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로 본 죄악 (막 14:17-21)
가룟 유다로 본 죄악 (막 14:17-21)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 시간 “가룟 유다로 본 죄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원수들에게 판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므로 결과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죽인 자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마26:24에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신 것처럼 제자였던 가룟 유다의 죄는 일반 죄인들의 죄와 다릅니다.
히6:4-6에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기억할 것은 우리 마음에도 이런 가룟 유다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 가룟 유다는 무엇일까요?
1. 우리 안의 가룟 유다는 교만입니다.
잠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가장 큰 문제는 교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난 주간 넷째 날에서 봅니다. 전통적으로 고난 주간 넷째 날 수요일을 사랑과 배신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그때 주님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사랑을 받았고 바로 다음에 유다로부터 배신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극과 극의 장면이 연이어서 나오는 것은 유다의 오해에서 비롯된 예수님께 대한 분노가 깊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다른 제자들보다 똑똑했습니다. 계산이 빨라 돈 궤를 맡았고, 출신도 다른 열한 제자들과는 달리 남쪽 유다의 교육도시인 가룟이라는 도시였습니다. 이런 우월의식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을 때, 유다는 비싼 향유를 허비했다고 그 여인을 책망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유다를 제지시키고 도리어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마땅히 제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인데도 교만한 유다는 그것을 감정으로 받았습니다. 틀린 말도 아닌데 자기는 무시 받고 별 볼 일 없는 여인을 두둔하시니 면박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난 예수의 사도인데 나를 일개 무명의 여인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시는가? 그 격한 감정 가운데 마귀가 들어가 결국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고 결심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교만이 무섭습니다. 교만이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합니다. 시험 들게 합니다. 내가 누군데 하는 순간 시험이 옵니다. 내가 누군데 이것이 교만입니다. 교만과 우월감이 있다면 그 교만이 때를 만나면 얼마든지 큰 사고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2. 우리 안의 가룟 유다는 내 생각입니다.
롬8:7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다른 이유는 야심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도 한동안 그런 야심을 가졌는데 유대인의 왕 예수를 따르다 한자리하려는 정치적 야심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이적과 기사 등 메시아의 표적이 나타날수록 야심은 힘을 더해갔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서까지 누가 크냐로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점점 자기 기대와는 다르게 세상적인 야심을 버리라 하시고 그 반대의 길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왕이 될 채비를 하지 않고 비천한 사람들만 섬기며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다는 말씀만 하십니다.
이것을 본 가룟 유다는 답답하고 속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예수님에 대한 배신은 성만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요13:2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했고, 27절에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했습니다.
혹자는 예수님이 죽게 되면 암행어사 출도야 라도 하시겠지 하는 극적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 생각입니다. 내 생각은 곧 육신의 생각이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이 유다의 생각이 곧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3. 우리 안의 가룟 유다는 탐심입니다.
히12:16-17에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가룟 유다의 또 하나의 약점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그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책망한 것도 구제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아 훔쳐 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탐심이 두려운 것은 탐심 그 자체가 예수를 파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한 그릇의 식물을 위해 장자권을 판 에서와 같고,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리에 탐심이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씀합니다. 마24:15에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하셨는데 이런 현상이 우리 마음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탐심이 돈 혹은 다른 무엇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탐심을 품을 때 그것은 예수를 파는 죄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보다 사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고 그 무엇도 바꾸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4. 우리 안의 가룟 유다는 자존심입니다.
눅14:27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나를 죽이라는 말씀인데 가룟 유다는 제자 중에서 자존심이 가장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여러 차례의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자존심 때문입니다.
향유 사건을 통해서 질책하시므로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적의 마음을 회개하기는커녕 반항함으로 예수님을 팔 결심을 했습니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에서도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시며 그의 회개를 유도했지만, 유다는 “저건 나 들으라는 소리구나!”하고 자존심만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근심하며 한 사람씩 “접니까?” 하고 질문했지만 유다는 콧방귀만 끼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유다에게 또 다시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그러시면서 “나를 파는 그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그는 차라리 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뻔하였느니라” 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다릅니다. 자존감은 머물러 있는 느낌으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런 뿌듯한 자부심 같은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부자이기도 한 어떤 사람은 남루한 옷과 중고차를 타고 다니면서 무시 받는 것을 즐긴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자존감이 있기에 그걸 즐기면서 살아요. 그러나 자존심은 자부심도 없이 조그만 무시에도 심리적인 발작을 일으키는 병든 상태입니다.
이처럼 자존심은 믿음 없음에서 비롯한 몽니입니다. 이걸 버리지 않으면 사탄이 무슨 일과 매치시켜 요지부동하도록 쐐기를 박아 이걸 내려놓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살면 예수님이 죽고 내가 죽으면 예수님이 산다는 점에서 나라는 자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죄라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팔아서 죽게 한 가룟 유다의 죄가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아직도 교만, 육신의 생각, 탐심과 자존심 등 주님을 대적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시간 다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죄들은 예수님을 두 번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큰 죄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의 기쁨이 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 시간 “가룟 유다로 본 죄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원수들에게 판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므로 결과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죽인 자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마26:24에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신 것처럼 제자였던 가룟 유다의 죄는 일반 죄인들의 죄와 다릅니다.
히6:4-6에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기억할 것은 우리 마음에도 이런 가룟 유다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 가룟 유다는 무엇일까요?
1. 우리 안의 가룟 유다는 교만입니다.
잠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가장 큰 문제는 교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난 주간 넷째 날에서 봅니다. 전통적으로 고난 주간 넷째 날 수요일을 사랑과 배신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그때 주님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사랑을 받았고 바로 다음에 유다로부터 배신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극과 극의 장면이 연이어서 나오는 것은 유다의 오해에서 비롯된 예수님께 대한 분노가 깊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다른 제자들보다 똑똑했습니다. 계산이 빨라 돈 궤를 맡았고, 출신도 다른 열한 제자들과는 달리 남쪽 유다의 교육도시인 가룟이라는 도시였습니다. 이런 우월의식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을 때, 유다는 비싼 향유를 허비했다고 그 여인을 책망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유다를 제지시키고 도리어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마땅히 제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인데도 교만한 유다는 그것을 감정으로 받았습니다. 틀린 말도 아닌데 자기는 무시 받고 별 볼 일 없는 여인을 두둔하시니 면박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난 예수의 사도인데 나를 일개 무명의 여인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시는가? 그 격한 감정 가운데 마귀가 들어가 결국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고 결심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교만이 무섭습니다. 교만이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합니다. 시험 들게 합니다. 내가 누군데 하는 순간 시험이 옵니다. 내가 누군데 이것이 교만입니다. 교만과 우월감이 있다면 그 교만이 때를 만나면 얼마든지 큰 사고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2. 우리 안의 가룟 유다는 내 생각입니다.
롬8:7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다른 이유는 야심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도 한동안 그런 야심을 가졌는데 유대인의 왕 예수를 따르다 한자리하려는 정치적 야심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이적과 기사 등 메시아의 표적이 나타날수록 야심은 힘을 더해갔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서까지 누가 크냐로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점점 자기 기대와는 다르게 세상적인 야심을 버리라 하시고 그 반대의 길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왕이 될 채비를 하지 않고 비천한 사람들만 섬기며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다는 말씀만 하십니다.
이것을 본 가룟 유다는 답답하고 속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예수님에 대한 배신은 성만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요13:2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했고, 27절에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했습니다.
혹자는 예수님이 죽게 되면 암행어사 출도야 라도 하시겠지 하는 극적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 생각입니다. 내 생각은 곧 육신의 생각이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이 유다의 생각이 곧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3. 우리 안의 가룟 유다는 탐심입니다.
히12:16-17에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가룟 유다의 또 하나의 약점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그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책망한 것도 구제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아 훔쳐 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탐심이 두려운 것은 탐심 그 자체가 예수를 파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한 그릇의 식물을 위해 장자권을 판 에서와 같고,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리에 탐심이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씀합니다. 마24:15에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하셨는데 이런 현상이 우리 마음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탐심이 돈 혹은 다른 무엇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탐심을 품을 때 그것은 예수를 파는 죄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보다 사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고 그 무엇도 바꾸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4. 우리 안의 가룟 유다는 자존심입니다.
눅14:27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나를 죽이라는 말씀인데 가룟 유다는 제자 중에서 자존심이 가장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여러 차례의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자존심 때문입니다.
향유 사건을 통해서 질책하시므로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적의 마음을 회개하기는커녕 반항함으로 예수님을 팔 결심을 했습니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에서도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시며 그의 회개를 유도했지만, 유다는 “저건 나 들으라는 소리구나!”하고 자존심만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근심하며 한 사람씩 “접니까?” 하고 질문했지만 유다는 콧방귀만 끼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유다에게 또 다시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그러시면서 “나를 파는 그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그는 차라리 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뻔하였느니라” 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다릅니다. 자존감은 머물러 있는 느낌으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런 뿌듯한 자부심 같은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부자이기도 한 어떤 사람은 남루한 옷과 중고차를 타고 다니면서 무시 받는 것을 즐긴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자존감이 있기에 그걸 즐기면서 살아요. 그러나 자존심은 자부심도 없이 조그만 무시에도 심리적인 발작을 일으키는 병든 상태입니다.
이처럼 자존심은 믿음 없음에서 비롯한 몽니입니다. 이걸 버리지 않으면 사탄이 무슨 일과 매치시켜 요지부동하도록 쐐기를 박아 이걸 내려놓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살면 예수님이 죽고 내가 죽으면 예수님이 산다는 점에서 나라는 자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죄라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팔아서 죽게 한 가룟 유다의 죄가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아직도 교만, 육신의 생각, 탐심과 자존심 등 주님을 대적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시간 다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죄들은 예수님을 두 번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큰 죄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의 기쁨이 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나의 피난처가 되시는 주님 (0) | 2024.08.25 |
---|---|
요14;28-31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0) | 2024.08.20 |
스크랩 성도 삶의 8대 기준 (약 3:13-18) (0) | 2024.08.20 |
주일설교. 시기의 말을 버리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 2장 1절 ~ 10절) (0) | 2024.08.19 |
스크랩 중국과 이란, 왕들의 협력과 전쟁 (창세기 14장 1~2절) (0) | 2024.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