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당
열심당(1)- 개념 설명/ 서론적 소개
Ⅰ
‘열심’(zeal)과 ‘열심당’(zealots), 이 두 개념에 대한 연구는 후기 제2성전 시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마카비 전쟁기(167-142 BCE)부터 유대인의 對 로마항쟁기(CE 66-74)까지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9-20세기에 와서 ‘열심당’은 하나님과 율법에 대한 ‘열심’에 뿌리박은 경건의 한 모델을 지칭하는 전용어가 되었다(Kohler 1905; Farmer 1956; Hengel 1956). ‘열심당’이라는 이 용어는 외국의 통치, 특히 로마 통치에 대항하던 매우 과격하고 호전적인 유대인 반항자들을 지칭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또한 특별하게 사용되던 용어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용어는 한층 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용어는 눅 6.15; 행 1.13에서 예수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어 있는데, 그는 시몬 베드로와 구별하기 위하여 열심당 시몬이라고 지칭되었다.
또한 이 명칭의 아람어형은 ‘카나나’(qan'ana)이다. 이 단어의 원형인 ‘카나’는 ‘시기하다’라는 뜻으로서, 열심당 멤버들은 하나님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우상숭배와 배교와 그 밖의 율법위반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분노와 심판의 대행자로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게 바쳤다[‘질투’와 ‘열심’은 동일한 히브리 어원을 지니고 있다].
이 용어는 로마의 통치에 대항하여 싸웠던 유대 저항자들이 그들 자신을 지칭했던 용어로서, 근래의 연구에서 이 용어는 갈릴리 사람 유다로부터 시작하여(6 BCE) 마사다 요새 방어자들의 자결로 종결된(CE 74) CE 1세기의 저항운동에 가담했던 전 집단의 명칭으로 해석되고 있다.
Ⅱ
열심당의 기본적 동기를 형성했던 ‘열심’의 신학은 이스라엘의 유일하시고 참된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인 예배에 근거한 것이었다. “나, 너희의 주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며, 율법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주어졌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함으로써 하나님의 질투를 야기 시켰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진노를 내리셨다.
따라서 열심당의 행위는 예방의 의미를 지닌 화해적이며 보상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열심당은 암세포를 잘라내는 외과의사처럼 날카로운 검으로 배교자들을 이스라엘에서 근절시켰다. 틀림없이 마카비 시대에 일어났던 이스라엘의 계약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그의 율법에 결부되었을 때, 우리가 그리스-로마시대에 기승을 떨쳤던 것으로 알고 있는 열심주의의 기초가 다져졌는데 열심당은 율법의 엄격한 해석자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심”을 지키는 데 있어서 죽음도 불사했었다(참조. 행 22.4)-즉 그들은 이방인들을 살해하고자 했으며 또한 율법을 범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자청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경우에는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인하여 그의 동족 이스라엘인들까지도 기꺼이 살해하고자 했었다.
CE 70년과 135년의 커다란 민족적 패배 이후, 이 열심의 신학은 유대교의 영적 지도자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제한되었다. 이 신학은 랍비 유대교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이방인들에 대한 관계를 지배하는 유력한 신학적 주제로서 ‘샬롬’(Shalom, 평화)으로 대치되었다. 그리고 이 열심은 기독교에 있어서 새로운 신학에 어울리는 용어로 재정리되었다(참조. 고전 14.12; 딛 2.14; 벧전 3.13; 계 3.19).
열심당(2)- 열심당의 전형
*열심당의 전형(A)-시므온/ 레위/ 비느하스/ 엘리야(포로기 이후의 유대교)
가. 시므온과 레위-시므온과 레위는 야곱의 아들들로서 하몰의 아들 세겜이 그들의 누이 디나를 욕보인데 대한 보복으로 세겜 사람들을 살육한 자들이었다(창 34.4f).
나. 비느하스-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하나님을 위안하고 죄를 속한다는 개념은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열심당의 열광적인 태도와 잔혹함의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마카비 상에서 비느하스는 “그가 심히 열심이었던 까닭에” 마따디아와 그의 아들들의 조상으로 선정되어 있으며(2.54), 시 106편에는 비느하스에 관한 기사가 모압족속의 신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은 이스라엘인들의 죄악에 대한 그의 열성적인 행위로 기술되어 있다.
다. 엘리야-엘리야는 모든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라고 명하였다(왕상 18.40; 19.10-14). 이러한 그의 처사는 후대의 유대 전승에서 ‘열심’으로 인한 행위로 해석되었다.
*열심당의 전형(B)-열심당원 시몬
열심당원 시몬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이전에 아마도 율법에 대한 열심에 있어서 비느하스-마카비 노선이었던 어떤 <열심당류의> 집단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이 당시의 역사서에는 CE 1세기 동안에 팔레스틴에 이와 같은 집단들이 수없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또한 이 집단들이 폼페이 시대 이후로 계속되어온 로마에 대한 민족적 저항운동의 핵심을 이루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음을 지적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열심당의 전형(C)-바울
바울은 크리스천이 되기 이전에 열심당의 한 전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열심의 신학에 입각하여 행동하였다. 바울이 교인들에게 언급한 기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었으나”(갈 1.13-14),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빌 3.6).
사도행전의 보도에서도 바울이 ‘열심’인 자로 드러난다. “나는 유대인으로 …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열심하는 자라”(행 22.3). 또한 바울은 그의 회심에 뒤이은 하나님께 대한 고백을 상기할 때,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라고 진술한다(행 22.19).
율법에 대해 열심히 있는 것에 대한 바울의 판단은 이스라엘인들이 율법에 입각한 의를 추구한다고 보는 그의 논의에 제시되어 있다. “형제들아 … 이스라엘 …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1-3).
열심당(3)-정체
‘열심당’이 반로마 항쟁에 참여했던 모든 유대의 혁명가들에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다양한 저항운동 중 하나의 분파적 행동에만 해당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가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비록 로마 저술가들의 문서들이나 랍비 문헌 가운데 혁명가들에 대한 언급이 간간히 여기저기 나온다. 그러나, 열심당의 정체에 관한 논의는 유대 출신 요세푸스의 저작들에 해석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그의 저작들은 이 시기 팔레스틴의 포괄적인 역사를 기술한 현존하는 유일한 문서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열심당에 대한 요세푸스의 분류
왕실의 역사가로서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을 다루는 세 권의 책을 저술했다:
<유대전쟁사>(The Jewish War, CE 75-80년)
<유대고대사>(The Antiquities of the Jews, CE 93-95년)
<생애>(Life, CE 95-100년): 자전적 저술
학자들은 요세푸스의 이 저작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특히 요세푸스 그 자신이 관련된 사건들에 대한 진술에서 더욱 그러하다. 요세푸스는 처음에는 유대 편에서 전쟁에 참여했다가 나중에는 로마 편으로 투항한 경위를 변증해야 했다. 게다가 그는 개인적으로 유대의 혁명가들과 갈등관계에 놓여 있었기에 그들을 비난하려 했던 것을 배제할 수 없다. 요세푸스의 저작들은 공정한 사실의 서술이라기 보다는 일정한 편견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그는 로마의 공식적 입장에 의거해서, 전쟁의 여파로 로마에 저항감을 갖게 된 바르티아 제국 내 유대인들을 설득하려는 목적에서 <유대전쟁사>(The Jewish War)를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전쟁의 책임을 극소수의 분파적 유대인과 몇몇 부패한 로마인 박해자에게 지움으로서 유대인 일반과 로마인 일반을 면책하고자 한다. 요세푸스는 자신의 각 저작마다 다른 목표와 다른 독자를 대상으로 작업을 했던 것이다.
요세푸스는 전쟁기간 그 당시에 활약했던 다섯 부류의 저항집단들을 다음과 같이 시사한다(The Jewish War): 시카리, 열심당, 기살라의 요한과 그의 추종자들, 시몬 바르 기오라와 그의 추종자들, 이두메인들. 이 분파들은 기원, 목표, 방식, 지도력의 유형, 구성 등에 있어서 서로 구별된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은 공동의 적에 대항하는 데 있어서 서로 협력하지 않았으며, 서로 갈등관계에 있었다.
(1) 시카리(The Sicarii) - 소위 시카리라고 불렸던 집단(이 명칭은 단검을 지닌 자를 의미하는 라틴어 Sicarius에서 유래된 명칭으로서 자객을 의미한다). 추정컨대, 이 집단의 창설자는 CE 6년에 시행된 인구조사에 대해 저항운동을 지휘했던 갈릴리 사람 유다였을 것이다. 이들은 전쟁초기에 그들의 지도자인 므나헴이 암살당하자 마사다 요새로 후퇴하였으며 거기서 집단 자결함으로써 그들의 저항운동의 마침표를 찍었다(CE 74년). 그러나 요세푸스는 전쟁이 끝난 후에 이집트로 도주한 유대 난민들을 지칭하는 데도 시카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2) 열심당(The Zealots) - 이 용어는 극히 영예로운 명칭이다. 열심당은 하급사제들, 예루살렘의 반란군 및 전쟁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하여 CE 68년 임시정부를 전복시킨, 시골에서 도주한 도적 집단들 등의 연합체를 말한다. 이들은 로마로부터의 정치적인 독립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유대의 권력층과 특권층을 공격하였으며, 성전에 자신들의 본부를 설치하고는 대안적인 평등주의적 정부를 구축했다. 그러나 열심당은 로마와의 실제 전투에서는 별 기여를 하지 못했다.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지휘 아래 예루살렘 성전 인근을 점유했던 집단이 그들 자신을 지칭했던 명칭으로 추정된다.
(3) 기살라의 요한(John of Gischala) - 이 집단은 갈릴리에서, 민족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싶어했던 요세푸스에게는 주된 경쟁자였다. 요한에게는 사회적 급진주의나 묵시적 희망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 전쟁의 와중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된 자로 나타난다. 이 집단은 전쟁 동안에 열심당에 합류하였으며, 때때로 예루살렘에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The Jewish War, Ⅳ.5.3).
(4) 기오라의 아들 시몬(Simon bar Giora) - 시몬 바르 기오라는 하층계급의 대변자였다. 그는, 다윗처럼, 무명의 상태에서 등장하여 온 민족의 지도자로 부상한다. 이 집단은 남유다에서 활약하였는데 예루살렘 주민들은 그들에게 열심당을 도와 싸워줄 것을 요청하였다.
(5) 이두메인들 - 이 집단은 처음에는 열심당과 그 다음에는 부분적으로 기살라의 요한 일당과 마지막에는 기오라의 아들 시몬 집단과 손을 잡았다(The Jewish War, Ⅳ.4.1, 9.5, 9.11; Ⅴ.6.1).
열심당(4)-예수는 열심당이었는가
*누가복음 22장 36b절-“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마태복음 10장 34절-“내가 세상에 … 검을 주러 왔노라”
예수는 열심당이었는가? 일군의 사가(史家)들은 나사렛 예수가 열심당(Kautsky; Eisler 등) 또는 열심당에 우호적인 사람(Brandon)이었다고 전제해 왔다. 이러한 견해는, 평화의 화신으로서의 예수상은 복음서가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며, 예수는 혁명가였다는 이유로 로마인들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주장에 토대를 둔다. 또한 그 외에도 열심당원인 시몬이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다는 것(눅 6.15)과 예수가 제자들에게 검을 사라고 권고한 것(눅 22.36; 참조. 12.51)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실제의 예수는 혁명가였다는 주장에 기초한다.
반면 다른 일군의 사가들은 예수는 자신의 사상 속에서는 혁명가였지만, 열심당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고 주장한다(Hengel; Edwards). 이는 그가 폭력을 거절하는 대목(마 26.52), 로마를 위해 세금 징수에 종사하는 유대인들을 받아들인 부분(막 2.15-17),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부분(마 5.44; 눅 6.27-31, 35)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가들은 예수가 열심당원이냐 아니냐의 관점에서 예수를 보려 함으로써 시대착오의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반면 유대교가 매우 다양한 종교현상이고, 로마에 대한 저항 유형도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으며, 예수를 다양한 집단들, 곧 바리새인들, 행위예언자들, 열심당, 제4의 철학 및 기타 다른 집단들 등과 비교, 대조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가 열심당원이냐 아니냐라든가 또는 정치적이냐 아니냐라는 식의 질문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그의 보다 큰 비전과 이를 위한 그의 전술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또한 예수와 동시대 사람들의 시대가 끝날 무렵에야 로마와 유대간의 전쟁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관점에서 예수에 관해 물어야 할 것이다.
말을 바꾸면, 예수는 부의 불균형과 당국자들의 권력 남용에 반대하는 다른 혁명가들과 견해를 같이하였으며, 부와 권력의 평등한 분배 모델에 기반한 민족 생활의 모든 차원에서의 갱신을 부르짖었다(Horsley). 그러나 예수의 혁신 프로그램은 민족의 정서를 전쟁을 향해 고양시키는 이데올로기, 부정한 것으로부터의 민족의 분리주의를 조장하는 이른바 정결성의 이데올로기를 지향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의 이데올로기는 자비를 통해서 정결성을 확장시키는 데 목적으로 둔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억압과 배제를 통해서가 아닌 치유와 용서 그리고 성전과 토라의 갱신을 통해 부정한 것을 변혁시킴으로 이 땅 위에 정결함을 불러들이는 데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Borg). 예수에게 있어 율법 해석의 근본 원리를 살펴보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며, 더 나아가 원수를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에 있다(막 12.28-34 등).
열심당의 중심되는 이론은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신인(神人) 상호 협동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비록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언급하셨지만, 그는 은밀하게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막 4.26-29)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도움이 없이 그의 나라를 실현하실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셨다. 열심당이 결성된 계기가 된 사건은 CE 6년에 있었던 인구조사였다. 그러나 막 12장 14절의 질문에 대해 예수는 17절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대답하셨다. 이러한 예수의 대답은 열심당의 세금불납운동을 거절하신 것과 다름아니다. 열심당은 그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자들은 누구나 엄히 멸절시켜야만 한다고 믿었지만, 예수는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을 요구하셨다(마 5.43-48; 눅 6.27-28, 32-36).
비록 예수의 사후(死後)에 이르러서야 그를 추종하던 몇몇 유대인들이 율법에 열정적이었고(행 21.20), 대 로마 전쟁에 참여했을지라도 초기 크리스천들 대다수는 예수처럼 폭력에 반대했고 유대-로마 전쟁에도 불참했다. 복음서 기자들, 바울, 묵시록의 기자를 비롯한, 현존하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어떤 문서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표시로 무장혁명을 주장하는 내용은 없다.
이와 같이 예수의 가르침과 열심당의 비전과의 간극을 잇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예수는 열심당이었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은, “예”보다는 “아니오”가 더 타당할 것 같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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