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시기의 말을 버리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 2장 1절 ~ 10절)
주일설교. 시기의 말을 버리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 2장 1절 ~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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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질투(기, 투기)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질투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질투(시기,투기)를 물리치고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를 향한신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은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 1~3절을 읽어 드립니다.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아멘.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 보았으면(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값없이 받은 자들이라면) 너희 스스로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기 위해서(믿음의 수준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순전하고 신령한 젖(칭의에 머무르지 말고 성화와 영화로 인도함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삶)을 사모하라 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요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완성형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연약하고, 여전히 세상적이고, 여전히 간사하고, 여전히 교만하고, 여전히 죄와 악에 쉽게 노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모든 여전함을 완전하게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변화와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활동하던 초대 교회 시절에는 기독교인에 대한 극심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루라도 빠리 재림 하셔서 고통과 억압이 없는 영원한 나라가 속히 오기만을 학수고대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박해와 핍박으로 고통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복돋아 주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붙잡고 사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유일한 소망이자 완전한 승리라는 것을 전달해 주고자 이 편지를 썼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붙잡고 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당연한 삶인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이것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뜨면 매일 같이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치고, 감정이 섞이고, 문제가 생기고, 스트레스가 쌓여가는 일상이 끊임 없이 반복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붙잡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목회에만 집중하는 목사도 집중하며 사는 것이 잘 안 되는데 정신 없이 바쁜 직장과, 가정과, 학교와, 모든 사회 관계속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붙잡고 산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 사도는 너희들이 주의 인자하심을 맛 보았으니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기 위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며 살아야 된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그리스도를 붙잡는 삶을 살기 위해서 너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인 직장과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1절에서와 같이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살아라는 말씀과 오직 예수님을 붙잡고 살아라 라고 “오직”이 앞에 붙으면 부담이 엄청 납니다. 1절에서도 질투(시기, 투기)하지 말아라는 말씀과 모든 질투를 하지 말아라 라고 “모든”이라는 말이 역시 앞에 붙은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악독하고, 기만하고, 외식하고, 시기하고, 비방하는 모든 말은 단 한 마디도 생각도 하지 말고 입 밖에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를 붙잡고 사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삶의 현장에서 만나본 그리스도인들 중에 “오직”, “모든”에 부합되는 사람을 얼마나 보셨습니까? 여러분 자신은 여기에 포함 되시나요? 솔직하게 주변에서 이런 분들을 찾아보려고 해도 눈을 씻고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만큼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도 왜 우리는 질투(시기,투기), 악독, 비방, 외식을 도무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말도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안이 열려 영적 셰계를 바라보고, 영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존재를 마음으로 생각하며, 보이지 않는 분과 만남과 대화를 시도해야 하는 지난한 일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시도해 보다가도 보고, 듣는 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너무나 망상적이고 허상을 쫓는 것 같은 낙심의 마음으로 대부분이 중도에 포기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냥 주어진 주일 예배 시간에 예배에 참석하고, 그 시간에 찬양하고, 그 시간에 말씀 듣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되어 버리는 이른바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일상이 되다 보니 교회에 나와서 예배와 봉사하는 모습만 보고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이 좋다라고 칭찬하고 자기 스스로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그릇된 생각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성경 말씀으로 이런 그릇괸 생각을 바로 잡아 줍니다. 교회 안에서의 생활은 물론이고, 교회 밖의 삶의 현장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라, 교회 안에서 보다 교회 밖에서 더더욱 모든 질투, 비방, 외식, 악독을 삼가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 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현재 우리의 상황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는 험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모든”으로 그렇게 살아가라고 베드로 사도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언가 보여지는 것이 분명히 있어야 믿으려고 하고, 어떤 일들에 대해 빠르게 결과들이 나타나면 그때서야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물건이 금방 나오면 당연한 듯 여기지만, 돈을 넣었는데도 물건이 안 나오는데도 무작정 나오기만을 믿고 기다리라고 하면 누가 거기에 있으려고 하겠습니까? 성질 급한 사람은 자판기를 두드리고 부수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허상을 쫓는 것 같고, 믿는 사람들이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밥이 나오지도 떡이 나오지도 않는데도 바보들 같이 시간과 노력을 허비 하면서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80~90%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도무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나마 10~20% 신자들 중에서 주님 오시는 날이 가까워 질수록 믿음에서 이탈하는 숫자가 급속하게 늘어날 겁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과 시선은 그렇다고 해도 베드로 사도가 말 한 대로 주의 인자 하심을 맛 본 우리들은 구원에 이르도록 내 믿음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 진짜 성경 말씀 대로 “오직”, “모든”을 목표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각자 주어진 환경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이유는, 성령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예비 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다. 하라, 하지 말라는 요구가 성경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 많은 요구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용어가 “구별”입니다.
세상에서 따로 떼어내서 모이게 불려 모여진 곳이 “교회(헬, 에클레시아)” 라는 용어라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부름을 받았으니, 정말로 거룩하게 구별 되어진 진 것처럼 삶의 현장에서 많은 것들을 해내야 된다, 혹은 많은 것을 하지말아야 된다라고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진리의 책인 성경에서 그런 요구사항 혹은 금지사항들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거룩, 경건, 인내, 사랑, 온유, 자비, 겸손, 용서, 이런 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하는 성숙한 인격의 모습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이러한 모습으로 변화시켜 간다고 하고 그 과정을 칭의(의롭다 하신다), 성화(거룩하게 하신다), 영화(영광스럽게 하신다)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 스스로가 그렇게 하려는 의지를 가지려는 것보다, 내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이 나의 전 인격을 다스리시면서 변화와 성장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우리의 언행심사를 성령께 맡겨 드리는 연습과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성령 받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성령 받았다는 증거는 또 무엇입니까? 성령은 변화와 성장을 주도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순간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더 이상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 성령에 속한 자임을 알게 하셔서, 늘 성령이 함께 하심을 인식하고, 성령이 인도하심으로 언행에 주의 하고, 성령이 추구(뜻)하시는 것에 순종함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이 인도하시는 것을 따라가는 삶이 구별된 삶이고, 이렇게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성령 받았다는 외적 증거입니다. 진짜 성령 받은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이 안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 모두를 변화시켜 가기를 강력하게 원하시고 계시며, 성령은 구원 받은 자들을 반드시 변화시키시려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이루시는 주체로서 그 능력대로 일하심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자, 그럼 본문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 보았다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님 이십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소중히 여기며 그 구원이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이르도록 자라나게 하도록 인도해 가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님 이십니다.
구원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때까지 계속 자라나도록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만드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님 이십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거룩하고 겸손하게 구별된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죄와 악을 물리쳐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님 이십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그리스도만을 붙잡고,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며 살아가도록 우리의 입과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성령님 이십니다.
도대체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인자하심을 맛 볼수도(구원의 은혜), 순전한 젓을 먹을 수도(성장), 모든 질투하는 말을 끊어 낼 수도(변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잡고(심판대 앞에서 인정 받는 믿음) 살아가는 것은 전부 불가능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오늘의 말씀은 바로 성령님과의 절대적인 동행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8월의 주제인 질투, 성령이 아니고서는 내 입에서 나오는 지긋지긋한 질투를 끊어낼 방법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달동안 질투에 대한 말씀을 들었으니, 실제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질투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려면 어떤 의식과, 어떤 언행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그 가르침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4~10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아멘.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산돌, 살아있다는 의미는 부활 하셨다는 것과 하늘 보죄 우편에서 통치하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믿음이 있는 우리들은 신령한 집(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전)을 날마다 세워가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서 산돌에게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은 삶의 현장에서 예배자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직장, 가정, 학교, 사회, 내가 속한 삶의 현장에서 예배자로 살아가려는 의식, 이것이 있다면 우리는 질투와 같은 죄악들을 끊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 사도는 과거에 산돌이신 예수님을 버려진 돌이라고 말했던 자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혹시나 예수님을 산돌이 아닌 버려진 돌처럼 무시하고, 무감각하고, 무의식으로 상대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분은 9절과 같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구절입니다,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택함 받은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자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분이라는 의식이 한 시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제사장은 성전을 수시로 드나드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수시로 대면해야 하는 것이 제사장이기 때문에 말과 행동과 복장이 거룩하지 않으면 즉시 죽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제사장이 되었다는 거룩한 인식이 있다면 두려운 하나님을 매일 같이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나는 제사장이라는 의식이 떠나지 않아야 질투와 같은 죄악을 끊어 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 10절은 전에는 우리가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긍휼(은혜)를 입은 자들임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 가운데서 살아난 자들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물에 빠지고, 불에 타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려는 찰나에 다시 살아나서 지금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는 죽음에서 건져진 자이며, 나를 건져낸 자가 누구인지를 잊지 말고 살아갈 때에 질투와 같은 언행을 다시는 행하지 않게 됩니다.
세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 신령한 집을 날마다 짓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삶의 예배자라는 의식,
둘째,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신분의 변화 의식,
셋째, 긍휼(은혜)를 입은 자로 죽음에서 건짐 받아 살아났다는 의식,
이 세가지 의식이 나의 몸과 말과 생각과 행동에서 적용되고 작동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나게 하는 온전한 믿음의 궤도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산돌로 상대할 것이냐, 버려진 돌로 취급할 것이냐가 내 인생 가운데 선택사항으로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 생활하는 모습과 자세와 언행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세상에 나아가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하는 모든 언행이 최종 심판자의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질투 한 번 한 것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 유업을 받지 못하는 것이 말이 돼? 이런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상대하며 살고 있음을 특별히 명심해야 합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질투하심을 거두게 하시고 긍휼과 자비로 사랑으로 상대해 주시는 하나님을 진짜로 만나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안 보이고, 왜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릴까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눈 앞에서 떠나신 적이 없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멈추신 적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를 단 한 번도 외면 하신적이 없습니다.
오늘 부터라도 정말 성령 안에서 전심으로 기도하시면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시게 될 것입니다. 인생에 단 한번만이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영안으로 직접 보고,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는 짜릿한 전율을 느껴 뵈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단기간 목표는 질투하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무시하고, 판단하고, 저주하는 나쁜 언행의 습관들을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죄 문제부터 끊어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려는 시작 조차 하지 않으면 소멸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노하심으로 역사하실 겁니다.
질투와 시기를 끊어내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는 안 됩니다. 성령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한 달 동안 암송하신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소유된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점점 적용되는 지렛대가 되는 말씀으로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계속 작동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8월 한달 동안 질투에 대해 선포된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성령님과 항상 동행하며 산 돌이신 예수님께로, 질투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매일 같이 나아가려는 시도를 멈추지 마시기 바랍닏.
00교회 모든 성도는 소멸하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긍휼(은혜)을 입은 자 답게, 나에게 주어진 너무나도 소중한 구원을 지켜가며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묵묵히 전진해 나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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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소멸하시는 분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게 하시고, 질투와 시기를 버리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자라나도록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인생 다하는 그 날까지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음을 명심하고 오직 성령과 동행하며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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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질투(기, 투기)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질투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질투(시기,투기)를 물리치고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를 향한신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은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 1~3절을 읽어 드립니다.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아멘.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 보았으면(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값없이 받은 자들이라면) 너희 스스로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기 위해서(믿음의 수준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순전하고 신령한 젖(칭의에 머무르지 말고 성화와 영화로 인도함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삶)을 사모하라 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요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완성형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연약하고, 여전히 세상적이고, 여전히 간사하고, 여전히 교만하고, 여전히 죄와 악에 쉽게 노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모든 여전함을 완전하게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변화와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활동하던 초대 교회 시절에는 기독교인에 대한 극심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루라도 빠리 재림 하셔서 고통과 억압이 없는 영원한 나라가 속히 오기만을 학수고대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박해와 핍박으로 고통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복돋아 주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붙잡고 사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유일한 소망이자 완전한 승리라는 것을 전달해 주고자 이 편지를 썼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붙잡고 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당연한 삶인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이것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뜨면 매일 같이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치고, 감정이 섞이고, 문제가 생기고, 스트레스가 쌓여가는 일상이 끊임 없이 반복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붙잡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목회에만 집중하는 목사도 집중하며 사는 것이 잘 안 되는데 정신 없이 바쁜 직장과, 가정과, 학교와, 모든 사회 관계속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붙잡고 산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 사도는 너희들이 주의 인자하심을 맛 보았으니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기 위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며 살아야 된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그리스도를 붙잡는 삶을 살기 위해서 너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인 직장과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1절에서와 같이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살아라는 말씀과 오직 예수님을 붙잡고 살아라 라고 “오직”이 앞에 붙으면 부담이 엄청 납니다. 1절에서도 질투(시기, 투기)하지 말아라는 말씀과 모든 질투를 하지 말아라 라고 “모든”이라는 말이 역시 앞에 붙은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악독하고, 기만하고, 외식하고, 시기하고, 비방하는 모든 말은 단 한 마디도 생각도 하지 말고 입 밖에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를 붙잡고 사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삶의 현장에서 만나본 그리스도인들 중에 “오직”, “모든”에 부합되는 사람을 얼마나 보셨습니까? 여러분 자신은 여기에 포함 되시나요? 솔직하게 주변에서 이런 분들을 찾아보려고 해도 눈을 씻고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만큼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도 왜 우리는 질투(시기,투기), 악독, 비방, 외식을 도무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말도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안이 열려 영적 셰계를 바라보고, 영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존재를 마음으로 생각하며, 보이지 않는 분과 만남과 대화를 시도해야 하는 지난한 일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시도해 보다가도 보고, 듣는 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너무나 망상적이고 허상을 쫓는 것 같은 낙심의 마음으로 대부분이 중도에 포기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냥 주어진 주일 예배 시간에 예배에 참석하고, 그 시간에 찬양하고, 그 시간에 말씀 듣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되어 버리는 이른바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일상이 되다 보니 교회에 나와서 예배와 봉사하는 모습만 보고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이 좋다라고 칭찬하고 자기 스스로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그릇된 생각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성경 말씀으로 이런 그릇괸 생각을 바로 잡아 줍니다. 교회 안에서의 생활은 물론이고, 교회 밖의 삶의 현장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라, 교회 안에서 보다 교회 밖에서 더더욱 모든 질투, 비방, 외식, 악독을 삼가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 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현재 우리의 상황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는 험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모든”으로 그렇게 살아가라고 베드로 사도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언가 보여지는 것이 분명히 있어야 믿으려고 하고, 어떤 일들에 대해 빠르게 결과들이 나타나면 그때서야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물건이 금방 나오면 당연한 듯 여기지만, 돈을 넣었는데도 물건이 안 나오는데도 무작정 나오기만을 믿고 기다리라고 하면 누가 거기에 있으려고 하겠습니까? 성질 급한 사람은 자판기를 두드리고 부수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허상을 쫓는 것 같고, 믿는 사람들이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밥이 나오지도 떡이 나오지도 않는데도 바보들 같이 시간과 노력을 허비 하면서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80~90%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도무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나마 10~20% 신자들 중에서 주님 오시는 날이 가까워 질수록 믿음에서 이탈하는 숫자가 급속하게 늘어날 겁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과 시선은 그렇다고 해도 베드로 사도가 말 한 대로 주의 인자 하심을 맛 본 우리들은 구원에 이르도록 내 믿음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 진짜 성경 말씀 대로 “오직”, “모든”을 목표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각자 주어진 환경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이유는, 성령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예비 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다. 하라, 하지 말라는 요구가 성경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 많은 요구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용어가 “구별”입니다.
세상에서 따로 떼어내서 모이게 불려 모여진 곳이 “교회(헬, 에클레시아)” 라는 용어라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부름을 받았으니, 정말로 거룩하게 구별 되어진 진 것처럼 삶의 현장에서 많은 것들을 해내야 된다, 혹은 많은 것을 하지말아야 된다라고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진리의 책인 성경에서 그런 요구사항 혹은 금지사항들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거룩, 경건, 인내, 사랑, 온유, 자비, 겸손, 용서, 이런 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하는 성숙한 인격의 모습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이러한 모습으로 변화시켜 간다고 하고 그 과정을 칭의(의롭다 하신다), 성화(거룩하게 하신다), 영화(영광스럽게 하신다)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 스스로가 그렇게 하려는 의지를 가지려는 것보다, 내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이 나의 전 인격을 다스리시면서 변화와 성장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우리의 언행심사를 성령께 맡겨 드리는 연습과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성령 받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성령 받았다는 증거는 또 무엇입니까? 성령은 변화와 성장을 주도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순간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더 이상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 성령에 속한 자임을 알게 하셔서, 늘 성령이 함께 하심을 인식하고, 성령이 인도하심으로 언행에 주의 하고, 성령이 추구(뜻)하시는 것에 순종함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이 인도하시는 것을 따라가는 삶이 구별된 삶이고, 이렇게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성령 받았다는 외적 증거입니다. 진짜 성령 받은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이 안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 모두를 변화시켜 가기를 강력하게 원하시고 계시며, 성령은 구원 받은 자들을 반드시 변화시키시려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이루시는 주체로서 그 능력대로 일하심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자, 그럼 본문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 보았다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님 이십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소중히 여기며 그 구원이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이르도록 자라나게 하도록 인도해 가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님 이십니다.
구원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때까지 계속 자라나도록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만드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님 이십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거룩하고 겸손하게 구별된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죄와 악을 물리쳐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님 이십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그리스도만을 붙잡고,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며 살아가도록 우리의 입과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성령님 이십니다.
도대체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인자하심을 맛 볼수도(구원의 은혜), 순전한 젓을 먹을 수도(성장), 모든 질투하는 말을 끊어 낼 수도(변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잡고(심판대 앞에서 인정 받는 믿음) 살아가는 것은 전부 불가능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오늘의 말씀은 바로 성령님과의 절대적인 동행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8월의 주제인 질투, 성령이 아니고서는 내 입에서 나오는 지긋지긋한 질투를 끊어낼 방법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달동안 질투에 대한 말씀을 들었으니, 실제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질투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려면 어떤 의식과, 어떤 언행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그 가르침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4~10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아멘.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산돌, 살아있다는 의미는 부활 하셨다는 것과 하늘 보죄 우편에서 통치하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믿음이 있는 우리들은 신령한 집(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전)을 날마다 세워가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서 산돌에게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은 삶의 현장에서 예배자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직장, 가정, 학교, 사회, 내가 속한 삶의 현장에서 예배자로 살아가려는 의식, 이것이 있다면 우리는 질투와 같은 죄악들을 끊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 사도는 과거에 산돌이신 예수님을 버려진 돌이라고 말했던 자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혹시나 예수님을 산돌이 아닌 버려진 돌처럼 무시하고, 무감각하고, 무의식으로 상대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분은 9절과 같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구절입니다,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택함 받은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자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분이라는 의식이 한 시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제사장은 성전을 수시로 드나드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수시로 대면해야 하는 것이 제사장이기 때문에 말과 행동과 복장이 거룩하지 않으면 즉시 죽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제사장이 되었다는 거룩한 인식이 있다면 두려운 하나님을 매일 같이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나는 제사장이라는 의식이 떠나지 않아야 질투와 같은 죄악을 끊어 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 10절은 전에는 우리가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긍휼(은혜)를 입은 자들임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 가운데서 살아난 자들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물에 빠지고, 불에 타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려는 찰나에 다시 살아나서 지금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는 죽음에서 건져진 자이며, 나를 건져낸 자가 누구인지를 잊지 말고 살아갈 때에 질투와 같은 언행을 다시는 행하지 않게 됩니다.
세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 신령한 집을 날마다 짓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삶의 예배자라는 의식,
둘째,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신분의 변화 의식,
셋째, 긍휼(은혜)를 입은 자로 죽음에서 건짐 받아 살아났다는 의식,
이 세가지 의식이 나의 몸과 말과 생각과 행동에서 적용되고 작동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나게 하는 온전한 믿음의 궤도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산돌로 상대할 것이냐, 버려진 돌로 취급할 것이냐가 내 인생 가운데 선택사항으로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 생활하는 모습과 자세와 언행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세상에 나아가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하는 모든 언행이 최종 심판자의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질투 한 번 한 것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 유업을 받지 못하는 것이 말이 돼? 이런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상대하며 살고 있음을 특별히 명심해야 합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질투하심을 거두게 하시고 긍휼과 자비로 사랑으로 상대해 주시는 하나님을 진짜로 만나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안 보이고, 왜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릴까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눈 앞에서 떠나신 적이 없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멈추신 적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를 단 한 번도 외면 하신적이 없습니다.
오늘 부터라도 정말 성령 안에서 전심으로 기도하시면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시게 될 것입니다. 인생에 단 한번만이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영안으로 직접 보고,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는 짜릿한 전율을 느껴 뵈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단기간 목표는 질투하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무시하고, 판단하고, 저주하는 나쁜 언행의 습관들을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죄 문제부터 끊어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려는 시작 조차 하지 않으면 소멸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노하심으로 역사하실 겁니다.
질투와 시기를 끊어내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는 안 됩니다. 성령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한 달 동안 암송하신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소유된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점점 적용되는 지렛대가 되는 말씀으로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계속 작동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8월 한달 동안 질투에 대해 선포된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성령님과 항상 동행하며 산 돌이신 예수님께로, 질투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매일 같이 나아가려는 시도를 멈추지 마시기 바랍닏.
00교회 모든 성도는 소멸하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긍휼(은혜)을 입은 자 답게, 나에게 주어진 너무나도 소중한 구원을 지켜가며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묵묵히 전진해 나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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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소멸하시는 분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게 하시고, 질투와 시기를 버리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자라나도록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인생 다하는 그 날까지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음을 명심하고 오직 성령과 동행하며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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