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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Canaan

열려라 에바다 2024. 6. 15. 14:57

가나안Canaan

(1) 명칭과 지역
가나안 사람의 조상의 이름으로서 창세기 9:18, 10:6에 이 @['n'K] (Kna`an) `가나안'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있다. 이 이름은 아마르나 문서(TheAmarna Lettess)와 봐스교이(Boghzky) 문서에 Ki-na-ah-ni, Ki-na-ah-na,Ki-na-ah-hi, Ki-na--a-an-hi, Ki-na-hi로 나와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으나, 애굽, 알랄락(Alalakh) 문서에는 각각 Kjnnw, kn`n로 나와 있다.
누시(Nuzi) 점토판(粘土板)문서에서 Kinahhu는 자주 물감을 나타내는 말인데, 상술한 Knn는이 말로부터 된 말이며, 따라서 원래는 누시의 주된 언어였으며, 후르리어(Hurrian,hurri의 말)라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학적으로도 무리가 있다.

구약성경에는 kna'an(i)이 상인을 나타내는 별명으로 쓰이고 있는 예를 보는데(습 1:11,장사하는) 이 Kn'n 자체는 kinah-hu(자주 물감)을 나타내는 후르리어에서 온 말이 아니고, 오히려 `가나안'이라는 본래부터 이름이 있던 곳, 즉 베니게나 우가리트(Ugaritie) 문서에서 볼 수 있는 두로, 시돈, 우가리트 등의 자주 물감의 산지로서 알려져 있던 이 지명 자체가 이것을 거래하는 상인의 대명사로도 쓰이게 되었으며,또 자주물감을 나타내는 말로서 누시 따위로 후르리어화(語化) 되어 쓰이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나안'과 `자주물감'과의 관계는 이와 같이 깊은데, 희랍어로도 이것을 나타내고 있다. 는 `자주물감'을 나타내는데, 선문자(線文字) B에는 이미 ponika로 나와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으며, 이것은 오래된 말이다.

그런데 희랍어로 `베니게'를 이 말에서 유래한<로 표시하고 있다. 이 `베니게'야말로 이사야 23:11 등에서 보면 분명히 시돈 두로 등을 가리키고 있으며, 또 이 곳 주민을 `가나안 사람'이라 부르고 있다. 한편 창세기 12:5, 민수기 33:51에 `가나안'은 요단 강 서쪽의 땅을 가리키고 있으며, 민수기 13:29, 14:25, 여호수아 11:3에는 동지중해 연안의 땅 내지는 평야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 이 `가나안'이라는 땅은 경우에 따라서 요단 강 서쪽의 지역 전체 중에서 상당히 한정된 지역에 대해 쓰이고 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관련하여 우가리트(Ugarit) 문서의 Kn'n도 마찬가지로 한정된 지역에 대해 쓰이고 있다. 그리고 후에 `가나안'이라는 명칭은 요단 협곡에, 다음에 요단강 서쪽 전체에 확대되었다.

히브리인 거주지의 일반적 명칭으로 되었다(창 11:31,민 13:2). 이스라엘 사람의 정복 후의가나안 언어는 히브리어, 즉 하나님의 백성의 말이었다(사 19:18). 히브리인은 모세의 사후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가나안을 정복하였지만, 출진 계획에서는 길갈에 장막을 고정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 유적은 요단 저지(低地)의 여리고 동쪽에 있다(수 4:19,5:10). 여기서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와 기브온으로 올라갔다(수 7:3,8:1,3,10:10).

이 길갈은 전략상 많은 이점이 있었다. 즉, 이 부근은 후방에 적이 없고, 물이 풍부하며, 요단 강 동쪽에 정주한 두 지파 반으로부터 조달을 받을 수 있었고, 또 노획품 저장에도 안전하였다. 여기에는 회막(수6:24→9:23, 18:1, 22:19), 언약궤(수 3:17,4:11,7:6등), 제단(수 9:27→ 22:19, 28, 29), 요단 강 도하 기념으로서의 열 두 돌(수 4:20)이 있고, 또 제사장 엘르아살(수 14:1→16:6)과 다른 제사장(수 6:5,12,8:33)들이 있었다.

여호수아는 여기서부터 가나안 공략의 요충인 여리고를 점령하고 즉시 서진하여 산으로 들어가 아이를 전멸시켰던 것이다. 아이는 길갈과서로 대하여 계곡의 산정에 있었으며, 거기서 적군이 진영으로 쳐내려 올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모세의 명령에 따라 에발 산에 제단을 쌓았다(수 8:30-35,신 27장).
여기에 기브온에서 대표자들이 나타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그들과 조약을 체결한 것이 큰 잘못이었다. 이와 같이 확고한 거점을 얻었으므로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진행시켰지만, 이들 다섯 왕들은 동맹하여 대항했으므로 남부 토벌에서 그들과 접전하게 되었다(수 10장).결국예루살렘왕은 기브온을 치기 위해 헤브론, 야르뭇, 라기스 및 에글론왕을 소집하였다. 여호수아는 조약을 맺은 기브온 사람들을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가나안 다섯 왕은 벧호른을 지나 도망쳤지만, 여호수아는 그들을 추격하여 해변의 평원과 막게다를 공략하여 거기에 임시로 장막을 치고 평원에 있는 립나와 라기스를 점령하였다. 라기스에서는 원군인 게셀 왕도 격파하였다.

또 에글론을 점령하고 거기에 다시 일시적인 장막을 치고 헤브론을 점령했다. 헤브론에서 철군하여 산지인 드빌을 침으로써 기브온,가사,가데스바네아를 포함하는 전 지역을 토벌하고 여호수아는 길갈로 돌아왔다. 그가 태양에 명하여 머물러 서게 했던 것은 이 싸움에서였다(수 10:12-15).중부와 남부를 정복했으므로 여호수아는 북부 동맹과 싸우기 위해 블레셋 사람의 북쪽 작은 성을 무시하고 북상하여 인구가 많은 유력한 성읍을 치기로 작정했다(수 11장).하솔왕이 이 땅의 약소한 왕들의 우두머리였으나, 남쪽에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승리에 대한소문을 듣자, 그는 다른 왕들과 연합하여 여호수아를 분쇄하려고 하였다. 연합군은 북쪽의 메롬 물가(湖畔)에 모였다. 여호수아는 그 부근에서 그들을 격파하고 패주자들을 서북쪽 시돈까지, 또 동쪽으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추격하였다. 그리고 그는 되돌아서서 하솔 성읍을 점령하고 이를 불사르고, 동맹을 맺었던 약소 왕국의 도성들을 점령했다(수11:16-12:24).

가나안 사람의 세력은 이것으로 분쇄되었으나, 주민이 완전히 멸절되지는 않았다. 많은 주민이 남아 있었으며, 또 중요한 성읍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수중에 남아있었다(수 11:13,15:63,16:10). 그리고 가장 심하게 파괴된 곳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다가 이스라엘군이 철수하자(수 10:43) 그들은 돌아와 폐허된 성읍들을 재건하고 황폐된 들을 다시 갈아 일구었다. 후에 이스라엘 제족속이 각지에 산재했을 때 가나안 사람들의 저항이 각지에서 속발하였다(삿 1장→헤브론인 여호수아).가나안 정복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수 11:18,19). 즉, 출애굽기 제 2년에 척후병을 보내고서부터(→ 민 10:11,13:20,신 1:2) 토지 분할을 하려고 했을 때 갈렙에게 헤브론의 재정복임무가 부여 되었는데, 이때까지 45년간이었다(수 14:7,10).
척후병 파견으로부터 세렛 시내를 건널 때까지는 38년간이었다(신 2:14).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의 동쪽과 서쪽의 정복을위해 6, 7년 걸렸다. 여기서부터 동방의 땅 정복과 싯딤에서의 사건에 소비된 시간을 빼야할 것이다. 아론의 죽음은 출애굽 제 40년의 5월 1일이며(민 33:38), 요단강 도강은 정월 10일이었다.

그러면 시혼과 옥의 땅 정복과 싯딤에서의 사건은 약 8개월 9일이 되며, 그 기간 중 싯딤의 사건이 약 2개월을 차지하고 있다(신 1:3,4,수 4:19,신 34:8,수 2:22). 그러므로 서쪽 팔레스틴 정복에 소요된 연수는 5, 6년이 된다. 여호수아는 세 가지 정치적 실책을 했다. 즉, 기브온 사람과 조약을 체결한 것(수 9장), 여부스 사람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지 않고 거주를 허락한 것(수 15:63), 블레셋 사람을 추방하지 않음으로써 바다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지배하지 못한 것 등이다. 이들 과실의 결과 유다와 시므온의 양 지파가 다른 이스라엘 사람으로부터 고립되어 버렸다. 그 고립의 결과는 중대한 것인데, 분명히 그 후의 역사 코오스에 영향을 주었다.
이스라엘 사람은 가나안 사람을 전멸시켜야만 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신 7:2-4). 하나님은 그것으로 가나안 사람의 사악(邪惡)을 벌하고(창 15:16,레 18:25,신 9:3,4,18:12), 또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더럽히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출 23:31-33,34:12-16). 이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공의의 그릇이었다. 요단 강 서쪽의 정복지 분배는 일부는 길갈에서, 또 일부는 장막이 옮겨진 실로에서 행해졌다(수 14:1,2,6-18:1,2). 그것은 제사장 엘르아셀, 여호수아 및 10지파에서 뽑힌 방백들에 의해 행해졌는데(수 17:4→ 민 34:17,18), 제비를 뽑아 정해졌다(수 18:6). 분배 방법은 이미 제정되어 있었다. 즉, 큰 지파에는 많은 기업을 주고 누구에게 어디가 뽑히건 뽑힌 곳이 그의 소유로 된다는 것이다(민 26:52-56,33:54).

그러나 이 일은 그 경계를 정확히 한정하지 않고, 어떤 지방을 골라 제비에 따라 어느 지파가 그것을 소유할 것인가를 결정했을 것이다.
① 사사기 1:1의 물음의 형식 참조.
② 이 설은 민수기 33:54을 만족시킨다.
③ 여호수아 18:1-10을 참조. 거기서는 땅이 먼저 일곱 부분으로 나뉘어져 그 후 여호수아가 제부족을 위해 제비를 뽑았다.
④ 이 설은 또 여호수아 19:1 등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후의 분배에 있어서 두번째 제비가 시므온에게, 세번째는 스불론에게 뽑힌 것이 기술되어 있다.
⑤ 제지방은 마치 제비로 결정되지 않은 것처럼 순서 바르게 배당이 진행됨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을 긴밀히 구성하여 여기 저기 뛰지 않고 거주지가 확정되었다.
⑥ 분명히 많은 것이 지도자나 감독자들의 사려(思慮)에 남겨졌다.

유다족의 주요 부분의 제비가 그들을 그 부근에 정주하는 것을 허용하건 안하건 갈렙은 헤브론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야곱의 마지막 소원은 제비의 범위 안에서 정해졌을 것이나(창 49장) 그의 기업은 틀림없이 조상의 소원에 가급적 가깝도록 조정되었다. 그러나 잘못도 있고 수정도 있었다. 분배를 끝맺기에 앞서(그것은 하루나 한 주일에 완료되지 않았지만) 유다족이 받은 땅이 너무 많다고 보고했다. 그래서 과잉 분은 아직 분배되지 않는 땅에 부가되었다. 이에 반하여 요셉의 아들들은 여호수아에게 그들의 땅을 너무 작다고 고하여 더 줄 것을 소청했다. 야곱의 소원에 맞도록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나란히 살게 되고, 그 때문에 제비를 따로따로 뽑지 않고 요셉의 아들들로서 합하여 뽑았다(수 16:1,4).
이리하여 백성은 긴밀히 짜여졌으며, 장막에 가장 가까운 지역에서부터 먼저 분배 되었다. 남부 구릉지대는 레아의 네째 아들 유다에게, 중앙 산지는 라헬의 맏아들 요셉,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중간에 있는 구릉지대는 라헬의 둘째 아들 베냐민에게, 유다가 반환한 남부 구릉지대의 잉여 부분은 레아의 둘째 아들 시므온에게, 중앙 산지의 북부 경계지는 레아의 여섯째 아들 스불론과 다섯째 아들 잇사갈에게, 인접 해안 지대는 레아의 여종의 둘째 아들에게, 잇사갈과 스불론의 북쪽 지역은 라헬의 여종의 둘째 아들 납달리에게 분배되었다.

유대의 잉여분의 나머지 부분은 라헬의 여종의 맏아들 단에게, 레아의 장자 르우벤, 레아의 여종의 아들 갓과 라헬의자손 므낫세의 반지파는 요단 강 이동에 땅을 받았다. 레아의 아들 레위에게는 분배가 없었다(수 13장-19장).


(2)주민
창세기 9:18, 10:6을 보면 가나안은 함의 아들이다. 따라서 `가나안 사람'이란 함족 계통이라고 구약성경은 생각하고 있다. 또 창세기 10:15 이하를 보면 가나안의 아들에는시돈, 헷, 여부스, 아모리, 기리가스, 히위, 일가, 신, 아르왓, 스말, 하맛 등이 있는데, 이것을보면 가나안은 애굽인과 형제이며, 또 힛타이트인(Hittites, Heth)의 조상으로 되어 있다. 인종ㆍ언어상으로 보더라도 힛타이트인(헷 사람)이 함족에서 나온 자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헷 족속'(힛타이트인)처럼, 구약성경에 있어서 힛타이트인은소아시아를 장악하고 있는 힛타이트 제국 본국 사람이 아니고, 애굽도 또한 이미 BC 2000년 기(期) 초에는 수리아에 그 세력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애굽의 2기 `시누헤' 따위에서도 발견된다. 또 BC 15세기의 아마르나 문서(The Amarna Letters)에서 이 시대에는 애굽이 팔레스틴 일대를 옛날처럼은 장악하고 있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결정적인 패퇴(敗退)는 하지 않고 있다. 민수기 13:29, 여호수아 1:2-4를 보면 `힛타이트 사람'이란 실제로 어떠한 인종을 이 경우에 가리키고 있는지가 일단 문제이나, 성경의 기술에 따라 말하면 유다 산지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들은 요단 서쪽에 상당히 식민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힛타이트 사람이나 애굽 사람 등 인종적으로도, 그 언어상으로도, 가나안 사람과는 다른 사람들이 일찍부터 수리아나 팔레스틴 지역에 식민하고 있어 상당히 셈족화 되어 있었다. 아마 이들 상황의 반영이 상술한 창세기의 계보의 기술로 되어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

우가리트(Ugarit) 문서가 보이듯이, 가나안은 일찍부터 이들 이종(異種) 민족 문화(에게의 것을 포함하여)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가나안의 주류로 되어있는 인종은 셈족이며, 그 언어는 순수한 것이 못된다고 할지라도 여하튼 셈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결론적으로 가나안 주민이란, 가나안 지방에서 함의 자손과 합체(合體)한 사람과 부족은 모두 `가나안 사람'이라고 불린다. 특히 함 자손의 하나를 가리킨다. 지리적으로 가나안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가나안 사람'이란 말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좁은 의미의 가나안 사람이란 해안, 또는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창 15:21,수 9:1)이고, 넓은 의미의 가나안 사람이란 창세기 10:15-19에 열거되어 있는 민족을 말한다. 가나안사람은 그 죄 때문에 멸망의 운명에 있었지만(신 20:17),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전멸하라는 명령을 완수하지 못하여 대개의 경우 가나안 사람들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게 함으로써 만족하였다(삿 1:27-36). 솔로몬은 그들에게 강제 노동을 부과하였다(왕상 9:20,21). 끝으로 가나안 사람들은 상업에 종사하여 그 이름이 상인과 동의어로 되었다(사 23:8).


(3) 가나안의 언어
가나안 사람에 대해서는 아마르나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전술했지만, 가나안어는 셈어 중 북서 셈어 방언에 속한다. 이 문서에 의하면, 우가리트kinahhi(가난)에 포함되어 있으며, 베이루트에서 발견된 주화에는 베니게 사람이 자기의 토지를 Kn'n라고 말하고 있다. 또 BC 5세기의 카르타고의 베니게인도 자기들에 대해 역시 Kn'ny(가나안 사람)라고 부르고 있다.

또 이사야 19:18에는 히브리어를 `가나안 방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가나안 방언'이라는 것은 팔레스틴과 수리아 연안 지대의 오래된 방언군(方言群)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우가리트어가 가나안어인지, 그렇지 않으면 아모리 사람들의 방언인지 어떤지가 문제로 되는데, 원래 바벨론 사람이 말하는 Amurru는 서방의 나라를 나타내는 말인데, 아모리어 자체가 반드시 꼭 같은 말이 아니라면 가나안어도, 아모리어도 엄밀하게는 구별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가나안어 중 북방에서 언어학적 변화를 이루고, 더욱이 베니게어와 비교할 경우 아람어와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우가리트어이다. 베니어를 중부 가나안어 또는 남가나안어로 하고, 우가리트어를 북가나안어로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4) 역사
최근의 고고학은 가나안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애굽인은 일찍이 BC2200-2000에 수리아, 팔레스틴 일대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시작하고 있다. 애굽의 제 12왕조(BC 1990-1790경)의 소위 주술문서(execration texts)는 우리에게 셈어명(語名)을 애굽어의 자음으로 나타내 보여주고 있으나, 이것들은 이 시대의 팔레스틴과 수리아에 있어서 애굽의 힘과 그 관계를 말하고도 남음이 있다.

BC 15세기 경이 되자 이 땅에 있어서 애굽의 힘이 약화되고 그 세력화의 팔레스틴과 수리아의 제국이 혼란하여 이미 애굽의 위세가 옛날 같지 않다는 것을 아마르나 문서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BC 14, 13세기의 우가리트 문서는 이 이후 힛타이트 제국(帝國)의 힘이 수리아로 신장하고 있는 것을 가르치고, 애굽의 이야기 `웬 아몬'은 BC 11세기에는 벌써 가나안에 대한 애굽의 힘이 쇠진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애굽의 세력이 쇠퇴한 가나안으로 이동해 온 것이 이스라엘 민족이며, 이 이후 그들이 정치적, 문화적 면에서 이 가나안을 이을 자로 된 것이다.


(5) 사회 구조
가나안 사회의 구조에 대해서는 우가리트 및 알랄라크 왕실의 여러 가지 문서가 청동기 시대 말경의 실제 상황을 직접으로 꽤 자세히 말해주고 있으나, 양자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고대 셈족 중에는 두 가지 지배 형태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카리스마적이라고 하는 것으로 개인의 능력이 위기에 부딪쳐 신적(神的)인 축복을 받아 권위를 갖고 백성을 지도한다는 것인데, 구약성경의 사사와 같은 것이며, 아들은 이것을 세습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우가리트의 서사시 중에서 이전에 이와 같았던 것을 반영하고 있으나, 우가리트 문서 시대, 적어도 도시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시대의 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왕은 세습하며, 상당히 정비된 관료 조직을 가지고 많은 성읍과 촌락 공동체를 지배하고, 그 하나하나에 조공^부역^각종 세금을 부과하고, 농목, 수공업, 상업에 걸쳐 통제 지배를 하고 있다. 우가리트는 육지와 바다를 통한 상업 무역을 세계 각 지역에서 활약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으므로 다른 가나안 모든 성읍과는 사회 구조상 상당히 상이한 점을 보이고 있다. 각 왕실은 상당한 노예를 소유하고, 군사, 상업, 농목, 수공업을 함에 있어서 전문 기술의 길드가 각각 형성되어 있어 왕은 이것들을 통하여 지배하고 있었다.

토지도 원칙적으로 모두 왕의 것이며, 공신(功臣)에게 세습지를 상으로 주어도 왕은 자기의 의지로 이것을 언제든지 회수하여 마음에 드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소위 동양적인 전체 군주적 왕권 본연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는 이보다도 300년 후인데, 그 왕조와 그 관직 등에는 이들 가나안의 도시 국가의 것이 많이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토지의 세습권에 대해서는 아합 왕의 나봇의 포도밭에 대한 태도를 보면(왕상 21장) 이스라엘왕의 토지에 대한 지배는 가나안 왕처럼 절대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6) 문학과 종교
최근까지는 가나안의 문학과 종교에 대해 직접적인 자료에서는 이것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1929년 프랑스대(隊)에 의하여 북수리아 연안의 라스 샴라(Ras Shamra)에서의 발굴 이래 우가리트 왕국의 제문서(諸文書)가 밝혀지고 있다. 이것에 의하여 BC 2000년 전의 가나안 문학과 종교의 상황을 어느 정도 분명히 하게 되었다.
이가나안 문학과 종교 및 언어가 구약성경과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의 발견은, 개개의 문제에 대해서도 구약 연구에 획기적인 의의를 주고 있다. 상술한 라스 샴라 종교 서사시의 문서에서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 의식과 그 저급한 품성에 대한 지식이 또한 밝혀졌다. 가나안 사람의 두 큰 신전 사이에 있던 수 천 개의 점토판(BC 15-14세기)에 의해 가나안 사람의 판테온(그들의 신을 모시는 전)의 형편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고대에 있어서 가나안 사람의 풍산(豊産)의 제사는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더 상스럽고 비열하였다. 그 때문에 히브리인의 강한 유일신 신앙도 항상 부도덕한 우상신, 불결한 여신, 뱀, 비둘기, 황소의 우상, 기타 더러운 자연물 숭배에 오염될 위험성이 다분히 있었다. 판테온의 주신(主神) 엘은 탐욕, 비천, 난폭, 범죄의 영웅이었다. 그는 피비린내 나는 폭군이며 부친의 왕위를 빼앗고,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고, 또 딸의 목을 베었다.
이와 같은 폭행에도 불구하고 엘은 `해(年)의 아버지' `인간의 아버지'라고 불리워 제신의 조상으로 되었다. 가나안 사람이 일반적으로 숭배한 바알은 엘의 아들인데, 가나안 사람의 판테온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뇌신(雷神)인데, 그 목소리는 폭풍우 때 천지에 반향하였다. 라스 샴랴의 돌 비석에는 바른손은 창을 휘두르고, 왼손에는 양식화(樣式化, 예술상의 표현과 수법 등으로)된 뇌전(雷電)을 가진 바알이 묘사되어 있다. → 바알. 아나스, 아스다롯, 아세라의 세 여신은 모두 성욕과 전쟁의 파트론(Patron)이며, 동시에 매춘부의 우상이기도 하였다. 그 밖의 가나안의 우상에는 모토(죽음), 레셉(惡疫), 슐만(건강), 고샬(예술) 등이 있다. 모두 부도덕하고 부패와 더러움이 심한 것이며, 그 우상 신자의 생활을 파괴로 몰고갈 위험성이 다분히 있었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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