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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제도의 역사: 발단으로부터 종교개혁까지

열려라 에바다 2024. 7. 5. 08:34

교황 제도의 역사: 발단으로부터 종교개혁까지

교황 교회는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엄청난 부와 뛰어난 조직과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을 가지고 있다. 1세기 경에 그곳 로마에서 몇몇 목회자들이 적은 무리에게 사역을 하던 때와는 달리 교황 교회는 강력하고 화려하게 서 있다. 그 차이는 생생하다.

몇몇의 목회자와 함께 하며 가정에서 모이던 초대 교회는 구약과 함께 사도들의 글들과 주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복음을 받으면서 그 말씀의 권위에 의지하였다. 이 때의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을 가졌다.

로마에 보내는 바울의 서신을 보면 초대 로마 교회의 교인들이 복음을 충성스럽게 붙들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서의 첫 부분을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롬 1:8‐9). 바울이 이렇게 칭찬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로마 교회의 믿음은 계속 세상에 알려졌고, 극도의 핍박과 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약 250년 이상 충성스럽게 유지되었다. 가장 무섭고 잘 알려진 핍박은 서기 64년, 네로 황제의 정권 때에 발생하였다.

현재의 “지극히 거룩한 교황”이라는 개념은 로마의 초대 성도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종교 예식들이 성령의 은혜를 줄 수 있다는 믿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기도 가운데 “완전히 거룩한 분(the All Holy One)”이라고 불려야 한다는 믿음은 그들에게 생각조차 가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도의 교제에 있어서 평신도에서 사제, 사제에서 주교, 주교에서 추기경, 추기경에서 교황으로 오르는 계층 구조는 매우 혐오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러한 계층 구조는 세상에서 온 것이지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세기부터 3세기까지 기독교 믿음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급속하게 널리 퍼져 나갔다. 복음의 선포자들의 열심과 충성,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죽음, 그리고 성경이 로마 제국의 언어로 번역된 점들이 복음이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주된 이유가 되었다.

황제 티미 우스 세베루스 (193‐211) 집권 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시무시한 고통을 당했다. 가장 지독했던 핍박은 서기 303‐311년 기간에 함께 집권했던 디오클레티안 황제와 갈레리우스 황제 때 있었다. 역사가 필립 샤프는 “성경의 모든 사본들이 불탔으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공직과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마지막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외없이 죽음의 고통으로 신들에게 희생 제물로 드려졌다. 

그러나 그들의 핍박이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을 말살하기는커녕 오히려 복음 전하는 자들을 정결하게 하고 복음의 메시지를 더욱 힘있게 증거하도록 만들었다.


기독교 박해는 서쪽의 황제 콘스탄틴과 동쪽의 황제 리키니우스가 밀란 칙령을 선포함으로써 서기 313년에 끝났다. 그 칙령은 이방 종교와 기독교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정책을 세웠다.

로마 황제 콘스탄틴 하에서 4명의 부사령관이 로마를 다스렸다. 따라서 콘스탄틴의 집권 체제 하에 기독교 세계는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그리고 로마라는 이 4개의 큰 도시로 나뉘어져서 다스려지게 되었다. 각 도시 위에 주교를 세워 그가 맡은 지역의 모든 원로(장로, elder)들을 다스리게 했다. 주교가 맡은 영역은 후에 교구(a diocese)라고 불렸다.

성경적인 교회론에 별 관심이 없던 콘스탄틴은 기독교 교회를 로마 제국의 군사 체계와 비슷하게 조직하였다.


여러 각 교회의 원로들이 누리는 존경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관리하는 도시의 상태와 비례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그 당시 로마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유명한 도시였기 때문에 가장 뛰어나고 영향력 있는 주교는 로마의 주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서서히 로마 주교에서 명예와 존경이 점점 더 많이 주어지자 로마의 주교들은 다른 도시의 주교들로부터 이러한 아첨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 즈음에 교회는 3‐4 세기를 지나고 있었는데 로마의 주교들은 뛰어난 지위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지금 그들은 이러한 지위가 자신들의 소유라고 여기고 있다.

 

로마 교황의 점차적 상승

 

4‐5세기를 지나면 복음은 희석되었고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와 성령의 내적 확신은 형식적인 의식들과 우상 숭배에 밀려나게 되었다. 또한 이방 종교의 관습들이 들어와서 기독교의 외적 형태를 회칠하였다. 

처음부터 복음은 신자들 간의 내적 연합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의식주의가 복음을 대치하자 교회는 보이는 외적 일치를 고집하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 역사가 디’아우비긴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기의 여러 다양한 환경들은 외적인 통합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들게 했고 그 생각은 크게 퍼졌다. 초기 국가의 국가 체제와 정치 형태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들의 관점과 풍습을 그리스도 예수의 영적이며 영원한 나라에 끌어들였다. … 점점 참 종교의 근본이 되는 내적이고 영적인 일치는 외부의 통일된 외형으로 대치되었다. 믿음의 귀중한 향은 내 버리고 향을 담고 있던 빈 용기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교회의 회원들은 연합시키는 것이 마음의 믿음이 되지 않자 그들은 그 대신 그들을 묶을 다른 끈을 찾게 되었다. 그들은 주교, 대주교, 교황과 같은 지위들과 예식들과 법률을 수단으로 하여 연합되었다. 살아있는 교회는 서서히 각 개인의 숨겨진 성소로 물러났고 외형적 교회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으며 모든 외적 모양들은 신적인 제도라고 선포되었다. … 구원은 고안된 형태들을 수단으로 하여 전달된다고 믿게 되었으며 따라서 이 채널을 통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선포되었다. … 교회의 외형적 통일이 이루어 되자 이제는 이 통일을 외부적으로 대표할 수 대표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교회 내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신속하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더니 이 구분은 성직자의 통치 권위 계층으로 이어졌다. 5세기 말경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는 제사를 드리는 사제직이라고 추정되면서 사제직이 성경을 가르쳤던 초대의 사역자의 자리를 대치했다.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 예수 하에 복음과 참된 예배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연합된 성도의 교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교회 전부가 거의 주교와 장로들의 권위 계층에 의해 다스려지는 제도가 되었다.

동시에 5세기 초부터 중반까지 로마 시는 처음에 고트족의 알라릭에 의해 포위되더니 410년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알라릭은 그곳을 통치하지 않고 떠났다. 452년에 훈족의 아틸라는 로마 주교 레오(440‐461)에 설득되어 이태리로 진격하지 않고 전부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반달족의 지도자 젠세릭은 도시를 함락하였지만 레오의 설득에 의해 로마 사람들을 살려주었다. 그 결과로 레오는 로마를 지킨 사람으로써 엄청난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 즈음 계속적인 침략에 의해 로마 제국은 공중에 떠 있었다. 그 이유는 제국의 지도자들이 로마를 떠났으며 야만족 지도자들 중에는 그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주교인 레오는 자기 앞에 놓인 기회를 보았다.

 “레오는 어거스틴이 말한 그리스도의 임시적인 천년왕국을 구현할 수 있는 시기가 왔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공적으로 자기에게 메고 푸는 권세가 승인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한 레오는 비어있는 왕위가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나라를 세우는데 합당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에게 그 권한을 선포했다. 이렇게 하여 로마 교회는 서방 제국으로 진입하였으며 따라서 서방 제국의 “실제적인 계승”을 잇게 되었다. 따라서 제국은 망하지 않았으며 그 형태만을 바꾼 것이 되었다. 교황은 황제의 계승자가 되었다. 이는 앞을 향해 성큼 큰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로마의 주교가 교황이 되다

 
서기 330년에 로마 제국의 수도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자 로마 주교의 권세는 놀라울 정도로 커지게 되었다. 한 동안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로마 사이에 있었던 누가 제일 큰가에 대한 교회 갈등은 이제 새롭게 등장한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교구로 한정되었다.

 서로마 제국을 향한 야만족들의 침공은 교황의 로마가 될 조직의 등장을 무한하게 도왔다. 계속적인 위협이 되었던 10개의 야만족들은 알라만니족, 앵글로 색슨 족, 부르군드족, 프랭크족, 헤룰리족, 롬바르드족, 오스트로고트족, 수에비족, 반달족, 그리고 비시고트족이다. 로마 황제는 이제 콘스탄티노플에 살고 있었지만, 로마 군사들은 로마를 계속 포위하고 있는 오스트로고트족과 전쟁을 치루면서 동시에 헤룰리족과 반달족을 뿌리째 섬멸하였다. 역사가 그래틴 기네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로마는 4세기가 되기 전에 기독교 주교의 본부가 되었다. 로마 제국의 분열과 부패 가운데 수도의 위치 때문에 로마 주교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 되었으며 라틴 기독교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여러 통치자들이 지나게 되면서 로마의 권력은 고트족과 반달족의 침략 앞에서 약해졌다. 오랜 로마의 조직 속에서 유일하게 생존하게 된 기독교 주교직과 교구는 거센 파도 가운데 단단한 암반처럼 그 고개를 들었다. 주변의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쓰러졌지만 주교의 권한은 유지되었다. 처음에 주교의 권한은 거대하고 강력한 고대 권력의 그림자 하에서 매우 작고 연약한 새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새로 생성된 고트족의 나라들이 난리를 일으키는 와중에 고대 로마의 권력 붕괴가 점점 구체화되는 상황에서 주교의 권한은 점점 더 안정되고 강하고 그리고 유일한 고대의 것이 되었다. 갓 전도된 이 거친 민족들에게 로마 교회는 자연스럽게 모교회가 되었고 로마의 주교는 기독교 주교 중에 수장이 되었다. 따라서 세상의 가장 오랜 대도시의 ‘라틴 교구’는 무지하고 미신적이며 철모르는 고트족 나라들 앞에서 ‘즉위하게” 됨으로써 처음에는 군주의 권력을 차지하더니 곧 황제의 권력을 갖게 되었다. 이 추세는 깊고 오래 견디더니 수세기를 지나면서 결국 우리가 ‘교황권’이라고 부르는 신성모독적인 단일 독재 권력 지배 체계를 만들어냈다.

“권력 강화는 다른 거대한 성장처럼 점진적이며 느렸다. 5세기 중엽부터 13세기 말까지, 즉 800년에서 900년이 걸리면서 교황권은 계속적으로 커지고 높아지면서 그 통치 영역은 더욱 넓어졌고 더 많은 엄청난 요구와 주장들을 하게 되었다.”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는 야만족 군주들 중에서 로마 교회가 제시한 믿음을 첫번째로 받아들인 군주였다. 그는 알라만니를 물리치면서 전쟁 중에 했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서기 496년에 램스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로마의 주교는 그에게 “교회의 장자”라는 칭호를 주었다. 6세기에는 브리튼의 앵글로 색슨족들, 남부 골(Gaul)의 부르군드족, 포르투갈의 수에비족, 그리고 스페인의 비시고트족 사람들 모두가 로마 주교의 종교에 가담했다. 이들 야만족의 왕들과 백성들은 로마의 믿음을 쉽게 받아들였는데 그 이유는 로마의 믿음은 복음이 빠졌으므로 자신들의 이방 예배와 형태나 본질에 있어서 별 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들 모두의 개종은 로마 종교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러자 이 야만족 나라들은 로마의 종교를 더욱 쉽게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또한 로마 도시는 전통적으로 로마 황제들이 세상의 주인으로서 권력을 누리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이제 로마의 주교들은 황제들을 계승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권력의 본부였던 도시는 이제 로마 주교가 그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자 더 많은 나라들이 그의 위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른 그 누구보다도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527‐565)는 로마 주교의 우월성을 설립한 장본인이다. 그는 이 일을 국가법 하에 교회 칙령과 규율을 가져옴으로써 공식적이고 법적인 방법으로 이루어냈다. 이 사실에 대해 역사가 프룸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위대한 업적 중에 하나는 교회 및 신학 문제의 규율을 세운 것으로서 그 규율 가운데 최고인 황제 칙서는 로마 주교를 교회의 ‘거룩한 모든 교회의 수장’으로 앉혔다. 따라서 교황의 교회 최고 위치에 대한 법적인 바탕을 마련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의 공식 법령은 당장 로마에서 실시되지는 않았지만 모든 로마 제국에 걸쳐 공식적으로 그 법이 효력을 나타낼 것을 공포하였다.

 

“‘따라서 로마 회의에 따라 우리는 고대 로마의 지극히 거룩한 교황은 모든 주교들 가운데 제일 높은 계급을 차지하며 새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는 다른 모든 직위 위에 우선하는 고대 로마의 거룩한 사도의 관할 다음의 둘째 계급을 차지한다.’ …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 위에 있는 교황의 우월성은 로마 세계의 세속적 권력이 줄 수 있는 최대의 허가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교황이 교회 위에 최고라는 사실에 대한 세속적 권력의 인가는 로마가 오스트로고트족의 포위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538년부터 일반적인 효력을 나타낼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칙령은 교황직을 만들어 내었다기 보다는 로마 주교의 통치 세력이 확장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마련해 준 것이 된다. 이때 황제는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다.

 

“유스티나이누스는 이탈리아를 다시 탈환함으로 인해 얻게 된 이권을 향상시켜서 서왕국에서의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이단과 분리를 쫓아냄으로써 그의 목표인 ‘종교 문제에 있어서 보편적 일치’를 이루고자 하였다. 그의 목적은 서부와 동부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교회의 일치를 이루어내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의 종교를 만드는데 있어서 로마 교회의 권위를 향상시키고 그 교회의 수장을 교회 일치의 후원자로 인정하는 것 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교황에서 사람들의 양심에 겁을 줄 수 있는 교회 파문 뿐만 아니라 법의 무거운 형벌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주권을 갖게 된 교황과 대주교들은 약 539년부터 그들의 칙령을 집행할 관리층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자신들의 재판권을 사용하여 민사 처벌을 집행하기 시작했다.”

 

정치를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것은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니겠지만 아무튼 제국의 무너짐을 완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입장 때문에 로마 제국은 교회의 연합을 강제로 강요하였다. 로마의 주교가 제국의 교회의 수장으로 선포되자 그에게 일이 생겼다. “교황”이라는 이름이 “로마의 주교” 자리에 앉는 사람에게 주어지기 시작한 것이며, 이제 그는 유스타나이누스의 칙령에 의해 맘껏 국가의 권력의 칼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전에는 교회의 일치가 사회에 빛과 소금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주교가 추구하여 얻은 것과 같은 비성경적 사상과 방법들은 세상의 부패와 다를 바가 없는 결과를 빚어냈다. 곧 바로 로마의 주교는 세상의 허세와 권력을 가진 왕처럼 군림하길 원했다. 주께서 경고하셨던 것들이 이제는 그들에게 동기부여가 되고 있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눅 22:25‐26).

 

제국은 계속 무너졌다. 황제 포카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602년부터 610년까지 집권했다. 607년에 교황이 된 보니페이스 3세는 이미 포카스를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는데 그는 교황이 되기 전에 황제 포카스에게 교황 특사였었다. 보니페이스는 황제로부터 더 많은 공식적인 인정을 얻어내는데 뛰어난 기술을 보였다.

 

“보니페이스는 황제 포카스에게 부탁하여 ‘복된 베드로 사도의 자리는 모든 교회의 머리여야 한다’라고 재언급하는 칙령을 얻어냈다. 이 칙령은 ‘전 인류의 주교” 라는 이름이 로마의 주교에게만 주어지도록 했다. 따라서 이 칙령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시리아쿠스가 자기 자신을 “전 인류의 주교”가 되려는 시도를 효과적으로 무마시켰다.”

 

교황 보니페이스 3세는 멸망하는 제국 내에서 교황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두 가지 계략을 사용했다. 첫째, 그는 베드로가 로마의 첫째 주교였다는 놀랄만한 억측을 하기 시작했다. 둘째, 황제 포카스에 의해 주어진 “전 인류의 주교”라는 칭호를 통해 로마의 중심 도시로부터 제국 모든 곳에 이르는 교회의 최고 통치 권한과 권력을 주장했다. 이 두 가지 술책은 역사 가운데 계속 진행되었다.

 

사기 문서와 이 세상에서의 교황 권력의 상승

 

8세기 중엽이 되자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 주교에게 권력과 권위와 궁전을 넘겼다는 이상한 주장이 나왔다. “콘스탄틴의 기증”이라는 거짓 문서에 의하면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의 주교가 된 실베스터(314‐335)에게 그의 대부분의 재산과 함께 위대한 영적 권세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콘스탄틴이 실베스터에게 엄청난 유산을 주었다고 주장하는 거짓 문서에서 인용한 것이다.

 

“우리는 모든 존엄과 영광과 제국의 권력의 모든 권위를 베드로의 관할로 한다. 더욱이 우리는 실베스터와 그의 계승자들에게 이 땅에서 비교할 수 없는 가장 멋진 궁전인 라테란 궁전을 넘긴다.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면류관과 주교관, 왕관 및 모든 제국의 권력의 자리들을 넘긴다. 우리는 그에게 제국의 위험을 넘긴다. 우리는 거룩한 교황에게 로마 도시와 이탈리아의 모든 서부 도시들을 드린다. 그에게 이 모든 것을 양도하기 위해 우리는 그 지역의 모든 권한을 내려 놓으며 우리는 로마에서 물러나 우리의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교의 수장을 세운 곳에서 이 땅의 황제가 조금이라도 권위를 유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콘스탄틴의 기증”은 754년 직전에 조작된 것 같다. 이에 대해 와일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문서를 보면 콘스탄틴이 8세기의 라틴어로 말하고 있으며 주교 실베스터를 ‘사도들의 왕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부르고 있다. 600년 이상 로마(교회)는 이 선물의 증서를 효과적으로 사용했고 그 선물의 증서를 법에 삽입하여 아무도 그 증서의 신빙성을 묻지 못하게 했으며 만일 믿지 않는 자가 있으면 화형에 처했다. 16세기가 되어 처음으로 빛이 떠오르게 되자 그 사기는 드러났다.”

 

8세기가 되니 사회 권력이 교황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한때 야만이었지만 이제 아리안 이단의 신자가 된 롬바르디아의 왕들은 로마까지 위협하면서 이탈리아를 완전히 정복하려는 뜻을 가졌다. 동시에 회교도들은 아프리카를 정복하더니 스페인을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로마를 위협하고 있었다. 교황 스티븐 2세는 프랑스에 도움을 구했다. 그는 샤를마뉴 대제의 아버지이며 또한 찰스 마르텔(찰스 해머)의 아들인 난쟁이 페핀을 불렀다. 당시 페핀은 왕의 땅과 군대의 수석 장관이었다. 페핀은 킬데리크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자신의 새로운 지위의 승인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군사들과 함께 알프스를 넘어와서 롬바르드군을 쳐부술 수 있었다. 그는 정복한 도시들을 교황의 소유로 바쳤다. 따라서 755년에 난쟁이 페핀은 교황에게 세상 권력을 다시 쥐어 주었고 자신은 교황으로부터 승인을 얻어냈다.

 

페핀의 아들 샤를마뉴는 교황의 세속 권력을 계속 강화하였다. 롬바르드군은 다시 로마를 포위하려고 했다. 교황은 다시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으며 이번에는 샤를마뉴가 그 요구에 응답하여 롬바르드군을 쳐부수었다. 샤를마뉴 대제는 아버지가 물려준 땅과 도시들을 더 넓혀서 로마 교회에 바쳤다. 후에 80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로마 및 독일 나라들을 거의 재패한 샤를마뉴는 교황 레오 3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교황은 그의 머리에 서부 제국의 왕관을 씌웠다. 이 행위는 교황의 권력이 계속 자라나는 것을 보여주었다. 538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로마의 주교에서 ‘보편 교회의 사제장직(Pontifex Maximus)’의 칭호를 준 것이 262년 후에는 황제에게 왕관을 씌우는 교황이 되어 있었다.

 

조작된 위조 “콘스탄틴의 기증” 문서는 50년이 되기도 전에 이미 가장 유용한 여러 수단들 중에 하나가 되었다. 교황 니콜라스 1세는 865년에 이 위조 문서와 다른 위조 문서들로부터 주교들과 군주들의 굴복을 요구하였으며 또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다. 이후로 교황의 교만과 그들의 재정은 한없이 커졌다. 교황은 자신들의 교만 가운데 도취되어 버렸고 10대 및 20대에 있던 몇몇 교황들은 이성을 잃고 극악한 행위 가운데 빠져 버렸다. 역사 가운데 악독하기로 유명한 여인들인 데오도라와 마로지아는 수년 동안 교황의 성좌를 차지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의 연인들과 아들들과 손주들까지 소위 교회의 주인들로 세우기도 하고 퇴위 시키기도 하였다. 불경건한 교황좌는 자신들이 군주들과 왕들의 위엄보다 더 높이 오른 것을 알자 쓰레기 같은 죄악으로 치달았다. 약 200년 동안 교황직은 광란의 장이었으며 이탈리아의 가장 강력한 가문들 사이의 권력 다툼의 본거지였다. 와일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장 많은 뇌물을 줄 수 있는 부자거나 또는 로마의 출입문에 군대와 함께 나타날 수 있을 만큼의 권력을 가진 자가 틀림없이 바티칸의 황제가 되었다. … 교황들은 최고 뛰어난 수장을 뽑는 그들의 원칙의 어떤 공식적인 내용으로 세상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행동으로 그들의 원칙을 구현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들은 세상이 어떤 이론적 진리를 인정하도록 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 원칙을 실제적으로 적용하여 익숙하게 만드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즉, 이론이 아니라 이미 발생된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황들은 아주 과감하고 성공적인 술책으로 교황의 최고 우월함을 유럽의 일반 정책에 삽입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살인과 고문을 행하는 인간의 정욕

 

1073년은 끔찍했던 패륜의 세기로부터 돌아서는 해였다. 이제 엄격하게 훈련된 모습이 교황직의 표준이 되었다. 그러나 육체의 욕망을 넘어서는 교황의 정욕은 세상과 교회를 완전히 장악하려는 목표로 나아갔다. 그 당시 샤를마뉴 왕조는 교황의 야망을 저지하기에는 너무 약해있었다. 특히 교황 그레고리 7세 (힐데브란트로 알려져 있음) 기존의 다른 교황들보다 훨씬 더 야망이 컸다. 그는 교황의 통치는 실제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라고 확신하였고 따라서 영적이든 현세적이든 이 세상의 모든 권위와 권력을 “베드로의 자리”에 구체적으로 굴복시키기로 다짐했다. 교황의 방대한 조직을 꿈꾼 자가 바로 이 그레고리 7세다. 그의 목표는 교회든 정부이든 교황이 최고 통치자이며 모든 지도자들의 심판자가 되는 것이었다. 와일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정열과 열심을 가진 그레고리는 성좌와 영주 간의 전쟁을 다시 일으켰다. 그레고리 7세의 목표는 두가지였다. (1) 교황 자리의 선거는 황제와 독립되어 진행될 수 있도록 한다. (2) 다시 제국을 교회의 봉토가 되도록 하고 교황의 통치를 세상 나라들과 왕들 위에 세우도록 한다. 이러한 방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한 그의 첫 단계는 … 사제의 독신주의를 규정하였다. 그의 두번째 단계는 모든 교회직에 있어서 세속 권력이 임관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레고리 7세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의식을 주창했다. 그가 신권에 의해 교황직의 최고위를 주장하면서 황제들과 왕들의 굴복을 분명하게 요구하였다.

 

“제국의 몰락은 로마 주교의 등용을 가장 구체적으로 돕게 되었다. 첫째, 제국의 몰락은 황제들을 제거했고, 둘째로 로마 주교들에게 마음을 쏟게 하였다. 지금까지는 제국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로마 주교의 탁월함을 돕도록 하였지만 이제 그 영향력이 사라졌으니 다른 요소를 강조하게 되었다. … 교황직 자체를 설립하는 것이다. 즉 교황의 영적 그리고 현세적 통치 하에 복잡한 구조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 그 사상에는 로마의 주교는 베드로의 계승자라는 점, 사도들 중에 왕자라는 점..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 사상은 한 동안 유포되었다.

“교황위의 뛰어남은 종교 회의의 법령들에 의해 공표되었고 제국의 칙령에 의해 인준되었다. 그러나 교황들은 종교 회의와 황제들에 의해 주어진 것은 다시 종교 회의와 황제들에 의해 빼앗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 둘에 의해 제정된 것은 버리고 ‘신적인 권한’을 그 자리에 집어넣었다. 따라서 세월이 지나든 상황이 바뀌던 교황의 유일한 권력은 정복될 수 없게 되었다. 그 이후로 로마는 파괴될 수 없었다.”

 

교황위가 최고 위라는 인식을 구체화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레고리는 교활한 이 인식을 붙들고 힘찬 야망을 가지고 밀고 나갔다. 더욱이 그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소유한 어마어마한 소유로 인해 그 야망을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간교한 야망의 실현은 그레고리가 집권하는 기간(1073‐1085)에 벌써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그레고리 7세 이후에 등장한 교황들은 그가 설립한 구조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들은 거짓과 십자군과 파문을 사용해서 전 세계를 교황의 정치세력 아래에 들어오게 하는 과업을 계속 진행시켰다. 그레고리 7세의 통치로부터 약 200년간 교황위는 로마 종교의 모든 이름으로 그 권력과 영광에 있어서 계속 커나갔으며 그 와중에 수천 수만의 생명을 파괴하였고 많은 왕들과 군주들을 폐위시켰으며 수 없이 많은 도시를 파괴하였고 셀 수 없을 정도의 대지와 농장을 철저하게 황폐하게 하였다.

 

교황 이노센트 3세(1198‐1216)과 보니페이스 8세(1294‐1303)는 교황직이 영적이며 현세적인 권력을 완전히 차지할 수 있는 최종적 승리를 다졌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알비젠스파 사람들을 대항하여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였으며 십자군에 가담하는 사람들에게 전원 그들의 죄악을 다 용서해 줌으로써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전쟁은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함 그 자체였다. 모든 마을과 도시의 사람들이 무작위로 도살 되었고,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화형을 당했으며 다른 많은 사람들은 가장 무서운 고문을 당하였다. 이때의 만행과 살인의 역사는 여러 자료들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교황 보니페이스 8세는 “완고하고 야망이 넘치는 천재였고 그 마음은 허망하고 파렴치했다. 그는 마음 속 깊이 교황은 문자 그대로 이 땅에의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믿었으며 따라서 자신은 예외적인 권한들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를 대적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따라서 반드시 악한 자여야 했다.” 그는 그의 교령 “거룩한 하나의 교회(Unam Sanctum)” 로 가장 유명하다. “우리는 모든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해 반드시 전적으로 로마 교황에게 굴복해야 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하며, 말하며 정의하며 선포한다.” 교황 이노센트 3세로부터 교황 비오 7세까지 75명의 교황이 지나면서 그들은 모두 고문과 살인과 화형과 신자들의 소유를 압류하는 것을 승인함으로써 고문의 무서운 역사를 남겼다. 물론 참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기간에 죽음을 당했다.

 

600년 이상의 교황 종교 재판

 

종교 재판(the Inquisition)은 역사적으로 로마 교황이 소위 ‘이단’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투옥하고 죽였던 때를 구체적으로 이르는 용어이다. 교황이 그러한 고문과 사형을 공포하기 전에는 교구 차원에서 투옥이나 압류와 같은 핍박을 했었다. 성경의 예언은 어떤 일이 실제로 발생할 지 미리 말하였다.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계 13:7). 이 구절은 교황의 박해가 진행되었던 수백년 동안 유럽 전반에 걸쳐 왈덴시스 사람들, 알비겐시스 사람들 등, 주님의 주님의 백성들을 향한 전쟁에서 이루어졌다. 이 예언은 또한 다니엘서의 내용과 같다.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과 더불어 싸워 그들에게 이겼더니” (단 7:21).

 

종교 재판 중에 “모든 것 중에 가장 소름끼치는 혐오스러운 것은 고문 시스템이었다. 냉혈 기계로 불리는 고문 시스템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누구든지 이 고문을 본다면 무릎이 떨릴 것이다. 이러한 고문 시스템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교황들에 의해 규정되고 합법화되었었다. 1252년 교황 이노센트 4세는 엄숙하게 고문 시스템을 승인하였다. 이를 다시 확증하고 규정하는 법령이 알렉산더 4세, 클레멘트 4세, 어반 4세, 클레멘트 5세에 의해 발표되었다. 교황들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였다” (계 17:6). 교황 교회만큼 그렇게 깊게 피에 취한 나라들이나 권력들은 없었을 것이다. 이 사실들은 부정할 수 없다. “조심스럽고 믿을 만한 역사가들의 평가에 의하면 600년에 교황 제도가 발생된 이래로 지금까지 15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단으로 몰려 교황이 세운 박해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교황직이 존재하는 매해 약 4만명 이상이 종교적으로 살해당했다.”

 

모든 나라에 설치되어 로마에 의해 조정을 받았던 종교 재판을 위한 고문실은 약 600년 이상 유지되었다.고문을 위한 기구들은 무시무시했다. 감각이 예민한 사람은 와일리가 기록한 이 내용을 기도를 통해 용기를 얻기까지는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고문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더 무서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고문 기구들이 이곳 저곳에 걸려 있었으며 너무나 많아서 하나 하나 그 이름을 말하는데도 한참 걸렸다. 또한 그 다양성이 대단하여 그것을 설명하는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한꺼번에 그것들을 볼 뿐이었다. 사실 그것을 하나 하나 살피며 어떻게 동작되는지 연구해 본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모든 고문 기구들의 발상과 기술들은 원하는 무서운 목적을 이루는데 완벽했다. 손가락 뼈가 가루가 되도록 뼈를 찧는 기구가 있었다. 불에 타는 것 같은 가장 큰 고통을 느끼도록 손톱 아래로 신경을 따라 찌르는 바늘 같은 기구들이 있었다. 혀를 잡아 빼는 도구가 있었고 눈알을 패서 뽑는 기구, 귀청까지 쑤시는 기구들이 있었다. 또한 철로 된 채찍들이 많았는데 그 채찍으로 때렸을 때 사람의 등에서 살점을 떼어내어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 그 끝은 뾰족한 못들이 달려 있었다. 철로 만든 상자들이 있었는데 그 상자에 다리를 얹게 되어 있었고 옆의 나사로 조이면 살과 뼈가 젤리처럼 되도록 되어 있었다. 날카로운 못으로 가득한 요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그곳에 누우면 이리 저리 굴리게 되어 있었고 그러면 온 몸이 못에 찔리게 되어 있었다. 그 비참한 희생자는 셀수 없이 많은 날까로운 못의 기계에 끝없이 찔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긴 목을 가진 철로 된 국자가 있었다. 그 국자는 녹힌 납이나 끓고 있는 역청을 담아 희생자의 목청에 부음으로써 그 몸을 끓는 남비로 만들어 버린다. 손과 발을 구멍에 넣을 수 있도록 만든 틀이 있었는데 그 틀은 사람의 발과 손을 꼬아 이상하고 고통스런 자세를 만들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면 고통이 순간마다 계속 커지게 되면서 결국 죽게 된다. 한편 작지만 가장 섬세하게 만들어진 기구들이 가득 있었다. 그 기구들은 몸의 가장 예민한 부분들을 죄고, 찌르고, 찢어낼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정신을 잃거나 혹은 죽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었다. 그 건물의 바닥과 벽에도 찢어 내는 도구, 난도질 도구, 산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기구등, 똑 같은 무시무시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훨씬 더 큰 고문 기구들로 가득차 있었다. 이 도구들은 우리가 방문하게 될 다른 깊은 감옥에서 사용되는 것들이었다.”

 

종교 재판에 대한 고발

 

교황의 종교 재판에 대해 가장 잘 요약한 것은 카톨릭의 유명한 역사학자 로드 액톤이 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종교 재판은 특히 무기이며 또한 교황이 한 일이다. 종교 재판은 결국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로마 교황의 분명한 모습을 따르고 동의하고 협조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종교 재판은 교회 내 가장 높은 권위로부터 오랜 기간 내려오는 법령에 의해 계속 새롭게 되고 더욱 완벽하게 되었다. 어떤 다른 기관도, 교훈도, 행사도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 외에는 교황직이 만든 이 두드러지고 독창적인 창작품을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이다. 종교 재판은 교황직과 가장 일치가 되는 원칙이며 따라서 종교 재판의 원칙에 의해 교황직을 판단해야 한다. 종교 재판의 원칙은 교황이 죽음과 삶의 주권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불순종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재판을 받고 고문과 화형을 당해야 한다. 만일 이렇게 될 수 없다면 법적인 정식 절차를 통해 반역자가 되어 사형을 당하게 된다. 즉, 종교 재판의 원칙은 살인적이다. 교황에 대한 사람의 의견은 그것이 종교 훼손의 규정에 해당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교황들은 참 신자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과 잔인한 죽음을 가했다. 마치 구약에서의 주의 백성들이 당한 고통과 같았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히 11:36‐38). 아더 핑크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교황들은 이 점에서 이방인들 보다 더 심했다. 프랑스 및 여러 다른 곳에서 행한 그들의 잔인한 대량학살을 보라. 성령께서는 이 창녀 바벨론을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계 17:6) 라고 말씀하신다. …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상습적으로 가장 무자비하고 양심이 없이 잔인하게 핍박하던 자들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

 

종교 개혁과 교황 제도의 특성 비교

 

종교 개혁 기간은 많은 역사적인 인물들과 엄청난 양의 신학적 논쟁으로 가득찼었다. 그러나 모든 교리적 이슈들과 사건들 가운데 개혁주의자들 사이에 받아들여진 것은 5개의 성경적 원칙이었다. 믿음과 도덕에 대한 모든 문제에 있어서 오직 성경만이 최종 권위를 갖는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각 개인은 은혜로만, 믿음을 통해서만,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얻는다. 따라서 모든 영광과 존귀는 하나님만이 받으신다. 종교 개혁의 특징을 개괄적으로 보기 위해 다음의 긴 인용을 보도록 하자.

 

“개신교의 개혁은 분명한 특징이 있으며 그 특징들은 역사 속의 다른 개혁들로부터 종교 개혁을 따로 구별시킨다. 가장 뚜렷한 특징 중에 하나는 지역적인 범위다. 종교 개혁은 여러 유럽의 나라들에서동시에 각각 독립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마틴 루터가 1517년에 그의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붙일 그 당시 영국 성의 성 바울 학교의 교장이었던 존 콜렛은 카톨릭 교회의 악습들을 거절하면서 믿음의 법칙으로서 성경의 최고 권위를 주장하였다. 프랑스의 리페브르, 스위스의 즈윙글리는 동시에 교회의 악들에 대항하여 설교하였으며 구원의 문으로서 그리스도를 지적했다. 비록 루터가 개혁의 창시자로 불리고 있으나 다른 개혁자들도 루터에게 배운 적이 없는데 루터와 똑같은 메시지를 발견하여 선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이 가능하도록 하고 그 진전이 가능하게 한 힘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었다. 에라스무스에 의해 준비된 헬라 신약 성경은 모든 유럽의 학자들이 진리와 생명의 길을 배우는데 도움이 되었다. 개혁이 일단 진행되자 개혁자들 사이에는 깊은 우정과 형제애가 생기게 되었다. 서로의 생각을 자주 주고 받았으며 대접도 자유롭게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졌다. 개혁의 놀라운 특징 중에 하나는 서로의 노력을 격려하면서 나누는 개혁자들 간의 접촉과 협력의 범위였다. 개혁은 놀라운 속도로 퍼져나갔다. 물론 단합과 수정과 확장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렇게 엄청난 개혁이 그만한 방대한 규모로 그렇게 짧은 기간에 이루어지면서 수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여전히 역사 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건 중에 하나다.

 

“개신교의 개혁은 실제로 유럽의 배움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각 나라의 대학에서 시작되었다. 비텐베르크의 루터와 멜란히톤과 같은 학자들 뿐만 아니라 옥스포드의 에라스무스와 콜릿, 캠브리지의 빌니, 라티머, 그리고 카트라이트, 파리의 르페브르와 파렐 등, 많은 학자들이 있었다. 종교 개혁의 지도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그 시대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베자와 틴데일은 문학에 뛰어났으며 크랜머와 발데스 같은 사람들은 법에 능하였다.

 

“다른 시대에서는 덜 배우고 재능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 더욱 효과적으로 능력으로 복음을 전파했는데 왜 그 당시는 이러한 지성인들이 필요했을까? 적어도 두개의 답변이 가능하다. 오직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이 히브리어, 라틴, 헬라어를 알고 있었으며 그 당시의 성경을 읽으려면 이러한 언어를 알고 있어야 했다. 또한 성경이 각 나라의 방언으로 번역되어야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나라 언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기에 이러한 일은 학문을 요구하였다.

“만일 일반인을 위해 각 나라의 방언으로 성경이 번역되지 않았다면 루터와 라티머, 즈윙글리, 낙스, 위셔트 등의 많은 설교들이 개혁을 이루어 내는데 실패하였을 것이다. 만일 라티머가 캠브리지에서 설교하는 순간에 대륙으로 도망하였던 틴데일이 수천권의 영어 성경책들을 밀수하여 모든 영국 사람들이 스스로 구원의 길을 읽을 수 없었다면 영국에서는 개혁이 없었을 것이다. 비슷한 상황이 독일, 프랑스 등 여러 다른 나라들에서 발생했다.

 

“이러한 두가지 조건과 함께 절대적인 세번째 요소가 결합되어야 했다. 그것은 인쇄의 발명이다. 인쇄는 번역된 성경의 출판을 가능하게 했으며 일반사람들이 구입할 수 있는 가격으로 만들어 주었다. 10년 기간으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성경 번역을 받을 수 있었다. 루터는 1522년에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르페브르는 1523년 프랑스어로, 틴데일은 1525년에 영국어로, 브로치올리는 1523년에 이탈리아어로 번역했다. 그 다음 10년 내에 프랜시스코 엔지나스는 스페인어로, 페트리는 스웨덴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그 바로 직후에 마자르에서 가장 활동적인 설교가 중에 한 사람이었던 카톨리는 마자르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종교 개혁자들 간에 또 다른 주목할 만한 특징은 중요한 교리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동의였다. 모든 종교 개혁자들이 서 있던 교리는 믿음에 의한 칭의였다. 그들은 구원은 행위나, 금식이나, 돈, 고백 성사 등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믿었다. 이 교리는 개혁의 모퉁이돌이 되었다. 또한 성경의 최고 권위와 충분성에 대해 일치하였다. 두가지 종류의 성사, 그리고 성자 숭배, 형상, 유물, 연옥, 미사, 독신주의, 교회의 머리로서의 교황 등의 교리는 다 거절하였다.

 

“종교 개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카톨릭의 권위로부터의 분리는 상당히 짧은 기간 내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교황의 모든 가르침들이 갑자기 다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 개혁은 행동과 반응을 전부 포함해서 계속 진행되었으며 빛을 많을 수록 더 많은 영광을 쌓아갔다. 종교 개혁은 영광스러운 영적 각성이었다.”

 

결과 및 교훈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운 사람들은 교황 제도와 그 운영 자체에 대해 염려한다. 성경이 말하는 불법의 비밀은 무신론자들의 매춘행위나 술주정 등과 같은 악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 종교의 악을 의미한다 (마 7:15, 24:24‐25; 살후 2:3‐12; 딤전 4:1‐2; 행 20:29; 벧후 2:1). 성경은 “경건의 비밀”(딤전 3:16)과 “불법의 비밀”(살후 2:7) 을 둘 다 계시한다. 이 둘을 비교해 보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놀랍기까지 하다. 주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셔서 주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는 것처럼 (계 7:3),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의 이마에 심부름꾼을 시켜 표를 찍어주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 (계 13:16). 그리스도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처럼, 거짓 표적을 행하는 다른 존재가 있다 (살후 2:9). 구세주는 위엄의 보좌에 앉으셨는데, 주께 대항하는 자를 위한 자리가 있다 (계 2:13). 그리스도 예수는 그의 백성과 교회가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존재도 그의 회와 거짓 교사들이 있다 (계 2:9; 벧후 2:1). 그리스도에게 대항하기 위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고후 11:14) 존재가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만이 참으로 이 세상의 빛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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