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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문화란 무엇인가?

열려라 에바다 2024. 5. 29. 08:51

기독교 문화란 무엇인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편,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 교육자료 13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1991), 61-69.

I. 여는 말

노동하고 있는 세 사람에게 각각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첫 번째 사람은 “벽돌을 쌓고 있다”고 대답했고, 두 번째 사람은 “벽을 쌓아올린다”고 했으며, 마지막 세 번째 사람은 “교회당을 건축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 짤막한 삽화는 ‘의미추구’가 곧 인생의 질을 결정짓는 요체가 됨을 시사한다 하겠다. 그러나 또항 이 삽화는 기독교와 문화를 연결짓는 데도 꽤나 함축적인 의미를 던진다.

기독교 문화란 기독교 복음정신의 표현양식을 말한다. 문화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종교는 문화의 실체요, 문화는 종교의 표현양식이다”라고 했다. 기독교도 예외일 수 없다. 엄밀하게 말하면 기독교는 두 가지 구성요소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초문화적인 복음이요, 다른 하나는 이 복음을 역사적으로 표현해 내는 문화적인 형식이다. 그러므로 문화적 표현양식 없이는 복음의 선포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기독교 문화 형성이란 결단코 미국이나 유럽의 기독교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는 일이 아님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서양 문화 역시 기독교 복음이 서양사의 맥락 속에 표현된 역사적 산물일 뿐 결코 기독교 문화의 모델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화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가 역설하듯이 이 지상에는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문화는 없고, 모든 문화는 다만 상대적일 뿐이다. 그럼에도 복음이 문화적 형식을 입은 원초적 모델이 있다면 그것은 곧 성육신 사건이다. 영원한 로고스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유한한 언어와 사고와 관습과 생활의 영역 속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 두 가지 구성요소를 어느 것 하나도 도외시하거나 소홀히 여길 수 없다. 예컨대 복음만이 강조되고 문화적 형식이 도외시되면 그 기독교는 타계주의 내지는 도피주의의 길을 걷게 되어 마침내는 역사를 하나님의 구속에로 이끄는 복음의 참된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게 되며, 반면 복음이 결여되고 문화적 형식만이 강조되면 그 기독교는 고유한 구속의 종교의 자리에서 세속화된 문화집단으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

그럼 이제 문화의 특성 및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등을 좀더 구체적으로 짚어가면서 바람직한 기독교 문화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II. ‘문화’의 특성

찰스 크라프트(Charles H. Kraft)는 문화에 대한 신학적 견해를 세 가지로 밝히고 있다. 첫째, 모든 문화는 그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절하고 알맞다. 둘째, 모든 문화 속에는 인간의 죄가 반영되어 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를 가지시기 원할 때 그 매개체가 된다. 니버(Richard Niebuhr) 역시 “하나님은 문화를 초월한 존재이시나 문화를 자기와 인간 상호관계의 매개체로 사용하고 계신 분”이라 이해했다.

문화에 대한 성경적 견해는 복음의 ‘문화 초월성’과 동시에 ‘문화 계약성’에 대한 인정이다.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문화를 초월하며, 구속사의 섭리는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 보편 동일하나, 하나님께서 각 민족들에게 말씀하실 때는 그 민족의 고유한 문화 양식으로 말씀하신다. 예컨대 하나님은 특별히 팔레스타인이라는 공간과 히브리인이라는 특정한 민족을 선택하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모세와 대화하실 때도 천사의 말이 아닌 히브리 방언을 사용하셨다. 또 한 하나님은 자신을 보다 완전히 계시하시기 위해 히브리 문화와 역사와 언어 속으로 성육신하셨다. 그럼에도 그 성육신은 히브리 문화의 제약 속으로의 성육신일지언정 히브리 문화의 속박으로의 성육신은 아니었다. 이 점은 모세의 본래적 율법 정신이 퇴색되어 외형화되고 경질화된 후기 유대교의 종교 문화를 그리스도가 여지없이 비판하셨고, 또 그것을 ‘사랑의 종교’라는 새로운 자유의 율법으로 변혁시킨 사실 속에서도 확인된다.

이미 오늘날의 선교 신학에서는 문화 인류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지 오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타문화와 선교의 모형으로 이해하고 커뮤니케이션의 원리로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문화 형성의 모델을 찾는데 있어서 좋은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럼 문화의 일반적 특성을 살펴보자.

(1) 문화는 무엇보다도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 그래서 문화와 사회적 실존은 공존하게 된다. 사회생활을 곧 문화생활로 바꿔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어머니 모태에서 태어나자마자 곧 사회라고 하는 더 큰 품안에서 사회의 모든 문화유산을 흡수하며 사회화되어 간다. 우선 언어를 배우고 가치와 도덕의 기준을 익히는 가운데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며 일정한 생산․소비활동에 참여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문화이며, 따라서 문화는 인간들이 전수받고 전수하는 사회적 유산이다. 이렇듯 오직 사회적 삶과 체험만이 문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 문화는 의미와 가치 지향성으로 특징된다. 문화는 인간의 목적 지향성과 노력에 의해서 자연을 가공함으로 산출된다. 자연 그대로의 석영이나 석탄은 아직 문화가 아니다. 그것을 캐내어 보석과 연탄을 만들고 각종 기계산업을 일으켜 값지고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때 비로소 문화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정한 민족공동체나 특정 사회의 문화에는 그 민족 그 사회만의 고유한 가치와 목적과 꿈이 서려있다. 문화란 결국 한 공동체가 갖는 궁극적 관심들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3) 문화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생명체처럼 성장하고 생명력이 있어서 타문화와 만나면 통합, 갈등, 긴장, 보완, 융합 등을 야기시키는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초기의 한국 기독교도 한국 사회가 지니고 있던 온갖 병들고 불우한, 비인간화된 문화요소들을 복음으로 심판하고 치유하고 갱신하는 역동성을 보였었다.

(4) 모든 문화는 종교적 특징을 지닌다. 도슨(Christopfer Dawson)은 종교를 전문화 영역을 지배하는 원동력으로 본다. 그는 자신의 저서 「유럽이해」(Understanding Europe)에서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창조적 힘은 종교가 제공해 주며 만약 종교가 지닌 고유한 생명에 이상이 발생하면 문화창조의 기능이 정지 내지는 마비된다고 말한다. 도슨은 서구의 정신문화 형성에 초월적 신적 법(A transcendent divine law)이 크나큰 영향을 주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입장은 종교와 문화를 불가분리적으로 보며, 종교적일 때 더욱 문화적일 수 있다는 칼빈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하여튼 문화란 지극히 복합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하나의 총체 개념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따라서 문화가 수식어가 되든, 어떤 수식이 문화를 규제하든, 문화라는 개념이 사용될 때면 언제나 그 주제는 총체성을 함축하고, 또 총체성을 함축한 만큼의 복합성을 지닌다.


III. ‘기독교 문화’의 모델

리차드 니버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 Culture)에서 그리스도와 문화의 상호관계를 규정하는 다섯 가지 유형을 기독교 사상가들과 연계시키면서 논하고 있다.
(1) 대립모델(contrast-model) - 이 유형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결단이 요구된다.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가 피차 배타적이고 이율배반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대립모델에서의 기독교는 타계주의 내지는 현실도피주의로 전락되기 쉬우며, 이 모델에는 터툴리안, 중세의 수도원, 소종파 운동, 톨스토이, 근본주의 기독교 및 신비주의가 속한다. 사실 이 대립모델에서는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바른 기여와 공헌을 기대할 수 없다. 여기에서의 종교란 인간 삶의 외각에서 머물고, 영혼 구원이라는 국면적 영향에 제한되므로 역사에 대한 참여는 자연 도외시되고 만다.

(2) 일치모델(identity-model) - 이 유형은 기독교와 문화 사이의 근본적 일치를 인정하는 입장이다. 여기에서는 강한 현세주의가 득세하게 되고, 하나님의 왕국이 인간의 지상 왕국과 동일시되며,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도덕적 양심의 명령과 동일시된다. 그러므로 이 모델에서의 그리스도는 인류 정신사에 나타난 위대한 영웅이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 즉 문화 기독교주의에 의해 대표되는 이 유형은 복음의 초문화적 성격이 도외시됨으로써 기독교가 지니는 문화의 실체로서의 성격이 변모하게 된다.

(3) 종합모델(synthesis-model) - 이는 ‘일치모델’처럼 상호간의 일치를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불연속적인 위대한 비약을 주장한다. 즉 복음이 문화를 초월한다는 입장을 전제하고 문화와 복음 가운데 어느 한 쪽을 택하지 않고 양장의 화해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온건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종합모델은 인간의 행위 안에 내포된 선천적 부패성 및 근본 악과 진지하게 대결하지 않고, 신의 은혜로부터 독립하여 그 자체의 이성적 신인식과 윤리성을 인정하는 전제 위에 서 있으므로 자칫 신인협동주의(Synergismus)에 빠질 우려가 있다. 이러한 종합형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대표된다.

(4) 역설모델(paradox-model) - 루터주의에 의해 됴표되는 이 유형은 문화와 복음의 관계를 양자간의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긴장관계로 파악하는 입장인데, ‘양극성과 긴장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대립유형과 유사하나 하나님에 대한 복종에 있어서 사회제도에 대한 복종을 전제로 하면, 사회에 대한 충성과 사회의 심판자인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동시에 요청한다는 점에 있어서 대립유형과는 또 다르다. 이 모델에서는 계시와 이성, 율법과 은혜, 창조주와 구속주,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 인간의 의(義)와 하나님의 의(義)의 긴장관계가 강조되며, 부패와 타락이라는 불안정한 현실과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구속된 새 현실이 강조된다.

(5) 변혁모델(reform-model) - 이 모델은 이상의 모든 모델의 장점을 다 살린 사상으로서 복음의 문화 초월성과 동시에 복음의 문화 변혁성을 강조한다. 이 변혁의 모델은 세 가지 신학적 신념을 가진다. ① 창조질서에 대한 강조이다. 이 모델은 창조의 질서를 인정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적 문화활동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② 인간의 본성과 문화를 전적으로 부패한 질서로 이해한다. 그러나 부패는 존재로서의 악이 아니라 전도(顚倒)로서의 악으로 인식한다. ③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인정한다. 역설의 모델에서는 역사의 종국에서나 기대되던 하나님의 행위가 이 변혁의 모델에서는 역사 안에서의 수행으로 가능하며 종말론적 미래는 곧 종말론적 현재가 된다. 여기에서 바로 문화의 변혁과 창조라는 적극적인 가능성이 제시되는 것이다. 이 변혁모델의 구체적인 구조는 ‘규범 지향성’과 ‘상황 지향성’이다. 규범 지향성이라 함은 복음의 내용을 변형시키지 않고 항상 복음의 내용에 대한 문화적 적용을 음미하며 일치시키는 작업을 말한다. 또한 상황 지향성이라 함은 복음의 전달과 표현 양식에 있어서 우리의 고유한 전통과 관습, 관례, 언어, 사고구조의 형식과 틀을 사용하는 작업을 말한다. 이 변혁의 유형에는 바울, 요한의 사상과 아우구스티누스, 칼빈 등이 속한다.


IV. 개혁교회 전통의 문화 변혁주의 사상

개혁교회 전통에 있어서의 문화적 사고는 창조론에 입각해 있다. 칼빈은 창세기 1장 28절의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에서 창조세계에 대한 인간의 문화적 사명을 주장하며, 이방세계의 문화도 이방인의 죄악성에 항거하여 하나님이 육성하신 열매로 간주하며 감사해야 할 의무를 강조한다. 칼빈은 루터와는 달리 인문주의를 성경해석의 한 방편으로 보지 않고 정신문화의 한 새로운 세계로 보았다. 또한 그는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인간 본성의 전적인 타락을 강조하면서도 근본주의적인 반문화사상을 말하지 않고, 적극적인 문화사상을 주장한다. 원죄에 의해서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 파괴되었고 자연도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죄로 인해 문화가 파괴된다고 주장하면서도 반문화주의에 이르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일반 은총론 때문이다. 칼빈은 일반 은총에 근거해서 그리스도 속죄의 사역이 없는 이방인에게도 문화가 가능한 것을 인정한다.그는 하나님의 섭리란 믿는 자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이방인에게도 문화가 가능한 것은 두루 주시는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이 죄의 파괴적 세력을 막고, 정부와 사회적 제도를 통해 문화적인 선(善)을 실현시키기 때문이다.

이처럼 칼빈은 문화가 기독교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문화 기독교적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오히려 문화에 대한 변혁사상을 말한다. 즉 문화가 그 궁극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규정했다. 그리고 이 지고한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복음이 삶의 모든 영역 속에 침투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칼빈의 문화적 변혁주의 사상은 그의 직업관이나 국가관에서도 뚜렷이 부각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칼빈의 문화적 변혁주의에 결정적인 기반은 역시 창조론과 연관된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이다. 하나님은 이 세계의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이 창조 세계의 모든 영역에 역사하신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이 창조 세계가 부패되고 왜곡되었으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 세계의 구속과 그 문화를 변혁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신다. 개혁주의 전통은 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가정과 국가, 사회 및 모든 문화 영역을 두려한다. 그러므로 창조 세계와 문화의 영역은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는 장(場)이다. 교회뿐만이 아니라 모든 창조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주요, 창조의 하나님으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신다. 여기에서 바로 그리스도는 문화의 구속주시오, 문화의 변혁자로 나타난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과 문화의 바른 관계를 해명하는데 있어서 변혁주의의 유형이 가장 성경적이며, 또 기독교 신앙이 지니는 문화적 과제를 수행하기에도 가장 적절한 문화관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 개혁주의의 문화 이해이다. 개혁주의적 변혁사상은 그리스도를 문화의 왕으로 이해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해가 결단코 리츨(A. Ritschl)적인 문화 기독교주의와는 일치되지 않는 이뉴는 그리스도를 부패한 인간 문화의 변혁자로 본다는 점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개혁주의 사상의 현대적 설득력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상을 강조하되, 그것을 바르트(K. Barth)와 같이 구속의 역사 속에만 한정치 않고 모든 현실의 영역과 창조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철시키고 있다는 보다 적극적인 변혁주의적 문화관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의의 사상은 근본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그들의 종파나 교리나 생활 영역 속에 가두어 버리지 않고, 선택받은 자의 전인격과 삶이 하나님께 헌신되고 하나님이 종교의 주인일뿐 아니라, 보편역사의 창조자요 구속주가 되심도 선포한다. 그렇다고 이 개혁주의적 변혁모델이 우리 한국문화를 서구화시킨다거나 또는 한국적 고유문화를 말살시킨다는 뜻은 아니다. 변혁주의의 진정한 의의는 한국문화 속에 내재한 부정적인 문화형식을 긍정적인 문화형식으로 변혁시킨다는 문화 창조에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모델은 항상 한국적 문화라는 상황과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적 기독교 문화가 된다.


V. 닫는 말

이제 결론적으로 문화의 실질적 주체와 문화의 존재방식 문제를 검토하고 한국 기독교가 한국 문화와 ‘유기적 공존’을 주체적으로 이룩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자각과 해석학적 관점에 도달해야 하는가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기독교 문화형성의 과정에서 극히 유의해야 할 것은 서양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이 그대로 기독교 문화의 수용이라고 단정하는 과오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서구 문화의 옷을 입고 들어온 기독교 문화란 결국 서구의 오랜 역사적 산물이며 따라서 서구인들의 삶에 적합한 가치체계 형식임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민족문화 유산을 부정, 멸시하면서까지 서구문화 사대주의에 빠져온 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가 한국문화를 절단하면서 다른 문화를 이식시키는 부정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반성에 우리는 더 이상 비겁할 수 없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한국문화, 역사, 한국적인 것에 대해 역기능적이어야 참다운 신자였고, 그런 것들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것이 훌륭한 기독교인의 사표였다.

질문은 언제나 대답을 결정한다. 우선 오늘 우리는 우리 민족의 문제 상황 속에서 우리다운 언어와 개념으로 성경에 질문해야 한다. 우리의 물음을 가지고 성경에 묻고, 우리의 눈으로 성경을 보며 해답을 찾고자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적인 기독교 문화창달의 토대이자 출발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기독교 본래의 메시지와 서구 문화를 분리시켜 인식할 줄 몰랐기 때문에 서구문화에 의해 형성된 인간형을 곧 이상적인 기독교인 상(像)으로 여겨온 우(愚)를 범해 왔다.

기독교의 지금, 여기에서의 신앙적 결단이란 무시간적, 무공간적인 것일 수 없다. 나아가 문화적 차원에서 인식할 때 기독교 수용의 주체도 개인이라기 보다는 운명공동체적 민족집단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문화와 기독교의 관계에서의 모든 물음과 대답은 집단적 언어와 표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한국적 기독교문화란 표현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사실 이전에는 한국인에서 기독교인으로 이적(移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새삼 우리에게 중요한 인식은 기독교인으로서 한국인이 된 것이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본질적인 자각에 이를 때 비로소 한국 기독교는 갓쓰고 양복입은 꼴을 극복하고 한국에 존재하는 일체의 문화를 민족 공동체에 봉사하는 유기적인 기독교문화로 변혁시키는 위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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