 고고학적 발굴에서 가나안에 대한 연구 분야가 획기적으로 마련된 계기는 20세기에 들어선 이후였다. 특히 1890년 텔 엘-헤시(Tell el-Hesi)에서 플린더즈 페트리 경에 의해 착수된 발굴 작업 덕분으로 팔레스틴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새 시대를 맞게 되었다. 그 이후 줄곧 게셀과 다아낙과 므깃도와 여리고에 대한 탐사가 있었으며, 세계 제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에 벧산과 여리고, 므깃도, 라기스, 텔 엘 야술, 텔 베이트 미르심, 벧세메스, 벧엘, 아이, 벳여라, 하솔, 세겜과 같은 중요한 유적지들이 발굴되었다. 계속해서 세계 제2차 대전 이후에 벧엘, 도단, 기브온, 하솔, 여리고, 카실레, 세겜, 디르사가 발굴되고, 아울러 요단강 동편에 있는 디본과 아로엘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요르단의 가타 다른 여러 유적지들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지역에서의 모든 발굴들은 팔레스틴에서 이룩되었던 정착민 가나안인들의 당시 물질 문화 등의 발전 과정을 탐색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이 모든 고고학적인 중요 자료들을 종합 정리하는 작업들이 영국의 학사원에 있는 슈바이크재단(Schweich Le-ctures) 소속의 케년 박사(Dr, K. M. Keynon)에 의해 최그 착수되었다.

 

 2. 아마르나 문서에 나타난 당시의 문화

 1887년 농사를 짓는 한 여인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양편에 쐐기글로 된 아마르난의 토판들은 초기 예루살렘에 대한 성경외의 참고 자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가나안은 비록 정치적으로 혼란 가운데 있었으나 문화적으로는 대단히 높은 수준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 토판에는 구리, 주석, 금 그리고 은 등을 언급하고 있으며 또 가나안인이 뽕나무라든가 감람나무, 곡물등을 식물로 생산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수도를 중심으로 삼아 각 지방 도시들을 요새화하였고, 그외에 도시와 부락들이 있었다. 아마르나 문서에 의해 탐색된 가나안에 대해 첨언한다면 이 문서에는 바벨론과 미티니 그리고 헷 왕들로부터 발신된 편지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문서의 대부분은 여행이나 선물의 교환, 왕궁의 결혼 등을 다루고 있다. 주로 서신들로 분류되는 아마르나의 문서들은 주전 14세기 당시의 가나안의 상태를 우리에게 잘 보여 주는데, 곧 그 지역이 비록 애굽에 예속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그에 종속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아마르나의 문서들 중에는 바벨론과 애굽간에 주고 받았던 문서도 발견되는데, 족장 시대의 성경 기록에 의거한 증거와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3. 이집트의 연대기 측정 기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명과 고고학적 유적 발굴에서 발견된 문헌상의 이름을 일치시키는 작업이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그러한 고고학적 문헌에서 특별히 애굽(이집트, Egypt)의 고관 이름들이 빈번히 거론될 때나 반복될 경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는 일은 필수적이며, 연대표를 만들어 내는 작업은 더욱 그러하다. 이집트 왕조 연대표는 B.C. 3세기에 이집트 출생의 제사장 마네토에 의해서 작성되어진 고대의 고안물이다. B.C. 3000년경 메네스 치하의 이집트 통일에서부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제에 의한 이집트 정복까지의 기간에 걸쳐 그의 31왕조는 오늘날 역사가들이 편리하게 쓰고 있고, 번영기와 쇠퇴기를 기준으로 한 시대를 명명(命名)하는 데 척도가 되고 있다. 연대를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 이집트인들은 고대의 다른 여타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술어로 연대를 표현하는 방법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공문서의 연대를 작성할 때 대개 즉위 기원과 절기에 의거해서 적어 나갔다. 그들은 한 해를 세 계절로 나누고, 다시 한 계절을 넉 달로, 다시 한 달을 30일로 분할하였다. 이렇게 해서 360일을 성립시켰고 이것은 여러 신들의 탄생일로 간주한 5개의 윤일(閏日)에 의해 보충되었다. 때로는 역사적 문서의 연대를 기록할 때 소틱스 주기(Sothic cycle)로 알려져 있는 1460년 경의 주기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소틱스 주기에 의거한 연대들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현대적 책력의 술어에 의거한 확실한 시기로 환산이 가능하며, 따라서 오늘날에도 이집트의 역사에서 천문학적으로 확정되어진 연대들을 다소간 확보하고 있다. 이상(以上)에 더하여 농업과 유사한 실제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이 범람하는 규칙성에 의거해 계절력을 만들어 사용했으며, 세 계절의 이름마저 농업적인 용어들로 이름지었다.

 

 4. 하솔 발굴 작업의 정황

 1955년에서 1958년까지 4년에 걸친 하솔에 대한 대규모의 발굴 작업들이 히브리 대학교의 요청을 받은 이가엘 야딘의 지휘 아래 추진되었다. 네 차례에 걸친 발굴 기간 동안에 언덕 윗 지대(상부도시)와 언덕 아래 장방형 대지(하부도시)의 두 장소 모두에서 여러 흔적들이 발굴되었다. 이들 상부도시와 하부도시의 모든 발굴층들에는 각각의 고유 번호가 매겨졌다. 그 후 또 다시 1968년 여름에는 다섯 번째의 발굴 작업이 추진되었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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