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직(使徒職)
이 말이 성경에서 쓰이는 예는 신약에만 국한되어 있는데 거기서 이것이 79회 나온다. 곧 복음서에서 10회, 사도행전에서 28회, 서신에서 38회, 그리고 계시록에서도 3회 나온다. 영어 Apostle은 아포스테레인에서 온 헬라어 아포스톨로스에 대한 음역이다. '보내다'를 의미하는 여러 단어들이 신약에서 사용되고 있음에 반하여 '급파하다', '석방하다', '가게 하다'와 같으니 의미를 나타내는 아포스텔레인은 위탁의 요소들, 곧 보내는 자의 권위와 그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바로, 일정한 임무로 보냄을 받은 자이며 그는 이러한 임무에 따라 보낸 자를 대표하여 완전한 권위를 갖고 행동할 뿐 아니라 그는 이러한 권위를 해명할 의무가 있다.
이 단어가 명사로는 70인역에서 단 한번 나온다. 여로보암의 아내가 자기 아들의 건강을 물으려고 아히야에게 왔을 때 선지자 아히야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나는 흉한 소식을 네게 보냄을 받았노라". (왕상14:6). 여기서 아포스톨로스는 히브리어 솰루아흐를 나타내는데 이것은 유대교에서 다소 전문적인 말이 되었다. 솰루아흐는 예배 중 회당의 회중을 인도했던 자일 수 있으며 따라서 이것은 그러한 회중이나 공식적인 일로 보냄을 받은 사헤드린의 대표자를 의미했다. 제사장직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두드러지게 행동했던 구약의 몇몇 걸출한 인물들도 이 말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솰루아흐에는 신약 아포스톨로스와 관련된 전도의 강조에 대해 어떠한 예시도 없다.
<1> 그리스도
히브리서 3:1에서 예수는, 유대교가 솰루아흐이란 말을 사용한 모세와의 의식적인 대조로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라 불리워진다. 예수는 모세가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욱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말씀하셨다. 그는 거듭, 자신이 아버지에 의해 보냄을 받았다고 주장하셨다.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를 보내셨던 것처럼 그의 택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낸다고 선언하셨을 때 우리 주는 사도직 위에 가장 높은 위엄을 부여하고 계셨다. (요17:18)
<2) 열 두 사람
이들은 복음서에서 가장 빈번히 "제자들"이라 불리워지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사역기간 동안 그들의 주된 역할이 그와 함께 있어 그에게서 배우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쫓아내도록 그들에게 그의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또한 사도들이라 불리워지기도 한다(막3:14, 15; 6:30). 바로 이러한 활동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던 동안에만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도란 말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 이러한 상황은 변하였다.
열 둘이란 수는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상기시키지만 그러나 이 말의 주된 근거는 더 이상 육신적인 지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며 영적인 것이다. 확실히 사도들의 집단의 수에 있어 정해져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오는 세상에서 열 두 보좌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19:28; 참조, 계21:14). 유다가 맛디아로 교체되었지만(행1장) 그러나 그후, 죽음으로 끝나는 사도들을 계승시키기 위해 사람을 선출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행12:2)
사도들은 영적 은사의 목록에서 첫째로 언급된다(고전12:28; 엡4:11). 이러한 모든 은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성령을 통하여 부여되기 때문에 사도 시대의 초기에, 예수에 의해 임명받고 그에 의해 훈련받은 자들이 이제, 초기 명칭(제자)이 그 예비였던 그들의 사역에 대해 새롭고도 영속적인 명칭에 따라 두번째 직위(사도)를 소유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자신의 기초에 버금간다는 의미에서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엡2:20)
사도들의 의무는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며 지도하는 일이었다. 그들의 설교는 그리스도와 그들의 연합과 그로부터 받은 교육에 근거하였으며, 그리고 그것은 그의 부활에 대한 그들의 증언을 포함하였다(행1:22). 그들의 개종자들은 즉시 그들의 가르침을 받았는데(행2:42) 그들의 가르침은 아마 주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회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며 성령의 계시에 의해 증가되었다(엡3:5). 치리면에서 그들의 역할은 다양하였다. 대체로 말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인들 공동체의 생활과 복지에 대해 책임이 있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주의 성찬에서 기념될 때 예배를 주도하였다. 그들은 신자들이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 기부한 공동 기금을 관리하였으며(행4:37) 이러한 일이 결국 번거롭게 되자 이를 책임맡도록 특별히 선택된 자들에게 위임하였다(행6:1-6). 훈련 방법이 그들의 손에 있었다(행5:1-11). 교회가 점점 자라나 널리퍼지자 사도들은 그들 흩어진 신도를 더욱 더 주의깊게 감독하였다(행8:14; 9:32). 때로는 성령의 은사가 그들을 통하여 전달되었다(행8:15-17). 귀신들을 몰아냄과 병자를 고침과 같은, 주께서 그들 중에 계셨을 때 그들이 발휘했던 초자연적인 능력이 계속하여 그들의 신성한 권위에 대한 표가 되었다(헹5:12; 고후12:12). 그들은 민주주의적인 발전에 대한 표현으로 그들 자신 장로들과 제휴함으로써, 교회가 당면한 어려운 문제들을 결정함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3> 바울
그의 사도직의 독특한 특징들은 그리스도에 의한 직접적인 임명(갈1:1)과 그의 수고의 영역으로서 그에게 이방 세계를 할당한 것(롬1:5; 갈1:16; 2:8)이었다. 그의 사도직은, 최초의 사도들과의 동수준에 대해 그 자신이 주장한 것과 일치하여 예루살렘 당국에 의해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열 두 제자 중의 일원임을 주장하지 않았으며(고전15:11) 그들과 독립된 기초 위에 서 있었다. 그의 소명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는 그 부활에 대해 증언할 수 있었다(고전9:1; 행26:16-18). 바울은 그의 사도직을, 그러한 직분을 자랑할 기회로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와 희생적인 수고로의 부르심으로 보았다.
<4> 그 외 사도들
갈라디아서 1:19의 가장 자연스러운 설명은 바울이 주의 형제 야고보를 사도라고 선언하는 것인데 이것은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받은 인정과 부합한다. 19절과 일치되게 야고보가 언급되는 고린도전서 15:5-8에서는 그 외 모든 제자들이 사도들로 언급된다.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사도라 칭하여지는데(행14:4, 14) 이것은 아마, 그의 임무가 수행되었을 때 그가 보고한 책임이 있던 안디옥 교회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로서 오직 제한된 의미에서 그러했을 것이다(14:27). 비록 좀더 후에 바나바는 바울과 같이 다른 사도들과 교제의 악수를 하게 되었지만(갈2:9) 그는 예루살렘에서는 사도로 여김을 받지 못하였다(행9:27).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사도들 중에서 유명히 여김을 받은 것으로 언급된다(롬16:7).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전서 2:6의 바울의 진술에도 사도들에 포함되는 것 같다. 고린도전서 9:5, 15:17에서의 진술이 반드시 열두 제자 이상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열 두 제자에 더하여 바울과 야고보가 사도들로서의 유력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매우 명백한 사실이다. 다른 제자들도 특별한 상황 하에서 그러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를 '선교사'에 상당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할 이유는 없다. 현대 교회의 관례상 탁월한 개척자 선교사들이 종종 "사도들"이라 불리워지지만 그러나 이것은 다만 언어상의 임시 변통일 뿐이다. 사도 시대에 이러한 직분을 맡은 자는 설교자 이상이었다(딤후1:11). 모든 제자들이 설교자들로 가정되었지만 그러나 모두가 사도는 아니었다(고전12:29). 이상하게도 교회 생활의 어떤 점에서 사도들 외에 모두가 열심히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행8:4). 비록 바울이 복음을 전할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자기의 사도직을 그렇게 열렬히 변호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 말이 독특하며 좀더 전문적인 사용으로서 이것은 때로는 사자란 의미로 사용된다. (빌2:25; 고후8:23)
<5> 사도의 계승
교회에 있어 이러한 성직설은 A. D. 170-200년 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영지주의자들은 사도들로부터 자신들에게 전하여진 은밀한 전통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가톨릭 교회는 감독직을 설립했던 사도들의 참된 계승자로서의 감독과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를 지적하였다. 권위 있는 선생으로서의 감독은 사도의 전통을 보전하였다. 그는 또한 사도의 성경과 사도신경의 보관자였다. 사멸해 가고 있던 사도들과 직결된 세대에서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관례에 대한 강조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3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러한 강조는 선생들의 공공연한 계승에서, 사도들의 직접적인 계승자들로서의 감독들로 변하였다. 이러한 발전은 주로 칼타고의 감독 키프리안(248-58)의 주장에 기인하였다. 그러나 하르낙은 이것을 발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곡해로 간주한다.
계승자란 용어는 신약에 나오지 않는다. 디아도케란 말은 신약과 70인역에는 없다. 신약에는 그러한 개념에 대한 증거가 거의 없다(디후2:2참조). 초기의 모든 계승 목록들은 2세기 후반기에 편집되었다.
또한 로마 가톨릭교의 견해와 영국 가톨릭교의 견해 간에는 차이점이 있다. 전자는 베드로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교황 계승에 의한 중앙 집권의 독재이다. 옥스퍼드 운동주의자는, 비록 감독직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모든 감독은 한 자치 체재 내에서 다같이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부여하신 권위를 안수와 기도를 통하여 감독에게 전해 주었다. 이러한 성직 위임설은 개혁 교회들에 있어 대결함에 대한 장애물이 된다. 왜냐하면 비감독제 교회들은 자체의 직무에 있어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1946년 K. E. Kirk에 의해 편집된) 사도직에 대한 반증의 빈약성은, 초기 2세기의 기독교 시대에 있어 그러한 개념의 부재를 설명하지 못한 데 있었다. Ehrhardt 박사는, 유대교가 새 이스라엘과 자체의 계속적인 제사장직을 강조했기 때문에 예루사렘의 유대교화하는 교회로부터 유래된 제사장직의 계승을 당연한 것으로 함으로써 사도직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사도직이란 개념을 2세기에서는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없다.
감독 Drury는 사도들은 자신들 위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것을 남겼다고 확언한다. 첫째 그들의 문서들, 둘째 그들이 세웠고 가르쳤으며 규정했던 교회들, 세째 이러한 교회들의 질서를 위한 사역자들의 여러 준법이 그것이다. 사도란 말의 본래 의미에 있어 더 이상 사도가 있을 수 없다. 사도직에 대한 진정한 계승자는 신약자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 내에서 사도들의 직무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직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세 가지 종류의 계승이 가능하다. 첫째, 교회법- 처음부터 계속되어 온 교회, 둘째, 교의- 동일한 가르침이 시종 계속되어 왔다. 세째, 감독제- 일련의 감독들은 끊임없이 초대 교회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감독직이 사도직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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